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 장 運命의 相剋 1 은은한 촛불빛 아래 두 남녀가 마주 앉아 있었다. 바로 종리단목과 한 명의 미녀였다. 아아…… 천하에 이러한 절세미녀도 있는가? 화공(畵工)이 정성들여 그린 미녀도(美女圖)에서 튀어나와 살아 움직이듯 현란한 보석(寶石)이 인간으로 환신(幻身)한 듯 너무도 황홀한 미녀였다. 북경제일미녀라는 양옥상은 비교도 되지 않았다. 단 하나 흠이라면 길게 뻗은 짙은 눈썹으로 인해 성격이 매우 강렬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한데 그 미녀를 자세히 보면 어쩐지 종리단목과 상당히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때 종리단목이 미녀를 깊게 응시하며 씨익 웃음 지었다. "역시…… 여인은 여인의 옷을 입어야 어울리는 모양이오. 종리공자가 남장(男裝)을 했을 때는 몰랐는데 지금보니 대단한 미인이오. 웬만한 미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구려." 오오…… 그렇다. 지금 눈앞의 미녀는 바로 진정한 종리단목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종리단목은 바로 백리강의 변신이었다. 종리단목은 백리강의 칭찬에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평생 남장만 하고 생활해서 그런지 난생 처음 치마를 입으니 보통 이상한 것이 아니오. 아무래도 여인체질은 아닌 것 같소." 세상에 그것은 영락없는 남자의 음성에 남자 말투가 아닌가? 백리강은 부지중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종리공자, 여장(女裝)을 하고 남자의 음성을 내면 어떻게 하오?" 종리단목은 얼굴을 붉히며 씁쓸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여인으로 변장한 것은 잘못한 것 같구려." 그 말에 백리강은 정색을 띠었다. "아니오. 내 생각으로…… 종리공자는 언젠가는 진정한 자신을 찾아야 할 것이오. 평생 자신을 숨기고 남자행세를 할 수는 없지 않소? 결혼도 하고…… 아기도 낳아야 할텐데……" 종리단목은 그 아름다운 옥용에 쓰디쓴 고소를 떠올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소. 내 스스로가…… 한 번도 여인이라는 생각을 가져 본 적이 없기 때문이오." 이어 문득 그는 생각났다는 듯 화제를 바꾸었다. "그건 그렇고…… 오늘 구문제독부에 가셨던 일은 어찌 되었소?" 백리강은 피식 웃었다. 이어 구문제독부에서 있었던 일들을 간단히 들려 주었다. 순간 종리단목이 배를 잡고 웃었다. "하하하…… 영호공자가 정말 태산을 몰라 봤구려. 감히 마교의 대지존께 어설픈 무공으로 덤볐으니…… 볼만 했겠소. 하하하……" 백리강은 은은히 미소띤 채 그를 응시하고만 있었다. 그러자 종리단목은 웃음을 거두며 일순 야릇한 눈빛을 뿌렸다. "그나저나 이제 큰일났소이다." "큰일……?" "양옥상과 영호미미…… 그 두 여인이 백공자를 보고 단단히 홀렸을텐데 나중에 날 보고 어찌 뒷감당을 하란 말씀이오?" "……!" "청혼이라도 해오면 큰일이 아니오?" 백리강은 그저 빙그레 웃었다. "그럴 리야 있겠소?" 하나 종리단목은 정색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거야 모르는 일이 아니오? 천하에 백공자의 모습을 보고 반하지 않을 여인이 어디에 있겠는가 말이오." 백리강의 눈빛에 야릇한 기색이 떠올랐다. "아니…… 한 명이 있긴 있소." "……?" "바로…… 종리공자." "음?" 종리단목은 움찔하더니 이내 낭랑히 대소했다. "하하하…… 나야 몸만 여인일 뿐이지. 어디 여인이라고 할 수 있겠소?" 종리단목은 이어 의미심장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또…… 혹시 아오? 사람의 일이란 모르는 것…… 내 언젠가 백공자에게 반하게 될지……" 다음 순간, "하하하……" "푸하하……!" 그들은 한바탕 파안대소(破顔大笑)했다. 이윽고 웃음기를 거둔 두 사람은 신색을 추스르며 다시 마주했다. 종리단목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앞으로 어찌하실 계획이오?" 백리강은 얼굴빛을 엄중히 굳혔다. "반년 안으로…… 황궁 내에서 우내오천을 움직이는 신비인을 찾아내야 하오. 그리고 삼월천(三月天)으로 가서 헌원륭을 상대해야 하지 않겠소?" 종리단목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적이 회의어린 얼굴로 다시 백리강을 향했다. "삼월천의 일이야…… 백공자의 능력을 믿지만…… 황궁 내에서 오천(五天)을 움직이는 신비인을 찾기란 무척 어려울 것이오." "혹…… 종리공자는 황궁 내에서 짚히는 사람이 없소?" 백리강의 물음에 종리공자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황궁에 고수는 많지만…… 오천에 비교해 위일텐데…… 그런 자가 황궁 내에는 없소." 종리단목은 부정적으로 딱 잘라 말했다. 하나 백리강은 정색을 하며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꼭 그렇게만 생각할 일이 아니오." "……?" "오천을 움직이는 자…… 속은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는 그리 두드러지게 행동하진 않을 것이오." "그것은……?" "그렇소. 