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투리 콩가리와 콩가리밥에 얽힌 사연
(작성 중)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는 ‘콩가리’와 ‘콩가리밥’이 있다. 표준어로는 ‘콩고물’과 ‘콩고물밥’이 될 것이다.
경상도(慶尙道) 동남부지방에서는 ‘가루’를 ‘가리’라고 하기 때문에 ‘콩고물’의 다른 말인 ‘콩가루’도 ‘콩가리’라고 한다.
이하에서는 또 하나의 표준어(標準語)인 ‘콩가루’로 통일한다. ‘콩가루’는 콩을 빻아서 만든 가루로 ‘두황(豆黃)’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날콩(생콩)을 빻은 가루를 ‘날콩가루’라고 하고, 넓은 바구니에 볏짚을 깔고 위에 콩을 펼쳐 따뜻한 아랫목에서 1-2일 동안 띄워 말렸다가 가루를 낸 것을 ‘띄운콩가루’라고 한다.
콩가루
필자들이 어렸을 때는 일년내내 ‘꽁보리’밥과 ‘갱죽’을 먹고 살았지만, 어쩌다 풍년(豊年)이 들면 겨울 한 철 쌀밥이나 쌀과 보리쌀이 반반씩 섞인 밥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워낙 돈이 귀한 시골이라 반찬은 언제나 푸성귀 투성이었고, 육류(肉類)나 생선토막은 명절 때나 생신(生辰) 때가 되어야 구경할 정도였다.
때문에 비록 쌀밥이라 하더라도 반찬은 언제나 ‘짠지(통무를 반으로 잘라 담근 김치)’나 ‘무청김치’ 정도로 만족(滿足)해야 했다. 이때 등장한 것이 ‘콩가루밥’이다. 당시에는 ‘콩가루’도 이만저만 귀한 것이 아니었다.
콩가루밥
![](https://t1.daumcdn.net/cfile/cafe/14421D144C70A14E9E)
명절 때 볶은 콩을 디딜방아에 빻아 ‘콩가루’를 만들어 시루떡을 쪄서 제사음식(祭祀飮食)으로 쓰고 남은 것을 조그만 독에 갈무리해 두고, 집안 어른들이 식욕(食慾)이 떨어져 식사를 제대로 못하실 때 밥 위에 뿌려 비벼드리는 귀중품(貴重品)이었다.
아이들이 반찬이 없다며 칭얼거릴 때도 밥그릇 위에 한 숟갈씩 뿌려 비벼주기도 했는데, 고소하고 짭짤한 맛이 기가 막혔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를 겪고 6·25 사변을 치른 세대인 60대 후반에서 70대 이상의 세대들은 ‘콩가루밥’에 얽힌 향수(鄕愁)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아이들은 먹을 수나 있는지 모르겠으나, 당시에는 너무나 인기가 좋았던 별미(別味)였다.
콩가루밥
바쁘고 가난하고 고단했던 그 시절 하루 종일 들판에서 일하시던 우리들의 어머니들은 어린 자식들에게 점심밥 한 번 제대로 챙겨 줄 여유(餘裕)가 없었다.
늦은 점심때가 되어 잠시 귀가(歸家)하신 어머니들은 호미를 마당 중간에 던져 놓기 바쁘게 ‘기맹물(기명물 ; 설거지물)’통에 손 한 번 훌쩍 행군 뒤에 ‘꼬두박(흰박)’ ‘바가치(바가지)’에 보리밥 한 그릇 갈라 담고, 퍼런 ‘콩고물’을 뿌려 ‘콩가루밥’을 만드셨다.
‘콩가루’가 밥알에 골고루 무쳐지면 아들놈과 딸년은 물론 그 친구들까지 불러 모아 댓돌 위에 앉혀 놓고, 치맛자락 뒤집어 누런 콧물을 쓱쓱 훔쳐 준 뒤, ‘콩고물’ 비빈 밥을 손에 쥐고 쪼물쪼물 뭉치고 다져 “아~해라”하고 입을 벌리게 한 다음 한 줌씩 한 줌씩 먹여 주셨다.
