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 피터슨의 해괴한 주기도(1)
분별과 검증/현대영성비평 2018.12.13 20:58 Posted by 김삼
에귚트 신 '토트'(달신)와 그리스 신 '헤르메스'(해신)의 결합인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 신의 '위에서처럼 아래서도' 제스처1. 이 문구가 피터슨 역 '주기도문'에 쓰였다.
피터슨의 해괴한 주기도(1)
-유진 피터슨 비평2
이른 바 '주기도문' 곧 "주님의 기도"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터이다. 비신자들조차도 어릴 적부터 많이들 들어 알 것이다. [ 이 기도의 이해를 일부 돕기 위한, 필자의 다음 두 글을 참고해 주기 바란다.
요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유진 피터슨에 관한 비평을 시작한 바 있다. 이 두 번째 글은 그의 "나름 성경"인 '더 메시지' 가운데 주기도문 번역에 관한 것이다. 미국 교계 명사들뿐 아니라 수많은 한국의 복음주의 사역자들도 기꺼이(?) 추천하곤 하는 '더 메시지'에 대한 전체적 비평은 광범위하니, 차차 하기로 한다.
우선 단도직입적으로 피터슨의 나름 주기도문을 살펴 보자.
한글 부분은 필자의 (임시)대역이다.
Our Father in heaven,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Reveal who you are:
당신이 누구신지 드러내십시오(계시하소서)
Set the world right;
세계를 바로잡으십시오
Do what's best
최상의 것을 하십시오
, so below
위에서처럼 아래서도.
Keep us alive with three square meals.
세 끼 정식으로 우리를 늘 생존하게 하십시오
Keep us forgiven with you and forgiving others.
당신으로 말미암아 늘 용서받아 남을 용서하게 하십시오
Keep us safe from ourselves and the Devil.
우리 자신들과 마귀로부터 우리를 늘 안전하게 지켜 주십시오
You're in charge!
당신께서 맡아 계십니다(님의 주관이고, 책임입니다)!
You can do anything you want!
당신은 원하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습니다!
You're ablaze in beauty!
님은 아름다움 속에 빛나십니다!
Yes. . .
예, 예, 그렇고말고요
어떤가? 이것이 아버지께 하신 주님의 기도라고 생각하는가? 한 마디로, 피터슨의 주기도는 시건방진 생략과 시건방진 추가의 연속이다. 주제에 대 학자(?)라고 이걸 번역이라고 내놓으면서 최대한 시건방을 떨었다. 이렇게 말하면 피터슨 애호가들은 내게 화를 낼 지도 모르겠다. 정작 예수님의 모범기도를 이런 식으로 옮긴 사람에겐 화를 안 내고 말이다.
피터슨 식 '주기도'를 비롯한 그의 '더 메시지'는 번역이 아닌 번안(飜案)이다. 한자 '안'(案)이 더 격에 맞다고 보지 않는가? 애당초 '책상 안' 자라는 어의처럼 하나의 제시에 가깝다는 말이다. 탁상공론일 수도 있다는..
많은 사람들이 피터슨의 인격을 신망하고 존중한다고들 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십대 아들을 피터슨이 마다 않고 단독 면담해 준 데 대해 엄청난 감격을 하기도 했다. 가히 예수님처럼 존중하고 있었다.
글쎄다. 필자로선, 크리스천이라며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푼다면서, 그 분 면전에서(Ενώπιον Θεού, Coram Deo) 그 분 말씀을 이처럼 경시하는 사람은 드물게 본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낮추는 사람은 혹시 천국에 가더라도 가장 낮은 데 처할 사람이다.
'더 메시지'의 저 기도문을 좀 더 분석해 보자.
어쭙잖은 명령형
당신이 누구신지 드러내십시오(계시하소서)
세계를 바로잡으십시오
최상의 것을 하십시오
위에서처럼 아래서도.
위의 말들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내용이 아니라, 완전히 피터슨의 자작극 대사와도 같다. 그는 당당하게도(?) 하나님께 명령하고 있다. 아마 혹자들은 명령문이 아니라 (문장이 명령문과 비슷한) 기원문일 뿐이라고 할 것이다. 실은 그것이 문제다.
시편 기자들을 비롯한 구약인이 자주 활용한 기원문은 죽음 같은 삶 속에서 하나님께 애절하게 간구한 고백 같은 내용들이다. 그러나 피터슨의 저 문구는 그런 맛이 거의 없다. 왜 그런지 설명해 보자.