스스로 위세(威勢)를 드러내어 적에게 굳이 경계심을 심어줄 필요는 없을테니까 말이오." 종리단목의 얼굴엔 짙은 경탄의 기색이 떠올랐다. "과연…… 그럴 것 같군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백리강을 지그시 응시했다. 불현듯 그의 미간에 어두운 그늘이 스치는 듯했으나, 백리강은 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종리단목의 입술이 다시 천천히 열렸다. "혹시…… 그 자가……?" 백리강은 긴장된 신색으로 바싹 다가 앉았다. "짚히는 인물이 있소?" 종리단목은 확신이 서지 않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소." "그가 누구요?" 종리단목은 침중히 일성했다. "주여설(朱如雪)……!" "여인이오?" "그렇소." "……!" "황제 폐하의 아우이신 진무왕의 두 분 군주 중에 대군주요. 일명 서하군주(瑞霞君主)라고도 하는 분이지요." 백리강은 잠시 경악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그는 엄중한 신색으로 되물었다. "어째서…… 그녀가 의심스럽다는 것이오?" 그러자 종리단목은 생각에 잠기는 듯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서하군주는…… 내가 반 년 전…… 금위부의 일을 처리할 당시 스치듯이 한 번 본적이 있소. 그때 나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었소." "충격……?" "그녀는 몹시 특이한 체질을 지니고 있었소." 종리단목은 천천히 눈을 뜨고는 백리강을 빨아들일 듯 응시했다. 이어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더니 곧 진중히 입을 열었다. "백공자, 내 말에 절대 놀라지 마시오." "……?" "백공자는…… 잠마천형상(潛魔天形相)이오. 맞소?" 종리단목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백리강은 흠칫 놀라고 말았다. (무서운 안력(眼力)이다!) 그는 새삼 종리단목의 예리한 안목에 깊이 경탄했다. 동시에 그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시했다. "종리공자의 말은 사실이오." "……!" 종리단목은 그를 다시 지그시 바라보며 음성을 이었다. "백공자의 체질은 무척 괴이하오. 마존지상(魔尊之相)인 잠마천형상에…… 저주의 삼태혈성(三太血星) 기운까지 깃들어 있으니……" 백리강은 또다시 내심 경악을 머금고 말았다. (으음…… 종리단목, 예상보다 뛰어난 안목을 지닌 인물이다. 아무도 알아내지 못한 삼태혈성의 기운까지 알아 보다니…… 진정 놀랍다!) 그가 내심 중얼거리고 있을 때 종리단목은 다시 입을 열고 있었다. "내가 아는 바로는 이 두 가지 체질은 마(魔)의 극치인 마중지마(魔中之魔)가 되어 혈세무림(血洗武林)할 운명이오." 문득 종리단목은 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기이하게도 백공자의 미간에는 성스러운 불광(佛光)의 흐름이 비치고 있소. 대체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나 그 불광의 흐름이 마성(魔性)의 격발을 막고 있소." 아! 아! 무섭도록 놀라운 일이 아닌가? 종리단목, 그는 알아내고야 말았다. 과거 백리강의 부친인 백리용청이 천기를 짚어 알아낸 천살(天殺)과 지살(地殺)의 운명을……! 천살(天殺)----! -천하의 대마(大魔)가 되어 전 중원을 피로 씻으나 언젠가는 하늘의 저주로써 처참한 최후를 맞으리라! 지살(地殺)----! -천살의 뜻이 이뤄지기도 전에 누군가 풍효(風爻)의 패로 천기를 엎어 태어나기도 전에 죽이리라! 백리용청, 그는 그 두 가지 뜻을 막기 위해 백리강으로 하여금 팔만 사천 권의 불경을 읽게 했다. 또한 그 스스로 대역천만상대법(大逆天萬像大法)을 펼쳐 천기를 뒤엎지 않았던가! 한데 종리단목, 그는 백리용청이 한 일까지는 몰라도 그 내력을 어렴풋이 짚어내고 있었으니 이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백리강은 왠지 종리단목의 두 눈빛이 가슴 섬뜩하게 느껴졌다. 이때 종리단목은 진중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고 있었다. "한데…… 내가 일전에 본 서하군주의 체질은 백공자와 상극(相剋)이었소." 백리강은 안색을 굳혔다. "상극이라면……?" "그녀는 잠룡제마상(潛龍制魔相)을 타고났소. 또한…… 하늘의 삼십육성좌(三十六星座) 가장 뛰어난 천괴성(天魁星)의 기운이 그녀의 전신에서 느껴졌소." 순간 백리강은 재차 크나큰 경악을 띄워야 했다. (잠룡제마상에…… 천괴성의 기운까지……!) 오오, 실로 통천가공할 사실이 아닌가? 서하군주, 그녀가 백리강과 상극의 체질을 타고났다는 것이다. 바로 잠룡제마상과 천괴성의 기운을……! 그것은 또 무슨 운명(運命)인가? "……!" "……" 한동안 정실 안에는 바다 속처럼 적막한 침묵이 감돌았다. 이윽고, 종리단목이 다시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잠룡제마상은…… 백공자가 지난 잠마천형상의 상극이오. 그리고…… 천괴성은 삼태혈성(三太血星)과 상극이지요. 운명대로라면 백공자와 서하군주는 장차 백년(百年)을 두고 싸울 운명이오. 