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風爻의 牌장 무산되고… 1 동경(銅鏡)으로 한 여인의 옥용이 보름달처럼 둥실 떠올라 있다. 은은히 도화빛 홍조를 띤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왔다. 현옥령은 요 며칠간 지극히 행복했다. 마음(心)도 몸(身)도……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주인이자 낭군인 백리용청은 요즘 그녀에게 너무도 잘해 주었다. 실로 불안할 정도였다. 지금 그녀는 동경 앞에 앉아 머리를 가꾸고 있었다. 문득 현옥령은 두 눈을 반짝 빛냈다. (오늘 밤도…… 오시겠지……) 순간 그녀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름을 느끼며 볼을 감싸 쥐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얼굴빛을 가다듬은 그녀는 취옥잠(翠玉簪)을 들어 머리에 꽂았다. 그 순간 그녀는 보았다. 동경 속 자신의 얼굴 위에 떠 오른 또 하나의 얼굴을……! 그 얼굴은 결코 다정한 백리용청의 모습이 아니었다. 섬뜩한 핏빛 복면 위로 드러난 사악무비한 두 눈이 소름끼치도록 무서웠다. 현옥령은 그처럼 무서워보이는 얼굴은 난생 처음이었다. "누…… 누구……?" 그녀는 두 눈과 얼굴이 경직된 채 화급히 몸을 돌렸다. 어느새 나타났는가? 방 안에 아홉 명의 혈의인(血衣人)들이 우뚝 서 있지 않은가? 한결같이 핏빛 복면을 뒤집어 쓴 유령(幽靈)같은 모습이었다. "아……" 현옥령은 창백하게 질린 채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때, "네가 현옥령이냐?" 뒷골에 찬물을 끼얹듯 냉막하기 그지없는 음성이 들려왔다. 바로 그녀의 등 뒤였다. 현옥령은 무서운 공포에 떨며 다시 몸을 돌렸다. 귀신…… 유령? 아니 허깨비라고 생각했다. 헛것이 아니고서야 어찌 인간이 이렇게 급작스레 나타날 수 있는가? 현옥령이 허깨비라고 생각한 그 인물은 백의의 중년인이었다. 얼굴은 분이라도 바른 듯 창백하여 오싹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더욱이 그는 눈썹이 아예 없었다. 그리고 오오, 저토록 공포스런 눈을 본 적이 있는가? 보통 인간의 눈은 흰자위에 검은 눈동자가 있기 마련이다. 한데 그는 어이없게도 상식에서 벗어난 충격적인 눈을 하고 있었다. 묵빛 검은 자위에 떠오른 새하얀 눈동자, 어찌 그것이 전율스럽지 않겠는가? 현옥령은 불길한 예감을 금치 못하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다…… 당신들은 대체 누구죠……?" 하나 백의 중년인은 사악한 흰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냉막하게 물었다. "현옥령…… 나이 서른 둘…… 무인년(戊寅年) 출생…… 맞느냐?" 그 음성엔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무형의 압력이 깃들어 있었다. 현옥령은 부지중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그래요. 한데……" 백의 중년인은 필요한 말만을 했으며 들어야 할 말만을 들었다. "벗겨라!" 돌연한 일성이 그의 입 밖으로 튀어 나왔다. 순간, 두 명의 혈의복면인이 비쾌히 움직여 현옥령의 양 팔을 잡았다. 동시에 현옥령의 옷자락이 그들에 의해 사정없이 찢겨 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현옥령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 되었다. 탱탱히 부푼 아랫배와 함께 드러난 풍염하며 매끄러운 여체(女體). 반항을 하고 말고 할 틈도 없었다. 혈의인들의 행동은 현옥령의 사고(思考)를 훨씬 앞질러 버렸다. 또한 극도의 공포감이 그녀의 모든 사고 능력을 한꺼번에 상실시 켰던 것이다. 백리용청을 소리쳐 불러야 하건만 입조차 얼어붙어 말이 되어 나오질 않았다. 