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현(居七賢)
거칠현설은 정선아라리의 근원설화 중 일반화된 설이다. 정선 지역민들에겐 거의 정설로 통한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고려 유신들 중 72명이 불사이군(不事二君) 즉, 충직한 신하는 결코 두 임금을 모실 수 없다며 충절을 맹세하고 숨어든 곳이 개성의 ‘두문동’ 이었고, 여기서 이성계의 회유가 집요해지자 다시 이를 피해 일부가 흩어져 숨어든 곳이 강원도 정선 땅이었다.
이때 온 이들이 7인이었고, 그래서 이들이 머문 곳을 후세에 ‘거칠현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들은 매일 아침 관복을 옛 궁궐 쪽에 걸어 놓고, 중국의 백이숙제의 고사(故事)처럼 서운산(瑞雲山)의 고사리와 산나물을 캐 먹으며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그리고 이웃 여주의 목은 이색이나 원주의 원천석과 같은 이들과 회한을 나누며 자신들의 처지를 한시로 지어 부른 것이 인근에 풀이되어 전해져 정선아라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증거가 정선아라리의 제 1절 격인 다음의 노랫말이라고 한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 막 모여 온다.”
여기서 눈이나 비가 오려는 암울한 상황은 고려 말의 국운을 말하는 것이며, ‘만수산’이란 옛 도읍지인 개경의 주산을 말한다. 그리고 이들이 7인이니 7수의 한사와 그 풀이한 노랫말도 있다고 주장하여 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주장은「정선전씨대동보」나「고려숭의록」등에 명시하고 있으나 이런 주장에 대해 이의가 없지 않다. 즉, ‘7현이라는 일곱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 가 명확치 않다든가, 그들이 남긴 한시 7편의 문헌적 근거가 불분명하다든가, 그 시에 의한 사설이 확인되지 않다든가, 결정적으로는 “누가 내 마음을 알리오”라는 어원의 단서가 어느 시에 있는가? 등의 문제이다.
그럼에도 이 설은 정선아라리의 움직일 수 없는 기원설화로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최근에는 목은 이색 시 수용설이 대두되고 있다.
여기서 눈이나 비가 오려는 암울한 상황은 고려 말의 국운을 말하는 것이며, ‘만수산'이란 옛 도읍지인 개경의 주산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7인이니 7수의 한사와 그 풀이한 노랫말도 있다고 주장하여 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주장은「정선전씨 대동보」나「고려 숭의록」등에서 확인 된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 대해 이의가 없지 않다. 즉, 7현이라는 일곱 사람이 과연 누구누구 인가가 명확치 않다든가, 그들이 남긴 한시 7편의 문헌적 군거가 불분명하다든가, 그 시에 의한 사설이 확인되지 않다든가 하는 문제이다. 그럼에도 이 설은 정선아라리의 움직일 수 없는 기원설화로 자리집고 있다.
정선-칠현비
정선-고려유신거칠현비
이외에도 정선아라리에는 각 편의 기원설화로 볼 수 있는 ‘아우라지 처녀’얘기, ‘백전리 물레방아’얘기, ‘되돌이 아라리’, ‘문호장네 며느리얘기 등이 전해지고 있다.
거칠현 공원 (居七賢公園)
강원도 정선군 남면(南面) 낙동리에 있는 공원.
조선 건국에 반대하여 거칠현동에 은거하여 살던 고려 유신 전오륜(全五倫)· 신안(申晏) 변귀수(邊貴遂)· 김충한(金沖漢)· 고천우(高天佑)· 김위(金瑋)· 이수생(李遂生)· 7인의 고려 유신(遺臣)을 기리기 위한 공원이다. 남면은 1997년부터 정선아리랑의 보존·발전과 칠현(七賢)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거칠현 유적공원' 조성사업을 벌여왔으며, 고려유신 칠현비를 세웠다.
조선의 개창에 반대해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光德面) 광덕산 서쪽 기슭 두문동(杜門洞)에서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바치며 지조를 지킨 72인을 두문동 칠십이현(七十二賢)이라고 하는데, 그중 칠현이 정선 서운산(瑞雲山)으로 내려와 산나물 등을 뜯어먹고 살면서 절개를 지킨 곳이 거칠현동이다.
당시 칠현은 한맺힌 마음을 한시로 지어 율창(律唱)으로 불렀는데, 지방의 선비들이 이를 듣고 사람들에게 풀이하여 알려주면서 구전되던 토착요(土着謠)가 강원도무형문화재 제1호인 정선아리랑이 되었다고 한다.
