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6주간 금요일
‘바벨탑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창세기의 이야기입니다.
‘혼란’, ‘흩어짐’의 뜻을 지닌 ‘바벨’이란 말 속에는, 에덴 동산의 범죄 이후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인간의 욕망이 집단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담겨 있습니다.
“돌 대신 벽돌을 쓰고, 진흙 대신 역청”을 써서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는 인간의 오만함을
하느님께서는 단죄하시고 그들의 말을 섞어 흩어 버리십니다.
인간이 신과 같아지려는 욕망은 신화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제4차 산업 혁명’ 또는 ‘제4의 물결’로 불리는 기술 융합과
인공 지능 개발을 통해 인간이 ‘정신’을 창조하려는 새로운 바벨의 역사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술 과학이 발전하고, 로봇이 일상의 많은 영역을 대신해 주는 시대가 오면
인류는 행복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기술 혁명의 혜택은 오늘날의 자본주의 시대에
자산과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만 돌아가는 특혜가 되기 쉽습니다.
공정한 분배와 올바른 민주 의식이 전제되지 않는 한,
기술 과학의 혜택 역시 사회의 양극화 현상을 첨예화할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가 살아가야 할 분명한 길을 제시해 주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무한 경쟁 시대에 내 목숨을 구하려고 남을 짓밟는 일이 반복되는 한,
인류는 결코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서 체험할 수 없습니다.
나만 잘살려고 하면 이 세상은 ‘혼란’, 곧 바벨의 역사를 반복하고 맙니다.
내가 죽기로 작정하고, 내가 숨기고 싶은 나의 약점, 곧 십자가를 짊어질 때
이웃을 용서하고, 공감하며, 공존하는 법을 배웁니다.
하느님 나라는 바벨탑을 포기하고, 십자가를 서로 짊어져 주는 나라입니다.
2017,2,17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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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 신부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십자가
각자의 일터와 생활에서 잘 지내시는지요.
아마 대부분 힘들고 어려운 현실에 희망이라도 없으면 살아가시기가
무척 어려우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 희망이 우리에게 확신을 주고 기쁨을 주어
현실의 무게를 견디어 낼 수 있는 것이길 바랍니다.
만일에 그 희망이 이루어지는 것이 더욱더 우리 자신들과 가족을 곤궁에 처하게 만들거나
일시적 행복을 주고 파탄에로 이끈다면 큰일이 아니겠습니까.
청취자 여러분! 그런 일에 우리들의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고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럼 지금 우리들이 바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생명에로 이끄는 것입니까. 죽음에로 이끄는 것입니까?
혹시 아무리 힘든 현실이라도 그것이 죽음인지 독인지 모르고 눈앞의 일을 위해
걸어가거나 마신다면, 주님께서 생명에로 이끄시는 양식을 주시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사실 어려움 속에서 주님의 편에 생명의 길을 희망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소위 십자가를 묵묵히 짊어지기란 어렵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우리들은 자신들의 욕망으로 이기심으로 십자가를 지기보다
어려움을 비겨가거나 내려놓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설령 이웃의 유익과 하느님의 영광에 반해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말입니다.
나아가 생명을 버리고 죽음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선택은 좀 여유 있고 성공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실제로는 세상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은 첫 번째 인간 아담 에덴동산의 유혹에서
두 번째 사람 예수님의 광야의 유혹이야기에서, 어떤 것이 성공의 길인지 알려주십니다.
잘못된 길에 들어서면서 소위 돈, 명예, 권력 등으로 포장된 것들에 의해
자신의 생명을 잃어버립니다.
자신이 관심을 두지 않는 사이에 자신의 생명을 좀먹고 있는 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조금만 관심을 갖고 소위 성공한 사람들의 생활을 들어다 보면,
이런 내용을 금방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부럽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들과 같은 생활을 하고 싶다면,
이미 당신은 세상의 악성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치료를 요하는 상태입니다.
바로 의사이신 주님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그런데 의사를 찾지 않고 어디로 가십니까?
여러분! 우리는 생명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건강을 위해서 하루만 열심하면 안되고 매일매일 꾸준히 노력하고 준비해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확천금을 꿈꾸며 욕심스럽게 삽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하느님의 초대에 맞지 않는 생활입니다.
주님께서 들려 주시는 하느님의 초대에 귀를 기울이고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혹시라도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도 들려주시는 말씀
“너희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면 내가 잘 보게 해 주겠는데, 너희들이 잘 보인다고 하니
나도 어찌할 수 없다”는 주님의 깊은 탄식이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시길 바랍니다.
