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9월 10일 '코리아타임스' 편집장 이묘묵은 여운형에 대한 악의적 연설을 통해 미군정의 통역권력으로 등장했다.
주한 미24군단과 일본 17방면군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는 일본군 경성연락부에서 근무한 오다 야스마는 미군정에서 신뢰받으며 중요한 역할을 한 통역원이었다. 오다 야스마는 미군이 진주하기 전 17방면군 사령부가 미24군단과 전문으로 통신할 때도 군사령부에 출근해 미군과 연락을 취했기에 미군 진주 이전부터 한반도를 둘러싼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오다 야스마는 연희전문학교 이사로 재임하던 시기, 연희전문의 학감·학교장으로 자신과 인연이 깊었던 이묘묵에게 미군 진주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미군과 교섭할 매체로서 영자신문의 창간을 권유했다.(정병준)
1902년 생인 이묘묵은 1923년 미국으로 유학하여 마운트유니온대학 학사, 시라큐스대학교 석사, 보스턴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시라큐스대학에서 사학을 강의하다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에서는 흥사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귀국 후에도 흥사단 계열의 동우회에서 활동하는 등 민족개량주의자 입장에서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을 한 지식인이었으나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된 후 전향하여 녹기연맹과 대화숙을 비롯해 여러 친일단체에 적극 가담했으며 미영격멸을 주제로 시국강연을 다니기도 하였다.
이묘묵은 연희전문의 선배 교수 백낙준과 하경덕에게 영자신문 발간을 제안하여 미군선발대가 경성에 도착하기 하루 전인 9월 5일 4면짜리 타블로이드판 영자신문 '코리아타임즈'의 창간호를 발행하여 배포하였다. 9월 9일 경성에 진주한 미군 장교들은 숙소인 조선호텔에 비치된 이 신문을 집어 들었다. 창간호 1면에넌 엔 "Welcom Heroes Liberation!"이라는 제호의 유창한 영문으로 된 연합군 환영사가 실려 있었다. 기사를 쓴 이는 한국인 최초로 하버드대 정규 과정을 졸업한 하경덕이었다. 한국을 당시 유럽이 식민지배했던 아프리카 수준의 국가로 생각했던 미군 고급장교들은 한국에 미국의 일류대학을 나온 지식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들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미군 제7사단장 아놀드 소장과 그 휘하 막료의 의견이 일지되자 미군은 곧 경성 시내에 공지문을 돌렸다. "미군 사령부에서 미국, 영국 등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사람들을 찾고 있으니 내일 점심시간을 지나 조선호텔로 오라." 전화가 있는 집은 전화로 전화가 없는 집은 사람을 시켜 공지사항을 전달했다.
10일 오후 1시가 되자 조선호텔 본관 1층에 이묘묵, 조병옥, 오천석, 이훈구, 이대위 등 미국 영국 유학 경력이 있거나 영어에 유창한 55 명의 한국인이 모였다. 사실 이들 중 일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귀축영미를 격멸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이었다. 오후 1시 반 아놀드 소장과 군정관 해리스, 스튜어트 헌병대장 등 미군 고급 장교 5명이 이들과 만났다. '조선인유지 초청간담회'는 명칭과 달리 먼 타향에서 동창생을 만난 듯한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미군은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자신들과 함께 업무를 수행할 파트너를 찾기 위한 일종의 '면접 시험'을 치룬 것인데 면접 시험의 응시 자격은 고학력의 영어 가능자였던 셈이다. 이날 모인 인물들의 학력·경력·영어 수준 등 인적사항은 미군정 지도부에게 확실히 입력되었다. (손정목 184~186)
이날 오후 5시 30분 연합군 기자단 환영회가 명월관에서 개최되었다. 한민당 측이 주선한 환영회에는 하지 중장을 비롯한 24군단 고위 장교들과 연합군 기자, 특파원, 통신원, 군사실 요원, 그리고 한국인 기자들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단연 돋보인 것은 이묘묵 '코리아타임스' 편집장의 영어 실력이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점령군이 직면하고 있는 주요 문제로 법질서 유지, 식량과 연료 문제, 일본인 재산 문제, 인플레이션 상태, 재일조선인 문제, 그리고 한국 내의 정당조직 현황, 특히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공화국의 관계, 그 구성원들의 정치 성분에 대해 "훌륭한 영어로 연설"하였는데 연설 중에는 "여운형은 친일파이자 공산주의자로, 조선총독부의 돈을 먹고 친일정부를 수립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일제시대 친일파였던 이묘묵이 일제시대 독립운동가 여운형을 친일파이자 공산주의자로 무고한 것이다. 이묘묵은 8쪽 분량의 연설 원고를 하지 중장에게 전달했다. 이묘묵의 이 발언으로 하지는 여운형과 그가 선포한 인민공화국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인 감정을 갖게 되었다.
