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 아득한 마을에 눈이 내리면·2 │ 최기순
─ 벨라 로젠베르*
사랑이란 밤새 눈이 내리는 건지도 모릅니다
눈이 처마 끝까지 쌓여
아무 곳에도 갈 수 없는 날은
온종일 물레를 돌렸지요
화덕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핑계 삼아 조금씩 아끼며 울었지요
아버지가 일하는
청어염장공장 지붕 처마에 겨울이 자라고
자작나무 흰 가지 사이에서
흐려지는 나를 손바닥으로 닦곤 했지요
어떤 밤에는 당신이
눈처럼 흰 드레스를 입은 나를 안고
높이 솟은 지붕들과 굴뚝 위를 가볍게 날아
몇 개의 나와 당신을 날아서
사라지는 당신에게 닿기도 하였지요
흰 소와 푸른 얼굴의 사나이와
울 줄만 아는 닭과 당나귀와
초록과 빨강 흰색을 잘 섞어놓은
삐에로 옆에 눕는 꿈을 꾸기도 하다가 잠이 깨면
물을 긷고
빵을 굽고
나무의자에 고개를 깊이 숙이고 앉아
양털실로 겨울의 고요를 기우면서
그렇게
나
눈 내리는 마을에 살고 있지요
*벨라 로젠베르 : 샤갈의 아내
- 월간 『우리詩』2007년 12월호
■시 읽기■
우리는 종종 아름다움 속에 슬픔의 그늘이 섞여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 시에는 “벨라 로젠베르”의 고독과 슬픔이 샤갈의 그림이 갖는 몽환적인 분위기 위에 아름답게 덧칠해져 있다. 이 시는 이중의 의미망을 갖는데, 샤걀의 몽환적인 그림 세계가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아내 로젠베르의 물레를 돌리고 화덕에 불을 지피는 우수에 잠긴 겨울 풍경이다.
실상 물레를 돌리고, 물을 긷고, 화덕에 불을 지펴 빵을 굽는 것은 로젠베르의 여성적인 삶의 표상이다. 그 모습은 참으로 우아하고 서정적으로 보이나, “아무 곳에도 갈 수 없는 날”들의 일상이다. “사랑이란 밤새 눈이 내리는 건지도 모릅니다”는 언술로 시작하는 이 시는 눈 내리는 세계의 풍경으로 인하여 아름답고 포근하게 ‘감싸임’을 느끼게 하지만, 역으로 사랑하는 당신에게 “갈 수 없는 날”이라는 감금의 상황을 가져오기도 한다.
샤갈의 그림 속에는 “청어염장공장 지붕에 쌓인 눈과 굴뚝과 흰 소와 당나귀” 그리고 그 위를 “날아가는 몇 개의 나와 당신” 등과 같은 착하기만 한 시골 풍경이 몽환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잠이 깨면”에서 의미가 역전된다. “사라지는 당신에 닿기도 하였”던 시간은 말끔히 가셔지고, “나무의자에 고개를 깊이 숙이고 앉아 / 양털실로 겨울의 고요를 기우면서” 일상의 곤곤한 생활과 당신을 기다리는 적막한 세계로 이전되는 것이다.
