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에 관한 시모음 16)
가족사진 /유자효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들이
환하게 웃고 있다
옷을 잘 차려입고
한껏 멋을 내고는
마치 아무 근심 걱정 없다는 듯이
세상에서 가장 밝은 표정으로 웃고 있다
아들은 집을 나가고
아버지는 말을 잃고
어머니는 깊은 잠에 못 든 지 오래됐지만
사진 속의 세 가족은 언제나 똑같이 웃고 있다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은 그래서 더욱 슬프다
외삼촌의 발걸음 /목필균
새마을 운동 시절
새벽종을 울리며 잘살아 보자고
경운기가 덜덜덜
농촌 마을 휩쓸고 다닐 때
면서기 외삼촌은
술집 작부 손을 잡고
뒹굴뒹굴 세월을 낚았는데
천하의 한량 외삼촌도
조신했던 외숙모 십여 년 먼저 보내고는
팔십 사세 발걸음으로
주춤주춤 거리고 있다
잘못 산 것이 너무 많아
사 남매 자식에게
미안하단 말도 못했다며
비척거리는 걸음걸이
이승 마지막 벽에 기대고 있다
고모를 아는 척 안했다 /김경애
간판도 없는 서산동 할매집,
미자언니는 비밀 이야기를 풀어놓듯
소문내지 말라고 당부를 하며 나를 그곳에 데려갔다
아는 사람만 찾아온다는 보리마당
식당이라고 하기에는 옹색한 지붕이 파란 집
비탈진 텃밭에는 봄동이 꽃을 피웠고
빨랫줄에 걸린 서대 몇 마리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기별 없이 찾아간 고향집 풍경처럼
동네 사람들은 대낮부터 술에 취해 있었다
작은 방에서 서대찜을 기다리는 동안
압력밥솥이 요란스럽게 칙칙거렸다
한 쪽 구석에 자리 잡은
보해소주, 크라운맥주, OB맥주…….
때 묻은 작은 진열장에는
한라산, 88디럭스, 라일락, 엑스포, 시나브로…….
창고 같은 방 안은 보물들이 꽉 찬 흑백 필름 같았다
막걸리 몇 잔 들어가니 목포 앞바다가 출렁거렸다
옆방에서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들려 돌아보았다
20여 년 전, 타향에서 적금 들어
내가 엄마에게 맡긴 돈 오백만원 떼어 먹고 소식 없던
아직도 춤추러 다닌다는 고모를 봤다
끝내, 고모를 아는 척 안했다
고모 /박철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염할 때
사람들 헤치고 내 손 끌어다가
할아버지 찬 손에 어린 손 쥐어주던 고모
얘 병좀 가져가요
그 덕인지 파랑파랑하면서도
삼십 년을 더 살았다
그 고모 돌아가시기 사흘 전
다시 내손 잡고
내가 가다 네 병 저 행주강에 띄우고 가마
나는 이제 삼십 년 또 벌었다
식구 /김연종
식구와 가족은 엄연히 다르다 둘 다 패밀리라 부르지만 가족과 달리 식구는 한 끼 식사에 집중한다
운명공동체인 가족보다 밥상 공동체인 식구가 내겐 더 끌린다 우리 식구는 나를 포함하여 네 명, 모두
닉네임을 사용한다 옆 침대의 스피커가 쩡쩡 울린다 그는 밥을 먹을 때도 물을 삼킬 때도 쩝쩝거린다
매미처럼 펑펑 울기도 한다 귀가 어두워지면서 볼륨이 커진 것이다 건너편 침대에는 우두커니가 있다
그는 종일 장승처럼 꿈적하지 않는다 비가와도 바람이 불어도 마찬가지다 가족이 다녀갈 때도 우두커
니 바라볼 뿐이다 전두엽 상당부분이 길을 잃은 게 분명하다 바로 그 곁에 라디오가 아침 조회처럼 윙
윙거린다 그는 속삭일 때마저 손 마이크를 사용한다 그가 입 근처에 손을 올리면 스피커도 우두커니도
가만히 자리를 뜬다 요즘 부쩍 가족 자랑이 많아졌지만 아직까지 면회 온 가족은 없다 전직 교장인 그가
우리를 가족처럼 대할지 식구처럼 대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주변을 살피고 있다 우리 식구
들은 나를 감시카메라라 부른다
구슬픈 가족사 /이은경
그대여
밤인데 자려고 뒤척대다가 일어나 이 글 쓰오.
왜 시간이 지날수록 그대 생각만 나는지 알 수 없소.
박 타작이라고 해서 미안했소.
그대는 나의 아버지의 명예를 더럽히지 말라고 했소.
들어가보니 그 말이 맞더군요.
문인이던 울 엄마의 허영에 나는 평생 마주르카처럼 인형 짓만 했소.
그 짓을 관두고 나니 속은 편하요.
새삼 난 구슬퍼지오.
능소화 생활에서 이리 탈출해 떠도는 별이 된 것이.
