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 장 朱如雪 1 먹물을 뿌려놓은 듯 유난히 깜깜한 밤이었다. 천진장원은 이미 어둠에 묻힌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한데 이때 어둠의 일부가 천진장원의 높은 담을 뛰어 넘었다. 그것은 바로 왜소한 체구에 야행복을 걸친 인영이었다. 야행인들이 그러하듯 그의 얼굴도 복면으로 가리고 있었다. 보이는 건 오직 두 눈 뿐이었다. 한데 어둠 속에서 빛나는 그 눈은 너무나도 맑고 아름다웠다. 마치 별(星)의 기운이 모두 그 눈에 모인 듯 영롱한 보석처럼 아름다운 눈이었다. 이때 야행인은 천진장원을 번개처럼 누비며 내심 염두를 굴리고 있었다. (언니는 분명 그를 무척 의심하고 있어! 하나 불광대사님의 말대 로 너무 의심을 하는 것 같아! 상대를 믿지 않으면 상대의 신뢰를 끌어낼 수 없는거야…… 지나친 의심은 오히려 상대의 거부감만 일으킬 뿐이야……) 반짝! 눈빛이 맑은 빛을 뿌렸다. (흥, 엽노인이 그에 대해 뭔가 조사하기 전에 내가 먼저 일을 처리해야지!) 오오! 그렇다면 흑의인은 바로 주상아가 분명하지 않은가? 그렇다. 백리강이 장담한 대로 그녀는 지금 천진장원을 찾아든 것이다. 천심마겁안(天心魔劫眼)과 미남계(美男計)의 승리였다. 이때, 휙! 주상아는 계속 경공을 발휘해 어느 한 전각 앞에 다다르고 있었다. 전각의 한 곳만이 유독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주상아는 왠지 그곳에 마음이 이끌리는 것을 느꼈다. (저곳이…… 그 분이 계신 곳일까?) 더 이상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이내 신형을 날려 가볍게 전각 위로 올랐다. 이어 편복괘천( 卦天)의 수법을 펼쳐 처마 끝에 거꾸로 매달렸다. 그러자 불이 환하게 켜진 정실 내부가 그대로 주상아의 시선에 들어왔다. 정실 안엔 지금 두 인물이 마주 앉아 있었다. 한 명의 늙수그레한 노인과 준수무비한 백의 미공자였다. (아……!) 순간 주상아는 내심 가슴 떨리는 탄성을 터뜨렸다. 백의 미공자. 그는 바로 낮에 그녀의 가슴에 돌을 던진 그 청년이 아닌가? 주상아는 꿈꾸듯 몽롱한 눈빛으로 백리강에게서 시선을 떼지못했다. 이렇듯 그녀가 황홀경(?)에 잠겨있을 때 백리강은 맞은편의 노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공자님! 드디어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상태로 계속된다면 아무래도 위험할 듯합니다만……" 노인은 종리단목을 조심스레 응시하며 정중히 입을 열고 있었다. 종리단목, 아니 백리강은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염려 마시오, 진노(陳老). 한 달 안으로 나의 무공은 완성 될 것이오." "……" "헌원륭…… 그의 무공이 얼마나 강한지는 몰라도 나는 그를 이길 자신이 있소. 여래팔법(如來八法)이 구성(九成)의 경지에 이른 이상……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오." 진노는 더욱 엄중한 신색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한데 헌원가에서는 공자님이 단목진이 아닌가 의심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후후후…… 이제 한 달만 더 버티면 모든 일은 해결될 것이니 염려마오." 백리강은 의미있게 웃은 뒤 문득 엄숙한 표정을 떠올렸다. "두고 보시오. 삼월천(三月天)…… 그 일은 반드시 내가 해결할 것이오. 반드시……" 그는 두 주먹마저 불끈 움켜 쥐었다. 진정 영웅다운 패기와 자신에 넘친 의연한 모습이었다. 이때 창 밖의 주상아는 방심이 통째로 흔들림을 느끼고 있었다. (아아…… 저런 분을 언니는 의심하다니……! 언니는 정말 바보야!) 이어 그는 돌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한데…… 삼월천은 무엇이고 단목진은 또 무엇이지? 종리공자에게…… 무슨 비밀이 있는 걸까?) 그때 정실 안에서 계속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진노, 그건 그렇고 오늘 내가 무공을 연성하는 광경을 타인에게 들키고 말았소." 백리강의 그 말에 진노는 흠칫 노안을 굳혔다. 이어 그는 다급히 물었다. "그…… 그들이 누구였습니까?" "글쎄…… 내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들은 황궁 진무왕가의 고수들인 것 같았소." "무슨 문제가 발생하진 않을까요?" 진노의 적이 염려섞인 음성이었다. 그러자 백리강은 잠시 씁쓸히 고소지었다. "하는 수 있소? 내가 손을 쓰려 했지만…… 상대의 무공이 보통이 아니라 어쩔 도리가 없었소." 흠칫! 하며 진노는 재차 경악의 표정을 떠올렸다. "천하에 그 누가 공자님과 당적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나도 그들의 정체가 궁금했소. 진정 무서운 고수들이었소." 백리강은 이어 탄식하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어쨌든…… 이번 일만 마무리되면…… 나는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고 초야에 묻혀 살고싶소. 