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31. 송구영신 예배. (송구 예배)
https://cafe.daum.net/znzdkzkepal/1qvN/879 김진성
https://cafe.daum.net/rnjstlgur/9oZ8/138 권시혁
영원을 지향하는 삶. 눅 12:16~21
☞ 마음 문을 열고
애플사의 전설적인 CEO 스티브 잡스가 사망할 때 불과 56세의 나이였습니다. 아이폰, 아이패드 등 여러 혁신적인 발명품들로 ‘IT업계의 신화’, ‘세상을 바꾼 남자’ 등의 대단한 평가를 들은 그였지만 인간의 한계와 유한성을 극복할 수는 없었습니다.
인생은 유한합니다. 잡스의 경우에서 보듯이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보유하고 있고 아무리 대단한 존재라 하더라도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는 없습니다. 불로초를 구하러 다녔다는 진시황도, 신적 존재로 추앙받았던 로마의 황제도 다 하늘이 내건 시간의 장애물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모세는 시편 90편에서 인생을 아침에 돋는 풀에 비유하면서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시 90:10)라고 노래했습니다.
요즘은 인간의 평균 수명이 늘어나서 ‘100세 시대’라고 말하지만, 인생의 유한성에 대한 모세의 기본적 주장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마치 공중을 날아가는 새처럼 이 땅에서 우리의 시간은 그렇게 빨리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이런 우리가 어떻게 영원을 지향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시계의 째깍대는 소리에서부터 도망가면 영원에 이를 수 있을까요? 어느 책에서 읽은 한 도인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대매산이라는 곳에서 수행하던 그는 몇 가지 곡식 종자를 가지고 인적이 없는 깊은 산중에 들어가 거기에 초암을 짓고 살면서 세상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상을 초월하고 인간사를 넘어 존재하고 싶었습니다. 어느 날 이 산중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어떤 나그네가 우연히 초암 앞에 이르러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도인의 모습을 보고 그에게 물었습니다. “이 산중에 들어와 사신 지 얼마나 되십니까?”
도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몇 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둘레의 산이 푸르렀다가 누레지고 다시 푸르렀다가 누레지는 것을 보았을 뿐이요. 그렇게 거듭하기 한 30여 차례나 되는지 모르겠소.” 시계도 없고 달력도 없었지만 그래서 자기 나이도 정확히 의식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시간을 초월할 수는 없었습니다.
둘레의 산이 푸르렀다가 누레지는 것을 30여 차례나 보았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 이야기는 우리가 시간으로부터 도망갈 수도 없고 우리 힘으로 영원에 이를 수도 없음을 잘 보여 줍니다.
이처럼 시간에 매여 사는 우리이지만, 그리고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시간의 지배하에 있는 유한한 것뿐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유한성이 현실이 아닌 양 애써 그것을 부정하고 오히려 영원을 말하며 영원을 갈망합니다.
또한 영원한 사랑을 노래하고 영원한 삶을 기대하며 영원한 세상을 꿈꿉니다. 전도서 기자에 의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전 3:11). 그래서 유한한 인간이 영원을 겨냥하며 영원에 팔을 뻗치는 것입니다.
1. 그렇다면 진정 영원을 지향하는 삶이란 무엇일까?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넣어 주신 소원에 따라 그저 영원을 동경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위의 도인처럼 세상을 등지고 시간의 횡포로부터 도망가는 것일까요? 아니면 진시황처럼 적극적으로 불멸과 영생을 찾아 나서는 것일까요?
영원을 지향하는 삶이란 현실 도피주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과거 몇몇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흰옷을 입고 산에 올라가 하늘만 쳐다보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학교도 관두고 가정도 팽개치고 회사도 떠나는 등 현실의 모든 의무를 내버리고 오직 세상의 종말이 빨리 오기만을 기다리는 그런 삶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우리의 삶은 영원에 이어져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다가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여기서 보다 거기서, 다시 말해 이생에서보다 내세에서 훨씬 더 오래 삽니다. 그러므로 영원을 지향하는 사람은 인생에 대해 더 확장된 관점을 가집니다.
누가복음 12:16~21을 보면 한 부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자기 형과의 유산 분배 문제에 정신이 팔려 있는 한 청년의 인생에 대한 관점을 바꾸기 위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비유 속의 부자는 사업에 크게 성공했고 평생 먹고 놀아도 될 만큼 큰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는 자기만을 위해 축적된 그 큰 재산으로 인해 삶이 안전하다고 느꼈고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자기 확신은 영원의 관점에서 볼 때는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의 기준으로 그 사람의 인생을 평가하시면서 그를 ‘바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는 이 땅에서 크게 성공한 것으로 보였지만 사실은 실패자였습니다. 그가 시공이 제한된 이 땅의 관점에서만 인생을 보고 평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원을 지향하는 사람은 그런 실수를 하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우화의 부자처럼 한시적이고 현세적인 것들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골로새서 3:1~2에서 바울이 권면한 것처럼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는 가운데 자신의 꿈, 계획, 성공, 관계, 가정생활과 같은 모든 것을 영원의 판단 기준으로 평가합니다.