콩가루밥 먹기
고소하고 짭짤했던 ‘콩가루밥’, 꿀맛이 따로 없었다. 60여년의 세월이 흘러간 지금, 그 시절 그 ‘콩가루밥’을 생각하면 가끔씩 고소한 ‘콩가루밥’을 비벼 주시던 자애(慈愛)로운 어머니의 모습이 문득문득 떠올라 눈시울을 적신다.
그 때 그 시절 어머니들의 정성(精誠)은 ‘콩가루밥’ 뿐만이 아니었다. 조무래기 동네 아이들이 소꼽장난 놀이에 해가는 줄도 모르고 마당에서 뛰놀고 있으면, 그 집 아이의 어머니는 이 빠진 ‘꼬두박’ 바가지에 상추와 밥을 담은 후 그 밥 위에 마늘잎사귀 쭝쭝 썰어 넣은 ‘지렁(간장)’을 뿌려 들고 마당으로 나오신다.
점심 때 점심밥을 챙겨주지 못한 아이들의 허기를 면해 주기 위해서였다. 아이들 흙 손바닥에 입 바람을 호호 불어 대충 먼지를 불어내고, 상추 한 잎씩을 아이들의 흙투성이 손바닥에 깔아 준다.
그리고는 아이들의 상추 잎에 마늘잎 간장을 무친 보리밥을 크게 한술 떠서 얹어 주신다. 꿀맛이 따로 없었다. 아이들은 누구의 것이 더 큰지 잠시 전자(견주어) 보다가 목구멍에 꿀꺽하는 소리를 내면서 어적어적 씹어 삼킨다.
그 시절 꽁보리밥
그 시절 아이들은 해마다 열리는 가을 운동회(運動會)나, 봄 가을에 돌아오는 '원족'날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었다. 이런저런 먹거리를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고, 평소엔 엄두조차 못 냈던 ‘콩가루밥’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윤기(潤氣) 도는 햅쌀밥에 ‘콩가루’를 듬뿍 묻혀 먹으면, 너무나도 구수하여 반찬이 없어도 도시락 하나쯤은 게눈 감추듯 뚝딱 먹어치웠다.
그 시절 가을운동회
![](https://t1.daumcdn.net/cfile/cafe/125BC5364C73B7B722)
식어빠진 ‘꽁보리밥’이라도 그 위에 ‘콩가루’를 두툼하게 뿌려 놓으면, 그런대로 감칠맛이 나기도 했다.
초등학교(初等學校)에 다닐 때의 일이다. 어느 날 할머니가 특별히 만들어 주신 ‘콩가루밥’ 도시락을 책보에 싸서 등교(登校)했는데, 점심시간에 도시락 뚜껑을 열자말자 꾸러기들이 우루루 달려들어 한 숟갈씩 떠먹어 버리자 필자가 먹을 것이 없어졌다.
어안이 벙벙해진 채 비록 점심을 굶기는 했지만, 동무들이 할머니의 정성(精誠)을 먹었다고 생각하니 도리어 흐뭇했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여기에서 잠시 그 당시 할머니께서 콩고물로 비벼주신 도시락을 찬미(讚美)한 이재익의 ‘배롱나무’를 음미해보고 넘어간다.
배롱나무
이 재 익
물 맑은 수청리 복사꽃 벙글던 초가집
진달래 꺾어 꽂은 흙벽 검은 부엌에서
매운 연기로 눈을 씻는 할머니
어린 손자 삼남매 배곯리보셨다.
동트는 새벽에 동산에 올라서
아카시아 가시 거꾸로 꽂으며
‘남의 눈에 꽃이고 잎이게 하소서’
천지신명에게 삼눈 내리던 약손이셨다.
콩고물로 비벼주신 도시락
급우들이 다 빼앗아 먹어도
나는 먹지 않고도 배가 불렀다.
‘네 장가갈 때 까지 살리라’ 시더니...
허리 휘며 가꾸던 그 밭머리에 잠드셨다.
