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6 장 血劫終熄 1 황혼(黃昏). 붉은 석양의 잔재가 마치 쇠락한 왕조의 운명처럼 스러져 가고 있었다. 오늘 따라 유난히 일륜의 침몰은 붉고 장엄했다. 그 시각 서문빙천은 사천공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횡산 유운봉(流雲峯)의 정상에 우뚝 서 있었다. "……" "……" 그들 두 사람은 서천(西天)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오랫 동안 말이 없었다. 문득 서문빙천의 입술이 떼어졌다. "사천공!" 사천공의 시선이 느릿하게 서문빙천을 향했다. "말씀하십시오." 서문빙천은 여전히 전방을 응시하며 무겁게 말했다. "모든 것…… 다 잘 될 것이오." 사천공의 눈빛은 여전히 무심했다. "물론입니다." 그의 마음은 이제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이미 오늘 오전 그는 서문빙천의 명을 받들어 혈극천의 모든 고수들에게 총공격의 명령을 내렸다. 결정을 내리기 전이라면 몰라도 일단 결정이 떨어지면 사천공은 더 이상 뒤를 보지 않는다. 뒤를 돌아본다는 건 꺼림직한 마음이 있음이고, 그것은 곧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불신만 줄 뿐이다. 이제 그에게 주어진 건 이 싸움을 어떻게 승리로 이끄냐는 것 뿐이었다. 2 수백의 인마(人馬)가 황혼 속으로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었다. 맨 앞을 달려가는 인물은 다름아닌 서문일백이었다. 지금 서문일백의 표정은 무겁게 굳어져 있었다. (빙천, 무사해다오. 부디……) 그의 심정은 초조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의 예감이 기우로 끝나기를 바란다만…… 겁효(劫爻)의 패로 보아 그럴 가능성은 없다!) 그렇다. 그래서 그는 이렇듯 혈극천을 떠나왔으며…… 그래서 그는 이렇듯 바람처럼 달려가는 것이었다. 그의 뒤를 쫓는 고수의 숫자는 모두 사백 명. 혈극천위대(血極天偉隊)와 더불어 서문일백이 친히 양성시킨 혈극천 최강 고수들인 빙혈사랑대(氷血邪狼隊)가 합쳐진 숫자였다. 비록 숫자는 사백 명이지만 그들 하나 하나가 일당천의 고수들이기에 그들의 힘은 혈극천 전체의 삼할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두두두두두…… 서문일백은 가끔씩 하늘을 쳐다보며 계속 질주에 질주를 거듭했다. 한데 평원을 지나 막 어느 계곡으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문득 서문일백의 눈에 기광이 스쳐 지나갔다. 멀리 세 인영이 우뚝 서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 점차 거리가 좁혀지면서 그들의 모습이 뚜렷이 보였다. 서문일백은 그들의 범상치 않은 기도에 심상치 않은 예감을 느끼곤 빙혈사랑대를 멈추게 했다. 그리곤 냉오한 시선으로 그들 삼 인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너희들은……?" 그러자 세 사람은 차례로 입을 열었다. "노부는 무곡성군 화진성이라 하오." "흐흐…… 이 거지는 괴신걸, 이름은 도무방이라고 하지." "아미타불…… 빈승은 불광이오." 그렇다. 막아선 세 사람은 다름 아닌 우내오천 중의 삼인(三人)이었다. 하나 서문일백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냉담하게 물었다. "본좌를 막겠다는 뜻이냐?" "그렇소." 화진성의 대답에 이어 도무방이 말을 받았다. "흐흐…… 그대는 절대 횡산으로 가지 못한다." 불광신승이 장중한 불호와 더불어 한 마디 덧붙였다. "아미타불…… 천하의 평화를 위해 그대는 하루 동안만 이곳에서 머물러 주셔야하오." 의도는 분명했다. 생명을 걸고 막아서겠다는 뜻이었다. 서문일백의 얼굴에 비웃음이 서렸다. "본좌가 누구인지 아느냐?" 무곡성군 화진성이 안색을 굳히고 무겁게 말했다. "어찌 모르겠소? 혈극천의 대종사 서문일백을……" 서문일백의 비웃음이 짙어졌다. "본좌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다분히 비꼬는 어투였지만 이어지는 화진성의 음성에도 굽힐 수 없는 굳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승부가 끝나기 전에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소.