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수필 문학(文學)을 정립한 국가무형문화재
운정 윤재천 교수
김홍은
윤재천 교수님의 존함을 알게 된 것은 도서관에서 그분의 수필을 읽으면서였다. 그렇게 작품 속에서 남다른 사유하는 감성으로 느껴와 이끌리게 되었다.
윤 교수님을 직접 뵙게 된 인연은 1993년 10월 8일 가을이었다. 당시 나는 ‘충북수필문학회’의 책임을 맡고 있을 때다. 교수님을 모셔서 제1회 충북수필문학회 세미나를 개최하여, 대학에서 수필문학 강연을 처음 들었다.
<포도주 같은 글을 쓰자 >라는 주제를 가지고 회원들과 많은 수필지망생들에게 감동을 주셨다. 여울물이 물결을 이루는 것처럼 잔잔한 소리를 내며 흐르듯이 조용조용히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좋은 수필을 쓸려면 포도를 따서 포도주를 담는 것처럼 생각해라.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나면 포도가 푹 곰삭아 자연히 맛좋은 포도주가 되는 것같이 소재를 갖고, 오래 머릿속에 담아두고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생각을 하고난 후 써라. 좋은 수필을 쓰는 방법은 담아놓은 오래된 포도주와 다르지 않다.” 며 수 십 년 묵은 포도주에다 비유를 시켜 주셨다. 많은 세월이 지났지만 그 말씀은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윤 교수님과의 두 번째 뵙게 됨은 1995년 7월 28일 ‘제1회 한국수필가협회 해외 세미나’ 때다. 사진을 보면 ‘한국수필 세미나’ 때의 일이 생각이 난다. 조경희회장님을 비롯하여 이숙사무국장, 윤재천교수, 허세욱교수, 이현복교수, 김진영수필가, 한국수필문학회원인 주영준, 허정자, 이정심 수필가 등, 현대수필의 이옥자, 임승렬 수필가 등 20명이 9박10일로 중국여행을 떠났다. 세미나 후 북경, 백두산, 용정, 하얼빈, 홍콩, 도문, 만리장성, 서호, 진시황 능, 계림 등지를 여행으로 즐거움을 나누던 지난세월만이 오랜 추억으로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제1회 한국수필가협회 해외 세미나-
요즘 내가 좋아하는 수필집은 ‘청바지와 나’이다. 이 책은 내 외로움을 달래주는 친구이기도 하고 삶의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기도 하다. 비가 오는 날이나 마음이 허전할 때는 <청바지와 나>라는 수필집을 꺼내 든다. 목차를 펴들고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수필제목을 찾아 읽으면 마음이 편안해 진다. 글을 읽어 가다보면 어느새 운정 윤재천 교수님을 곁에 모시고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고독이 아름다운 계절’ '꽃의 비밀' '손바닥으로 가린 하늘' ‘구름카페’ ‘눈물의 미학’ ‘시련은 삶의 한마디일 뿐’ ‘사랑의 묘목’ ‘침묵의 소리’ ‘사랑은 고귀한 생명체’ ‘인연의 늪’ ‘수필은’ ‘촛불’ ‘청바지와 나' 등을 읽는다.
윤 교수님의 글을 내가 좋아하는 이유는 첫째로는 순수한 문학적 향기가 은은하게 배어나와 자신도 모르게 매료되고 만다. 거기다가 군더더기가 없어서 깊은 산사를 향하는 조용한 숲속에 든 편안한 느낌을 갖게 한다. 때로는 한겨울에 새벽의 눈길을 홀로 뚜벅 뚜벅 걸어가는 느낌을 일게도 한다. 둘째로는 어떤 살아가는 외로운 인생의 길을 바르게 살아가도록 철학을 들려주고 있어서다.
누구나가 글을 읽다보면, 어느새 고집스런 인생에서 빠져나와 나목이 되어 있는 자연 속에 잠들게 하거나, 길 잃은 한 마리의 사슴이 되어 백설이 가득한 깊은 산에서 사방을 분별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자신을 흔들어 깨워준다.
그래서 윤교수님의 글을 읽고 나면 새로운 각오를 하게 만든다.
1. 운정(雲亭) 윤재천교수의 수필문학(文學)
윤재천 교수님은 수필사관이 뚜렷하다. 우리는 이제까지 붓 가는 대로 쓰는 게 수필이라고들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적인 냉철함을 전제로 한 사고와 관찰의 문학으로 운정은 다음과 같이 들려주고 있다.
‘문학은 언어를 수단으로 하고, 언어는 인간을 새롭게 만들며 완성시킨다. 감동적인 수필은 단순한 서정이나 서시를 담은 그릇이 아니라, 한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의 원천이며, 그 주체가 된다. 표류하고 있는 시대와 분별력을 잃고 흔들리고 있는 인간의 심성을 제 위치에 고정시키고 가야할 방향을 밟고 가도록 안내할 수 있을 때, 문학작품은 작품 이상의 존재적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런 수필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정리했던 것을 모은 이론서이다.
수필은 그 특성상 지적인 냉철함을 전제로 한 사고와 관찰의 문학으로 발전할 수 있는 소양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것이 작품 표면에 직접 노출될 경우, 문학으로서의 싱그러움과 여유, 포근함을 잃고 반감시킬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유머와 위트로 윤색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소설적 면도 과감히 수용해야 하고, 형식에 있어서도 변화를 가해야만 한다.
사실과 자유로운 구성, 실험정신을 통한 면모의 쇄신만이 새로운 시대 현실에 적응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 될 수 있다.
그동안 수필문학은 무분별한 문학성으로 단순히 붓 가는 대로 쓰는 글로만 알고, 그저 감동이 없는 서정에 지나치는 수필로 그저 일상의 경험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수필은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과, 분별력, 흔들리고 있는 인간의 심성, 가야할 방향을 안내할 수 있을 때, 문학작품의 의미를 갖게 된다고 하였다. 문학으로서의 싱그러움과 여유, 포근함, 유머와 위트를 문장에 담아내야 함을 들려주고 있다. 감성적(感性的) 서정성으로만 일관하려는 태도는 지양되어야한다며 다양한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개인적 기대를 만족시킬 수 있는 글은 이미 전형화 된 진부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모색을 통하여 새롭게 창조되어야할 때 문학의 사명이며 작가의 책임임을 주장하였다.
