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鍾離端木 1 건문(建文) 오년(五年) 십일월 초닷새. 마교에 있어 이 날은 대단히 뜻깊은 날이었다. 천존마제로부터 이어온 천년의 금제를 벗고 전 마교 고수들이 시달목하를 떠난 것이다. 바로 중원(中原)을 향해 그들은 극히 은밀하게 떠났다. 하나 정작 중원에서는 그 누구도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니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다. 2 북경(北京). 대륙 십팔만리를 통틀어 가장 크고 화려한 대도(大都)이자 당금 황제가 천하를 통치하는 자금성이 위치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살아가며 온갖 일이 매일같이 쉬지않고 이곳에서 벌어진다. -이 복잡하고 다사다난한 북경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누구일까? 만일 누군가 이렇게 묻는다면 북경인 중 대부분이 갸우뚱하며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이 많고 많은 사람 중 제일 유명한 사람을 어떻게 손꼽는단 말이냐? 그럼 다시 묻자. -북경에서 최근 가장 화제가 되고있는 인물은 누구냐? 그렇다면 사람들은 말한다. -그 사람은 당연히 종리단목(鍾離端木)이다. …… 종리단목(鍾離端木)? 그러고 보니 좀 이상하다. 종리(鍾離)와 단목(端木), 이것은 모두가 성(姓)이다. 한데 종리단목이라면 두 개의 복성(復姓)을 합쳐 만든 이름이 아닌가? 어째서 그런 이름을 가졌는지는 아무도 연유를 모른다. 하나 결코 그런 이름으로 인해 그가 유명해진 것은 아니었다. 종리단목의 부친은 자금성을 수호하는 일천 금위부(禁衛府) 고수들의 대영반(大令班)인 종리후(鍾離候)였다. 그의 부친 뿐 아니라 종리가문은 조상 대대로 황실의 녹을 먹고 사는 정통적인 무가(武家)였다. 한데 종리단목만은 예외였다. 상당히 특이하다고나 할까? 그는 어려서부터 무(武)를 철저히 배척하며 자랐던 것이다. 그에겐 오로지 문(文)만이 전부였다. 이미 세 살 때 사서삼경(四書三經)과 제자백가(諸子百家)를 통달했다. 그리고 그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 북경에는 더 이상 그가 읽을 책이 없게 되었다. 천부적으로 명석한 두뇌를 지니고 태어난 그는 한 번 본 것은 영원히 잊지 않았다. 또한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도 순식간에 체득해내는 무서운 이해력을 가졌다. 뿐인가! 종리단목은 학문 뿐 아니라 무(武)를 제외한 모든 방면에 달통해 있었다. 북경성의 국수(國手)였던 소무량(蘇無凉)이 바둑대결에서 패한건 이미 화제거리도 되지 못한다. 중요한건 지금 그가 몇점을 깔고 두느냐 하는 것이었다. 비파 탄주에 관한한 당대 최고로 꼽히는 위종빈(委宗彬)이 그의 탄금을 듣고 북경을 떠난 지도 벌써 몇년이 지났다. 그 후 위종빈이 비파를 탄주했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이 없었다. 이미 열 두 살 때에 황제의 사부인 황사(皇師) 장태문(張太文)이 그를 만나 하루를 가르쳐 보곤 고개를 흔들며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인간도 아니다…… 진정 그는 천하에 못하는 것이 없고 모르는 것이 없는 천고기재(千古奇才)였다. 단지 무학(武學)을 빼놓는다면…… 현재 종리단목의 나이 이십 사 세. 하나 그는 몸이 극히 허약하여 좀체로 바깥 출입을 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겨우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를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아 이렇게 말했다. -종리단목……! 그의 모습은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 바로 선계(仙界)에 사는 선인(仙人)의 모습이 그러할 것이다! 송옥(宋玉)이나 반안(潘顔)은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천하의 절세미녀라 할지라도 그의 얼굴을 본다면 절로 수치를 느끼게 되리라! 이렇듯 종리단목에 대한 소문은 구구했으며 무궁무진했다. 하나 한 가지 공통된 점은 하나같이 최대한의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요즘 들어 소리 소문없이 조용히 불어온 풍문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종리단목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3 해가 지면서 북경에 어둠이 내렸다. 가만? 생각해보니 그 말은 어폐가 있어도 이만저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북경이란 화려한 대도시에 밤(夜)은 찾아올지언정 어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야성(不夜城)! 밝게 켜진 불빛과 흥청대는 인파…… 어디에도 어둠이 깃들 곳은 없었다. 송학루(松鶴樓). 이곳은 북경성 동남쪽에 위치한 거대한 객잔이었다. 불야성을 이룬 북경에서도 손꼽히는 객잔으로 손님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구해준다. 일급 미희(美姬)에서 특별 요리에 이르기까지…… 온갖 쾌락과 인생의 묘미는 모두 이곳에서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정운헌(靜雲軒). 송학루 후원에 자리한 한 채의 호화로운 누각이었다. 인공호수(人工湖水) 앞에 세워진 이곳은 송학루 내에서도 가장 비싼 값을 치뤄야만 올 수 있는 곳이다. …… 정운헌 내의 한 방 안, 황제가 기거하는 황실(皇室)이 이러할까? 그야말로 화려의 극치를 이룬 방이었다. 벽마다 값비싼 고서화(古書畵)가 장식되어 품위를 더하고 가구는 모두 이국(異國) 특산의 자단목(紫檀木)이었다. 그리고 바닥에는 흰 양털로 짠 융단이 푹신하게 깔려 있었으며, 황금 촛대는 사방에서 휘황한 촉광(燭光)을 뿌렸다. 실로 인간이면 누구나 꿈꾸어 보는 그런 호화로운 내실이었다. 그 중앙에 있는 팔선탁(八仙卓)을 사이에 두고 두 인물이 마주 앉아 있었다. 그들은 바로 백리강과 성혼이었다. 그렇다! 그들은 암암리에 마교를 떠나 중원의 핵심부인 이곳 북경까지 들어와 있었다. 지금 막 백리강은 믿기지 않는 듯한 얼굴로 묻고 있었다. "정말…… 그의 얼굴이 그토록 나와 흡사하단 말이지?" 성혼은 야윈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렇습니다. 처음엔 속하도 무척 놀랐을 정도였습니다." "……!"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알아보기 힘들만큼 그는 대지존을 닮았습니다." 백리강은 적이 경악어린 얼굴로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진정…… 기막힌 일이군. 어찌 그토록 우연한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성혼이 문득 기이한 눈빛으로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혹시…… 대지존께선 종리단목…… 그와 쌍둥이가 아닙니까?" "음?" 백리강은 일순 눈빛을 굳혔으나 이내 실소했다. "그럴 리가 없다. 종리단목과 나는 우선 나이에서도 두 살이나 차이가 난다. 게다가 아버님께 내 위에 형이 있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었으니까……!" 성혼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이 무슨 말인가? 북경의 명물 종리단목이 백리강과 쌍둥이같이 닮았다니. 이때 백리강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나직하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무튼…… 이번 일이 나에겐 하늘이 도와주는 것과 같다." "……!" "마교가 군산(君山)에 총단을 마련할 때까지 당분간 머무를 곳을 발견한 셈이니까……" 그는 이어 성혼을 똑바로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종리단목을 이용해서 황궁의 신비인(神秘人)의 정체를 알아낼 수도 있다는 점이다." 