그녀가 그저 공포에 전율하고 있을 때 백의 중년인은 두 혈의인에게 모종의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혈의인들은 현옥령을 들어 사정없이 침상 위로 내팽개쳤다. "악----!" 비단폭 찢기듯 날카로운 비명성이 현옥령의 입술을 비집었다. 하나 그녀는 이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비명성을 삼켜야 했다. 어느샌가 날이 시퍼렇게 선 칼날이 그녀의 목에 섬칫한 감촉을 주고 있지 않은가? 그 순간 다시 두 명의 혈의인이 다가와 그녀의 다리를 잡고 양쪽으로 한껏 벌렸다. 그러자 여인의 신비지문(神秘之門)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울창한 방초와 그 사이의 춘궁이 낯선 사내들 앞에서 일목요연하게 보여진 것이다. (아……!) 현옥령은 수치와 분노, 절망에 물든 얼굴로 질끈 눈을 감았다. 그때 백의 중년인이 소리없이 침상으로 다가왔다. 이어 사이(邪異)한 백색 눈동자로 현옥령의 신비지문을 잠시 응시했다. 아름다운 미녀의 은밀한 곳을 세세히 살피는 그의 모습엔 욕망과 색정의 빛이 조금도 없었다. 그의 눈빛은 그저 사이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얼굴은 너무도 무표정하였다. 한데…… 왜 그들은 이런 괴행(怪行)을 벌이는가? 이때 문득 백의 중년인은 품 속에서 무엇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주판처럼 생긴 하나의 산목(算木)이었다. 백의중년인은 곧 산목을 빠르게 퉁기기 시작했다. 딱! 딱! 따딱……! 이윽고 산목을 퉁기던 것을 멈추며 백의 중년인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오 개월(五個月) 후 출산(出産)…… 갑자년생(甲子年生)이 맞군." 그 말에 현옥령은 기이한 느낌이 들어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찰나 그녀의 두 눈은 감당키 어려운 공포와 경악으로 찢어질 듯 휩뜨였다. 오오…… 보라! 이 엄청난 광경을……! 백의 중년인의 머리 위에 돌연 새하얀 기체가 피어 오르며 한 자루 검(劍)이 솟아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인간의 머리 속에서 검이 솟아 나오다니 과연 이럴 수도 있는 것일까? 기검(奇劍), 그것의 한 면은 핏빛으로 붉었으며 다른 한 면은 섬뜩하도록 푸르다. 검자루엔 단 두 글자가 씌여 있었다. <풍화(風火).> 백의인은 한 손으로 검을 잡았다. 이어 그는 망설임없이 검 끝을 현옥령의 부풀어 오른 배에 갖다댔다. 현옥령의 안색은 아예 잿빛이 되어 버렸다. 그녀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이상일 수 없도록 행복하다고 여겼는데 지나치다 싶을 만큼 행복에 겨웠는데…… 마른 하늘에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백의인이 냉막한 일성을 천천히 내뱉았다. "대지존(大至尊)께 대항할 놈을 잉태한 것이…… 네가 죽어야 할 죄목(罪目)이다." 다음 순간, 푸---- 욱! "아---- 악!" 가슴 섬뜩한 괴음과 함께 현옥령의 처절무비한 비명성이 일었다. 아아…… 귀를 틀어 막고 싶도록 애처로운 비명이었다. 현옥령의 아름다운 옥용은 고통으로 참혹하게 일그러져 있었고 보석처럼 빛나던 두 눈은 크게 확대된 채 바르르 안타까운 떨림을 일으켰다. "나…… 나으…… 리……" 툭----! 그것이 끝이었다. 현옥령은 고개를 떨구며 이승과의 영원한 이별을 하고 말았다. 뱃속에 잉태한 또 다른 한 생명과 함께…… 그제서야 백의인은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사악하기 그지없는 웃음을…… "흐흐흐…… 이것으로 풍효(風爻)의 패(牌)는 성공으로 끝났다." 스윽----! 백의인은 현옥령의 배에 쑤셔 넣었던 검을 뽑았다. 순간, 뒤늦은 시뻘건 피분수가 비릿한 내음과 함께 분출되었다. 뜨거운 핏물은 현옥령의 슬프도록 희뽀얀 나신을 금시 빨갛게 물들였다. 