당신이 누구신지 드러내십시오(계시하소서)
이 말은 본래의 주기도에 없을 뿐더러 앞뒤를 못 가린, 무지몽매한 말이다. 하나님은 이미 그 분이 누구신지 말씀을 통하여, 그 무엇보다 말씀이신 예수 크리스토를 통하여 충분히 계시하셨다.
더욱이 이 모범기도를 하신 주님 자신이 아버지의 계시를 모두 체현화하신 분이시다. 물론 제자/사도/기자들을 통한 추가적인 계시도 있지만.
만약 주기도를 오늘날의 의식(儀式)기도로 활용하는 우리들 일부처럼 이제 와서 다시 계시하라고 기도한다면, 성경 기록 밖에, 기록을 넘는 특별계시 겸 기록계시를 더 내려 달라는 얘기 밖엔 안 된다.
예수 안에 온전히 계시된 하나님 아버지 밖에 누구의 무엇을 더 계시해 달라는 말인가?!
피터슨의 이 문장은 요한복음서 14'8에 있는 제자 필맆의 요청을 연상시킨다. 이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내가 곧 아버지의 계시이다"로 요약된다(9~11절). 그런데 피터슨은 이 말씀을 못 본 것인가, 성령 받기 전의 필맆보다 더 둔했던 것인가? 왜 주님의 모범기도를 이런 식으로 변개하는가?
세계를 바로잡으십시오
이 역시 알고 보면 주기도에도 없는 말이지만, 보기에 따라 헛갈림을 자아낼 수 있는 '짬뽕' 같은 말이다. 예수님이 정의와 사랑으로 평화통치를 시작하신 먼 미래 이후라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 이 마귀 장난 같은 세상에서(참고: 요한A서2 2'15~17) 이런 기도를 하면, 주권주의적(dominionistic) 발상이다.
지금의 복음시대, 새언약시대, 은혜시대, 성령시대, 교회시대에 하나님이 성도를 내신 것은 장망성(將亡城) 같은 세상을 우리를 통해 바로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과 성령의 권능으로 세상에 소금 치고 초 치고 빛이 되고 모범을 보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으로써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주님 나라는 주님 말씀 그대로 우리 가운데, 우리의 심령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 정치인들을 통해 세상을 바로잡는 것은 과거 신정시대라면 혹 모를까, 신약성경엔 없는 내용이다. 구약 때도 비록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시긴 했어도 지도자와 백성들이 끝끝내 제대로 듣지 않아, 하나님의 백성이 수없는 외침(外侵)을 당하던 끝에 한 동안 포로기와 역대 제치(帝治)를 겪기까지 했다. 그래서 마침내 메시아를 보내셨다.
지금 종교국인 바티칸이 세상을 좌지우지 한다지만, 그건 의로써 바로잡혀진 세상이 아니다. 그리고 이 세상 더 나아가 하늘과 땅은 반드시 망하도록 예정돼 있다(페트로B3 3'10,12).
최상의 것을 하십시오 위에서처럼 아래서도
이 대목은 피터슨의 '주기도' 가운데 가장 심각한 부분이다. '위에서처럼 아래서도(as above so below)'는 세상에서도 널리 알려진 악명 높은 오컬팈(occultic) 문구이기 때문이다. 어둠의 세계에서 주로 쓰이는 문구다. 피터슨은 이 오컬트 문구를 어디서 따 왔을까? 단순한 펌글? 오컬트 성격을 미처 몰라서였을까, 알고도 썼을까? 어느 쪽이든 시건방짐과 황당함을 면할 순 없다.
'최상의 것을 하십시오'라는 말도 원 주기도엔 전혀 없는 말이다. 주기도 가운데 어느 부분을 풀어 쓴 것인지 이해가 안 된다. 그래서 번안이라는 것이다.
'위에서처럼 아래서도'는 피터슨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대신 삽입한 문구이다. 얼핏 그럴 듯해 뵈는가? 그러나 뉴에이지 세계에서 흔히 쓰이는 이 문구는 심지어 타로 카드에도 나오고, 루키페르4의 한 이미지인 양성신, '바포맽'의 제스처와 그 잠재적 어의이기도 하다. 또한 비밀집단 사람들을 비롯한 수많은 오컬티스트들이 자주 써온 말이다. 일종의 마교인 위칸, 마녀들, 사탄숭배자 등도 이 문구를 쓴다. 파리 지하의 카타콤을 배경으로 한, 좐 에맄 다우들 감독의 악령공포영화도 같은 제목을 갖고 있다.
