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 장 奸雄의 最後 1 사호(死湖)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아담한 모옥이 있다. 조각품인가?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미녀가 그린 듯 창 밖을 내다보며 서 있다. 그녀는 금발에 청옥(靑玉)처럼 푸른 벽안을 지닌 이국미녀였다. 바로 귀영소소였다.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옷차림이었다. 야행복 차림이 아닌 단아한 옷차림을 하고 있어 더욱 현란한 미태가 돋보이고 있었다. 이때, 덜컹! 문이 열리며 두 인물이 모옥 안으로 들었다. 만자혈탈 조사의와 백리강이었다. 백리강은 모옥 안에 들어서자마자 흠칫 놀라고 있었다. "……!" 창가에서 막 신형을 돌리고 있는 귀영소소를 발견한 것이다. 그러자 만자혈탈 조사의가 그를 돌아보며 빙그레 웃었다. "놀랄 것 없네! 저 아이가 바로 나의 의손녀 사라일세." "아……!" 백리강은 그제야 나직한 탄성을 뿜어냈다. (뜻밖이군! 귀영소소가 조영주의 의손녀였다니……) 이어 그는 귀영소소를 향해 한차례 미소 지었다. "오랜만이오, 소저." 하나 귀영소소는 그 푸르고 신비한 벽안 가득 적개심을 떠올릴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백리강 그는 자신의 속살까지 본 치한(?) 중의 치한이 아닌가? 조사의가 씁쓸하게 웃으며 귀영소소에게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사라야, 화내지 마라! 이분은 나의 옛 벗이니라." "……?" 귀영소소는 그 말에 흠칫 의혹어린 눈빛을 떠올렸다. 조사의는 이어 백리강을 향하며 다시 말했다. "사라는 나의 의손녀이자 내가 제일 사랑하는 수하이지. 하나 사라는 벙어리라네." "……!" 백리강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일이라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사의는 다시 사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사라야,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저녁 준비와 함께 술상을 마련하도록 해라." 사라는 잠시 머뭇거리다 곧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정성들여 만든 음식이 향긋한 냄새와 함께 한껏 구미를 돋구었다. 백리강은 내심 은은한 경탄을 머금고 있었다. (무공만 높은 줄 알았더니…… 요리 솜씨 또한 일품이군!) 조사의가 그에게 식사를 권했다. "자…… 부족한 솜씨지만 맛있게 들게." "하하…… 너무 성찬이라 무엇부터 먹어야 할지 고민이오." 백리강의 너스레에 조사의는 빙그레 웃었다. 이어 그들은 술과 함께 저녁을 들기 시작했다. 사라는 시종 그들 곁에서 시중을 들었다. 백리강이 사라를 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라소저는…… 중원인이 아닌 듯하군요." 조사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서역인(西域人)이네." 백리강은 가볍게 경탄했다. "어쩐지 사라소저의 무공이 서역밀전의 무공이라 했더니……" 조사의가 쓰게 웃으며 그의 말을 중도에서 끊었다. "사라에 대해서는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하세." "……" "그건 그렇고…… 자네의 이야기를 듣고 싶군. 어떤가? 노부에게 이야기해 줄 수 있겠나?" 백리강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우린 동업자가 아니오?" 그는 그 동안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들려 주었다. 천금마옥을 통과해 마교로 들어갔을 때부터 다시 천금마옥에 들어오기까지…… 그 엄청난 내용에 조사의는 연신 탄성을 발했다. 진정 경악과 경악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잠시 후 백리강의 모든 설명이 끝나자 조사의는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진정…… 대단하군. 마치 전설을 듣는 기분이야." 동시에 그는 미묘한 눈빛으로 백리강을 지그시 응시했다. "아무래도 차후 자네와 나의 비무는 불공편한 것 같네. 예감인데 내가 질 것 같단 말일세. 하하……" 백리강은 그제야 말뜻을 깨닫고 나직하게 웃었다. "하하…… 그 무슨 과찬의 말씀을……!" "아니…… 절대 과찬이 아니네." 그러다 문득 조사의는 정색을 띄우며 말했다. "자네, 진정한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겠나?" "갑자기 왜……?" "그동안 자네의 변한 모습을 보고 싶네. 지난 세월이 변화시킨 자네의 모습을……" 백리강은 빙긋 웃었다. "좋소." 순간 눈 깜짝할 사이 백리강의 모습이 바뀌었다. 갑자기 모옥 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천신도 감탄할 백리강의 완벽한 용모가 드러난 것이다. 조사의는 부지중 탄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진정……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군. 