‘수필은 작가와 독자가 혼연일체를 이루어 인간의 진실을 구명하기에 적합한 인간문학(人間文學)이라며 문학의 존재이유가 인간과 삶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라면 그 목적에 가장 접근된 것이 수필이라고 한다. 문학작품을 통하여 작가가 적극적으로 시대의 아픔을 고발하고 치유하는 주제가 될 때 인간사회는 타락의 속도를 늦추게 되고, 자정능력을 확보하게 된다고 피력한다.
인간문학이란 인간을 사랑하는 문학 작업이다. 인간의 삶을 가장 사유적 표현으로 정신사상을 일깨워주며 사회를 사랑하는 이들이 바로 수필가로, 작가는 사회를 형성하는 모든 문화를 깊이 알아야 그래야 자신의 작품으로 인간을 즐겁게 해줄 수 있을 것임을 시사한다.
2. 운정의 수필문학 이론 정립(定立)
1) 수필론
운정의 저서(수필론)를 보면 ‘문학은 감동을 목표로 하고 있어 그 감동을 통해 궁극적으로 획득하려는 것은 가치 있는 자유를 경험 할 수 없는 문학 작품은 작품으로서의 가치가 없다.’ 라며 수필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하였다. 감동적인 수필은 단순한 자신의 서정이나 서사를 담은 그릇이 아니라, 시대를 횡단하며 자신과의 거리감을 유지한 채 인간을 예술적으로 형상화 시킬 수 있는 힘의 원천이 주제가 되어야 한다며 창작예술의 수필이론을 이렇게 정립하여 놓았다.
나의수필론, 새롭게 시도하는 아방가르드, 수심(隨心)으로 세상보기, 수필에 자유의 날개를 달자. 수필은 왜 변화가 필요한가. 시대에 맞는 수필, 정체(停滯)에서 접맥(接脈)으로, 퓨전수필, ‘수필의 날’ 제정, 명수필(名隨筆) 바로알기로 하여 모두 78편으로 수필론을 이론적으로 알기 쉽고 완벽하게 담아놓았다.
그동안 수필문학은 다양하게 이론이 서 있기는 하였지만 350명의 작가들이 말하는 수필에 대한 나름대로의 의미를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던 생각을 윤재천 교수님은 그림과 함께 수화(隨畵)로 엮어놓았다. 수필공부를 하는 사람들에게 정립된 수필이란 어떤 글이며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다각적으로 사유하게 하고 있다. 그 예로 윤교수님의 글을 인용하여 보았다.
2) 수필은
* 수필은 인간학
인간내면의 심적 나상을 자신만의 감성으로 그려내는 한 폭의 수채화.
자연이 지닌 온갖 색을 혼합해 만들어 내는 다양성의 보고.
한 편의 수필에는 자신의 철학과 사유를 통해 현재와 과거의 행적, 미래를 예시하는 메시지가 담겨있어야.
* 수필은 노정(路程)의 문학
나만의 세계를 묵묵히 열어야 하는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외로운 길.
긍정적, 적극적 자세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밀고나가 새로운 글의 세계를 열어 가야. 진실을 잃지 않는 발전적 변화의 모색은 수필가가 추구해야할 진정한 세계.
진정한 글은 완성을 향해가는 노종이 있을 뿐.
* 수필은 백인백색(百人百色)
작가자신의 독창성을 살려야. 무지개가 일곱가지 색으로 이루어지듯 다양성이 모여야.
수필쓰기의 구성이나 소재와 주제에 대해 디테일한 가의를 하지 않는 것은 선험先驗에 구애 없이 열린 마음으로 글을 쓰려는 의도.
천신만고 끝에 얻어진 자신만의 작법과 노하우가 천재성으로 이어져 타인의 글과 비교될 수 없는 지니게 돼.
* 수필은 창작문학
사실을 뿌리로 서정의 꽃과 열매를 맺는 문학.
함축하고 묘사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형상화하여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내야.
* 수필은 풍류風流문학
같을 것을 보아도 자신만의 심안心眼으로 마음의 움직임을 진솔하게 따라가는 글.
고택古宅의 누마루에 걸터앉아 그 집의 생성연대를 가늠하기보다 살았던 사람의 숨결을 귀담아 들어야.
한 칸의 작은 방을 보고 그 방안에서 이루어졌던 담론과 애환에서 역사의 흐름을 느끼고 헤아려야.
* 수필은 총천연색
금기禁忌가 없는 문학.
고정된 사고에서 벗어나 변화를 받아들이고 열린 사고로 다의성을 인정해야. 사람의 얼굴이 모두 다르듯이 사고가 다름을 인정해야.
흰색, 청색, 황색이기도 하고 여러 색이 섞이기도 하는 수필. 다양한 색상은 자연이 우리에게 보내는 또 다른 소텅의 방식, 그것을 광범위하게 수용하고 해석해야.
수필은 가을 산처럼 모든 것을 포용하고 찬란한 빛깔로 이루어져야.
3) 퓨전수필을 말하다
-아방가르드 글쓰기-
윤교수님은 일상적 글쓰기를 거부한 낯설게 하기의 새로운 시각으로 글감을 보고, 맛깔난 언어로 다듬는 미래적 수필의 지침서를 펴냈다. 내용의 목차를 살펴 몇 작품 속에서 부분적 문장 요지를 살펴보았다.
<고정관념,수사적 기법으로>는, 수필은 시의 서정성인 면모에서 소설의 사상성, 희곡의 연출기법까지 동원해 자유롭고 유연하게 구사 할 수 있는-융통성이 요구되는 문학이다. 작가는 근원적이면서 영원불변한 사실을 모아 쟁여놓은 창고의 소유자가 되어야 새롭고 풍부한 정보를 끊임없이 보급할 수가 있다. 고정된 사실만 언급하는 작가는 독자를 식상케 하여 본연의 위치에서 밀려나게 된다며, 수필은 다양한 제재를 발굴해 구속되지 않는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포용의 용기(容器)로 통찰력과 달관, 통합적 성찰을 전제로 할 때 도달 가능한 세계임을 알게 한다.
