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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돌핀세상 스크랩 봄비 / 박인수
사무국장(조기성) 추천 0 조회 65 13.03.14 10:29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봄비 - 박인수


이슬비 내리는 길을 걸으며 
봄비에 젖어서 길을 걸으며 
나혼자 쓸쓸히 
빗방울 소리에 
마음을 달래도 
 
외로운 가슴을 달랠 길 없네 
한없이 적시는 내 눈위에는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 
한없이 흐르네 
 
봄비 
나를 울려주는 봄비 
언제까지 내리려나 
마음마져 울려주네 
봄비 
 
외로운 가슴을 달랠 길 없네 
한없이 적시는 내 눈위에는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 
한없이 흐르네 
 
봄비가 내리네 
봄비가 내리네
 
 
 



 

투병중인 한국 최고의 소울가수 박인수


대중들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최고 가수의 처참한 현주소에 놀랐으며 가요 관계자들은 그의 생존소식에 경악했다. 누구보다 먼저 병실로 달려온 후배가 이경우였다. 그는 몰라보게 초췌해진 선배 박인수의 손을 부여잡고 한동안 오열했다.


가요계 왕따로 전락, 떠돌이 생활

두 사람의 인연은 1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0년대 말 ‘목화밭’등으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남성 듀오 ‘하사와 병장’의 리더 이경우에게 1960년대 중반부터 흑인 특유의 소울 곡들을 자유자재로 소화해냈던 박인수는 음악 영웅이었다.

듀오 해체 이후 재즈가수로 독립한 이경우는 한영애와 더불어 1989년 독집 ‘블루스맨’ 음반으로 가요계에 소울 블루스 열풍을 몰고 오며 주목 받았다. KBS 2TV ‘연예가 중계’에서 출연 요청이 왔다.

담당 PD 박성주는 ‘원조 격인 선배가수가 없냐’고 물어오자 이경우는 까까머리 속초고교 시절에 우상으로 숭배했던 박인수가 떠올랐다. ‘홀리데이 인 서울’에서 노래하던 박인수를 수소문 끝에 찾아내 함께 출연하면서 운명적인 만남은 시작됐다.

이때가 1989년 여름이었다. 이경우는 “처음 만나보니 돈에 대한 개념조차 없는 순수한 사람이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그러나 ‘박인수 돕기 운동’의 중심에서 땀을 흘리는 그로서도 박인수는 ‘피하고 싶은 대상’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주위 사람들은 ‘아름다운 만남’이라고 좋게 말하지만 그는 사실 최대 피해자였다. 방송출연 후 기행을 일삼던 박인수는 출연업소에서 해고당했다. 노래 외에는 살아가는 방법을 몰랐던 그는 일을 찾기보다는 후배들에게 민폐를 끼치기 시작했다.

이경우는 새벽 1~2시에 수도 없이 전화를 걸어 ‘갈 곳이 없다’고 하소연하는 선배가 안스러워 여관에서 재우고 용돈도 주곤 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희망 없는 관계가 답답하고 싫었다. 1994년 어느 날 MBC TV ‘주부가요열창’에 조영남과 함께 나간다며 박인수가 찾아왔다.

기쁜 마음으로 만나 목욕비를 쥐어주며 축하해 주었다. 그러나 조영남으로부터 “박인수가 방송에 나오기로 했는데 목욕탕에서 갑자기 쓰러져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에 입원했다”는 연락이 왔다.

당시 박인수는 ‘저혈당’으로 고생했으며 전성기 시절부터 대마초 등 마약의 유혹에 빠져 폐인에 가까운 상태였다.이후 박인수는 홀로 떠돌이 생활을 하며 가요계의 ‘왕따’로 전락했다.


살아가는 법 모르는 골치아픈 인생

이경우는 고향 속초로 내려가 수산물 가공공장과 재즈클럽을 운영하는 사업가로 변신했다. 어느 날 윤항기 목사가 운영하는 선교원에서 ‘박인수가 기거하고 있다’고 연락이 와 찾아갔다.

오 갈데 없는 후배를 돌보던 윤항기 목사도 성도들에게 ‘천 원만 달라’는 식으로 민폐를 끼치는 박인수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1998년 겨울 이경우가 운영하는 속초 블루노트 재즈클럽에 내복도 입지 않고 런닝샤츠 차림에 구두를 구겨 신고 가방하나 달랑 든 버버리 코트의 걸인이 나타났다. 박인수였다. 놀란 마음에 고향친구가 운영하는 주유소에 취직시켜 주었다.

