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따라 그림따라 Ⅲ』
- ▣워터하우스▣몬드리안▣고흐▣드 몽벨▣루소▣로흐너▣들라크루아▣하머스호이▣호베마▣루트비히 카텔▣하틀리▣호머▣사전트▣로비스 코린트▣그랜트 우드▣레비탄▣뭉크
『발길따라 그림따라』 Ⅲ https://blog.naver.com/ohyh45/222481588454
41.윌리엄 워터하우스-데카메론 이야기, 42.몬드리안-베스트카펠르의 등대, 43.고흐-감자 먹는 사람들,
44.베르나르 부테 드 몽벨-느무르의 기숙학생들, 45.앙리 루소-사자의 식사, 46.슈테판 로흐너-장미 덩굴의 성모,
47.들라크루아-미솔롱기 폐허 위의 그리스, 48.빌헬름 하머스호이-스트란드가드의 실내, 마루에 비치는 햇빛,
49.메인더르트 호베마-미델하르니스의 가로수 길, 50.프란츠 루트비히 카텔-과일장수와 나폴리만, 51.마스든 하틀리-등대,
52.고흐-폭풍우 이는 날, 스헤베닝언 해변, 53.윈즐로 호머-생명줄, 54.존 싱어 사전트-지붕 위의 카르리 소녀,
55.카스파어 볼프-로어 그린덴발트 빙하, 56.로비스 코린트-동물원에 있는 카를 하겐베크, 57.그랜트 우드-아메리칸 고딕,
58.빈센트 반 고흐-붉은 포도밭, 59.이사크 레비탄-황금빛 가을, 60.에드바르 뭉크-절규,
41.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데카메론 이야기』 (1916년) - 흑사병 시대의 문학
▲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데카메론 이야기’, 1916년, 101×159㎝, 레이디 레버 아트 갤러리, 영국 포트 선라이트
14세기 중국에서 발생한 흑사병은 1347년 시칠리아에 상륙한 후 빠르게 유럽 대륙을 휩쓸었다. 피렌체는 1348년 흑사병이 퍼져 번성하던 도시가 순식간에 초토화됐다.
이곳에 살았던 보카치오는 훗날 ‘데카메론’의 서두에서 가래톳이 솟고 반점이 퍼진 지 사나흘 만에 죽음에 이르는 이 병을 묘사한다. 손쓸 새도 없이 목숨을 앗아가는 병보다 무서운 것은 사람들 사이에 만연한 불신과 도덕적 불감증이었다. 보카치오는 사람들이 서로 믿지 못하고, 자식의 죽음에조차 둔감하게 된 세태를 탄식한다.
하지만 이 처참한 경험은 ‘데카메론’이라는 불멸의 문학작품을 쓰는 계기가 됐다. 열 명의 젊은 남녀가 흑사병을 피해 시골로 피신한다. 이들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매일 저녁 각자 재미난 얘기 한 가지씩을 한다는 구조 속에 백 편의 짧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참가자들은 돌아가면서 모임을 이끌고 그날 얘기할 주제를 제시한다. 행운의 힘, 의지력의 힘, 비극적 사랑, 행복한 사랑 등 다양한 주제에 따라 애틋하고 웃기고 야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이야기는 사업차 여행하는 상인을 따라가고 높은 성과 여염집, 수도원과 교회를 들여다보며 성직자의 탐욕과 타락을 비웃고 귀족 계층의 답답함을 질타한다. 즉흥적 기지, 영리한 처세술, 지식 같은 상업적ㆍ도시적 가치들은 옹호되는 반면 우둔함, 무지함은 조롱과 응징의 대상이 된다.
지대를 경제적 기반으로 하고 신앙과 충성심에 의해 유지되는 봉건사회 속에서 화폐경제를 바탕으로 떠오르는 도시 상인계층의 자신감을 볼 수 있다. 보카치오는 독자를 가르치거나 교훈을 제시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믿고 따라온 방식을 비웃을 뿐이다. 맹목적 신앙은 특히 작품 전체를 통해 놀림감이 된다.
영국 라파엘전파 화가 워터하우스는 ‘데카메론’에 착안해 이 그림을 그렸다. 이야기하는 남성과 둘러앉은 청중이 묘사돼 있다.
뒤쪽에는 한 쌍의 남녀가 거닐고 있다. 우아한 복장과 악기가 품격 있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오렌지 나무가 우거지고 수반이 놓인 이탈리아식 정원은 엄혹한 흑사병 시대보다 낙원을 연상시킨다. 등장인물이 모두 아홉이다. 한 사람은 어디 숨었나?
[출처] : 이미혜 미술평론가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 41.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데카메론 이야기』 (1916년) - 흑사병 시대의 문학 / 서울신문 , 2020.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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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작품세계 Ⅰ』 https://blog.naver.com/ohyh45/20147289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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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피에트 몬드리안, 『베스트카펠르의 등대』 (1910년) - 특징없는 남자
▲ 피트 몬드리안, ‘베스트카펠르의 등대’, 1910년, 캔버스에 유채, 39×29㎝, 무세오 델 노베첸토, 이탈리아 밀라노
이 그림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몬드리안, ‘빨강, 노랑, 파랑의 컴포지션’이라든가 ‘브로드웨이 부기우기’와는 전혀 다르다. 우뚝 솟은 등대가 화면 가득하다. 등대에 부딪힌 햇빛이 오렌지색 점으로 튀어 오른다. 바다와 하늘은 경계가 사라진 채 반짝이는 푸른 점으로 뒤덮여 있다.
베스트카펠르는 네덜란드 젤란트의 해안마을이다. 몬드리안이 그린 등대는 교회 부속 건물이었던 15세기 석조 탑을 19세기에 개조한 것이다. 지금도 52m에 달하는 등대가 작은 마을을 압도하듯 굽어보고 있다.
몬드리안은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자주 병치레를 했고 초등학교 교장이었던 아버지는 광신적인 기독교 신앙에 빠져 있었다. 여덟 살밖에 안 된 누나가 동생들을 건사하고 살림을 꾸렸다. 가정에 무책임했던 아버지의 공적이라고는 아들을 그림으로 인도한 것뿐이었다.
몬드리안은 급진적 신앙에 빠진 내성적인 젊은이로 성장했다. 아방가르드 미술의 혁신성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서른 살이 넘자 몬드리안은 미술애호가의 마음에 드는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북해 연안의 시골 마을을 다니면서 풍차, 등대, 모래언덕 같은 네덜란드 미술의 전통적인 소재를 묘사했다. 표현주의와 점묘파에 한 발씩 걸친 이 시기의 그림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1909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의 죽음은 몬드리안의 마음에 그늘을 드리웠다. 1910년쯤을 끝으로 그의 작품에서는 경쾌하고 화려한 울림이 사라졌다. 어렵게 얻은 대중의 지지도 사라졌다.
1911년 마흔 살 생일을 앞두고 몬드리안은 파리로 떠났다. 큐비즘이 파리 화단을 뒤흔들고 있었다. 하지만 큐비즘 화가들은 순수추상 직전에서 멈춰 섰다. 그 뒤의 무한한 심연이 두려웠을까. 몬드리안은 그 문턱을 넘어 미지의 영역으로 뛰어들었다.
파리 시대부터 그는 아버지가 지어준 긴 이름을 버리고 피트라고 서명했다. 불행했던 과거의 흔적도 없앴다. 그리하여 독신으로 살며 학문을 연구하듯이 그림을 그리고 이론서를 집필했던 몬드리안만이 일체의 감정이 배제된 그림과 함께 남았다.
[출처] : 이미혜 미술평론가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 42.피트 몬드리안, 『베스트카펠르의 등대』 (1910년) - 특징없는 남자 / 서울신문 , 2020.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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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빈센트 반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1885년) -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
▲ 빈센트 반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1885년, 82㎝×114㎝, 반 고흐 미술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감자는 16세기 후반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럽으로 유입됐다. 사람들은 이 못생긴 덩어리를 ‘악마의 사과’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1770년대 이상 저온으로 밀의 수확량이 감소하고 기근이 심각해지자 감자는 비로소 식품으로 받아들여졌다. 밍밍하고 텁텁한 감자를 먹어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은 불만이 높았다. “이런 건 개도 안 먹을 거다.”
하지만 감자는 점점 없어서는 안 될 작물이 됐다. 같은 면적의 땅에 감자를 심으면 밀을 심었을 때보다 두 배나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었다. 전쟁도 감자 재배를 확산시켰다. 군대가 농작물을 징발해도 땅속에 묻힌 감자는 안전했다.
빈센트 반 고흐는 고향인 네덜란드 누에넨에서 습작에 몰두하던 시기에 이 그림을 그렸다. 농부들이 저녁 식사를 하고 있다. 먹을 것이라곤 접시에 수북이 쌓인 감자와 정체가 불분명한 검은 음료뿐이다. 커피 또는 커피 대용으로 마셨던 치커리 차일 것이다.
매달려 있는 등불에 농민들의 거친 얼굴과 마디 굵은 손이 도드라져 보인다. 방구석과 천장은 어둠 속에 잠겨 있다. 통상적인 아름다움은 없지만 하루 일을 마치고 식탁에 앉은 사람들의 모습에는 경건함이 떠돈다.