<수심(隨心)으로 세상보기>는, 무엇이든 처음 시도는 어려움이 따른 경험으로 윤교수님의 수필사랑의 발자취가 담겨져 있으며, 씨앗을 뿌리는 사람은 열매를 걱정하지 않지만, 오직 맑고 깨끗해지려는 수심(隨心)으로 바라볼 뿐으로 시가 언어의 집이라면 수필은 마음의 집이라 하였다.
<수필에 금기란 없다>에는, 수필은 정서적 체험의 결과로 획득된 것이어야 한다. 비록 일상적인 제재를 글감으로 했어도 작가의 신선한 안목과 에리한 통찰력, 독자의 마음을 그는 흡인력이 전제되지 않았다면 수필이 아닌 잡문으로 보아야 한다. 수필의 발전을 위해서는 좋은 작품이 양산되어 독자의 관심을 모아야 한다. 이를 위해 옥석을 가려 ‘옥’에 해당하는 것은 수필이라 칭하고, 그렇지 못한 ‘석’에 해당되는 것은 잡문이라 해야 한다. 그 기준은 문학성이 결핍된 작품을 ‘잡문’이라 칭하고 그런 작품을 발표하는 작가를 ‘잡문가’‘잡문인’이라 하면 수필문학이 발전의 계기가 될 수 있다며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제기한다.
<어느 노맨티스트의 고백>은 ‘지금은 한없이 가볍다. 50여 년 동안 5,6백 편의 수필에 온갖 사유와 비판, 갈채와 질시, 마음과 사랑까지도 모두 실어 보낸 이제, 그 가벼움은 나를 참으로
자유롭게 한다. 각인각색의 명제 속에서, 문학적 충일과 고백이라는 백설을 거듭하며, 예측할 수 없는 고통과 환희의 도정을 지나, 지금 이 자리 서 있다. 문학은 한낱 과정일 뿐, 그 지향점이란 현실에서는 존재 할 수 없는 환상의 신기루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오로지 수필만을 위한 노력에 모든 수필가들을 놀라게 한다.
<퓨전수필>은 수필도 새로운 지평을 열어야 한다며 퓨전수필을 기점으로 메타수필, 접목수필, 마당수필, 테마수필, 웰빙시대에 맞는 작품을 써야 한다며 수필엔 금기와 정석이 없어 논리적, 비논리적, 상상력이 있는 수필을 쓰되 논리적인 글을 써야 철학성에 가까운 글이 되며 문학성과 개성있는 작품을 쓸수 있음을 제기하였다.
골방수필. 다(多)문화시대의 장르수필. 마당수필. 마당수필 낭송회. 문학의 뿌리 이미지. 뮤지컬수필. 변화와 모색. 상상력으로 진실을 말하는 힘. 새롭게 시도되는 아방가르드. 수필과 인문학. 수필의 문제점. 수필의 문화성. 수필의 수사적 디자인. 수필의 시의성(時宜性). 수필의 정체성. 수필이 시와 만났을 때. 수필적 다다이즘. 시심(詩心)과 수심(隨心). 실험수필. 의식의 변화. 정답이 없는 시대. 정체(停滯)에서 접맥(接脈)으로. 좋은 수필.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국수필, 어제와 오늘. 해체와 융합. 황희의 미소. 구름카페. 또한의 신화. 바람의 정체. 어느 노맨티스트의 고백. 오월송(五月頌). 청바지와 나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3. 운정의 남다른 수필문학성
1) 문장의 수사적 표현
문장의 수사적 표현의 구성을 보면, 미적 선율을 그려내는 하나의 가냘픈 선(線)을 연상케 하기도 하고 때로는 굳건하고 남성적이면서도 일정한 방향을 제시하는 직선적(直線的)인 감성을 연상케도 한다.
운정의 사색은 때로는 굵고 짧은 직선이 되었다가, 어느 때는 굴곡을 이루면서 활동적으로 이어지는 유동적인 여러 갈래의 방향으로 제시하는 소통을 펼쳐 놓기도 한다. 반면 아주 부드러우며 우아한 곡선의 여성적인 감각을 자아내기도 한다.
<참사랑>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동안 몇 사람을 자기 존재이상으로 사랑하고 아끼며 살 수 있을까. 의무로 이어진 사랑이 아니고,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 사랑이라면 그것을 견디고 지키는 방법은 약속 하나밖에 없다.
약속은 지켜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지켜지지 않는 약속은 애초부터 의미 없는 것이기에, 그것은 참사랑이 아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한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이다.
이것은 한 인간으로서 또 하나의 인간에게 전하는 자기 맹세이며, 남의 눈에 들어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영원히 자기 스스로 지켜나가는 진실의 실천이다.
사랑은 온유(溫柔)한 것이나 때로는 참혹하리만큼 고통도 동반되고, 그 진실의 실천을 위해서는 자기가 지닌 모든 것을 버리고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사랑은 소중하게 지켜나가는 데서 가치를 지니고 의미를 더한다.
그을음이 일지 않는 사랑 - 그것은 순수한 열정에서만이 가능한 것이고, 혼신을 다해 지켜나갈 때만이 이루어질 수 있다.
무엇인가를 손에 쥐어주고 싶으나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 그를 안타까워하는 것이 진정한 마음이며 참사랑의 온기(溫氣)가 아닐까.
사람에 따라서는 사랑을 빙자해 명예와 물질적 풍요를 쟁취하는 사람도 있고, 그것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버리는 사람도 있다. 어느 것이 더 현명하고 인간다운 결단인가에 대해, 한 마디로 단정 짓기는 어렵다.
나는 전자보다는 후자에 마음이 쏠린다. ’
문장의 형태를 보면 짜임새가 빈틈없이 수목을 규칙적으로 전정하여 기학적으로 다듬어놓은 듯 맛깔나게 표현을 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어느 때는 자연적이고도 형태적인 곡선으로 불규칙 적인 구성으로 자연경관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그려내어 독자들의 마음을 자유자재로 하늘로 바다로 평야로 산으로 이끌고 가기도 한다.
