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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 상궁(내명부 궁관계층 정5품)들의 모습
〔조직〕
국가 최고의 정청인 동시에 국왕의 사가(私家)인 궁중 운영은 자연히 많은 여성을 필요로 하였다. 궁중의 여성 조직은 국왕의 배우자로서 품계를 초월한 왕비와, 직임을 가진 내명부, 그리고 품계가 없는 궁인인 잡역 궁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내명부는 품계를 받은 자로서, 위로는 국왕과 왕비를 모시고 궁중내의 일정한 직임을 맡아보며, 아래로 잡역 궁인을 부렸는데, ≪경국대전≫에 따르면 크게 두 계층이 있었다. 정1품 빈부터 종4품 숙원까지는 왕의 후궁 층으로 내관이라 하고, 정5품 상궁부터 종9품 주변궁(奏變宮)까지는 상궁 층으로 궁관이라 하였다.
이들은 품계·명칭·직무가 다르듯이, 신분 또한 달랐다. 이들의 출신 성분을 보면 삼국시대에는 천인 출신도 있었으나, 고려시대에는 대부분 귀족 출신들이었다. 그러나 고려 말기에 와서는 천인 출신도 적지 않았다.
조선 초기의 후궁은 신분이 좋은 가문에서 정식으로 맞아들인 후궁과, 한미한 집안 출신의 궁녀로 승은을 입은 후궁으로 나눌 수 있다. 정식 후궁은 처음부터 왕비나 세자빈처럼 가례색(嘉禮色)을 설치하여 전국의 혼기에 있는 처녀들에게 금혼령을 내리고 간택하여 빙례를 갖추어 맞아들인 경우이다.
그러나 태조·정종 때에는 제도가 미비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가례색에 의한 간택은 없었다. 단지 몇몇 대신들이 딸을 바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는 천한 가문의 딸로서 승은한 것은 아니었다.
이에 태종은 ≪예기≫의 ‘제후부인입삼궁(諸侯夫人立三宮)’의 제도를 따라 1빈 2잉제를 명령하였다. 왕의 명령에 따라 가례색을 설치하여 간택하고 빙례로 맞아들인 정식 후궁이 바로 정의궁주(貞懿宮主)이다.
태종은 후궁 간택의 중요성을 인군계사(人君繼嗣)와 중인내조(衆人內助)에 있다고 보았다. 때문에 자신이 정한 1빈 2잉제를 채택했지만, 그 수에 얽매이지 않고 3, 4빈잉을 더 두었다면서 아들 세종의 빈잉도 더 두고자 하였다. 이후의 왕들은 그 시대 상황에 따라 한두 번 정도 정식 후궁을 맞아들이기도 하였다.
조선 중기와 후기에는 왕비의 분만 가능성이 없을 때, 대통을 이을 왕자를 낳기 위해 특별히 간택한 경우가 있었다. 정조의 후궁 원빈(元嬪)과 순조의 생모 수빈(綏嬪) 등이 그에 해당한다.
승은한 후궁은 시녀·관비·사비·창기·과부 등의 미천한 출신으로 왕에게 승은을 입고 일약 후궁이 되는 경우이다. 대개 왕의 총애를 받거나, 왕자를 낳거나, 공로가 있는 경우에만 봉작 또는 재차 승격된 기록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정식 후궁에 비해 문헌상 나타나지 않은 승은한 후궁이 많았을 것이다.
조선 중·후기에 승은한 후궁으로는, 세자의 생모가 된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暎嬪李氏)와 광해군의 생모가 된 공빈 김씨(恭嬪金氏), 경종의 어머니 희빈 장씨(禧嬪張氏), 그리고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淑嬪崔氏) 등이다.
이들은 비록 한미한 집안 출신들이었으나, 세자와 왕의 생모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그러나 지존한 왕비에게는 절대로 미치지 못하였다.
궁관은 일정한 직임과 품계를 가지고 궁중 운영의 핵심이 되었던 계층이다. 위로는 왕비와 내관을 받들고, 아래로는 품계를 받지 못한 잡역에 종사하는 하층 궁녀를 부렸다.
세자궁에도 역시 내관과 궁관으로 구별되어 있었다. 규모는 대전(大殿)을 축소한 상태이며 조직과 기능은 대전과 비슷하였다.
