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2일 가을이 깊어가는 밤 시인 주요한은 미군정사령관 하지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를 쓰고 있었다.
주요한은 1918년 우리나라 최초의 서정시로 평가되는 시 '불놀이'를 통해 등단한 시인이었다. 그의 동생이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작가 주요섭으로 형제가 나란히 한국근대문학사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주요한의 주요 활동무대는 언론이었고 그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편집국장 및 논설위원을 지낸 언론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뒤 친일파로 전향하여 조선문인보국회, 조선임전보국단 등 수많은 친일단체의 간부로 활동하였다.
주요한은 '나라의 부름을 받고 가실 때에는 빨간 댕기를 드리겠어요"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댕기',
"나는 간다. 만세를 부르고 천황폐하 만세를 목껏 부르고, 대륙의 풀밭에 피를 뿌리고 너보다 앞서서 나는 간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지원병 이인석에게 줌' 이라는 끔찍한 글을 쓰고 일제의 침략전쟁을 '애국'이라 선전하며 일제 말기를 보냈다.
2000년 이후 친일문학에 대한 자세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주요한은 친일 문학인으로 선정된 42인의 문인 중 이광수 다음으로 많은 편수의 친일문학작품을 제작한 문인으로 밝혀졌다.
해방 후 주요한은 자신의 친일행적에 대한 자숙의 의미였는지 시야를 멀리 내다 보고 있었는지, 한민당의 영입 제의를 거절하고 정치권과 거리를 두고 지내고 있었다. 정치권에서 떨어져 보면 더 잘 보이는 법, 주요한은 진주한 지 한달 보름도 되지 않은 군정에 얽힌 난맥상과 독단을 보며 우려를 금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글로써 일반적인 한국인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뿐이었다. 그는 정중하고 예의를 갖추었지만 단호한 주장의 편지를 썼다. 편지의 내용은 간절했고 그의 부역행위를 감안하더라도 읽어 볼 가치는 충분했다.
"미국인들이 오로지 이 나라를 해방시키겠다는 목표에 충실하고, 또 각 부서장들과 도지사, 시장의 자리에 앉아서 헌신적으로 노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군정의 시정은 선의에 입각해 있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첫째, 미국인들은 한국어로 얘기하지 못합니다. 통역의 도움이 있어야 행정 업무를 펼칠 수 있지만 그들의 역량으로는 그 막중한 책임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둘째, 장교들은 한국인 관리를 모릅니다. 적당한 사람을 적재적소에 임명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충언은 단순하고 단호합니다. 조선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집을 돌보게 하라는 것입니다. 군정장관 아놀드를 대신하여 조선인 지도자들 중 어느 누구라도 임시민정장관으로 임명하십시오. 이승만 박사도 좋고, 임정의 김구, 인민위원회의 여운형, 한민당의 송진우, 국민당의 안재홍, 미국에 있는 서재필, 김규식 박사 어느 누구라오 좋습니다. 당신이 누구를 선택하든 상관없고, 그들 중 누구라도 적임자입니다...물론 우리는 매사가 순조롭게 진행되리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정당과 파벌 간의 투쟁은 물론 이합집산이 계속될 것입니다...중요한 것은 조선인 민간행정이 지금 이 순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미국이 이 나라에 10년간 주둔할 겁니까? 아닐 테지요. 그렇다면 그 대안은 위에서 제시한 대로입니다. 외국 군대의 시정이 계속되는 한 인민의 통합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우리는 요람 속에서 무한정 보호를 받는 대신 비틀거리고 다치더라도 혼자 걷기 위해 노력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아놀드 군정장관은 지난 10일 인민공화국을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미군정이 한반도 이남의 유일한 정부임을 다시 한번 천명했다. 미군정이 단호한 태도로 재차 직접 통치를 천명한 시점에서 주요한은 그러한 방침을 비판하며 한국인 지도자라면 이승만이든 김구든 여운형이든 그 누구라도 좋으니 그에게 민정장관직을 맡기라고 호소했다. 그는 정당과 정파 간의 정쟁은 불가피하고 그러한 자체 정화과정은 수십 년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그러면서 점진적으로 자리를 잡지 않겠냐고 호소했다.