부산교구 김윤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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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현 신부님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인간들을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상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그러면서 당신의 모범을 따라 충실히 살고자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에 대해 우리들은 어떠한 자세로써 살아가야 할 지 묵상해보도록 합시다.
세계 2차 대전 때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일입니다.
독일군 한 부대가 폴란드의 작은 마을을 점령하여 주민들에게
군인들이 먹을 음식과 전쟁에 필요한 철 그리고 많은 액수의 돈을 요구하였습니다.
만일 다음 날 정오까지 음식과 철 그리고 돈을 내놓지 않으면
주민들 중 10명을 붙잡아 사형에 처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민들은 모든 식량을 꺼내고, 가정에 있는 모든 쇠붙이를 가져왔습니다.
식량과 철은 어느 정도 마련되었지만
마을에 있는 모든 돈을 모아도 그들이 요구한 돈에 반밖에 차질 않았습니다.
다음날 정오가 되었을 때 독일군들은 주민들 중 닥치는 대로 10명을 뽑아
그들을 밧줄에 묶고, 눈을 가린 채 마을 중앙에 나타났습니다.
독일군 장교 한 명이 앞으로 나와서 “음식과 철 그리고 돈이 준비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주민 대표가 나와서 떨리는 목소리로 “음식과 철은 준비되었지만 돈은 아무리 구해도
우리에게 가진 것은 당신들이 요구한 금액에 반밖에 모이질 않았소,
이것이라도 제발 가지고 가고, 우리 마을에 있는 사람들은 죽이지 말아 주시오.”
라고 애원하며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독일군 장교는 독살스런 눈을 부릅뜨고
“복종하지 않으면 어떠한 대가가 치러지는지 다른 마을 사람들이 잘 알 수 있도록
본보기를 보여 주어야겠다.”고 말하면서 밧줄에 묶인 채 있는 마을 주민 10명을 향해
사격 명령을 내리려고 하였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독일군 장교 앞에 조그마한 한 여인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마을 병원에 근무하던 수녀님이었습니다.
그 수녀님은 독일군 장교에게 “남자를 죽이는 것보다 연약한 여자를 죽이는 것이
다른 마을에 더 많은 효과적인 본보기를 보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한 뒤
천천히 독일군 병사들 사이를 지나 밧줄에 묶여 있는 10명의 마을 사람들을 풀어 주고
가족들에게 보내고는 그들이 서 있던 자리에 당당히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모두 숨죽인 듯 조용히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독일군 역시 갑자기 닥친 일이라 어리둥절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독일군 장교는 너무나도 당당한 그녀의 모습을 뒤로 한 채 조용히 마을을 떠났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너무나도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십자가상에서 죽으셨음을 우리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과 희생의 결정체인 것입니다.
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구원의 길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무상으로 주어진 구원의 길로 들어서게 된 우리들은 주님께 충실한 응답의 자세로서
새롭게 변모된 모습으로 그분께서 가르치시고,
모범으로 남긴 뜻을 잘 되새기며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부르심은 자기 자신 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삶에서부터
이웃 형제들을 위한 삶으로 방향 전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매일을 살아가면서 매스컴을 통해 보고 듣는 것은
온통 이기적인 삶에서 드러나는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나만 호의호식하며 즐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자기만 잘 살아 보려고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신의를 저버리고 사는 사람들
더 나아가 몇 푼의 돈 때문에 이웃 형제를 죽이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모습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앞의 예화에서처럼 비록 연약하고 가진 것 없는 수녀님이지만
무서운 분위기 속에서 자칫 잘못하면 자기 목숨까지도 잃어버릴 수 있는 순간에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목숨까지도 이웃 형제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불의와 맞서서 주님의 사랑을 전한 수녀님의 용감한 행동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생활 가운데 그 수녀님의 모습처럼 살아가고자 한다면
아주 조그마한 부분부터 사랑을 실천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바로 옆에 있는 형제들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얘기를 잘 들어주며,
우리의 따뜻한 마음을 전해야 할 것이고, 더 나아가 큰 어려움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 자신에게 불이익이 닥칠지라도 끊임없는 사랑 안에서 희생하는 삶을
꾸준히 이어 나아갈 때 이런 삶의 모습이 모이고 모여서
종국에는 자기 목숨까지도 내어주는 사람으로 변모해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부산교구 신기현 신부님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