‘사랑은 서로의 가슴에 드리운 상대의 무게를 부담스러워 하지 않으며, 가볍게 하려고 꾀를 피우지 않을 때만이 가능하다. 이러한 간절함이 어느 한쪽의 것으로만 남는 경우도 있지만, 이 순간에도 후회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약속을 하고 어느 한쪽이 어겼다고 해서, 지킨 다른 한쪽마저 약속을 어긴 것은 아닌 것처럼….
사랑은 스스로의 힘으로 서지 못할 순간까지도 지켜져야 하고,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못해 빈손을 허공에 대고 휘저을 수 있을 때까지도 지속되어야 한다.
나는 그런 사랑만이 부끄럽지 않은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너를 위하여 그 약속을 끝까지 지켜 나갈 것이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수없는 내면의 갈등을 겪으면서 살아간다. 인생이란 살아가다 보면 인간과 부딪히게 되고 다양한 활동으로 갈등을 하는 순간들이 많다. 그 가운데서도 믿음은 이성적 사랑의 중요성이 차지한다. 값진 사랑은 자연적인 도덕률을 지키며 살아감이다. 사랑은 헌신적인 사랑일 때 아름다움의 사랑임을 들려준다. 운정의 끝없는 사랑의 가치의미를 되새김하게 한다.
<청바지>
(-----생략)
청바지와 캐주얼을 즐겨 입게 된 것은 지나치리만큼 형식에 매달려 규격화된 채 살아온 내 젊은 날에 대한 일종의 반란이거나, 보상심리에 기인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눈치 보는 일에서 벗어나 마음을 비우고 살고 싶다. 아무 데나 주저앉아 하늘의 별을 헤아리고, 흐르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돌아갈 수 없는 시간들이 모여 사는 곳을 향해 힘껏 이름이라도 불러보기 위해서는 청바지가 제격이다.
넥타이를 매고 후줄근한 양복을 걸친 채 한강변을 거니는 초라한 형상보다, 청바지에 남방을 받쳐 입고 시선을 멀리 던지며 사색에 젖어 있는 모습이 더 여유롭다.
청바지는 나를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탈출의 동반자요, 동조자다.
옷은 어느 면에서 보면 자신의 열등한 국면을 가리는 수단이며 방편이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살 수는 없지만, 지나치게 신경 쓰는 것은 소심(小心)함을 밖으로 드러내는 소치다. 그 외에는 일시적 가치를 지닌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언제나 벗어 던지고 나면 인연이 끊기고 마는 것이다. 오랫동안 함께 할 수 있는, 함께 해야 하도록 운명 지워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겉치레의 노예가 되는 일은 자존심을 스스로 손상시키는 일이다.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현재의 처지와 나이가 아니고, 진취적 자세로 자신의 삶을 주도하는 자세다.
명예니 권세니 하는 것은 한낱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 장식품은 말 그대로 장식품일 뿐 본체는 아니다. 본체와 분리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것은 애착의 산물이다.
장식품은 진귀한 것이라 해도 체온이 없는 물질에 지나지 않는다.
청바지는 값비싼 고급 상품이 아니다. 서양 노동자들이 즐겨 입는 작업복이다. 나는 나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사회적 통념의 구속을 비교적 적게 받는 청바지와 간단한 남방차림을 일상복으로 애용하고 있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옷이 주는 고통을 감내하는 일을 반복할 필요를 느끼지 않아, 오늘도 나는 청바지 차림으로 집을 나선다.
누구 앞에서도 어색하거나 부끄럽지 않다. 상대에게 결례를 범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심리적 부담을 덜게 하므로, 피곤한 사람에게 청량제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이런 생각도 삶의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벗어던지고 나면 누구의 것인지도 알 수 없는 것에 마음을 빼앗긴다는 것이 허망한 일임을 깨닫게 된다.
황량한 벌판 끝에서 석양(夕陽)을 등진 채 말을 타고 언덕을 넘어오던 사나이와, 누렇게 익은 곡식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흘리는 농부처럼 노년을 내 것으로 소유하고 싶어, 오늘도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남자’를 꿈꾸며 내 길을 걸어가고 있다.
젊은 노년으로 청바지처럼 질긴 - 구김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살고 싶다.
운정의 작품을 새로운 관점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면 하나하나의 문장표현이 깊은 의미를 던져 주고 있다.
개성을 드러내는 옷차림에서 부터 격식을 갖추기보다는 자유롭게 자신의 정신을 표현하는 것이 더 멋스럽다. 늘 젊음과 자유의 표상으로 여유로움을 안겨다 준다. 누가 미수(米壽)의 연세라 믿겠는가. 몸매에서 발끝까지 흐트러짐 없는 문인의 멋을 상징하게 하는 청바지 차림은 구김이 없으시다. 한국의 수필문학의 문인다운 문질빈빈(文質彬彬)의 표상으로 뚜벅 뚜벅 걸어가는 청운(靑雲)의 몸짓이 고고하시다.
2) 새로운 질감(質感)의 문장
운정의 글을 읽다보면 남다른 생각과 새로운 문장의 질감을 느끼게 된다. 어떤 묘사로부터 물체의 표면이 심미성의 빛을 받았을 적에 반사적으로 생겨나는 명암의 윤색이 잘 배합되어 시각적으로 느껴지는 감각적인 언어미의 독특한 질감을 가져다주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문장의 구성에서는 독자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색채감을 편안하게 안겨다준다. 표현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온화하고 친근감이 넘치는 봄날의 파란 들판을 사뿐사뿐 걷는 듯한, 느낌만큼이나 포근하다. 문장을 지적(知的)이며, 깊이가 있어 쾌감은 울창한 침엽수림의 숲속을 거니는 기분이게 한다.
<구름이 사는 카페>
(---생략)
늘 나를 내려다보면서 내 짙은 외로움을 삭이는 일에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구름 - 구름은 내게 더없이 소중한 존재이며,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던, 같은 구름으로만 보였다.
구름에 매료되고 동화되기 시작한 것은 1989년 모스코바 공항에 도착해서 트랩을 내려오며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부터다. 영원히 와볼 수 없을 곳이라 생각했던 나라에 왔는데, 구름은 이미 먼저 와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버릇처럼 바라본 하늘에서 조금 슬픈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던 그 구름의 표정,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인지 다그쳐 물을 수는 없었지만, 무슨 말을 내게 하고 싶어 했다.