그동안 이토록 훌륭한 청년으로 변모했을 줄이야……" 백리강은 쑥쓰럽게 웃었다. 이때 사라는 아예 멍하니 넋을 잃고 있었다. 조사의가 그녀를 힐끗 응시하며 빙그레 웃었다. "하하…… 사라는 여간해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아이인데 아무래도 자네에겐 반한 듯하군." 사라의 옥용이 순식간에 빨갛게 노을 빛으로 물들었다. 조사의는 짓궂게도 한술 더 뜨며 말했다. "오늘밤…… 말만 잘하면 사라는 자네 품에 그냥 안길 수도 있네. 하하……" "……!" 백리강이 어색하게 웃는 사이에 사라는 아예 두 손으로 홍당무가 된 옥용을 가린 채 밖으로 뛰쳐 나가 버렸다. 한 마리 사슴이 놀라 달아나듯 그 뒷모습조차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하하하……" "하하……" 유쾌한 대소가 그 뒤를 따랐다. 2 "마하반야바라밀다……" 아침나절부터 시작해서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단 한 번도 바뀌지 않는 염불, 듣는 이의 마음을 온통 짜증스럽고 고민스럽게 만들어줄 이 염불은 끊임없이 고승(苦僧)의 입 밖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고승, 그는 오직 그 하나의 염불만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죽어라고 그 염불만 되뇌이고 있었다. "마하반야바라밀다……" 이제는 목탁 치는 것조차 권태스럽고 귀찮은 듯 목탁은 법당 한 구석에 아무렇게나 나동그라져 있었다. 한데 이때였다. 휙----! 돌연 섬세한 인영 하나가 경미한 파공성과 더불어 법당 안으로 뛰어들었다. 백향희, 바로 그녀였다. 그녀의 시선은 들어서자마자 빠르게 고승의 모습을 포착하더니 이내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백향희옵니다." 뚝! 그나마 하던 염불도 뚝 멎었다. 고승은 눈살을 찌푸리며 여전히 등을 보인 채 입을 열었다. "이곳은 오지 않도록 되어있거늘 어찌 이렇듯 경거망동이냐?" 다분히 꾸짖는 듯한 음성이었다. 백향희는 초조한 듯 다급히 입을 열었다. "큰일났습니다! 노선사님." "큰일이라니……?" "천룡단의 일곱 시비 중 소녀를 제외한 모두가 제거되었습니다." 순간 고승의 안색이 싹 대변했다. 그는 앉은 채로 빙글 몸을 돌렸다. "그게 무슨 말이냐? 조금 전 그들이 보낸 서찰을 받았거늘……" 백향희는 다급히 대꾸했다. "모든 것이 전격적으로 처리되었습니다." "누구에 의해서 말이냐?" "위지영주입니다." 고승의 얼굴에 커다란 놀람의 빛이 솟구쳤다. "그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는 노선사님의 정체도 이미 파악한 듯했습니다.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그들이 곧 이곳으로 밀어닥칠 것입니다." 고승의 안색이 짧은 순간 여러차례 변했다. 그러다 문득 고승은 침중히 입을 열었다. "이리 와보아라." 백향희는 급히 고승의 앞으로 다가갔다. 순간, 고승이 백향희를 향해 벼락치듯 우장을 내뻗었다. 느닷없는 기습이었다. 한데 백향희는 이미 예측이나 했었다는 듯 훌쩍 뒤로 물러서는 게 아닌가? 무섭게 빠른 신법에 고승의 우장은 고스란히 허공만 갈랐을 뿐이었다. 고승의 눈빛이 싸늘하게 빛났다. "역시 너는 백향희가 아니었구나." 그러자 백향희는 까르르 간드러진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호호……" 하나 그녀는 이내 교소를 뚝 그쳤다. "역시 보통 땡초는 아니었구나. 내가 백향희가 아닌 줄은 어떻게 알았지?" 고승은 천천히 가부좌를 풀고 몸을 일으켰다. "천룡단 일곱 시비들에게 각기 신분을 알리는 표식이 있다. 귀 아래의 붉은 점이 그것이지." "오라…… 그걸 몰랐구나." "너는 누구냐?" "나? 이런 사람이지." 그렇게 말하면서 얼굴을 쓱 문지르자 전혀 엉뚱한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오! 숨막힐 듯 아름답고 요염한 얼굴이 아닌가? 두 눈에 일렁이는 요사스러운 광채만 아니면 어디 내놔도 흠잡을 곳 없는 절색미인, 그 미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고승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소서시…… 바로 너였구나……!" 오오…… 소서시! 그녀는 소서시 서비연이었다. 몇 년 전에는 귀엽고 깜찍한 모습이었으나 지금은 몰라보도록 아름답게 성숙해 있는 것이다. 고승의 미간에 문득 그늘이 깔렸다. "위지영주가 보냈느냐?" 소서시는 차갑게 냉소했다. "그렇다. 배신자 땡초중." "모두…… 알았나보군." 소서시의 얼굴에 경멸의 조소가 떠올렸다. "이미 오래 전부터 영주님은 너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 단지 이곳에 잠입해 있는 천룡단의 끄나풀들을 파악하기 위해 모른척 하셨을 뿐이지." "그랬…… 던가?" "고승, 순순히 그 자리에 무릎을 꿇어라." 소서시의 야멸찬 어조에 고승은 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정도(正道)를 위해서인데 어찌 목숨을 두려워하겠는가? 아미타불……" 이어 그는 정말 고뇌에 찬 표정으로 소서시를 응시했다. "하나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닌 즉…… 그대를 제거한 후 이곳을 떠나리라." 그때였다. "떠나지 못한다! 고승." 돌연 한소리 무거운 음성과 더불어 한 인영이 법당 안으로 들어섰다. 