지난 세월은…… 너무나 고통에 겨운 나날들 뿐이오……" "……" 진노는 그저 침묵을 고수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백리강이 진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진노, 이만 돌아가 보시오." "……" "가서 전하시오. 아무 걱정 말라고……" 진노는 이내 노구를 일으켜 백리강에게 공손히 예를 취했다. "공자의 말씀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그럼 다시 뵈올 때까지 몸조심 하십시오." 이어 진노는 조용히 방을 나갔다. 백리강은 잠시 상념에 잠긴 듯 미동도 않고 있었다. 문득 그는 시선을 창쪽으로 주며 한가닥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후후…… 이 정도면…… 꽤 훌륭한 연극인 셈이지……?) …… 주상아, 그녀는 지금 심각한 상념에 잠겨 있었다. (종리공자…… 무슨 내력이 있는 분인가봐. 대체 정체가 무엇일까? 언니 말대로……) 하나 그녀는 이내 살래살래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결코 그럴 리가 없어. 설사…… 어떤 피치 못할 내력이 있다 해도 사파(邪派)와는 관계 없으니까……!) 주상아는 확신을 가졌다. 종리단목, 그는 결코 의심할 만한 인물이 아님을……! 이어, 그녀는 황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신형을 움직였다. 그 순간, "누구냐?" 정실 안에서 백리강의 일성이 터졌다. (어멋!) 주상아는 화들짝 놀라 거꾸로 매달린 채 급급히 경공을 펼쳤다. 하나 그녀의 손목은 이내 쇠갈고리에 갇힌 듯 잡혀 버렸다. "누가 감히 나를 엿보느냐?" 어느새 백리강이 창문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주상아의 손목은 그의 강철같은 손아귀에 꽉 움켜쥐어 있지 않은가? (이…… 이 일을 어쩌지?) 주상아가 내심 당황해 있을 때 백리강은 복면을 한 그녀를 바라보며 싸늘히 코웃음쳤다. "흐흥! 이제보니 헌원륭이 보낸 첩자가 숨어있었군." 그는 짐짓 살기띤 두 눈을 무섭게 부라렸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그와 동시에 백리강은 주상아를 잡은 손에 은근히 힘을 가했다. "아앗! 아…… 아파요." 주상아는 부지중 자신의 음성을 그대로 발하고 말았다. "응?" 백리강의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여인인가?" 그는 의아한 중얼거림과 함께 주상아의 복면을 확 벗겨버렸다. 미처 그녀가 말릴 사이도 없이 주상아는 진면목이 드러나고 말았다. 그녀는 옥용을 빨갛게 물들인 채 앵도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때 백리강은 내심 터지려는 웃음을 참으며 짐짓 안색을 굳히고 있었다. "아니…… 소저는 바로……?" 주상아는 고개를 푹 떨구며 모기소리만큼 작은 음성으로 말했다. "죄…… 죄송해요. 하나…… 결코 나쁜 뜻으로 그런 건 아니예요." 백리강은 짐짓 화난 얼굴로 냉소했다. "이제보니 소저는 남의 일을 훔쳐보는 것이 취미인 모양이구려?" 주상아는 황급히 정색을 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니예요. 그런 취미는 없어요." "그럼 어째서 야심한 밤에 남의 방을 훔쳐본단 말이오?" "……!" 주상아는 대답할 말을 잊었다. 어찌 그 이유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분홍빛 가슴을 어찌 보여 줄 수 있겠는가? 그녀는 그저 입술을 꼭 깨물고 있을 뿐이었다. "……!" 백리강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더니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소저는 진무왕가의 인물이 맞소?" 주상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요." "소저의 신분은……?" "그…… 그것은……" 백리강은 다시 표정을 싸늘히 굳혔다. "무언가 비밀이 많은 여인이군." 주상아는 잠시 주저하는 듯했다. 하나 그녀는 이내 입술을 꼭 깨물며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소녀는…… 주상아…… 진무왕의 둘째 딸이예요." 순간 백리강은 대경한 듯 그녀의 손목을 놓으며 뒤로 물러섰다. "소…… 소저가 바로 난향군주……?" "그래요." 주상아는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품에서 한 개 옥패를 꺼냈다. <황(皇).> 그것은 분명 황가의 표식이었다. 그러자 백리강은 자못 엄중한 신색으로 공손히 예를 취했다. "미천한 백성 종리단목이 군주님을 뵙습니다." "……!" 주상아의 옥용은 왠지 야릇하게 일그러졌다. (정말…… 이러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어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백리강의 행동을 제지했다. "소녀는 예의를 좋아하지 않아요. 어서 예를 거두세요." "어찌…… 감히 황가의 귀하신 분 앞에서 고개를 똑바로 들 수 있겠습니까?" 백리강은 더욱 깊숙이 허리를 꺾었다. 그러자 주상아는 아예 울상이 되어 버렸다. 