그 땅에도 구름이 올 수 있고, 코발트 빛깔의 하늘이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그곳을 여행하는 동안, 나는 줄곧 구름을 바라보는 일에만 열중했다. 보고 봐도 싫증이 나지 않아서다.
내가 아호를 ‘운정雲亭’ - 구름 ‘운’자에 정자 ‘정亭’자로 하고, ‘구름카페’의 주인이 되고 싶다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넓은 창과 길게 드리운 커튼, 고갱의 그림이 원시의 향수를 느끼게 하고, 무딘 첼로의 음률이 영혼 깊숙이 파고들어 인간의 짙은 향내를 느끼게 하는 곳에서, 구름과 마주하고 싶어 붙여진 이름이고 소망이다.
이것은 이미 내 마음 안에 마련되어 있는 공간이기에, 소망이 아니고 현실로서의 카페다. 어려움 속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내 마음 안에 그런 장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 삶의 많은 부분이 구름과 다르지 않고, 여생 동안 그와의 동행을 거부할 의사가 없다.
아무 말 없이 흘러가는 대로 가다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그리움을 삭이고, 분노를 빛과 소리로 분출하는 구름, 나는 비가 내리거나 번개와 천둥이 주변을 어지럽힐 때면 그의 표정을 살피며 한동안 카페의 넓은 창을 통해 서 있곤 한다. 울음이나 감정의 폭발을 바라보는 것이 사랑의 표현이라고 믿어서다.
훗날, 가능만 하면 나는 구름으로 태어나고 싶다.
내가 그동안 쓴 글이나 누군가와 나누었던 말, 상대를 의식하며 평생 동안 했던 강의까지도 구름과 같은 존재로 여기고 싶다.
그런 것들이 어떻게 인식되고, 어떤 평가를 받을지는 상관하고 싶지 않다. 이미 나를 떠나 허공에 흩어진 것들이다. 그들이 비가 되어 목마른 생명의 목을 적실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아도 어쩔 도리가 없다. 분노도 혼자만의 답답함이고 안타까움일 뿐, 그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지 않는다.
나는 지금까지 구름처럼 살아온 것같이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다. 누군가를 찾아 동행을 권하지 않고, 겸허한 마음으로 만족하며 살려고 한다.
맑은 날이면 밝은 차림으로 길을 나서서 갈 수 있는 데까지 유유히 산책하고, 물을 필요로 하는 생명이 있으면 어디선가 물을 가져와 생명을 살리고 싶다. 그러다 지치면 카페로 돌아와 조용히 쉬고 싶다.
어느 정도 피곤이 풀리면 그 자리에 장미 한 송이만 가져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뻐하는 마음 연약한 사람들을 초대해, 오래된 포도주를 꺼내 그들의 갈증을 풀어주고, 차를 끓여 정성스럽게 대접하고 싶다. 그들의 환한 얼굴을 바라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촛불이나 등잔에 기름을 채워 불을 붙여놓을 것이다.
이것이 내 소망이다.
이제 무엇이 더 필요한가.
내 문학은 그런 삶을 살기 위한 준비였을 뿐이다.
지금도 구름이 내 곁에 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그를 위해 어떤 준비도 할 필요가 없다.
일상의 모습처럼 그와 마주앉아 서로 바라보고만 있어도 행복하다.
많은 작가들의 수필을 읽다보면 문장의 서정성을 대할 때의 즐거움이나 아니면 별로 느낌을 받지 못 할 때가 많다. 이는 작가의 생각이나 수사적 표현의 감정적 차이나, 사색적 표현의 감동적 요소의 꾸밈새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겠다. 수필문학에 대하여 흔히 모르는 사람들은 수필을 신변적 글이라고 비하하는 경우가 많았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다양한 문학적 인생체험으로부터 깊이 있는 수필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 가운데에도 운정은 문맥 하나하나에 까지도 사유함의 문장으로 신경을 써가며 표현함에서 독자들에게 인생의 의미를 느끼게 한다.
3) 아름다운 농담(濃淡)의 표현미
수필은 자신을 성찰하는 문학이다. 말과 행동을 함께하는 문학으로 ‘글은 곧 그 사람이다.’ 라고 한다. 윤 교수님이야말로 인생의 농담(農談)이 분명한 인간미를 담고 있다. 생각이 고고한 인품이 흰구름 같은 분이시다. 이렇게 사시는 분이기에 구름을 사랑하는 지도 모르겠다.
수필은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수필이란 예술성을 지니고 글다운 글로 문학적 형식을 갖춘 작품으로 독자들에게 호응을 받는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게 될 적에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수필이다. 라는 안일한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무리 하늘이 맑다고 하지만 사람이 생각하는 마음의 표현만큼 깨끗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운정의 마음은 오직 푸른 하늘의 아름다운 한 점의 흰 구름일 뿐이다. 희고 검고 부옇고 때로는 황홀하게 찬란한 색깔로 조명 되어지는 표현미는 거대한 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케 한다. 그는 오밀조밀한 세세한 미적인 분위기 형성에 이르기까지 감칠맛 나게 이끌어 냄이 남다르다. 특히 문장의 상호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통일감 있게 농담미를 살려가며 시각적인 문학적 측면으로 육하원칙에 기본을 둔 문장의 표현미임을 알 수 있다.
<구름카페>
나에게는 오랜 꿈이 있다.
여행 중에는 어느 서방西方의 골목길에서 본 적이 있거나, 추억어린 영화나 책 속에서 언뜻 스치고 지나간 것 같은 카페를 하나 갖는 일이다.
구름을 좇는 몽상가들이 모여들어도 좋고, 구름을 따라 떠도는 역마살 낀 사람들이 잠시 머물다 떠나도 좋다. 구름 낀 가슴으로 찾아들어 차 한 잔에 마음을 씻고, 먹구름뿐인 현실에서 잠시 비껴 앉아 머리를 식혀도 좋다.
꿈에 부푼 사람은 옆자리의 모르는 이에게 희망을 풀어주기도 하고, 꿈을 잃어버린 사람은 그런 사람을 보며 꿈을 되찾을 수 있는 곳, '구름카페'는 상상 속에서 나에게 따뜻한 풍경으로 다가오곤 한다.