마령군 위지풍, 바로 그가 나타난 것이었다. 고승의 눈에서 번뇌스런 눈빛이 파도처럼 쏟아져 나왔다. "영주……" 위지풍은 유현(幽玄)한 시선을 고승의 얼굴에 꽂으며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본좌를 실망시켰다, 고승." 고승은 씁쓰레한 고소를 떠올렸다. "미안하오, 영주. 그 동안 나 역시 영주를 진심으로 좋아했소. 하나…… 어쩔 수 없었소." "어찌됐든…… 천금마옥이 외부인의 음모에 의해 흔들리는 것을 용납치 않는 본좌로서는 그대에게도 예외를 둘 수 없다." "미안하오! 영주." 짤막한 말과 함께 고승의 신형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바로 그 순간 돌연 허공을 스치며 금빛 광채가 일었다. "우욱!" 고승은 묵직한 신음을 터뜨리며 급격히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음……?" 위지풍은 순간 법당의 천정을 힐끗 올려다 보았다. 다음 순간 그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보라! 대들보 위에 고양이 비슷한 황금빛 괴물 한 마리가 잔뜩 웅크린 채 나타나 있지 않은가? 고양이 비슷하게 생기긴 했으나 그것은 절대 고양이는 아니었다. 은빛 눈에 온몸에선 황금빛 비늘이 번뜩번뜩 빛나고 있었다. 뿐이랴? 꼬리는 세 개에 전신에는 온통 핏빛 실뱀이 휘감겨 있는 저 무서운 모습! 문득 위지풍의 입술 사이로 신음같은 음성이 띄엄띄엄 새어나왔다. "천…… 마…… 사…… 견…… 수!" 순간이다. "흐흐흐…… 맞았소. 천마사견수외다." 비할 데 없이 냉막한 음성과 함께 한 인영이 문가에 나타났다. 아니, 나타났다기보다 그는 원래부터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 던 사람같았다. 왜냐하면 그가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위지풍의 안색이 굳어졌다. "적한청……" 그렇다. 적한청의 모습을 한 백리강이었다. 그때 대들보에 있던 천마사견수가 백리강의 어깨 위로 가볍게 떨어져 내렸다. 이어 천마사견수는 혓바닥으로 백리강의 얼굴을 한차례 부드럽게 핥았다. 위지풍은 경악과 의혹이 어우러진 복잡한 눈길로 천마사견수와 백리강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대는……?" 백리강은 싱긋 웃었다. "아직도 나를 적한청으로 생각하시오?" 그것은 더 이상 적한청의 것이 아닌 백리강 본래의 음성이었다. 순간 위지풍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제보니 자네는……?" 백리강은 빙그레 미소를 떠올렸다. "당신은 나에게 말했었소. 언젠가 다시 한 번 나를 만나고 싶다고…… 나 또한 그런 때가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하오." 위지풍은 실같이 가느다란 미소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분명히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만나고 싶었소이다." 간단한 한 마디에 이어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다가서더니 서로 의 손을 덥썩 잡았다. "반갑네! 엽공자." "백리강이외다." 위지풍은 그 말에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알고 있네. 천마사견수의 주인이면 천존마제의 전인인 백리강 밖에 없다는 것을 말일세."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백리강의 손을 더욱 굳게 움켜쥐었다. 3 세 사람이 원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앉아 있었다. 백리강과 위지풍, 조사의였다. 숙연한 분위기가 열기처럼 흐르는 지금 백리강은 자신의 목적 등을 상세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윽고 백리강은 이야기를 끝맺고 조사의와 위지풍을 침중한 눈길로 응시했다. "이제…… 두 분의 결정만 남았소이다." 위지풍과 조사의는 무거운 표정으로 서로의 시선을 부딪쳤다. 백리강은 침중히 물었다. "두 분…… 도와주시겠습니까?" 순간 조사의의 시선이 느릿하게 백리강의 얼굴로 옮겨갔다. "노부는 이미 결정했네. 만약 자네를 나의 적이라고 생각했다면 아예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네." 말인 즉 백리강의 요청을 수락한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랴! "단 혈극천의 첩자들을 찾아내어 처단하겠다고 약속했던 일만큼 은 자네가 직접 처리해주기 바라네." 백리강은 빙그레 웃으며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이어 그는 위지풍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위지풍은 잔잔한 미소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천금마옥의 평화가 계속 유지될 수 있다면 기꺼이 자네를 돕겠네." 백리강은 밝게 웃으며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백리강, 두 분 선배님의 은혜는 반드시 잊지않을 것이오." 