묵정밭 억새풀은 해 더욱 거칠고
유심한 배롱나무는 연연이 붉어라.
|
‘콩가루’는 ‘찰떡(찹쌀떡)’을 만드는 데에도 필수품(必需品)이었다. ‘찰떡’이란 찹쌀을 가지고 만든 떡을 말하는데, 일명 ‘인절미’라고도 한다. 이야기가 나왔으니 여기에서 ‘찰떡’의 유래(由來)를 잠시 살펴본다.
옛날 ‘공산성’이라고 부르는 곳의 어느 한 시골에 임씨(任氏) 성을 가진 마음씨 고운 한 농군(農軍)이 아들 3형제와 함께 농사를 지으면서 열심히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연속 3년째 가뭄이 들어 농사를 지을 수 없어 입에 풀칠도 제대로 할 수 없어 온 가족(家族)이 시름에 잠기곤 했었다.
게다가 큰아들과 둘째아들이 커서 성가(成家)까지 하다 보니 자연이 식구가 불어나게 되고, 입이 많아지게 되자 끼니때마다 ‘무청김치’나 산나물에 쌀알이 조금 들어간 ‘갱죽(羹粥)’으로 연명(延命)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갱죽
![](https://t1.daumcdn.net/cfile/cafe/1762311C4C73B45C61)
(옛것도, 서민의 것도 아닌 지금의 고급갱죽이다)
‘가마목(가마솥이 걸려 있는 부뚜막이나 그 주변)’을 차지하고 앉은 며느리들도 농사가 안 돼 쌀이 없는 정황(情況)이라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여기에다 그해 겨울, 임씨는 또 셋째며느리를 맞아들이게 되었다. 그런데 셋째며느리는 인물도 절색(絶色)이었지만, 어느 모로 보나 꽤나 영리해보였고, 살림솜씨 또한 여간 재치가 있지 않았다.
셋째며느리가 ‘가마목’을 차지하고 앉은 다음부터 비록 산나물이나 퍼런 ‘무청김치’로 끓인 ‘갱죽’으로 끼니를 때우기는 했지만, 그 맛이 때마다 다르고 구수했다. 음식(飮食)을 만드는 솜씨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가마목
(아낙이 앉아 있는 곳을 '가마목'이라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임씨가 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밭을 번지고(갈고) 씨를 뿌려야겠는데, 먹은 것이 없다보니 어디에서 맥이 나겠느냐!”면서 한탄(恨歎)을 하신다.
이 말에 큰아들이 “그렇습니다. 배가 든든하면 그만큼 힘이 날것이 아니겠습니까?”라면서 참견(參見)하고 나섰다.
“이제 집에 조금 남아있는 식량(食糧)으로 어떡하나, 보릿고개까지 넘겨야겠는데” 시아버지가 하는 말을 조용히 앉아서 듣고 있던 ‘가마목’ 담당 셋째며느리는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解決)할 수 있을까. ‘가마목’에 앉아있는 아녀자들이 잘 처사해야겠는데.” 며칠이 지나 집안 식구들이 밭갈이를 나서려고 차비를 하던 그날 아침이었다.
‘가마목’에 앉은 셋째며느리가 다른 양식(糧食)이 떨어져 얼마 남지 않은 ‘기장쌀’로 밥을 짓게 되었는데, 밥이 다 되었는데도 밥을 풀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밥이 ‘죽밥’이 되면서 한 덩어리가 되어 떡이 되어버렸다.
기장쌀
![](https://t1.daumcdn.net/cfile/cafe/172D87204C7284AF15)
셋째 며느리는 그런대로 식구들에게 그 떡이 된 밥을 골고루 나누어주면서 “덩어리가 된 ‘죽밥’이라도 식기 전에 어서 잡수세요.”라며 아양까지 떨었다.
“그래, 어서 먹고 밭으로 나가자꾸나.” 시아버지 임씨가 이렇게 말하면서 수저를 먼저 들자 모두 따라 들었다.
그리고 모두들 아침밥을 배부르게는 먹지 못했지만, 그런대로 산으로 들로 일을 하러 나갔다. 그런데 그날은 다른 날에 비해 늦게까지 일을 했는데도 모두 배고파하는 눈치가 보이지 않았다. 웬일일까.