반 고흐는 사람들 얼굴을 살구색으로 마무리했다가 곧 후회하고 ‘더러운 감자 색’으로 다시 칠했다. 그에게는 해부학적인 정확성이나 기술적 완성도보다 그림이 갖는 진실성이 중요했다. 그는 농민화를 매끄럽고 보기 좋게 그리는 것은 잘못이며, 농민화에는 거름과 비료가 쌓인 마구간 냄새, 허리가 휘도록 일하는 농민들의 땀방울이 배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반 고흐는 자신의 그림에 대해 자못 만족했으나 이 그림을 본 동생 테오와 몇몇 사람들의 반응은 뜨악했다. 테오는 차마 뭐라고 하지 못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색깔이 너무 칙칙하고 인물 묘사도 조잡하다고 흠을 잡았다.
반 고흐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가 옳았다. 그는 이 그림으로 습작기를 마치고 한 사람의 화가로 탄생했으며 닮고 싶어 하던 농민화가 프랑수아 밀레를 뛰어넘었다. 이 그림을 파리에 있는 테오에게 보낸 뒤 반 고흐는 누에넨을 떴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출처] : 이미혜 미술평론가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 43.빈센트 반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1885년) -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 / 서울신문 , 2020.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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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로 가는 길』 Ⅰ https://blog.naver.com/ohyh45/22091925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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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베르나르 부테 드 몽벨, 『느무르의 기숙학생들』 (1909년) - 여성 공교육 탄생
▲ 베르나르 부테 드 몽벨, ‘느무르의 기숙학생들’, 1909년, 115×260㎝, 포 미술관, 프랑스 포
부테 드 몽벨은 파리와 뉴욕을 오가며 화가, 디자이너, 삽화가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다. 그의 아버지도 화가이자 삽화가로 유명했던 사람이다. 파리 남쪽의 유서 깊은 마을 느무르에 화실을 갖고 있어서 가족이 그곳에 종종 머물렀다. 부테 드 몽벨의 그림에는 어릴 때부터 친숙한 장소인 느무르가 종종 등장한다.
이른 봄 기숙학생들이 산책을 나왔다. 모자부터 구두까지 검정 일색인 소녀들이 키순으로 열을 지어 걸어간다. 앞쪽 소녀들은 짧은 치마를 입었는데 맨 뒷줄의 두 소녀만 긴 치마를 입었다. 짧은 치마를 입기에는 거북한 나이가 된 소녀들이다. 그 뒤에는 특이한 모양의 흰 모자를 쓴 수녀가 따라가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16세기에 수녀원이 여성 교육에 뛰어든 이래 20세기 초까지도 많은 여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수녀원이 운영하는 기숙학교는 흔히 고아원을 겸했다. 이 느무르의 기숙학교도 그런 곳이었다. 고아 중 일부는 상급생이 되면 하급생을 가르치는 조교 일을 하다가 사회로 나갔다. 사회는 그런 여성들을 반 하인인 가정교사로 흡수했다. 이 그림에서 긴 치마를 입은 두 소녀가 그런 상급생들이다.
1882년 제정된 쥘 페리 법은 세계 여러 나라의 모델이 된 공교육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무상교육, 의무교육, 종교와 분리된 교육이라는 세 원칙이 그것이다. 이 중 무상교육과 의무교육은 재원 마련이 문제였지 이념적으로는 별 토를 달지 않고 받아들여졌다. 가장 실행이 어려웠던 것은 종교와 교육의 분리였다.
특히 여학교에서는 종교의 입김이 너무 강했다. 수녀원이 운영하는데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공화파 정치가들은 “프랑스는 수도원이 아니다. 여성들은 수녀가 되려고 태어난 게 아니다”라고 목청을 높였지만 소용없었다.
1905년 프랑스 정부는 가톨릭의 반발, 교황청과의 마찰을 무릅쓰고 ‘국가·교회 분리법’을 제정했다. 국가와 종교의 분리라는 프랑스 대혁명의 이념을 완수하는 데 한 세기 이상이 걸린 것이다. 이 법으로 수녀원이 운영해 온 여학교들은 문을 닫았고, 종교와 분리된 교육이라는 공교육의 목표에 성큼 다가섰다.
종교계와 보수 인사들은 이 법에 극렬히 반대했다. 프랑스는 거의 두 쪽이 날 지경에 이르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서야 국가적 위기 앞에 이념 대결이 중단됐다.
프랑스는 1924년 여학생에게 대학입학 자격시험을 개방했다. 1969년에는 초등학교에서, 1975년에는 중등학교에서 남녀공학이 의무화됐다. 이로써 남녀가 동등한 조건에서 교육을 받게 됐다.
[출처] : 이미혜 미술평론가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 44.베르나르 부테 드 몽벨, 『느무르의 기숙학생들』 (1909년) - 여성 공교육 탄생 / 서울신문 , 2020. 4. 7.
Bernard Boutet de Monvel» 1926
Bernard Boutet de Monvel, Les Mules noires, huile sur toile, 77 x 114 cm
La Femme de l'Eclusier or L'Eclusière, 1901,Color woodcut, 30.8 × 24.4 cm
Bernard Boutet De Monvel, La Convalescente, 1906.
Femme à une table de jardin (1909) (Woman at a garden table)
Fez, Oriental assis, 1918, huile sur toile, 45 x 40 cm.
Bernard Boutet de Monvel - Portrait de S.A.R le Prince Sixte de Bourbon-Parme (1886-1934), 1921, oil on canvas, 231.5 X 169.5 cm, Musée de l'Armée.
Portrait of Miss Lise Brissaud by Bernard Boutet De Monvel, 1928
Bernard Boutet de Monvel, Autoportrait, place Vendôme, 1932.
Bernard Boutet de Monvel, Self Portrait with a Palette,1932,
Portrait of the Count P. Quinsonas, oil on canvas, 66 x 71 cm,
Portrait of Marcel Laffon, oil on canvas, 65 X 51 cm,
Portraiy De Georges Menir, Avenue Du Boism oil on canvas, 83 X 72.5 cm,
45. 앙리 루소, 『사자의 식사』 (1907년) - 직접 가보지는 않았지만
▲ 앙리 루소, ‘사자의 식사’, 1907년, 44 3/4×63 in,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미국 뉴욕
‘나이브 아트’는 제도권 교육을 받지 못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가리키는 말이다. 20세기 초 독일 비평가이자 수집가인 빌헬름 우데가 루소의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처음 사용했다. 루소는 미술학교에 다니거나 유명 화가에게 개인 교습을 받은 적이 없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중등교육도 끝마치지 못했고, 아버지를 여읜 후에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했다.
그는 파리로 반입되는 주류를 검사하고 세금을 매기는 세관의 하급직을 얻었다. 일과를 마친 후 그림을 그려 마흔두 살 때 처음으로 전시회에 그림을 출품했다. 심사를 거쳐야 하는 살롱전은 엄두도 못 냈고, 회비만 내면 누구라도 작품을 전시하게 해 주는 앙데팡당 전에 참여했다. 여기서도 그의 작품은 비웃음만 샀다.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꾸준히 작품을 냈다.
1891년 폭풍우가 몰아치는 열대 우림 속에서 호랑이가 겁에 질려 있는 장면을 그려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원근법은 엉터리였지만 식물과 호랑이가 너무 실감 나서 사람들은 루소가 열대지방에 가 본 게 틀림없다고 믿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루소는 열대지방에 가 본 일이 없었다.
파리 식물원을 드나들면서 동식물을 관찰하고 엽서며 잡지에 실린 도판을 연구한 게 전부였다. 파리 식물원은 동물원과 자연사 박물관을 갖추고 있어서 큰 도움이 됐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루소의 상상력이었다.
밀림 속에서 사자가 얼룩무늬 치타를 잡아먹고 있다. 무성하게 자란 풀과 나무 때문에 주인공인 사자는 잘 보이지 않는다. 사자는 사람처럼 곧추선 자세로 희생물을 움켜쥐고 있다. 선연한 피가 뿜어나온다. 언덕 위에 해가 있지만, 햇빛은 밀림 속을 비추지 못한다. 수북하게 핀 흰 꽃, 가지가 휘도록 매달린 노란 꽃이 확대경을 갖다 댄 것처럼 크고 정밀하게 그려져 신비함과 이국적 정취를 더해 준다.
루소는 마흔아홉 살에 세관 관리직을 그만두고 전업 화가가 됐다. 몽파르나스에 작은 작업실을 얻어 쥐꼬리만 한 연금으로 생활하며 그림을 그렸다. 사람들은 19세기 풍경화가 테오도르 루소와 구별하기 위해 그에게 ‘세관원 루소’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어린이처럼 단순하면서도 환상적인 그림은 아폴리네르, 피카소 등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출처] : 이미혜 미술평론가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 45. 앙리 루소, 『사자의 식사』 (1907년) - 직접 가보지는 않았지만 / 서울신문 , 2020.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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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루소의 작품세계』 Ⅰ https://blog.naver.com/ohyh45/20175145628
『앙리 루소의 작품세계』 Ⅱ https://blog.naver.com/ohyh45/20175152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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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슈테판 로흐너, 『장미 덩굴의 성모』 (1440~1442) - 격리된 낙원
▲ 슈테판 로흐너, ‘장미 덩굴의 성모’, 1440~1442년, 51×40㎝, 발라프 리하르츠 미술관, 독일 쾰른
성모가 아기 예수를 안고 금실로 수놓은 붉은 장막 아래 앉아 있다. 황갈색 머리, 깨끗한 피부, 얌전하게 내리뜬 눈, 작은 입술은 중세인의 미적 이상을 보여 준다. 뒤에는 장미 덩굴이 버팀대를 타고 올라가 액자 형태를 만들고 있다. 장미 외에도 여러 가지 꽃들이 어우러져 피어 있다. 천사들은 악기를 연주하고 아기 예수에게 과일을 내민다. 아름답고 행복한 장면이다.