하지만 고질병으로 정신이 온전치 않아 휘발류 차량에 경유를 넣는 등 말썽을 다반사로 일으키자 영어학원 강사자리를 주선했다. 영어는 유창했지만 문법을 모르고 말만 하니 또 문제였다.

별 수 없이 박인수의 명성을 기억하는 고향 후배의 야간업소에 소개했지만 웨이터 등에게 민폐를 끼치는 못된 버릇이 도져 쫓겨났다.

마지막으로 무의탁 노인들이 머무는 속초의 양로원에 집사자리를 잡아주었지만 허사였다. 이경우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통을 호소해 와 너무도 괴로웠었다”고 한숨을 내쉰다.

2000년 가을 박인수를 보살펴주었던 전도사에게 연락을 해 서울로 떠나 보낸 이후 소식이 끊어졌다. 2001년 서울로 올라온 이경우는 일산에 ‘하사와 병장 음치클리닉’사무실을 열었다. 처음에는 상계동을 염두에 뒀지만 일이 꼬여 일산에 사무실을 얻게 되었다.

그는 “인수형과 나는 전생의 어떤 연결 끈이 있는 것 같다. 정 목사가 전화를 했을 때 병원이 아닌 어디에 기거하고 있다고 했으면 가지 않았을 것이다. 인수형과는 그저 용돈 주고 연명이나 하도록 도와주는 관계 외에는 없었다. 그래서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빼어난 가창력, 라이브 무대의 황제로

본명이 백병종인 박인수는 흑인 노래인 소울의 맛을 제대로 알고 불렀던 가수였다.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도 “박인수는 한국 최초이자 최고의 소울 가수다. 영어 발음이 좋고 손을 비비며 오만가지 인상을 쓰며 노래 부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회고했다.

박인수는 한편의 소설 주인공처럼 불우한 인생과 가수로서의 영욕을 함께 맛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다. 1947년 9월 3일 평안북도 길주에서 태어나 6ㆍ25 전쟁 때 북에 남은 아버지와 형과 헤어지고 전북 정읍의 열차 안에서 어머니의 버림을 받고 7세 때 본의 아니게 고아가 됐다.

이후 고아원과 춘천의 미군부대를 2년 간 전전하다 춘천 초등학교 3학년에 입학했다. 미 8군 어린이 교육봉사회에서 미국인 토마스의 눈에 들어 1960년 켄터키로 입양됐다. 미국에서 중학교를 마치기도 전에 양부모와의 불화로 1963년 홀로 귀국했다.

미8군 무대에서 잡일을 하며 연명하던 그는 타고난 음악성과 미국에서 익힌 리듬감으로 노래실력을 인정 받으며 1965년부터 ‘키보이스’ ‘코끼리 브라더스’ ‘샤우터즈’ ‘데블즈’ ‘바보즈’등 수 많은 밴드들의 객원가수로 노래 생활을 시작했다.

1966년 키보이스와 청계천 3가 센추럴 호텔 나이트클럽에서 함께 활동하며 일반무대로 진출했고 1967년부터 신중현 사단에 합류하며 빼어난 가창력으로 라이브 무대의 황제로 통했다. 그는 “미국에서 흑인들이 모여 살던 지역에 살았기 때문에 그들의 본능적인 음악 감성이 몸에 뱄다”고 말한다.


‘봄비’ 폭발적 인기, 기행으로 스스로 자멸

그의 음반 녹음은 1969년 펄시스터즈의 ‘나팔바지’노래코러스로 참여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이후 1970년에 결성된 신중현 그룹 ‘퀘션스’의 데뷔앨범에 ‘봄비’를 취입, 폭발적인 대중적 인기를 거머쥐었다.

신중현곡 ‘봄비’는 그룹 ‘덩키스’의 보컬 이정화가 1969년 최초로 노래했다. 차분한 보컬로 노래한 이정화의 오리지널 ‘봄비’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폭발적인 소울 창법으로 노래하는 박인수가 신중현의 권유로 이 곡을 재취입하자 당시 대중들은 ‘이정화는 봄비고 박인수는 소낙비’라며 다이나믹한 박인수의 ‘봄비’에 열광했다.