황궁의 신비인----! 누구를 일컬음인가? 백리강의 음성은 계속되고 있었다. "현 무림에 은밀히 움직이는 정도무림의 구파일방(九派一幇)과 육대비문(六大秘門)은 분명…… 백 년 전에 사라진 우내오천(宇內五天)이 지휘하고 있다. 하나 그동안 알아본 바에 의하면 우내오천을 움직이는 암중의 인물이 있어……" "……!" 성혼 역시 알고 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리강의 두 눈빛이 문득 예리한 광채를 번뜩였다. "그 신비인이 누군지는 모르나…… 황궁(皇宮)과 연관이 있음이 틀림없다." 성혼이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우내오천이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그 우내오천을 움직이는 인물이 있다는 것은 더 더욱 놀라운 일입니다." 백리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그 인물의 정체를 알아내야 한다……!" 실내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이윽고, "성혼." 백리강은 성혼을 엄중히 직시했다. "말씀하십시오. 대지존." "내일…… 종리단목을 만나 봐야겠다." 성혼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빛내며 곧 절도있게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4 천진장원(天眞莊院). 자금성에서 동남방으로 오리(五里) 정도 떨어진 곳. 그곳엔 북경성 내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는 거대한 장원이 있다. 바로 현 금위부의 대영반 종리후의 거처인 천진장원이 그곳이다. 천진장원은 하인의 수만도 백 명이 넘는 대가문(大家門)이었다. 더욱이 천진장원의 현판을 태조 홍무제(紅武帝)가 친필 하사했다 하여 더욱 유명했다. 또한 천진장주 종리후, 그는 황가(皇家)에서 지극히 신임하는 뛰어난 무장(武將)이었다. 그는 무공 뿐 아니라 충성심 또한 깊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한데 반 년 전 어느날인가부터 중병에 들어 현재까지 와병 중이었다. 때문에 천진장원 내의 모든 대소사는 아들인 종리단목에게 맡기다시피 하고 있었다. 천고기재인 종리단목은 그 일 또한 훌륭히 처리해내고 있었다. 밤(夜)이 오고 어둠이 천진장원을 뒤덮었다. 천진장원 내의 한 정실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따사롭게만 느껴지는데 지금 단아한 분위기의 정실 안에선 한 인영이 묵화(墨畵)를 그리고 있었다. 묵향이 은은한 그 그림은 설경(雪景) 속에서 낚시하는 한 노인을 표현하고 있었다. 화필의 움직임이 빠르지도 늦지도 않은 것이 극히 섬세하다. 가히 한 눈에도 명인의 솜씨임을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하나…… 오오, 그 화필을 놀리고 있는 인영의 모습은 더욱 더 일품(一品)이었으니……! 주인의 성품을 대변하듯 깔끔한 백의를 걸치고 윤기 흐르는 흑발은 단정히 묶어 설백색 문사건(文士巾)으로 질끈 묶었다. 뽀얗고 투명한 살결, 성결한 이마, 짙고 긴 눈썹 아래 빛나는 성목(星目). 사내의 눈빛이라기엔 너무나도 깊고 아름다웠다. 한데 기이하지 않은가? 이 백의문사의 모습, 그것은 영락없는 백리강의 모습이었다. 진정 판에 박은 듯 똑같았다. 구태여 다른 점을 찾는다면 백의문사의 모습이 백리강의 모습보다는 약간 섬세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백의문사의 눈썹 끝에 콩알만한 붉은 점이 하나 찍혀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토록 백리강과 흡사한 인물이라면 대체 누구인가? 종리단목! 그렇다. 바로 그였다. 이때 종리단목은 화필을 움직이다가 문득 멈칫하며 손을 늦추었다. 순간, 뚝! 붓 끝에서 한 방울 먹물이 떨어져 설경 위로 번져 버렸다. 그러자 종리단목의 얼굴은 왠지 창백하게 굳어들었다. 먹물의 흔적을 바라보는 그의 미간엔 어두운 그늘마저 드리워져 있었다. "휴우……" 그는 불현듯 긴 탄식을 뿜으며 붓을 놓았다. 바로 그 순간 어디선가 낮은 비웃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후후후…… 춘야(春夜)에 어울리지 않는 설경이라…… 게다가 먹물을 너무 많이 찍어 먹물 방울이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있었으 니…… 실망이군. 내가 듣던 종리대공자와는 너무 많은 차이가 난단 말이야." "……!" 종리단목은 일순 흠칫했으나 곧 싸늘하게 일성했다. "누구냐? 누가 감히 내실을 엿보고 있느냐?" "하하하……!" 낭랑한 대소가 일었다. 밤바람인가? 대소와 동시에 한 줄기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어느새 방 안엔 한 인영이 우뚝 출현해 있었다. 신비한 기운을 뿜어내는 백의복면인이었다. 종리단목의 안색이 싸늘히 굳어 들었다. "무엄하구나. 감히 금위부 대영반의 집에 복면을 쓴 일개 도적이 함부로 횡행하다니……!" 복면인의 두 눈빛이 일순 기광을 뿌렸다. "도적……? 하하…… 이것 또한 실망인걸……? 나를 겨우 도적 따위로 취급하다니…… 쯧쯧…… 안목이 그 정도밖에 안되어서야 원……!" "……!" 종리단목의 미간은 심히 찌푸러들고 있었다. 그 모습에 복면인은 재차 낭랑히 대소했다. "핫핫……! 안면 찌푸리지 말게나. 금위부 대영반 나으리의 저택엔 가져갈 만한 물건이 없다는 것쯤은 알고 왔으니……" 종리단목은 묵묵히 복면인을 응시했다. 그의 내심엔 한 가지 확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 일개 도적은 아닌 것 같다. 담담하며 신비로운 기운이 전신에 흐르는 것을 보아 목적은 다른 데 있는 듯하다!) 한차례 뇌리를 굴린 그는 한층 부드러워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대는 무슨 목적으로 이 야밤에 내 방을 찾았는가?" 순식간에 평정을 찾는 종리단목의 태도에 복면인은 뜻밖이라는 듯 두 눈에 기광을 떠올렸다. "흠…… 목적이라……? 그렇지. 내가 종리대공자를 찾아온 것은 분명 목적이 있어서지." "……?" "그건 그렇고…… 듣기는 했지만 이건 정말 너무 똑같군." 이 뚱딴지같은 소리에 종리단목은 흠칫했다. 실상 백의 복면인은 백리강이 변장한 모습이었다. 그는 모종의 목적을 갖고서 이곳으로 온 것이다. 이곳으로 오기 전 성혼의 말을 듣긴 했지만 그는 종리단목을 보며 큰 충격을 받았다. 마치 거울을 보는 듯 착각이 들 정도로 그의 모습은 자신과 흡사했던 것이다. 백리강은 짓궂은 눈빛으로 종리단목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그대를 찾아온 이유는 바로 그대의 몸이 필요하기 때문이네." "뭣이?" 종리단목은 침착성을 잃고 두 눈썹을 꿈틀했다. "핫핫…… 너무 놀라지 말게. 종리대공자……" 백리강은 한차례 대소한 뒤 돌연 전신에 음산한 기운을 떠올렸다. "나는 한 가지 알아내야 할 일이 있고…… 또 그 일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대의 몸이 필요하다." 종리단목의 표정이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 그의 얼굴 위로 괴이한 미소가 스쳤다. "나로 변장해서 무언가를 알아보겠다는 뜻인가?" "머리가 좋으니 말하기도 쉽군, 바로 그것이 내 뜻이네." "가능하다고 여기는가?" "물론." 백리강이 고개를 끄덕이자 종리단목은 일순 낭랑히 웃었다. "하하하…… 그대는 상대를 잘못 짚었다. 그대는 곧 나를 택해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백리강의 두 눈에 야릇한 광채가 떠올랐다. "후후…… 그대를 지키는 호위고수 십삼인(十三人)을 믿고 하는 말이라면 일찌감치 꿈을 깨는게 좋을거야." 종리단목의 안색은 돌처럼 굳어 버렸다. "후후…… 그대의 호위무사 십삼 인은 모두 보통이 아니더군. 놀랍게도 금위부의 무사들은 아니었어. 