이 순간 자신이 군주라는 사실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예의를 거두지 않으면 정말 화를 낼거예요!" 주상아는 토라진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백리강은 그제야 당황한 모습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 알았습니다." 이어 그는 의아한 눈빛으로 주상아를 향했다. "한데…… 어인 일로 존귀하신 군주께서 미신의 집까지 찾으셨습니까?" "한 가지 알아볼 것이 있어서예요." "……?" "실례가 아니라면 들어가서 얘기해도 될까요?" 주상아, 그녀는 이제 황가의 군주다운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와 있었다. 백리강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이를 말이 있겠습니까? 어서 들어오십시오." 주상아는 생긋 밝은 웃음을 떠올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고마워요." "하하…… 무슨 말씀을…… 오히려 제겐 영광입니다. 뜻밖에 군주를 모시게 되다니……" 백리강은 주상아를 탁자로 안내해 갔다. 하나 그 전에 한차례 창 밖을 보며 야릇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으니 그것은 귀신도 모를 암암리의 일이었다. 바로 어둠 속 한 그루 나무를 그는 예의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무(木), 그 무성한 잎사귀 그늘 아래 한 명의 거지노인이 누워 있었다. 그는 바로 오천(五天) 중 한 명인 괴신걸 도무방이 아닌가? (흠흠…… 의외로군. 종리단목…… 그가 삼월천과 관계가 있었다니……) 이미 그는 오래 전부터 정실 안을 엿보고 있었던 듯했다. (이렇게 되면…… 우리 모두의 예상이 빗나간 셈이군!) 괴신걸 도무방은 쑤세미같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염두를 이었다. (그가 삼월천의 인물이라면…… 분명 이십 년 전에 실종된 단목소의 증손자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어 그는 천천히 신형을 일으키며 씨익 의미있게 웃었다. (작은 군주 덕분에…… 천룡단은 큰 조력자를 얻게 된 셈이군! 역시 여인은 좀 대담해야 된단 말이지……) 그는 옆구리에 찬 호로병을 한차례 쓰다듬었다. (돌중과 필히 한 잔 해야겠는걸? 후후…… 엽노의 얼굴엔 주름이 지고 불광은 더 빛이 나겠군!) 다음 순간, 휙----! 괴신걸 도무방은 한 마리 야조(夜鳥)처럼 밤하늘을 가로질러 갔다. 2 사방이 고서(古書)로 가득 찬 고아한 느낌의 방이다. 이곳은 일전에 오천(五天)과 신비여인이 있었던 그 방이었다. 한데 지금 그곳의 둥근 탁자엔 단 두 명만이 대좌하고 있었다. 바로 오천의 한 명인 검선생 엽장청과 백리강이었다. 백리강, 그가 어찌하여 이곳까지 와있는 것일까? 방 안의 분위기는 깊은 바다 속처럼 착 가라앉아 있었다. 엽장청은 신중하게 백리강을 응시하며 말문을 열었다. "노부가 종리공자를 이곳 진무왕가(震武王家)까지 초청한 이유를 아시오?" 사뭇 정중하기 그지 없는 어투였다. 백리강은 아무 표정없이 그저 담담히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노인장이 누군지도 모를 뿐더러 또한 진무왕가가 어찌하여 소생을 초청했는지 알지 못하오." 그의 음성은 상당히 차가웠다. 검선생 엽장청은 가볍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노부가 실례를 범했소이다. 노부는 엽장청…… 엽노인이라 불러주시오." 백리강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없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 "엽노인이 소생을 초청한 서찰에는 진무왕가의 표식이 없었소. 이는 분명 진무왕이 아닌 다른 분이 초청한 것 같은데 맞소?" 엽장청은 사뭇 놀랍다는 얼굴로 대소했다. "하하하…… 종리공자의 관찰력은 과연 놀랍구려." "소생은 그가 누군지 알고 싶소이다." 백리강의 단호한 어투에 엽장청은 엄숙히 변한 얼굴을 끄덕였다. "공자를 초청한 분은 바로 진무왕가의 대군주이시오." 백리강은 가벼운 경악의 기색을 떠올렸다. "서하군주(瑞霞君主)께서……?" 엽장청의 고개가 재차 끄덕여졌다. "그렇소." "왜 소생을……?" "공자와 상의할 것이 있어서요." 백리강은 두 눈에서 짙은 의혹을 피어 올렸다. "무엇을 의논한다는 말이오?" "바로…… 공자의 무공을 사고자 하심이오." "……!" 백리강은 재차 표정을 흠칫 굳혔다. 이어 그는 싸늘한 신색으로 냉랭히 입을 열었다. "그렇군. 서래산에서 나를 발견한 사람들이 서하군주에게 이야기한 것이군. 그렇지 않소?" 엽장청은 숨김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백리강의 안색은 더욱 냉랭히 굳어 들었다. "소생은…… 비록 신분은 보잘 것 없으나 왕가(王家)의 세력다툼에 끼고 싶은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소." 엽장청은 쓰게 웃었다. "왕가의 분규 때문에 공자의 힘을 빌리고자 함이 아니오." "그럼 무슨 이유로……?" 엽장청의 노안은 매우 엄중한 기색을 띄웠다. "무림(武林)을 위해…… 종리공자 아니 단목공자의 힘을 얻고자 했을 뿐이오." 찰나 백리강은 눈에 띨만큼 안색을 일변시켰다. 