타로의 마술사 카드
조지워싱턴메이슨기념관(GWMM)에 있는 워싱턴 상과 전통적인 바포멭 그림5, 이 그림에 기초한 사탄숭배자들의 사탄상 등이 모두 '위에서처럼..'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 위 그림은 같은 원리의 '슐로모' 육각별 그림.
피터슨이 주기도에서 이 문구를 쓰자 아마도 그들은 '후레이!', '후라!'(만세, 만만세)를 부르고, "아주 잘 하네~!" 하면서 반겼을 법 하지 않은가?
이쯤 되면, 당연히 "도대체 피터슨의 정체가 뭐길래???" 하고 궁금해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아닌 게 아니라, 피터슨은 그의 나름 성경에서 수많은 오컬팈 용어를 쓰고 있다. "녹색 희망(green hope)"은 '더 메시지'에서 쓰인 또 하나의 뉴에이지/오컬트/비집 용어이다.
중세 연금술에서도 쓰인 이 문구 '위에서처럼 아래서도'는 전설에 따르면, 이집트의 지혜와 마술의 신 '제후티'(ḏḥwtj=djehuti, 또는 토트/Thoth)와 그리스의 헤르메스 신을 결합한 신적 존재인,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3배로 위대한 헤르메스"란 뜻)가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물론 신화적 전설에 불과하다6. 아무튼 여기서 '헤르메틱스'라는 부류의 오컬트 학문이 생겨났다.
이 문구는 실상, 하늘에서 떨어진 타락천사인 사탄이 세상에서처럼 하늘에서도 다스리고 싶은 욕망을 표출한 암시 같은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역시 사탄 나름의 희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내력을 가진 문구를 주기도에 끌어들였다는 것 자체가 피터슨을 참 크리스천 학자라고 하기 어려운 이유이다. (계속)
1.헤르메스는 태양신, 토트는 달신이었다. 고대 미쯔라임(아이귚트) 사람들은 토트를 따오기로 상징했는데, 이는 따오기의 부리가 초승달 모양이었기 때문이다. 또는 초승달을 손에 든 비비(개코원숭이)로 묘사하기도 했다. 수많은 오컬트 삽화에서 태양신과 달신을 겹쳐 놓은 것은 이 때문이다. [본문으로]
2.요일 [본문으로]
3.벧후 [본문으로]
4.또는 루치페르, 영어의 루시퍼. 예샤야후(이사야)서 14'12의 '계명성'에서 왔음. 흔히 오컬트계에서 사탄을 지칭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비밀집단에서는 루치페르가 사탄이 "아니다"고 부정하기도 한다. [본문으로]
5.이 바포멭(Baphomet) 그림은 본래 프랑스 카톨맄 사제보였다가 급진 사회주의/공산주의자였고, 나중 오컬트 사상가 겸 마법사가 된 엘리파스 레비 자에(본명 알퐁스 루이 콩스탄)의 저서 '고 (高) 마법의 원리와 의식'의 삽입화였다. [본문으로]
6.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가 썼다는 상상 속의 '에메랄드 석판에 새겨졌다고 하나, 실은 6~8세기 사이에 쓰여진 아랍어 책에서 발견되어 12세기에 라틴어로 처음 옮겨졌다는 추정이 있어왔다.
유진 피터슨의 해괴한 주기도2
분별과 검증/현대영성비평 2019.01.02 20:36 Posted by 김삼
하루 세 끼 정식을 생존용으로 챙겨 주소서? (사진출처: BBC)
유진 피터슨의 해괴한 '주기도' 2
피터슨 비평 시리즈 3
김삼
[필자와 출처를 있는 그대로 밝히지 않는 한, 허락 없이 글의 일부분도 인용/참조할 수 없습니다.]
유진 피터슨은 그의 나름 '주기도문' 후반부(마태복음서 6'11~13)에서 좀 더 본격적이고도 문학적인 번안을 해 나아간다.
