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知何術長相對/ 無別無思度此生
무슨 수로 길이 서로 대할 수 있을지를 모르겠으니,/ 이별도 말고 생각도 말고 다만 이렇게 사세나."
외할아버지 신현구 님의 문집에 들어 있는 시의 한 구절이다. 막역한 고우와 오랜만의 반가운 해후 끝에 헤어지기가 너무도 아쉬워 읊은 시이다. 동무가 아무리 정다운들 만난 사람은 언젠가는 헤어져야 한다는 삶의 정리를 어찌할 수 없음이 너무도 안타깝다. 이별도 하지 말고, 서로 그리워하는 일도 없이 지금의 만남 이대로 오래오래 지내고 싶은 마음을 애절한 가락으로 노래하고 있다. '생각도 말고'라고 한 것은 물론 '사무치는 그리움'의 역설이다. 벗과의 가슴을 에는 듯한 석별의 정이 넘쳐나고 있다.
정월 초이레, 아내의 환갑날. 아내가 도무지 마다하여 환갑이라 이름을 붙이지도 못하고 설을 쇠러 온 아이들과 더불어 케이크에 예순 한 살의 촛불을 켜고 세 살배기 손녀가 축가를 귀엽게 부르는 것으로 땜을 하고 말았지만, 그대로 보내기엔 왠지 아쉽고 서운했다.
강산이 세 번도 더 바뀌는 세월을 함께 살아오는 동안에 겪어야 했던 간난과 신고, 그 속에 하얗게 세어버린 저 머리를 보노라면 세월의 한 매듭을 모른 체하고 넘길 수가 없다. 한사코 사양하는 아내를 어르고 구슬려 조그만 자리 하나 마련하기로 했다. 처가 식구들을 불러 함께 하는 것이 아내에게 편한 자리가 될 것 같아 동서네와 처남네를 부르기로 했다. 다 해봤자 삼남매뿐인 살붙이들이다. 바깥 어디에 괜찮은 자리를 마련해 볼까 생각했으나, 아내는 없으면 없는 대로 집에서 차리는 것이 마음 푸근할 것이라 했다. 환갑날 하루 전의 토요일에 두 집을 불렀다. 우리는 구미에 살고 남매들은 대구에 살고 있으나 그다지 멀지 않는 길이니 밤 좀 이슥해져도 괜찮겠지. 임지의 사택을 살고 있어 상이며 그릇하나 제대로 갖추어진 게 없지만, 좀 불편한 대로 맞이해도 무관한 동기간들 아닌가.
"내 환갑 잘 놀자고 내가 애를 먹어야 되겠어요?" 하면서도 아내의 손길은 분주해졌다. 작은 문어 한 통을 사오고, 잡채를 조리하고, 전을 부치고……. 내가 좋아하는 땅콩도 볶았다. 남매들이 온다는 토요일, 아내는 잠시도 쉬지 않았다.
날이 저물 무렵 동서네와 처남네가 도착했다. 두렛상에 둘러앉았다.
"처제-, 동생", "누나-, 형님"
"환갑을 축하합니다.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시기를-."
잔을 들고 소리쳤다. 박수도 쳤다.
이렇게 앉기가 얼마만이야? 서로 바쁘게 살다 보니, 한 해도 더 넘은 것 같지? 이렇게 불러주어 고마워. 무얼요, 차린 게 있어야지요. 이리 마주 앉은 것만 해도 얼마나 좋아! 그동안 참 고생도 많이 했다, 그렇지?
아내와 내가 만나던 시절부터 오늘에까지 살아온 일들이며 아이들이 커 나온 일들을 안주 삼으며 술잔을 비웠다.
"……그래, 그동안 힘도 많이 들고 어려운 일도 참 많았지만, 이젠 한 시름 놓았잖아!"
"맞아, 이젠 건강하게만 살면 돼-."
일흔 살 처형이 아내와 처남댁의 손을 잡고 웃음을 지었다. 불콰한 얼굴의 세 남자도 함께 웃었다. 아내는 이따금 부엌을 들락거리고, 상은 점점 낭자해져갔다.
"야, 정말 좋다-.!"하며 잔을 들던 처남이 거실 바닥에 스르르 몸을 눕혔다. 운전자인 처남이 쓰러졌으니 집으로 돌아가기는 다 글렀다. 그러나 누구도 걱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동서와 함께 잔을 나누는 사이에 밤은 새록새록 깊어 가는데, 세 여자는 따로 돌아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때로는 박장대소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조근조근 담소를 하기도 하며 고담준론(?)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날아오는 소리를 잠시 들으니 아이들이며 살림살이 이야기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남편 흠잡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밤이 얼마나 깊었을까.
"늘 이렇게 살면 얼마나 좋겠노! 인제 살면 얼매나 산다고." 처형이 말했다.
"맞아요, 형님! 그런데 작은형님 오늘 힘 많이 쓰셨지요?" 처남댁이 말했다.
"무어, 힘들 거 있나. 이래 보는 것만 해도 얼마나 좋노!"
상이 치워진 자리에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끼리 이리저리 누웠다. 술 취한 남자들은 이내 잠이 들었지만, 여자들이 누운 자리에서는 오래도록 이야기가 그치지 않았다.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아내의 환갑날인 일요일 아침, 아내가 끓인 미역국으로 아침을 먹었다. 술에 속이 단 남자들은 국물 한 그릇씩들을 다 비웠다. 한나절 되도록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점심을 같이 먹고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왕 늦은 거 저녁도 함께 하고 가시지요." 아내가 형부와 언니를 잡았다.
"그래, 나도 더 있고 싶다. 그냥 이대로 살고 싶다." 처형이 말했다.
오후에 볼일이 있다는 처남네를 따라 모두 차에 올랐다. 골목을 돌아나갈 때까지 아내와 나는 손을 흔들었다.
"환갑잔치 한 번 걸게 했네."
"뭔가 하나 잃어버린 것 같네요."
아내는 동기들과 헤어진 것을 못내 아쉬워하는 듯했다.
외할아버지의 문집을 다시 읽어본다.
"重年仙峽懷常切/ 二日구門夢思醒/ 自在奇緣時雨若/ 請君無苦數宵停
해 거듭할수록 신선 골짜기 생각이 언제나 간절한데,/ 이틀 동안 문간에서 만나니 꿈같은 생각이 깨었다네./ 스스로 기이한 인연 있는 듯해 비 때맞춰 내리거늘,/ 청컨대, 그대 여러 날 밤 머물러 괴로움 없이 하세나."
할아버지는 친구간의 우정을 노래했고, 아내의 정은 동기간의 우애이지만, 우정이든 우애든 정이야 일반일 터. 정은 사람의 마음을 아리게도 하지만, 정이 있기에 사람살이가 아름답고도 미쁠 수 있지 않으랴. 그래서 세상살이가 살만하지 않으랴.
이별도 말고 생각도 말고 다만 이렇게 사세나-.♣(2009. 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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