영원을 지향하는 삶이란 또한 영원을 준비하는 삶입니다. 성경은 이 땅에서의 삶이 영원 세계의 준비 과정임을 분명히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한 모든 일은 언젠가 하나님 앞에서 평가받을 뿐 아니라 우리의 영원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이 세상의 종말이 올 것과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것을 강조하시면서 이에 대해 준비하며 살 것을 분명히 권면하셨습니다. 열 처녀의 비유로 알려진 예수님의 비유는 이의 가장 잘 알려진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25:1~13에 기록된 이 비유는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의 이야기입니다. 열 명의 처녀들 가운데 다섯은 등과 함께 여분의 기름을 준비했지만, 나머지 다섯은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두 그룹 공히 신랑이 예상보다 늦게 와서 졸게 되었는데 성경은 이에 대해 칭찬도 책망도 하지 않습니다. 자정이 되어 신랑의 도래를 알리는 외침이 있었고 처녀들은 일어나 등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분의 기름을 미리 준비했던 자들은 문제가 없었지만 그렇지 못했던 다섯 처녀는 꺼져 가는 등을 위해 그제야 기름을 준비하느라 부산을 떨다가 신랑을 놓치게 되고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지혜로운 처녀들은 신랑의 늦어짐에 대해 미리 준비했고 어리석은 처녀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가올 나라에 대해 전혀 준비하지 않은 수많은 사람을 대표합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하신 후 “깨어 있으라”는 말로 요점을 재서술하셨습니다. 영원을 지향하는 자는 장차 도래할 영원 세계에 대비합니다. 그것은 그곳으로 우리를 인도해 들이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또한 도둑같이 임할 주의 날에 대비하여 깨어 정신을 차리고 사는 삶입니다. (살전 5:6).
결론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듯 생각하고 즉각적인 만족을 구하는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조차도 그저 지나가고 말 이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며, 심지어 하나님의 교회도 이 땅의 성공, 행복, 심리적 안정 등을 구하는 종교적 일시주의에 빠져드는 이 시대에 우리는 영원에의 열정을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나간 시간을 어떻게 사셨습니까? 시간은 되돌아 갈수 없습니다. 이제 영원을 제대로 준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023. 1.1 영신 예배
희망의 새 아침. 창32:22-32.
☞ 마음 문을 열고
새 출발의 주인은 시간이 아닙니다. 시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시간도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시간이 바뀌고, 해가 바뀌면 이전에 없던 복이 오고, 새로운 기회가 오리라고 기대합니다. 왜 그럴까요? 새 사람이 없다면 새로운 출발도 없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바뀌고 날짜가 바뀌어도 시간의 주역인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면 새로운 시작은 없습니다.
그런데 좀처럼 바뀌지 않는 것이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가 걸어왔던 길을 그대로 걸어갑니다.
자기 앞에 죽음이 놓여 있는 것을 보면서도 갈 데까지 가보는 게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바뀜은 곧 회개입니다. 회개 없는 새로운 출발은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야곱의 생애를 통하여 새로운 출발이 무엇인가를 찾아가 보고자 합니다.
1. 귀향! 얼마나 가슴 뛰게 하는 말입니까?
야곱의 귀향! 그것도 거부가 돼 돌아갑니다. 두 아내(사실은 네 아내), 13명의 자녀와 함께 말입니다. 그가 에서에게 준 뇌물을 계산하면 그의 재산이 얼마나 많은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이를 낳을 때마다 하나님이 허락하셨다고 했습니다. 양 떼를 불릴 때도 하나님이 주셨다고 했습니다(창 31:9). 장인 라반이 야곱을 헤치려 뒤쫓아 갈 때도 하나님께서 살려주셨습니다(창 31:24).
야곱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하나님의 군대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고도 했습니다. 얼마나 큰 축복을 받은 사람의 모습입니까? 금의환향입니다! 그런데 그가 요단을 건너 조상의 땅으로 발을 옮기려는 순간,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죽음의 위기였습니다.
야곱은 부지런히 살았지만, 그 결과는 복수심에 불타 자신을 해하려고 400명의 부하를 이끌고 온 형 에서였습니다. 그는 홀로였습니다. 홀로 죽음과 대면해야 했습니다. ‘홀로 남았다’의 히브리어 어근 ‘야다르’는 단순 재귀형입니다.
즉 그가 홀로 남게 된 것은 다른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결정한 것이란 말입니다. 곧 자신이 만든 결과란 뜻입니다. 그는 혼자 일 수밖에 없습니다. 형의 위협 앞에서 그의 재산도, 그의 가족도 그를 도울 수 없게 됐습니다.
그런 위기에서도 야곱은 살아남기 위해 자기의 잔머리를 굴려서 선물을 보내고, 식구들을 다 보내고, 홀로 얍복강 너머에 남습니다. 야곱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습니다. 그래도 죽음의 위험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것이 그동안 그가 노력한 인생의 결론입니다. 무엇이 야곱을 이처럼 비극적인 상황 속으로 몰아넣은 것인가요?
2. 야곱은 팥죽 한 그릇으로 형에게서 장자권을 샀습니다.