우선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께 요청하는 부분을 "Keep us..."로 시작하는 문장으로 정리해 묶어 놓고 있다. 편리해 보이긴 하나, 번역자 자신의 취향을 따라 취합한 형식이다.
여기서 keep us는 늘/계속/언제나 우리를 여차여차한 상태로 있게 해 달라는 주문성(注文性)과 지속성을 내포한다. 물론 원어엔 없는 말이다.
1. 세 끼 정식으로 우리를 생존해 있게 하십시오?
Keep us alive with three square meals.
세 끼 정식으로 우리를 늘 생존하게 하십시오.
그럴 듯 하나, 역시 한껏 의역한 느낌이다.
이 부분의 그리스 원어는 다음과 같다.
Τὸν ἄρτον ἡμῶν τὸν ἐπιούσιον δὸς ἡμῖν σήμερον1
직역하면..
"오늘 우리의 하루치 빵2을 우리에게 주소서."
이 두 번역문을 비교해 보라.
오늘 우리의 하루치 빵(단수)을 우리에게 주소서.
세 끼 정식으로 우리를 늘 생존해 있게 하십시오.
차이를 느끼는가? 원어에는 세 끼 개념이 없다. 더 나아가, 생존은 하나님께 내맡기고 지내는 게 크리스천의 삶이다.
물론 성경엔 우리와 같은 세 끼를 암시하는 대목이 있긴 하다. 예를 들면 판관기(사사기) 19'5, 잠언 35'11, 요한복음서 21'9~15, 루카복음 11'37, 14'12 등이다. 그러나 유대 개념으로는 세 끼를 다 먹어야 하루치 양식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본인이 먹는대로다. 금식을 자주 했기 때문이다.
또 원어의 빵도 단수로 돼 있고 '빵 세 덩이'로 돼 있지 않아, 빵 하나로 하루를 견디는 수도 있다는 느낌이다.
그런데 유진 피터슨은 'three square meals'라는 꽤 strict한 개념의 끼니란 용어를 쓰고 있다. 더구나 생존 지속을 위해서 그렇게 부탁드리고 있다. 이것은 날마다 세 끼니를 먹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식의, 순전히 육적인 의미가 되고 만다. 즉 "하루 세 끼 정식을 제때 제때 필수 생존용 식사로 챙겨 주소서(?)"라는 기도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왜 주님이 말씀하신 원문엔 세 끼 개념이 없을까? 그것은 이 기도의 이 요청에 몸의 양식뿐 아니라, 영적인 양식의 의미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미, 광야에서 금식하시던 중 마귀가 나타나 돌을 가리키며 빵을 해 먹으라고 하는 유혹에 대하여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선언하셨다. 그래서 말씀으로 사는 신자는 장기간 금식도 가능하다.
더욱이 주님은 자신을 생명의 양식, 곧 생명을 위한 빵으로 소개하셨다(요복 6'35). "하나님의 양식은 하늘에서 내려와 생명을 주는 그"라고 말씀하셨다(요복 6'33). 또한 "썩어 없어지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때까지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며 "그것이 내가 너희에게 줄 양식이다."라고 하셨다.
우연치 않게도 그 분이 태어나신 곳의 장소명도 벹을레헴3 곧 '빵집'이었다. 그러므로 이 기도가 몸을 위한 양식만 구하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피터슨은 이런 영적인 생명양식을 아랑곳 하지 않는 듯(?), 단지 하루 세 끼니의 정식을 주셔야 인간 생존이 가능하다고 선언하다시피 하고 있다. 정말 피터슨은 하루 세 끼니의 정식이 인간 생존에 필수라고 생각했을까? 이른 바 '서바이벌 게임'에 나선 사람들조차 아연해 할 소리다. 지상에는 하루 두 끼, 아니 한 끼만 먹고 사는 사람들도 수두룩하다!
[ 하기야 하루 세 끼는 보다 더 성경적인 연원이 있는 것으로 보이긴 한다. 식품역사학자 캐럴라인 옐덤에 따르면, 고대 로마인들은 점심 때쯤 먹는 하루 한 끼가 더 건강한 식사라고 생각했단다. 중세 때는 아침 미사 전엔 대체로 아무 것도 먹을 수 없었기 때문에, "금식을 깬다"는 뜻의 조반(breakfast)이란 영어 용어가 생겨났다. 산업혁명 이후엔 하루 세 때 배고픈 근로자가 많아져 모든 것이 달라졌지만. ]
피터슨이 쓴 three square meals라는 용어를 분석해 보자. 'square(정사각형, 정방형)'란 말은 여기서 약간 구식의, 구어체(colloquialism)에 해당한다. square의 해석은 세 가지로 가능하다.