이후 박인수는 소울과 사이키델릭 등 새로운 양식의 음악을 이 땅에 수혈하는 음악 전도사로 2장의 독집 앨범을 내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1975년 대마초사건은 그에게 활동금지의 족쇄를 채웠다. 진보적인 그의 독집 음반들은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발매가 금지됐다. 또 자유분방하고 감성적인 그는 공연을 밥 먹듯이 펑크 내는 등 어느 누구와도 화합하지 못했다.

1972년, 1982년 두 번의 결혼으로 1남 1녀를 두었지만 방랑벽이 심해 가족들로부터도 철저히 외면당했다.

해금이 된 1980년 박인수는 또 하나의 불후의 명곡 ‘당신은 별을 보고 울어보셨나요’라는 독집 음반과 1989년 재즈가수인 선배 김준의 도움으로 마지막 독집음반 ‘뭐라고 한마디 해야 할텐데’를 의욕적으로 발표했다. 하지만 상의도 없이 잠적해 버리는 기행으로 스스로 무덤을 팠다.

박인수는 음악적으로는 타의추종을 불허했던 최고 가수였지만 삶 자체는 고아 아닌 고아로 성장한 불우한 환경으로 황폐화 된 6ㆍ25 전쟁의 희생양이었다.

    -출처 한국일보-

이달 초 가수 송창식과 장사익, 인순이 씨가 함께 출연한 방송 콘서트를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서정성 짙은 가사도 좋았지만 땀을 뻘뻘 흘리며 혼신의 힘을 다해 노래를 부르는 거장들의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최근 한류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케이팝(K-pop·한국대중가요) 스타들도 좀 더 내공을 키우고, 연륜을 쌓으면 선배들의 뒤를 이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 사람 모두 한국 가요계를 대표하는 국민가수지만 이날 제 마음을 온전히 빼앗은 이는 장사익이었습니다. 그는 노점상, 가구점 점원, 카센터 직원, 독서실 총무 등 15가지 직업을 전전한 뒤 46세에 소리꾼이 됐다고 합니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한 목소리로 ‘찔레꽃’ ‘봄날은 간다’ ‘꽃구경’을 절규했지만 이날 제 마음을 울린 것은 ‘봄비’였습니다. 그의 절창에 마음을 빼앗겨 맥 놓고 하늘을 바라보는데 때마침 오랜 가뭄을 뚫고 봄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콩, 콩, 콩” 천창(天窓)을 때리는 소리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습니다. 마당에 나가 오는 비를 맞으며 장사익이 부른 박인수의 ‘봄비’를 조용히 불러보았습니다.

‘한없이 적시는 내 눈 위에는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 한없이 흐르네.’

[채널A 영상] 암 투병 ‘울랄라 세션’ 임윤택 “나도 일진이었어”

유년시절 비올때마다 듣던 그 노래

유년 시절 서울 광화문 인근 새문안교회 건너편에는 경기여고로 향하는 골목이 있었습니다. 양옆에는 학생들로 붐볐던 덕수제과, 프린스제과, 책을 싸게 팔던 숭문사, 메밀국수를 팔던 미진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습니다. 그 중간에 있던 작은 전파사에선 비가 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박인수의 ‘봄비’가 흘러나왔습니다. 비닐우산을 쓰고 버스를 기다리고 종종걸음으로 광화문 육교를 건너던 사람들은 ‘봄비’ 노래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면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곤 상념에 젖은 채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투병 중인 가수 박인수 씨

끊어질 듯 이어지고 이어질 듯 끊어지는 박인수의 목소리는 어린 나이에도 제 애간장을 녹였습니다. 1970년대 사람들은 그의 노래를 듣고 애수에 젖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 날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아주 우연한 기회에 그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경기 고양시 외곽에 있는 의탁할 곳 없는 할머니들을 모신 요양원에서였습니다. 집 근처에 중풍과 치매를 앓는 할머니들이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마을 사람들과 점심 한 끼 대접해 드리려고 찾아간 곳이었습니다.

10년 전 이맘때였던 것 같습니다. 겨우 차 한 대가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길을 따라가자 막다른 골목 끝에 컨테이너 박스를 연결한 작은 요양원이 나타났습니다. 나무 십자가가 걸려 있는 어두운 거실이 있었고 할머니 두세 명이 함께 기거하는 작은 방들이 나타났습니다. 반쯤 열려 있는 문틈으로 누워 계시는 할머니들이 보였습니다. 퀴퀴한 냄새가 났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요양원을 떠나려는 순간 원장님이 노래 한 곡만 듣고 가라며 우리를 붙잡았습니다. ‘요양원에서 웬 노래일까?’ 하며 의아해하고 있는데 원장님은 마지막 방으로 다가가더니 무언가 간절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초로의 남자가 몸집에 비해 큰 기타를 메고 나왔습니다. 반백의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고 허리마저 꾸부정했습니다. 우리 앞에 자리 잡은 그는 몇 번 목청을 가다듬더니 이윽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참 오랜만에 듣는 ‘봄비’였습니다.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고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봄비가 갑자기 어두운 거실에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움에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음색이 많이 탁해지긴 했지만 어린 시절 들었던 그 노래였습니다.