그때, 스스스스…… 백의인의 풍화검(風火劍)은 다시 연기처럼 빨리듯 그의 머리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의 공포스런 눈동자는 피칠을 하고 누운 현옥령을 응시하고 있다. "나…… 사천공(邪天公)은 대지존에 대항하는 자…… 그 누구도 용서치 않는다." 사천공, 그 냉막하기 짝이없는 음성이 광오하게 이어졌다. "설사…… 하늘(天)이라 해도……" 이어 그는 재차 품 속에서 산목을 꺼냈다. 그의 입가엔 음산한 괴소가 독버섯처럼 피어 오르고 있었다. "흐흐…… 이제 중원과 새외변방…… 천하통일(天下統一)은 시간 문제다." 사천공은 말과 함께 또다시 산목을 퉁기기 시작했다. 딱! 따딱! 딱……! 한데 문득 분을 바른 듯 창백하던 그의 안색이 홱 돌변해 버렸다. "읏! 이…… 이게 무슨 조화냐?" 순간, 사천공은 재차 엄중한 신색으로 산목을 다시 퉁겨 보았다. 딱! 딱 따딱…… 딱! 하나 사천공의 안색은 여전히 대경의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아니, 지우기는 커녕 엄청난 놀라움의 기색은 더욱 짙어지고 있 지 않은가? 파르르…… 급기야 사천공의 두 눈이 거센 파랑을 일으켰다. "이…… 이럴 수가……! 무언가……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다음 찰나 그는 미친 듯 산목을 퉁기고 또 퉁기기를 계속했다. 따딱! 딱! 따딱…… 딱……! 하나 갈수록 사천공의 얼굴은 무섭게 굳어들 뿐이었다. 동시에 백지장같던 그의 안색은 파르스름하게 변해갔다. 이윽고, 탁! 사천공은 산목으로 손바닥을 내리치며 번뜩 고개를 쳐들었다. 그 눈엔 불신(不信)과 당혹의 뜻이 역력히 떠올라 있었다. "산패(算牌)가 잘못 되었다…… 산패가……" 불끈! 산목을 쥔 손에 힘이 가해졌다. "십팔변법(十八變法) 중 사변서법(四變筮法)이 팔변서법(八變筮法)으로 변하다니!" 그의 음성은 점차 경악으로 떨려 나오기 시작했다. "이…… 이것은 사음(死陰)이 생양(生陽)으로 바뀐 것을 증명하니…… 곧…… 놈이…… 놈이 아직도 죽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나 다음 순간 사천공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돼! 분명…… 천기(天機)를 짚은대로 이 계집의 뱃속에서 놈이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는데 이따위 터무니 없는 산패가 나오다니……!" 그는 망연히 현옥령의 축 늘어진 시신을 응시했다. "허…… 하나…… 나의 산패는 결코 틀릴 리가 없는데……" 현옥령의 뻥 뚫려진 배에서 아직도 꾸역꾸역 핏물이 토해져 나오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번뜩! 돌연 사천공의 허연 눈동자가 소름 끼치는 백색 광망을 뿜었다. "그렇다! 누군가…… 누군가 대지존의 풍효의 패를 역(逆)으로 짚었다." 그는 수중의 산목을 으스러져라 움켜 쥐었다. "놈은 아직 죽지 않았다!" 순간, 아홉 명의 혈의인들은 움찔 몸을 떨었다. 동시에 적이 불신어린 눈빛으로 사천공을 주시했다. 하나 사천공은 예의 사악한 눈빛을 되찾으며 확신에 찬 일성을 터뜨렸다. "누군가…… 분명 역천(逆天)의 패로 풍효의 패를 무산시키고 천기를 재역행(再逆行) 시켰다." 아아…… 사천공, 그는 마침내 알아내고야 말았다. 딱! 따딱! 딱…… 딱……! 사천공은 급히 산목을 퉁겨내기 시작했다. 그의 새하얀 얼굴은 금시 굵은 땀방울로 얼룩져갔다. "무…… 서운…… 놈이다. 놈은…… 이미 모든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사천공은 나직한 음성을 이빨 사이로 흘려내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대지존의 상극(相剋)…… 놈은 이미 이십 년 전…… 신유년(申 酉年)에 탄생했다." 다음 순간 그는 서릿발같은 한광(寒光)을 뿜어내며 벼락같이 소리쳤다. "누구냐? 대체…… 어떤 놈이냐? 대역천만상대법(大逆天萬像大法)을 사용하여 우리를 희롱한 놈이…… 대체 누구란 말이냐?" 