중세 회화는 상징으로 가득 차 있다. 흰 장미와 백합, 장신구에 박힌 진주는 성모의 순결함을, 가시 달린 붉은 장미는 예수의 고난을 상징한다. 천사의 날개와 성모의 망토에는 정의와 진리를 상징하는 푸른색이 사용됐다. 그림 속 성모는 늘 담이나 장막으로 둘러쳐진 정원에 앉아 있다. 격리된 공간은 그녀가 오점 없이 태어났음을 의미한다.
파라다이스란 단어는 ‘벽으로 둘러쳐진 곳’을 뜻하는 페르시아어에서 왔다. 전쟁과 질병에 시달렸던 중세 시대에 세상과 격리된 정원은 낙원으로 여겨질 만했다. 중세 로망의 귀부인과 기사는 정원에서 사랑을 속삭인다. ‘신곡’에서 단테가 맨 마지막에 도달하는 천국의 이미지는 정원과 흡사하다.
‘데카메론’에서 흑사병을 피해 피난한 열 명의 선남선녀가 머무는 곳도 격리된 공간이다. 수목에 가려져 길에서 보이지 않고 풀밭 가운데 맑은 샘이 있는 정원이다. 지옥은 그 반대로 춥고, 냄새나고, 더럽고, 벌레가 들끓고, 어두운 곳이다.
닫힌 정원은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을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몇 달 동안 ‘안전한’ 집에 머물고 ‘위험한’ 바깥세상에 나가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코로나19는 자신과 타인을 보호하기 위해 격리된 삶을 살라고 요구한다. 바깥세상은 왜 위험해졌나. 인간은 오랫동안 자신의 욕망과 이익을 위해 자연을 약탈하고 길들이려 해 왔다.
신종 전염병은 자연에 대한 우리의 접근법이 변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인간은 자연의 지배자가 아니라 그 일부분일 따름이다. 격리된 아파트가 중세 정원처럼 축복받은 공간일 수는 없다. 문을 빠끔히 열고 밖을 내다본다. 우리가 손잡고 살아가야 할 세상을….
[출처] : 이미혜 미술평론가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 46.슈테판 로흐너, 『장미 덩굴의 성모』 (1440~1442) - 격리된 낙원 / 서울신문 , 2020. 5. 5.
슈테판 로흐너의 최후의 심판, 1435,
Stefan Lochner Mzdonna Rose Bower, 1440~1442,Wallraf Richartz Museum Cologne
47.들라크루아, 『미솔롱기 폐허 위의 그리스』 (1826) - 정치와 예술의 만남
들라크루아, '미솔롱기 폐허 위의 그리스, 1826, 213 X 142 cm, 보르도미술관, 프랑스 보르도
한 여인이 절망적으로 팔을 벌리고 있다. 발아래 돌에는 핏자국이 선연하고, 돌 틈으로는 시신이 팔을 내밀고 있다. 뒤편에는 이슬람 복장을 한 남자가 거만하게 깃대를 잡고 있다. 이 여인은 현실의 인간이 아니고 그리스를 의인화한 존재다. 그리스의 상징색인 흰색과 푸른색 옷을 입고, 전통 모자를 쓰고 있다. 이 그림은 당대 국제 사회를 겨냥한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리스 반도와 에게해 섬들은 15세기 이래 오토만 제국의 지배를 받아 왔다. 계몽주의와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으로 민족주의가 퍼지면서 그리스에서도 독립운동 조직이 결성됐다. 1821년 봉기가 일어났고, 에게해 섬으로 소요가 번졌다.
유럽은 식민지배에 항거하는 그리스에 주목했다. 작가, 지식인들은 유럽 문화의 뿌리인 그리스를 지원하기 위해 기금 마련에 나섰다. 영국 시인 바이런은 아예 직접 싸우러 나섰다. 코린트 해협 입구의 항구 미솔롱기는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다.
오토만은 이곳을 두 차례 공격했으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물러났다. 두 번째 공격 소식을 들은 바이런은 미솔롱기로 출발했다. 시인은 1824년 1월 5일 이곳에 도착했으나 열병에 걸려 전투에 참가해 보지도 못하고 서른여섯 살의 생을 마쳤다.
다음해 4월 오토만은 세 번째로 이곳을 공략했다. 이번에는 속전속결 대신 항구를 봉쇄하는 전략을 택했다. 봉쇄가 일 년간 지속하자 식량이 바닥났다. 그리스인들은 봉쇄를 뚫기 위해 공격을 감행했으나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1826년 4월 오토만은 미솔롱기를 점령했다. 대량학살이 벌어졌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노예로 팔려갔다. 유럽 지성인들은 그리스가 죽었다고 탄식했다.
들라크루아는 이 그림을 통해 현재 진행 중인 사건에 대해 발언하지만 낡은 알레고리 형식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에게 이 그림은 강한 인상을 주었고 그리스를 동정하는 여론을 더욱 활활 타오르게 했다. 프랑스, 영국, 러시아 등 강대국의 압박을 받은 오토만은 1832년 그리스의 독립을 인정했다.
들라크루아가 살아 돌아온다 해도 이제 이런 그림은 나올 수 없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같은 매체가 등장하기 전, 그림이 효과적인 정치선전물이었던 시대의 산물이다.
[출처] : 이미혜 미술평론가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 47.들라크루아, 『미솔롱기 폐허 위의 그리스』 (1826) - 정치와 예술의 만남 / 서울신문 , 2020.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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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랄크루아의 작품세계] Ⅰ[1821~1835] http://blog.naver.com/ohyh45/20127535869
[들랄크루아의 작품세계] Ⅱ[1836~1849] http://blog.naver.com/ohyh45/20131385436
[들랄크루아의 작품세계] Ⅲ[1850~1860] http://blog.naver.com/ohyh45/20131409323
[들랄크루아의 작품세계] Ⅳ[1861~1863] http://blog.naver.com/ohyh45/220494133939
48.빌헬름 하머스호이, 『스트란드가드의 실내, 마루에 비치는 햇빛』 (1901)
- 그 여자는 거기 없었다
▲ 빌헬름 하머스호이, Interior from Strandgade with Sunlight on the Floor, 1901, oil on canvas, 46.5×52㎝,
Statens Museum for Kunst -Copenhagen
하머스호이는 코펜하겐 스트란드가드 30번지에 십 년 동안 살면서 이 집을 일흔 점 가까이 그렸다. 이 방은 작은 살롱이다. 가운데 창문이 있고 오른쪽에는 흰 문이 있다. 왼쪽 벽에는 액자 두 개가 걸려 있고 그 앞에는 타원형 탁자가 놓여 있다. 탁자 앞에는 검은 옷을 입은 화가의 부인 이다가 앉아 있다.
관객은 이 그림을 보면서 어디에다 중점을 두어야 할지 주저하게 된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여성은 주인공이 되기에는 존재감이 빈약하다. 한쪽에 치우친 데다가 뒷모습이어서 무엇을 하는지, 표정이 어떤지 알 수 없다.
인물보다는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이 더 중요해 보인다. 햇빛은 흰 커튼을 더욱 희게 만들고, 창턱과 바닥에 창살 무늬를 떨구고 있다. 지금은 아침나절일까 늦은 오후일까. 이 고요한 방안에서는 시간조차 정지된 것 같다.
하머스호이는 서구 예술이 급격한 변화를 겪던 세기 전환기에 활동했다. 야수파, 표현주의가 등장하면서 원색이 폭발했으나 하머스호이는 흰색, 회색, 검정, 갈색으로 이루어진 모노톤에 가까운 그림을 고집했다. 색뿐만 아니라 지시적 내용도 소거했다.
가정은 전통적으로 여성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여겨졌다. 화가들은 실내 그림에 여성을 등장시켜 온기를 불어넣거나 모종의 드라마를 암시했다. 하머스호이의 그림에 등장하는 이다는 그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이 부부의 실제 생활이 어떠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하머스호이는 대학 친구이자 동료 화가인 페테르 일스트의 여동생 이다와 평생을 해로했다. 자식은 없었지만, 사이가 나빴다는 증거도 없다. 과묵했던 화가는 가까운 사람들한테도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한번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코펜하겐으로 하머스호이를 찾아간 일이 있었다. 하지만 화가가 아무런 얘깃거리를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릴케는 그에 대한 글을 쓰려던 계획을 접어야 했다. 그를 인터뷰했던 기자는 화가의 집이 그의 그림과 똑같았다고 증언한다.
창백한 공간 속에 이다는 그림자처럼 존재한다. 화가는 그림을 통해 고독의 메타포를 창조했지만, 모델이 돼 준 아내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아무 힌트도 주지 않는다. 그래서 도리어 그녀를 자꾸 생각하게 된다.