셋째며느리는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기장쌀’로 만들어 ‘죽밥’같이 된 찰밥덩어리를 먹은 때문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그래서 이튿날 아침에 밥을 지을 때도 의식적(意識的)으로 ‘기장밥’을 죽이 되게 계속 끓여서 떡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죽밥’을 식구들에게 대접했다.
무던한 식구들은 이틀째 ‘죽밥’을 먹으면서도 말 한마디 없이 먹고, 산으로 밭으로 일을 하러 나갔다. 그런데 그날도 역시 저녁 늦게까지 일을 했지만, 누구 하나 배고프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제야 그 비결(秘訣)을 알아차린 셋째며느리는 혼자 빙그레 웃었다. 바로 그 떡이 된 기장쌀 찰밥덩어리를 먹은 것이 효과(效果)였다는 것을 간파(看破)한 것이다.
위에서 말한 ‘기장’은 수수와 비슷한데, 작은 이삭이 갈라진 줄기마다 끝에 1개씩 달리는데 달걀꼴이고, 9∼10월에 익으며 아래로 늘어진다. 열매는 둥글고 담황색(淡黃色)인데 떡·술·빵·과자 등의 원료 및 가축의 사료로 쓰인다.
우리나라에서도 한 때는 많이 재배(栽培)하였으나, 지금은 많이 심지 않고 있다. ‘기장’은 유사전(有史前)부터 아시아·이집트·유럽 등지에서 재배되었다.
기장
![](https://t1.daumcdn.net/cfile/cafe/170DD8124C70A24509)
본론으로 돌아간다. 저녁에 밭에서 집으로 돌아오자 셋째며느리는 시아버지에게 당차게 한 가지 제안(提案)을 했다. “아버님, 금년에 우리 집에서 ‘찰곡식(찰벼)’을 많이 심었으면 합니다”라는 제안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시아버지는 “뭐라고, ‘찰붙이(찰벼)’는 소출(所出)이 적은데 왜 그러느냐?” 약간은 어이없다는 투로 셋째며느리에게 되물었다.
며느리는 “요즈음 ‘기장밥’ 덩어리를 잡수시고 일하러 나가셔도 배가 고프지 않으니 얼마나 좋은가요.
그 모든 것이 ‘찰기’가 있는 ‘기장밥’을 찰떡같이 ‘죽밥’을 만들어 먹었기 때문입니다”라는 며느리의 말에 딱히 그 원인(原因)인지는 몰라도 하루 종일 일을 해도 배고픈 감을 느끼지 못했는지라 머리를 끄덕였다.
그해 임씨네는 기장쌀, 찰수수, 찰옥수수 등을 많이 심었는데, 생각 밖으로 대풍년(大豊年)이 들었다. 그러자 어느 날 셋째며느리는 ‘기장쌀’을 씻어 가마솥에 찐 후, 그것을 퍼내 ‘절구’에 넣은 다음 남편더러 찧으라고 했다.
잠시 후 저녁상이 갖추어졌다. 셋째며느리는 ‘절구’에 찧어 만든 ‘기장쌀떡’을 칼로 베어 밥상에 올려놓고, 어느새 만들었는지 ‘콩가루’를 사발에 담아 올려놓으면서 말했다.
아낙들의 절구질
![](https://t1.daumcdn.net/cfile/cafe/1747221F4C73B5FFA3)
(둘 다 임신을 하여 힘들게 절구질을 하고 있다)
“떡이 목에 붙지 않게 구수한 이 ‘콩가루’에 묻혀 잡수세요.” 가족들은 모두 한 덩이씩을 맛보더니 별맛이라며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그 음식의 이름을 ‘찰붙이’로 만든 떡이라 하여 ‘찰떡’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시절 찰떡
![](https://t1.daumcdn.net/cfile/cafe/166B56134C70A2A390)
그로부터 세월이 흐른 1624년 초, ‘이괄’이라는 사람이 반란(叛亂)을 일으켜서 수도 한양(漢陽)을 점령하였다. 그 바람에 당시 조선 16대 임금이었던 인조(仁祖)는 한양을 떠나서 충청도 공주(公州)의 ‘공산성(公山城)’으로 피난을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임금님이 공주(公州)로 피난을 왔다는 소식을 들은 임씨는 아침 일찍 셋째며느리더러 ‘찰떡’을 하라고 하고는 그것을 담은 음식 보따리를 갖고 ‘공산성’을 찾아갔다.
