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포의 생활상
마포는 젓갈, 소금, 생선, 건어물 등 해산물이 모이는 집산지로 그 중 새우젓의 거래가 많아 전국적으로 '마포새우젓 장수'가 유명했다. 이에 당시 세간에서는
"목덜미가 까맣게 탄 사람은 왕십리 미나리 장수, 얼굴이 까맣게 탄 사람은 마포 새우젓 장수"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동쪽에 있는 왕십리에서 도성 안으로 미나리를 팔려면 아침 햇빛을 등지고 왔고, 서쪽의 마포에서 도성으로 새우젓을 팔기 위해서는 아침 햇빛을 바라보면서 왔기 때문이다. 이처럼 당시에도 유명했던 '마포 새우젓 장수'라는 말은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 마포의 염해전
조선 초기부터 마포에는 새우젓 등 젓갈류를 파는 상인과 미역, 생선 따위의 수산물을 파는 상인이 많았다.또한 이 일대는 소금 창고인 염창과 젓갈을 담는
항아리를 만드는 동막(또는 독막)이 있어 새우잡이 어민들은 배에 소금과 독을 심고 바다에 나가 새우를 잡은 즉시 배에서 절이거나, 마포로 옮겨와서 새우젓을 만들었다. 17세기 한양의 인구 증가로 소금 수요량이 많아지면서 한양과 한강 일대에는 새로운 염전인 마포염전, 경염전, 마포 염해전 등이 만들어졌다. 이후 17세기 중반에는 한양의 활발한 소금 유통을 둘러싸고 상권과 운영권에 대한 경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 유통의 중심 마포
마포는 전국 교통의 요지이자 물류의 중심지로, 철도가 놓이기 전까지 곡물이나 어물을 실은 장삿배(상선)만 연간 1만여 척이 오가는 전국에서 가장 큰 항구였다.서해의 바닷물이 마포까지 들어왔기 때문에 충청도,전라도, 경상도에서 올라온 배들은 밀물 때에 한강을 거슬러 올라 마포에 도달했다. 서해를 통해 마포에 들여온 곡물, 어물, 기타 상품들은 애오개나 만리재를 거쳐 한양 도성 안으로 운반되었다. 또한 한강 상류의 목재나 농산물 등도 마포에 몰렸다. 철도가
놓인 이후에도 마포는 서해의 생선, 건어물, 젓갈, 소금 등이 모이는 곳으로 명성을 유지했으며 그중에서도 새우젖의 거래가 많아 '새우젖 항'으로도 불렸다.
● 경강상인과 마포
조선시대에는 한양 인근을 흐르는 한강을 '서울의 강'이라는 의미의 경강이라고도 불렀다.이러한 경강에서 활동하며 부를 축적한 상인을 경강상인이라고 한다. 경강상인은 시전상인과 선상사이에서 거래를 중개하는 객주업, 배로 화물을 실어 나르는 선운업, 배를 만드는 조선업, 얼음을 매매하고 관리하는 장빙업, 물고기를 잡는 어부, 지역 간의 가격 차이를 이용하여 이익을 남기는 선상층, 국가에 세금으로 내는 곡물(조세곡)의 운송 등 다양한 모습으로 활동했다. 이들의 활발한 활동을 바탕으로 경강은 전국 시장의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마포는 쌀과 꼭식을 보관하는 창고와 상점 등이
빽빽하게 들어찬 유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 명승지 마포
마포는 예로부터 마포팔경이라 하여, 탁 트인 한강 풍경이 아름답기로,유명했다. 특히 마포나루로 돌아오는 수많은 돛단배의 모습을 뜻하는 '마포귀범'은 마포의 빼어난 경치 중 하나로 유명했다.아름다운 경치를 보며 뱃놀이를 하고, 시를 읊고, 그림을 그리는 등 풍류를 즐기는 이들이 많았으며,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이 호수처럼 보인다고 하여 서호라고도 불렀다.
● 교통의 요지 마포
조선시대 한양은 도읍인 동시에 경제 중심지였다. 용산, 마포, 서강은 한양으로 들어오는 수많은 배들이 도착하여 안전하게 머문 정박지였다.19세기 지리학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속의 경성오부도와 지리책인 <대동지지>정리고 등을
보면, 마포지역은 뱃길이 동서남북으로 잘 발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국에서 서해바다를 거쳐 마포나루로 들어오는 뱃길은 대개 4개의 항로가 있었다. 남쪽인 충청도ㆍ전라도ㆍ경상도에서 올라오는 뱃길이 1개,북쪽의 의주ㆍ 개성 등에서 강화도와 인천을 통해
올라오는 뱃길 3개가 있었다.
● 독 짓는 마포
조선시대에 지금의 마포구 용강동에서
대흥동에 이르는 강변 일대에는 항아리를 제조하는 곳이 많아, 동막 또는
독막이라 불렸다. 이곳에서 만든 독은
젖갈을 담는 데 사용되었다. 마포구에는
지금도 '독막길' 이라는 도로명이 있어 그 자취가 남아있다.
● 마포삼주
조선시대 한강의 포구와 나루 중에서 가장 활기차고 번화했던 곳이 마포였다. 전국 각지의 물자가 모여들어 대규모 시장이 생기고,수많은 배가 드나들면서 뱃사공, 장사꾼 등으로 항상 북적였다.그래서 18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마포는 한강의 포구 가운데 여객의 주인, 즉 객주가 존재했던 유일한 곳이었다. 객주란 뱃사람들에게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하면서 상품 보관, 매매,중개, 금융업 등을 함께 수행하며 그 대가를 받는 사람이다. 이와 함께 뱃길의 안녕을 기원하는 당주, 유흥가인 색주도 발달했다. 18세기 후반 700여 개의 객주와 술집이 술 제조용으로 연간 수만 석의 쌀을 소비했다고 한다. 당시 번성했던 마포를
이끌었던 이들은 마포삼주(객주, 당주, 색주)라 불렸다.
● 마포 황포돛배
황포둑배는 넓게 짠 면직물인 광목에 황토물을 들여 내구성을 높인 황포 돛을 단 배로, 마포가 항구로 번성했던 시기에 쌀, 땔감, 소금 등을 싣고 한강을 오가던 배이다. 배의 몸체는 주로 소나무, 전나무 등으로 제작하고 표면에 칠하여 튼튼하고 물에 잘 견딜 수 있게 만들었다. 세찬 물살이나 암초를 피해 수심이 얕은 강을 오갈 수 있도록 배의 밑바닥을 평평하게 설계한 평저선으로, 역풍일 때도 바람을 통제할 수 있는 쌍돛 구조를 갖고 있다.
ㅡ참고ㅡ
■ 위의 글은 마포황포돛단배 전시 및 쉼터에 있는 안내판 참조.
첫댓글 좀 있으면
세상이 푸르겠지 ~~^^
네
곧 산수유 꽃 피겠어요
새싹 움트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