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2일 종로 화신백화점의 종업원 자치위원회장 문석태는 화신백화점에서 농성 중 미군 헌병에게 연행되어 도경찰부로 압송되었다.
화신백화점은 일제시대 경성의 5개 백화점 중 유일하게 조선인이 경영하던 백화점이었다.
1931년 평안남도 용강 출신의 사업가 박흥식은 화신상회라는 귀금속점을 인수하여 백화점으로 개편, 운영하면서 조선의 대기업가로 성장하였다.
1935년 화재가 발생하여 건물이 거의 전소되면서 화신백화점은 1937년 지하 1층, 지상 6층의 현대식 건물로 재건되었다. 재건된 화신백화점은 당시 경성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으며, 내부에 엘리베이터 4대와 에스컬레이터 2대가 운행되고 옥상에는 일루미네이션이 빛나고 있었기에 꼭 쇼핑이 아니더라도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를 체험하기 위해 방문하는 장안의 명소가 되었다.
1930년대 화신백화점은 '민족백화점'의 이미지를 구축하여 조선인 고객을 흡수하는 전략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박흥식은 동향의 안창호를 비롯한 서북 출신 민족주의자들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용강시절부터 각종 실력양성운동에 동참하였는데 사업지를 경성으로 옮기면서 조선상공업의 육성을 통한 실력양성의 경영 이념은 그의 출세의 발판이 되었다.
소설가 주요한의 소개로 옥중의 안창호를 만나 그로부터 한국의 상공업 진흥을 위해 애쓴다는 격려를 받은 박흥식은 안창호의 석방을 위해 힘을 쓰고, 석방 후에는 생활비를 지원해 주는 등 민족자본가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강력한 전시통제경제정책이 시행되자 박흥식은 급격하게 친일화되었다.
총독부 로비를 통해 화신백화점은 배급통제하에서 이전보다 오히려 2배 반 가량의 물품을 배급받는 특권을 누리며 급성장했고 그는 "영구한 東亞의 안정"을 위하여 빠른 승전을 기원하며 동남아시아로의 확전을 주장하였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온갖 친일단체에 가입하였으며 전쟁 말기에는 친일단체의 총본산이었던 임전대책협의회와 조선임전보국단의 이사가 되어 고액을 기부하였다. 대동아건설을 위해 전력 증강에 더욱 매진할 것을 부르짖으며 학도병 지원 권유에 앞장서 청년학도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전부 지원"할 것을 외쳤다.
1944년에는 전투기 생산 기업인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여 태평양전쟁의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적극적인 친일행위를 하였다. 비행기 공장의 인력은 강제 징용된 노동자로 채워졌다. 조선에서 그만큼 대놓고 적극적으로 민족을 팔아먹고 친일을 하는 이를 찾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해방이 되었다.
일본인 기업가들이 철수하면서 일제 소유의 생산기관과 일본인 공장에 대한 노동자의 접수가 시작되었고 이들 기업에 대한 (노동자)자주관리운동이 전개되었다. 문제는 자주관리운동이 일본인 사업장뿐 아니라 화신백화점, 경성방직, 조선비행기 등 조선인 자본가의 사업장으로 확대되는 경향이었다.
해방이 되면서 미츠코시백화점 등 일본인 소유의 4개 백화점은 폐쇄되었고 화신백화점은 2개월째 영업중단 중이었다.
백화점 개점 준비를 하던 10월 4일 화신종업원 700명은 종업원 대회를 열고 생활대책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그들은 문석태를 위원장으로 선출하여 임금인상 교섭에 들어갔다. 생활대책위원회는 현재 물가 상승을 고려한 대우 개선을 요구하였다.그러나 회답 기일인 9일 백화점 사장 박흥식은 종업원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거부하였다.
11일 종업원은 다시 대회를 열어 생활대책위원회를 화신종업원 자치위원회로 발족시키고 화신백화점의 금후 관리는 자치위원회에서 하겠다는 자주관리운동을 선언하였다. 화신백화점 종업원들은 박흥식 같은 민족반역자이자 전쟁범죄자의 재산은 일본인 기업의 경우처럼 노동자들이 접수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다.
자치위원회는 성명서를 발표한 후 박흥식 사장의 집을 방문하여 화신백화점을 자치위원회로 인수할 것을 종용하였다.
다음 날인 12일 미군 헌병 4명이 일본 경찰보조관 2명과 일본인 통역관 1명을 대동하여 화신백화점으로 왔다. 그들은 문석태를 자동차에 태우고 도경찰부로 데리고 갔다. 문석태는 약 4시간 동안 도경찰부의 별실에서 취조를 받고 석방되었으나 자치위원회의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문석태를 맞이한 화신백화점 종업원 700명은 밤이 깊어가도록 대책을 강구하고 자치위원회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절대로 물러나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그러나 10월 10일 미군정 아놀드소장의 인공 부정 성명 발표 후 조선공산당은 미군정과의 마찰을 자제하고 있었다.
조선공산당과 조선공산당의 지시 하에 있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는 '자주관리운동'이 "미군정과의 마찰을 불러일으킨다"며 노동자들의 투쟁을 자제시켰다.
11월 9일 미군정청은 "분쟁 중이어도 사업을 계속하라"는 조치를 내렸다.
조선공산당과 전평의 지지를 받지 못한 자치위원회는 군정에 협력하는 의미에서 15일 개점 후 발전적으로 해소하였고 자주관리운동은 종결되었다.
1949년 1월 8일 박흥식은 반민특위 제1호 검거자로 구속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보석으로 풀려났고 공민권 2년 정치형이라는 낮은 구형에도 무죄 판결을 받아 방면되었다.
그러나 그는 사후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광복회와 함께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 2005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 그리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모두 이름을 올리는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
첫댓글 화신옆에 신신백화점도 있었지요 ᆢ지금 종로 스타벅스자리?
그리고 사잇길로 올라가면 조계사길 ᆢ안국동이구요 어릴때 살던동네랍니다ㅎ
하잉푹님 좋은 동네 사셨군요.
저보고 지금 살 동네를 고르라고 한다면 종로구의 산 가까운 어느 동네를 정할 듯 해요. 오늘 정독도서관 풍광이 되게 아름답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