조사의는 문득 괴이한 표정으로 위지풍을 돌아 보았다. "이거…… 마교의 대지존에게서 이런 예우를 받아도 되는 건지 모르겠소이다." 순간, 백리강과 위지풍의 입에서 폭소가 터져나왔다. "으하하하……" "하하핫……" 그들의 웃음은 승부의 어떤 결정을 예고하는 소중한 의미의 웃음이었다. 4 사호(死湖). 물고기조차 살기를 거부하는 죽음의 호수. 그 검푸른 수면 위로 황혼빛이 점차 번져가고 있었다. 백리강은 뒷짐을 진 채 사호의 낙조를 담담히 응시하고 있었다. 하나 그의 뇌리 속은 이 순간 재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성혼의 보고가 생생히 떠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혈극천…… 놈들이 조영주의 세력 내에 잠입시킨 첩자는 모두 열 일곱 명이었습니다. 그 중 열 여섯은 이미 귀신도 모르게 처치했습니다. 하나 수혼마랑으로 변장한 놈의 무공은 보통이 아니어서 아직 손을 못대고 있습니다. 놈의 진정한 정체는 바로 혈극천의 천주 서문일백의 네 명 제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놈의 이름은 한도성(翰道星)! 아직 무공을 시험해 보지 못했습니다……! 석양빛이 더욱 짙어질 무렵 한 인영이 사호로 통하는 산로(山路)에 번뜩 나타났다. 파리하다 못해 창백한 안색을 지닌 청년이었다. 제법 준수한 용모를 지녔지만 기괴하게도 희뿌연 백색 광망을 두 눈에서 뿜어내는 그는 바로 수혼마랑이었다. 지금 그는 만자혈탈 조사의의 부름을 받고 사호로 가는 길이었다. 무슨 일인지 한 시진 전에 급작스런 연락을 받았던 것이다. 잠시 후 수혼마랑은 사호에 도착했다. "……?" 하나 어디에도 조사의의 모습은 없었다. 그는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가 문득 수혼마랑의 시선이 우뚝 멈추며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뜨여졌다. 하나의 바위에 핏빛 금강지(金剛指)의 글이 용틀임 하듯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혈극천 첩자 살(殺).> 바위 위엔 핏물이 뚝뚝 돋는 열 여섯 개의 수급이 올려져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수혼마랑의 입술 사이로 부지중 뼈골 저린 신음성이 새었다. 하나 다음 순간 그는 곧 담담한 예의 신색을 되찾으며 싸늘히 외쳤다. "숨어 있는 놈이 누구냐?" "청각이 꽤 예민한 놈이군." 삭막무비한 일성과 함께 바위 뒤에서 한 인영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인간이 얼마나 깡마를 수 있는지 그 한계를 보여주는 듯 강시같은 몰골의 인물이었다. 바로 성혼이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그는 수중에 자신의 애검(愛劍)인 혈훼를 들고 있었다. (고수다!) 수혼마랑은 대뜸 직감했다. 하나 그는 내색치 않으며 싸늘히 입을 열었다. "너는 누구냐?" 성혼의 깊숙이 꺼진 두 눈이 번뜩 소름끼치는 냉광을 뿜었다. "너를 제거하기 위해서 왔다. 한도성……" 순간 수혼마랑 아니, 한도성은 재차 흠칫 경악을 떠올렸다. (이미 나의 정체까지 발각나 버렸군!) 그때 성혼이 깡마른 얼굴에 삭막한 웃음을 피워 올렸다. "후후…… 한도성, 너의 수하들은 모두 제거되었다. 남은 것은 이제 너 혼자 뿐. 네놈은 내가 직접 해치운다." 불현듯 한도성의 두 눈이 희뿌연 백색 한광을 내뿜었다. "너는…… 천금마옥의 인물이 아니구나." "……" "천금마옥 내에서 너 정도의 무서운 기도를 풍기는 검(劍)의 고수는 없다." 성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나는 천금마옥과는 상관없다." "네놈의 정체는 뭐냐?" "나……?" 성혼이 이어 소름끼치도록 메마른 웃음을 떠올렸다. "나는 마교(魔敎)의 인물이다." 한도성은 부지중 뒤로 주춤 물러서고 말았다. "이곳에…… 마교까지……?" 성혼은 이내 웃음기를 싹 거두며 무심히 일성을 내뱉았다. "한도성, 이제 갈 때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천천히 걸음을 떼어 한도성에게 다가갔다. 한도성은 내심 등골 시린 전율을 금치 못했다. 성혼의 깡마른 전신에서 풍기는 기도는 가히 살인적이었다. (안되겠다. 내가 먼저 선기(先機)를 제압해야겠다!) 내심 결심을 굳힌 한도성은 온 공력을 발 끝에 모아 힘껏 땅을 박찼다. 빛살인들 이처럼 빠를까? 번뜩! 하는 순간 한도성의 신형은 이미 성혼의 눈 앞에 닥쳐와 있었다. (빠르다!) 성혼은 내심 은은한 감탄을 머금었다. 하나 성혼 그가 누구인가? 지상에서도 가장 빠른 사나이 지상제일쾌(地上第一快)가 아닌가? 일순 그의 한 손이 검집에 닿았다고 느낀 순간 섬광보다 더 찬란한 한 줄기 빛이 솟구쳤다. 그리고 그것은 나타났을 때보다 더욱 빠르게 사라졌다. "우욱!" 한 소리 신음과 함께 싯뻘건 피분수가 허공에 뿌려졌다. 한도성이 한쪽 어깨를 쥔 채 뒤로 비틀비틀 물러서고 있었다. 그의 왼쪽 어깻죽지는 이미 깨끗이 잘려나간 뒤였다. 반면 성혼은 어깨 부분의 옷이 한 치 가량 베어져 있을 뿐이었다. 한도성의 두 눈은 불신과 경악에 크게 휩뜨여 있었다. (나보다 한 수 위의 고수다!) 한도성의 눈빛은 급변에 급변을 거듭했다. 다음 찰나 그는 이를 악물었다. "차---- 앗!" 그는 재차 비쾌히 땅을 박차며 성혼을 덮쳐갔다. 자살을 하려는건가? 너무나도 무모한 동귀어진의 수법이었다. 한데 돌연 덮쳐가던 그의 신형이 허공에서 한 바퀴 빙글 회전했다. 그와 동시에 그는 방향을 틀어 갑자기 사호쪽으로 뛰어들고 있지 않은가? 