며느리가 만든 기장쌀 떡
![](https://t1.daumcdn.net/cfile/cafe/191BCB124C70A34601)
임씨는 성문(城門)을 지키는 병졸(兵卒)에게 말하기를 백성으로서 임금님에게 드릴 음식을 해왔는데, 임금님에게 대신 전해달라고 부탁하였다.
병졸(兵卒)은 그 음식을 인조 임금님에게 갖고 가서 전후사정을 설명하고 바쳤다. 인조 임금은 처음에 대수롭지 않게 받아 먹어보았는데, 생전 처음 먹어보는 쫄깃쫄깃하면서도 구수한 음식의 맛에 놀라며, 떡의 이름이 무엇인가고 물었다.
하지만 그 병졸(兵卒)은 대답을 못하고 사람의 이름은 모르겠지만, 임씨(任氏) 성을 가진 백성이 만들어온 떡인 줄로만 알고 있다고 아뢰었다. 그 말을 들은 인조(仁祖) 임금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허허, 임서방이 가져온 떡이 절세(絶世)의 맛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 떡의 이름을 ‘임절미(任絶味)’라 하면 되겠구나”.
그래서 그날부터 그 ‘찰떡’은 또 ‘임절미’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게 되었는데, 세월이 가면서 임(任)이 어음적(語音的)으로 쉽게 불리는 ‘인’으로 변하여 ‘인절미’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 시절 인절미
그 후로부터 ‘찰떡’ 소문(所聞)이 온 나라에 퍼지게 되었는데, 점차 후세 사람들은 지역에 따라 그 ‘찰떡’을 만드는 방법을 기발(奇拔)하게 바꾸어 방아에 찧고, 절구에 찧고, 돌판에 놓고 나무로 ‘떡메’를 만들어 치고, 또 전문 ‘떡구시’를 만들어 쳐서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 ‘찰쌀’이 나오면서부터는 ‘흰찰떡’, 즉 ‘인절미’를 위주로 만들었는데, 이후로 생일(生日)과 결혼, 환갑(還甲) 등 경사로운 일과 즐거운 명절(名節) 놀이에 없어서는 안되는 음식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옛적 우리들의 어머니들은 그 시절 셋째 며느리의 방식(方式)을 따라 ‘찰밥’을 짓거나, 밥솥 한 귀퉁이에 찹쌀을 몇 줌 따로 안쳐 ‘찰밥’을 지어 ‘찰떡’을 만들어 주셨다.
‘찰밥’을 ‘주게(주걱)’로 계속 다져 떡처럼 덩어리지게 만든 후 ‘절구’에 볶은 콩을 찧어 만든 ‘콩가루’를 듬뿍 뿌려 굴리면, 둘이 먹다가 둘 다 죽어도 모르는 기막힌 ‘찰떡’이 되었다.
봄소풍이나 가을소풍, 가을 운동회(運動會) 때 이런 ‘찰떡’ 몇 개면 점심도시락으로는 그만이었고, 이마저도 갖고 오지 못하는 아이들에게는 참으로 화중지병(畵中之餠 ; 그림의 떡)이 되기도 했었다.
지방(地方)에 따라서는 이를 ‘밥절미’라고도 했다. ‘찰밥’으로 만든 ‘인절미’라는 뜻이다. 그 시절 어머니께서 만들어 주시던 ‘밥절미’를 먹어본 회원님들은 결코 그 맛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 시절 엄마표 ‘밥절미’
![](https://t1.daumcdn.net/cfile/cafe/123DA2114C70A3AD3C)
'찰떡'은 또 끈적거리고 잘 들어붙는 성질(性質)처럼 부부관계(夫婦關係)도 그렇게 되기를 기원(祈願)하는 의미가 담긴 음식으로 인식되어 혼인(婚姻) ‘이바지’로 잔칫날 큰상에 올려졌다.