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이곳에 뼈를 묻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오."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화진성은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어 허공에 휘저었다. 순간 한눈에도 일천 명은 됨직한 인영들이 계곡의 사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서문일백의 눈썹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설마하니…… 이렇듯 많을 줄이야……) 그는 힐끗 하늘을 쳐다보았다. 태양은 이제 거의 서천 하늘 아래로 스러져 가고있었다. (시간이 없다!) 서문일백은 입안이 바싹 타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이때 불광신승의 묵직한 음성이 서문일백의 조바심을 더욱 북돋았다. "서문시주, 내일 아침 저 태양이 다시 뜰 때까지만 그렇게 있어 주시오." "……!" "굳이 가시고자 한다면 우리 일천 명의 시신을 밟아야만 될 것이외다. 아미타불……" 이미 죽음을 각오한 이 노승의 눈에는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혜광(慧光)이 잔잔히 일렁이고 있었다. 서문일백의 두 눈 깊숙한 곳에 화르르 살광(殺光)이 피어올랐다. 그는 고개를 약간 치켜들며 싸늘하게 말했다. "일천 명이라 했던가? 좋아, 모조리 죽인 다음 지나가겠다!" "아미타불……" 불광신승은 그런 말이 나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묵직한 불호와 함께 천천히 한 걸음 물러났다. 서문일백은 꼿꼿한 자세 그대로 냉혹한 음성을 토해냈다. "빙혈사랑대!" "하명하십시오!" "모두 죽여라!" "존명!" 대답에 이어 사백여 기마대들이 노도처럼 앞으로 밀려 나갔다. 때를 같이해서 불광신승 등 삼인(三人)의 신형이 일제히 지면을 박차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거의 같은 순간 태산이라도 허물어뜨릴 듯 우렁찬 함성과 함께 일천 명의 인영들이 일제히 신형을 날리는 모습이 보였다. 여기, 또 하나 격전의 막이 올라가고 있었다. 3 이미 서쪽의 능선엔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대신 하늘엔 둥근 만월이 떠올라 있었다. 한데 그 고적한 달빛 아래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 전개되고 있었다. 무림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공전(空前)의 대혈전(大血戰)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피가 튀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땅덩이 또한 온통 핏빛으로 채색되고 있었다. 사천공이 계획한 전법은 실로 가공할 것이었으나 마교와 천룡단의 저항 역시 절대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으아악----!" "아---- 악!" 누구를 위한 죽음인가? 무엇을 위한 싸움인가? 살륙(殺戮), 그 끝은 어디에 있는가? 하늘 높이 치솟는 흙 먼지는 이미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달빛을 어둡게 하는 강렬한 도기(刀氣)와 검광(劍光)은 쉴 새 없이 천공을 난도질했다. "크아아아악!" "으아악!" 불협화음으로 이어지는 비명은 끝이 없다. 격전 네 시진째, 시체는 이미 산(山)을 이루고 있었고 피(血)는 벌써부터 강(江)이 되어 흘렀다. 아아! 죽이고 죽는 이 싸움은 도대체 그 끝이 있기나 한 것일까? 하늘(天)과 땅(地)도 이미 숨죽인 지 오래였다. ……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욱 치열하게 싸우는 두 사람이 있었다. 