모두가 최고의 수련을 거친 진짜 무인들이었지. 하나 말이야…… 그들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내겐 한낱 허수아비에 불과할 뿐이야." 종리단목은 더욱 굳어진 얼굴로 어둡게 물었다. "그들을 어떻게 했나?" "잠시 쉬게 만들었다." 백리강은 천천히 그에게 다가들었다. 종리단목의 안색은 홱 변했다. "다가오지 마라!" "하하…… 종리대공자, 미안하네." 한가닥 지풍이 종리단목을 향해 쏘아졌다. "욱!" 종리단목은 일순 마혈(魔穴)이 제압되어 굳어 버렸다. 백리강은 그에게 바싹 다가들며 진심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미안하네만…… 삼 년 간만 다른 곳에 가 있어줘야만 하겠어. 참……또 한 가지 실례 좀 해야겠어…… 그 동안 공자의 옷도 내가 빌려 입어야겠고……" 그와 동시에 백리강은 종리단목의 겉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종리단목의 얼굴은 아예 사색이 되었다. "손…… 손을 멈춰라!" "후후…… 사과는 삼 년 후에나 하지." 백리강은 이내 상의를 벗겨냈다. 한데 상의를 벗기운 종리단목의 가슴엔 흰 천이 칭칭 동여매 있지 않은가? 백리강은 의아하여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이유로 가슴을 이렇게 천으로 감고 있는 거지?" 종리단목이 하얗게 질린 채 애원했다. "제…… 제발…… 그것만은 건드리지 말아주오." 백리강은 더욱 의혹이 솟구침을 느꼈다. 이어 문득 두 눈에 이채를 띄운 그는 그 흰천마저 풀어갔다. 한데 이 무슨 조화인가? 천을 푸는 순간 그 안에서 희뽀얀 육봉(肉峯)이 튀어나온 것이 아닌가? 사내에게 탐스러운 젖가슴이라니……! 오오…… 종리단목, 그는 여인이었던 것이다. 백리강은 안색이 굳어진 채 주춤 물러섰다. "여…… 여인……?" "……" 종리단목은 안색이 창백해진 채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부챗살같은 눈썹 끝으로 한 방울 맑은 이슬이 배어 나왔다. 여인의 수치심이 흘러 나왔다. 백리강, 그는 도저히 예상치 못한 일이라 크게 경악하고 있을 뿐이었다. "종리단목…… 당신이…… 여인이었다니……!" 그가 간신히 입을 열자 급기야 종리단목은 두 줄기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악다문 그녀의 입술 사이로 처연하기 그지없는 음성이 새었다. "죽여…… 다오……!" 백리강은 크게 당황하여 급히 입을 열었다. "종리공자, 아니…… 소저! 나는 소저가 여인일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소." "……" 종리단목의 두 눈이 천천히 뜨였다. 순간 백리강은 내심 섬뜩함을 느꼈다. 종리단목의 눈빛 무섭도록 가라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그런 채로 비장하게 말했다. "제발…… 죽여다오." "왜…… 그런 말을……?" 그러자 종리단목은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지난 이십 년 동안 지켜온 비밀이었다. 네가 이 비밀을 안 이상 나는 살아 있을 수가 없다……!" 수치와 모멸감을 숨길 수 없는 비감어린 음성이었다. 백리강은 할 말을 잊었다. 그러다 문득 그의 시선이 종리단목의 드러난 가슴에 닿았다. 박을 쪼개 엎어놓은 듯 희뽀얗고 투명한 속살이었다. 실로 눈부실 정도로 희고 탐스런 가슴이었다. 분홍빛 유실이 그의 눈을 강하게 자극했다. 백리강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아무래도…… 계획을 잘못 잡았구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는 지체없이 종리단목의 혈도를 풀어준 뒤 천천히 신형을 돌렸다. 종리단목은 백리강을 잠시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었다. "삼월천(三月天)에서 보냈느냐?" "……!" 백리강은 처음 듣는 이름에 내심 고개를 갸웃했다. (삼…… 월…… 천……?) 이어 그는 은은히 고소지으며 고개를 돌려 종리단목을 향했다. 하나 그는 또 다시 멈칫하고 말았다. 종리단목은 여전히 벌거벗은 상체를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도 그는 조금도 거리끼거나 얼굴을 붉히지 않고 있었다. 고요히 가라앉은 시선으로 백리강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삼월천이 무엇인지 모르오." "……" 종리단목은 말없이 그를 직시했다. 백리강의 눈을 통해 뭔가를 알아내려는 듯 그녀의 눈빛은 강렬했다. 잠시 후, 그녀는 백리강의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듯 천천히 흰천으로 자신의 가슴을 다시 동여맨 뒤 옷을 입었다. 그리고 탁자 곁으로 다가가 무너지듯 의자에 앉았다. 허탈한 기운이 그의 전신에서 배어 나오고 있었다. 백리강은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자신도 모르게 그와 마주 자리했다. "아무래도…… 내가 생각을 잘못한 것 같소." "……?" 그가 조용히 말하자 종리단목은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나의 계획으로 인해…… 소저에게 해가 된다면…… 이만 물러가겠소." 동시에 백리강은 미련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실례 많았소." 그는 가볍게 목례한 뒤 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때, "잠깐." 종리단목의 일성이 일었다. "……?" "귀공의 대명(大名)을 알고 싶소." 여전히 종리단목의 말투는 남자와 같았다. 영락없는 무인가문(武人家門)의 남자 말투, 도저히 여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음성이었다. 백리강은 천천히 신형을 돌려 세우며 입을 열었다. "본인은 백리강이라 하오." "백리강……!" 종리단목은 잠시 그 이름을 되뇌였다. "귀공이 이곳에 온 진정한 이유는 무엇이오?" "좀 전에 말한 그대로…… 종리공자로 변신하여 한 가지 해결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오." 백리강은 부지중 공자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직접 여인임을 확인(?)한 그로서도 종리단목이 여인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나 종리단목은 그것을 개의치 않는 듯 다시 물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인지 말해 줄 수는 없겠소?" "그것은……" 백리강은 잠시 망설였다. "말하기 곤란한 것이오?" 종리단목의 얼굴 위로 단순한 호기심 이상의 그 무엇이 떠올랐다. 백리강은 내심 한차례 염두를 굴렸다. (때때로…… 인간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에 부딪치는 경우가 있다. 지금의 나 역시…… 그런 경우가 아니겠는가?) 그의 입술이 복면 속에서 지그시 한일자로 다물렸다. (어쩌면…… 정면으로 부딪쳐 보는 것이 나은 방법일 수도 있다!) 결심을 굳힌 백리강은 이내 얼굴에 쓴 복면을 벗었다. 순간, "아니?" 종리단목은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어찌나 놀랐는지 그는 부지중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눈 앞의 사내가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니 어찌 경악치 않을 수 있겠는가? 거울을 보듯 마치 판에 박은 듯이 너무도 똑같지 않은가! "귀…… 귀공은 대체 누구요?" 종리단목은 흡사 도깨비에 홀린 듯한 얼굴로 더듬더듬 물었다. 백리강은 고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방금 말하지 않았소? 백리강이라고……" "마치…… 거울을 보고 있는 것 같군……" 망연자실한 음성이 종리단목의 입술 사이로 흘러 나왔다. 백리강은 멋쩍게 웃었다. "나 역시…… 당신을 처음 보는 순간 내 분신을 보는 것 같았소." "……!" 