뿌드득! 세찬 이갈림이 사천공의 입술 사이로 새었다. "대지존과 나 사천공을 능가할 정도로 무서운 재능을 지닌 놈이 중원에 존재하고 있었다니……!" 그러다 문득 그는 백색 두 눈에 이채를 띠었다. 이어 한 옆에 서 있는 혈의인들을 향해 냉랭히 대갈했다. "천살구령(天殺九靈)! 백리용청을 찾아라. 바로 그놈이다!" 동시에 사천공은 방 밖으로 비쾌히 신형을 날렸다. 그러자 혈의인, 천살구령들도 분분히 신형을 날려 사천공을 쫓았다. 기분 나쁜 정적이 급작스레 실내를 휘감았다. 비릿한 혈향(血香), 그리고 현옥령의 처참한 시신만이 정실 안에 덩그라니 남아 있었다. 2 황성백리가의 후원. 그 깊숙한 곳에 한 채의 전각(殿閣)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미 밤이 깊어 모든 방의 불은 꺼져 있건만 유독 한 곳만이 환하다. 정실의 내부, 아! 이 무슨 기경(寄景)인가? 넓은 방 전체가 황금 촛대로 꽉 메워져 있지 않은가? 바닥엔 팔괘도형(八卦圖形)이 그려져 있었다. 그 도형을 따라 둥근 원을 그리며 불켜진 황금촛대들이 늘어서 있는 것이다. 촛불의 수는 도합 일흔 두(七十二) 개. 실로 신비괴이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으니…… 지금 그 중앙에는 한 노인이 고요히 정좌해 있었다. 바로 황성백리가주인 백리용청이었다. 그는 마치 입정(入定)한 고승(高僧)처럼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휘황찬란한 불빛 속에 얼마나 쥐죽은 듯한 정적이 흘렀을까? 일순, 꽈꽝----! 요란한 폭음이 일며 정실문이 박살나 버렸다. 동시에 한 개 그림자가 빛살같이 쏘아져 들어왔다. 사천공, 바로 그였다. 거의 같은 순간, 꽝----- 꽈꽝----- 꽝……! 사면 벽이 모조리 터지며 아홉 줄기 핏빛 인영이 뛰쳐 들었다. 그들은 사천공을 따라온 천살구령들이었다. 삽시에 정실은 모조리 박살나 폐허가 되어 버렸다. 희뿌연 먼지가 서서히 가라앉으며 실내의 정경이 드러났다. "……?" "……!" 천살구령들은 뜻밖의 정경에 일순간 주춤했다. 그 와중에도 황금촛대 위의 촛불들은 여전히 눈부신 광채를 뿌리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중앙에 백리용청이 미동도 않은 채 정좌해 있는 것이었다. 천살구령들은 촛대 주위로 번뜩 신형을 날려 백리용청을 포위했다. 이어 그들은 명령을 기다리듯 사천공을 응시했다. 사천공의 고개가 일순 절도있게 끄덕여졌다. 순간, 쉬---- 익! ㅆ----! 천살구령들의 신형이 허공을 가르며 벼락같이 백리용청을 덮쳤다. 한데, "헉!" "윽…… 이런……!" 돌연 천살구령들의 입에서 분분히 당혹에 찬 외침이 터졌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일제히 원래 위치로 퉁겨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무형의 엄청난 압력이 천살구령들을 퉁겨내 버린 것이다. "……!" "……!" 천살구령들은 곤혹스런 눈빛을 교환했으나 곧 짙은 살기를 떠올렸다. 이어 다시 신형을 날리려는 찰나, "물러서라!" 사천공의 냉막한 일성이 울렸다. "……?" 천살구령들은 멈칫 멈추며 의아한 눈길을 그에게 주었다. 사천공은 새하얀 동공을 한 차례 굴리며 촛대 주위를 훑어 보았다. 그러더니 문득 흐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뜻밖이군. 이런 곳에서 칠백 년 전…… 팔괘천자(八卦天子)의 칠십이화영절진(七十二火影絶陣)을 접하다니……!" 그의 눈길이 촛대에 둘러싸인 백리용청에 이르러 번뜩 빛을 뿌렸다. "바로 네놈이군. 대지존의 풍효의 패를 무산시킨 놈이……! 하나 이 정도로 나 사천공의 걸음을 멈추게 할 수는 없지." 소름 끼치도록 사악한 음성이다. 동시에 사천공의 머리 위에서 새하얀 기체와 함께 풍화검이 솟구쳤다. 사천공은 이내 풍화검을 한 손에 움켜쥐며 소리쳤다. "마풍(魔風)의 뜻이다. 모든 불꽃은 소멸하라." 순간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우우우우우웅……! 