그 변화를 엽장청의 현기깊은 시선은 놓치지 않고 있었다. (역시…… 종리단목은 삼월천(三月天)의 십대천주인 단목소의 증손자 단목진이었군!) 그가 내심 확신을 굳히고 있을 때 백리강은 다시 입을 열고 있었다. "단목공자라니…… 그것은 무슨 말씀이오?" 그는 짐짓 애매모호한 표정을 떠올렸다. 엽장청은 재차 가볍게 웃었다. "허허…… 이미 다 조사해본 일이오." "……!" "공자가 단목소의 증손자임을 이미 확인했고…… 또한 우리는 삼월천의 비사(秘事)도 알고 있소이다." "……" 백리강은 할 말을 잊은 듯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엽장청은 다소 부드러운 어조로 그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허허…… 공자께서 대군주의 일을 도와준다면 우리도 단목공자를 돕도록 하겠소. 잘 생각해 보시오." "……!" 백리강의 안색은 일시지간 수시로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적이 침중한 기색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소생보고 무엇을 도와달라는 말씀이오?" 엽장청은 주저없이 말했다. "전 중원(中原)의 평화!" 백리강은 냉랭히 웃었다. "진정 거창하군." 그때였다. "거창한 반면 그만큼 어려운 일이예요." 돌연 청아하기 이를 데 없는 옥음(玉音)이 정실 안에 울려퍼졌다. (드디어 나타났군!) 백리강의 두 눈 깊숙이 야릇한 빛이 스쳤다. 하나 겉으론 표정을 굳히며 소리가 난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으로 막 한 명의 은빛 면사여인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오천(五天)을 명령하던 신비여인이었다. 검선생 엽장청이 신형을 일으키며 그녀를 향해 공손히 허리를 꺾었다. "노신 엽장청이 대군주를 뵈옵니다." 신비면사여인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예를 거두세요, 엽노인!" "알겠습니다." 엽장청은 정중히 고개를 숙인 후 다시 자리에 앉았다. 신비여인은 이번엔 백리강을 향하여 재차 청아한 옥음을 발했다. "소녀가 바로 공자를 이리로 오시게 한 장본인…… 서하군주예요." 백리강은 신형을 일으키며 담담히 예를 취하였다. "미신 종리단목…… 대군주님을 뵙습니다." "저는 예의 따위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냥 편히 자리하세요." 서하군주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 말에 백리강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다시 자리했다. "감사합니다." 동시에 내심 그는 의미있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과연…… 종리단목의 추측이 맞았군. 오천을 암중으로 움직이는 신비인은 바로 서하군주 주여설이었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확인된 셈인가? 이때 서하군주는 백리강의 맞은편에 자리하며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 면사 속으로 그녀의 눈빛이 보일 듯 말 듯 물결쳤다. 그녀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상아에게서 공자의 말씀을 대강 들었어요. 듣던대로…… 기우가 헌앙하신 분이군요." 백리강이 가볍게 목례를 해보였다. "과찬의 말씀이시오." "……!" 서하군주는 얼른 무어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은 듯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잠시 그들 사이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다시 입을 연 사람은 서하군주 주여설이었다. "소녀가 공자를 이곳에 모신 것은…… 엽노인의 말씀대로 전중원을 위해서예요." 백리강은 담담히 그녀를 응시했다. "소생은…… 소생의 일을 처리하기에도 힘이 부친 상태이외다." 그것은 곧 정중한 거절의 뜻이 아닌가? 서하군주는 면사 사이로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너무…… 겸손하신 말씀이세요." "겸손이 아니라 사실이오." 칼로 자르듯 단호한 어조에 곁에 있던 엽장청은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감히 뉘 앞이라고…… 무례한 녀석이로군.) 하나 서하군주 주여설은 달랐다. (어딘지 특별한 데가 있는 사람같아……) 그녀는 어쩐지 백리강의 당당한 그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면사 속에서 그윽한 눈빛을 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소녀가 보기에…… 공자의 무공은 당금 천하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고강한 것이예요." "……!" "그리고…… 삼월천에 대해서는 소녀도 약간은 알고 있어요. 헌원가문(軒轅家門)의 위세는 대단한 것이죠. 공자 혼자의 힘으로는 벅찬 상대일 거예요." "……!" "아무리 단목가문(端木家門)이 공자를 돕는다 해도 현재 단목가문은 헌원가문에 밀려 그 힘조차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니까요." 