우선 첫째로, 실질적인, 적절한, 균형잡힌, 제대로 된, 올바른, 진정한, 진짜의, 정식(공식)의, 만족스러운...등의 의미로 쓰인다. 즉 90도 직각 앵글과 같은 딱 부러진 뭔가를 요구한다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square meals라면, 제 때에 먹는, 질 좋고 영양 좋고 분량이 충분한, 바람직한 식사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과연 우리 주님이 아버지 하나님께 그런 식의 요청을 드린 적이 있었을까?
Square의 두 번째 가능한 해석은 4자에 직결된 개념이다. 음식엔 4가지 그룹이 있다. 즉 육식/어식, 낙농/난식(卵食), 야채/청과, 곡물/전분식 등이다. 이 네 가지가 고루 포함된 식사가 square meals이라는 설이다.
또 다른 설은 과거 영국 왕립 해군에서 사용되던 네모난 나무접시에서 유래된 개념으로, 근거는 희박하다.
아무튼 피터슨이 기도문에 삽입한 'three squre meals' 문구는, 매일 3회 제 때 제공되는, 질 좋고 균형잡힌 딱 부러진 정식을 하나님께서 주셔야 한다는 요구처럼 들린다.
이것은 오늘날 수시로 금식하며 순교적 삶을 살아가는 크리스천으로서 할 기도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자녀들, 곧 하늘나라 왕자와 공주들로서 요구해대는, '당근'일 만큼 당연한, 너무나 당차고 야무진 기도여선지 의문이 간다.
2. 당신으로 말미암아 늘 용서받아 남을 용서하게 하십시오.
Keep us forgiven with you and forgiving others.
당신으로 말미암아 늘 용서받아 남을 용서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수시로 죄를 회개하여 아버지께 용서받는 것이 바람직함은 물론이겠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그리스어 원문엔 남의 죄를 용서해 줌을 빚진 것을 탕감해 준다는 어의로 풀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수동적이기보다는 매우 능동적, 적극적인 개념이다.
그러므로 피동적으로 그저 용서를 받고 용서하는 상태를 지속한다는 개념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하나님 앞에 죄 지음은 채무와도 같다. 원문을 보자.
καὶ ἄφες ἡμῖν τὰ ὀφειλήματα ἡμῶν, ὡς καὶ ἡμεῖς ἀφήκαμεν τοῖς ὀφειλέταις ἡμῶν·4
직역: (또) 우리의 채무자(죄 지은 사람)들을 우리가 용서하듯, (아버지께서도) 우리의 채무(죄)를 사(赦)하여 주소서
참고로, 이 부분에 해당하는 세 가지 주요 영문성경 번역문을 모두 나열해 본다.
NIV: 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
KJV: And forgive us our debts, as we forgive our debtors.
NASB: And 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
위의 세 가지 주요 성경이 모두 빚과 채무자라는 원의를 반영했다. 그러나 피터슨의 '더 메시지'는 그러지 않았다. 피터슨은, 죄 빚이라는 개념이 부담스러워서였을까?
3. 우리 자신들과 마귀로부터 우리를 늘 안전하게 지켜 주십시오?
Keep us safe from ourselves and the Devil.
우리 자신들과 마귀로부터 우리를 늘 안전하게 지켜 주십시오.
심한 뒤틀기를 한 대목이다.
우선 원문부터 보자.
Καὶ μὴ εἰσενέγκῃς ἡμᾶς εἰς πειρασμόν Ἀλλὰ ῥῦσαι ἡμᾶς ἀπὸ τοῦ πονηροῦ5
직역: (또한) 우리를 유혹에 빠져들지 말게 (하시고), 오히려 우리를 악에서 건져내소서
원문에는 '우리 자신'이라든지 '마귀'라는 말이 없고, 다만 '유혹'과 '악'이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피터슨은 [유혹=자신], [악=마귀]라는 등식을 사용했다.