넓은 창과 촛불, 길게 드리운 커튼, 고갱의 그림이 원시의 향수를 부르고, 무딘 첼로의 음률이 영혼 깊숙이 파고드는 곳에서 나는 인간의 짙은 향기에 취하고 싶다.
눈만 뜨면 서둘러 달려와 책장을 뒤적이고, 사람을 만나는 조그만 연구실이 있는 서초동 꽃마을이다. 2,30년 전부터 그렇게 불렀으니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변화의 물결에 휩쓸려 지금은 정치 1번지니, 강남의 요지니 하는 요란한 수식어가 붙어 있지만, 사슴의 뿔처럼 실속도 없이 교통만 혼잡하고, 하늘을 향해 치솟는 고층건물로 숨이 막힐 지경이다. 꽃마을은 꽃을 가꾸어 생계를 유지하던 풀더미 같은 사람들이 땅을 거름 삼아 하루하루를 살던 곳인데 지금은 문화와 진리의 요람, 예술과 학문의 메카다. '예술의 전당'과 '국악 연구원', '국립중앙도서관'과' 학술원','예술원'이 이곳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꽃과 문화는 생존이 해결되고 난 후에 생활의 질적 향상을 위한 요소이고 보면 서초동과 문화적 여건은 필연인 것도 같다. 집을 떠나 '문화의 거리'라 일컫는 서초대로를 지나 연구실에 이르는 동안 '구름카페'에 대한 동경심은 가로수가 늘어선 길목에 눈길을 머물게 한다. 플라타너스가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길목 찻집을 지나면서, 은으한 조명에 깊은 의자가 편히 놓여 있는 찻집 앞을 지나면서, '구름카페'가 현시롤 이루어질 것 같은 기분좋은 착각에 빠진다.
프랑스의 '드마고카페 문학상'은 상장과 매달만 수여한다. 작가들은 그 상을 받기위해 창작에 열중한다. 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이 상의 권위는 주최측이 작품과 작가 선정에 엄격하기에, 오해의 소지를 제거함으로써 객관성을 대외에 과시한다. 드마고카페에서 수여되는 문학상과 같이 프랑스에는 누구나 인정하는 작가와 작품을 선별하고 조촐한 자리를 마련하여 정情을 나눌 수 있는 상의 수는 많아도 불만을 갖는 사람은 없다.
만약 내가 한 묶음의 장미꽃을 상품으로 수여하는 상을 만들 수 있다면 시상식은 '구름카페'가 제격일 것이다. 이 자리에 참석하는 사람이 꽃 한송이씩을 들고 와 수상자에게 마음과 함께 전함으로써 상금을 대신하는 '구름카페 문학상'을 만들어 상을 받는 사람과 시상하는 주최측이 자랑스러움에 벅찰 수 있는 문학상을 서초동 꽃마을에 뿌리내리고 싶다.
'구름카페' 천장과 벽에는 여러 나라의 풍물이 담긴 종을 매달아 문이 열리거나 바람이 불때마다 들리는 신비한 소리가 사람들의 영혼을 일깨우고, 다른 한편에는 세계의 파이프와 민속품을 진열해 놓아 구름처럼 어딘지 모를 곳으로 흘러가야 하는 사람들의 발길을 머물게 하고 싶다. 그 장소가 마련되면 한 시대를 함께 지냈다는 사실만으로도 영원히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초대하여 향기 짙은 차를 마시며 비 내리는 날은 비를, 눈 내리는 날은 눈발에 마음을 함께 보내고 싶다.
'구름카페'는 나의 생전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어도 괜찮다. 아니면 숱하게 피었다가 스러지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면 어디서나 만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행복의 장소인지도 모른다. 구름이 작은 물방울의 결집체이듯, 현실에 존재하기 않기에 더 아득하고 아름다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꿈으로 산다. 그리움으로 산다. 가능성으로 산다.
오늘도 나는 '구름카페'를 그리는 것 같은 미숙한 습성으로 문학의 길을, 생활속을 천천히 걸어가고 있다.
20여 년 전이다. 서초동 ‘구름카페’의 아담한 윤교수님의 연구실을 몇 사람이 찾아가 커피를 마셨다. 은은한 커피향이 방안을 가득히 넘쳐났다.
책상 옆에는 파이프가 가지런히 놓여있고, 손때 묻은 서적들이 책상을 가득히 메우고 있었다. 아늑하고 조용한 분위기로 부러움을 샀던 일은 잊혀 지지가 않는다. 잔잔한 음성으로 빈틈없는 강의를 하시듯 들려주시던 이야기는 누구나 매료시키었다. 글에서 보는 것처럼 윤교수님은 바로 이러한 분이셨다.
‘구름을 좇는 몽상가들이 모여들어도 좋고, 구름을 따라 떠도는 역마살 낀 사람들이 잠시 머물다 떠나도 좋다. 구름 낀 가슴으로 찾아들어 차 한 잔에 마음을 씻고, 먹구름뿐인 현실에서 잠시 비껴 앉아 머리를 식혀도 좋다.
꿈에 부푼 사람은 옆자리의 모르는 이에게 희망을 풀어주기도 하고, 꿈을 잃어버린 사람은 그런 사람을 보며 꿈을 되찾을 수 있는 곳, '구름카페'는 상상 속에서 나에게 따뜻한 풍경으로 다가오곤 한다.’
윤교수님은 많은 수필가들에게 구름위에 쉬어가는 평화스러움을 선사하고 계셨다.
‘만약 내가 한 묶음의 장미꽃을 상품으로 수여하는 상을 만들 수 있다면 시상식은 '구름카페'가 제격일 것이다. 이 자리에 참석하는 사람이 꽃 한 송이씩을 들고 와 수상자에게 마음과 함께 전함으로써 상금을 대신하는 '구름카페 문학상'을 만들어 상을 받는 사람과 시상하는 주최측이 자랑스러움에 벅찰 수 있는 문학상을 서초동 꽃마을에 뿌리내리고 싶다.’
나는 이 문장을 읽고 글의 내용처럼 따르고 싶은 충동을 일으켰다. 이후 청주에 있는 작은 문학회에서 상을 줄 적에는 여성회원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수상자에게 화환을 목에 걸어주고, 장미 한 송이씩을 들고 가서 축하를 하여주고 있다. 수상자는 많은 감동을 받고 있다. 구름카페의 작품을 통하여 실천에 옮겨봄으로 새로움을 깨달았다.