힘의 한계를 느끼고 도주를 결심한 것이다. 하나 성혼은 움직이지 않았다. 단지 그의 입가로 비정한 미소가 스쳤을 뿐이었다. 한도성의 몸이 사호의 수면에 닿을 즈음 돌연 사호 속에서 하나의 거대한 물체가 솟구쳐 올랐다. 엄청나게 뚱뚱한 인물이었다. 그는 바로 지상에서 가장 비대한 자, 만노였다. 만노는 매우 게으르고 느린 인물이다. 하나 물(水)에서만은 다르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 그것도 물 속에서라면 그는 누구보다 빠르다. 수중제일쾌(水中第一快)! 그가 바로 만노가 아닌가? 이 순간 그의 살찐 한 손이 무섭도록 빠르게 한도성의 심장을 쑤셔갔다. "크흑……!" 참담한 신음성이 일며 한도성의 신형은 그대로 물 속으로 잠겨 버렸다. 사호의 검푸른 수면엔 금시 시뻘건 핏물이 번져 나갔다. 만노는 지그시 그 광경을 응시하다 문득 나직이 괴소했다. "흐흐…… 네놈이 물 속으로 들어온 것이 가장 치명적인 실수였다." 이어 그는 거북이같이 느릿한 동작으로 천천히 호숫가로 나왔다. 성혼이 그를 부드러운 시선으로 응시하며 물었다. "놈은 어찌 되었느냐?" "죽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만노는 오히려 되물으며 씨익 웃었다. 성혼 역시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마령칠십이참혼대는……?" "오늘 밤이면 충분히 도착할 것이네." 성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무심히 중얼거렸다. "이제…… 천금마옥에도 피의 혈풍(血風)이 무섭게 몰아치겠군." 5 으스름한 달빛에 천지가 온통 푸른 빛으로 채색된 야심한 시각. 불어오는 바람에는 터질 듯 영글어 있는 만추(滿秋)의 내음이 듬뿍 실려 있었다. 야트막한 야산(野山)이 구릉인 양 펼쳐진 한곳에 누군가 뒷짐을 진 채 야천(夜天)을 응시하며 우뚝 서 있었다. 달빛을 받아서일까? 그렇지 않아도 옥(玉)같은 피부가 더욱 하얗에 돋보이는 인물이었다. 바로 백리강이었다. "……" 밤바람 소슬한 이 가을밤, 그렇게 서 있었는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건만 그는 도무지 움직일 줄을 몰랐다. 이때, 스스…… 스으…… 유령(幽靈)의 움직임인가? 극히 미세한 음향과 함께 수십 줄기의 흐릿한 그림자(影)가 백리강의 뒷쪽에 나타났다. 한결같이 흰 천을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칭칭 휘감고 있는 그들 의 전신에선 실로 피를 말릴 듯한 죽음의 냄새가 물씬 풍겨나오고 있었다. 모골이 송연해지도록 짙게 풍기는 죽음의 냄새였다. 그들은 나타나자마자 백리강의 등을 향해 깊숙이 부복했다. "마령칠십이참혼대, 대지존을 배알하옵니다." 마령칠십이참혼대! 대지존 백리강 직하의 친위대이자 가장 무서운 죽음과 피의 집행자(執行者)들이 아니겠는가! 백리강은 야천에서 시선을 거두고 천천히 돌아섰다. 그는 맨 앞의 인물에게 깊숙한 시선을 던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느라고 수고 많았다, 염천백." 염천백! 백혈무영 염천백, 그는 마령칠십이참혼대의 수좌였다. 백리강의 말에 염천백은 머리를 땅에 대어 최고의 경의를 표시했다. "황송하옵니다, 대지존!" 백리강은 담담한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내가 왜 너희들을 불렀는지 이유를 아느냐?" 염천백은 그 자세 그대로 정중히 대답했다. "약간은 알고 있사옵니다." 백리강은 조용히 말했다. "오늘밤 음무극을 제거할 생각이다. 하나 그는 내가 직접 제거할 것이고 너희들이 해야할 일은 따로 있다." "하명하십시요!" 백리강은 조용히 이어 말했다. "무영살인대…… 모두 삼십 인으로 구성된 음무극의 직속 수하들이다." 염천백은 더 듣지 않아도 자신들의 할 일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문득 음산하고도 자신에 찬 음성을 발했다. "명령만 내리십시요. 한 시진 이내에 모두 씨를 말려 버리겠습니다." "음……" 백리강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염천백." "하명하십시요." "네가 죽여야할 고수는 따로 있다." "말씀하십시요." "요노(妖老)." 순간 염천백의 고개가 약간 땅에서 떨어졌다. "음무극의 모사 말씀이십니까?" "바로 그 자다." 땅바닥을 향해 있는 염천백의 눈빛이 스산하게 일렁였다. "놈은…… 내일 아침에 뜨는 태양을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자신에 찬 음성이었다. 백리강은 싱긋이 웃으면서 품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염천백의 머리 앞에 던졌다. "그 속에 무영살인대에 관한 전부와 요노가 머물고 있는 곳의 위치 등이 적혀 있다. 반드시 제거하라. 한놈도 놓치지 말고." "존명!" "가거라." 대세를 결판짓는 죽음의 선고는 이렇듯 간단하게 내려졌다. 6 장노방(張老方), 그는 천금마옥 내의 하급무사였다. 나이는 칠십 정도에 아무런 불만도 없이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노인이었다. 하나 그런 그에게도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곧 그가 무영살인대의 일인(一人)이라는 사실이었다. "오늘 따라 차맛이 쓰군." 장노방은 입맛을 씁쓸하게 다시며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 놓았다. 