그리고 학업을 닦는 자식(子息)들이 충실해지라는 의미로 학부모가 소원과 정성을 담아 훈장(訓長)과 학동(學童)들을 위한 잔치를 열고, ‘이바지’상에 올리는 우리민족의 전통음식(傳統飮食)이 되었다.
‘이바지’ 떡
![](https://t1.daumcdn.net/cfile/cafe/1228C1314C72824E5A)
그리고 먼 길을 가는 가족에게는 끈기 있는 어머니표 ‘찰떡’을 만들어 ‘초배기’에 차곡차곡 담아 두 세끼씩 요기(療飢 ; 시장기를 면할 정도로 음식을 조금 먹음)를 하기도 했었다. 여기에서 잠시 인절미를 노래한 김사인의 ‘인절미’를 잠시 음미한다.
인절미
김사인
외할머니 떡함지 이고
이 동네 저 동네로 팔러 가시면
나는 잿간 뒤 헌 바자 양지 쪽에 숨겨둔
유릿조각 병뚜껑 부러진 주머니칼
쌍화탕병 손잡이빠진 과도 터진 오자미 꺼내놓고
쪼물거렸다.
한나절이 지나면 그도 심심해
뒷집 암탉이나 애꿎게 쫓다가
신발을 직직 끈다고
막내 이모한테 그예 날벼락을 맞고
김치가 더 많은 수제비 한 사발
눈물 콧물 섞어서 후후 먹었다
스피커에서 따라 배운 ‘노란 샤쓰’
한 구절을 혼자 흥얼거리다
아랫목에 엎어져 고양이 잠을 자고 나면
아침인지 저녁인지 문만 부예
빨개진 한쪽 볼로 무서워 소리치면
군불 때던 이모는 아침이라고 놀리곤 했다
저물어 할머니 돌아오시면
잘 팔린 날은 어찌나 서운턴지
함지에 묻어 남은 콩고물
손가락 끝 쪼글토록
침을 발라 찍어먹고 또 찍어먹고
아아 엄마가 보고 싶어 비어지는 내 입에
쓴 듯 단 듯 물려주던
외할머니 그 인절미
용산시장 지나다가 초라한 좌판 위에서 만나네
웅크려 졸고 있는 외할머니 만나네
|
여기에서 다시 앞쪽에서 말한 ‘초배기’가 무엇인지를 잠시 알아보고 넘어간다. 도시락이 나오기 전에 휴대용(携帶用) 밥그릇으로 ‘초배기’라는 것이 있었다.
‘초배기’는 대나무를 가늘게 쪼갠 다음, 잘 다듬어서 조밀(稠密)하게 엮어 길쭉한 모양으로 만든 오늘날 도시락과 같은 기능(機能)을 하는 밥그릇이다.
초배기
![](https://t1.daumcdn.net/cfile/cafe/1506422E4C7A1C002F)
이 ‘초배기’는 먼 거리 여행(旅行)이나, 들녘에 일하러 갈 때나 산에 땔나무를 하러 갈 때 휴대용 점심 박스로 지참(持參)했었다.
‘초배기’는 대나무로 엮은 것이기 때문에 통풍(通風)이 잘되어 장시간 두어도 밥이 쉽게 변하지 않는 점도 있지만, 담긴 밥도 쌀은 적고 보리쌀이 거의를 차지하다보니 순쌀밥과 같이 밥알 사이가 밀착(密着) 되지 않고, 다소 통풍공간(通風空間)이 있어서 쉽게 변질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비록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철에 ‘초배기’에 담은 거친 밥이지만, ‘초배기밥’은 지극한 모정(母情)으로 짓고, 싼 도시락이었기 때문에 ‘초배기밥’을 먹고 식중독(食中毒)에 걸리거나 배탈이 나는 경우도 없었다.
그러나 이토록 정기 담기고 위생적(衛生的)인 ‘초배기’도 1950년대를 지나면서 극빈(極貧)한 가정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다.
