미군 진주가 다가오자 우익들은 재빨리 움직였다.
가장 발빠른 움직임을 시작한 이는 이묘묵이었다.
1902년 생인 이묘묵은 1923년 미국으로 유학하여 오하이오주의 마운트 유니온대학교, 시라규스대학교 대학원 석사, 하버드대 대학원, 보스턴대 대학원 철학박사 과정을 졸업, 수료한 후 시라큐스대학에서 사학을 강의하다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에서는 흥사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귀국 후에도 흥사단 계열의 동우회에서 활동하는 등 민족개량주의자 입장에서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을 한 지식인이었으나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된 후 전향하여 여러 친일단체에 적극 가담한 이력의 인물이었다.
이묘묵은 연희전문의 선배 교수 백낙준과 하경덕에게 곧 이 땅에 들어올 미군에게 제대로 된 조선 정보를 제공할 영자신문을 발간하자고 제안했다.
미군선발대가 경성에 도착하기 하루 전인 9월 5일 4면짜리 타블로이드판 영자신문 '코리아타임즈'의 창간호가 발행되었다.
9월 9일 경성에 진주한 미군 장교들은 숙소인 조선호텔에 비치된 이 신문을 집어 들었다.
창간호 1면엔 "Welcom Heroes Liberation"이라는 제목의 유창한 영어 기사가 실려 있었다.
이 기사를 쓴 이는 한국인 최초로 하버드대 정규 과정을 졸업한 하경덕이었다.
한국을 당시 유럽이 식민지배했던 아프리카 수준의 국가로 생각했던 하지와 미군 고급장교들은 한국에 미국의 일류대학을 나온 지식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들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미군은 곧 경성 시내에 통문을 돌렸다.
"미군 사령부에서 미국, 영국 등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사람들을 찾고 있으니 내일 점심시간을 지나 조선호텔로 오라."
10일 오후 1시가 되자 조선호텔 본관 1층에 이묘묵, 조병옥, 오천석, 이훈구, 이대위 등 미국 영국 유학 경력이 있거나 영어에 유창한 55 명의 한국인이 모였다.
사실 이들 중 일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귀축영미를 격멸해야 한다고 주장한던 사람들이기도 했다.
오후 1시 반 제7보병 사단장 아놀드와 스튜어트 헌병대장 등 미군 고급 장교 5명이 이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조선인 유지 초청 간담회'는 미군과 한국인 최초의 공식적인 접촉이었으며 목적은 "현하 조선 정세에 관한 여러가지 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미군 장교들에게는 이런 공식적인 목적에 비할 수 없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미군 장교들은 간담회에서 자신들과 같은 정치 사상적 배경을 가졌고 비슷한 학교를 다녔으며 수준급의 영어를 구사하는 집단을 발견하고는 엄청나게 기뻐했다.
조선총독부의 오염된 정보에 의해서 공산주의 사상이 지배적이고 공산폭도가 우글거릴 것으로 생각하고 진주한 이들은 영어능통자들의 존재를 확인하고 이 미지하고 미개한 나라에 대한 점령 업무를 적절히 수행해 나갈 수 있겠다는 용기를 얻었다.
간담회는 먼 타향에서 동창생을 만난 듯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간담회에서 참석자들의 학력과 경력을 묻던 아놀드 소장은 이대위가 '예일대학에서 노동문제를 전공했다.'고 말하자, 이 씨의 손을 덥썩 잡고 자신도 예일대학에서 ROTC 교관생활을 한 일이 있다며 '노동문제는 닥터 리가 책임져 달라'고 부탁했다. 이어 MIT출신인 오정수에게는 당창생 언더우드 대령이 담당한 광공국을, 윌리엄스 중령과 공주 영명학교에서 함께 공부한 조병옥에게는 경무국 일을 보아 달라고 간청했다."
간담회 후 한국인 기자들이 국일관에서 미국 기자들과 미군 장교들을 위한 환영 만찬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단연 돋보인 것은 이묘묵 '코리아타임스' 편집장의 영어 실력이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점령군이 직면하고 있는 주요 문제로 법질서 유지, 식량과 연료 문제, 일본인 재산 문제, 인플레이션 상태, 재일조선인 문제, 그리고 한국 내의 정당조직 현황, 특히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공화국의 관계, 그 구성원들의 정치 성분에 대해 연설하였다.