그 앞엔 상당한 미모의 서른살 가량 되보이는 미부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진교랑(陳嬌娘). -죽지도 않는 늙은이가 무슨 힘을 믿고 저렇게 아름답고 팽팽한 처녀를 처로 맞아 들였을까? 그런 비난과 질투를 받으며 십 년 전에 맞아들인 여인이 바로 진교랑이었다. 진교랑은 채 반도 마시지 않고 내려놓은 장노방의 찻잔을 응시한 뒤 상냥하게 입을 열었다. "다시 끓여 드릴까요?" 장노방은 주름진 얼굴 가득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채 물끄러미 진교랑을 응시했다. "그냥 두시오. 당신이 끓인 것인데 그냥 마셔야지……" "쓰시다면서요?" "됐소. 자고로 좋은 약일 수록 맛이 쓰다하지 않소?" 진교랑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나직이 웃었다. "호호호…… 그렇다고 쓴 걸 억지로 먹어요?" 입을 가리고 있는 저 손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장노방의 눈에 뜨거운 열기가 떠올랐다. "음……" 흘러 나오는 침음조차 어쩐지 끈적끈적한 열기를 담고 있었다. 진교랑은 어떤 낌새를 알아차린 듯 얼굴을 사르르 붉히며 요염한 미소를 떠올렸다. "어머, 또……?" 장노방은 천천히 두 팔을 벌렸다. "여보……" "아이…… 싫어……" 말이 그렇다 뿐이지 진교랑은 몸을 교태롭게 비틀며 은근히 장노방의 품 속으로 안겨왔다. "으음……" 장노방은 뜨거운 신음을 토하며 탄력넘치는 여체를 힘껏 끌어안았다. 이때였다. 돌연 어디선가 극히 음산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장노방…… 무영살인대 제육호(第六號)…… 너를 죽이러 왔다." "……!" 장노방은 대경하며 황급히 진교랑을 떼놓았다. 그 순간 폭음과 함께 종잇장처럼 우측 벽이 터지는가 싶더니 한 줄기 백영(白影)이 섬광처럼 장노방을 덮쳐왔다. "음?" 장노방은 경악했다. 하나 그는 진교랑을 밀쳐내며 몸을 옆으로 구르면서 어느새 신형을 날려 탁자 위에 놓인 자신의 검(劍)을 집어갔다. 무섭게 빠른 신법이었다. 한데 막 검자루에 손이 닿는 순간이었다. 파팟! 돌연 바닥이 갈라지며 또 하나의 백영이 땅 속에서 솟구쳤다. 그러자 장노방의 가슴이 베어지며 피가 튀었다. 딴에는 황급히 허리를 꺾었으나 검날이 스쳐간 것이었다. (윽!) 장노방의 신형이 가볍게 휘청거렸다. 그 순간 이번에는 천정이 터져나감과 동시에 백영 하나가 빛살같이 내리꽂히며 검날을 번뜩였다. 장노방은 대경실색하며 황급히 앞으로 신형을 날렸다. 하나 그는 보지 못했다. 최초로 벽을 뚫고 온 백영의 검이 그 순간 자신의 배를 찔러오고 있는 것을…… "컥!" 비명과 함께 복부에서 핏줄기가 뿜어 나가는 순간 이번에는 등 뒤가 화끈해지며 가슴 앞으로 검날이 쑥 빠져 나왔다. "윽!" 거의 같은 순간, 정수리 끝에서 또 한 자루의 검이 작렬했다. 슥! 이번에는 비명도 없었다. 그저 머리통 반쪽만 허공으로 튀어 올랐을 뿐이었다. 끝장이었다. 장노방은 호흡 한 번 제대로 가다듬어 보기도 전에 세상을 하직해 버린 것이었다. 삼인(三人), 온통 흰 천을 칭칭 휘감은 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진교랑에게 눈길을 던졌다. 진교랑은 하얗게 질린 채 한쪽 구석에서 바들바들 몸을 떨고 있었다. "제…… 제발…… 목숨만……" 이때 삼 인의 백포인 중 가운데 인물에게서 전율스럽도록 스산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진교랑…… 무영살인대 제이십육호(第二十六號)…… 마교대지존의 명으로 너를 처단한다." 진교랑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하나 다음 순간 그녀의 신형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녀는 그대로 천정을 뚫고 밖으로 나갔다. 아니 머리만 빠져나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창백한 백광(白光) 한 줄기가 진교랑의 목덜미를 간단없이 베어 버렸다. 툭…… 떼구르르…… 뎅강 잘려나간 머리통이 지붕 아래로 구르고 목없는 시신은 원래 서 있던 자리로 사정없이 곤두박질쳐 나뒹굴었다. 목둥지에서는 그제야 피보라가 자욱이 뿜어나왔다. 이때 지붕으로부터 극히 무심한 음성 한 줄기가 뚫어진 구멍을 통해 실내로 스며들었다. "이제 남은 놈은 여섯…… 가자." 순간 방 안에 있던 삼 인은 연기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있었던 한 토막의 살인극(殺人劇)이었다. 7 사면의 벽에 정확하게 일백 개의 밀납상이 세워져 있는 거대한 석실이었다. 음무극은 연신 희열에 찬 괴소를 흘리며 주위의 밀납상을 둘러보고 있었다. "흐흐흐…… 드디어 불사천령강시가 완성될 시간이 반시진 앞으로 다가왔다." 반 시진…… 몇년을 노력한 것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다. "흐흐흐…… 이것만 완성되면 천하패권을 움켜잡기란 문제도 아니다." 그는 생각만 해도 마냥 뿌듯했다. "먼저 조사의와 위지풍 두 놈을 제거하여 천금마옥을 장악한 뒤…… 지옥부와 혈극천, 마교 등을 모조리 쓸어버리는 것이다. 으하하하하……" 광소(狂笑)----! 