[출처] : 이미혜 미술평론가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 48.빌헬름 하머스호이, 『스트란드가드의 실내, 마루에 비치는 햇빛』 (1901) - 그 여자는 거기 없었다 / 서울신문 , 2020. 6. 2.
빌헬름 하머스호이 자화상,1895,
빌헬름 하메르스회이(Vilhelm Hammershøi, 1864년~1927년) 덴마크 화가.
1864년 코펜하겐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덴마크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미술 교육을 받았다. 1885년에 열린 덴마크 왕립 미술 아카데미 전시회에서 자신의 여동생이었던 아나 하메르스회이(Anna Hammershøi)를 소재로 한 인물화인 《소녀의 초상화》를 출품했다.
1891년에는 화가였던 페테르 일스테드(Peter Ilsted)의 딸인 이다(Ida)와 결혼했다. 1898년부터 1909년까지는 코펜하겐에 위치한 스트란가데 30번지(Strandgade 30)에서 작업실을 차리면서 실내 풍경을 소재로 한 그림을 제작했고 1913년에는 스트란가데 25번지(Strandgade 25)로 이주했다.
1908년에는 덴마크 왕립 미술 아카데미 총회의 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10년에는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10년대에는 유럽 각지에서 열린 미술 작품 전시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1911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국제 미술 작품 전시회에서는 1위를 수상했다. 1916년 코펜하겐에서 후두암으로 인해 사망했다.
빛을 절묘하게 포착한 덴마크 화가 빌헬름 하메르스회이
In the Bed room, 1895,
Interior Frederiksberg Alle, 1900, oil on canvas, 56 X 44.5 cm, Private collection
Interior With at Piano, Strandgade, 1901, oil on canvas, 55.9 X 44.8 cm,
빌헬름 하메르스회이는 크리스티안스하운(Christianshavn) 스트란대로 자택에서 아내 이다(Ida)를 화폭에 담았다. 이다는 책 한 권을 양손으로 펴 든 채 창 옆에 서 있다. 바닥에는 햇빛이 창틀을 본 딴 그림자를 그렸다. 모노톤으로 간결하게 정돈된 실내는 바닥에 반사된 자연광만으로도 충분히 존재감을 드러낸다. 면은 단조롭지만 벽과 문에 몰딩은 빛과 그림자 덕분에 창 옆에 선 이다보다 선명한 존재감을 그러낸다. 이 그림은 빌헬름 하메르스회이의 전형적인 화풍을 보여준다. 그는 평생 140~150점에 달하는 실내 그림을 그렸는데, 이 가운데 60여 점은 부부가 10년 동안 살았던 단촐한 집에서 아내를 모델로 그린 것이다.
빌헬름 하메르스회이 작품은 비싼 축에 들지 않았다. 이 그림을 경매에 내놓은 원주인은 1960년 단돈 9600크로네(166만5천 원)에 브룬 라스무센 경매장에서 사들였다. 율리에 보스(Julie Voss) 브룬 라스무센 경매장 순수미술부서장은 1980년대부터 작품 가치가 치솟았했다고 <리쳐>와 인터뷰에서 설명했다. 이제 빌헬름 하메르스회이는 덴마크 안팎에서 인기를 누린다.
“북유럽스러운 우울감과 시상을 특유의 색배합과 빛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그는 덴마크와 북유럽을 넘어 유럽과 미국, 일본에서도 사랑받습니다.”
지금껏 가장 비싸게 팔린 덴마크 그림도 마찬가지로 빌헬름 하메르스회이가 그린 ‘피아노와 여성이 있는 스트란대로 30번지 실내'(Interiør med kvinde med klaver, Strandgade 30)다. 2017년 미국 뉴욕 소더비 경매장에서 530만 달러(62억4천만 원)에 낙찰됐다.
‘스트란대로 30번지 실내'(Interiør fra Strandgade 30)
A Woman Readihg By A Window
A Lady Reading in An interior
Interior, Strandgade 30, 1901, oil on canvas, 62.4 X 55.2 cm, Liedersachsisches Landersmuseum Germany
Interior, Strandgade 30, 1907, oil on canvas, 71 X 57.5 cm, ARos Aarhus Kunstmuseum, Denmark
Intrior With Piano and Woman in Black
Untitled
The Tall Windows
Interior, Atrandgade 30
Bedroom
POrtrait of a Young Girl
Sunshine in the Living R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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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lhelm Hammershøi 의 작품세계』Ⅰ [1880~1904] https://blog.naver.com/ohyh45/221721634303
『빌헬름 함메르쇼이의 작품세계』 Ⅱ [1905~1915] https://blog.naver.com/ohyh45/221722709869
49.메인더르트 호베마, 『미델하르니스의 가로수 길』 (1689) - 화가라는 직업
메인더르트 호베마, '미델하르니스의 가로수 길',1689, 101 X 141cm, 내셔날 갤러리, 영국,런던
17세기 초 스페인에서 독립한 네덜란드는 시민공화국을 출범했다. 경제적 번영은 시민적 자유와 맞물린다. 영국, 프랑스, 스페인 같은 절대왕권 국가에서는 왕실이 중요 산업을 독점했고 그 외의 산업도 왕의 허가를 받은 사업자만 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에서는 자본과 아이디어가 있으면 누구나 사업에 뛰어들 수 있었다. 종교적 제약도 없었다. 인구의 다수가 신교였으나 가톨릭, 유대교를 배척하지 않았다. 박해를 피해 이주한 유대인들은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자본주의적 경제 발전은 예술생산과 유통방식에 변화를 일으켰다. 전근대적 후원제도가 무너진 자리에 근대적 시장제도가 밀고 들어왔다. 특권계급과 교회의 주문이 사라지자 화가들은 자구책으로 누군가 사주기를 기대하며 여관, 술집에 그림을 걸어 놓았다. 전문적인 미술상이 생겨나 고객과 화가를 중개해 주었다. 네덜란드의 부는 미술품 거래를 활발하게 했고, 미술시장을 성립시켰으며 그림을 되팔 수 있는 재화로 만들었다.
다른 나라 예술가들이 여전히 후원자의 비위를 맞추고 그의 명을 받들고 있을 때, 네덜란드 화가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변덕스러운 후원자에게서 벗어나 독립했다. 성공하면 부를 누리고 전문 직업인으로 존경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복병이 있었다. 시장 생산은 주문 생산에서는 없던 수요공급의 불일치를 초래했다.
자유 경제 속에서 너무 많은 미술가가 생겨났고 이는 작품 생산의 과잉으로 이어졌다. 미술가는 알 수 없는 고객을 상대로 무한 경쟁에 휩쓸리게 됐다. 렘브란트는 인생 후반기에 고객의 인기를 잃고 몰락했다. 페르메이르는 미술시장 붕괴로 파산해 부인에게 빚과 열한 명의 아이들을 남겨 놓고 세상을 떠났다.
호베마는 서른 살 때 포도주 검사관 자리를 얻자 그림을 중단했다. 화가보다 포도주 검사관이 나았다는 얘기다. 오십 줄에 어쩌다 그린 그림이 그의 대표작이 됐다. 가로수가 늘어선 신작로 끝에 교회 종탑이 솟은 마을이 보인다. 사냥꾼은 개를 데리고 관객 쪽으로 걸어오고 길옆 밭에서는 농부가 묘목을 돌본다. 광활한 하늘의 뭉게구름을 보고 있으면 호베마가 살던 시대의 네덜란드로 순간이동을 한 것 같다.
[출처] : 이미혜 미술평론가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 49.메인더르트 호베마, 『미델하르니스의 가로수 길』 (1689) - 화가라는 직업 / 서울신문 , 2020. 6. 16.
50.프란츠 루트비히 카텔, 『과일장수와 나폴리만』 (1822) - 나비 효과
프란츠 루트비히 카텔, '과일장수와 나폴리만', 1822. 22 X 31 cm, 알테 나치오날갈레리, 독일베를린
1494년 9월 프랑스 왕 샤를 8세는 나폴리 왕국의 왕위 계승권을 빌미 삼아 이탈리아로 쳐들어갔다. 이즈음 이탈리아는 40여년 동안 호시절을 누리고 있었다. 피렌체는 메디치가의 통치 아래 번영을 누렸고 밀라노는 강력한 군주 루도비코 스포르차 밑에서 황금기를 구가했다. 그의 궁정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비롯해 시인, 학자가 버글거렸다.
이탈리아에 입성한 샤를 8세는 밀라노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나폴리 왕국과 적대 관계였던 루도비코는 샤를 8세의 원정을 부추긴 장본인이었다. 별장에서 연회가 벌어졌다.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루도비코는 프랑스인들이 건방지고 무례해서 자존심이 상했고, 샤를 8세는 이탈리아가 너무 덥고 포도주도 기대에 못 미쳐 짜증이 났다. 일은 루도비코의 계산과 딴 방향으로 뻗어나갔다. 나폴리 왕이 가만히 적군을 기다릴 리 만무했다. 알폰소 왕의 군대가 밀라노 근처까지 다가오자 루도비코는 전쟁 태세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레오나르도에게 불똥이 튀었다. 당시 ‘우리의 천재’는 루도비코의 선친인 프란체스코의 기마상을 만들고 있었다. 점토 본은 이미 완성했고 청동 본 주조를 준비 중이었다. 루도비코는 기마상에 쓰라고 주었던 청동 75t을 회수해 대포 제작소로 보냈다. 레오나르도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기마상이 완성됐으면 레오나르도 생애 최대의 역작이 됐을 것이다. 그는 다시는 이런 대형 프로젝트를 맡지 못했다.