난 장례식엔 못 가겠더라구요.
아버지 장례 때 울 엄마는 재산 분할에만 바쁘더군요.
그것도 내가 준 비용으로 장례 겨우 치르고선.
그 귀한 산수화 그림을 내다 버리고 매일 돌아가신 아버지 원망만 하였소.
그것도 웃긴 이유로, 뭐 아버지가 어떤 문인 여자를 좋아했다나?
질투가 왜 그리 심하오?
문인들은.
내가 죽을 지경인데도, 거짓말만 하고서.
울 아이에게 전복을 시장에서 사다가 죽을 끓여줬다고 뻥을 치더군요.
난 까맣게 속았소.
그 긴 세월 동안.
첫 애인의 편지를 모조리 불사른 것도 세월이 한참 지나서였고.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지만 그 일로 인해 다시 시의 길에 들어섰으니, 원.
지금 나는 너무나 작아졌소.
이러다가 좁쌀만큼 작아져 아무에게도 뜨이지 않고
소멸할 까 두렵소.
내 손에 망치를 쥐어주오.
도시니까 경작할 일은 없고 자꾸 자꾸 생겨나는 건물들과 박 정희 사진이 전시되어 있는
사진관을 부숴버리게.
그리하면 속이라도 시원할 것 같소.
나는 문인이라고 귀족인 듯 행세하는 사람들 보면 역겨움부터 일어나오.
그들은 타인의 고통에 사실은 무관심하오.
모두 이기적이지,
사람이 죽어도 자신들에게 취해있소.
독배를 마신 것이지.
꽈리튼 배암처럼.
울 엄마처럼, 울 가족에 대한 이 배신감도 사랑이요?
작은 고모 /박명숙
덕유산자락 기평마을에 작은고모 살고 있지요
밤이면 황금벌레들 하늘 가득 살림나는 걸
허리를 접고 앉아서 나방처럼 지켜보지요
데룩데룩 이리저리 바쁜 하늘 기어다니며
몸 부딪고 배 뒤집는 별들의 난장을
처마끝 거미줄 사이로 까무룩이 바라보지요
어쩌다 툭, 황금벌레 한 마리 풋감처럼 떨어져서는
섬돌까지 꾸물꾸물 이슬 젖어 기어들 때면
두 날개 파닥거리며 고모 혼자 잠 못 들지요
가정 /박태강
성년이 되면 마련하는 가정
남,여 하나되어
일구는 사랑의 쉼터
가정 작은 단위 국가
엄연한 질서와 법이 있어
법따라 사랑, 존경, 함께하는 쉼터
내일 위한 에너지 충전소
함께 손을 맞잡아
새롭게 만들어 가는 나눔의 안식처
배려하는 마음
효하고 우애하는 마음
훌륭한 가정에서 나오고
훌륭한 가정은
끝없는 노력과 위함과
무한한 인내로써 이룩되는 것
훌륭항 가정에
아름다운 새싹이 터고
무한한 사랑 웃음 피어 나나니.
세 모녀 /鞍山백원기
오죽하면 그랬을까
옆길이 있는지도 모르고
정도로만 살아온 엄마와 딸들
어쩌면 세 모녀의 심성이
하나도 틀리지 않고 똑 같을까
죽음 앞에서 까지 피할 줄 모르고
착하고 곱게 마지 해야 했을까
궁금하고 안타까운 사람들이
밤새도록 중얼거리며 우울하다
어찌 말 할 수 있었으랴
먹고 사는 부끄러운 일인데
감히 뉘게 말 할 수 있으리오
한 달 치 곱게 드리는 손길
차마 직접 드리지 못하고
마지막 집세라 죄송한 마음
조아리며 한 자 한 자 쓴 편지
읽어 주시리라 바라는 마음으로
곱게 접어 두었으리
손자녀석 /이월순
어제는
첫돌 지난 손자 녀석
책상 뒤엎어
내 이마 터쳐 꿰매게 하더니
날마다 심해지는 손자 녀석
뒤 따라 다니며 치우기
너무도 힘이 드네요
하나 치우는 동안
두 가지일 더하는
발빠른 손자 녀석
며느리 여름 방학은
며칠 안 남았는데
하루가 한달 같이
힘이 드네요.
수상한 가족 /권오범
엄마가 아빠를 오빠라 부르니
외삼촌이 날 낳았나
그럼 엄마가 고모?
혹시
콩가루 집안에
내가 입양 된 걸까
유치원 문턱 넘기도 전에
첫밗부터 내 인생
왜 이리 복잡 하냐
골머리 빠지게 시리
가족(FAMILY) /백낙은
Father and mother I Love You
이 단어들의 첫 글자를
연결하면 'FAMILY'가 된다지요.
Father and mother
아버지와 어머니가
화합하지 못하면 불행의 원인.
Father and mother I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
가족은 질서가 분명해야 하는 법.
Love You
에로스가 아닌 아가페 사랑으로
든든한 고리를 만들어야 한답니다.