얼마나 치열하게 싸우는가는 그들이 싸우고 있는 곳이 방원 십여 장 정도의 공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누구도 근처로 접근하지 못했다. 쉴 새 없이 작렬하는 경력의 격돌, 거기에서 회오리쳐 나오는 여파에 휩쓸려 죽거나 천지를 뒤덮을 듯한 검기(劍氣)의 폭풍에 갈가리 찢겨 죽는 애꿎은 목숨만도 부지기수였다. 두 사람은 다름아닌 주여설과 서문빙천이었다. 그들과 약간 떨어진 곳에는 사천공과 천수마선 목인청이 막상막하의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으나 결코 주여설과 서문빙천의 싸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주여설, 시간을 끌 수록 그녀는 자신이 조금씩 밀리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서문빙천의 몸에서 쏟아져 나오는 무공은 너무도 패도적인 극사마공(極邪魔功)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주여설이 장시간 감당하기에 너무나 벅찬 것이었다. 이미 주여설의 전신은 땀으로 후줄근하게 젖어 있었다. 반면 서문빙천은 숨돌릴 틈도 없이 거세게 몰아 붙이면서도 상당히 여유있는 모습이었다. 서문빙천은 자신했다. 자신 스스로도 물론이거니와 시간이 흐를 수록 주위의 상황이 혈극천 쪽으로 우세가 기울기 시작한다고 파악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 싸움을 시작한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자부했다. "후후후…… 주여설, 아직도 늦지 않았다. 어서 무릎을 꿇어라!" 서문빙천은 사악한 웃음을 흘리며 연신 맹공을 퍼부었다. 살짝 스치기만 해도 어딘가 통째 날아갈 듯한 강기를 발산해 쉴 새 없이 주여설을 압박했다. (이 상태로는 백초 이상 버티기도 어렵다!) 주여설은 조금씩 당황하고 있었다. 이미 심신이 극도로 지쳐있는 그녀였다. 지금 그녀는 거의 본능적으로 몸만 움직일 뿐 맞공세는 펼쳐낼 엄두도 못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승부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의 성격이었다.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포기하지 않는 그녀의 자존심이었다. 주여설은 알고있다. 만약 자신이 서문빙천에게 죽는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를…… 모든 이들이 전의를 상실할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그들은 연쇄적으로 무너질 것이다. 하나 그걸 알면서도 그녀는 점점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아…… 이제는 더 이상……) 주여설은 언뜻 죽음이란 것을 뇌리에 떠올렸다. 한데 그녀가 죽음을 떠올리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저, 저기를 봐라!"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하나 서문빙천은 여유있게 외침이 가리키는 방향을 돌아보고 있었다. 다음 순간 서문빙천의 눈이 흠칫 부릅떠졌다. 주여설도 본능적으로 그쪽을 바라보았다. 순간 주여설 역시 안색이 변했다. 보라! 능선을 따라 거대한 일진광풍이 밀려오고 있었다. 하나 그것은 바람이 아니다. 마치 폭풍같은 기세로 질주해오는 일단의 무리들이었다. 한데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가히 모든걸 휩쓸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 순간 일진광풍 속에서 엄청난 음파가 터져나왔다. "우아아아아아아----!" 순간 주위에 있던 혈극천의 고수들 백여 명이 칠공에서 피를 뿜으며 날아가 곤두박질쳤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광경이었다. "마…… 마곡신후!" 마곡신후! 그건 바로 천존마제의 음공이 아닌가? 이 세상에서 그 무공을 아는 사람은 단 한 명 뿐이다. (그…… 그 분이다!) 주여설은 갑자기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꼈다. 