샤를 8세는 파죽지세로 남하해 다음해 2월 나폴리에 당도했다. 처음 보는 꽃과 열매가 그득하고 햇빛과 바다는 찬란했다. 샤를 8세는 “아담과 이브만 있다면 여기가 바로 에덴동산”이라고 프랑스에 보낸 편지에 썼다. 에덴동산의 환락가에서는 신종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다.
역겨운 종기와 끔찍한 고통을 안겨 준 후 목숨을 빼앗아 가는 병이었다. 프랑스군은 이 병을 ‘나폴리 병’이라 불렀고 나폴리인들은 ‘프랑스 병’이라고 불렀다. 식자들은 매독이 프랑스인에 의해 이탈리아에 퍼졌다는 설과 콜럼버스의 범선에 실려 유럽으로 건너왔다는 설을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샤를 8세는 실익을 거두지 못하고 길고 힘든 귀국길에 올랐다.
[출처] : 이미혜 미술평론가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 50.프란츠 루트비히 카텔, 『과일장수와 나폴리만』 (1822) - 나비 효과 / 서울신문 , 2020. 6. 30.
51.마스든 하틀리, 『등대』 (1940~1941) - 저 거친 바다에 외로운 등대
마스든 하틀리, '등대', 1940~1941,oil on canvas, 76,2 X 101.9 cm, 메트로폴리탄미술관,미국 뉴욕
고대인은 지구가 평면이라고 믿었다. 그 끝에 이르면 바닷물이 폭포처럼 허공으로 곤두박질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배를 타고 멀리 나가는 일은 절대 금물이었다. 고요하다 흉포해지는 바다는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리스 신화에는 바다에 대한 공포가 여기저기 드러나 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바다 괴물이 모는 수레를 타고 나타나 폭풍을 일으킨다. 화를 잘 내고 질투심 강한 포세이돈은 위엄을 세우며 여유만만한 천상의 왕 제우스와는 대조적이다.
하지만 바다는 기회의 터전이었다. 대담한 자들은 바다로 나가 도시를 세우고, 상거래로 부를 쌓았다. 항해의 안전은 최대 과제였다. 그리스인은 일찍부터 바닷가에 돌무더기를 쌓고 그 위에 불을 피워 등대를 만들었다. 건축술에 능했던 로마인은 지중해 연안은 물론 영국 도버까지 진출해 탑 모양의 튼튼한 등대를 세웠다.
등대는 경제가 번성하는 지역을 따라 퍼져 갔다. 르네상스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지중해 곳곳에 등댓불을 밝혔고, 한자동맹 도시들은 북해에서 같은 일을 했다. 17세기부터 대서양에 면한 유럽 국가들이 대륙 간 원거리 무역에 뛰어들면서 대서양 연안과 멀리 아메리카대륙에도 등대가 세워졌다.
산업혁명과 함께 등대는 전성시대를 맞았다. 건축술과 광학기술의 발달은 든든하고 높은 구조물, 멀리 강력하게 퍼지는 조명 시설을 가능하게 했다. 세계 곳곳에 등대가 우후죽순처럼 퍼졌다.
이제 나침반, 지도, 등댓불 같은 것들에 의존해 바다를 오가던 시대는 과거가 됐다. 20세기에 들어와 선박과 항만시설이 대형화, 기계화되고 항해술이 발달하면서 등대의 역할은 차츰 축소됐다. 외롭고 꿋꿋하게 등대를 지키는 등대지기도 옛말이 됐다. 관리의 자동화로 오늘날의 등대에는 등대지기가 없다.
미국 화가 하틀리는 모더니즘과 지역성을 조화롭게 접목했다. 1910년대 초 유럽에 건너가 큐비즘과 표현주의를 받아들였고 여기에 자신의 고향인 메인주의 풍경을 더했다.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등대를 강력한 필치로 묘사한 이 그림은 거대한 힘과 맞서는 인간의 의지를 보여 주는 것 같다. 등대는 말한다. 고독하고 힘들어도 버텨야 한다고.
[출처] : 이미혜 미술평론가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 51.마스든 하틀리, 『등대』 (1940~1941) - 저 거친 바다에 외로운 등대 / 서울신문 , 2020. 7. 14.
52.빈센트 반고흐, 『폭풍우 이는 날, 스헤베닝언 해변』 (1882) - 캔버스에 남은 열정의 흔적
▲ 빈센트 반고흐, ‘폭풍우 이는 날, 스헤베닝언 해변’, 1882년, oil on canvas, 34.5×51㎝,
반고흐미술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1882년 8월 말 반고흐는 헤이그 인근 스헤베닝언 해변을 그렸다. 수개월 전 그는 화가 안톤 마우베 밑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뒤늦게 화가의 길을 택한 이 고집 센 사나이는 누구에게 배우기보다 직접 캔버스와 씨름하며 그림을 알아 가고 있었다.
그날 해변에는 폭풍우가 몰아쳤지만 반고흐를 말릴 수는 없었다. 서 있기도 힘들고, 모래가 날려 눈도 뜨기 힘든 가운데 반고흐는 이젤을 펼쳤다. 캔버스가 모래를 뒤집어쓰자 그는 모래언덕 뒤의 작은 여인숙으로 철수해 모래를 긁어내고 작업을 계속했다. 중간중간 해변으로 가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캔버스에 남아 있는 모래 알갱이가 그날을 증언하고 있다.
그림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먹구름이 낀 하늘, 거품 같은 파도로 뒤덮인 바다, 사람들이 있는 해변. 남정네들은 해안에 있는 고깃배에 줄을 묶어 안전한 곳으로 옮기려는 중이고, 흰 머릿수건을 쓴 아낙들은 그것을 지켜본다.
이 그림을 그린 직후 동생에게 보낸 편지는 이런 말로 끝맺고 있다.
“그림 속에는 무한한 뭔가가 있다. 정확하게 설명하기 힘들지만 자기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건 정말 매혹적인 일이다. 색채들 속에는 조화나 대조가 숨어 있다. 그래서 색들이 저절로 조화를 이룰 때면 그걸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는 게 불가능해 보인다.”
이 그림은 100년을 훌쩍 뛰어넘어 1989년에야 대중에게 공개됐다. 반고흐 가족은 그림을 다락방에 버려둔 채 이사했고, 새 집주인은 수년 뒤 다락방에 쌓인 잡동사니를 고물로 처분했다. 그 속에서 그림을 발견한 상인은 로테르담의 화랑에 가져갔고, 그림은 수집가의 손에 들어갔다. 수집가의 자손은 1989년 컬렉션을 국가에 기증했다.
그런데 2002년 미술관에 도둑이 들어 이 그림과 다른 한 점의 반고흐를 가져갔다. 사건 직후 경찰은 두 명의 행동대원을 체포했으나 이들은 그림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2016년 이탈리아 경찰이 나폴리 근처에서 그림을 발견했을 때 미술관은 회수를 거의 단념한 상태였다.
그림은 갱단 두목이 사용하던 빌라의 부엌 마루 아래 감춰져 있었다. 무사히 되돌아온 그림은 2017년부터 반고흐미술관에서 관객을 맞고 있다.
[출처] : 이미혜 미술평론가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 52.빈센트 반고흐, 『폭풍우 이는 날, 스헤베닝언 해변』 (1882) - 캔버스에 남은 열정의 흔적 / 서울신문 , 2020.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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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로 가는 길』 Ⅰ https://blog.naver.com/ohyh45/220919250136
『고흐로 가는 길』 Ⅱ https://blog.naver.com/ohyh45/220919291981
『고흐로 가는 길』 Ⅲ https://blog.naver.com/ohyh45/220919299401
『고흐로 가는 길』 Ⅳ https://blog.naver.com/ohyh45/220919429757
『고흐로 가는 길』 Ⅴ https://blog.naver.com/ohyh45/220919443031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세계』Ⅰ [자화상 / 편지] http://blog.naver.com/ohyh45/20099390042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세계』Ⅱ [1873~1882] http://blog.naver.com/ohyh45/20099389187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세계』Ⅲ [1883] http://blog.naver.com/ohyh45/20129677936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세계』Ⅳ [1884~1885] http://blog.naver.com/ohyh45/20129714254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세계』Ⅴ [1885~1886] http://blog.naver.com/ohyh45/20129717807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세계』Ⅵ [생애-일대기] http://blog.naver.com/ohyh45/220009319169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세계』Ⅶ [1887①] http://blog.naver.com/ohyh45/220548924580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세계』Ⅷ [1887②1888①] http://blog.naver.com/ohyh45/220549276809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세계』Ⅸ [1888②] http://blog.naver.com/ohyh45/220549399319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세계』Ⅹ [1888③1889①] http://blog.naver.com/ohyh45/220550440706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세계』11[1889②] http://blog.naver.com/ohyh45/220551158357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세계』12 [1890①] http://blog.naver.com/ohyh45/220551482799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세계』13 [1890②] http://blog.naver.com/ohyh45/220551525228
53.윈슬로 호머, 『생명줄』 (1884) - 호머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 윈즐로 호머 ‘생명줄’, 1884년, oil on canvas, 72.7×113.7㎝, 필라델피아미술관, 미국 펜실베이니아 필라델피아
한 구조대원이 반바지 모양 구명대가 달린 구조용 도르래를 이용해 좌초된 배에서 여자 승객을 구조하고 있다. 왼쪽 위의 너덜거리는 돛이 난파선의 존재를 말해 준다.