Family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울타리
사랑의 영원한 동반자입니다.
* 에로스(eros) : 성적인 사랑.
* 아가페(agape) : 종교적인 무조건적인 사랑.
가족 /조용숙
오르막 산길에 까치발 딛고 서서
햇빛을 수혈받고 있는 나무 한 그루
쩍쩍 갈라진 몸피와 바짝바짝 타 들어가는
잎사귀 사이로 드러나는 가슴팍
무엇이 그토록 생에 대한 집착의 끈
놓지 못하게 했을까
새까맣게 썩은 그의 가슴팍에 주소를 옮기고
이삿짐을 부린 버섯과 벌레의 일가
제 안에 들어와 이젠 식솔이 되어버린 그들을
나무는 차마 내칠 수 없었던 것일까
다 함께 죽을 수도 없는 삶
이제 더 이상 혼자일 수 없는 그는
하늘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
쟁여두었던 뿌리의 체온을 끌어올려
식솔들을 감싸 안는다
이른 봄 성치도 않은 나무의 몸에 피가 돌 듯
연푸른 잎사귀 돋는 것은
몸에 새긴 봄의 기억 때문만은 아니다
긴 시간의 물살을 온몸으로 견뎌온 자만이
저 아닌 다른 것을
제 생의 빈터에 받아들인다
누이 술 한잔 줘 /이승복
"누이 술한잔 줘"
옛날 외삼촌은 술이 생각나면
한동네 사는 엄마한테 와서
술을 달라고 졸랐다
엄마는 친오빠를 위해
술을 담갔다
순사가 집집마다 술조사가
수시로 나오던 시절
잿간에 술단지 묻어 숨기며
술을 담갔다
나는 어려서도 외삼촌의
누이, 그 말이 보기 좋았든가 보다
누이란 말이 정겹다
누이를 바랬는데 내가 막내다
가족애는 오가는 정속에
무르익는게 아닌가
노랗게 익은 동동주 한잔에
오누이 맘이 서리고
정이 술처럼 흐른다
눈길 웃음꽃이 오갔다
"누이 잘있게"
거나하게 취한 외삼촌은
갈짓자는 아니라도
선걸음으로 마당을 나가며
다시 뒤돌아 보며 사나흘전
말을 되씹는다
"매부(매제가 맞지만 높임말)한테 잘해줘"
외할머니 일찍여워 다독여
누이동생에게 주는 훈계다
두남매는 정다웠다
새벽 기독교 TV에서
전주 종달새목사님(성함이 임종달, 나중에 확인하니
전주순복음교회 당회장님이시다)
남편,아내,자식 상호 고생하는거 모르는 세상이라고
"당신은손없어""눈을흘기며대드는자식"
(남편,아내가 부탁하자. 늦게 다니지 말라하자)
서로 다독임이 없는 심술만 부리는 세상 됐다고
마음에 진하게 와닺는 설교였다
부부간,부모 자식간 삭막한 세상이다
가족간 정이 정말 그리운 세상이다
돌아가신 어머님과 외숙부님이
보고파지는 아침이다
산소라도 다녀와야겠다.
채송화 /고광헌
고향 형님 댁 앞마당
키 작은 채송화
고등학교 시절 집에 갔을 때
구겨진 오천원짜리 쥐여주며
서울 공부 잘해야 한다던
눈 큰 형수 닮았다
60년대 초 어느 겨울날
한 집안으로 시집와
내리 딸만 다섯 낳고, 평생
살금살금
가만가만 사시다가
일흔살도 안돼 떠난
눈 크고 키 작은 형수
형수가 낳은 딸 다섯
닮았다
형수 /이상국
서둘러 저녁이 오는데
헐렁한 몸빼를 가슴까지 추켜 입고
늙은 형수가 해주는 밥에는
어머니가 해주던 밥처럼 산천이 들어 있다
저이는 한때 나를 되련님이라고 불렀는데
오늘은 쥐눈이콩 한 됫박을 비닐봉지에 넣어주며
아덜은 아직 어린데 동세가 고생이 많겠다고 한다
나는 예,라고 대답했다
형수의 밥상 /홍사성
빈소 향냄새에 그 냄새가 묻어 있었다
첫 휴가 나왔을 때, 감자 한 말 이고 뙤약볕 황톳길 걸어 장에 갔다 와 차려낸 고등어조림 시오
리 길 다녀오느라 겨드랑이로 흘린 땀 냄새 밴 듯 콤콤하다 엄마 젖 그리워 패악 치며 울적마다
가슴 열어 빈 젖 물려주던 맛과 똑 같았다 그 일 둘만 안다는 듯 영정 속 그녀는 오랜만에 찾아
온 시동생 일부러 무표정하게 맞았다 어머니뻘 형수가 차린 오늘 저녁 밥상 고등어조림 대신 국
밥이다
한 수저 뜨는데 뚝, 눈물 한 방울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