불현듯 종리단목의 안색이 싸늘히 굳었다. "혹시…… 변장한 것은 아니오?" "변장……?" 백리강은 재차 고소를 머금고 말았다. "나는 종리공자 당신이 나로 변장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소." "……!" 종리단목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하나 그의 두 눈빛은 백리강을 빨아 들일 듯 응시하고 있었다. (이 사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때 백리강은 미소띈 얼굴로 음성을 잇고 있었다. "나는 종리공자를 보는 순간 혹시 나의 부친께서 쌍둥이를 낳지 않았나 의심까지 했었소." 종리단목은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는 없소. 나는 형제가 없는 홀홀단신의 몸이오." 이어 문득 그는 눈빛을 부드럽게 바꾸며 말했다. "어쨌든 앉으시오. 당신이 어떤 목적으로 왔든…… 삼월천과 관계없는 일이라면 상관치 않겠소." 백리강은 빙긋 웃으며 다시 그와 마주 앉았다. 종리단목은 찻잔을 꺼내 향기좋은 차를 두 잔 따르었다. "황가에서 내려오는 용향설록차(龍香雪綠茶)요, 들어 보시오." 백리강은 곧 그가 권하는대로 차를 들었다. "흠…… 향기가 매우 좋소." "……" 종리단목은 그저 싱긋 웃을 뿐이었다. 이어 그 역시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기이한 눈빛으로 백리강을 지그시 응시했다. "천하에서…… 내가 여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오직 나의 부친과 당신 밖에는 없소." "……!" "당신은 나보다 강하오. 훨씬……! 그러니 당신이 나를 속이지는 않을 것이라 믿소. 만약 귀공이 나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 해준다면 나 역시 당신에게 나의 모든 이야기를 해주겠소." 말하자면…… 공평한 거래를 하자는 뜻이 아닌가? 백리강은 내심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묵묵히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자 종리단목은 더욱 진중한 얼굴로 제의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의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당신이 원하는 것을 들어 주기로 하겠소." "으음……" 백리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나 실상 그의 마음은 종리단목에게 모두 털어놓기를 원했다. 왠지 그에게서 어떤 끊을 수 없는 운명의 끈을 느낀 것이다. 마치 천존마제에게서 느꼈던 것 같은 그런 종류의 친근감이었다. 생각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백리강은 곧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 아래…… 이처럼 똑같은 모습을 지녔다는 것도 큰 인연이라면 인연이 아니겠소? 좋소…… 모든 것을 말해 드리리다." 종리단목의 입가에도 빙그레 기분좋은 웃음이 떠올랐다. 백리강은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좀전에 말한대로 나의 이름은 백리강이요. 그리고 나는 과거 천존마제의 후예로서 현 마교(魔敎)의 대지존의 신분이오." 순간, 종리단목의 안색이 일시에 급변했다. 비록 그가 황실의 녹을 먹는 무가의 자손으로 자라왔지만 그역시 마교의 전설에 대해선 수없이 들어온 바가 있었다. 죽음과 공포와 피의 대명사로 불리우는 천년 신화의 마교! 한데 그 마교를 지배하는 대지존이 눈 앞의 인물이라니 어찌 놀랍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름만 들어도 정도인(正道人)들이 공포에 떠는 천존마제의 후예라는데……! 종리단목은 두려움과 경외심을 동시에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쩐지…… 기도(氣度)가 범상치 않다 했더니……!) 그런 중에도 백리강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자신의 출생의 비밀에서 현재의 상황에 이르기까지를 대략 간추린 내용으로 들려 주었다. 하나 그것만으로도 그의 이야기는 통천가공할 내용이었으니……! "……!" 종리단목은 경악하다 못해 아예 넋을 잃고 있었다. 이윽고 백리강의 이야기가 모두 끝나자 종리단목은 긴 탄식을 터뜨렸다. "마교의 대지존이셨다니…… 진정 엄청난 신분이구려." 백리강은 싱긋 웃어 보였다. "이제 그대가 얘기할 차례요." "……" 종리단목은 심중을 가다듬는 듯 잠시 침묵했다. "옛날…… 오백년(五百年) 전…… 중원에는 아무도 모르게 하나의 단체가 결성되었소. 비밀리에 결성된 그 단체의 이름은…… 삼월천(三月天)이오." "삼월천……?" 백리강이 되묻자 종리단목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핏 두 눈빛에 음영을 드리운 채 그는 말을 계속했다. "삼월천을 세운 인물들은 그때 당시 모두 스물 일곱 명이었소. 한데 그들 이십칠 명은 세 가지 성씨(姓氏)로 분류되었소." "세 가지 성으로……?" "그렇소. 바로…… 공손(公孫)씨와 단목(端木)…… 그리고 헌원(軒轅)씨였소." "음……" 종리단목은 잠시 말을 끊고는 한 모금 차로 목을 축였다. 그리고 다시 조용하고 차분한 설명을 이었다. "그로부터…… 사백 년이 흐르면서 삼월천은 극히 강성(强盛)해졌소. 아니…… 지나치게 강해졌다고 해야 옳을 정도였소. 그리고 삼월천 사이에서는 세력의 패권을 놓고 끝내 암투가 벌어지기 시작했소. 특히 삼월천의 전대조사(前代祖師)들이 만든 삼월진경(三月眞經)은 그 암투의 가장 핵심 대상이 되었소." 종리단목의 두 눈빛에 서린 음영이 더욱 짙어졌다. "삼월진경은…… 삼월천의 천주(天主)에게만 전수되어 오던 비급이오. 한데 백 년 전 삼월천의 구대천주(九代天主)가 급사하면서 피비린내나는 혈겁이 시작된 것이었소……" 종리단목의 입에서 백 년 전의 피비린내 나는 비사(秘事)가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강호상에서도 극소수의 인물만이 알고 있는 전대비사가…… 삼월천(三月天)----! 오백 년 내력의 극비세력. 또한 세 가지 성씨(姓氏)가 융합되어 이룬 세력이 바로 삼월천이었다. 한데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 삼월천에 일대 회오리가 일기 시작했다. 단목운진(端木雲震), 그는 삼월천의 구대천주(九代天主)였다. 그런 그의 급작스런 죽음은 삼월천 내부에 크나큰 충격파를 던져주었다. 당시, 삼월천에는 각기 다른 성씨의 세 명의 지배자가 있었다. 단목가문의 가주(家主)로서 단목운진의 아들 단목소(端木 ), 공손가문의 가주인 공손의붕(公孫義鵬), 그리고 헌원가문의 가주 헌원도(軒轅濤)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 중 가장 막강한 힘을 지닌 가문은 헌원도가 이끄는 헌원가였다. 자연 헌원도는 삼월천의 천주가 될 야심을 품었다. 그런 속셈으로 그는 자신의 세력 기반을 토대로 강력히 밀고 나왔다. 즉, 그 상태에서 천주가 될 인물은 당연히 자신밖에는 없다는 것이었다. 하나 단목운진의 아들 단목소의 생각은 달랐다. -헌원도…… 그는 야심이 너무 크다. 만일 그가 삼월천의 천주가 된다면…… 삼월천의 이념이 무너질 뿐 아니라 그 여파가 중원까지도 미치게 된다. 그렇기에 헌원도가 천주가 되는 것을 결단코 막아야 한다! 일단 그렇게 마음먹은 단목소는 여러가지로 헌원도를 설득시켰다. 하나 대단한 야심을 품은 헌원도가 쉽사리 그의 말을 들을 리 없었다. 결국 단목소는 궁여지책으로 헌원도에게 한 가지 제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삼월천의 세 가주가 싸워 이긴 자가 천주가 되고 삼월진경을 갖도록 하자고…… 또한 최후의 승자가 나온 가문이 향후 백 년 동안 천주 자리를 계승토록 하자고 헌원도를 회유했다. 헌원도는 그 제안을 쾌히 승낙했다. 그리고 다음 날 우선 헌원도와 공손의붕이 세 가문의 인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무공을 겨루었다. 