거칠현 - 정선아리랑 창극
“살아 숨쉬는 우리 아리랑의 뿌리,
정선아리랑의 역사적 시원을 통해 그 참된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1호이자 현존하는 아리랑 중 본조가 되는 정선 아리랑의 보존과 전승 발전을 위해 꾸준히 이어져 온 정선아리랑 창극 시리즈는 2005년을 맞이하여 새롭게 <정선아리랑 창극-‘거칠현>으로 아리랑의 뿌리를 찾고 아리랑의 진정한 참뜻의 의미를 풀어 모두가 함께 공감하고 어우러지는 소중한 계기가 되고자 한다.
[ 작품 배경 ]
정선아리랑은 지금으로부터 약 600여년전인 조선 초에 고려왕조를 섬기던 충신들이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불사이군을 다짐하며 송도에서 은신하다가 정선(현재의 정선군 남면 거칠현동)으로 은거지를 옮기어 일생동안 산나물을 먹으며 생활하면서 충절과 지난날의 회상,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당시에 전해지던 아리랑 곡조에 한시를 지어 율창한 것에서 그 역사적 시원을 찾는다.
거칠현동칠현은 전오륜(全五倫), 김충한(金沖漢), 고천우(高天禑), 이수생(李遂生), 신안(申晏), 변귀수(邊貴壽), 김위(金瑋)를 일컫는다.
정선아리랑창극-‘거칠현’은 아리랑의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만들어질 작품이다.
[ 연출 의도 ]
문화의 급속한 세계화로 인해 각국의 문화와 문명이 충돌하고 그로인한 갈등과 분열이 세계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작금의 현실에 대해 정선아리랑창극-‘거칠현’은 아리랑의 역사적 뿌리가 되는 거칠현동을 배경으로 아리랑을 통해 그 해결점을 모색하고자 한다.
또한 정선아리랑의 보존과 계승발전을 통해 정선아리랑 속에 녹아있는 한민족의 혼과 한을 그려보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정선아리랑의 소리를 찾아 급속도로 변화하는 글로벌 시대에 세계화를 지향하는 정선아리랑의 소리를 무대상에서 펼쳐 보고자 한다.
가장 자연적이며 토속적인 원형의 모습을 간직한 한국적인 소리(정선아리랑의 특징인 곡성과 미성)와 정선지역에 전해지고 있는 토속민요들, 정선의 상여소리와 제의식을 통한 소리의 구성을 이용한 새로운 연출기법으로 모두가 함께 공감하고 감동 할 수 있는 창극을 제작하고자 한다.
[ 작품 줄거리 ]
평화로운 정선에도 고려가 멸하고 조선이 개국되는 와중에 혁명의 물결이 밀려온다.
위화도에 출전했던 랑이가 정신을 잃고 돌아와 아리의 보살핌 속에서 지내는 중에 송도 두문동 광덕산에 은거하던 고려의 충신들 중 이성계 일당의 만행을 피해 전오륜을 위시한 충신 일곱명이 정선 거칠현동 백이산 소도로 피신해 온다.
뒤를 쫓아 온 조선군사들이 산 아래를 포위하고 있는 가운데 삼척으로 유배를 당한 고려의 마지막 황제인 공양왕이 도착했다는 전갈이 전해온다. 삼척의 공양왕과 은밀히 연락을 취하며 황제의 복벽을 추진하던 칠현들은 울진 등지에서 뜻을 같이하는 군사들이 동참함에 힘을 얻는다. 이를 예의주시하던 최부자와 이별장은 복벽의 근원을 차단하고자 대종을 이용해 공양왕의 시해를 은밀히 사주한다.
한편 마을사람들과 의기투합한 칠현들은 정선사람들을 통해 아리랑의 진정한 의미와 자연을 그대로 닮은 소리의 아름다움을 접하게 되며 자신들의 처지를 아리랑 곡조에 실어 기록으로 남긴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복벽을 위해 공양왕이 도착하던 날 칠현들과 정선인들에게 황제의 시해 소식이 전해지고 아리와 랑이는 칠현들을 대신해 이별장과 조선의 군사들에게 처절한 죽음을 당해 아리랑고개를 넘어가게 되고 칠현들과 마을사람들은 아리랑을 부르며 자신들의 갈등과 한을 위로한다.
아리랑의 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산을 울리고 하늘을 울리며 살아있는 모든 자에게 다가온다
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사진까지 준비해서 설명하니 더욱 이해하기 쉽게 보입니다....
좋은점은 조상님 탓이오...부족한 점은 내탓이오...하면 어떨까요....
고맙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정선아리랑을 모르는 분이 있을까요....
비록 가난과 슬품이지만 .. 마음에 편안함과 후손에 좋은 정신과 마음을 전하지 않습니까....
그당시 생활과 문화는 그때 살아가는 습관이고 충절입니다...
지금은 문명의 발전이 첨단으로 가지만...
한가지 문제는 두문동 72현에 해당하는 사람의 명단은 실제 3명이며 이후 조작문서에 72명의 명단이 여러종이 있는데
진실은 밝혀질지 기다려 봐야 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