그리고……" 왜인가? 종리단목은 왠지 안색을 미미하게 변화시킨 채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백리강은 어느 새 담담해진 얼굴로 그를 재촉했다. "그리고 무엇이오?" 그러자 종리단목은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음성을 이었다. "백공자는…… 장차 천하의 버림을 받아 서하군주에게 가장 비참하게 죽을 운명이오……!" "……!" "바로…… 천살(天殺)의 패가 백공자의 운명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오." "……!" 실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지 않은가? 백리강은 안색을 굳힌 채 그저 침묵하고 있었다. "한데……" 종리단목이 다시 고개를 갸웃하며 기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백공자의 미간에 흐르는 불광(佛光)의 기운이 그 천살의 기운을 차츰 소멸시키고 있다는 것이오. 때문에…… 백공자의 운명이 어찌 바뀔지는…… 나도 아직 예측할 수가 없구려." "음……" 백리강은 부지중 낮게 침음했다. 이어 그는 문득 궁금한 듯 물었다. "한데 그 서하군주가 어째서 오천(五天)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오?" 종리단목은 망설이지 않고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만일…… 서하군주가 오천과 관계가 있다면 분명 오천을 능가할 수도 있소." "……?" "그것은 바로 황궁무고(皇宮武庫) 때문이오." "황궁무고……!" "그렇소. 그곳엔 우리가 상상도 못할 엄청난 무공비급들이 헤아릴 수도 없이 쌓여있소. 오천(五天)이 서하군주의 내공(內功)만 도와준다면 그녀는 능히 오천을 능가할 수도 있다는 말이오." 그것은 실로 타당한 논리였으며 확률이 높은 일이었다. 그리고 종리단목의 예상은 실상 경이적일 정도로 맞아 들어가고 있었다. "으음……" 백리강은 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문득, 번뜩! 백리강의 두 눈이 비수처럼 섬뜩한 기운을 내뿜었다. 순간, 종리단목은 전신이 바짝 오그라드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아아…… 보라! 백리강의 두 눈동자, 그 속 깊숙이 세 개의 붉은 점이 번뜩이며 나타난 것이 아닌가? (사…… 삼태혈성……!) 그렇다. 그것은 바로 삼태혈성의 저주받을 혈점(血點)이었다. 하나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리강은 결연히 입을 열고 있었다. "내…… 그녀를 만나 보리다." 믿을 수 없도록 착 가라앉은 음성. (마…… 마존(魔尊)의 음성이다. 마중마(魔中魔)의 외침이다!) 종리단목, 그는 전신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끼며 부지중 전율했다. 그 순간 종리단목은 문득 어떤 운명을 느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하늘이 정해준 운명. (잠마천형상의 남자…… 그리고 잠룡제마상의 여인……!) 무언가 끊을 수 없는 운명의 회오리가 그들을 휘어감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와중엔 종리단목의 운명도 휘말려 있는 것이 아닐까? 이때였다. 돌연, (아……!) 종리단목은 정신이 아찔해져 두 눈을 감고 말았다. 한데 두 눈을 감자 이번엔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듯한 어지럼증이 그를 덮쳤다. "으…… 음……" 부지중에 종리단목의 입술 사이로 미약한 신음이 새었다. 백리강은 퍼뜩 정신을 차리며 그를 응시했다. 그러자 얼굴이 창백해진 채 두 눈을 꼭 감고 있는 종리단목의 모 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종리공자, 무슨 일이오?" 종리단목은 등받이에 기대며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오. 그저…… 심력(心力)이 지나쳐서……" "……?" "육 년 전…… 주화입마로 인한…… 피(血)의 역류(逆流) 현상이 일어났소." 그 말에 백리강은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 "공연히…… 나 때문에……" 종리단목은 힘겹게 눈을 뜨며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아니오……! 백리공자 때문이 아니오. 원래…… 주기적으로 일년에 한 번…… 일어나는 현상이라오. 단지…… 그 시기가 조금 빨리 닥쳤을 뿐……" 찰나 종리단목은 견디기 힘든 듯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이어 그는 조급해진 얼굴로 백리강의 뒤쪽에 붙은 족자를 가리켰다. "저…… 저 족자의 뒤를……" 백리강은 급히 족자를 밀쳤다. 그러자 작은 구멍 속에 감춰진 쇠고리가 나타났다. "그…… 쇠고리를…… 당겨 주시오." 백리강은 다시 종리단목이 시키는대로 했다. 순간, 크르릉! 나직한 굉음과 함께 벽이 갈라지고 작은 통로가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종리단목은 이때 고통을 참기 힘든 듯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가 힘겹게 말했다. "나…… 나를…… 저곳으로……" "……!" 