처음 얼마동안 그들은 막상막하를 이루는 듯했다. 하나 공손의붕은 결코 헌원도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간신히 헌원도를 상대하던 공손의붕은 결국 천합 만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에 사기충천한 헌원도는 곧장 단목소와 겨루었다. 그러나 예상을 뒤엎고 단목소가 헌원도를 격파했으니……! 무려 삼천초(三千招)나 겨룬 끝에 힘겨운 승리를 한 것이다. 실상 단목소나 공손의붕은 애초부터 헌원도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하나 공손의붕과의 싸움에 진력을 소모한 헌원도는 단목소를 너무 과소평가하여 연속적인 싸움을 벌였다. 결국 헌원도의 오만함이 그를 무참히 패배시킨 것이었다. 또한 단목소의 격장지계(激將之計)의 눈부신 승리라고 할 수 있었다. 헌원도는 이를 갈았으나…… 어찌하랴? 약속은 약속인 것을……!" 그 후 백 년 간 단목가문은 삼월천을 장악했다. 하나 그 동안에도 헌원가문은 이를 갈며 보복의 기회만을 노려왔다. 그리고 약속된 백 년이 가까워 올 무렵 헌원가문엔 무서운 고수가 등장하게 되었다. 헌원륭(軒轅隆). 헌원도의 손자인 헌원륭이 바로 그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헌원도에게 직접 무공을 사사받고 자랐다. 그가 청년이 되자 그의 무공은 오히려 헌원도를 능가할 지경이 되었다. 가히 삼월천 내에서 그의 상대를 찾기 힘들 정도였다. 단목가문과 공손가문은 위기를 느꼈다. 약속된 기한 백 년은 다가오는데 대책이 없었다. 그런 때에 헌원도가 단목소에게 대전을 요구해 왔다. 이번엔 그의 손자인 헌원륭과 단목소의 손자인 단목강(端木强)을 대결시키자는 것이었다. 역시 백 년 간 천주자리를 지킬 것과 삼월진경의 소유여부를 가리자는 제의였다. 한데 우연이었는지 돌연 단목소의 손자 단목강이 병사하고 말았다. 그렇게 되자 헌원륭은 싸울 상대를 잃게 되었다. 이에 단목소는 다시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단목강의 아들, 즉 자신의 증손자로 하여금 자신의 무공을 전수받게 하여 이십 년 후에 대결시키자는 제의였다. 헌원도는 어쩔 수 없이 그 제의를 받아 들여야 했다. 단목소는 싸우기엔 너무 노쇠했으며 단목강 이외의 후손은 없었던 것이다. 헌원륭을 단목소와 겨루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결국 헌원가와 단목가의 숙명적인 대결은 다시 이십 년 후로 연기되었다. 종리단목의 길고긴 설명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 백리강은 적이 놀란 얼굴로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어느새 용향설록차는 싸늘히 식어 있었다. 종리단목은 그의 잔에 다시 뜨거운 차를 부어주며 말을 이었다. "나의 진정한 이름은 단목진(端木眞)…… 내가 바로 단목소의 증손자요." "……!" 백리강이 흠칫하자 종리단목은 희미한 웃음을 떠올렸다.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 궁금할 것이오." "무척 궁금하오." "그러니까…… 이십 년 전 증조부께서는 삼월천의 평화를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증손녀인 나를…… 남자처럼 키워 헌원륭에 대항시키려 하셨소. 하나 언제부터인가 헌원가는 나를 의심하기 시작했소." "……?" "삼월천의 율법 중에는 결코 여인은 천주가 될 수 없다는 항목이 들어 있소. 그런 연유로……" 삼월천. 이 신비세력 내에서 여인은 천주가 될 자격이 없었다. 때문에 단목소는 종리단목, 즉 단목진이 여아(女兒)라는 사실을 숨기고 키웠다. 한데 단목진이 두 살 무렵부터 헌원가에서는 그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단목소는 암담해졌다. 단목진이 여인이라는 사실이 들통나면 자연히 천주자리는 헌원륭에게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삼월천의 평화는 그것으로 끝장이었다. 그때 단목소에게 한 가지 묘안이 떠올랐다. 그에게는 중원에 한 명의 기명제자가 있었는데 바로 그가 황궁 금위부의 영반으로 있는 종리후였다. 당시 종리후에게는 아들이 있었으나 두 살 무렵 사고로 죽어 버렸다. 단목소의 생각이 바로 그 점에 미친 것이었다. 단목소는 그 즉시 비밀리에 단목진을 데리고 삼월천을 빠져 나갔다. 그리고 일말의 희망을 품고 종리후를 만났던 것이다. 종리단목은 빙긋 의미심장하게 미소지었다. "그렇게 해서 종리단목이 탄생한 것이었소. 물론 헌원가에선 내가 단목진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소." 백리강은 어이가 없었다. 실로 내력 중에도 기괴하기 이를 데 없는 내력이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궁금증을 이내 털어 놓았다. "헌원도나 헌원륭이 어째서 얌전히 있는 것이오?" 종리단목은 피식 실소했다. "사실…… 그들은 내가 중원으로 빠져나간 사실을 알고 증조부께 심할 정도로 따져 물었소. 하나…… 증조부님은 약속된 이십 년 후에 내가 나타나서 헌원륭과 대결하면 되지 않느냐고 딱 잘라 말씀하셨소. 그러니 그들은 할 말이 없어진 것이오……" "흠……" 백리강은 그럴 듯한 이치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그는 기이한 눈빛을 뿌렸다. "한데 조금 전 나를 보고 왜 삼월천에서 보냈느냐 물었소? 그들은 종리공자가 이곳에 있는 것을 모르지 않소?" 그 말에 종리단목은 어두운 기색을 띄웠다. "삼월천 헌원가문의 고수들은 지난 이십 년 간 나를 찾기 위해 끈질기게 수소문해 왔소. 그러다 결국은…… 이곳 천진장원에 있는 나를 의심하기 시작했소. 그동안 몇번이나 이곳을 조사하기도 했으니까……" "어찌…… 모면했소?" "귀공께서 만난 십 삼 인의 고수들이 그들을 교묘히 따돌려 버리곤 했소." "아……!" "그들 십 삼 인의 고수들은 증조부께서 비밀리에 키운 무사들이오." "……!" 백리강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중원의 무학(武學)과는 다른 무공을 쓴다 했지!) 그때, 종리단목은 더욱 어둡게 물든 얼굴로 탄식하듯 입을 열고 있었다. "이제…… 이십 년 지약의 기한이 반 년밖에는 남지 않았소. 한데…… 실상 나는 그 동안 무공을 조금도 익히지 못했소." "……?" "육 년 전…… 무공을 익히다가 주화입마(走火入魔)하여 내공을 모두 소실해 버렸기 때문이오." 종리단목의 얼굴은 처참할 정도로 무겁게 이그러지고 있었다. "내공이 그대로 있어도 헌원륭을 당할 수는 없소. 한데 그 내공마저 소실되어 버렸으니……!" 질끈! 그는 입술을 깨물며 회의어린 일성을 내뱉았다. "이젠 끝장이오." "으음……" 백리강은 부지중 낮게 침음했다. 왠지 그의 일이 남의 일같지 않았던 것이다. 문득 백리강의 두 눈에 번뜩 이채가 떠올랐다. 무슨 묘안이 생각난 것일까? 그는 급히 종리단목을 향해 입을 열었다. "종리공자! 이렇게 하면 어떻겠소?" "……?" "나도 할 일이 있고, 종리공자도 할 일이 있으니……" 백리강의 다음 말은 전음으로 계속되었다. 순간 종리단목의 얼굴이 금시 희색만면해졌다. "저…… 정말 그렇게 해 주시겠소?" 백리강은 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그러자 종리단목은 어찌나 기쁜지 그의 손을 덥석 잡아 가슴에 끌어 안았다. "백리공자, 정말 고맙소……! 뭐라고 이 종리단목…… 감사의 말을 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오." 백리강의 손은 종리단목의 가슴에 바짝 밀착되어 있었다. 그러자 손끝으로 여인의 가슴의 탄력이 느껴졌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멋쩍게 웃었다. "종리공자…… 손좀……" "……?" 종리단목은 의아하여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백리강의 손이 자신의 가슴에 바짝 밀착된 채 안겨 있는 것이 아닌가? "아……!" 종리단목은 낮게 부르짖으며 이내 그의 손을 놓아 주었다. 그리고는 멋쩍게 웃어 보이는 것이었다. "사실…… 이십 년 동안이나 남자 행세를 해왔더니…… 내가 여인이라는 의식이 거의 들지 않는구려. 