구명대에 몸을 실은 구조대원은 구명대 가장자리에 비스듬히 몸을 걸친 여자의 허리를 필사적으로 부둥켜안고 있다. 여자는 고개를 떨구고 팔을 늘어뜨린 채 정신을 잃은 모습이다. 거대한 파도가 두 사람을 위협한다. 젖어서 달라붙은 옷, 찢어진 치마 사이로 보이는 피 묻은 무릎, 몸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현장감을 자아낸다. 휘날리는 스카프의 붉은색과 괴이한 모양이 위급한 분위기를 강조한다.
좌초된 선박과 육지를 연결해 인명을 구하는 이 장치는 1870년대 후반 처음 사용됐다. 호머는 1881년 영국 북동부 해안에서 구조용 도르래를 처음 보았다. 1883년 미국으로 돌아간 호머는 자신이 살던 뉴저지주 애틀랜틱시티의 인명구조대를 찾아가 구조용 도르래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실제 사용하는 모습도 관찰했다. 이 그림은 그다음 해 완성됐다.
호머는 불필요한 부분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구명대를 탄 두 남녀에 집중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그림은 특정한 해난사고가 아니라 거친 바다를 상대로 사투를 벌이는 인간이라는 고전적 주제에 접근한다. 호머는 이 오래된 주제에 구조용 도르래라는 소재를 결합해 당대라는 시간성을 입혔다.
연약한 여성을 강인한 남성이 구한다는 서사는 자칫하면 감상으로 빠질 수 있었다. 호머는 사건을 목격하고 기록하는 사람의 이성과 예술가의 감수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감동을 이루어 냈다. 탄탄한 세부 묘사는 신뢰감을 주고, 극적인 구성은 현장에 있는 듯한 생생함을 안겨 준다.
이 그림이 전시되자 비평가들은 미국 미술의 한 획을 긋는 작품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일부 비평가는 젖은 옷이 몸에 찰싹 붙어 있고, 무릎이 보이며, 남녀가 바싹 끌어안은 데 불만과 당혹감을 표시했다. 호머는 성적 암시에 과민한 당대 분위기를 모르지 않았다.
그는 붉은 스카프로 구조대원의 시야를 가려 이 문제를 비켜 가려고 했다. 구조대원은 어쩔 수 없이 낯선 여인과 몸을 밀착하고 있지만, 그녀를 바라보지 않음으로써 체면을 살려 주고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선을 지키고 있다.
[출처] : 이미혜 미술평론가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 53.윈즐로 호머, 『생명줄』 (1884) - 호머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 서울신문 , 2020.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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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슬로 호머의 작품세계』Ⅰ [1860~1873] http://blog.naver.com/ohyh45/20124835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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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존 싱어 사전트, 『지붕 위의 카르리 소녀』 (1878) - 여름에 만난 사랑
존 싱어 사전트, '지붕 위의 카르리 소녀', 1878, oil on canvas, 50.8 X 63.5 cm,
크리스털 브리지스 미국미술관, 미국 아칸소 벤턴빌
달이 떠오르고 지붕 위에서 한 아가씨가 타란텔라춤을 추고 있다. 다른 한 사람은 지붕 가장자리에 발을 뻗고 앉아 커다란 탬버린을 두드린다. 옅은 분홍빛이 감도는 하늘을 배경으로 춤추는 젊은 여성의 날렵한 실루엣이 생동감 있게 드러나 있다.
사전트는 미국인이지만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필라델피아의 안과 전문병원에 있었던 의사였다.
두 살 난 딸을 잃고 아내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자 일을 접고 유럽으로 건너갔다. 이곳저곳 여행을 다니던 중 피렌체에 머물 때 사전트가 태어났다. 파리에 주거지를 두긴 했지만, 부모는 사전트를 데리고 유럽 곳곳을 다녔다. 학교에 갈 수 없었던 사전트는 부모로부터 기초 교육을 받았다. 아마추어 화가였던 어머니 밑에서 사전트는 자연스럽게 예술을 천직으로 택하게 됐다.
1878년 스물두 살의 사전트는 파리의 국립예술학교를 마치고 화가로서 첫걸음을 내디뎠다. 그해 여름 사전트는 나폴리 근처 카프리섬으로 향했다. 카프리섬은 지금은 고급 호텔이 즐비한 휴양지지만 당시에는 바닷가에 고기잡이배가 정박해 있는 한적한 어촌이었다. 청록색 바다와 절벽, 독특한 하얀 집이 어우러진 풍경에 매혹된 화가와 작가들이 드문드문 찾을 뿐이었다.
그림을 그리려면 모델이 있어야 했다. 사전트는 영국 화가 프랭크 하이드의 작업실에서 그의 모델이었던 로지나 페라라를 만났다. 날씬하고 가무잡잡한 열일곱 살 아가씨는 이국적이고 신비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페라라는 훌륭한 모델이었고, 사전트는 부지런히 그림을 그렸다. 스물두 살 청년과 열일곱 살 아가씨 사이에 어떤 감정이 오갔을까? 알 수 없다. 여름이 가자 사전트는 짐을 싸서 파리로 돌아갔다. 사전트는 매년 스페인, 이탈리아, 모로코 등지로 스케치 여행을 떠났고 다른 모델들을 만났다.
페라라는 카프리섬을 찾아온 화가들을 상대로 일을 계속하다 1891년 미국 화가 조지 랜돌프 바스와 결혼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두 사람은 뉴욕 근교에서 오래 사이좋게 살았다. 1934년 페라라가 폐렴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바스는 아내의 빈자리를 견디지 못했고 3년 뒤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출처] : 이미혜 미술평론가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 54.존 싱어 사전트, 『지붕 위의 카르리 소녀』 (1878) - 여름에 만난 사랑 / 서울신문 , 2020.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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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싱어 사전트의 작품세계』Ⅰ [1874 ~ 1880] http://blog.naver.com/ohyh45/20138649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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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싱어 사전트의 작품세계』Ⅴ [1893 ~ 1900] http://blog.naver.com/ohyh45/20138730252
『존 싱어 사전트의 작품세계』Ⅵ [1901 ~ 1904] http://blog.naver.com/ohyh45/220807142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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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싱어 사서전트의 작품세계』15[수채화⑤~1913] http://blog.naver.com/ohyh45/220812871704
『존 싱어 사전트의 작품세계』16[수채화⑥~1925/No Date] http://blog.naver.com/ohyh45/220813164358
55.카스파어 볼프, 『로어 그린덴발트 빙하』 (1774) - 하나뿐인 푸른별
▲ 카스파어 볼프, ‘로어 그린덴발트 빙하’, 1774년, 53.5×81㎝, 빈터투어미술관, 스위스 빈터투어.
지구가 아프다. 여름 내내 계속되던 장마가 끝나니 태풍이 연거푸 올라온다. 강풍에 아파트 베란다 창문이 깨지고, 공사장 철제빔이 내려앉고, 아름드리나무가 뿌리째 뒤집힌다. 인류가 부를 쌓고 남보다 근사하게 살기 위해 경쟁하며 더 많은 생산, 더 많은 소비에 박차를 가한 결과다.
과학자, 환경운동가들은 파국을 막을 수 있는 시간이 아주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고 외친다. 하지만 과연 기업이 생산량을 줄일 수 있을까, 우리가 이제 당연하게 여기게 된 편리함과 물질적 만족을 포기할 수 있을까. 많은 생각이 꼬리를 문다.
예술가들도 기후 변화를 경고하기 위해 나섰다. 덴마크의 설치미술가 올라프 엘리아손은 그 선두에 있는 작가다. 2003년에 발표한 ‘기후 프로젝트’는 테이트 모던의 터빈 홀 전체를 인공안개로 채우고 거대한 노란 해를 띄워 지구온난화를 경고하는 메시지를 전했다. 최근 작품들은 더 직설적 화법으로 대중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2014년에 시작한 ‘아이스 워치’ 시리즈가 그것이다. 엘리아손은 그린란드에서 가져온 거대한 얼음덩이 수십 개를 광장에 배열했다. 오가는 사람들은 얼음을 만지고 구경하고, 사진을 찍는다. 그러는 동안 얼음은 녹아서 점점 작아지고 마침내 사라진다. 작품은 말한다.
“그린란드의 빙하도 이 순간 이렇게 줄어들고 있다.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다음 세대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과거 화가들의 작품은 기후 변화를 연구하는 데에 이용되고 있다. 낭만주의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장엄함에 주목한 유파였다. 18세기 말 질풍노도운동이 독일어권을 휩쓸 때 스위스의 화가 카스파어 볼프는 알프스의 그린델발트를 다니며 드로잉과 유화 170여점을 그렸다.
이 그림도 그중 하나다. 거대한 초록색 빙하가 화면을 뚫고 우리를 덮칠 것 같다. 판화업자는 볼프의 그림들을 판화로 제작해 책으로 엮어 냈으나 팔리지 않았다. 화가는 가난 속에 생을 마쳤지만, 그가 그린 빙하, 계곡, 동굴, 고사목 그림은 사진이 없던 시절에 지구 환경을 기록한 소중한 자료로 남았다.