백리강은 어찌 손을 쓸지 몰라 당황했다. 하나 이내 입술을 깨물며 종리단목을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러자 돌처럼 차갑게 굳어진 그의 몸이 전신으로 전해져 오는 것이었다. "종리공자……" 백리강은 안타까운 얼굴로 종리단목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하나 그때 종리단목은 이성을 잃은 모습으로 미친 듯 전신을 쥐어뜯고 있었다. "우…… 우욱……!" 그의 얼굴은 이때 고통으로 참담히 일그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옷은 고통을 참지못한 그의 손에 의해 갈가리 찢겨져 나갔다. "……!" 백리강은 상태가 시급함을 깨닫고 급급히 그를 안은 채 신형을 날렸다. 휙----! 쿠르릉……! 그들이 사라지자 갈라졌던 벽은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고 있었다. …… 한 칸의 석실, 휙----! 미미한 파공음과 함께 백리강이 나타났다. 그의 품엔 걸레조각같은 의복을 걸친 종리단목이 안겨 있었다. 이때 종리단목의 입술이 다시 열리며 고통에 겨운 신음성이 새어나왔다. "으……! 타…… 탁자 위…… 약병에서…… 세 개의…… 알약을 제발…… 제발……!" "알았소." 백리강은 우선 그를 바닥에 내려놓은 뒤 탁자로 다가갔다. 과연 돌탁자 위엔 한 개의 검은 옥병이 놓여 있었다. 백리강은 지체없이 옥병 속에서 세 개의 알약을 꺼냈다. 순간, 매캐한 악취가 그의 코끝을 찔러왔다. 백리강은 그 알약들이 결코 좋은 약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나 어찌하겠는가? 종리단목은 연신 고통에 신음하고 이 상황에서 다른 방도가 전혀 없었다. 그는 곧 종리단목의 입을 벌려 세 개의 알약을 넣어 주었다. 그리고 채 일각이나 지났을까? 문득 종리단목의 신음성이 멎었다. 이어 그는 고통마저 사라진 듯 툭툭 몸을 털고 일어서는 것이 아닌가! "……!" 백리강은 마치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어이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그러자, 종리단목은 의자에 앉으며 씁쓸히 고소했다. "반각만 지나면…… 또 다시 발작할 것이오. 내일…… 이 시각까지…… 꼬박 하루가 걸리오." "……!" 종리단목은 이어 탄식하듯 설명하기 시작했다. "과거…… 마공(魔功)을 수련하던 것이 잘못되어 이렇게 되었소." "마공을……?" 백리강은 적이 경악어린 표정으로 그와 마주 자리했다. 종리단목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천축(天竺)의 비전밀공(秘傳密功)인 혈영천수(血影天手)라는 마공이었소." "혈영천수!" 백리강의 안색이 홱 바뀌었다. 마공이라면 모르는 것이 없는 그였다. 그런 그가 어찌 혈영천수를 모르겠는가? 비록 그 자신이 직접 익히지는 않았으나 들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혈영천수(血影天手)----! 이것은 천 이백 년 전 천축사상 최고의 마존이었던 살파(薩巴)의 무공이었다. 하나 살파 그마저도 극성연성에 실패한 극히 가공할 무공이었다. 혈영천수는 모두 열 두 단계로 이루어졌다. 하나 그 한 단계 한 단계는 실로 목숨을 건 사투(死鬪)가 아닐 수 없다. 살파(薩巴). 그는 십일성에서 십이성을 연마하던 도중 주화입마하여 결국 죽음을 면치 못했던 것이다. 혈영천수를 수련함에 있어 실패란 단어는 곧 죽음이 아니면 주화입마를 뜻했다. 한데 종리단목이 바로 이 죽음의 마공을 연성하다 주화입마 했다는 것이 아닌가? "원래 혈영천수는 여인이 익힐 수 없는 것이었소." 종리단목은 어두운 기색으로 음성을 이었다. "한데 증조부님을 생각하며 나는 무리하게 그것을 연성하려 했소. 제 오단계에서 나는 주화입마를 당했고 그후 매년 한 번씩 그 죽음보다 더한 고통에 시달리게 된 것이오." "으음……" 백리강은 부지중 탄식하듯 침음성을 발했다. 이어 그 역시 어두워진 안색으로 물었다. "치료 방법은…… 없는 것이오?" 종리단목은 암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없소." "……!" "오직 하나…… 혈영천수를 다시 연마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소." 저주받은 마공 혈영천수----! 그것을 다시 익히는 것이 주화입마를 치료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하나 여인은 익힐 수 없는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결국 영원히 고통 속에서 헤어날 수 없다는 뜻이었으니…… 그때 종리단목은 문득 입가에 고소를 베물고 있었다. "혈영천수를…… 익힐 방법이 있기는 하지만……" "……?" 백리강이 의아해 하자 종리단목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저 착잡한 시선으로 백리강을 지그시 바라볼 뿐이었다. 백리강은 궁금했다. "그 방법이 무엇이오?" 하나, 종리단목은 말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문득 종리단목의 안색이 다시 창백하게 핏기를 잃었다. 