그가 내 놀란 표정을 보았을까. 아니 온몸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사람에게 관객의 표정이 뭐 중요하겠습니까. 이윽고 노래를 마친 그는 천천히 기타를 들고 어두운 복도를 지나 방문을 굳게 닫아걸었습니다. 박인수 씨는 젊음도, 돈도, 명예도 모든 것을 잃고 이곳에 왔다고 했습니다. 그는 세상과의 모든 인연을 끊고 위암과 고통스럽게 싸우고 있었습니다. 이날 요양원을 나서며 모진 세월을 이기고 제발 그가 살아남기를 바랐습니다.

투병중인 박인수씨 건강 되찾았으면

그런데 10년 동안 그를 잊고 지내다 장사익이 부른 ‘봄비’를 듣고 번쩍 정신이 든 거지요. 마음을 졸이며 지난주 요양원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젊은 여성이 전화를 받았습니다. “봄비 노래를 불렀던 박인수 씨가 아직 그곳에 계신가요?” 제 목소리가 유난히 떨렸습니다. “네, 그럼요. 이제 몸이 많이 좋아지셨어요.” ‘아! 그가 건강해졌구나!’ 저는 마음속으로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올봄에는 봄비가 많이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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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악 인생 50년 테너 박인수 교수

 

세계인이 가장 좋아하는 오페라는 과연 어떤 것일까.

아마도 ‘라보엠’이라는 말에 별로 토를 달지는 않을 터.

가난한 보헤미안 연인들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라보엠’의 백미는 단연 ‘그대의 찬 손’이다.

한 대목 잠시 음미해 본다.

‘그대의 조그만 손이 왜 이다지도 차가운가요! 내가 따뜻하게 녹여 줄게요~ 저는 시인입니다.

비록 가난하지만 마음만은 백만장자랍니다.

저는 꿈이 많답니다.

시와 노래의 아름다운 낭만적인 낙원에서 살지요.

그러나 갑자기 그대의 눈길이 내 마음을 흔들어 놨습니다.

자 이제 이름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이 아리아는 성악을 하는 테너 가수라면 누구나 ‘로망’으로 여기고 있다.

이 노래, 그러니까 오페라 ‘라보엠’에 100여회 출연,

‘그대의 찬 손’을 수없이 불러 ‘한국의 도밍고’,

‘전설의 스텐토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50인의 목소리)라는 별명이 붙은 성악가가 있다.

▲ 지난 4일 오전 서울 방배동 백석대학교 연구실에서 만난 테너 박인수 교수가 오는 10일 열릴 데뷔 50주년 기념공연에 대해 설명하면서 자신이 걸어온 음악인생을 회고하고 있다.
이언탁기자 utl@seoul.co.kr



1938년생, 우리 나이로 치면 74세임에도 불구하고 무대 위에서 쩌렁쩌렁하게 여전히 감동을 선사한다. 오는 10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데뷔 50주년 기념음악회를 연다.

성악가가 50주년을 기념한다는 것은 실로 드문 일이다. 그에 걸맞게 김성빈, 김성준, 김성진, 류정필, 박현재, 신동원, 양인준, 왕승원, 윤상준, 이병삼, 이상규, 이성민, 정규남, 정의근, 정호윤 등 내로라하는 테너 성악가 제자들이 참여해 스승의 50주년을 기념한다. 누굴까. 클래식과 가곡을 접목한 ‘향수’로 대중들에게도 유명한 테너 박인수 백석대학교 석좌교수가 주인공이다.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고 미국 줄리어드 스쿨과 줄리어드 오페라센터를 거쳐 미국과 캐나다, 남미와 유럽에서 주역 테너로서 성공을 거두었다. 20여년간 모교인 서울대에서 제자들을 양성했고 300여회의 오페라 주역과 2000회를 훌쩍 넘는 콘서트로 오늘날까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하여 우리나라 테너 음악계의 큰 스승으로 여겨진다.