이 시의 중심 의미망은 착한 아내로서의 “나- 로젠베르”의 일상이 눈 내리는 겨울 풍경, 혹은 꿈속에서 그림으로 빠져 들어가 섞이는 장면과 당신을 기다리는 우수에 가득 찬 시간이 겹쳐지는 곳에 있다. 깊은 밤, 한 여성이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며 “흐려지는 나를 손바닥으로 닦”아내 듯 맑은 불빛의 등불을 켜고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이 시를 읽으면, 눈 내리는 멀고 아득한 마을의 풍경이 슬픔을 넘어서 아름답게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
웃는 사람들 │ 최금진
웃음은 활력 넘치는 사람들 속에 장치되어 있다가
폭발물처럼 불시에 터진다
웃음은 무섭다
자신만만하고 거리낌없는
남자다운 웃음은 배워두면 좋지만
아무리 따라 해도 쉽게 안 되는 것
열성인자를 물려받고 태어난 웃음은 어딘가 일그러져
영락없이 잡종인 게 들통 난다
계층재생산, 이란 말을 쓰지 않아도
얼굴에 그려져 있는 어색한 웃음은 보나마나
가난한 아버지와 불행한 어머니의 교배로 만들어진 것
자신의 표정을 능가하는 어떤 표정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웃다가 제풀에 지쳤을 때 문득 느껴지는 허기처럼
모두가 골고루 나눠 갖지 않는 웃음은 배가 고프다
못나고 부끄러운 아버지들을 뚝뚝 떼어
이 사람 저 사람의 낯짝에 공평하게 붙여주면 안 될까
술만 먹으면 취해서 울던 뻐드렁니
가난한 아버지의 더러운 입냄새와 땀냄새와
꼭 어린애 같은 부끄러움을 코에 귀에 달아주면
누구나 행복할까
대책없이 거리에서 크게 웃는 사람들이 있다
어깨동무를 하고 넥타이를 매고
우르르 몰려다니는 웃음들이 있다
그런 웃음들은 너무 폭력적이다, 함께 밥도 먹고 싶지 않다
계통이 훌륭한 웃음일수록,
말없이 고개 숙이고 달그락달그락 숟가락질만 해야 하는
깨진 알전구의 저녁식사에 대한 이해가 없다
그러므로 아무리 참고 견디려 해도
웃음엔 민주주의가 없다
- 시집 『새들의 역사』 (창작과비평사, 2007)에서
■시 읽기■
이 시는 웃음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배반한다. “아무리 참고 견디려 해도 / 웃음엔 민주주의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의 상식은 울음이나 웃음은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 표시이고, 이들에 대해 우리는 평등하다는 의미를 부여하여 왔던 것이다.
시인의 말에 따르면 “웃음”이야말로 정말 잘 웃기가 힘들다는 생각에 수긍이 간다. 오히려, “어깨동무를 하고 넥타이를 매고 / 우르르 몰려다니는 웃음들이 있다 / 그런 웃음들은 너무 폭력적이다.” 정말 남들 앞에서 자유롭게, 아무 눈치도 보지 않고 터뜨리는 폭소는 남들의 상처를 건드릴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말없이 고개 숙이고 달그락달그락 숟가락질만 해야 하는 / 깨진 알전구의 저녁식사에” 대해 이해가 없는 이들이, 가난한 식사 앞에서 웃어젖히는 웃음이란 얼마나 폭력적인가, 그래서 화자는 “함께 밥도 먹고 싶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모두들 편안하게 웃지 못한다는 걸까. “가난한 아버지와 불행한 어머니의 교배로 만들어진”, “열성인자를 물려받고 태어난 웃음은 어딘가 일그러져 / 영락없이 잡종인 게 들통”날 것이 뻔하다는 인식 때문이다. 결국 시인은 “웃음”을 매개로 하여 소외된 자들의 일그러진 웃음에 내포한 비참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웃다가 제풀에 지쳤을 때 문득 느껴지는 허기처럼 / 모두가 골고루 나눠 갖지 않는 웃음은 배가 고프다.”
사회적 소수자의 웃음이 박탈되지 않고 함께 공평하게 웃음을 나눌 수 있는 사회, 웃음의 계보학 같은 것이 없는 사회는 이상 세계에서나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 논리를 넘어서는 지향의 자세, 그 추구의 의지야말로 진정한 시정신의 발로가 아닐까.