그는 다급하게 백리강에게 말했다. "저기…… 저 석벽에 나를 묶어 주시오." 백리강은 그가 가리킨 석벽을 응시했다. 석벽엔 자광이 감도는 네개의 족쇄가 장치되어 있었다. 백리강은 놀란 얼굴로 종리단목을 향했다. "왜 묶으라는 거요?" 종리단목은 창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주화입마의 현상이 나타나면…… 나의 피는 역류하고 나는 이성을 완전히 잃게 되오. 그리고 순간적으로 내 양손엔 혈영천수의 극성경지가 나타나게 되오." 종리단목은 괴로운 표정으로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 보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되면 고통으로 인해 나는 나의 전신을 갈가리 찢을 것이오…… 그러니 나를 묶지 않으면 나는 걸레처럼 되어…… 죽고말 것이오." "……!" 백리강은 일순 종리단목이 몹시 애처롭게 느껴졌다. (종리공자에게…… 이런 사연이 있었다니……!) 그의 심중을 눈치챈 듯 종리단목은 애써 웃어 보였다. "사실…… 나는 매년마다 피가 역류될 시각을 짐작하고…… 스스로 이곳에 들어와 미리 족쇄로 내 몸을 묶곤 했소. 한데…… 오늘은 심력이 지나친 탓에 그 현상이 며칠 빨라졌을 뿐이오." 다음 순간 그는 더욱 창백해진 얼굴로 다급히 외쳤다. "빠…… 빨리…… 나를 묶어 주시오." "……!" 백리강은 도저히 다른 방도가 없음을 깨달았다. 이어 그는 몸을 움직여 종리단목을 족쇄가 있는 석벽으로 옮겼다. 한데 그는 족쇄를 가까이서 본 순간 흠칫 경악하고 말았다. (대라보색(大羅寶索)……!) 대라보색(大羅寶索)! 그것은 천하에서 가장 견고하고 질긴 쇠사슬이었다. 백리강은 탄식하며 종리단목을 대라보색으로 된 족쇄에 묶었다. 찰칵! 찰칵……! 종리단목의 두 손목과 발목은 곧 천하에서 가장 견고한 쇠로 채워졌다. 부들부들…… 종리단목의 몸은 세차게 경련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주화입마의 현상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듯했다. 종리단목은 괴로운 표정으로 백리강을 향했다. "백리공자! 나가 주시오. 나의 이런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소……!" 아아…… 종리단목, 그의 음성은 거의 절규에 가까웠다. 그 순간이었다. 마침내 그의 전신에 괴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그의 긴 머리칼이 새빨간 핏빛으로 화했다. 동시에, 파…… 파…… 팟……! 전신에 걸친 의복이 일시에 가루로 화해 떨어져 나갔다. 찰나 여인의 나신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훌륭한 화공(畵工)이 정성들여 그린 듯 균형잡힌 아름다운 여체여……! 하나 그 나체마저도 이 순간 시뻘건 핏빛이다. 전신에 서린 무서운 마기(魔氣)…… 특히 족쇄에 묶인 두 손은 가공할 혈색(血色)을 띠고 있지 않은가? 보기에도 끔찍한 모습이었다. 또한 이 모든 현상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났다. "……!" 백리강은 석실을 나가는 것도 잊은 듯 망연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괴인으로 변한 종리단목이 그를 무섭게 쏘아보며 발광하기 시작했다. "크…… 아…… 아……! 나를…… 풀어줘…… 나를……" 아아…… 그것이 종리단목의 음성이었던가? 양철판을 긁듯 듣기 거북한 음성이었다. "……!" 백리강은 그제야 퍼뜩 심중을 추스렸다.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가슴 저 밑바닥에 보이지 않는 앙금이 가라앉듯 무거웠다. 이어 그는 무겁게 탄식하며 신형을 돌렸다. 순간 종리단목의 핏빛 눈이 부릅뜨였다. "나를…… 풀어달란 말이다! 나를…… 으아아----!" 고통인가……? 아니면…… 그동안 참고 참았던 비감어린 울분이었을까? 괴물로 화해버린 종리단목은 마구 울부짖으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쿵! 문 닫히는 소리가 둔중히 일었다. 그리고 백리강의 귀로 더이상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이곳은 저주받을 마(魔)의 기운이 서린 지하석실이었다. 2 깊은 바다 속이 이러할까? 시간…… 공간…… 그 모든 것이 정지된 듯한 적막----! 너무도 고요했다. "……" 마치 석상처럼 백리강은 미동도 않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백리강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이후 탁자 앞에 앉아 꼼짝않고 있었다. 지금 그의 뇌리 속에는 온갖 상념이 꼬리를 물고 끝없이 떠올랐다 사라지길 거듭하고 있었다. 그 중에도 그를 끈질기게 사로잡고 있는 한 가지 상념은 바로 주여설에 대한 것이었다. (서하군주 주여설…… 그녀가 잠룡제마상이었다니……) 잠룡제마상(潛龍制魔像)----! 그것은 천하 모든 마(魔)의 극성이 아닌가? 문득 백리강의 입가에 희미한 한 줄기 고소가 피어 올랐다. (내가…… 주여설에게 비참하게 죽을 운명이라고……?) 그는 더욱 짙게 고소하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까짓 운명…… 결코 나를 지배할 수는 없다!) 번뜩! 