풍화검이 미친 듯 흔들리며 엄청난 광풍이 사위로 폭출되는 것이 아닌가? 회우우우우웅----! 팟! 파파파팟! 일흔 두 개의 불꽃들은 일시에 모조리 꺼져 버렸다. 그러자 풍화검은 다시 사천공의 머리 속으로 기체가 되어 스며 들었다. 볼수록 믿어지지 않는 기현상이었다. 사천공은 마치 환영처럼 백리용청에게 다가갔다. "……!" 백리용청은 눈앞에 다가와 있는 사천공을 발견하고 두 눈에 은은한 경악을 떠올렸다. 하나 이내 눈빛을 담담히 가라앉혔다. 사천공이 냉막하게 물었다. "네가 백리용청이냐?" 무례하기 짝이없는 말투였으나 백리용청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당신은……?" "흐흐흐…… 자칫했으면 감쪽같이 속을 뻔했다. 감히 대역천만상대법으로 천기를 다시 엎어놓다니……!" "……" "말해라. 너의 또 다른 아들 놈은 어디 있느냐?" 백리용청은 무심하게 되물었다. "그것이 무슨 말이오?" 찰나 사천공은 정실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앙천광소했다. "크핫핫핫……! 어리석은 놈! 너는 나를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다음 순간 그의 눈빛이 극히 음산하게 돌변했다. 동시에 사악하기 그지 없는 음성이 사천공의 입술 사이로 흘러 나왔다. "백리용청, 내 눈을 보아라." "……!" 백리용청은 무심결에 그의 눈을 응시했다. 순간, (으……) 백리용청은 내심 뼈저린 신음성을 발하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자신의 심혼(心魂)이 모조리 사천공의 백색 눈동자 속으로 빨려 드는 듯하지 않는가! 도저히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때 다시 사천공의 사악무비한 음성이 일었다. "천마종(天魔宗)의 뜻이다. 너는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야 한다." "……" 백리용청은 흐릿하게 변한 눈빛으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천공은 만족한 듯 사이한 미소를 띄우며 재차 입을 였었다. "말하라. 이십 년 전…… 신유년에 태어난 그 아이는 어디에 숨겨 두었느냐?" 찰라, 부르르…… 백리용청의 전신이 눈에 띄게 경련을 일으켰다. "무…… 무슨……" 그러자 사천공의 음성은 더욱 지독스럽게 음산히 변했다. "말해라, 어디에 있느냐?" 백리용청의 눈빛은 초점없이 더욱 흐릿해졌다. "황성…… 백리가의…… 지하…… 뇌옥……" "위치는?" "그…… 그곳은……" 아아! 이 또한 운명인가? 백리용청은 그만 백리강을 숨겨 놓은 지하 뇌옥의 위치를 말해 버리고 말았다. 사천공의 입가엔 회심어린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드디어…… 찾아냈군." 번뜩! 살기어린 광채가 그의 두 눈을 스쳤다. "백리용청, 너는 확실히 뛰어난 놈이다. 하나…… 대지존의 뜻에 역행한 죄로 너는 죽어야한다." 순간, 푹! "으악----!" 백리용청의 처절무비한 비명과 함께 핏둥지가 뻗쳐 올랐다. 어느새 풍화검이 솟아나와 그의 심장을 관통해 버린 것이다. 털썩! 백리용청은 맥없이 가슴을 움켜 쥐며 쓰러져 버렸다. "가자." 사천공의 일성과 함께 그는 천살구령들과 무너진 정실 밖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채 일각이나 지났을까? 홀연, 팟! 파팟……! 이럴 수가! 황금촛대 위의 촛불들이 일제히 다시 켜지는 것이 아닌가? 뿐만이 아니었다. "으……" 죽은 줄 알았던 백리용청의 신형이 꿈틀거리지 않는가? 세상에 심장을 관통 당하고도 숨이 붙어 있다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이때 백리용청은 간신히 신형을 일으켜 무너진 벽에 기대어 앉고 있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엔 은은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문득 피 흐르는 입술 사이로 실낱같은 음성이 새었다. "후후…… 네놈들…… 네놈들은 결코 나의 아들을…… 죽이지 못한다." 