변화무쌍한 문장표현은 높고 푸른 하늘이며, 망망한 바다의 일엽편주(一葉片舟)처럼, 그리움으로 쏟아놓고 있다. 바닷가의 조약돌이나 다름없는 언어들과 풍화작용에 깎인 바위 같은 문장이며, 강가에서 불어오는 안개에 젖은 아련한 매혹에 빠져들게 하는 수사적 표현과 산기슭에 피어난 청초한 풀꽃보다도 신선한 묘사의 아름다움은 그 누구도 따를 수가 없다.
구름카페의 작품에서 보듯이 운정은 신선이며 구름이다. 그 누구도 오르지 못하는 산봉우리에 위치한 높은 문봉(文峰)이며,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하는 구름위에 지어 놓은 운정의 수필집의 멋스러움을 어찌 탐내지 않겠는가.
4) 다양한 사색과 지각(知覺)
신화를 만드는 인생을 살아가며 구름을 타는 사람, 윤교수님은 오직 수필문학을 위해 태어난 분 같다. 수필문학의 거봉,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청운지사(靑雲志士) 운정이시다. 미수(米壽)의 고매한 인품으로 오로지 수필문학을 높은 반석위에 꽃피워 놓은 수필학 문인은 우리역사의 이전에도 없었지만 이후에도 윤재천교수님을 능가할 학자가 또 있겠는가. 끊임없이 노력하고 추진하는 정렬과 열정을 누가 따를 수 있으랴.
그 다양한 사색과 지각(知覺)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또 하나의 신화>
진실이란 무엇일까.
삭풍이 몰아치고 때로는 눈비가 내려,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조차 찾을 수 없는 순간이 온다 해도, 맞잡은 손을 놓지 않고 상대를 감싸 안는 것이 사랑의 참모습이다.
사랑의 신화이든 수필의 신화이든, 신화는 정해진 코스를 밟아가는 상태에서는 꽃이 피지 않는다.
나는 또 다른 길을 찾기 시작한다.
또 하나의 신화를 찾기 위해 항해를 계속한다. 또하나의 신화를 만들기 위해 그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것을 모아 그 안에 매장하고 수필에 몰두한다.
다음의 신화는 무엇이 될까.
4. 운정의 수필문학사상 계보
백철선생의 100주년을 기념하는 국제펜클럽의 2008년도 주요 행사의 하나로 마련된 충북 청주시 내수면 초정리 스파텔의 문학강연회에서 이명재 전 중앙대 교수가 '변증법적 삶과 휴머니즘의 문학'을 주제로, 임헌영 중앙대 교수가 '논쟁사로 본 백철'이란 주제를 발제해 백철 선생의 문학적 업적을 기렸다. 이어서 윤재천 전 중앙대 교수와 허형만 목포대 교수가 백철 선생에 대한 회고담을 들려주었다.
이때 운정의 회고가 기억난다.
“1952년 중앙대학교 국어 국문과를 입학하여 현대문학을 공부하였으며, 1956년에 동대학원에서 고전문학을 전공하였습니다. 20대 중반의 청년기에 당시 중앙대학교 문리대 학장이던 백철白鐵을 만나 1955년부터 1958년까지 4년 동안, 백철의 조교로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 스승인 백철의 영향을 받았고, 연구실을 드나들던 내방객은 거개가 시인, 소설가 등의 문필가였는데, 이들로 하여 문학의 길로 들어서는데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이후 1966년 당시 상명여자사범대학으로 출범한 대학에 몸을 담게 되었습니다. 그곳이 처음 생겼을 때 학보사 주간을 하고 국어교육과 학과장을 맡아서, 1967년의 국어교육과 커리큘럼에 '수필문학'을 처음으로 집어넣었습니다. 대학의 커리큘럼에 제일 먼저 수필이 들어간 대학이 바로 상명여자사범대학이 된 것은 나름대로 저의 보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저는 수필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시만 메타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수필에서도 메타포가 있어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은유가 있어야 하고, 설명을 다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내가 쓴 글을 보면 조금은 딱딱한 느낌을 주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부드러운 글이 있으면 딱딱한 글도 있어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나라 수필은 전부 나가 있는 수필입니다.”
각 대학에서 수필논문이 쏟아져 나오고 학위까지 받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냄도 수필교과목을 받을 수 있게 교과과정이 짜졌기 때문이다.
운정은 수필문학을 계보적으로 볼 때, 임화에서 백철의 제자인 셈이다. 이처럼 문학적 계보가 뚜렷한 수필가는 없으며, 수필계의 문학적 무형문화재적 독보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5. 수필의 날 제정
우리가 어떤 일을 이루려면 혼자보다는 많은 생각들이 합하여 질 때 성공하기가 쉽다. 그동안 나약한 문학 장르이다 보니 타 분야로부터 천대를 받아온 것만은 사실이다. 이에 각자가 뜻을 지니고 힘을 합쳐야 한다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누구도 구심점을 갖게 하려고 노력한 작가는 없었다. 그러나 운정은 자신이 뜻을 담은 문하생을 비롯한 작가들과 수필의 날을 선포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아래 와 같다.
‘수필의 날 선언문’
수필은 진정으로 살아 있는 음성이다. 진지한 삶의 돌아봄이다. 우리는 수필을 통해 다시 태어날 수 있고, 가슴에 불꽃을 피울 수 있으며, 강과 바다를 찬란히 여울지게 할 수 있다. 인류의 화해와, 자연과 신과의 만남도 이를 통해 이룰 수 있다. 지혜와 포용이 그 안에 있다. 또한 무한한 가능성이 수필과 함께함을 확신한다.
수필은 지나간 시간의 기록이 아니라,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미래를 향해 펼치는 사랑의 향연이고, 언어의 축제여야 한다. 모든 고뇌와 기쁨이 정제되어 수필의 품에 뿌리를 내릴 때, 우리의 삶도 빛날 수 있다.