왠지 두 눈으로 눈물이 고였다. 천수마선 목인청의 입 밖으로 날벼락같은 앙천광소가 터져나왔다. "와하하핫…… 모두 힘을 내라! 대지존께서 오셨다!" "와---- 아!" 천지를 뒤흔드는 함성이 횡산을 뿌리째 뒤흔들며 물결쳤다. -대지존께서 오셨다. 그 한 마디가 던진 파장은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이…… 이렇게 빨리 밀어닥치다니……) 서문빙천은 아득한 현기증을 느꼈다. 그런 느낌은 사천공도 마찬가지였다. (기…… 기어코 불안해하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구나!) 먼지가 사라지면서 백리강과 불사천령강시의 모습이 완연하게 드러났다. 서문빙천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럴 수가……) 그는 지금까지 쌓아올린 탑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싸움은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4 "으---- 아---- 악!" 생(生)의 종말을 알리는 듯 처절무비한 비명성이 솟구쳤다. 불광신승이 가슴을 움켜쥔 채 비틀거리며 물러서고 있었다. 아! 구멍뚫린 그의 심장에선 지금 콸콸 뜨거운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으……" 그는 경악과 공포 등이 뒤섞인 눈빛으로 전면을 응시했다. 그의 앞에 서문일백이 찬바람이 풀풀 날릴 듯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한데, 오오…… 보라! 주위엔 이미 혈해(血海) 속에 괴신걸 도무방과 무곡성군 화진성의 시신이 나뒹굴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럴 수가 없었다. 정도 무림사상 최강기인 중 하나로 손꼽히던 우내오천, 그 중 삼 인의 합공도 서문일백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상대가 되기는 커녕 그의 옷자락도 건들이지 못했다. 서문일백의 무공은 과연 어느 정도란 말인가? 이때 불광신승은 가물거리는 의식의 끈을 피나게 움켜 잡으며 이를 악물고 있었다. (으…… 악마의 무공…… 이것이 어찌…… 더운 심장을 가진 인간의 무공이란 말이냐?) 그의 입으로 핏덩이가 토해졌다. (좀더…… 조금 더 시간을 벌어야 하거늘……) 그때 서문일백의 냉혹무비한 일성이 고막을 강타했다. "불광, 이제는 영원히 가거라." 불광신승의 핏기없는 노안에 희미한 자비의 웃음이 떠올랐다. "노…… 노납…… 이제는 여한이 없다. 그대를 술시까지 막았으니…… 우리…… 임무는…… 달성되었…… 다……" 울컥! 그는 다시 토막난 내장이 섞인 검붉은 피를 토했다. 그리고는 더욱 창백해진 신색으로 입을 열었다. "허…… 하나…… 그대 역시…… 파멸하고 말…… 것이다. 마교 대지존과…… 마교의 전 힘이…… 이미…… 서문빙천…… 그대 아들을…… 공격하고 있을 것……" "……!" "아미타불…… 내일 아침 해가 뜨기 전에…… 그대 역시 쓰러질 것이다……" 순간, "닥쳐라!" 쑤---- 앙! 벼락같은 노갈과 함께 서문일백의 쌍장이 무자비하게 휘둘러졌다. 꽝----! "아---- 악!" 불광신승은 그 일장에 전신이 완전 박살난 채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진정 잔혹무비한 손속이 아닐 수 없었다. 이때 서문일백은 다급히 천공을 응시했다. "……!" 만월이 이미 천공의 중심에 떠 있었다. 서문일백은 얼음같은 얼굴을 창백히 굳혔다. 이어 두 눈빛을 무섭게 이글거리며 입술을 피가 나도록 물었다. "가자! 전속력으로 횡산을 향한다." 휙----! 말(言)보다도 발(足)이 앞섰다. 하나 빛살같은 신법보다도 그의 마음(心)은 훨씬 더 앞지르고 있었다. (빙천…… 이 아비가 갈 때까지만 버티거라. 부디……!) 서문일백, 이 비정냉혹한 인간에게도 부정(父情)이 있었던가? 5 "……!" 서문빙천은 넋을 잃고 말았다. 짙은 피비린내가 바람에 실려와 코 끝을 아리게 했다. 주위는 온통 시체 뿐이었다. 한데 대부분이 혈극천의 제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불사천령강시들에 의해 완전 포위되어 있었다. 아무리 둘러보고 또 보아도 모두가 그의 적(敵)들 뿐이었다. 