‘초배기’를 대신해서 나타난 문명의 이기(利器) 도시락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시절 처음으로 보급된 양은(洋銀) 도시락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직장인(職場人)들도 아침에 출근할 때 유행처럼 들고 다녔다.
양은 도시락
![](https://t1.daumcdn.net/cfile/cafe/190440364C7282E172)
당시에는 학교식당(學校食堂)이며, 직장 내에 별도의 구내식당(構內食堂)이 없었기 때문에 도시락을 지참하지 않으면 점심을 굶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의 도시락은 애증(愛憎)의 산물이기도 했었다. 한 시간 가까운 통학거리를 걸어 가다보면 책보에 싼 도시락이 기우는 바람에 반찬의 짠물이 흘러내려 책과 공책(空冊)을 김치 국물로 염색(染色)하기도 했고, 둘러맨 보자기가 빨갛게 물들고 옷까지 착색(着色)될 때도 있었다.
6.25동란 때는 가을마다 어머니께서 ‘꿀밤’을 주워 밥을 해 주셨다. 서울과 윗녘에서 피난 온 피난민(避難民)을 먹여 살리고, 밤마다 마을에 내려와 식량을 빼앗아 가는 ‘빨치산’ 때문에 무엇이든 다른 먹거리를 보태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학교를 미군(美軍)들이 주둔하는 바람에 여름부터 시작된 겨울방학 기간 중 늦가을에서 초겨울까지 서울에서 피난 온 ‘혜영이 누나’와 함께 ‘하이골’ 산골짜기를 헤매며 ‘꿀밤’을 주어 나르던 그 시절이 주마등(走馬燈)으로 스친다.
그런데 겨울철 내내 텁텁한 꿀밤 밥을 먹는 것은 여간 고역(苦役)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때의 ‘꿀밤밥’에도 흰콩으로 볶아 만든 ‘콩가루’를 뿌려먹곤 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콩가루’는 현대판(現代版) 조미료(調味料)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콩가루’ 조미료는 그 후 ‘삭가리(사카린)’으로 만든 당원(糖原)으로, 다시 설탕으로까지 진화가 거듭됐다.
그리고 요즘 들어서는 웰빙 바람을 타고 다시 천연조미료(天然調味料)로 회귀하는 것을 보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게도 한다.
그 시절 '원족'과 '콩가루밥' 도시락
![](https://t1.daumcdn.net/cfile/cafe/161005324C74FFAA4D)
‘콩가루’와 관련된 전래속담(傳來俗談) 한 가지를 소개하고 파일을 접는다. 회원님들도 잘 아는 말로 우리말에는 ‘콩가루 집안’이라는 말이 있다.
‘콩가루 집안’은(어느 집이든지) 분란(紛亂)이 일어나거나, 가족과 친족(親族)들이 제멋대로여서 엉망이 되어버린 집안을 비유적(比喩的)으로 이르는 말이다.
“강영감네 집안은 완전히 ‘콩가루 집안’이 되어 버렸구나! 사촌동생이 일본(日本)서 사업 한답시고 재산 말아먹고, 30년 전 시집간 큰딸 강정옥이도 행실이 나쁘다고 소문(所聞)나 시댁에서 몰매 맞고 쫓겨났으니....”라는 용례(用例)가 있다.
‘콩가루가 되다’라는 말은 사전(辭典)에서 “어떤 물건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진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콩가루’는 가벼운데다 점성(黏性 ; 서로 달라붙어 끈끈한 성질) 또한 없기 때문에 작은 바람에도 흩어져서 날아가는데, 이것에 빗대어서 한 가족이 가족 간의 유대감(紐帶感)이나 화합이 없고 특히 질서(秩序)가 없고, 서로 제각각 제멋대로들 살아가는 복잡한 집안을 ‘콩가루 집안’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콩가루 집안’이란 한마디로 분란(紛亂)이 일어나 가족들 모두가 각기 제멋대로 행동하고, 질서나 예의범절(禮儀凡節)과 도덕성(道德性)이 없는 집안이라 할 수 있다.
|
첫댓글 '시락갱죽과 지게는 평생 안봐도 보고싶지 않겠다'고 하든 우리 이웃 정씨 할베 생각이 나네요. 우리 전 세대는 그렇게 한세상을 살고 갔지요. 요즘 아이들은 무슨 말인지 모를거고, 인절미가 그래서 생겼군요. 임씨 3째 며느리 참으로 지혜롭네.