소낙비가 내리던 지난 4일 오전 서울 방배동 백석대학교 연구실에서 박 교수를 만났다. 50주년 기념 음악회 얘기부터 나왔다.

“그러니까 1962년 대학교 다닐 때였지요. 슈만의 연가곡 ‘시인의 사랑’으로 첫 독창회를 했습니다. 낭만주의 예술가곡의 시대를 연 슈만의 사랑과 서정적 선율이 돋보이는 노래를 불렀던 당시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참 좋은 노래입니다.”

▲ 테너 박인수 교수



50주년을 맞는 소감을 물었다. 편안한 웃음으로 대답한다.

“구약성서에 ‘희년’(禧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50년마다 돌아오는 것이지요. 말 그대로 복되고 기쁩니다. 인생에 채무가 있다면 그것을 청산하는 홀가분한 마음도 있고요.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쌓은 업보를 내려놓는 기분입니다. 아울러 노래 인생 50년을 맞이하면서 제자들과 같이 무대에 선다는 것 또한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이번 공연에 대한 설명이 더 이어진다. 모두 1, 2, 3부로 나뉘어지는데 1부에서는 박 교수의 제자들이 나와 ‘그대의 찬 손’, ‘별은 빛나건만’, ‘남몰래 흐르는 눈물’ 등을 부른다. 2부에서는 박 교수가 독창으로 ‘클레멘타인’, ‘메기의 추억’, ‘아 목동아’ 등을 부른다. 3부에서는 제자들과 함께 ‘그리운 금강산’, ‘향수’, ‘새타령’, ‘진도아리랑’ 등 우리의 가곡과 민요를 열창한다. 2년 전부터 제자들이 앞장서서 준비한 무대여서 성악계에서는 큰 잔치로 이미 소문 나 있다. 그는 제자들에게 각별한 사랑을 베푼다.

“성악 하는 사람들은 원래 나이 50대면 끝난다고 하지요. 하지만 저는 70이 넘었는데도 노래를 하잖아요. 벨칸토 창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거기에다 나름대로 터득한 플러스알파까지 제자들에게 가르칩니다. 제 나이 60대에 많은 고민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다들(제자) 노래를 잘합니다.”

그는 순수와 대중음악의 벽을 허물면서 진정한 화합의 목소리로 주목을 받아 왔다. 까닭에 지금도 후학 양성과 끊임없는 콘서트로 노익장을 과시한다. ‘테너 박인수’ 하면 생각나는 것이 국민가요 ‘향수’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1989년 당시 파격적으로 대중 가수 이동원씨와 함께 불렀다.

“그 노래를 불러 잃은 것도 많고 얻은 것도 많습니다. 당시 이동원씨와는 일면식도 없었는데 재즈하는 김준의 소개로 만났지요. 이동원씨가 정지용의 시집을 갖고 와서 ‘향수’를 처음 접했습니다. 시가 너무 좋더군요. 이미 김희갑씨가 작곡을 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바로 녹음하자고 승낙했습니다.”

하지만 의욕과는 달리 오페라 가수가 대중가수와 함께 음반을 냈다는 이유로 비난과 질타를 받았다. 당시 몸담고 있던 국립오페라단에서 ‘성악을 모독했다’는 말까지 들었다. 온갖 시련을 견디다 못해 결국 그는 국립오페라단을 제 발로 걸어나와야 했다. 그런 과정에서 ‘향수’ 음반이 1년 만에 130만장이 팔리는 흥행기록을 세우면서 그의 이름을 대중들에게 확실히 각인시켰다.

“지금도 전혀 후회하지 않습니다. ‘향수’는 좋은 시이자 훌륭한 노래입니다. 문학적으로 보나 음악적으로 보나 가치 있는 일이라고 판단했지요. 저 개인적으로 ‘향수’를 부르고 나서 얻은 것이 훨씬 많다고 생각합니다. 성악가로서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아졌잖아요(웃음).”

그는 음악의 본질에 대해 “100% 듣는 사람 위주로 가야 한다. 마음에 감흥이나 즐거움, 감동을 받는 음악이 돼야 존재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향수’ 이후 그는 가수 이문세, 안치환 등과 함께 노래를 하고 음반을 냈다. 클래식을 대중화시키는 일, 많은 사람들에게 음악을 듣게 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기꺼이 대중가수들과 합류했던 것.