주여설의 말은 논리정연했으며 날카로운 면이 있었다. 백리강의 표정은 자못 침중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군주께서 소생에게 원하는 바가 무엇이오?" 주여설은 지체없이 대답했다. "소녀를 삼년(三年)만 도와 주세요." "삼 년……?" "그래요. 삼 년이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어요." "……" 백리강은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하나 얼마 후 그는 엄숙한 안색과 눈빛으로 주여설을 똑바로 응시했다. "소생이 비록 금위부 대영반의 아들 종리단목으로 행세하고 있으나 실상은 무림의 단목가문 출생…… 즉 무림인(武林人)이오." "……" "무림인에겐 원래 황가(皇家)와의 접촉이 금기로 되어 있소. 소생이 비록 미약한 신분이나 군주의 능력도 보지 않고 황가의 일을 돕는다는 것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소." 그 말의 뜻을 뒤집어 보면 주여설의 능력이 자신보다 뛰어나야만 그녀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능력이 모자라면 꿈도 꾸지 말라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황실의 군주에게 할 수 있는 말치곤 매우 당돌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옆에 있던 엽장청의 안색이 굳어졌다. 하나 주여설은 오히려 낭랑히 교소했다. "호호호…… 결국은 소녀의 무공을 알고 싶다는 말씀이군요?" "그렇다고 할 수 있소." 백리강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엽장청이 더 이상 두고볼 수 없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리며 입을 열었다. "단목공자, 너무 무례한 것 같네!" 주여설이 고개를 흔들며 그를 제지했다. "그만 두세요, 엽노인!" "……!" 엽장청은 움찔 입을 다물었다. 주여설은 다시 백리강을 향하며 은근히 물었다. "공자께서는 엽노인이 누군지 알고 계신가요?" 백리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소. 우내오천의 한 분이신 검선생 엽장청 노선배님을 그 누가 모르겠소?" "……!" 엽장청의 노안은 적이 굳어들었다. (으음…… 안목이 보통이 아니군. 이미 노부의 정체까지 파악하고 있었다니……) 새삼 백리강의 존재가 새로이 인식되는 것이었다. 주여설이 백리강을 향해 조심스런 음성으로 묻고 있었다. "엽노인과…… 공자께서 만일 무학을 겨룬다면…… 승패가 어찌 될 것 같은지…… 혹 생각해 보신 적이 있나요?" 백리강은 아무렇지도 않게 금시 입을 열었다. "승부는 무공을 겨뤄봐야 알겠지만 아마 육대 사(六對四) 정도로 소생이 유리할 것이오." 엽장청의 안색이 은근한 노기(怒氣)를 띄웠다. (무례한 놈!) 그 누가 감히 오천(五天) 앞에서 그런 말을 거침없이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수양이 깊은 엽장청도 백리강의 호언엔 담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데, "호호호……" 주여설, 그녀는 뭐가 그리 우스운지 연신 교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무척이나 유쾌한 듯한 모습이었다. 이윽고 웃음을 그친 주여설은 백리강을 향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공자의 뜻대로 소녀…… 비무(比武)를 승낙하겠어요." 백리강은 빙그레 웃었다. "고맙소." "……" "만약…… 소생이 진다면 기꺼이 대군주를 도와 드리리다." 주여설도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호호…… 좋아요. 만일 소녀가 진다면 더 이상 공자를 붙잡지 않겠어요." 그렇게 상극(相剋)의 운명을 타고난 두 남녀의 비무가 결정되었다. 백리강과 서하군주 주여설. 진정 흥미진진한 대결이 아닐 수 없었다. 하나 백리강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이번 기회에 서하군주의 무공과 내력을 완벽하게 파악해 둬야한다. 이건 둘도 없는 기회다. 훗날 마교와 나의 미래를 위해서……) "엽노인, 벽라옥척(碧羅玉尺)을 주세요." 주여설이 엽장청을 돌아보며 말했다. 엽장청은 품 속에서 벽옥빛 옥척(玉尺)을 꺼내 공손히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주여설은 벽라옥척을 손에 들며 백리강을 향했다. "공자도 무기를 꺼내세요." 백리강은 담담히 고개를 흔들었다. "소생의 무공은 여래팔법(如來八法)으로 무기가 필요없소." 주여설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소녀도 무기를 쓰지 않겠어요." …… 기묘한 대치상태가 이루어졌다. 남(男)과 여(女), 그리고 상극의 운명을 타고난 정(正)과 마(魔)의 대표적 두 인물……! 비록 서로의 무공을 시험하는 부담없는 비무라 하나 그 의미는 실로 큰것이 아닐 수 없었다. 적이 긴장된 분위기가 실내를 사로잡았다. 