〔기능과 역할〕
내명부의 직무를 구체적으로 명시한 것은 ≪경국대전≫보다도 1428년에 만든 제도이다. 기능이 내관과 궁관으로 크게 양분되고 품계에 따라 각기 고유의 직무가 부여되었다. 내관인 정1품 빈과 귀인은 왕비를 도와 부인의 예를 의논하며, 정2품 소의와 숙의는 왕비의 예를 돕고 의논하였다.
정3품 소용과 숙용은 제사지내는 일과 손님을 접대하는 일을 맡으며, 정4품 소원과 숙원은 왕이 평상시에 한가롭게 거처하는 전각을 관장하고, 명주와 모시를 길쌈해 해마다 바쳤다. 내관의 궁중 활동은 부여된 직무에만 한정한 것은 아니었다.
내관은 종친의 내연(內宴)에 왕비를 따라 참석했으며, 태종의 후궁인 정의궁주는 명나라 후궁 권파파(權婆婆)와 사신을 중계로 서신과 선물을 주고받으며 교제도 하였다. 왕비의 온수현 행차 때에도 내외 명부가 나가서 전송했고, 왕비 간택에서도 여러 종친 부인들과 공주들이 함께 참석하였다.
또한 왕비가 친잠례(親蠶禮)를 행할 때도 내외 명부들이 따라서 행했던 기록을 많이 볼 수 있다. 때로는 왕비의 소생을 길러주기도 하여 맡은 일 외에도 그 당시의 형편에 따라 다양하게 활동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내관(후궁)들은 왕의 총애와 공로에 따라 예우를 받았다. 총애 받는 후궁에게는 봉작 또는 승격의 영예가 내려졌다. 태종의 후궁인 정의궁주에게는 연못을 파준 예도 있으며 온수현에 요양가는 특전이 베풀어지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외국 사신에게 선물을 받는 등 여러 가지의 대우를 받았다. 그러한 은전은 본인뿐만 아니라 내관의 족친들에게까지 주어지기도 하였다.
반면, 출궁 당하거나 징계 받는 경우도 많았다. 태종은 숙공궁주 김씨(淑恭宮主金氏)를 친정으로 돌려보냈는데, 그녀의 아버지인 김점(金漸)의 죄를 국문할 때, 공의와 사은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세종에게 한 어린 후궁이 작은 일을 청했을 때 물리친 일 등은 단편적인 사실이기는 하나 왕의 후궁에 대한 양면성을 엿볼 수 있다.
궁관은 국왕의 시위와 궁중 실무를 맡았다. 상궁은 정5품으로 왕비를 인도하며, 정6품인 사기(司記)와 정7품인 전언(典言)을 통솔하였다. 사기는 궁내의 문서와 장부의 출입을 맡았으며, 전언은 백성에게 널리 알리고 왕에게 아뢰는 중계 구실을 하였다. 상의(尙儀)는 정5품으로 일상 생활에서의 모든 예의와 절차를 맡았고, 정6품인 사빈(司賓)과 정7품인 전찬(典贊)을 통솔하였다.
사빈은 손님을 접대하고 신하가 왕을 뵐 때의 접대, 그리고 잔치를 관장하고 왕이 상을 주는 일 등을 맡아 처리하였다. 전찬은 손님 접대와 신하가 왕을 뵐 때의 접대와 잔치, 그리고 정승을 도와서 앞을 인도하는 일 등을 맡았다. 상복(尙服)은 정5품으로 의복과 수로 무늬 놓은 채장(采章)의 수량을 공급하고 정6품의 사의(司衣)와 정7품인 전식(典飾)을 통솔하였다.
사의는 의복과 머리에 꽂는 장식품의 수식을 맡았으며, 전식은 머리감고 화장하는 고목(膏沐)과 세수하고 머리 빗는 건즐(巾櫛)을 맡았다. 상식(尙食)은 정5품으로 음식과 반찬을 종류대로 가지런히 준비하고, 정6품인 사선(司膳)과 정7품인 전약(典藥)을 통솔하였다.
사선은 삶고 졸여 간을 맞추는 반찬을 만들었고, 전약은 처방에 의한 약을 맡았다. 상침(尙寢)은 정5품으로 왕을 보통으로 뵐 때와 왕이 옷을 입고 먹는 일인 진어(進御)하는 순서를 맡았고, 정6품인 사설(司設)과 정7품인 전등(典燈)을 통솔하였다.