그는 말과 함께 꽉 쥐고 있던 오른손을 펼쳤다. 순간, 촤르륵……! 그의 주먹 안에서 다섯 개의 옥편(玉片)이 뿌려졌다. 그것들은 바닥에 기이한 상형문자를 연출해 냈다. "……!" 백리용청의 풀린 두 눈에 얼핏 희미한 광채가 스쳤다. "기…… 어코…… 성공했구나. 천기(天機)가 역행함에 따라…… 나의 아들 소강의 운명이 바뀌었다." 울컥! 백리용청은 검붉은 피를 토한 뒤 다시 말을 이었다. "그…… 그것은…… 왕운극성(旺運極星)…… 신위창생(神威蒼生)은 물론…… 불멸지혼(不滅之魂)…… 진압천하(鎭壓天下)하는 고금 최초이자 절대유일(絶大唯一)의 건위천(乾爲天)의 천품을 나타내는 것이니……" 오오, 이 무슨 가공할 말들인가? 왕운극성(旺運極星)! 하늘이 천지(天地)의 제왕(帝王)을 탄생 시키니…… 신위창생(神威蒼生)! 그 신위(神威)가 온통 우주 삼라만상(森羅萬象)을 뒤덮고…… 불멸지혼(不滅之魂)! 그 불멸(不滅)의 업적에 만인(萬人)이 앙복하도다. 진압천하(鎭壓天下)! 아아…… 마침내 온 천하가 그 앞에 스스로 굴복케 되리라! 백리용청의 얼굴은 갈수록 핏기를 잃었다. 하나 그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헛…… 수고다…… 네놈들 따위가…… 하늘(天)이…… 타…… 탄생시킨 나의 아들을…… 절대…… 죽일 수…… 없으리라……" 따뜻한…… 더할 수 없이 부드러운 빛이 그의 두 눈에서 흘러 나왔다. "아들아…… 이제부터가…… 너의 운명의…… 새로운 시작이다…… 강해지…… 거라…… 더 이상…… 강해질 수…… 없을 때…… 까지…… 아니…… 그 이상으로……" 불현듯 그의 눈빛이 잿빛으로 꺼져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는 한 손을 내밀어 안타깝게 허공을 움켜 잡았다. "소…… 소강…… 하…… 한 번 쯤은 단…… 한 번은…… 너와…… 너와……" 백리용청의 고개와 손이 동시에 힘없이 떨궈졌다. 죽음(死). 그 앞엔 장사가 없다던가? 한 시대를 풍미한 일대영웅(一大英雄)은 이렇게 생(生)을 마감했다. 팟…… 파팟……! 촛불이 하나씩 꺼지고 있었다. 3 꽝----! "당신은 약속을 어겼소!" 쿠꽝----! "끝까지 나를 실망시켰단 말이오!" 꽈앙……! "저주받을 것이오! 나는 영원히 당신을 저주하겠소!" 백리강은 오금사철로 된 쇠문을 향해 미친 듯이 장력을 때려내고 있었다. 하나 천하에 견고하기로 손꼽히는 오금사철이 어찌될 리가 없었다. 오히려 백리강의 기력만 점차 쇄진해 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두 눈을 보라. 갈수록 그의 눈빛은 이글이글 화롯불처럼 타오르고 있지 않은가? 더 이상 짙어질 수 없을 만큼 눈빛이 시뻘겋게 물들었을 때, "헉…… 헉……" 백리강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철문에서 물러섰다. 하나 그의 두 눈은 무섭게 철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한데 문득, "그렇지!" 백리강은 무엇이 생각난 듯 기광을 빛냈다. 동시에 석실 한 구석을 향해 비쾌한 몸놀림으로 쏘아갔다. 그곳에는 맑은 물이 고여있는 작은 물웅덩이가 있었다. 백리강은 이곳에 있는 십 수 년 간 이 물을 마시며 살아 왔다. "……!" 백리강은 이채어린 눈빛으로 잠시 웅덩이를 응시했다. "이 물은 지난 이십 년 동안 한 번도 불거나 줄어든 적이 없었다." 서서히, 흥분된 기색이 그의 무심하던 얼굴을 뒤덮었다. "또한…… 이 물은 잠시도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지 않고 늘 움직이고 있었지." 과연 웅덩이 속의 물은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며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물은 어디선가 끊임없이 스며들어 오고 있다는 결론인데……!" 