그의 편이라고는 오직 한 명, 그 곁에 선 사천공 뿐인 것이다. 그야말로 사면초가(四面楚歌)였다. (다…… 당했다! 완전히……) 서문빙천은 내심 절망의 외침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의 시선이 불사천령강시들을 훑었다. (악마같은 놈들……) 서문빙천은 전율했다. 실상 백리강이 나타났을 때 그는 암담했지만 그가 데리고 온 자들이 겨우 백여 명 정도라는 데 그는 희망을 가졌다. 백 명 정도로 대세에 영향을 끼칠 순 없으리라 생각한 것이었다. 하나 불사천령강시가 일단 움직였을 때 서문빙천은 자신의 생각이 엄청난 착각임을 깨달았다. 불사천령강시, 놈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들에 의해 혈극천의 고수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그 막강하던 혈극천위대(血極天偉隊)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창칼이 들어가지 않는 상대와 싸운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것이었다. 결국 놈들에 의해 혈극천이 무너졌고 전의를 상실한 제자들은 마교와 천룡단의 고수들에게 무참히 도륙을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 자신과 사천공 두 사람만 남은 것이다. …… 불사천령강시 사이로 한 명이 걸어나왔다. 바로 백리강이었다. 그는 느릿한 걸음으로 서문빙천의 앞에 섰다. "이제 혈극천은 마지막이다. 서문빙천, 모든 것이 끝난 것이다." 서문빙천은 냉소했다. "놈…… 장담하지 마라. 난 아직 쓰러지지 않았어." "그건 이제 시간 문제일 뿐이야. 지금의 상황을 뒤집을 수 있다고 망상을 하진 않겠지?" 서문빙천이 입술을 깨물었다. "설사…… 그렇다 한들…… 내겐 아버님이 계시다……" 백리강의 입가에 한가닥 신비한 미소가 베물렸다. "후후후…… 서문빙천, 너는 알아야 한다. 너의 부친이 살아 있다 해도 그 혼자만으로 혈극천 전체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을." "……!" "이미 혈극천은 이 횡산의 혈투에서 대부분의 힘을 잃었다." "으……" 서문빙천은 두 눈에 분노의 전율을 떠올렸다. 그런 그를 백리강은 신광어린 눈빛으로 지그시 응시했다. "이제 곧…… 너의 부친이 올 것이다." "……!" "하나…… 이미 때는 늦었다. 아침 해가 뜨기 전에 혈극천은 영원한 종말을 고하게 된다. 서문빙천…… 너도……!" 서문빙천은 나직하게 쿡쿡 웃었다. 약간 그늘진 그의 눈빛이 하얗게 이글거렸다. "결코…… 그렇게는 되진 않을 것이다!" 그는 품 속에서 한 자루 기형도(奇形刀)를 꺼내 들었다. 백설같이 흰 도신(刀身)의 반월형 도였다. "빙극천도(氷極天刀)로군." 백리강이 그 기형도를 알아보고 냉소했다. 문득 백리강은 시선을 사천공에게로 돌렸다. "사천공……" "……!" "너는 내가 누군지 알겠지?" 사천공은 침중히 굳은 얼굴을 끄덕였다. "알고 있다. 백리강……" 백리강의 눈빛이 불같은 냉전을 뿜었다. "백리가를 멸망시키고 나의 부친을 살해한 너…… 언제고 네놈을 죽이리라 결심했지……" "……" "너도 함께 덤벼라! 한꺼번에 두 개의 목적을 달성하리라!" 사천공이 허허롭게 웃었다. "단 한 번의 실수가 이런 결과를 초래할 줄은 생각못했어…… 모든 건 나의 불찰…… 그때 패를 다시 짚어 너의 죽음을 확인했어야 하는 것을……" "과거는 다신 오지 않아…… 후회해도 소용없어." 사천공이 음산하게 웃었다. "아직도 늦진 않았어. 비록 모든 것을 잃었지만 죽더라도 네놈만 은 데리고 간다." 다음 순간 사천공의 몸에서 괴음이 발생했다. 아! 그의 머리 위, 백회혈에서 한 자루 기검이 백무와 함께 솟아나오고 있지 않은가? 바로 풍화검(風火劍) 그것이었다. "……!" 그 가공할 광경에 장내의 고수들은 일제히 대경의 빛을 떠올리고 있었다. 백리강이 천천히 묵류혼을 검집채 치켜 들었다. "덤벼라!" 나직하고 힘찬 외침이 그의 입을 떠났다. 서문빙천과 사천공의 시선이 한 차례 마주쳤다. 이내 그들은 수중의 병기를 곧추잡은 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살기(殺氣), 긴장된 살기가 터질 듯 팽배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인가? "죽어랏!" "가라----!" 