몸만 여인일 뿐이지 지금 나의 사고방식은 완전히 남자나 마찬가지요. 하하……!" 종리단목은 진정 남자처럼 호탕히 웃었다. 이어 씁쓸히 고소하며 한 마디 덧붙였다. "불행인지…… 어떤지…… 아직은 나도 모르겠소." 종리단목의 그런 모습이 왠지 그늘져 보이는 것은, 단지 백리강의 선입견 때문이었을까? …… 그날 밤 귀신도 모르게 두 인물이 바뀌어졌다. 백리강과 종리단목, 기이하게도 닮은 꼴의 운명을 타고난 그들이 서로의 필요에 의해 운명을 잠시 맞바꾼 것이다. 기한은 삼년(三年)……! 삼 년 동안 백리강은 종리단목이 되기로 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밤마다 백리강은 종리단목으로부터 그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전수받기 시작했다. 진정한 종리단목의 대역(代役)이 되기 위해 백리강은 종리단목을 배우고 익혀 갔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자연스럽게 친밀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보름이 지났다. 5 청운정(靑雲亭). 천진장원 내에 있는 정자였다. 봄볕이 따사로운 오후, 연못 가운데에 그림처럼 자리한 청운정엔 두 인물이 나와 있었다. 백의문사 차림의 종리단목과 검은 턱수염을 기른 고고한 풍도의 육십대 노인이었다. 바로 당대 북경성 제일의 국수(國手)로 일컬어지는 소무량, 그였다. 소무량은 그동안 종리단목과의 대국에서 번번이 패배의 쓴잔을 마시고 돌아가곤 했었다. 그 후 반 년 간 그는 두문불출하며 종리단목을 찾지 않았었다. 한데 오늘 낮에 돌연 그가 종리단목을 찾아온 것이 아닌가? "허허…… 종리 대공자, 노부가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와 방해가 된 것은 아닌지……" 소무량은 적잖이 미안하다는 얼굴로 종리단목을 응시하고 있었다. 종리단목은 빙긋 밝은 웃음을 머금었다. "별 말씀을……! 다른 분도 아니고 소대인이신데…… 저는 언제든 환영입니다." 소무량은 그 말에 기분이 좋아진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그 말을 들으니 안심이네." 이어 그는 노안(老眼)을 빛내며 말했다. "어떤가? 시간이 있으면 바둑 한 판 두는 것이……" 종리단목은 낭랑히 대소했다. "하하……! 이미 소대인을 뵙는 순간부터 준비를 하고있었습니다. 바둑이 아니면 소대인께서 저를 찾아오실 이유가 없을테니까요……" "음……?" 소무량은 정곡을 찔린 듯 이내 멋쩍게 웃었다. "허허…… 속 마음을 들켜 버린 셈인가?" "하하하……" 봄 햇살 만큼이나 밝은 웃음소리가 연못 위로 잔잔히 퍼졌다. 종리단목은 바둑판을 사이로 소무량과 마주 앉았다. 문득 소무량이 그를 의미깊은 눈초리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종리공자, 오늘은 노부가 예전처럼 그리 쉽게 지지는 않을 것이네." 종리단목은 빙그레 웃었다. "저에 대해 그동안 연구를 좀 하신 모양이군요?" "음! 지난 반 년 간…… 노부는 패인(敗因)을 분석하여 공자의 기풍(棋風)을 완전히 파악했다네. 아마 오늘은 노부가 완승(完勝) 을 하지 않을까 생각하네만……" 진정 자신이 있다는 표정이었다. 종리단목은 씨익 웃으며 바둑판 앞으로 다가 앉았다. "승부야 두어봐야 알겠지요." "그럼…… 노부가 흑(黑)을 쥐겠네." 소무량은 곧 흑돌을 하나 집어들어 선수(先手)를 두었다. 탁! 그러자 종리단목은 여전히 웃음기를 거두지 않은 채 백돌을 집었다. 그의 백돌은 곧장 바둑판 중앙에 놓였다. 순간, (음?) 소무량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이건 무슨 기법(棋法)이지?) 첫수부터 수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종리단목이 둔 수(手)는 그가 본래 두던 정통 바둑기법과는 완연히 틀리지 않은가? 더욱이 과거 그의 기풍으로 미루어 결코 이렇게 둘 리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 종리단목의 태도와 표정은 너무도 느긋했다. 소무량은 내심 의혹을 굴리다가 결국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무슨 다른 수가 있나 보군!) 그는 이어 그의 기법대로 계속 흑돌을 두었다. 탁……! 탁……! 바둑판은 차츰 흑돌과 백돌로 채워져 가기 시작했다. 한데 종리단목이 두는 수는 여전히 기괴무쌍하기만 했으니…… 소무량이 한수 한수에 신중을 기해 놓는가 하면 종리단목은 그 반대였다. 그는 소무량이 흑돌을 놓기 무섭게 백돌을 놓는 것이었다. 뿐인가? 그의 한수 한수는 실로 엉뚱했으며 변화무쌍하기 그지 없었다. 소무량이 진정 예상치도 못한 곳에 백돌을 두곤 했던 것이다. 처음엔 정통기법을 펼치는 소무량의 흑돌이 우세를 점하는 듯했다. 하나 시간이 흐를 수록 소무량은 등에 진땀이 맺히는 것을 느꼈다. (이…… 이럴 수가 있나……?) 보라. 별 의미없이 사방에 깔아놓은 듯한 백돌들이 흑(黑)의 대마(大馬)를 위협하고 있지 않은가? 중반에 접어들며 변칙적인 백돌의 기법이 우세를 보인 것이다. (이럴 수가…… 이건 평소 종리공자의 기풍이 아니야.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가……) 소무량은 낭패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하나 그가 어찌 알았으랴? 지금의 그는 진정한 종리단목이 아님을…… 그는 바로 백리강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소무량이 제아무리 반 년 간 종리단목의 기풍에 대해 연구분석 했으면 무슨 소용인가? 사람이 바뀌어 버렸거늘…… "……" 소무량은 망연한 얼굴로 바둑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바둑판 위의 흑돌은 아예 한곳도 살아날 틈이 없게 되어 버렸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종리단목, 아니 백리강은 내심 고소를 머금었다. (후후…… 고민 좀 되시겠지! 바둑으로는 한 번도 진적이 없다던 성혼도 내게는 다섯 점을 깔고 두는데…… 소영감…… 그대가 감히 나를 이기려 한단 말인가? 어디 혼좀 나 봐라……) 아닌게 아니라 소무량은 보통 혼줄이 빠진 것이 아니었다. 그저 멍한 시선을 바둑판에 주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져…… 졌네!" 마침내 소무량은 침통한 신색으로 돌을 던지고 말았다. 이어 백리강을 향하며 탄식하듯 입을 열었다. "반 년 동안…… 공자의 기법이 너무도 변했군." 백리강은 씨익 여유있게 웃었다. "바둑의 원리가 무궁무진할진대 어찌 한 가지 기풍만을 지닐 수 있겠습니까?" "……!" 소무량은 그를 넋나간 눈빛으로 바라 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는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한데…… 조금 전의 그 기법은 무슨 류(類)의 것인가? 노부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기법이네만……" "그것은…… 일명 천일류(天一流)라는 것으로 제가 이번에 새로 개발한 백 가지 기법 중의 하나입니다." "배…… 백 가지나……!" 소무량은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이어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긴 탄식을 불어냈다. "내…… 죽을 때까지…… 자네를 따르지 못할 것 같군." 백리강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저를 이기는 방법이 한 가지 있기는 있습니다." "……?" "저와 바둑을 둘 때 열점(十點)을 미리 깔고 두시면 됩니다." 찰나 소무량의 노안(老顔)은 아예 흑색이 되어 버렸다. 망연자실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온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였다. "열점을……? 국수(國手)인 내가……" 6 원래 종리단목은 극히 폐쇄적인 인물이었다. 