어머니와 공모해 이삭을 속이고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그 후에 그는 승승장구합니다. 세상눈으로 보면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형의 장자권을 산 것은 그렇다고 해도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을 받은 것은 무엇으로도 변명할 수 없는 악한 행동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 주셨고, 그에게 약속하셨습니다. 특히 벧엘에서 하나님과 함께 맺은 언약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야곱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창 28:15).
하나님의 언약 방법은 일방적인 선언 형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거기에 어떤 세부 조항도 첨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계약 내용에 세부 조항을 달고 하나님과 흥정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참조, 창28:20-21).
여하튼 그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고, 그 축복이 이뤄지는 것은 시간문제였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를 속여서 축복을 빼앗지 않아도 됐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 28:15)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에서는 이방 여인들과 결혼함으로 장자권을 상실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대로 살았더라면 자기 조부 아브라함처럼 부요한 사람도 됐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 주셨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고,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이 됐을 것입니다.
이삭이 리브가를 만나 살았던 것처럼, 사랑하던 라헬을 만나 행복한 부부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란으로 떠난 야곱은 계약 없는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한 번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거나 제단을 쌓은 적이 없습니다.
한 번도 하나님께 묻고 그 길을 따라간 적이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하나님과 함께 살지 않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고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안전하게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실 기회도 주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이름 그대로 협잡꾼입니다.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고, 나머지는 자기 욕망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하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 결과 자기가 판 함정에 스스로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를 도울 수 없고, 야곱 스스로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하나님만이 이 문제를 풀어 가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 가실까요? 이것이 궁금합니다.
3. 하나님은 야곱의 허벅지 뼈를 치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를 쳐서 평생 절뚝발이로 만든 것일까요? 왜 언약의 아들을 위기에서 기적적으로 건져주지 않으셨을까요? 그때 야곱을 안전하게 구해 주셨다면 그는 변했을까요? 그때 구해 주셨다면 그의 미래는 행복했을까요?
24절을 봅시다. 천사가 야곱과 단지 씨름했다고만 언급돼 있습니다. 우연히 천사가 거기 있었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야곱 곁에 계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자신과 씨름하며 사느라 옆에 계신 하나님을 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얍복강가’에서 ‘야곱이 밤새워 했던 씨름’입니다. ‘야곱’과 ‘씨름’이란 단어의 히브리어 발음이 비슷합니다.
야곱-야아코브(Yaaqob), 씨름-아바크(abaq). 그렇다면 이 말은 ‘밤새도록 야곱은 야곱(씨름)했다’라는 말이 됩니다. 씨름한 것도 야곱처럼 끈질기게 했다는 말입니다.
그분은 야곱이 어떤 인간인가를 씨름하면서 똑똑히 알게 됐습니다. 여기에 그분도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천사가 떠나려 해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새벽이 돼도 떠날 수가 없자, 결국 엉덩이뼈를 쳐서 부러뜨리고, 그 이름을 바꿔 줍니다.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하나님이 보호하신다’라는 의미입니다. 새 이름을 주신 것은 이미 하나님의 능력이 그 사람에게 옮겨간 것을 의미합니다. 허벅지 관절을 무너뜨린 후에야 새 이름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왜 하필 엉덩이 뼈일까요? 엉덩이뼈는 생식기와 관련이 있는 부분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야곱을 지탱하던 기초가 무너졌다는 말이 됩니다.
야곱은 무너졌습니다. 죽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협잡꾼, 권모술수로 살아가던 야곱은 죽었습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께 이끌리어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절면서 이스라엘이 된 것을 성경은 축복이라고 합니다. 절름발이, 해 그리고 하나님의 얼굴이 야곱의 새로운 인생을 만들었습니다.
4. 야곱을 죽이겠다고 달려오던 에서가 갑자기 변했습니다.
야곱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울었습니다. 분노로 가득 찼던 그가 갑자기 울보로 변했습니다. 왜 이리 갑자기 변했을까? 한번 상상해 봅시다. 야곱이 절뚝이며 형을 향해 나아가던 모습이 보이십니까? 그 모습에서 에서는 무엇을 느꼈을까요?
여기서 에서도 무너졌습니다. 동정심의 발로라고 할까요? 야곱은 에서와 싸워야 했지만, 하나님과도 싸워야 했습니다. 이 두 가지 싸움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을까요? 야곱이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변했을 때, 이 두 가지 문제는 해결됐습니다.
그때 아침 해가 떠올랐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주시는 희망인 브니엘을 보았습니다. 자신이 무너질 때 그리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야곱은 새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와서 그 말씀을 듣고 바르게 살아가면 일어나는 결과를 이사야는 이렇게 전합니다.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서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사 58:8-9b).
새 출발의 주인은 시간이 아닙니다. 시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나 자신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시간은 새로운 축복을 만들 수 없습니다. 아무리 복을 달라고 부르짖어도 우리가 변하지 않는 한 복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너져야 합니다. 그러면 나는 물론 하나님도 기쁘시고, 내 이웃도 기뻐할 것입니다. 무엇을 바꿔야 할지 변화를 결단해 보십시오. 새해가 우리 성도들의 일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