살기띤 폭갈과 함께 서문빙천과 사천공의 신형이 일시에 허공으로 솟구쳤다. 동시에, 쐐---- 액! 번---- 쩍! 황혼빛마저 삼켜버린 눈부신 도광과 검광이 사위를 뒤덮었다. 대해(大海)를 일거에 가를 듯 통천가공의 위력이었다. "……!" 중인들의 안색이 대변했다. 목인청마저 은은히 눈빛을 굳히고 있었다. (대단하다!) 그러했다. 천하에 그들 두 명의 적수는 찾아볼 수 없을 듯했다. 백리강은 냉소하며 은형백변환(隱形百變幻)의 신법을 전개했다. 스스스……! 백리강의 신형은 가볍게 미끄러져 전권 밖으로 비쾌히 빠져 나갔다. 귀신도 이렇게 빠를 순 없었다. 서문빙천과 사천공의 합공은 번갯불처럼 빨랐으나 백리강의 신법은 그보다 훨씬 빨랐다. (……!) 하나 사천공과 서문빙천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공격권을 벗어난 백리강을 쫓아 빠르게 움직였다. 번---- 쩍! 빙극천도와 풍화검은 무서운 기세로 백리강의 전신을 쪼개갔다. 도광과 검광이 죽음의 천라지망을 펼쳤다. 하나 백리강은 이번에도 은형백변환을 펼쳐 그들의 공격을 피해내고 있었다. 이번엔 사천공과 서문빙천도 마음이 흔들렸다. 백리강의 신법이 너무나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 그들은 그래도 공격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그들은 미친 듯이 소나기같은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하나 결과는 매번 마찬가지였다. 백리강은 흡사 그들을 조롱이라도 하듯 여유있게 피하고 있었다. 서문빙천은 두려움이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이…… 이놈은 사람도 아니다. 인간의 상식을 완전히 초월한 능력을 지녔어.) 그런 감정은 사천공 역시 똑같았다. (과거 천존마제도 이놈에 비하면 상대조차 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이렇듯 절망어린 신음성을 품고 있을 때였다. 번뜩! 백리강의 두 눈빛이 불현듯 기광을 발했다. 아! 보인 것이다. 횡산 계곡 너머 수백의 인영들이 빛살같이 쏘아오고 있는 광경이…… (왔구나. 서문일백……) 내심 일성을 터뜨린 백리강은 그 쪽을 향해 명했다. "모두 길을 열어라." 그러자 불사천령강시를 비롯한 마교쪽의 인물들이 계곡 입구의 길을 터주었다. 서문일백과 그 휘하 사백 명의 빙혈사랑대들이 그 길을 통해 장내에 도착했다. 휙! 휘---- 휙! 서문일백은 장내에 도착하자 마자 천천히 훑어보았다. 사방에서 혈극천의 무리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서문일백은 싸움의 결과를 충분히 짐작했다. 하나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아들과 사천공이 무사한 것만으로도 그는 위안이 된 것이다. 이미 겁효의 패를 통해 결과를 짐작한 그가 아니던가? 서문일백의 시선이 처음으로 아들에게 향했다. 서문빙천은 참담한 표정으로 침묵했다. 하나 서문일백은 담담히 웃었다. "괜찮다…… 빙천…… 미래는 얼마든지 있어." 그 말을 들으며 서문빙천은 뭉클하는 감동을 느꼈다. "아버님……!" 그때 백리강의 앙천광소가 그들의 대화를 중단시켰다. "으하하하하……!" 서문일백과 서문빙천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서문일백, 네 아들이 살아있는 게 기쁘냐?" "……" "하나 넌 알아야 해. 내가 일부러 네 아들의 생명을 끊지 않았음을! 난 바로 네가 이곳에 오길 기다린 것이다!" "……!" "너는 과거 나의 부친을 무참히 살해했다. 이제 너는 네 눈 앞에서 너의 아들이 죽는 장면을 지켜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네가 갚아야할 응보(應報)다!" 백리강의 음성은 아예 분노를 초월한 무섭도록 담담한 것이었다. 하나 그것이 더욱 전율스러운 공포를 자아냈다. 서문일백은 유리알 같은 두 눈에 넘칠 듯 살광(殺光)을 떠올렸다. "그것이 네 뜻대로 될 것 같으냐?" "그렇다! 이 세상의 모든 건 이제 내 의지에 의해 좌지우지될 것이다!" 백리강이 외쳤다. "불사천령강시들이여! 서문일백과 그 수하들을 모조리 죽여라!" 핏빛 천을 두른 불사천령강시들이 서문일백 등을 덮쳤다. 