그의 두 눈 깊숙이 강렬한 신광이 섬전처럼 스쳤다. (나는 마교의 대지존……! 그 누구도 나를 능가할 수는 없으리라!) 아아…… 광오하다고 할텐가? 이 순간 백리강의 전신에선 태산이라도 위세를 잃을 무서운 기도(氣道)가 눈부시게 뻗쳐나오고 있었다. 운명(運命)의 신이여! 감히 백리강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화르르……! 황촉은 저 홀로 화미(火尾)를 사르며 생(生)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백리강의 두 눈에도 두 개의 황촉이 타오르고 있었다. 얼핏 그의 눈앞을 환상처럼 스치는 하나의 영상이 있다. 사지를 족쇄로 채운 채 몸부림치며 괴로움에 울부짖고 있는 한 인영, 바로 종리단목의 모습이었다. 그를 생각하자 백리강의 가슴이 또다시 바늘로 찌른 듯 찌르르한 아픔에 젖었다. (그가…… 저주의 마공 혈영천수를 익히고 있었을 줄이야!) 백리강의 얼굴은 몹시 침중하게 굳어 들었다. (종리공자가 혈영천수의 연성에 실패한 이상…… 그는 평생 죽을 때까지 저주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는 비감한 기분을 느꼈다. 얼굴이 판에 박은 듯 똑같아서인지도 모른다. 그는 어느새 종리단목을 친혈육같이 생각하게 되었다. 한데 그런 그가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으니 백리강의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 백리강은 내심 결심을 굳혔다. 무슨 수를 써서든 종리단목을 저주의 고통 속에서 헤어나게 해줄 것을……! 이어 그는 곰곰이 염두를 짜내기 시작했다. (이미 실패한 이상 혈영천수를 다시 연마하기는 힘들고…… 더욱이 그는 혈영천수를 익힐 수 없는 여인의 몸……) 이렇게 되면 다른 방도를 연구해 볼 수밖에 없었다. 백리강, 그는 지그시 두 눈마저 감은 채 깊은 상념에 빠져 들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각이 흘러 갔을까? 어느새 황촉은 절반 깊이로 타들어가 있었다. 똑……! 다시 한 방울의 촉루(燭淚)가 떨어져 내른 그 순간, "그…… 그렇다!" 백리강이 두 눈을 번쩍 뜨며 탄성을 터뜨렸다. 드디어 무엇이 생각난 것일까? 백리강은 의자에 깊숙이 묻었던 신형을 바로하며 은은한 기쁨이 어린 음성을 이었다. "여의존자…… 그의 항마절맥파라강기(降魔絶脈破羅 氣)……과거 사마종(四魔宗)을 금제시켰던 그 대법을 역(逆)으로 재전개하는 것이다." 아아……! 항마절맥파라강기----! 그러했다. 그는 이미 그것을 역으로 펼쳐 사태상을 천형지일에서 벗어나도록 한 적이 있었다. 바로 백리강이 정식으로 마교 대지존으로 군림하게 된 그 무렵의 일이었다. 이때 백리강은 확신에 찬 얼굴로 다시 나직하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방법으로 혈영천수의 치료도 가능하다. 극음(極陰)의 몸에 혈영천수에 의해 깃든 극양(極陽)의 기운만 제거하면 될 것이다." 그의 고개는 힘차게 끄덕여졌다. "능히…… 가능한 일이다." 이어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켜 방을 나갔다. 화르르…… 황촉불은 이제 그 여력을 다한 듯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 백리강은 그대로 몸을 굳히고 말았다. 지하석실, 종리단목이 괴물로 변신하여 갇힌 그 석실에 백리강은 와 있는 것이다. 한데 보라. 종리단목은 이 순간 처절한 몰골로 화해 있지 않은가? 옷은 이미 가루가 된 지 오래였다. 그녀의 아름다운 나신, 그러나 그것은 이 순간 너무도 처참하게 변한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그녀는 이미 혼절해 있었다. 전신 모공에서 쏟아져 나온 핏물이 흠뻑 젖은 혈인(血人)이 된 채로…… 백리강은 차마 더 볼 수가 없어 눈길을 돌려 버렸다. (지…… 지독하구나……)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이런 고통을 매년 겪어 왔다니……) 그는 절로 한숨이 새어 나오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미녀…… 하나…… 남자로 살아야 했던 인생……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여인일지도 모른다……) 한 동안 그는 종리단목에 대한 깊은 연민에 빠져 있었다. 이윽고 퍼뜩 상념을 추스린 백리강은 곧 종리단목을 족쇄에서 풀어 내렸다. 순간 맥없이 축 늘어진 종리단목의 신형이 백리강의 품으로 무너져 왔다. 백리강은 일순 당황했으나 이내 그녀를 안아다 석탁 위에 눕혔다. 핏물에 얼룩진 나신이었지만 그 아름다움만은 결코 감춰질 수 없었다. 한껏 부풀어 오른 두 개의 육봉(肉峯), 그 아래 팽팽히 긴장된 아랫배와 자칫 휘어질 듯 가는 세요(細腰)…… 그리고 갑자기 부풀어 시선을 현란시키는 둔부…… 차마 보기 부끄러운 여인만의 신비지소(神秘之所)는 울창한 숲에 의해 감춰져 있었다. 진정 완벽하다 할 만한 나신이 아닐 수 없다. 백리강은 부지중 여체의 아름다움에 현혹되어 잠시 넋을 잃고 있었다. 하나 다음 순간, (이런……! 내가 이게 무슨 추태인가?) 백리강은 퍼뜩 정신을 차리며 자신을 질책했다. 그러나 마냥 그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는 급히 전신에 여의존자의 신공인 여래신공(如來神功)을 운기했다. 