화제를 과거로 돌렸다. 어떻게 해서 성악을 했을까. 그러자 “성악은 첫 번째도 소리요, 두 번째도 소리, 세 번째도 소리”라고 강조하면서 잠시 회고한다.

“아버지가 노래를 아주 잘하셨습니다. 트로트, 발라드, 이탈리아 민요까지 불렀어요. 저도 따라 불렀는데 ‘울려고 내가 왔던가’란 노래는 지금도 생각납니다. 이것저것 부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노래가 좋아지더군요. 초등학교 5학년 때 합창반 오디션도 보고 중학교 때에는 교회 성가대에서 활동했지요. 고등학교 때 멋과 낭만이 있는 마도로스 영화를 감상하고 난 뒤 친구와 함께 마도로스의 꿈을 실현시키려고 부산으로 갔습니다.”

노래와는 담을 쌓으려고 했지만 ‘박인수는 노래를 해야 한다.’는 주변의 권유가 빗발쳤다. 결국 마도로스의 꿈을 접고 1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노래 레슨을 받아 서울대 음대에 진학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순탄치 않았다.

1967년 대학을 졸업할 무렵 국립오페라단에서 오페라 ‘마탄의 사수’ 주인공으로 출연했으나 너무 잘하려고 욕심을 내는 바람에 크게 실패했다. 방송과 여러 신문에서 혹평이 쏟아졌다. 음악을 그만둘 생각으로 전 재산을 투자해 간장 대리점을 차렸다. 장사가 신통치 않자 시장통에 음식점을 냈다. 그것도 얼마 못 갔다. 돼지와 양송이도 길러봤지만 사업과는 인연이 없었다. 그러다가 고교 시절 친구를 만나 고민을 털어놓은 것이 계기가 돼 리어카 하나를 사서 서울 신촌 뒷골목에서 동생과 함께 포장마차를 운영했다. 찾아오는 손님이 없어 동생과 함께 술 마시는 날이 더 많았다.

“언젠가 리어카를 장만해 준 친구가 찾아왔어요. 술 한잔 하더니 ‘야, 너는 음악해야 돼. 포장마차 장사하기엔 너무 아까워’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75만원이 든 통장을 주더라고요. 친구의 진심어린 권유로 용기를 얻고 1969년 시민회관(현재 서울시의회)에서 라보엠을 공연했습니다. 예상밖에 대박을 터뜨렸지요. 혹독하게 비판했던 언론에서도 찬사가 쏟아졌습니다. 다음 해에 미국에서 초청을 받는 등 사실상 새로운 음악인생을 시작했지요.”

이후 미국과 캐나다, 남미 등 순회공연에서 오페라 주인공을 맡으면서 이름을 널리 알렸다. 아울러 국내에서는 ‘박인수와 음악친구들’이라는 타이틀로 매년 200회의 공연을 하면서 대중들과 함께했다.

“성악은 조물주가 준 훌륭한 악기입니다. 잘 사용하면 최고가 되고 잘못하면 악성이 나오지요.”

인터뷰를 마치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우리의 민요와 판소리를 오페라에 접목시켜 세계화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대의 찬 손’이 아니라 ‘그대의 따뜻한 손’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선임기자 km@seoul.co.kr

■ 박인수 교수는

오페라 ‘라보엠’ 주인공만 100회 넘어… ‘향수’로 대중적 인기

193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동고를 나와 서울대 음대를 졸업했다. 이후 미 뉴욕 줄리어드 음대, 맨해튼 음악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서울대 음대 성악과 교수를 지낸 뒤 현재 백석대학교 석좌교수로 있다. 1962년 슈만의 ‘시인의 사랑’으로 데뷔했으며 1967년 국립오페라단 ‘마탄의 사수’ 주인공을 맡아 열연했으나 쏟아지는 혹평을 견디다 못해 간장 대리점, 음식점, 포장마차 등의 사업을 했다.

1969년 서울 시민회관에서 라보엠 공연으로 재기했다. 이후 현재까지 라보엠 주인공으로만 100여회 출연했다.

1989년 성악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대중 가수 이동원과 함께 ‘향수’를 불러 인기를 끌었다. 7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매년 200여회의 공연을 할 만큼 식지 않는 열정을 과시하고 있다. 1997년 문화체육부 한복애용자 표창 대상, 2011년 은관문화훈장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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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03.18 17:48

    첫댓글 봄 비의 추억을 다시 떠오르게 하는군요. 유익한 정보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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