유혹이 자신이고, 자신이 곧 유혹인가? 악이 곧 마귀라면, 우리가 짓는 악이 모두 마귀 자체인가? 범주 구분이 애매해진다. 그는 자아를 마귀와 똑같이 경계해야 할 적으로 삼고 있다. 물론 자아는 유혹에 빠져들기 쉬운 에이전트임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경우에 따라) 선한 에이전트일 수도 있다. 따라서 유혹에 빠져들지 어떨지 가능성은 50%씩이다.
세상과 마귀의 모든 유혹을 받으셨어도 단 한 번도 거기 빠져들지 않으신 예수께서는(히브리서 4'15) 그처럼 우리도 유혹에 빠져들지 말게 해 달라고, 의지를 선하게 사용하도록 아버지께서 도와주시라고 긍정적으로 기도모범을 보이셨다.
그런데 피터슨은 자기식의 이 '기도문' 속에서, 유혹에 대처하여 그것을 이기려 하기보다는 일단 자아를 마귀와 다름없는 적으로 보고, 단지 그 적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 달라고 한다. 이것은 역시 보다 피동적이며, 의지의 활용과 단련에 소극적인 입장이다.
파격적이라기보다는 주님의 모범기도의 형편 없는 오역이자 왜곡이다. 왜 피터슨이 이런 악역(惡譯)으로 악역(惡役)을 자처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야말로 아리송하다.
이하 부분
피터슨의 '주기도문' 이하 대목은 정말 그 나름의 준(準, quasi)기도로서, 성경에 없는 부분이다. 만약 주기도 끝 부분을 번안했다면, 원 재료야 어떻든 완전히 엿장수 식으로, 피터슨 조리사 마음대로 풀고 적당히 주물러 내놓은 희한한 '요리'와도 같다. 점입가경이다.
주기도 끝 부분은 (주요 후대 사본에 따라) "나라와 권능(또는 권세)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라는 송영인데, 피터슨은 이 부분이 없는 고대 사본에 딱히 충실한 것도 아니고, 사실상 후대 사본 문구 대신 거의 자신의 작문으로 대체한 모양새다. 가관이다.
You're in charge!
You can do anything you want!
You're ablaze in beauty!
Yes. . .
4. 당신께서 도맡아 계십니다(님의 주관이고, 책임입니다)?
You're in charge!
당신께서 도맡아 계십니다(님의 주관이고, 책임입니다)!
원문의 "님의 나라가 영원합니다" 대신 이 문구를 썼다.
주기도를 번역했다기보다 자신의 칼뱅주의 신앙을 현대어로 바꿔 표현한 듯하다. 그런데 이건 옛 신정시대(theocracy)나 주권주의에서는 통할 법한 말이다. 우리가 성령을 모시면서 내 마음 속 보좌를 그 분께 내어드리고 그 분에게 내 삶을 맡겨드리지만, 그 분의 전적인 통치 여부는 그 분에게 복종하려는 내 의지에 달려 있다. 안 그랬다면 왜 아담과 하와가 그토록 빨리 타락했겠는가? 그 둘은 얼마나 쉽게 마귀의 말에 홀라당 넘어가버렸는가!
어찌 보면, 기도말인즉슨 이렇게 해 놓고, 실제로는 내가 내 의지로 마음대로 일을 벌여 놓고 책임은 하나님께 떠맡기고 전가할 수도 있는, 그런 기도문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사제 앞에서 오늘 지을 죄까지 대강 적당히 '고백성사' 해 놓고 그 죄를 되풀이하는 일부 천주교도들처럼.
5. 당신은 원하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습니다!
You can do anything you want!
당신은 원하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습니다!
후대 사본의 "님의 권세(또는 권능6)도 영원합니다"에 해당하는 부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니까 응당 그렇겠지만, 문장이 가볍다 못해 자칫 경망스럽기까지 하다. 마치 뭔가를 잔뜩 제공해 놓고 당신 맘대로 해도 된다고 오퍼하는 듯한 느낌은 필자만의 것인가.
역시 '주권주의'스럽다. 아무튼, 하나님은 그 분이 지으신 우리의 의지를 무시하고 마구 행하시진 않는다.
6. 님은 아름다움 속에 빛나십니다?
You're ablaze in beauty!
님은 아름다움 속에 빛나십니다!
후대 사본 원문의 "님의 영광도 영원합니다"에 해당한다. "님은 아름다움에 충일해 계십니다" 정도로 풀이된다.