사제는 의복을 만들었고, 전채는 비단과 모시 등 직물을 맡았다. 궁정(宮正)은 정5품으로 궁녀들의 품행과 직무에 대하여 단속하고 죄를 다스리는 구실을 하였다. 전정(典正)은 정7품으로 궁정의 일을 도왔다.
이러한 직무 외에도 기록에 의한 활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 초기에는 제도가 정비되어 가는 과도기였으므로 궁관 층과 잡역 궁인을 구별 없이 기록하고 있어 내용으로만 추측해볼 수 있을 뿐이다. 실제로 궁관의 명칭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문종 때부터이다. 이는 1428년 제도가 제정된 이후 서서히 일반적으로 명칭이 정착되었음을 볼 수 있다.
궁관은 왕비의 친정아버지 상(喪)에 왕비를 따라서 상복을 입고, 왕 및 왕비가 죽었을 때에도 참최복(斬衰服)을 입으며, 동궁의 배필 간택 때에도 부분적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왕비의 온수현 행차 때에도 내관과 함께 전송을 나갔으며, 1457년(세조 3) 왕비의 헌수의식(獻壽儀式)도 궁관이 완전히 맡아서 담당하였다.
또 이들은 국가로부터 대우를 받았는데, 내관은 예외였지만 궁관은 녹을 받았다. 죽었을 때에는 상장(喪葬)에 필요한 미두(米豆)·정포(正布)·지(紙)·관곽 등의 부의를 내려주고, 공로가 있을 때에는 특별한 혜택도 주었다. 그러므로 내명부는 왕과 왕비의 일상 생활에 걸친 모든 시중을 드는 궁중 생활에 있던 하나의 단체라 할 수 있다.
품계 |
명칭 |
정1품 | 빈(嬪) |
종1품 | 귀인(貴人) |
정2품 | 소의(昭儀) |
종2품 | 숙의(淑儀) |
정3품 | 소용(昭容) |
종3품 | 숙용(淑容) |
정4품 | 소원(昭媛) |
종4품 | 숙원(淑媛) |
품계 | 명칭 | 임무 |
정5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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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궁(尙宮) | 중궁 인도의 총책임 |
상의(尙儀) | 예의와 기거 | |
종5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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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복(尙服) | 복용(服用)·채장(采章) 공급 |
상식(尙食) | 반찬재료 공급 | |
정6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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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침(尙寢) | 연현(燕見)·진어(進御)의 차례 |
상공(尙功) | 여공(女功) | |
종6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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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정(尙正) | 계율·규찰·처벌 |
상기(尙記) | 문서와 장부 | |
정7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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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빈(典賓) | 빈객·조현(朝見)·연회·상사(賞賜) |
전의(典衣) |
의복·자수 | |
전선(典膳) | 요리 | |
종7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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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典設) |
휘장·침구 등 |
전제(典製) |
의복 재봉 | |
전언(典言) | 문서·명령 전달 | |
정8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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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찬(典贊) |
조회나 연회 때 빈객 안내 |
전식(典飾) |
고목건즐(膏沐巾櫛) | |
전약(典藥) |
의약 | |
종8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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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典燈) |
조명(照明) |
전채(典彩) |
옷감·직류 | |
전정(典正) | 상정을 보좌 | |
정9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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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궁(奏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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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상(奏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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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각(奏角) | ||
종9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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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치(奏變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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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奏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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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우(奏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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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궁(奏變宮) |
품계 | 이름 |
종2품 | 양제 |
종3품 | 양원 |
종4품 | 승휘 |
종5품 | 소훈 |
품계 | 이름 | 임무 |
종6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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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규 수칙 |
세자빈을 인도하고 장정·장서를 다스림 예의(禮儀)·참현(參見)을 관장하고 장봉·장장을 다스림 |
종7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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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찬 장정 |
음식 마련, 장식·장의를 총관 문서, 출입과 자물쇠, 규찰과 추국 |
종8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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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 장봉 |
경적(經籍)·선전(宣傳)·교학(敎學) 재닌(裁紉)직적(職績) |
종9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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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장 장식 장의 |
재화(財貨)·겸채(縑綵:비단) 선차(膳差)·주예(酒醴)·등촉(燈燭)·신탄(薪炭)·기명(器皿) 방약(方藥) |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브리태니커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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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석조전...인가요? 상궁 차림으로 서양식 건물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이 이색적이네요^^ '한국적 미(!)'가 엿보이는 상궁도 계시고... 옛날 분들이라 그런지 전체적으로 아담하십니다ㅎ
석조전에서 한컷~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