그 악마같은 모습에 서문일백은 불현듯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하나 그에겐 아들을 구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비켜라!" 그는 자신을 덮쳐오는 불사천령강시를 향해 일장을 후려쳤다. 꽝----! 불사천령강시는 가슴을 정통으로 얻어맞고 뒤로 열 보나 물러섰다. 하나 불사천령강시, 그것은 불사지체(不死之體)의 괴물이 아닌가? 크크크……! 그것은 전혀 충격을 받지 않은 듯 무서운 기세로 다시 서문일백에게 덮쳐 들었다. 서문일백의 안색은 급변을 보였다. (이…… 이것들이 인간인가?) 그가 어찌 불사천령강시의 무서움을 알겠는가? 그때였다. "끄---- 악!" "카---- 흑!" 사방에서 처참무쌍한 비명성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빙혈사랑대, 서문일백이 천하무적으로 여겼던 그들이 이 순간 맥없이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아예 불사천령강시들의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이…… 이럴 수가……) 한데 바로 그때였다. 또 다시 백리강의 일성이 서문일백의 정신을 퍼뜩 차리게 했다. "서문일백! 보아라----!" 다음 순간, "향기는 바람을 타고 찾아오며 검의 비(雨)는 천하를 뒤덮는다. 표(飄)---- 향(香)---- 검(劍)---- 우(雨)----!" 낭랑한 외침과 함께 백리강의 신형이 신쾌히 지면을 박차고 솟았다. 찰나 서문일백은 두 눈을 찢어져라 부릅뜨고 말았다. 아아! 인세(人世)에 이토록 통천가공할 검학(劍學)이 있던가? 검화(劍花)! 하늘(天)에 온통 현란한 검광의 꽃이 피어났다. 그리고 그것은 이내 검광의 폭우가 되어 무섭게 쏟아져 내렸다. 순간, "크---- 아---- 악!" 사천공의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단말마가 처절하게 터졌다. 마검살인십삼예(魔劍殺人十三藝)! 천지조화의 위력이 깃든 죽음의 십삼변식 중 제 육변식이 다 전개되기도 전에 사천공은 풍화검과 함께 두 동강이 난 채 즉사하고 말았다. "헉……!" 그 짧은 순간 서문빙천은 엄청난 두려움에 주춤 뒤로 물러섰다. 동시에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사력을 다해 도망치려 했다. 하나 백리강의 표향검우는 이미 십변식(十變式)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서문빙천은 자신의 목 천돌혈 부근이 뜨거운 불에 지져지는 고통에 처절하게 비명을 터뜨렸다. "으---- 아---- 악!" 동체와 분리된 서문빙천의 수급이 피보라와 함께 튀어 올랐다. 백리강의 마검 묵류혼은 그대로 서문빙천의 빙극천도까지 박살내고 있었다. "빙천----!" 서문일백은 아들의 참혹한 죽음에 피토하게 부르짖었다. 다음 순간 그의 전신으로 가공할 한기(寒氣)가 폭풍처럼 휘몰아쳐 올랐다. "죽---- 인---- 다----!" 악마의 저주처럼 뼈저린 외침과 함께 그의 몸에서 천신도 놀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서문일백의 몸이 마치 얼음(氷)으로 빚은 듯 투명하게 변하는 것이 아닌가? 단지 무섭게 이글거리는 두 눈만이 시뻘건 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것이 더욱 전율스럽도록 가공할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그런 채로 서문일백은 벼락같이 신형을 날렸다. 그의 앞을 불사천령강시들이 막았다. "비켜라!" 그의 투명무비한 쌍장이 휘둘러진 순간 그를 막은 다섯 명의 불사천령강시가 그대로 얼음으로 화했다. 금강불괴의 불사천령강시들을 한꺼번에 얼려 죽이다니 서문일백의 빙공(氷功)은 대체 얼마나 무서운 것이란 말인가? 서문일백은 그 기세 그대로 무섭게 백리강을 덮쳐가고 있었다. 주위에서 바라보던 사람들의 안색이 급변했다. 위기를 직감한 것이다. 하나 정작 백리강은 조금도 흔들림 없는 신색으로 우뚝 서있을 뿐이었다. "이제 모든 은원을 종결할 때가 되었다. 서문일백!" 그의 신형이 수십 개로 불어났다. 은형백변환이 극성으로 펼쳐진 것이다. 다음 순간 수십 명으로 불어난 백리강의 분신들이 일제히 쌍장을 내뻗으며 대갈했다. "유천마장(流泉魔掌) 제 사식 육합화일(六合化一)----!" 