순간, 번뜩……! 백리강의 전신에 성스러운 기운이 은은히 떠올랐다. "……" 그는 그런 채로 조심스레 종리단목의 가슴 한 가운데 우장(右掌) 을 바짝 밀착시켰다. 일순 젖가슴의 뭉클한 감촉이 그를 움찔하게 했으나 백리강은 곧 마음을 평정시켰다. 이어 백리강은 전신에 끌어올린 여래신공을 손바닥을 통해 종리단목의 체내에 주입키 시작했다. 찰나, 푸스스스……! 돌연 종리단목의 전신에서 시뻘건 혈무(血霧)가 피어 올랐다. 그것은 이내 그의 전신을 완전히 휩싸 버렸다. 그리고 채 일각이나 지났을까? 스스스…… 다시 혈무가 종리단목의 전신 모공으로 스며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자, 오오…… 옥(玉)인들 이토록 맑고 깨끗할까? 백옥처럼 희고 고운 나신이 드러났다. 종리단목, 그의 본래의 눈부신 나신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 백리강은 또 다시 두 눈이 부신 것을 느꼈다. 핏물이 씻겨진 여체(女體)는 다시 그의 두 눈을 자극시키고 그의 마음을 혼란케 했다. 그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여인의 비밀스런 곳을 향했다. 그러나 백리강은 이내 크게 심호흡을 했다. 한결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그는 마음을 단단히 다짐시켰다. 이어 백리강은 중지(中指)를 천천히 종리단목의 천령개(天靈蓋)에 갖다 댔다. (항마절맥파라강기…… 그것을 역으로 펼친다……!) 다음 순간 장강노도와 같은 뜨거운 진력이 그의 중지를 통해 종리단목의 천령개로 물밀듯 쏟아져 들어갔다. 바로 항마절맥파라강기를 역으로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순간이었을까? 돌연, 부르르…… 죽은 듯 누워있던 종리단목의 전신이 무섭게 경련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백리강의 이마와 콧등엔 송글송글 땀방울이 솟아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계속 중지를 통해 자신의 진력을 혼신으로 쏟아 부었다. 그렇게 다시 얼마의 시간이 흘러 갔을까? 연신 경련하던 종리단목의 신형이 잠잠하게 가라 앉았다. 그의 얼굴도 한결 평온해 보였다. "후유……" 백리강은 그제야 땀을 닦으며 중지를 떼었다. "이제 어려운 고비를 넘겼다. 뒷 마무리만 남았을 뿐……" 그는 쉬려고도 안했다. 즉시 전신에 다시 여래신공을 끌어 올려 자신의 우수에 주입시켰다. 순간 그의 우수가 마치 옥수(玉手)처럼 투명하게 변했다. 얼음으로 깎은 듯 핏줄기까지도 환히 내보일 정도였다. "……!" 백리강은 이번엔 망설임 없이 종리단목의 가슴에 우수를 대었다. 이어 천천히 그녀의 나신을 쓸기 시작했다. 그것은 흡사 연인의 나신을 애무하는 듯한 광경이었다. 하나 이 순간 백리강의 모습은 성스러운 기운에 싸여 장엄하게까지 느껴졌다. 바로 불공(佛功)의 정화(精華)인 여래신공 때문인 듯…… 이때였다. 종리단목의 전신에서 또 다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백리강의 투명한 옥수가 스치는 곳마다 불그스레한 혈무가 피어나고 있지 않은가? 푸스스…… 스스……! 아아! 그것은 바로 마공 혈영천수의 잔재가 완전히 소멸되어 가고 있는 현상이었다. 이 사이에도 백리강의 손은 종리단목의 나신 구석구석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와 함께 분홍빛으로 점차 엷어져 가는 혈무는 계속 피어 오르고 있었다. 3 종리단목, (……!) 그는 차츰 깊은 의식의 나락 속에서 현실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 비몽사몽인 듯 몽롱한 상태에서 그가 가장 처음 느낀 기분은 너무나도 안락하다는 것이었다. (이토록…… 편안할 수가 있을까?) 그러했다. 그는 마치 하늘로 날아 오를 듯 가뿐한 기분이었다. 이윽고 종리단목은 기분좋은 상태로 번쩍 두 눈을 떴다. 제일 먼저 돌로 된 천장이 그의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그리고 등 허리로 느껴지는 차갑고 섬뜩한 돌의 기운, (내가 왜 여기에……?) 종리단목은 내심 의아했다. 하나 그는 이내 흠칫하며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 나체…… 완전 벌거숭이가 된 채 석탁 위에 누워있는 자신을 느낀 것이다. 종리단목은 거의 본능적으로 주위를 돌아 보았다. 그러자 한 옆에서 가부좌를 튼 채 운공 중인 백리강의 모습이 눈에 뜨였다. "……!" 종리단목은 표정을 무겁게 굳혔다. (이…… 이것이 어찌된 일……) 그러다 문득 그는 전신이 전에 없이 가볍고 상쾌해진 것을 느꼈다. (이럴 수가……! 단전(丹田)에 뭉쳐져 있던 혈영천수의 기운이 사라졌다!) 종리단목은 그제야 무언가 확연히 깨달아지는 느낌이었다. (그…… 그럼 이 사람이 나를…… 치료해 준 것이란 말인가?) 그는 망연히 백리강을 응시했다. 백리강은 아무 것도 모른 채 여전히 운공조식에 빠져 있었다. 종리단목은 나신을 가릴 생각도 않은 채 착잡한 시선으로 백리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으음……" 종리단목은 그늘진 얼굴로 뜻모를 탄식을 뿜어냈다. 