주여설이 엄숙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공격하세요, 공자!" 백리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실례하겠소이다, 군주!" 동시에 그는 오른손을 빙글 회전시키며 낭랑한 일성을 터뜨렸다. "여래(如來)의 불덕이 깃든 위대한 불광(佛光)이 성스러운 빛을 발하노라! 불광초현(佛光初現)!" 찰나, 번쩍----! 광채와 함께 한 무리 짙은 혈광(血光)이 그의 우장(右掌)을 떠났다. 그것은 아무런 소리도 기척도 없이 주여설을 덮쳐 들었다. 하나 이 순간 주여설은 느낄 수 있었다. 전신을 옥죄어 오는 가공무비할 압박감을…… (과연…… 대단하구나. 여래팔법! 불광신승이 자랑할만한 무공이었어!) 주여설은 면사 속에서 가볍게 안색을 변화시켰다. 하나 그녀는 이내 우수(右手)를 끌어올려 내공을 주입했다. 순간, 주여설의 우수가 벽옥빛으로 투명하게 변했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우수를 내뻗어 그대로 백리강의 혈광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백리강의 안색이 미미한 급변을 일으켰다. (이 무공은 무엇이든 꿰뚫어 버린다는 천축(天竺)의 밀공 미가수(彌迦手)가 아닌가?) 다음 순간 그는 급히 보법(步法)을 펼쳐 주여설의 미가수를 젖혔다. 도저히 여래팔법의 일법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을 듯했던 것이다. 이어 백리강은 쌍장을 동시에 회전시키며 재차 낭랑히 대갈했다. "창천(蒼天)을 수놓는 천(千) 개의 손에 불존(佛尊)의 미소가 깃들도다. 여래팔법의 제 삼법 천수소불(千手笑佛)!" 옆에서 지켜보던 엽장청의 안색이 굳어졌다. 자신이 알고있는 무공을 순간적으로 떠올렸지만 검을 사용치 않곤 상대의 무공을 막아낼 방도가 쉽게 생각나지 않았다. 수천 개의 만월이 한꺼번에 작렬하듯 눈부신 은광(銀光)이 폭우처럼 주여설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주여설은 한꺼번에 천 개의 손(手)이 자신을 덮치는 환각에 빠졌다. (어…… 엄청나다! 미가수로는 도저히 상대하기 힘들겠어!) 그녀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할 수 없다!) 무엇을 결심했는가? 주여설은 미가수를 거두고 이내 쌍장을 가슴 앞에 끌어 모았다. 순간, 그녀의 섬섬옥수가 핏줄까지 내보이도록 극히 투명하게 화했다. 마치 투명한 얼음을 빚어 놓은 듯했다. 그 광경에 관전하고 있던 엽장청은 흠칫 안색을 굳혔다. (이럴 수가……? 군주께서 천세신경(天世神經)의 무공까지 사용해야할 만큼 저자가 강하다는 말인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는 불신어린 표정으로 두 사람의 결전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그런 중에도 백리강과 주여설의 비무는 계속되고 있었다. "여래팔법의 제 사법 불광보조(佛光普照)----!" 이번엔 서슬이 시퍼런 청광(靑光)이 백리강의 쌍장을 떠났다. (앗!) 주여설은 다급히 보법을 펼쳐 백리강의 공세를 젖혀냈다. 여래팔법(如來八法). 실로 변화무쌍했으며 통천가공의 경지에 이른 무학이었다. 주여설은 그 현란지경에 두 눈이 팽팽 돌 지경이었다. 과거 여래존자가 어떻게 마교의 천존마제를 상대했는지 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하나 백리강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주여설의 극고한 무공 능력에 내심 경악을 품고 있었다. (으음…… 역시 예상대로 만만치 않군!) 그러다 문득 그는 암암리에 눈빛을 뿌렸다. (그렇다! 이 여인의 무공은 팔백 년 전 중원십천제(中原十天帝) 가 백 년 간 공동연구하여 저술했다는 정도무림의 최강의 비경(秘經)인 천세신경(天世神經)의 무공이다!) 그는 드디어 주여설의 무공 근원을 알아내고 말았다. 그녀의 무공 뿌리는 바로 중원십천세의 천세신경인 것이다. 한데 백리강이 잠시 정신을 분산시킨 사이에 주여설의 쌍장은 그대로 그의 장강(掌 )을 꿰뚫었다. 동시에 무색투명한 주여설의 쌍장은 백리강의 가슴을 맹렬히 찍어오고 있지 않은가? 찰나, (헛!) 백리강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이어 다급한 김에 그는 쌍장을 마주 내밀어 주여설을 막았다. 순간 그의 쌍장은 그대로 주여설의 쌍장에 맞부딪쳤다. 그러자, 푸시시시식……! 기음과 함께 마주친 두 사람의 손바닥에서 흰 연기가 솟았다. 한 옆에 있던 엽장청은 또 다시 안색을 굳히고 말았다. (내공(內功) 대결…… 하필이면 이렇게 위험한 대결을 벌이게 되다니……) 그렇다! 무인(武人)들에 있어서 가장 금기시되고 위험한 대결이 바로 내공 대결이었다. 한데 지금 백리강과 주여설은 불가피하게 내공대결을 벌이게 된 것이다. 실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이때 백리강의 전신은 은은한 서기(瑞氣)에 휩싸이고 있었다. 반면 주여설의 전신에선 찬연한 칠채보광이 뻗치고 있었다. 바로 여래불타신공(如來佛陀神功)과 천세무극지존공(天世無極至尊功)이 극성으로 펼쳐진 것이다. 두 사람은 삽시에 찬란한 서기와 칠채보광에 파묻혀 버렸다. 진정 천고에 보기 드문 가공할 내공 대결이 아닐 수 없었다. 무서운 경기의 회오리가 사방으로 뻗쳤다. "……!" 