미세히 떨리는 음성 끝에 백리강은 번뜩 눈빛을 뿌렸다. "수맥(水脈)! 그렇다. 이곳의 지하를 통과하는 수맥이 있음이 분명하다." 그의 얼굴은 은은한 기대감에 물들었다. "확률은 희박하지만…… 시험해 봐야겠다." 이어 백리강은 웅덩이를 향해 성큼 다가 들었다. 한데 바로 이때였다. 최악----! 갑자기, 물기둥이 치솟으며 웅덩이 속에서 커다란 물체가 튀어 나왔다. 백리강은 돌연한 그 광경에 놀라 뒤로 주춤 물러섰다. 그것은 놀랍게도 사람이었다. 한데 세상에, 이런 인간도 있던가? 도저히 그 이상 불어날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살이 쪄 있었다. 만일 예리한 칼날을 그의 살갗에 갖다 댄다면 펑! 소리와 함께 산산이 터져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디룩디룩 살이 찐 얼굴은 흡사 하나의 살덩어리 같았다. 하나 비계살 틈을 비집고 드러난 두 눈빛은 실로 소름끼쳤다. 괴이하게도 뿌연 막이 서려 있어 마치 시체의 눈을 보고 있는 듯하지 않은가? 그는 등에 하나의 물체를 지고 있었다. "……!" 백리강은 놀라기도 했지만 한편 어이없어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작은 웅덩이에서 어찌 저토록 비대한 인영이 빠져 나왔을까 의아스러웠던 것이다. 더욱이 그 인영은 전혀 물에 젖어 있지도 않았다. 그때 엄청나게 비대한 인물이 성큼 그에게 다가왔다. 아니 굴러 왔다고 하는 표현이 옳으리라. 그는 백리강의 전신을 한차례 훑어본 뒤 빠른 말투로 물었다. "귀하가 신유년생의 백리강…… 맞소?" 백리강은 너무도 갑작스런 상황에 부지중 고개를 끄덕였다. "그…… 렇소." 순간 비대한 인물이 돌연 그 앞에 부복했다. "속하…… 만노(慢奴)가 소종(小宗)께 인사 드립니다." 아아…… 만노! 그는 분명 만노라 했다. 지상에서 가장 느린 사나이 만노, 그가 바로 만노란 말인가? 하나 백리강이 그를 알 리 없었다. "당신은……?" 그는 안면 가득 의혹을 떠올린 채 만노를 응시했다. 그때,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소종!" 번쩍! 환상이 아니었을까? 그야말로 빛살처럼 만노의 신형이 폭사했다. 지상에서 가장 느리다던 자가 어찌 그토록 빠를 수 있는지…… 순간 백리강은 본능적으로 쌍장을 들어 올렸다. "이 무슨 짓……" 하나 채 말이 이어지기도 전 백리강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어느새 만노가 그의 마혈(麻穴)을 제압해 버린 것이다. 실로 번갯불에 콩구워 먹듯 삽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만노는 백리강을 옆구리에 끼며 등에 지고있던 물체를 떨어뜨렸다. 쿵! 그것은 백리강 또래의 제법 준수하게 생긴 청년이었다. 그는 혼절한 듯 두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만노는 곧 청년을 일으켜 앉힌 뒤 따귀를 후려 갈겼다. 철썩! "……" 청년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그 순간 만노는 청년의 정수리를 갈고리처럼 움켜 쥐었다. 청년은 극도로 당황하여 더듬거리며 물었다. "누…… 누구……?" 만노의 음성이 그의 말 허리를 끊었다. "너는 누구냐?" 이 돌연한 물음에 청년은 어리둥절 해지고 말았다. "나…… 나 말이오?" "그래, 너……" "나…… 나는……" 찰나, 번뜩……! 만노의 두 눈에 진저리쳐지도록 사악한 사기(邪氣)가 떠올랐다. 동시에 음산하게 변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가르쳐 주마. 너는 백리강…… 신유년생이다." "……" 만노를 바라보던 청년은 벼락을 맞은 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어 넋나간 음성으로 나직하게 말했다. "백…… 백리강……?" "그렇다. 너는 백리강…… 신유년생이다…… 백리강…… 신유년생……" 만노는 주문을 외우듯 한동안 그 말만을 되풀이 했다. 