다음 날인 9월 11일 하지의 첫 정식 기자회견이 열렸다. 중앙방송의 문제안을 비롯하여 국내외 50여 명의 기자들이 모였다. 하지는 파이프 담배를 붙여 문 채 미리 준비해 온 수첩을 펴놓고 매우 진지한 태도로 미·소 양국이 한반도를 점령하게 된 경위, 미군정의 정책 방향 등을 설명했다. 그리고 "각계 각 조직체의 대표 2인을 만나 협조를 부탁할 것"을 약속했다. 그런데 이 기자회견에서 두드러졌던 것은 이묘묵의 영어실력이었다. 막상 기자회견이 시작되었지만 하지와 기자 사이의 서로 다른 말을 번역해 줄 마땅한 사람이 없자 기자로 참석한 이묘묵이 임시 통역관으로 발탁된 것이다. 이묘묵은 하지가 하는 말을 그의 “가라앉은 음성까지 흉내내어가며” 우리말로 옮겨 주었다. 그의 유창한 영어는 미국인들조차 탄복할 정도였다. 회견이 끝나자 하지는 이묘묵을 따로 불러 자신의 방에서 만났다. 시라큐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연희전문학교 교수로서 서양사와 영어를 강의하고 있다는 이묘묵의 경력을 들은 하지는 그에게 자신의 고문 겸 통역이 되어 줄 것을 간청했다. 이때부터 이묘묵은 해방 조국의 생사여탈을 쥔 미군정청 최고 책임자의 정책을 매일 내외신 기자들 앞에서 통역했다. 내용의 정오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말이 곧 하지의 말이었고 미군정청의 정책이었다. 그는 단순한 통역사가 아니라 하지의 고문으로 활동하는 문고리권력이었다.
한민당 창당에 참여한 이묘묵은 강력한 인사추천권으로 자신의 성향과 일치하는 한민당 관계자들을 대거 권력의 중심으로 초대했다. 경찰계에서 조병옥, 장택상, 최경진 등이 득세한 것도 이묘묵의 영향력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졌다. 이묘묵은 하지의 친우익정책의 강력한 동인이 되었다. 정치적 영향력은 필연적으로 경제적 영향력으로 이어졌다. 미군정기 통역사들의 경제적 영향력은 특히 일본인들이 두고 간 재산인 적산불하와 관련되었다. 적산의 관리와 불하는 통역관들의 입에 달리게 되었고 통역관들은 각종 특혜나 뇌물과 같은 불법에 가담하거나 주도했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정치와 경제의 틀을 짤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그러나 통역권력의 등장에서 드러나는 친일 미청산, 인사권과 적산 불하권과 배급물자 전횡과 같은 통역사들의 부정부패로 인해 통역정치에 대한 사회 일반의 혐오가 팽배해졌고 이는 미군정에 대한 불신의 한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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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의 에피소드 찾기에 눈이 빨갛습니다ㅋ
흥미롭게 읽으셨다니 상쾌합니다.
곧 군사영어 학교를 설치 하여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한 한국군 장교단을 생산하죠..군사영어학교 입교자가 광복군 출신이건 일본군 출신이건 가릴 이유도 의미도 미군에겐 없죠.
군대 시스템에 더 익숙하고 이해도가 높고 기본 영어가 가능한 한국군 장교가 필요했고 미군은 미군의 할일을 한거죠.
미군은 미군의 할 일을 한다...
당시 우리나라의 민족주의자나 공산주의자나 미국이 바친 젊은이의 피값을 무시한 감이 있었어요.
우리가 아무리 항일을 했더라도 독립은 미군의 덕분일 걸 과소평가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미군은 미군의 할 일을 한다, 그리고 이걸 제대로 못 읽고 미군에게 과도한 역할을 주문한 80년대의 젊은이들이 반미에 빠지고 주사파가 되었습니다.
사실 그 시절 제 주변에는 저 제외 모든 선후배, 친구들이 반미주사파였는데 지금은 미국에 한다리 걸치며 사는 친구 비율이 평균보다 훨 높은 듯해서 아이러니합니다.
@슈 렉 그리고 오늘 중요 에피소드에 밀려 못 썼지만 미국이 garioa 원조를 약속한 날이기도 합니다.
80년대 책을 읽을 때 미국 원조가 우리 농촌을 파괴하고 우리산업의 성장기반을 침탈했다고 비판했는데 인구의 2/3가 요구호민이던 시절 당장 굶지않게 해 준 건 고마운 선행이었지요.
@슈 렉 그시절 반미들 미국욕하면서 딸들은 미국보내서 한가롭게 팔치자랑질하는 사진올리고 얼척ㆍ
글 잘 읽고 있습니다.
미제국주의가 없었다면 자기네들이 집권했을거라는 순진한 땅따먹기 발상들이 그려집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사에 대해서도 자기 관점만이 아닌 객관적인 시각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슈렉님 글 잘봤어요
해외생활하다보니
그때나 지금이나 영어는 필수라는걸 절실히 느낍니다 공대나오고 영어못하는 사람이 공고 전기과출신 아저씨한테 배우고있는 현실 ᆢ
제가 지난 번에 왜 대학을 가야하는가 라는 글에서 영어와 링크되어야 한다고 쓴 적이 있는데 이 글로벌한 세상에서 영어소통능력은 참 중요한 것 같아요.
저는 한국말밖에 할 줄 모르니
한국말의 좁은 감옥에 갖혀 살고 있는 거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