엽장청, 오천(五天)의 최강 기인인 그마저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의 노안은 대경의 기색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이…… 이런 놀라운 일이…… 단목진 저자의 내공이 거의 군주님과 맞먹을 정도라니 실로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장내의 상황을 예의 주시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 백리강의 이마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주여설 역시 어깨를 바르르 경련하고 있었다. 일순, 푸스스…… 주여설의 얼굴을 가린 은빛 면사가 가루로 화해 떨어져 내리며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아아! 만개한 모란화가 이러할까? 진정 고귀하며 부귀로운 기품이 넘치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 주상아와 비슷한 용모였다. 하나 감히 근접키 힘든 고귀한 기품은 주상아를 훨씬 능가했다. 이때, 파시식……! 백리강 쪽에서 기음향이 일었다. 그의 두 발이 바닥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백리강의 입가로 한 줄기 선혈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의 얼굴은 몹시 창백하기 그지 없었다. 그 순간 주여설이 돌연 손을 떼며 뒤로 몇걸음 물러섰다. 이어 그녀는 진심어린 얼굴로 정중히 말했다. "상처를 입혀 죄송해요." "……" 백리강은 멍하니 주여설을 응시했다. 자존심이 상한 듯 그의 입꼬리가 가늘게 경련하고 있었다. 문득 그의 입술 사이로 한 줄기 탄식이 새어나왔다. "천하에…… 적수가 없을 줄 알았건만……" 주여설은 그를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공자의 무공은 절대 소녀의 아래가 아니예요. 단지 좀전에 잠시 동안 방심하셔서 승기를 놓친 것이 결정적인 패인(敗因)이 되었을 뿐이죠." 백리강은 침중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어찌 대장부가 그런 것으로 패배의 구실을 삼을 수 있겠소? 소생이 진 이상 더 이상 할 말은 없소. 삼 년 간 군주를 도와 드리도록 하겠소." 주여설은 환한 웃음을 떠올리며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공자의 도움으로 천하의 억조창생이 악의 무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악의 무리…… ㅉ…… 정말 씁쓸하군……) 백리강은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한데 문득, 울컥! 그는 한 모금의 선혈을 토했다. "공자……!" 주여설은 당황하여 그를 부축하려다 멈칫 손을 멈추었다. 백리강은 한층 창백해진 얼굴로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소생…… 이만 돌아가겠소이다." "어찌 그런 몸으로……" "아니오. 괜찮소이다. 하나 오늘 약속은 결코 잊지 않으리다." 이어, 그는 신형을 돌려 정실을 나갔다. 한눈에도 걷는 것조차 힘겹게 보이는 모습이었다. 하나 또한 대단히 완강한 모습이기도 했다. 결코 비굴하거나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그런 의지가 엿보였다. 주여설은 잠시 그대로 선 채 백리강의 사라져 가는 모습을 응시했다. 잠시 후 백리강의 모습이 사라지자 엽장청이 고개를 흔들며 탄식하듯 입을 열었다. "진정…… 단목공자의 무공이 저토록 강할 줄은…… 상상도 못했소이다." 주여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동감을 표했다. "결코…… 소녀의 아래가 아니예요." 엽장청은 미소 띈 얼굴로 그녀를 돌아 보았다. "하나…… 군주께서 이기지 않았습니까?" 주여설은 적이 어두운 안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예요. 소녀가 이긴 것은 아니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여래팔법, 그것은 결코 천세신경의 무공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는 무공이었어요." "……!" 엽장청은 미세한 놀람의 기색을 띄웠다. 그때 돌연 주여설이 창백해진 얼굴로 비틀거렸다. "아……" 그녀의 입가엔 한줄기 가는 선혈마저 흘러 내리고 있었다. "대군주!" 엽장청이 대경하여 급히 주여설에게 다가갔다. 주여설은 간신히 신형을 지탱하며 손을 내저었다. "괘…… 괜찮아요." "대군주……" "나를…… 부축해서…… 밀실로……" 엽장청은 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자, 노신의 어깨에 기대십시오." 그는 주여설을 부축해서 정실을 나섰다. 그런 그의 내심은 이 순간 심상치 않은 경악으로 가득 찼다. (종리단목…… 아니 단목진……! 그의 무공이 그렇게 고강하단 말인가? 대군주가 이런 부상을 입을 만큼……) 이 순간 그의 마음은 왠지 가볍지가 않았다. 3 황촉이 화미(火尾)를 사르며 황금빛 그윽한 광채를 뿌렸다. 종리단목은 촛불빛 아래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여전히 우아한 궁장차림의 여장을 한 모습이다. 