-------------------------------------------------------------------------------------------------------
푸른 반점 │ 고성만
사내는 딸의 몸에서 반점을 발견하자마자 탱자나무 울타리 아래 날카롭게 빛나는 사금파리를 주은 다음 우물가에 데리고 가 샅샅이 씻겼지만 지워지지 않는 얼룩
꼬리뼈 지나 허벅지로 기어간 줄장지뱀
바이칼 호수 근처에서 출발하여 아무르 강가를 따라 내려오다가 오줌 한 번 누고 몇 개의 구릉과 골짜기를 달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잠시 소스라쳤으나 셋째딸년의 몸에 난 얼룩을 수습하지 못했다
다섯 번째 낳은 아들 쪽으로 무게의 추가 기울었으므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온몸을 돌아 입으로 들어간 얼룩이 마침내 내장 전체로 번질 때까지 아장아장 앙증맞은 딸년을 돼지우리 속에 가두고 사는 게 죄악이라고 중얼거렸다 병든 피톨이 집 안팎을 휘젓는 동안 또 다른 자식에게 난 반점을 찾으려 눈을 부릅뜨는 그는
아무르 강의 얼굴을 만지며 바이칼 호수를 향해 흰구름을 날려 보냈다
- 『내일을 여는 작가』 2007년 여름호
■시 읽기■
이 시에는 원초적인 상상력의 세계가 풍부하게 펼쳐지고 있다. 다소 모호한 채로 상상력의 공간이 건너뛰기를 함으로써 의미 단위를 확정하기가 매우 어려운 시이다. 그 서사의 줄기는 대략 부족국가 시대의 종족 간의 투쟁과 출생의 내력을 시적 상상력으로 풀어내는 데 있다. “푸른 반점”이라는 제목이 말해 주듯이 “지워지지 않는 얼룩”은 ‘몽고반점’을 시적 모티프로 한 것이다. 시인은 “푸른 반점”을 가진 종족의 기원을 멀리 바이칼 호수로 추적하고 있다. 그 바이칼 호수에서 연원한 부족들의 원형질이 아무르강을 거쳐 사내의 마을에 이르기까지 부족들의 이동과 투쟁의 역사를 “탯줄 부정”의 서사로 독특하게 풀어내고 있다.
아마도 바이칼 호수에서 발원했을 사내의 내력이 “병든 피톨”로 부정되는 아무르강 유역의 어느 지역에 도달하기까지 종족의 이동과 정착이라는 험난한 경로를 통과하였을 것이다. “꼬리뼈 지나 허벅지로 기어간 줄장지뱀”은 이러한 강을 거슬러 오르고 내리는 이동과 정주의 역사를 ‘강’의 상상력과 결합시킨 것이다.
이 시는 설화적이다. 특히 종족 유전의 표시인 “반점”을 ‘씻을 수 없는 치욕 같은 내력’으로 의미화 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독특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반점”은 “피정복자에게 찍힌 원형질의 낙인 같은 것이거나, 이주민의 단서” 같은 부정적인 유표소로 작용을 한다. 부족국가 시대에 종족 표시의 흔적은 집단으로부터 “수용과 추방”을 판가름하는 매우 중요한 인식소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
불혹 │ 최정란
투정하고 보채는 세상 남자들이
내 젖 먹고 자란 아들 같다
꽃구름 들떠 바라본 사월 들판
잠시 가슴에 넣고 다녔든가
내 안에는 내가 알고 있는 것 보다
더 많은 입덧이 들어 있었다
변덕스런 서풍이 이마를 스쳐가고
낯익은가 하면 낯선 시선이 비켜간다
서늘한 눈썹이 삼나무 숲에 걸린다
수많은 상상임신 끝에 나는 마침내
많은 아들을 거느린 족장이다
누덕누덕 기운 나를 엄마라 불러다오
강 하나씩 건널 때마다 더 무거워지는
물 먹은 목화솜, 꽃무늬 이불을 걷어낸다
사십 년의 긴 헛구역질을 끝낸다
- 시집 『여우장갑』 (문학의 전당, 2007)에서
■시 읽기■
“불혹”은 흔히 나이 40으로 들어선 때를 지칭하는데, 육체적으로는 왕성한 생성의 시간을 멈추고 전 생애의 중간 지점을 좀 유턴한 지점으로, 정신적으로는 공자의 말대로 세간의 말에 쉽사리 휩쓸리지 않는 심리적 안정기로 표상되어 왔다. 그러나 누구든 막상 “불혹”에 도달하면, 여전히 육체적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정신적으로도 충분한 안정감에 도달했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불혹”은 자신을 중간 점검하는 계기가 되면서 회오와 거부의 감각을 불러내기에 충분하다.
