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9월 18일 서른넷의 청년 김일성은 한반도 원산으로의 상륙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소련 군함 프가초프호에 오르고 있었다.
1912년 평양 교외의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한 김일성은 여덟 살 되던 1919년 부모를 따라 만주 지린성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2년 정도 평양에서 소학교를 다닌 적이 있었지만 그의 주된 성장 배경은 만주의 지린성이었다.
1929년 공산주의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하다 일경에 적발되어 투옥되었고 1930년 출옥해서는 완전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이때 일경의 감시를 피할 목적으로 이름을 김성주에서 김일성으로 개명하였다.
그러나 CIA 기밀해제문서에 의하면 고등학교 시절 친구의 돈을 훔쳐 살해하고 개명했다고 한다.
1931년 그는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본격적인 항일독립투쟁을 시작하였다.
중국공산당의 지령에 따라 만주 각지에 조직된 항일유격대 중 왕청 유격대의 소대장으로 활동하다 1936년 유격대가 동북항일연군으로 통합되자 조선인 대원이 가장 많았던 제1로군 제2군 휘하 제 6사의 사장을 맡았다.
이때 김일성은 조선인들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남긴 사건의 주인공이 되었다.
스물여섯의 젊은 청년 김일성은 1937년 6월 4일 밤 대원들과 함경북도 혜산 근처의 보천보 파출소를 습격했다.
이 습격으로 일본이 입은 피해는 일본인 술꾼 한 명과 일본 순사 부인이 등에 업고 있던 아기가 유탄에 맞아 사망한 것뿐이었다. 실제 전과는 보잘 것 없었지만 조선인 게릴라가 국경을 넘어와 일본 파출소를 습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선인들은 감격했다.
무장항쟁 소식은 이미 오래 전의 전설 같은 이야기가 되었으며 조선 내에서의 투쟁의 의지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오랜 식민통치로 패배감에 젖어 있던 조선인들에게 이 소식은 한 줄기 단비였으며 어둠만 가득한 밤하늘에 뜬 작은 별빛이었다.
동아일보는 신이 나서 두 번이나 호외를 발행해가며 이 '공비'들의 살인, 약탈, 방화 사건을 연일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1930년대 말 만주는 게릴라 활동이 지속될 수 있는 땅이 아니었다. 김일성과 항일 게릴라들은 일본군의 소탕 작전을 견디지 못하고 1940년 9월에서 11월 '고난의 행군'을 거쳐 연해주 소련령으로 피신했다.
소련은 이들을 하바롭스크 근교에 모아 1942년 8월 극동군 제88특별독립보병여단으로 재편성했다. 여단장은 중국인 저오바오중이었고 김일성은 그 밑의 제1대대장이었다.
김일성은 만주에서 소련으로 입국한 초기에 88여단의 창설부터 운영 및 해체까지 직접 관장한 소련군 장교 소르킨의 비밀정보원으로 포섭되었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88여단의 제1대대장이었지만 동시에 NKVD(KGB의 전신)의 비밀정보원으로 동료 게릴라들의 동태를 감시하여 소르킨에게 보고하였다. 김일성과 소르킨은 개인적으로도 특별히 친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행운의 여신은 김일성에게 환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소르킨 소장이 NKVD의 수장이자 소련의 제2인자로 불러던 베리야의 심복이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만주 공세를 앞둔 1945년 8월 말 극동군 총사령부에 '북조선에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지도할 지도자를 찾아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극동군 총사령부는 '공산당원이 지도자가 되어야 순리지만 조선공산당 지도자 박헌영은 서울에 있고 북조선에는 믿을 만한 공산당원이 없다'고 보고했다.
이들의 보고는 하바로프스크에 주둔하고 있는 자신의 예하부대, 곧 김일성부대에게 북한의 행정을 맡기려는 작전이었고 베리야는 김일성이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는 보고서를 올렸다.
이에 따라 스탈린은 9월 초 88여단의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불렀다. 김일성은 하바로프스크 군용 비행장에서 극동군 총사령관이 직접 명령하여 대기한 수송기를 타고 NKVD 극동 요원 2명의 안내를 받으며 모스크바로 가 스탈린과 4시간 동안 대좌했다.
스탈린은 면접을 본 후 "이 사람이 좋다. 앞으로 열심히 해서 북조선을 잘 이끌어가라. 소련군은 이 사람에게 적극 협력하라."고 말하며 그 자리에서 바로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내정했다.
스탈린은 위성국가의 지도자를 고를 때 토착 공산주의자들은 철저히 배제하고 모스크바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할 인물을 골랐다. 발탁된 인물의 두뇌는 소련 고문단이 맡으면 되었다.
그러므로 조선 내에 지지세력이 전무하여 소련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신출내기에다, 한창 나이인 30대의 경력이 5년 간 소련군에 소속되어 교육과 훈련을 받은 게 다인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참으로 매력적인 존재였다.
이것이 국내에 상당한 조직과 지지세력을 가진 박헌영이 배제되고 김일성이 선택된 이유였다.
김일성이 스탈린을 만나러 가기 전 극동군 총사령부는 벌써 김일성과 그의 휘하 대원들이 북한의 권력을 장악할 수 있게 작전을 시작하였다. 총사령부는 그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원활히 수행할 수 있도록 사병 17 명을 장교로 진급시키고 장교들은 계급을 올렸다.
총사령부는 또한 9월 2일자 명령서를 통해 평양에 4명 등 북한 20여 개 주요 도시에 이들을 배치하도록 결정했다.
김일성은 평양시 군경무사령부 부사령관(사령관은 소련군)으로 임명되어 9월 5일 하바롭스크를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했다.
이때 그의 대원들도 모두 한 자리씩 차지하여 배를 탔다. 김책은 함흥시 부사령관, 강건은 청진시 부사령관을 맡는 식으로.
9월 18일 김일성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소련 군함 프가초프호를 타고 원산으로 떠났고
9월 19일 그가 원산에 상륙했을 때 사실상 그는 북한을 접수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