불빛 아래 그 모습은 가히 고혹적이 아닐 수 없었다. "……" 사위는 적막했다. 간간이 책장 넘기는 소리만이 적막을 조심스레 깨고 있을 뿐이었다. 문득 종리단목이 책을 덮으며 고개를 들어 촛불을 응시했다. "……!" 그윽한 촛불빛을 담은 그의 두 눈에 얼핏 우수가 드리워졌다. 왜일까? 그는 무거워진 마음에 낮게 한숨을 불어냈다. 그런 그의 눈 앞을 스치는 하나의 영상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백리강이었다. "후우……" 그는 다시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실타래처럼 엉켜드는 느낌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방문이 덜컥 열리며 한 인영이 비틀비틀 들어섰다. "……!" 종리단목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백리강이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한데 그의 얼굴은 지금 몹시 창백했으며 입가엔 선혈마저 내흘리고 있지 않은가? "백리공자!" 종리단목은 대경하여 다급히 그에게로 달려가 부축했다. 백리강은 간신히 웃어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괜…… 찮소." 하나 종리단목은 괜찮지가 않았다. "이…… 이게 어찌된 일이오? 어쩌다 이런 상처를 입었소?" 평소 웬만한 일에는 절대 이성을 잃지않는 냉철한 성격의 그가 자신도 이상하리 만큼 당황하고 있었다. 백리강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의자에 털썩 자리했다. 이어 그는 희미한 고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서하군주와 비무하다가 이 지경이 되었소." "주여설과……?" 종리단목은 의자에 앉다말고 흠칫 안색을 굳혔다. 그는 다급히 되물었다. "그녀가 그렇게 강하단 말이오?" "무척 강하오." 백리강이 고개를 끄덕이자 종리단목은 적이 불신의 기색을 띄웠다. "백리공자보다도…… 강하다는 말이오?" 백리강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물론…… 나는 전력으로 싸우지 못했소. 더욱이 천존마제(天尊魔帝)의 무공을 쓰지 않았으니……!" 그렇다! 그의 진정한 무공은 과거 여의존자를 능가한 천존마제의 무공이 아니던가? 백리강은 종리단목으로 변신해 있었던 까닭에 여의존자의 무공만 을 사용했던 것이다. 만일 그가 진정한 무공을 숨기지 않았더라면 어찌 됐을까? 그 결과를 묻는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다. "아무튼…… 이번 대결로 서하군주 주여설의 무공 능력을 알아냈으니 큰 소득이 아닐 수 없소." 백리강은 흡족한 듯 말했다. 그 순간, 울컥! 그는 또다시 한 모금 선혈을 토했다. 종리단목은 다급히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백리공자! 어서 치료부터 해야겠소." "아…… 아니오. 내상을 좀 입었을 뿐이오." 백리강은 고개를 저어 종리단목의 손길을 만류했다. "운공조식(運功調息)을 하면 괜찮아질 것이니 염려마오." "……!" 이어 백리강은 품에서 한 알의 영단(靈丹)을 꺼내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곧장 눈을 감으며 운공조식에 들기 시작했다. 종리단목은 한 옆으로 비켜나 그 모습을 조용히 응시했다. 그의 두 눈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그러다가 문득 종리단목은 퍼뜩 상념에서 깨어나며 도리질을 했다. (내가…… 왜……? 설마…… 이 사람을……?) 그는 더욱 완강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어. 나의 마음 속에선 이미…… 그런 사 치스런 감정이 사라진 지 오래인데……) 그는 자신의 기묘한 감정을 강하게 부인했다. 하나 이건 대체 무엇인가? 그의 내부 저 심층에서 우러나오는 이 야릇한 감정은……? 일순, "으음……" 종리단목의 입술 사이로 나직한 탄식이 새었다. 그는 다시 백리강을 그윽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때 백리강의 얼굴엔 서서히 화색(和色)이 감돌고 있었다. 종리단목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어 천천히 한 손을 내밀어 백리강의 뺨을 쓰다듬었다. (……!) 왠지 가슴 뭉클한 감동이 그의 전신을 뒤흔들었다. 다음 순간 종리단목은 돌연 고개를 숙여 백리강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신형을 돌려서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늘진 그의 시선은 캄캄한 어둠 저쪽에 무심히 던져졌다. (잊는 게 좋아. 될수록…… 이런 감정은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좋아!) 밤바람은 제법 서늘했다. 하나 그 바람도 종리단목의 뜨거운 감정을 식혀주진 못했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재미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