그는 일제치하에서 부역한 친일 인사였지만, 미군정이 일제 식민통치 기구를 계승하고 부일 전력이 있는 조선인 관리와 경찰을 중용하고 10월 5일 쌀값을 자유화하는 등 비현실적 경제정책을 실시하고 그로 인해 빚어진 혼란을 지켜보며 우익 인사 중 누구도 비판하지 않던 미군정의 정책을 비판하는 편지를 썼고 편지는 영문으로 번역되어 다음날 미군정에 접수되었다.
여운형을 사기꾼으로 몰며 인공을 부인하고, 이후 충칭에서 귀국한 임정의 정부 자격도 부인한 강경파 군정장관 아놀드는 46년 1월 4일 민정조직이 전술군의 지휘 계통에서 완전히 벗어나 독자적인 민사행정조직으로 수립되면서 물러났다.
2대 군정장관 러치는 전원 미군으로 구성되었던 군정청 행정요원들을 점차 우파 한국인으로 대체해 나갔다.
러치는 군정 실시 1년 만인 1946년 9월부터 각 부처장을 모두 한국인으로 임명하고, 군정장관을 제외한 모든 미군 부처장은 일선에서 물러나 고문 역할만을 하게 하였다.
1947년 2월 10일 군정장관에 대한 수석보좌관이자 미군정 하 한국인 행정기관의 책임자로 안재홍이 '민정장관'에 취임했다.
이로써 제한된 범위이긴 하나 입법, 사법, 행정의 거의 모든 측면에서 한국인의 체제가 형성되었다.
1949년 4월 주요한은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풀려났고 이후 승승장구하다 1979년 반포주공아파트에서 사망하였다.
첫댓글 세상 어지러워지니 드디어 친일 글쟁이들이 출몰하는군요.
우리힘으로 독립 못해서 친일파 청산을 못했다는 널리 알려진 통설에 나는 회의적입니다.
이유는 35년은 너무 길었다. 일본인으로 태어난 아기가 35살이 되는 세월이면 어디까지가 친일파인가?라는 기준이 모호해집니다.
그러나 이 글쟁이들의 친일은 다른 문제. 머리 좋고 얍삽한 인간들. 친일의 참회록들 마저 교묘한 변명들.
진시왕 처럼 친일 글쟁이들과 책들을 한군데 모아서 분서갱유라도 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군사독재 시절에 그렇게 빨아 놓고서는 세상 좋아지니 대머리에 이상한 목소리로 강의랍시고 읊어데는 인간 나오면 측은하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스스로 지식인 이네 하는것들.지식인 자격증이라도 있는건가.
저도 레인져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일제시대에 태어나 일제로부터 엄청난 가스라이팅을 당하며 자란 평범한 집안의 똑똑한 젊은이가 식민지의 작은 벼슬을 얻었다고, 제국의 군인이 되었다고 친일파로 모는 것은 가혹합니다.
친일파몰이는 사회의 지도층에 한정되어야 하고 그때 적절한 처단이 이루어져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처음 이 글을 썼을 때는 주요한이 쓴 작품의 내용은 없었고 그냥 친일을 했다로 썼다가 글쟁이가 하는 친일의 구체성이 안 느껴져 작품 2개 넣었습니다.
사실 '불놀이' 같은 시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불놀이 없었어도 1925년에 진정한 서정시이자 자유시 진달래꽃은 나왔을 거예요.
불놀이 불태워버렸어야.
대머리는 대학 다닐 때 좋아해서 40대때까지 책 사서 많이 읽었는데 요즘은 제게 잊혀졌습니다. 아직도 몸자랑 하는가요?ㅋ
@슈 렉 한국전에 참전했던 연합군 병사들의 회고록을 보면 공통적으로 나오는게 , 측면이 한국군일때 가장 불안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초전에 너무 일찍 무너져서 자신들의 측면으로 적군이 밀려들었다고.
이랬던 한국군이 중반이 되면 제법 단단해졌다는 평가를 받기 시작합니다.
그 시행착오 과정에서 수 많은 젊은이들의 목숨값이었겠죠.
친일로 공격받는 백씨.박씨 등등은 고급 정규 군사교육과 경험으로 한국전에서 save lives 를 했습니다.
지식인 자격증..그렇네요.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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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섭이 주요한의 동생이었군요. 형으로 잘못 알고 있었어요. 본문 수정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