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1월 2일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저녁 6시 30분, 서울 원남동 우체국 건너편 노상에서 두 발의 총성이 울리고 한 남자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남자는 즉사했다.
비명횡사한 인물은 총독부 고등경찰의 상징적 인물 사이가 시치로였다.
사이가의 피살을 알리는 경성일보 11월 5일자 기사 제목은 "사상 경찰의 악마, 최후는 이렇다, 사이가 노상에서 사살되다"였으며
기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20년에 걸쳐서 허다한 우국 선각을 잔혹한 고문으로 없는 죄를 뒤집어 씌우고 감옥에 보내어 죽음에까지 이르게 했던 일본제국주의 사상경찰의 사귀(邪鬼)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사이가 시치로는 일제강점기 경기도 경찰부 고등경찰과 경부였다. 그는 20년에 걸쳐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사상범들을 야만적으로 고문해 악명을 떨쳤던 인물이었다. 당시는 행정구역상 서울이 경기도에 속했던 시절이었으므로 서울을 포함한 경기도의 중요 사상 관련 사건은 대부분 사이가의 손을 거쳤다. 그의 손에 걸려들어 잔혹한 고문을 받은 독립운동가와 지식인이 많았기에, 그리고 고문의 후유증과 혹독한 수감생활로 죽음에 이른 인사도 있었기에 그의 악명은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손을 거쳐 수많은 수사가 이루어지고 사건이 조작, 날조되었지만 대표적 사건 세 가지만 살펴보고자 한다.
첫 번째 사건은 안재홍 관련 사건이었다. 1936년 안재홍은 정태운이라는 청년이 중국 난징의 군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추천장을 써 주었다가 발각되었다. 일견 별 일도 아닌 사건이었지만 사이가는 안재홍을 비롯하여 10명이 넘는 연루자를 조사해 5명을 구속했다.
사이가는 안재홍을 비롯한 연루자들을 심문했는데, 이때 심한 고문이 가해졌다. 2개월여의 수사 끝에 검찰로 송치된 안재홍은 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사이가는 항상 피의자들의 행위를 어떻게든 독립운동과 관련시키기 위해 다각도로 분석하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연루시켜서 범죄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의 이러한 노력은 대부분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다.
사이가가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에 근무하던 무렵에 총독부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폐간을 기획하고 있었다. 사이가는 신문사에 압력을 넣고 약점을 파악하고 약점이 없으면 부정을 조작하여 두 신문사를 회유하고 폐간을 강요하는 역할을 맡았다. 결국 1940년 8월 10일 같은 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폐간되었다.
1943년 초 사이가는 '단파방송 청취사건'을 수사했다. 정보의 통제가 철저했던 당시에 경성방송국 직원들을 중심으로 '미국의소리(VOA)'와 중국 충칭 임시정부가 보내는 단파방송을 청취해 태평양전쟁의 전황과 국제정세를 비밀리에 전파하다가 많은 사람이 투옥된 사건이 '단파방송 청취사건'이었다.
엄혹한 언론과 사상 탄압으로 긴박하게 돌아가는 해외의 사정을 알 길이 없었던 때에 경성방송국 소속 조선인들은 미국의 이승만이 '미국의소리'에 실어 보내는 국제 정세와 충칭 임시정부의 김규식 부주석이 전해주는 독립운동 소식을 몰래 들었다.
일본은 반드시 패망하고 조선은 독립할 것이라는 소문이 은밀히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갔다.
단파방송 사건 3개월 전인 1942년 10월부터는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 수사를 받고 있던 살벌한 분위기였다.
독립이 머지 않았다는 복음을 전하다가 투옥된 사람들은 주로 방송국 기술 계통 종사자였지만 언론인, 변호사, 문인, 의사, 목사 등 다양한 직업의 지식인들이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경찰이 압수할 수 있는 증거물은 단파 수신기 외에는 없었다. 기껏 단순히 입으로 전파된 형체없는 '유언비어 유포' 정도의 범죄였다. 사이가는 범죄를 입증하기 위해서 피의자를 상대로 같은 내용을 반복해 심문하고 심문하는 동안에 조금씩 다른 내용이 나오도록 유도하며 고문을 병행하는 방법을 썼다. 이를 겪은 피의자의 육체적, 심리적 고통은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조선일보 영업국장을 지낸 문석준은 혹심한 고문에 시달리다가 목숨을 잃었다.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였던 홍익범도 1943년 3월 체포되어 이듬해 12월 47세의 나이로 옥사했다.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외교학을 전공하고 석사학위까지 마친 민족주의 지식인을 그렇게 스러져갔다.
이 사건으로 전국에서 350명이 잡혀가 모진 고초를 당했고 변호사 허헌(1945년 인공 부주석)이 징역 2년에 처해지는 등 수많은 지식인과 기술자가 경찰의 혹독한 심문을 받고 유죄판결을 받았다.
일제가 조선어학회 사건을 날조하고 단파방송청취 사건을 키워 조선 내 민족주의자와 지도층의 씨를 말리려 했지만 2년후 일본은 패망했다. 8.15 직후 사이가는 가족들을 일본으로 돌려보내고 자신은 원남동 자택에 남아 가산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이가는 집에 머무르는 날이 거의 없이 숨어 다녔다. 조선인들 사이에서 자신에 대한 원한과 악명이 높은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웃사람들도 그의 집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다른 날과 달리 11월 2일에는 집에 전등불이 밝게 켜졌고 큰 웃음소리까지 났다.
6시를 지났을 무렵 사이가는 방문객을 전송하기 위해 슬리퍼를 끌고 나왔다. 원남동 로터리를 건너 우체국 건너편 노상에 들어서는 순간 어둠 속에서 총성이 울렸다. 사이가는 오른쪽 가슴을 손으로 누르는 동작을 취했는데 연이어 두 번째 총알이 머리를 관통하자 단말마의 소리를 지르면서 거꾸러졌다.
이 사건은 조선인들에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통쾌함을 던졌지만 아직 조선에 남아있던 일본인들의 심장을 내려앉게 했다. 재조 일본인들의 귀국 행렬은 더 바빠졌다.
사건의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사이가 생전의 악행에 걸맞은 비참한 최후와 미스테리는 소설의 소재로 손색이 없었다.
덕분에 사이가 피살 사건은 일본에서 출간된 두 편의 소설에 등장했다.
추리소설 작가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 '북의 시인 임화'라는 소설에 사이가의 피살 장면이 등장하고 재일교포 작가 김달수의 소설 '태백산맥'(1969년)에도 사이가의 최후 장면이 묘사되면서 그의 비참한 죽음은 문학이라는 장르를 통해 영원히 박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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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이 당시 한국인이나 일본인에게 준 충격이 매우 컸는데 해방 이후의 일이라서 그런지 아는 사람이 많이 없는 듯해서 올려 봤습니다. 나무공님 오늘도 감사합니다~
두분 노력으로
알게 되어서 감사드립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