바로 그순간 백리강은 한 차례 심호흡과 함께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그는 나신 그대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종리단목을 발견했다. 당황스런 표정이 백리강의 얼굴에 어렸다. "종리공자, 나로선…… 이게 최선이었소…… 하나 어쨌든 허락도 없이…… 함부로 종리공자의 지체에 손을 댄 점…… 용서해주시오……" 종리단목은 그저 씁쓸히 고소 지을 뿐이었다. 백리강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자신의 겉옷을 벗어 종리단목에게 내밀었다. "……!" "……!" 한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 중에서 뒤얽히듯 부딪쳤다. 너무도 밝고 순수한 백리강의 눈빛을 보며 종리단목은 그만 쓴웃음을 지어보이고 말았다. 백리강 역시 빙긋 지었다. 그것으로 그들 사이에 존재했던 어색한 감정은 씻은 듯 사라져 버리고 있었다. 종리단목은 스스럼 없이 백리강의 겉옷을 받아 나신 위에 걸쳤다. 조금 헐렁한 듯한 느낌이었으나 그런대로 그에게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 종리단목은 옷깃을 여미며 다시 백리강을 바라보았다. "백리공자에게…… 폐만 끼치는 것 같구려." 백리강은 싱긋 웃었다. "별 말씀을…… 도울 수 있는 데까지 돕는 것이 인간의 도리가 아니겠소?" "……!" 종리단목은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이순간 그의 내심은 마치 태풍을 만난 듯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 기분은 난생 처음이었다. 문득 종리단목의 두 눈이 기이한 광채를 번뜩 뿌렸다. 이어 그는 급히 신형을 일으켜 족쇄가 박힌 석벽의 구석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가 석벽의 한곳을 쓰다듬자 달깍! 하는 소리와 함께 석벽에 구멍이 생겼다. 종리단목은 그 속에 손을 집어넣어 한 개의 목갑을 꺼냈다. 그는 목갑을 든 채로 다시 백리강에게로 돌아왔다. "백리공자, 이것을 받아 주시오." "……?" 백리강은 그가 내민 목갑을 손에 들며 물었다. "이게…… 무엇이오?" "살파가 남긴 혈영천수(血影天手)…… 그 비급이오." 백리강은 흠칫 안색을 변화시켰다. "이…… 것을 어찌……?" 그러자 종리단목은 엄중한 신색으로 그를 정시하며 말했다. "나는 이제 영원히 그 무공을 익힐 수 없게 되었소. 하나 공자에게는 필요할 것이오." 그는 잠시 말을 끊은 뒤 다시 간곡한 음성을 이었다. "비록…… 백공자는 혈영천수보다 더 강한 무공을 지니고 계시지만 이것도 나름대로 쓸모가 있으리라 생각하오." "……" "부디 거절치 말고 받아 주시오." "……" 백리강은 묵묵히 그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그는 도저히 사양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종리단목이 그에게 감사를 표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이것 뿐임을 백리강은 깨달은 것이다. 그는 곧 빙긋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그럼…… 고맙게 받겠소." 종리단목도 빙그레 밝게 웃었다. 백리강은 수중의 목갑을 품 속에 갈무리했다. 그러자 종리단목은 왠지 거북한 얼굴로 머뭇거렸다. 그러더니 입술을 꼭 깨물며 다시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백리공자…… 부탁이 있소." 백리강이 의아한 표정을 하자 종리단목은 가볍게 얼굴을 붉혔다. "오늘…… 있었던 일…… 모두 없었던 것으로…… 기억해 주셨으면……" 백리강은 멈칫했다. 하나 그는 이내 종리단목의 말뜻을 알아 차렸다. 그는 바로 자신이 나신으로 백리강의 치료를 받은 일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리강은 미소를 머금으며 지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모두 잊었소." 순간 종리단목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백리공자, 진정 고맙소." 백리강은 그저 씁쓸히 웃고 있을 뿐이었다. 종리단목은 문득 이채를 띠며 화제를 돌렸다. "한데 앞으로 어찌하실 작정이오?" 백리강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예정대로…… 주여설을 만나 봐야겠소." "어떤 방법으로 말이오?" 종리단목은 궁금한 듯 되물었다. 하나 백리강은 말없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신비로움만이 느껴지는 그런 미소였다. "……?" 종리단목은 의아했으나 더 이상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백리강의 성격을 알고 그의 능력을 믿기에 묻지않는 것이었다. …… 그 날은 종리단목이 저주의 마공(魔功)에서 영원히 풀려난 날이었다. 그리고 그가 태어난 이래 난생 처음으로 여인(女人)임을 느낀 날이었다. 비록 희미한 깨달음이었지만…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재미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