때문에 그는 북경성 내에서 가장 유명했으면서도 가장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다. 특히 그는 북경의 명문가 자제들과 전혀 교류가 없었다. 그들이 종리단목을 보고자 해도 종리단목 스스로가 꺼려왔던 것이다. 한데 그 불문율이 깨어지기 시작했다. …… 구문제독부(九門提督府). 일국의 병권(兵權)을 장악하고 있는 무가(武家) 최고의 가문이다. 이곳의 주인 구문제독은 양자헌(楊子軒)이었다. 그에겐 올해 스물 여섯 살난 아들 양광진(楊光秦)이 있었다. 양광진은 호방한 성격에 배포가 큰 인물로 알려져 있다. 열여덟에 무과(武科)에 장원 급제한 그는 현재 젊은 나이임에도 상당한 직위에 올라 있었다. 게다가 구문제독의 아들이라는 배경은 그를 더욱 당당한 위치로 올려 놓았다. 그런 그에겐 한 가지 독특한 취미가 있었다. 즉 한 달에 한 번 북경 명문가의 자제들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곤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는 그의 호방한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데 그에겐 옛날부터 가장 못마땅하게 여겨지는 인물이 한 명 있었다. 바로 천진장원의 소장주(小莊主)인 종리단목이 그였다. 그는 양광진의 끈질긴 초대에도 단 한 번도 응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양광진은 그런 그가 몹시 못마땅했다. 물론 그가 천성적으로 문(文)을 멸시하는 탓도 있었다. 하나 그의 눈엔 자신보다 크게 소문난 종리단목이 가시처럼 여겨지는 것이었다. 아무튼 양광진은 월례행사처럼 북경성 명문가에 또 다시 초대장을 돌렸다. 그것이 이미 삼 일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의례적인 인사치레로 그는 이번에도 종리단목을 빼놓지 않았다. 연회에 참석하리란 기대도 않은 채 별뜻 없이 초대장을 보냈던 것이다. 한데 이변(異變)이 발생했다. 종리단목, 그가 구문제독부에 나타난 것이다. 풍류헌(風流軒). 구문제독부의 후원에 위치한 정자였다. 풍류헌은 비단잉어가 노니는 작은 연못의 중앙에 세워진 삼층 누각이었다. 그리고 연못의 주위는 온통 울창한 청죽림(靑竹林)으로 이뤄져 있었다. 실로 고아한 운치를 느끼게 하는 곳이었다. 그런 까닭에 구문제독의 아들 양광진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했다. 오늘도 풍류헌엔 양광진을 비롯한 십여 명의 젊은이들이 모여 있었다. 바로 한 달에 한 번 베푸는 연회가 풍류헌에서 있었던 것이다. "하하하하……!" "호호호……" "하하……!" 연신 터져 나오는 밝은 웃음소리---- 그들은 모두 영기발랄한 북경명문가의 귀한 자제들이었다. 장군부(將軍府)의 영호필(令弧弼)을 비롯하여 병부상서(兵府尙書)의 아들 목승호(木勝浩) 등…… 그들은 양광진을 중심으로 하여 긴 탁자에 둘러앉아 있었다. 한데 양광진의 옆엔 눈이 번쩍 뜨이는 미녀 두 사람이 자리하고 있지 않은가? 공작의 화려함과 학(鶴)의 고고함을 함께 갖춘 두 절세미모의 백 의소녀, 그녀는 바로 양광진의 누이동생인 양옥상(楊玉霜)이었다. 그녀는 북경제일 미녀로 손꼽히는 미녀이기도 했다. 그리고 화려하지는 않으나 청초함과 은은한 지성미를 풍기는 녹의소녀, 그녀는 영호필의 누이동생인 영호미미(令弧美美)였다. 원래 양옥상은 이런 떠들썩한 자리엔 잘 나오지 않는 편이었다. 하나 오늘만은 영호미미로 인해 특별히 연회장에 나오게 되었다. 두 미녀는 상당히 친밀한 사이였던 것이다. 오늘 풍류헌은 두 미녀로 인해 더욱 환해진 느낌이었다. 자연 오늘의 화제는 온통 두 미녀에게로 집중되고 있었다. 문득, 영호필이 양옥상을 부신 듯 바라보며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하하…… 양소저의 모습이 갈수록 아름다워지시니 이러다간 북경의 젊은이들이 모두 눈이 멀어버리지나 않을까 걱정이오." 원래 양옥상에게 은근히 마음을 두고있는 그였다. 때문에 그의 말은 본심에 가까웠다. 여인, 그것도 미인이라면 이런 류의 칭찬을 싫어할 리 없었다. 더욱이 영호필같은 준재(俊才)의 칭찬임에야……! 양옥상은 명문가의 여인답게 품위를 잃지 않으며 조용히 미소지었다. "영호공자님, 다른 사람도 아닌 미매 앞에서 그런 말씀을 들으니 소녀 감당키 어렵군요." 맑은 계류가 흐르듯 음성조차 기막혔다. 그러자 영호필은 정색을 하며 나섰다. "제 말은 진심이오. 어찌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할 수 있겠소?" 그런 그의 눈빛과 얼굴엔 흠모의 기색이 숨김없이 떠올라 있었다. 그때 그 곁에 있던 병부상서의 아들 목승호가 그의 말을 거들었다. "영호형의 말씀이 맞소이다. 소생이 중원을 많이 돌아다녀 봤지만 양소저같은 미인은 한번도 본 적이 없소." 말과 동시에 그는 영호필을 돌아보며 의미있게 씨익 웃어 보였다. 기실 그 역시 한때 양옥상의 미모에 반한 적이 있었다. 하나 이미 결혼한 몸인 그로서는 양옥상이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차라리 영호필을 위해 옆에서 거들어 주는 것에 만족할 뿐이었다. 이때 양옥상은 황홀하도록 그윽한 미소를 머금은 채 꽃잎같은 입술을 열고 있었다. "여러분은…… 북경에서 진짜 미녀를 보지 못하셨기 때문에 그런 말씀들을 하고 계신 것이예요." 영호필이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흔들며 부정했다. "북경제일미녀이신 양소저 외에 진짜 미녀가 있다니…… 어찌 그런 모순이 있을 수 있소?" 그 말에 양옥상은 입을 가리며 조용히 웃었다. "호호…… 실상 북경제일미녀는 따로 있어요." "……?" "바로…… 진무왕(震武王)의 따님이신 두 분 군주(君主)님들이에요." 순간, 중인들은 일제히 흠칫하는 기색을 떠올렸다. "진무왕이라면…… 당금 황제폐하의 아우님이 아니시오?" 양옥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 분의 따님이신 두분 군주야말로 당금천하에서 제일미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예요." 영호필은 고개를 저으며 낭랑히 대소했다. "하하하……! 믿기 어렵군요." "양소저 이상으로 아름다운 미녀가 있다고는…… 두 눈으로 보기 전엔 믿을 수가 없소이다." 이번에도 목승호가 영호필을 거들고 나섰다. 그러했다. 그러한 심중은 나머지 청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리가……!) (진무왕가의 두 군주가 그토록 아름답다고……?) 그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 꽃마저 시샘할 폐월수화(閉月羞花)의 미녀 양옥상, 그녀보다 더 아름다운 미인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양옥상은 이때 은은히 옥용을 붉히며 미소짓고 있었다. "과찬의 말씀을 들으니…… 소녀 몸둘 곳을 모르겠군요. 하나 소녀의 말은 사실이예요." "……!" "사실…… 제가 그 분들을 뵌 것이 삼 년 전이었어요. 당시 대군주(大君主)의 모습은 그야말로 천상(天上)의 선녀를 방불케 했었죠. 그리고…… 이군주(二君主)는 그 당시 열 세 살로 어렸으나…… 지금쯤 결코 대군주 못지않은 절세미녀로 성장하셨을 것이예요." 그녀는 미처 꿈꾸는 듯한 얼굴과 음성으로 두 군주의 모습을 설명했다. 하나 중인들은 모두 믿기 어려운 듯 여전히 불신(不信)의 표정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아룁니다." 한 명의 중년인이 풍류헌 안에 들며 공손히 말했다. 그는 바로 구문제독부의 총관(總官)인 구자광(具子光)이었다. 양광진이 그를 발견하고 조용히 물었다. "무슨 일이냐?" 구자광이 허리를 숙이며 정중히 입을 열었다. "천진장원의 종리공자께서 당도하셨습니다." 순간, "……!" "……!" 그 자리에 모인 청년들은 일제히 경악어린 표정을 지었다. 양광진 역시 적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종리단목…… 그가 왔다고……? 그게 사실이냐?" "네, 틀림 없습니다." "……!" 모두들 서로의 얼굴을 응시했다. 너무나 뜻밖의 일이었던 것이다. 그토록 신비 속에 싸인 채 한 번도 초대에 응하지 않던 종리단목이 이곳엘 오다니 진정 해가 서쪽에서 뜨고 달이 대낮에 나올 일이 아닌가? 