과학자들은 그 그림들을 이용해 빙하가 줄어드는 속도를 계산해 냈다. 이 아름다운 빙하가 그림으로만 남게 되지는 말아야 할 텐데 걱정이 태산이다.
[출처] : 이미혜 미술평론가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 55.카스파어 볼프, 『로어 그린덴발트 빙하』 (1774) - 하나뿐인 푸른별 / 서울신문 , 2020. 9. 8.
56.로비스 코린트, 『동물원에 있는 카를 하겐베크』 (1911) - 인간동물원을 만든사람
로비스 코린트, '동물원에 있는 카를 하겐베크',1911, oil on canvas, 200 X 271 cm, 쿤스트할레 함부르크, 독일,함부르크
카를 하겐베크는 한 세기 전 인종 전시 쇼를 기획해 성공을 누렸던 독일 사업가다. 그의 아버지는 쇼단에 동물을 공급하는 일을 했는데 하겐베크는 이 사업체를 국제적인 규모로 키웠다. 전 세계에 포획대를 보내 잡아들인 동물을 전 유럽의 동물원에 공급했다.
1870년대에 동물원 열기가 식자 그는 인간을 전시하는 신종 사업을 구상했다. 시험 삼아 핀란드 북쪽에 사는 라플란드인들을 데려다 생활하는 모습을 전시했다. 여행이 힘들었던 때라 대중은 이 쇼에 열광했다.
하겐베크의 포획대는 지구 곳곳에서 다양한 인종을 찾아내 유럽으로 데려갔다. 그는 사업적 아이디어가 풍부했다. 인종 전시와 동물 서커스를 병행하고, 자신이 거느린 인종과 동물을 화집에 담아 수십만 부를 팔았다.
포획대에 유인돼 유럽에 건너온 이민족들은 비참하게 살았다. 이들은 살아온 환경과 유리된 민속 의식을 행하고 춤을 추며 구경거리가 돼야 했다. 인종 전시는 그 자체도 반인륜적이지만 더 심각한 지구적 범죄로 이어졌다. 인종 전시는 유럽인들에게 다른 인종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각인시켰으며 자신들이 지구상에서 가장 우월하다는 생각을 지니게 했다.
학자들은 유사 과학을 동원해 인종차별과 유럽중심주의를 정당화했으며 식민지배와 나치의 인종 청소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 하겐베크는 자신의 사업이 부도덕한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인류학회는 명예회원증을 수여해 그의 ‘공로’를 치하했을 정도였다.
독일 최고의 명성을 날리던 코린트는 동물 사업가 하겐베크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그렸다. 하겐베크는 자신이 세운 동물원에서 바다코끼리 등에 손을 얹고 있다. 이곳은 1907년 문을 열었는데 동물을 우리에 가두지 않고 자연 비슷한 환경 속에 풀어 놓는 철창 없는 동물원으로 유명했다. 자신만만한 하겐베크 옆에서 바다코끼리는 순종적인 개처럼 보인다. 뒤에는 그의 왕국이 펼쳐져 있다. 물가에는 북극곰들이 있고 멀리 보이는 바위에는 순록들이 있다.
이 의기양양한 초상화가 그려지고 두 해 뒤 하겐베크는 자신이 기르던 뱀에게 물려 죽었다.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믿고 싶다.
[출처] : 이미혜 미술평론가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 56.로비스 코린트, 『동물원에 있는 카를 하겐베크』 (1911) - 인간동물원을 만든사람 / 서울신문 , 2020.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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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비스 코린트의 작품세계』 Ⅰ https://blog.naver.com/ohyh45/20184885547
『로비스 코린트의 작품세계』 Ⅱ https://blog.naver.com/ohyh45/20185039804
『로비스 코린트의 작품세계』Ⅲ https://blog.naver.com/ohyh45/20185043000
57.그랜트 우드, 『아메리칸 고딕』 (1930) - 미국적인 삶
▲ 그랜트 우드, ‘아메리칸 고딕’, 1930년, 78×65.3㎝, 아트 인스티튜트 오브 시카고, 미국 일리노이 시카고.
인상을 잔뜩 쓴 부부가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아메리칸 고딕이라는 제목은 뒤편에 있는 농가를 카펜터 고딕 즉 목수가 만든 고딕이라 일컫는 데 착안한 것이다. 지붕 물매가 가파르고 박공에 길쭉한 창문이 나 있는 게 고딕 성당을 닮았지만 어울리지 않게 거창한 이름이다.
두 사람은 당대 농부의 전형적인 옷차림을 하고 있다. 아내는 흰 칼라가 달린 검정 드레스에 프린트 무늬 앞치마, 남편은 흰 셔츠와 데님 작업복, 검정 재킷, 손에는 쇠스랑. 여성 모델은 우드의 누이동생이고, 남성 모델은 우드가 이가 아프면 신세를 지던 치과 의사였다.
우드는 이 그림으로 시카고미술관이 주최한 콩쿠르에 입상했다. 지역 신문들이 아이오와 농부 부부를 그린 이 ‘괴상한’ 그림을 앞다투어 소개하면서 우드는 폭발적인 명성을 얻었다. 진보적인 비평가들은 이 그림이 바이블 벨트라고 불렸던 중서부 지역의 답답하고 뻣뻣한 사람들에 대한 기막힌 풍자라고 칭찬했다.
진짜 아이오와 농부들은 이 그림을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고집 세고 비사교적인 사람으로 묘사된 게 마땅치 않았다. 적대적인 반응에 부딪히자 우드는 자신도 이 지역 토박이이며, 이 그림은 특정 지역 사람을 묘사한 게 아니라 미국인 일반을 묘사한 것이라고 변명했다.
그의 누이동생은 자기보다 나이가 두 배인 치과의사의 부인으로 받아들여지는 데 당황했다. 사람들에게 오빠가 이 그림을 부부가 아니라 부녀로 그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드 자신은 이 점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견지했다.
1929년 발발한 대공황의 그늘이 미국 사회에 짙게 드리우면서 이 그림에는 다른 해석이 덧씌워지게 됐다. 비평가들은 이 그림에서 풍자가 아니라 애국적 의미를 찾아냈다. 이 부부는 미국적 덕성과 개척자 정신을 나타내는 사람이 됐다. 비평가들은 미국 민주주의가 이들처럼 촌스럽지만 건실한 남녀의 노동 위에 세워진 것임을 역설했다.
이들은 부부인가 부녀인가? 이들은 경직된 사회의 표상인가? 아니면 지켜야 할 가치를 표방하는 사람들인가? 오늘날 표류하는 미국 민주주의 속에서 이 그림은 또 어떤 새로운 의미를 지닐까?
[출처] : 이미혜 미술평론가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 57.그랜트 우드, 『아메리칸 고딕』 (1930) - 미국적인 삶 / 서울신문 , 2020. 10. 6.
58.빈센트 반 고흐 『붉은 포도밭』 (1888) - 병충해가 만든 색깔
▲ 빈센트 반 고흐 ‘붉은 포도밭’, 1888년, 75.0×93.0㎝, 푸시킨 미술관, 러시아 모스크바.
유럽의 10월은 포도 수확의 계절이다. 빈센트 반 고흐가 살던 아를의 농부들도 바쁘다. 아낙들은 바구니에 포도를 따 모으고, 밭 가운데에는 포도를 운반해 갈 마차가 서 있다. 론강을 따라 아득히 펼쳐진 들판 끝으로 태양이 가라앉고 있다. 붉은색과 노란색의 대비가 강렬하고 아름답다.
그런데 포도나무는 이렇게 붉지 않다. 수확기에도 잎이 녹색이라야 정상이다. 화가가 색을 왜곡했을까? 아니다. 19세기 말 진딧물의 일종인 필록세라가 유럽의 포도밭을 덮쳤다. 20년 가까이 계속된 병충해로 수확량은 심각하게 감소했다.
이 공백을 남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아르헨티나, 칠레 등지에서 생산된 포도주가 메웠다. 포도주를 증류한 브랜디도 품귀현상을 빚으면서 스카치위스키가 대체재로 떠올랐다. 병충해는 주류 시장의 지형을 변화시켰고 덤으로 아름다운 그림을 탄생시켰다.
고흐는 900여점의 유화를 그렸는데 살았을 때 팔린 것은 이 그림 단 하나였다. 산 사람은 벨기에 화가 안나 보슈. 안나의 남동생 외젠도 화가였고 고흐와 친구 사이였다. 이 남매는 부유한 사업가 아버지 덕택에 여유 있게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1890년 고흐는 외젠의 권유로 브뤼셀에서 열린 ‘20인전’에 참가했다. 여기서 안나는 이 그림을 400프랑에 샀다. 일류 화가들 그림이 1만~3만 프랑을 호가한 데 비하면 형편없는 헐값이었지만, 무명인 고흐로서는 잘 받은 것이었다. 안나는 고흐가 동생 친구고 사정이 어려운 걸 잘 알고 있어서 후하게 값을 치렀다.