시 「불혹」에서는 세상을 생성하려는 욕망이 너무나 강렬하여, “수많은 상상임신 끝에 나는 마침내 / 많은 아들을 거느린 족장이다”라고 선언한다. 물론 몽상을 통해서 말이다. 생래적으로 마음속에 품어 기르다가, 마침내 밖으로 내 보이고자 하는 것이 시인의 본능이다. 이러한 모색의 결과 “내 안에는 내가 알고 있는 것 보다 / 더 많은 입덧이 들어 있었다”는 자기 확인 과정을 거친다. 입덧은 생성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중독 증상이며, 몸이 말하는 고통의 표현이다.
내 몸의 일부를 떼어내어 또 다른 하나를 만들어 내는 일은 몸이 헐거워지고 느슨해지는 과정을 동반한다. 이리하여 꽃무늬 이불을 걷어낸 뒤의 몸이란 물먹은 목화솜처럼 무거워져 있다. 이즈음에서, 시인이 두려워하는 무게에의 공포, 혹은 익사에의 공포는 바로 시간이 가져다주는 무게에서 연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멸치 │ 이지담
냉장고에서 꺼낸 멸치를 다듬는다
온몸을 쥐락펴락했을 머리부터 떼어낸다
팔딱이는 바다를 휘저은 지느러미는
물결들에게 두고 왔는지 없구나
상어의 큰 입을 피해 다니며
배든 날렵함이 은빛으로 빛나고 있다
뱃속에는 별똥별을 삼켰던 탓인지
까만 씨앗들이 슬퍼하지 않을 만큼 맺혀 있다
요 작은 몸으로 보시를 결심한 느낌표들!
바다를 놓아주고 열반에 드는가
똥들이 모여 마침표 하나 찍는데
머릴 맞대고 궁리에 골똘해 있는 머리들을 비웃듯
몸뚱이는 몸뚱이끼리 나누어 머리 위쪽에 놓는다
한 몸이었던 내 몸이 부위별로 쑤셔온다
귀가를 서두른 노을과 함께
몸이 프라이팬에서 볶아진다
- 『문학들』 2007년 가을호
■시 읽기■
멸치는 시인 자신의 알레고리적 표상이다. 멸치는 냉장고에서 꺼내지면서 감금의 시간이 풀리고 화자 앞에 일자로 몸을 펼쳐 보인다. 일자일획의 뻣뻣함으로 굳어져 열반에 든 채로 화자 앞에 놓여 있는 멸치의 자세는 지나온 시간을 반성케 하는 매개물로 작용한다.
우선적으로 멸치의 시간들이 머리에서 몸통을 지나 뱃속의 똥 그리고 부서진 몸체로 향하면서 반성적 추구의 과정을 거친다. “온몸을 쥐락펴락했을 머리”→ “느낌표들!”→ “마침표 하나”로 이어지면서 멸치의 생애가 간략히 의미화 된다. “바다를 놓아주고 열반에 드는가”에서 의미가 드러나는 바, 미이라 같은 죽음의 형해가 삶의 터전이었던 바다를 놓아주고 생의 전부였던 “몸”을 바치는 희생 제의로 표현된다.
이 멸치를 손질하는 행위가 예사롭지 않은 까닭은, “한 몸이었던 내 몸이 부위별로 쑤셔”오면서 이 멸치를 손질하는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이 내 삶에 대한 의미화 과정과 맞물리기 때문이다. “귀가를 서두른 노을과 함께 / 몸이 프라이팬에서 볶아진다”의 끝 연에서는, 앞의 멸치를 손질하는 것이 나의 생애를 다듬는 행위와 다름없었음을 확인한다.
지상 위의 대지적인 삶, 그 제한적 운명의 공간에서 들볶이는 생의 순간과 지속의 느낌들을 객관적 상관물인 멸치의 은유를 통하여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