실상 이곳에 모인 인물들은 종리단목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다. 다만 양광진만이 천진장원을 찾았을 때 그를 소개받았을 뿐이었다. 그러니 그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양광진 뿐이라 하겠다. 자연 중인들의 표정은 경악에서 모두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이때 양광진이 급히 입을 열었다. "들어 오시도록…… 아니 내가 직접 나가 보겠다." 동시에 그는 몸을 일으켜 풍류헌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구자광이 따르고 있었다. "……!" "……!" 사람들은 모두들 흥분된 얼굴로 양광진과 종리단목을 기다렸다. (북경에 그토록 소문난 종리단목…… 대체 어떤 인물일까?) 이것이 그들의 한결같은 심정이었다. "……" 풍류헌은 물을 끼얹은 듯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다. 모두들 입(口)은 있으되 할말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들의 눈은 한결같이 크게 벌어진 채 한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곳으로 지금 한 명의 백의미공자가 들어서고 있었다. 종리단목 바로 그였다. 바람에 흔들리는 옥수(玉樹)가 저러할까? 온갖 형용사도 그의 모습엔 어울리지 않았다. 눈부시게 빛나는 그 미(美)를 어찌 표현해야 한단 말인가! 남자가 아름답다고 하는 말에는 분명 어폐가 있었다. 하나 종리단목, 그는 확실히 아름다웠다. 흡사 미(美)를 다스리는 신(神)인 양…… 양광진도 어디가면 빠지지 않는 미남이었다. 하나 종리단목과 나란히 들어서는 그 모습이 그토록 초라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마치 태양과 반딧불을 비교하는 듯했다. 여인인 양옥상과 영호미미의 방심(芳心)은 이 순간 태풍을 만난 듯 흔들리고 있었다. (아……!) (세상에…… 저토록 잘생긴 미공자도 있었다니……) 그녀들은 넋을 잃은 얼굴로 종리단목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기야 같은 남자인 영호필 등도 넋을 놓고 있는데 여인은 어떨까만…… 이때 양광진은 풍류헌 내의 분위기를 깨닫고는 내심 고소를 머금고 있었다. (역시…… 예상대로군!) 이어 그는 짐짓 헛기침을 터뜨렸다. "헛…… 험……!" 그러자 모두들 퍼뜩 정신을 추스렸다. 특히 양옥상과 영호미미는 자신들의 실태를 깨닫고 은은히 얼굴을 붉혔다. 하나 고개를 떨구면서도 살짝 종리단목을 훔쳐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양광진이 좌중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께 소개하겠소. 이분 공자가 바로 천진장원의 종리단목이오." 그러자 좌중의 인물들은 차례로 일어나 소개와 함께 수인사를 청했다. "금화장(金華莊)의 남석중(南石重)이오. 종리공자를 뵙게되어 영광이 아닐 수 없소." "본인은 목승호요……!" 그들은 한결같이 명문가의 자제답게 예의 정중했다. 종리단목, 그는 거만하지도 그리 겸손치도 않은 담담한 얼굴로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당당했으며 의연하기까지 했다. 한데 중인들 중엔 그런 종리단목이 은근히 거슬리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 장군부의 영호필이 그러했다. 그는 너무도 뛰어나 보이는 종리단목의 모습에 내심 배알이 뒤틀렸다. 더욱이 양옥상의 넋을 잃은 표정은 그의 질투심을 부글부글 끓게 만들었다. (어디서 기생 오라비같은 녀석이 나타나…… 내 일을 망쳐놓는구나!) 그렇다고 겉으로 내색할 수는 없는 일, 그는 자신의 인사 차례를 기다리며 모종의 암계를 품었다. (그래…… 이 놈이 문(文)에는 뛰어나도 선천적인 약골이라 했지……? 두고 보자!) 그 사이 종리단목은 점차 그와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드디어 영호필의 차례가 다가왔다. 양광진이 그의 소개를 대신하고 있었다. "이 분은 장군부의 영호필 공자이시오." 영호필은 의미심장하게 미소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반갑소. 종리공자." 종리단목은 역시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으며 웃음지었다. "처음 뵙겠소이다. 영호공자의 말씀은 많이 들어 알고 있소. 이렇게 뵙게 되어 진정 기쁘구려." 영호필은 내심 실소했다. (기뻐……? 기쁘기는 커녕 곧 눈물이 나올거다! 이놈아……) 동시에 그는 은근히 종리단목과 맞잡은 손에 공력을 주입시켰다. 영호필, 그는 일찍이 정종무공(正宗武功)을 익혀온 터라 내공이 가히 일류고수 축에 들었다. 한데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약골이라던 종리단목은 전혀 꿈쩍도 않고 있지 않은가? 아니 오히려 무쇠를 잡은 듯한 느낌마저 드는 것이었다. (이…… 이것은 무슨……) 영호필은 일순 당황했다. 하나 다음 순간 그는 더욱 공력을 끌어 올려 손아귀에 극성의 내공을 주입했다. 그때 양광진을 비롯한 중인들은 모두 영호필의 행동을 눈치채고 있었다. 양옥상 역시 그 일을 알고 은은히 눈살을 찌푸렸다. (손님에게 무슨 짓이람……! 더욱이 무공을 전혀 모른다는 종리공자에게……) 그녀는 영호필의 태도가 진정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어 막 무어라 입을 열려는 순간 양옥상은 물론 좌중의 인물들의 안색이 흠칫 굳어 들었다. 영호필의 안색이 창백해지며 이마에 구슬땀마저 맺히고 있지 않은가?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북경의 후기지수들 중에도 손꼽히는 영호필이 저런 모습을 보이다니…… 상대는 바로 무공을 전혀 모른다고 소문난 종리단목이 아닌가! "……" 영호필은 진정 호된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이…… 이것이 무슨 조화란 말이냐? 소…… 손이……) 종리단목에게 잡힌 손이 마치 달궈진 인두 속에 갇힌 듯하지 않는가? 하나 그는 손이 불로 지져지는 듯한 고통을 이를 악물며 참아야 했다. 급기야 영호필은 창백해지다 못해 거의 혼절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제야 종리단목이 씨익 웃으며 그의 손을 놓았다. "하하……! 영호형, 건강이 안 좋으신 모양이오. 안색에 핏기가 없는 걸 보니……" "……" "몸관리는 젊었을 때 잘해야 하는 법이라오. 몸 조심하시구려." 동시에 종리단목은 아무렇지도 않게 영호필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한데 말이 다독거리는 것이지 영호필에겐 마치 철퇴가 내려치는 듯하지 않는가! (욱! 우---- 욱----!) 영호필은 차마 비명을 지를 수 없어 안간힘을 다해 고통을 참아냈다. 이어 간신히 입을 벌려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아무래도…… 몸이 안좋은 모양이오……" 그러자 종리단목은 적이 걱정스런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저런……! 몸이 안좋으면 자리에 앉아 쉬셔야지요." 그 순간 영호필은 무형의 막대한 경력이 그의 몸을 사정없이 누르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영호필은 주착없이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아야 했다. 그런 그의 얼굴은 썩은 돼지의 간빛, 그것이었다. 그날은 영호필이 일생일대의 가장 큰 치욕을 치룬 날이었다. 마음속 깊이 연모하는 양옥상 앞에서…… 하나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으니……! 꿈엔들 상상이나 했으랴? 종리단목, 그가 사실은 마교(魔敎)의 대지존인 백리강의 변신이었음을…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재미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