이 연설에 깊은 인상을 받은 미군은 연설문을 얻어 하지에게 보고했다.
이날 간담회에 참석했던 이들 상당수는 이후 미군정청의 국장, 차장, 과장 또는 지방의 도지사로 임명되었다.
다음날 하지의 첫 정식 기자회견이 열렸다.
하지는 평소의 그답게 매우 진지한 태도로 미소 양국이 한반도를 점령한 경위와 미군정의 정책 방향 등에 대해 설명했다.
매일신보를 비롯하여 50여 명의 기자들이 기자회견장을 메웠다.
그러나 미군은 통역관도 대동하지 않은 채 경성에 진주한 터였다.
어제 항복조인식이 끝난 후 기자회견장에서 하지는 한국인이 들으면 경악할 만한 발언을 했지만 기자들이 영어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회견 내용 자체가 제대로 보도되지도 못한 형편이었다.
당장 영어를 통역해 줄 사람이 없자 '코리아타임즈'의 이묘묵이 현장에서 임시 통역자로 발탁되었다.
그는 하지의 어조까지 흉내 내어가며 열정적으로 통역을 진행했고 이묘묵의 유창한 영어는 미국인들도 놀랄 정도였다.
하지는 이묘묵을 자신의 고문 겸 통역이 되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하지의 특별보좌관으로 임명되어 하지의 집무실이 차려진 반도호텔로 출근했다.
이른바 영어 권력자에 의한 '통역 권력'이 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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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의 에피소드 찾기에 눈이 빨갛습니다ㅋ
흥미롭게 읽으셨다니 상쾌합니다.
곧 군사영어 학교를 설치 하여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한 한국군 장교단을 생산하죠..군사영어학교 입교자가 광복군 출신이건 일본군 출신이건 가릴 이유도 의미도 미군에겐 없죠.
군대 시스템에 더 익숙하고 이해도가 높고 기본 영어가 가능한 한국군 장교가 필요했고 미군은 미군의 할일을 한거죠.
미군은 미군의 할 일을 한다...
당시 우리나라의 민족주의자나 공산주의자나 미국이 바친 젊은이의 피값을 무시한 감이 있었어요.
우리가 아무리 항일을 했더라도 독립은 미군의 덕분일 걸 과소평가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미군은 미군의 할 일을 한다, 그리고 이걸 제대로 못 읽고 미군에게 과도한 역할을 주문한 80년대의 젊은이들이 반미에 빠지고 주사파가 되었습니다.
사실 그 시절 제 주변에는 저 제외 모든 선후배, 친구들이 반미주사파였는데 지금은 미국에 한다리 걸치며 사는 친구 비율이 평균보다 훨 높은 듯해서 아이러니합니다.
@슈 렉 그리고 오늘 중요 에피소드에 밀려 못 썼지만 미국이 garioa 원조를 약속한 날이기도 합니다.
80년대 책을 읽을 때 미국 원조가 우리 농촌을 파괴하고 우리산업의 성장기반을 침탈했다고 비판했는데 인구의 2/3가 요구호민이던 시절 당장 굶지않게 해 준 건 고마운 선행이었지요.
@슈 렉 그시절 반미들 미국욕하면서 딸들은 미국보내서 한가롭게 팔치자랑질하는 사진올리고 얼척ㆍ
글 잘 읽고 있습니다.
미제국주의가 없었다면 자기네들이 집권했을거라는 순진한 땅따먹기 발상들이 그려집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사에 대해서도 자기 관점만이 아닌 객관적인 시각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슈렉님 글 잘봤어요
해외생활하다보니
그때나 지금이나 영어는 필수라는걸 절실히 느낍니다 공대나오고 영어못하는 사람이 공고 전기과출신 아저씨한테 배우고있는 현실 ᆢ
제가 지난 번에 왜 대학을 가야하는가 라는 글에서 영어와 링크되어야 한다고 쓴 적이 있는데 이 글로벌한 세상에서 영어소통능력은 참 중요한 것 같아요.
저는 한국말밖에 할 줄 모르니
한국말의 좁은 감옥에 갖혀 살고 있는 거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