그러자 청년은 멍하니 있더니 꿈을 꾸듯 몽롱하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맞아…… 내 이름은 백리강…… 신유년에 태어났어……" 만노는 흡족한 미소를 띄우며 청년의 정수리에서 손을 거두었다. "후후…… 그래…… 그러면 되는 거야. 이제 저 철문 앞에 가 있도록 해라." "……" 청년은 부시시 몸을 일으키더니 홀린 듯 철문 쪽으로 걸어갔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날 뻔했다. 이것으로 마교(魔敎)의 염원은 해결된 셈인가?" 만노는 의미심장한 괴소를 흘리고 있었다. "흐흐흐…… 금사후…… 네놈은 성혼과 나와의 관계를 몰랐던 것이 생애 최대의 실수가 될 것이다." 그때였다. 쿠르르르릉……! 일순 철문에서 괴이한 진동음이 일었다. "……!" 만노는 흠칫하여 철문을 응시했다. "빨리도 들이 닥쳤군." 다음 순간, 스스슷! 만노와 백리강의 모습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때 오금사철로 된 철문이 점차 붉게 달아 오르고 있었다. 잠시 후, 꽝----! 지하뇌옥을 진동시키는 굉음이 일며 철문이 통째로 폭발했다. 순간, "아----악!" 철문 앞에 있던 청년은 비명을 지르며 날아가고 말았다. 휘! 휘---- 휙! 거의 동시에 열 줄기 인영이 번개처럼 뇌옥 안으로 쏘아 들었다. 바로 사천공과 천살구령이었다. "……!" 사천공은 청년을 발견하고 순식간에 그에게로 다가갔다. "으…… 으……" 청년은 온 몸에 오금사철의 파편이 박힌 채 신음하고 있었다. 사천공의 입술이 냉막하게 열렸다. "네가 백리용청의 아들이냐?" 청년의 피투성이 몸이 크게 경련했다. "나…… 나는……" 사천공은 재차 말했다. "네놈이 백리용청의 아들이냐고 물었다." "나…… 나는 백리강……" "생년(生年)은……?" "신…… 유년…… 생……" 사천공의 입가에 사악한 웃음이 피어 올랐다. "드디어 찾았군." 동시에 그는 청년의 앞가슴 옷자락을 찢었다. 순간 청년의 가슴에 세 개의 붉은 점이 드러났다. "삼태혈성(三太血星)……!" 나직하게 부르짖은 사천공은 이어 음유한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이젠 죽어도 된다." 찰나, 우두둑……! "악----!" 소름끼치는 음향과 함께 청년의 자지러지는 비명이 터졌다. 그리곤 눈뜨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경이 벌어졌다. 사천공이 한쪽 발로 청년의 가슴을 사정없이 밟아버린 것이다. 청년은 무참히 짓뭉개진 피떡이 되어 죽어 버렸다. "크핫핫핫……!" 짙은 피비린내 속에 사천공의 앙천광소가 울려 퍼졌다. 득의에 찬 승리자의 웃음, 그것이었다. 그러다 문득 사천공은 웃음을 멈추고 청년의 시신을 응시했다. (마지막 확인을 위해…… 다시 한 번 천기를 짚어 보자!) 그는 산목을 꺼내기 위해 손을 품속으로 가져갔다. 그때 천살구령 중 한 명이 음침한 음성으로 물었다. "과연 이놈이 백리용청의 아들이 확실할까요?" 순간, 사천공은 백색 눈에 사이한 빛을 떠올리며 품에서 손을 떼었다. 그의 시선이 말을 꺼낸 인물에게 싸늘히 돌려졌다. "나의 능력을 믿지 못하겠단 말이냐?" 움찔! 그 인물은 몸을 떨며 재빨리 고개를 조아렸다. "대…… 대죄를 범했습니다." 사천공의 음사한 음성이 이어졌다. "이놈은 백리용청의 신유년생 아들이 분명하다. 나 사천공은 단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다." "……" "돌아가자." 휙! 휘---- 휙……! 사천공은 이내 천살구령을 이끌고 뇌옥 밖으로 사라졌다. 무릇 인간에게는 자존심이라는 야릇하고도 괴상한 감정이 있게 마련이다. 사천공. 그는 너무도 능력이 뛰어났기에 자신을 너무 믿었다. 그리하여 마지막 확인마저도 그의 자존심에 의해 취소되고 말았다. 이것이 사천공 평생 일대의 실수였으며, 음모(陰謨)의 첫 번째 균열이었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재미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