1895년부터 인상주의 그림값이 치솟았다. 안나는 1906년 파리의 한 화랑에 그림을 내놓았다. 그림은 1만 프랑에 러시아 사업가 시추킨의 손에 들어갔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 그의 저택과 수집품은 몰수됐다. 시추킨은 파리에서 우울하게 여생을 마쳤다. 혁명 정부는 시추킨의 저택을 미술관으로 만들어 대중에게 공개했다.
1948년 스탈린은 건물이 너무 부르주아적이라는 이유로 미술관을 폐쇄하고, 수집품은 모스크바의 푸시킨 미술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슈 미술관으로 분산시켰다. ‘붉은 포도밭’은 푸시킨 미술관으로 이관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처] : 이미혜 미술평론가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 58.빈센트 반 고흐 『붉은 포도밭』 (1888) - 병충해가 만든 색깔 / 서울신문 , 2020.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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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로 가는 길』 Ⅰ https://blog.naver.com/ohyh45/220919250136
『고흐로 가는 길』 Ⅱ https://blog.naver.com/ohyh45/220919291981
『고흐로 가는 길』 Ⅲ https://blog.naver.com/ohyh45/220919299401
『고흐로 가는 길』 Ⅳ https://blog.naver.com/ohyh45/220919429757
『고흐로 가는 길』 Ⅴ https://blog.naver.com/ohyh45/220919443031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세계』Ⅰ [자화상 / 편지] http://blog.naver.com/ohyh45/20099390042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세계』Ⅱ [1873~1882] http://blog.naver.com/ohyh45/20099389187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세계』Ⅲ [1883] http://blog.naver.com/ohyh45/20129677936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세계』Ⅳ [1884~1885] http://blog.naver.com/ohyh45/20129714254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세계』Ⅴ [1885~1886] http://blog.naver.com/ohyh45/20129717807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세계』Ⅵ [생애-일대기] http://blog.naver.com/ohyh45/220009319169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세계』Ⅶ [1887①] http://blog.naver.com/ohyh45/220548924580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세계』Ⅷ [1887②1888①] http://blog.naver.com/ohyh45/220549276809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세계』Ⅸ [1888②] http://blog.naver.com/ohyh45/220549399319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세계』Ⅹ [1888③1889①] http://blog.naver.com/ohyh45/220550440706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세계』11[1889②] http://blog.naver.com/ohyh45/220551158357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세계』12 [1890①] http://blog.naver.com/ohyh45/220551482799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세계』13 [1890②] http://blog.naver.com/ohyh45/220551525228
59.이사크 레비탄, 『황금빛 가을』 (1895) -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람
▲ 이사크 레비탄 ‘황금빛 가을’, 1895년, 82×126㎝,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러시아 모스크바.
오렌지색과 노란색으로 물든 가을 풍경이다. 푸른 하늘에는 흰 구름이 가볍게 떠 있고, 누릇누릇한 들판 사이로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있다. 노란 자작나무 잎이 햇살을 받아 금박처럼 반짝인다. 이사크 레비탄의 풍경화는 단순히 아름다운 장소를 사실적으로 그린 것이 아니다. 그는 자연의 내밀한 속삭임과 그 아름다움 앞에 떨리는 영혼을 표현할 줄 알았다.
그는 가을의 화가였다. 그를 맨 처음 유명하게 만든 그림도 모스크바 교외의 가을 풍경을 그린 ‘가을날, 소콜니키’(1879)였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에 배어 있는 서글픈 정서를 우울증에서 찾는다. 레비탄은 힘들게 살았다. 청소년기에 부모를 잃었고 평생 심장병과 동맥류를 앓았으며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는 오늘날 리투아니아가 된 작은 도시에서 유대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모스크바로 이사해 두 아들을 예술학교에 넣을 정도로 교육에 열의가 있었지만, 외국어 교사의 수입으로는 가족을 부양하기에도 빠듯했다. 단란했던 시절은 어머니가 죽고 두 해 뒤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끝났다. 어린 자식들은 가난 속에 내동댕이쳐졌다.
유대인이란 사실도 삶을 불안하게 하는 요소였다. 1879년 5월 암살될 뻔한 위기를 겪은 알렉산더 2세는 대도시에서 유대인을 추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892년에도 재차 추방 명령이 떨어졌다. 거부당하는 유대인이었으나 레비탄은 누구보다도 러시아적인 화가였다. 그는 여름과 가을에 시골을 다니며 사생을 했고, 겨울과 봄에는 모스크바로 돌아와 그것을 바탕으로 대작을 완성했다.
명성을 얻었어도 우울증은 그를 떠나지 않았다. 우울증이 덮치면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적대시한다고 생각하고 친구들조차 피했다. 조급해져서 화를 내며 작품을 부수기도 했다. 그 상태에서 벗어나면 이번에는 과도하게 명랑해져서 의욕을 불태웠다.
레비탄은 두 번의 권총 자살을 시도했다. 자살은 불발에 그쳤으나 그는 점점 쇠약해지고 있었다. 1896년 장티푸스를 앓은 후 건강은 더욱 나빠졌다. 그는 1900년 마흔 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1000점에 가까운 유화, 스케치, 드로잉을 남겼다. 고통스러웠던 삶이었으나 그가 남긴 그림에는 고요함과 빛이 가득 차 있다.
[출처] : 이미혜 미술평론가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 59.이사크 레비탄, 『황금빛 가을』 (1895) -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람 / 서울신문 , 2020.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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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크 일리치 레비탄의 작품세계』Ⅰ [1877~1884] http://blog.naver.com/ohyh45/20113933952
『이사크 일리치 레비탄의 작품세계』Ⅱ [1885~1887] http://blog.naver.com/ohyh45/20113968358
『이사크 일리치 레비탄의 작품세계』Ⅲ [1888~1891] http://blog.naver.com/ohyh45/20134661133
『이사크 일리치 레비탄의 작품세계』Ⅳ [1892~1894] http://blog.naver.com/ohyh45/20137822012
『이사크 일리치 레비탄의 작품세계』Ⅴ [1895~1896] http://blog.naver.com/ohyh45/20159626557
『이사크 일리치 레비탄의 작품세계』Ⅵ [1897~1898] http://blog.naver.com/ohyh45/220725129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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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크 일리치 레비탄의 작품세계』Ⅷ [No Date ②] http://blog.naver.com/ohyh45/220725233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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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에드바르 뭉크, 『절규』 (1893) - 핏빛 하늘아래 퍼지는 비명
에드바르 뭉크, '절규', 1893, oil on canvas, 91 X 73.5 cm, 노르웨이 국립미술관,노르웨이, 오슬로,
사선으로 뻗은 길 위에 외계인같이 생긴 사람이 서 있다. 길 끝에 두 사람이 멀어져 가고 있다. 난간 아래에는 검푸른 바다가 흐르고, 그 위로 노을이 펼쳐져 있다. 거대한 물뱀처럼 꿈틀대는 바다와 핏빛 하늘이 지구 종말의 날 같다.
사람들은 종종 이 외계인 형상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비명은 그가 지르는 게 아니다. 그는 허공에 울려 퍼지는 비명을 듣지 않으려고 헛되이 귀를 틀어막고 있다. 크게 뜬 눈, 벌린 입이 그가 느끼는 공포를 말해 준다.
1892년 뭉크는 이 그림을 연상하게 하는 메모를 남겼다.
“두 친구와 산책을 하던 중 해가 지고 하늘이 문득 핏빛으로 물들었다. 나는 피로한 나머지 발을 멈추고 난간에 몸을 기댔다. 핏빛과 불의 혓바닥이 검푸른 만과 도시를 덮고 있었다. 친구들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지만 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 있었다. 그때 나는 자연을 관통하는 끝없는 비명을 들었다.”
뭉크는 1893년부터 1895년까지 이 장면을 템페라, 파스텔, 석판으로 제작했다. 두 점의 템페라화는 오슬로 국립미술관과 뭉크 미술관이 각각 소장하고 있다.
이 지점은 오슬로 남쪽 해안가의 에케베르크 언덕이다. 이곳에는 오늘날 ‘절규’의 배경이란 명판이 세워져 있다. 멀리 오슬로 시내가 바라다보이는 전망 좋은 언덕이지만 뭉크 시대에는 근처에 정신병원이 있었다.
뭉크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여동생을 방문할 때마다 이 언덕을 지나쳤을 것이다. 뭉크의 그림은 시각적 자서전이다. 정신병력이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자신도 미칠지 모른다는 불안을 안고 살았던 뭉크는 불안정한 내면을 강렬한 이미지로 표출했다.
작품의 아우라를 깨는 얘기일지 모르나 기상학자들은 이 유난히 붉은 하늘이 1883년 여름 인도네시아의 화산섬 크라카토아가 폭발을 일으킨 결과라고 주장한다. 화산 폭발이 만들어 낸 먼지와 가스가 반년 뒤 북반구에 도달해 이처럼 핏빛 노을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실제로 1883년 겨울 북반구에서는 ‘비정상적인 황혼의 빛’을 목격했다는 기록이 여러 군데 나타난다. 오슬로 천문대도 11월 말 하늘에 강렬한 빨간색 띠가 나타났음을 기록하고 있다.
[출처] : 이미혜 미술평론가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 60.에드바르 뭉크, 『절규』 (1893) - 핏빛 하늘아래 퍼지는 비명 / 서울신문 , 2020.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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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바르 뭉크의 작품세계』 Ⅱ https://blog.naver.com/ohyh45/20172975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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