원대한 야망을 실은 광소는 석실 안을 한동안 찌렁찌렁하게 뒤흔들었다. "이제…… 지난 몇 년 동안의 노력이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음무극은 기쁨에 겨운 나머지 연신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백인(百人)의 절정고수들에게 일천 가지의 약초와 독(毒)을 사용한 다음…… 밀납으로 오 년 동안 공기를 차단시키면 불사천령강시는 완성된다. 흐흐흐…… 이제 반 시진만 지나면 백 인의 귀여운 아이들이 밀납을 깨고 이 세상으로 나온다. 그렇게 되면 나 음무극은……" "어떻게 되느냐?" "어떻게 되긴…… 당장 이 세상의 주인이 되는……" 무심코 대답하던 음무극은 돌연 심장이 떨어져 나갈 듯 크게 놀랐다. "누구……" 말이 미처 끝나기 직전 석실 저쪽으로부터 머리통 하나가 음무극의 발 앞으로 공처럼 굴러왔다. 순간 음무극의 눈이 귀신이라도 본 듯 있는대로 부릅떠졌다. "요노(妖老)!" 오오…… 요노! 머리통의 주인은 바로 요노였다. 음무극은 번쩍 고개를 들어 머리통이 굴러왔던 쪽을 쳐다보았다. "누, 누구냐?" 묻는 순간 그의 시선 속으로는 이미 세 사람의 모습이 쏘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조사의, 위지풍, 또 한 명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는 백리강이었다. "……!" 음무극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 한 걸음 물러났다. "조사의…… 위지풍…… 너희들……" 백리강이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알아보지 못하겠소?" 순간, 음무극의 시선이 백리강의 전신을 빠르게 훑었다. "너는……?" "백리강!" "뭣이?" 음무극의 안색이 홱 돌변했다. 백리강! 마교대지존 백리강의 이름이 어찌 생소하랴? 음무극은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왈칵 치밀었다. "네…… 네가 어떻게 여기를……?" 백리강은 나직이 웃었다. "후후후…… 벌써 잊어먹지나 않았는지 모르겠구려. 적한청이라고……" 순간, 음무극의 눈이 놀람으로 커졌다. "그, 그럼?" "바로 나다." "……!" 음무극은 대경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누구보다도 철석같이 신임하던 적한청이 마교대지존 백리강이었다니! (이…… 이렇듯 황당한 일이……) 백리강은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음무극, 이제 너도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된 것이다. 네가 그토록 사랑하던 무영살인대의 뒤를 따라서 말이다." "……!" "그러고보니 이야기 순서가 바뀌었군. 너의 수하들이나 무영살인대 중 살아남은 자는 단 한 명도 없다고 먼저 말해주는 것을 깜박 잊고 있었어." "……!" 음무극의 몸이 한 차례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완전히 날벼락이라도 맞은 느낌이었다. 문득 음무극은 이빨을 으스러져라 악물었다. (반 시진…… 그래…… 반 시진만 버티자……!) 조사의가 불쑥 괴소를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후후후…… 혹시 시간이라도 끌어볼 생각이라면 일찌감치 포기해라. 음무극." 그는 등 뒤의 만자혈탈을 천천히 수중에 옮겨 잡았다. 백리강과 위지풍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한 뒤 세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조사의는 만자혈탈을 비껴들며 천천히 음무극을 향해 걸음을 떼놓았다. "후후후…… 옛날부터 나는 음무극 네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음무극은 부드득 이를 갈았다. "조사의…… 네놈이 결국……" 조사의는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핫……" 광소가 채 끝나기 전이었다. 파앗! 조사의의 신형이 음무극을 향해 번쩍 공간을 갈랐다. 갈랐다고 느꼈을 뿐인데도 그의 만자혈탈은 어느새 음무극의 머리를 내려찍고 있었다. (억!) 이렇게 빠를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음무극은 다급성을 삼키며 퉁기듯 물러났다. 만자혈탈은 아슬아슬하게 음무극의 어깨를 찢고 지났다. 자신의 어깨에서 튀어 오르는 몇방울의 피를 보는 순간 음무극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놈……!" 그는 재차 날아오는 만자혈탈을 피함과 동시에 옆구리에 차고있던 교사독도를 뽑아 미친 듯이 번뜩였다. 슈슈슛! 스치면 즉사요 일단 몸에 박혔다 하면 몸 속에 있는 것은 모조리 뽑아낸다는 죽음의 칼(刀), 교사독도! 그것은 마치 살아 움직이듯 허공을 난자하기 시작했다. 한 순간 두 괴병(怪兵)이 부딪치면서 새파란 불꽃을 허공에 흩뿌렸다. "후후…… 제법이다. 음무극……" 조사의는 환영처럼 신법을 구사하며 음무극의 전신 구석구석을 태풍처럼 휩쓸어갔다. "개소리치지 마라, 조사의!" 음무극은 뒤질세라 폭갈을 터뜨리며 교사독도를 기이무쌍하게 휘 둘러댔다. 싸움이 시작 되었는가 싶었더니 그들은 어느새 사십여 초의 공세를 주고받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쉽게 승패를 가리기 힘든 막상막하의 형세같았다. 하나 백리강은 초수가 거듭될 수록 음무극은 공격보다 방어하는 횟수가 늘어감을 볼 수 있었다. (저 상태라면 조사의에게 승산이 있다. 