먼 훗날에도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이 날이 온전한 향기로 살아 있고, 그때마다 보다 더 큰 빛이 사람들의 가슴을 안온히 휩쌀 수 있기를 소망하며, 이에 ‘수필의 날’을 제정한다.
운정은 수필의 날 제정 의도를 다음과 같이 표명했었다.
첫째, 우리는 우리의 이러한 열정이 인류의 미래를 위한 바람직한 준비라 믿고, 인간적 감동이 어린 작품을 창작하는 데 역량을 집중할 것이다.
둘째, 우리는 인간의 추악한 면모를 고발하는 일보다는 긍정적인 입장에서 인간에 대한 애정을 근간으로 하는 작품을 낳는 일에 최선의 힘을 경주할 것이다.
셋째, 우리는 우월감에서 비롯된 계도적인 글보다는 한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이웃으로서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주제와 소재를 발굴, 형상화하려는 자세로 일관된 노력을 할 것이다.
넷째, 우리는 지금까지의 수필이 보여 주었던 전통적 면모를 고수하면서, 새로운 전통을 수립하는 일에도 나태하지 않을 것이다.
다섯째, 우리는 자기 주변의 일을 소개하거나 자기변명에 급급한 글보다는 인류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한 수필문학을 만들어 가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여섯째, 우리는 수필을 감정의 소산물에 그치지 않게 하기 위해 연구하는 자세와 지성적 면모를 구축해 갈 것이다.
일곱째, 우리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지구촌 모두를 애정 어린 관심의 대상으로 삼아 그들과 이웃해 한 가족으로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할 것이다.
여덟째, 우리 사회의 문제점 중의 하나가 가진 자와 덜 가진 자, 힘을 보유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갈등임을 명지해 이를 수필을 통해 해결하는 일에 매진할 것이다.
아홉째, 우리는 모국어 발전을 통해서만이 성숙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음을 인지하고, 이를 위해 끊임없이 정진할 것이다.
열째, 우리는 문학이 현상을 기록하는 수단에 그치지 않고, 견고하게 인간의 삶을 개선하는 데 기여함을 확신하고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한다.
수필의 날은 일부 수필가들과, 현대수필 제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수필의 날을 선포하여 6회까지 행하여오던 행사를, 7회부터는 한국수필가협회의 주최로 전국의 수필가를 하나가되게 만들어 놓음도 역시 운정의 남다른 수필사랑으로 꽃을 피워 놓았음이다.
6. 문학 이론서 및 저서
운정은 50년동안 오로지 수필문학에만 평생을 다 바쳐 왔음을 많은 작가들이 알고 있다. 그의 수필 이론서와 저서를 보면 다음과 같다.
국문학 사전(1967), 명작을 찾아서(1969), 수필문학론(공저·1973), 수필작법(1973), 신문장론(공저·1974), 신문장 작법(1979), 문장개론(공저·1980), 세계 명수필의 이해(1981), 수필창작의 이론과 실제(1989), 수필문학 산책(1990), 수필작법론(1994), 수필문학의 이해(1995), 수필작품론(1996), 여류수필작가론(1998),현대수필작가론(1999), 수필 이야기(2000), 수필의 길 40년(2001),
나의 수필쓰기(2002), 여류수필작품론(2003), 운정의 삶과 수필(2003), 운정의 수필론(2004), 한국여류수필작품론(2004), 글쓰기의 즐거움(2006), 윤재천 수필문학전집(2007), 그림과 시가 있는 수필(2009), 윤재천 수필세계(1012), 오늘의 한국 대표수필100인선(2013), 수필 아포리즘(2014 ), 나는 글을 이렇게 쓴다( 2015)
수필집으로는 다리가 예쁜 여인(1974), 잊어버리고 싶은 여인(1978), 문을 여는 여인(1980), 요즘 사람들(1982), 나를 만나는 시간에(1985), 처음과 끝, 그리고 그 사이(1986), 나뉘고 나뉘어도 하나인 우리를 위하여(1987), 구름카페(1998), 어느 로맨티스트의 고백(상·하/2001), 청바지와 나(2002), 또 하나의 신화(2005), 바람은 떠남이다(2006), 퓨전수필을 말하다( 2010 ),
운정은 작가로서의 수필문학의 신화를 낳았다. 어떻게 이 많은 서적을 낼 수 있었을까. 거의가 1년에 한권씩 펴낸 셈이다. 50년 동안 발표한 작품 편수만 하여도 5, 6백편에 달하는 글을 발표하였음은 놀라운 일이다. 수필문학을 아끼고 사랑하는 그 열정은 아무도 따를 수 없는 신들림에 가까운 존재다. 운정은 이 뿐만이 아니다. 1988년에 한국수필학회를 발족함에 새로운 수필세계를 이루어 놓았다.한국수필학회를 발족하여 ‘수필연구’지를 발간하여 수필가들에게 무료로 배포를 하여오고 있다. 제30 권이 발행되어 전국도서관은 물론 수필가들에게도 배송한다.
1992년에는 현대수필(계간)을 발행하여 1년 2-3명에 이르는 우수한 수필가만을 배출하여 오고 있으며 금년으로 106호를 펴냈다. 1968년 대학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교과과정에 ‘수필문학론’을 개설하여 강의를 하였고, 2001년에는 ‘수필의 날’을 제정하여 6회까지 행사를 주최 하다가 범수필계(凡隨筆界)로 함께 수필의 날 행사를 하도록 하였다.
운정의 수필문학에 대한 남다른 열정은 그 누구도 흉내조차 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한국 수필문학의 기틀을 확고히 정립하여 놓았다. 이는 문인으로서의 인간문화재로 수필문학 역사에 길이길이 기록되어야 할 일이다. 수필가들의 문학성에 대한 재정립을 위해 수필문학을 높이기 위한 국가무형문화재로 내세움이 요구되며, 이는 바로 운정의 수필문학 일쑤밖에 없다.
첫댓글 한 인간을 변화시킬수있는 힘의원천 유머와 위트로 윤색하는 작업 필요 교수님감사합니다 내게 부족한 유머와 위트로 각색해 좀더 나은 글 써 보도록하게습니다
좋은 공부하였습니다.
노트에 써가며 좋은 공부합니다. 감사합니다.
대단하신 분들이시다. 글 5. 6 백편이나 발표하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