서술적인 형용사인 'ablaze'란 단어의 한 가지 뜻은, 요새 우리네의 흔한 유행어 '격한/격하게' 정도에 해당한다. "님은 격하게 아름다우십니다" 식의 어투라고 보면 된다. 그밖에도 ablaze는 "활활 (불)타올라, 흥분하여, 번쩍이어.." 등의 어의를 갖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남성인 자신이 찬탄해 마지 않는 미모의 여성에게도 저런 표현이 쓰이곤 한다. 상황에 따라 천한 세속시로 느껴질 수도 있는 문장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이 빛과 아름다움으로만 끝나는 개념인가? 하나님의 영광은 빛과 구름과 보좌 및 보좌 주변의 거룩한 무지개, 음성과 이름, 영예...등으로 표현된다. 딱 부러지게 한 가지 개념으로 몰아넣을 수 없다.
더구나 성경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란 말이 거의 없다. 우리 말 성경(개역/개정)에 유일하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예샤야후=이사야 35'2)이라고 옮겨진 부분도 대다수의 다른 성경엔 'beauty'로 하지 않았다. 대신 "장엄함, 찬란함, 뛰어남, 탁월함.." 등으로 번역됐다. 하나님의 영광은 미(美)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7. 예, 예, 아무렴요?
Yes. . .
예, 예, 그렇고말고요!
피터슨이 전통 주기도(후대 사본) 끝의 '아멘'을 대체해 놓은 부분이다.
가장 문제시되는 부분의 하나다. 왜 문제냐고? 아멘은 "진실/충성"과도 같은 말이며, "이상(以上)은 참으로 그렇습니다"라는 엄숙한 신앙적 동의가 내포돼 있다.
그러나 피터슨은 기도문을 완결짓는 지엄하고도 진실해야 할 문구라기엔 너무나 경박하고 통속적으로 풀어 썼다. 아멘이 예스에 가깝다면, 왜 세 번이나 늘어놓는 것인가?
더구나 "You are ablaze in beauty." 해 놓곤 곧 이어서 Yes. . yes.라고 했기 때문에 더 그렇다. 이 끝 부분만 놓고 본다면, 풀이에 따라 "님은 정말 황홀하게 아름답네요~! 오 예~, 정말 그래요!" 정도로 들릴 수도 있는 투의 말이다.
KJV 유일주의자인 힌턴 박사는 "예스, 예스, 예스" 문구를 할리우드가 영화 속의 성적인 상황을 통해 폭넓게 유행시킨 "성행위에 대한 야한 언급"이라고 빗대고, "(피터슨이) 이를 모를 리 없다"고 질타하기도 했다.
힌턴은 또 이 '피터슨 주기도'의 끝 부분이 마치 여신에게 찬사를 던지며 경배하는 듯하다고 투덜댔다.
'피터슨 주기도'에 대한 결론
유진 피터슨 비평 시리즈의 일부로서 그간 다룬 이 '주기도'는 탈 많고 말 많은 그의 '더 메시지' 가운데서도 문제의 핵심의 하나로 보인다. 적어도 필자는, 주기도에 대한 피터슨의 접근 태도만 보아도 '더 메시지' 전체의 영적 그림이 그려진다.
독자의 소감이야 잘 모르지만, 나의 결론은 하늘에서 내려진 메시지로 받을 지엄한 성경 말씀이기보다 황당한 '신독(神瀆/blasphemy)'에 더 가깝다는 느낌이다.
아무튼 '더 메시지'와 피터슨에 대한 비평은 이 새해에도 계속될 터이다. 그러나 집필 때마다 피터슨만 붙들고 있겠다는 뜻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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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톤 아르톤 헤몬 톤 에퓨시온 도스 헤민 세메론 [본문으로]
2.단수이다. [본문으로]
3.בֵּית לֶחֶם 앞(오른쪽) 낱말은 '벹'(집),뒷 낱말(왼쪽)이 '레헴'(빵). [본문으로]
4.카이 아페스 헤민 타 오페일레마타 헤몬 호스 카이 헤메이스 아페카멘 토이스 오페일레타이스 헤몬 [본문으로]
5.카이 메 에이세넹케스 헤마스 에이스 페이라스몬 알라 ㅎ뤼사이, 헤마스 아포 투 포네루 [본문으로]
6.권세든 권능이든, 개념은 각각 제한된 느낌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