하나 시간이 문제다!) 그는 문득 밀납상들을 쭈욱 살펴보았다. 아직까지 이상이 있는 밀납상은 눈에 띄지 않았다. (으음……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좋지않다. 저러다가도 어쩌면 반 시진 이내에 어떤 변화가 발생할지도 모르니까……) 백리강은 위지풍을 응시하며 가벼운 눈짓을 보냈다. 위지풍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두 사람이 싸우고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음무극은 경황중에도 그것을 발견하고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크, 큰일이다! 만일 저놈까지 가세한다면……) 더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고스란히 끝장나는 것이었다. 한데 잠시 생각이 분산되는 그 순간 음무극의 몸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헛점이 드러나고 말았다. 그것이 비록 지극히 짧은 순간이었다고는 하나 그냥 넘어갈 조사의는 절대 아니었다. 파팟! 소리와 더불어 살점 한 덩이가 음무극의 옆구리에서 뭉텅 끊어져 나갔다. "으윽!" 음무극의 신형이 한차례 크게 휘청였다. 그것은 절호의 기회였다! 별안간 백리강의 신형이 광섬(光閃)처럼 음무극을 향해 쏘아져 날았다. 그 속도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동시에 그의 손에서 눈부신 백광(白光)이 부챗살처럼 뻗쳐나갔다. 이른바 대비단혼수(大悲斷魂手)! 순간, "헉!" 음무극은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본능적으로 교사독도를 휘둘러댔다. 하나 대비단혼수가 무엇인가? 천하에 못 자를 것이 없다는 최강의 파옥신공(破玉神功)이 아니겠는가? 카캉! 뼈저리는 금속성과 함께 교사독도는 여지없이 다섯 조각으로 부러져 허공에 튀어 올랐다. "끝내자, 음무극!" 짤막한 외침과 더불어 백리강의 손이 재차 허공중에서 번뜩였다. 정확하게 다섯 줄기의 광채는 눈을 찢어져라 부릅뜨고 있는 음무극의 전신을 사정없이 파고 들었다. 파파파팍! "윽!" 일시 음무극의 몸이 급살맞은 사람처럼 부르르 떨렸다. 다음 순간 다섯 줄기의 싯뻘건 핏둥지가 살갗을 헤집으며 몸 밖 으로 맹렬히 뿜어나갔다. 음무극은 연거푸 몇걸음을 물러선 다음에야 가까스로 신형을 가다듬었다. 그때였다. 백리강의 음성이 음무극의 바로 코 앞에서 잔잔히 흘러나왔다. "이제 너의 야망은 끝난 것이다, 음무극." 음무극은 흙빛이 된 얼굴을 힘겹게 치켜들었다. "네놈이 아무리…… 그래도…… 곧 있으면…… 불사천령강시는…… 움직인다…… 그렇게 되면…… 천금마옥은 끝이다…… 아무도 불사천령강시…… 막지 못한다……" 백리강은 묵묵히 듣고 있더니 문득 품에서 푸른 빛이 감도는 옥패(玉牌) 하나를 꺼냈다. 그는 싱긋이 웃으며 옥패를 들어 보였다. "이게 무엇인지 아느냐?" 순간, 촛점을 잃고 흐릿해지던 음무극의 눈에 번쩍 기광(奇光)이 솟구쳤다. "탐보의?" "그렇다. 바로 탐보의다." "……!" "과거…… 너는 이 탐보의를 갖다주면 네 세력 전부를 내게 넘겨준다고 말했었다." 그렇다. 음무극은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백리강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이어 말했다. "나는 마교에서 이 탐보의를 얻은 이후…… 세밀히 이것을 조사해 보았다. 결국 나는 이 탐보의의 뒤에 박힌 천령주(天靈主)가 너 의 불사천령강시와 상극(相剋)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 "간단히 말해서…… 이 탐보의만 있으면 네 대법(大法)이 아니라도 나 역시 불사천령강시를 움직일 수 있다는 말이지." 음무극의 하반신이 힘없이 흔들리는가 싶었더니, "죽…… 일…… 놈……" 그 한 마디를 끝으로 그의 몸은 허물어지듯 바닥에 나뒹굴었다. 쿵! 그것은 천금마옥의 일각을 호령하던 거물(巨物), 교사독도 음무극이 생의 종지부를 찍는 소리였다. "결국…… 죽었어." 탄식처럼 흘러나온 위지풍의 말이었다. 조사의는 냉소했다. "당연한 결과지." 위지풍은 백리강의 얼굴을 힐끗 돌아보았다. "이제 앞으로의 계획은……?" 백리강은 담담한 미소를 떠올렸다. "지옥부의 궤멸이오." "음?" 백리강은 씩 웃으며 설명을 이었다. "음무극은 죽지 않았소이다. 그는 이 길로 지옥부로 가서 지옥부와 굳게 손을 잡게될 것이오. 따라서 지옥부는 소리없이 무너지게 되는 것이지요." 위지풍과 조사의는 일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하나 그들은 이내 백리강의 말뜻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럼…… 자네와 음무극과의 바꿔치기?" 위지풍의 물음에 백리강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적한청도 되었는데 음무극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겠소이까?" 순간 위지풍과 조사의는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와핫핫핫…… 그거 명안(名案)이다! 와하하하…"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즐독 ㄳ
잼 납니다
재미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