요즘 우리 카페에는 좋은 음악이 너무 많아 PC 켜 놓고 노래 감상하는 것도 또한 재미가 솔솔...
동백꽃 피는 고향 .....남상규 노래 참....좋으네요...잘 들어보지 못한 것 같았는데....좋은 노래네요....딱 어울리고요....콩고물에 밥 비벼 묵던 시절이 아련 합니다. 양은 도시락에 된밥을 넣고..콩고물 넣고....뚜껑 닫고 닫은뒤 마구 흔들면 멋진 콩고물 밥이 되었는데..그게 맛이 참 좋았지요...지금 생각해 보면 맛 좋을 것도 없는데..ㅎㅎㅎ 그래도 그것을 꿀맛처럼 먹었지요.
인절미의 유래 처음 들었습니다. 사실 여부는 몰라도 선배님이 그러시다면 맞겠지요...찰떡이 사투리고...인절미는 표준어로 알았더니...찰떡이 더 원래의 표준말이네요..ㅎㅎㅎ 기장 찹쌀떡이 근기가 좋은가 보네요...원래 찰밥이나 찰떡은 근기가 있습니다. 저는 찰떡을 자주 많이 먹은 편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을 들라면 찰떡입니다.ㅎㅎ
저를 잘 아는 분들은 저에게 선물이라며 찰떡을 잘 사 줍니다.ㅎㅎㅎ 옛날 2002년도인지....ㅎㅎ 제가 다른 인터넷동호회 활동을 좀 할적에는 저를 좋아하는 팬이 좀 있었는데.....저를 위해서 인절비를 사가지고 와서 다른 분들까지 잘 먹고 그랬습니다. (자랑하는거 같아서 죄송.....ㅎㅎㅎ) 요새는 그런 활동도 안하지만...그런 인기도 없습니다.ㅎㅎㅎㅎ
제가 어렸을적 별명이 초배기입니다.ㅎㅎㅎ 머리가 그렇게 생겼다고 해서....저는 태어나서 인간이 안될것 같았답니다. 눈도 안뜨고...감고 있어서...점을 했더니...잘못 태어나서 그렇다고...남의집 의엄마를 정했답니다. 그분이 모화리 상모에 사셨던 입천댁이란 분인데...ㅎㅎ 어쨋거나....초배기 말씀 하니..제 별명이 생각나네요..ㅎㅎ 초배기에 보리밥 싸가지고 산에 나무하러가서 꿀맛같이 먹기도 햇습니다.
옛날 양은 도시락에는 반찬통이 같이 들어가서....아무리 조심해도....반찬국물이 밥애 섞이고...심지어 책이나 공책에도 묻고....가방도 젖었고...그 냄새가 고약했고....지금 생각하면....그 도시락밥 맛도 없었는데....그래도 배가 왜 그렇게 빨리 고픈지.....2시간 3시간 수업마치면 다 먹어치웠던 생각하면.....참 우스운 추억이지요..점심시간까지 도시락 먹지말라고 단속도 했지싶은네요.,..ㅎㅎ
선배님 글을 읽고 있노라면 만감이 교차합니다. 하고싶은 말도 많구만은........밤만 되면 빨갱이들이 득실되엇다고 하더니....저는 말만 들었고..직접 당해 보지도 못했지만......그랳다고 하데요...그 빨갱이 한테 우리 할아버님은 무참이 살해 당해셨다는 이야기면....할아버지의 무용담을 수없이 많이 들으면서....그놈의 빨치산.....어떻게 해서든 물리쳐야된다는 의식이 뿌리 깊이 박혀 있지요......
한참 옛날로 갔다가 왔습니다. 요즈음 떡집에 잘 팔리는 인절미가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주는 어감이 좋아 떡 중에 손쉽기도 하고 좋아하기도 하는데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