천존마제의 가공할 장법 유천마장의 마지막 초식이 전개된 것이다. 휘---- 우---- 웅! 휘웅----! 수백 가닥의 장강(掌 )이 회오리를 이루며 곧장 서문일백을 짓쳤다. 사상 유래없을 가공무비의 격돌이 벌어졌다. 꽝---- 꽈르르르릉----! 천지개벽의 엄청난 폭음이 솟구쳤다. 희뿌연 먼지 속에 백리강은 세 걸음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반면 서문일백은 허공에서 빙그르 회전한 뒤 재차 그를 덮쳐오고 있지 않은가? "죽어라---- 백리강!" 동귀어진(同歸於盡)을 각오한 죽음의 공세였다. 백리강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하나 그는 이내 수중의 묵류혼을 꽉 움켜 쥐었다. 우---- 웅……! 묵류혼이 웅후한 용음(龍音)을 토해낸 순간 우렁찬 외침이 재차 백리강의 입을 떠났다. "표향검우(飄香劍雨)----!" 수천 개의 태양이 한꺼번에 작열하는가? 눈조차 뜨지 못할 엄청무비의 검광이 허공을 뒤덮었다. 그리고 마검살인십삼예(魔劍殺人十三藝)의 십삼변식이 연속해서 모조리 펼쳐졌다. "크---- 악……!" 폐부를 쥐어 뜯듯 참혹무비한 단말마가 검광 속을 꿰뚫었다. 그와 동시에 허공을 가득 메웠던 검광이 씻은 듯 자취를 감추었다. 아…… 보라! 서문일백은 삼 장 밖에서 곤두박질한 채 나뒹굴고 있었다. 한데 그의 양팔은 이 순간 깨끗이 절단되어 있었다. 하나 피는 흐르지 않았다. 잘린 부분이 마치 허연 서리가 앉은 듯 끔찍한 형상을 이루었다. 그런 채로 그는 비틀거리며 간신히 신형을 일으키고 있었다. 스윽! 그 앞으로 백리강이 다가섰다. 그는 좀전과 조금도 다름없는 의연하며 눈부신 신태였다. 그는 서문일백을 담담히 응시하며 일성했다. "네가 졌다. 서문일백." 서문일백은 힘겹게 그를 향하며 신음하듯 입을 열었다. "당대에만은…… 나의 적수가 없을 줄…… 알았건만……" "……" "그래…… 백리강, 네가…… 이겼다……" 쩍…… 쩍쩍……! 서문일백의 전신에 돌연 금이 가기 시작했다. 마치 단단한 얼음이 균열을 일으키며 갈라지듯 끔찍한 모습이었다. "너의…… 승리…… 다……" 힘겨운 한 마디가 흘러나온 순간 고목이 쓰러지듯 서문일백의 금간 육신이 둔탁하게 나동그라졌다. 그리고 그의 몸은 순식간에 수천 조각으로 부숴졌다가 금시 붉은 물로 녹아 지면으로 스며들어 버렸다. 한 줌의 물(水)…… 그것이 일대효웅(一大梟雄)이었으며 야심많은 서문일백의 최후였다. 또한 중원을 지킨 마교전왕 백리강의 눈부신 승리이기도 했다. "으음……" 백리강은 뜻모를 신음성을 내뱉으며 묵류혼을 거두었다. 이어 천천히 신형을 돌리자, "와---- 아!" "대지존께서 승리하셨다----!" 엄청난 함성이 계곡을 떠들썩하게 뒤흔들었다. 서하군주 주여설이 긴 안도의 숨을 내쉬며 백리강에게 다가왔다. "백리공자, 수고 많으셨어요." 그녀의 고귀한 옥용은 상기된 듯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백리강은 담담히 미소를 머금었다. "모두가 여러분들의 노력 덕분일 뿐이오." "……" 주여설은 말없이 그의 눈부신 신태를 그윽이 응시했다. 문득 그녀는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소녀가 이제껏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은근한 사과의 음성이 아닌가? 백리강은 그저 빙그레 웃었다. 그들 주위로는 많은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들고 있었다. 무림사상 가장 위대한 최강자인 마교전왕 백리강을 보기 위해서……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 일출 속에 천 년 이래 대혈겁은 종식(終熄)을 맞았다. 일출의 서광은 더욱 짙어져 갔고, 그 빛살 속에 대단원의 막(幕)을 내리는 유쾌한 웃음소리가 번져가고 있었다. 평화(平和)는 이렇게 찾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
첫댓글 수고 많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동안 잘 보았습니다. 감사.
그동안 잘 보았습니다. 감사.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즐독 ㄳ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