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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138호(친림 광화문내 근정전정 시시도) 친림 광화문내 근정전정 시시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138호
비단천에 채색하여 그린 8폭의 병풍 형태로 된 기록화이다. 이 병풍의 그림은 조선 영조 23년(1747) 9월 19일 실시한 정시(庭試)에 왕이 친림하였다가 시립했던 신하들에게 “창업중흥만세법(創業中興萬世法), 용준호거한양성(龍蹲虎踞漢陽城)”이라는 시의 제목을 내려 그 운에 맞는 시를 지어 올리도록 했는데, 이 병풍의 그림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총 8폭 중 맨 우측 한폭에만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정시가 행해진 광화문 내 근정전이 표현되어져 있다. 원경에는 농담이 있는 굵은 윤곽선과 짧게 찍은 가로점으로 북악산을 표시하였고, 중경에는 건물 기단과 주춧돌만 남아 있는 근정전 터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부감법(俯瞰法)으로 구사하였다. 근정전 자리에는 백분으로 칠한 천막과 붉은 어좌를 그려 임금이 친림했음을 나타내었다. 원경과 중경 사이에는 군데군데 무리진 문인화풍의 소나무를 그려 원근감을 표현하였다. 나머지 7폭들에는 정시에 참여하여 시를 적은 관리들의 싯구와 관직, 성명 등이 적혀 있다. 이 그림은 당시 폐허가 된 경복궁의 모습과 조정의 문풍(文風)을 알려 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138호 백련사 약사유리광여래 본원 공덕경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138호
흔히 『약사경(藥師經)』으로 불리는 『약사유리광여래 본원 공덕경(藥師琉璃光如來本願功德經)』은 동방세계(東方世界)에 유리광국(琉璃光國)이라는 불국토를 건설하고, 12가지 큰 서원(誓願)을 세워 모든 중생의 질병을 치료할 것을 서원함으로서, 중생들의 질병을 치유하고 모든 재난을 제거하며 수명을 연장하는 약사여래(藥師如來)의 공덕(功德)을 설파하고 있는 경전이다. 이 12가지의 큰 서원에는 대중들의 일상생활에 나타나는 현실적인 소망을 담고 있어, 이후로 약사신앙은 대중들의 요구에 부합하는 신앙으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약사여래의 법력으로 질병을 퇴치하고자 하는 현실적인 요구에 의해 『약사경(藥師經)』이 널리 번역 유포되면서 약사신앙은 급속히 성장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부터 신라를 거쳐 고려에 이르러 크게 유행했던 것으로 본다. 백련사(白蓮寺) 소장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藥師琉璃光如來本願功德經)』은 당나라 현장(玄奘)이 번역한 것으로, 고려 초조본(初雕本) 대장경판으로 간행된 것으로 모두 16장이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4장 7행의 13번째 글자 ‘경(竟)’자와 12장 22행의 12번째 글자 ‘경(敬)’자의 마지막 획이 탈락되어 있는데, 이는 중국 송나라 태조의 조부의 휘(諱)를 피한 결획(缺劃)이다. 표죽(褾竹)이나 뒤에 축을 달아 권자본(卷子本, 두루마리) 형식으로 장정을 갖추지 않은 것으로 보아 불상의 복장용(腹藏用)으로 인출된 것으로 보인다. 백련사(白蓮寺) 소장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藥師琉璃光如來本願功德經)』은 필획이 유려하게 살아있는 초쇄본(初刷本)은 아니지만, 인쇄 정도가 대체로 선명하고 보관 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이 책과 동일한 인본(印本)이 하나는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지정되어 있고, 또 하나는 경상남도지정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초조본 대장경의 희귀성이라는 점에서 볼 때 서지학 및 대장경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138호( 운흥사 천룡탱화) 운흥사 천룡탱화 강원도 유형문화재138호
탱화(幀畵)의 하단 가운데 있는 화기(畵記)에 따르면 조선시대인 1755년(영조 31) 삼척 운흥사(雲興寺)에서 제작하여 봉안된 불화로 강릉시 연곡면 유등리 백운사(白雲寺)에서 옮겨져 봉안되어 오다가 1995년 월정사로 옮겨져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운흥사(雲興寺)는 삼척시 근덕면 동막리에 있는 신흥사(新興寺)의 옛 이름으로, 1821년(순조 21)에 신흥사(新興寺)로 이름을 고쳤다. 이 탱화는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8종의 신장(神將)인 팔부신중(八部神衆), 즉 천(天)·용(龍)·야차(夜叉)·아수라(阿修羅)·가루라(迦樓羅)·긴나라(緊那羅)·건달바(乾達婆)·마후라가(摩睺羅伽) 등 천룡팔부중(天龍八部衆)을 그린 그림이다. 이 천룡도는 위태천(韋太天)이 화면 위쪽에 작게 표현되어 있고 팔부중이 크게 강조된 독특한 도상을 이루고 있어, 위태천(韋太天)이 천룡탱화(天龍幀畵)에서 주존으로 정착되기 이전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불화의 중앙에는 흰 수염으로 덮여 있는 용왕이 용뿔을 들고 서 있다. 그 왼쪽에는 사자관을 쓴 건달바가 있고, 용왕의 오른쪽에는 새 날개가 달려 있는 건달바가 그림의 바깥쪽을 바라보고 서 있다. 그밖에 여러 무장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용왕을 포함한 팔부중을 표현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림의 앞부분에는 일월관을 쓴 일궁천자(日宮天子)가 빨간머리가 위로 솟은 천왕에게 두루마리 경전을 전하고 있다. 동자(童子) 3위가 그림의 하단 좌우 끝에, 그리고 상단의 위태천 옆에 배치되어 있다. 이 탱화의 가장 중요한 신중인 위태천은 화면의 상단 오른쪽에 화염에 둘러싸여 있는데, 새 깃털 장식 있는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은 모습이다. 위태천(韋太天)의 화면 왼쪽에는 위태천(韋太天)의 다른 이름인 ‘동진보안보살(童眞普眼菩薩)’이라는 글귀가 붉은색 구획 안에 적혀 있다. 그림의 하단에는 화기가 있는데 1755년에 양공비구(良工比丘) 천붕(天鵬)과 해천(海天)이 그린 것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화면 중앙에 용왕을 중심으로 한 팔부중과 동진보살(童眞菩薩), 천왕, 일궁천자 및 동자 3위 등이 구름을 배경으로 자유롭게 배치되어 있는데, 각 존상의 표현방식, 짙은 적색과 녹색이 주조를 이루는 색조, 존상의 활달한 필선 등은 18세기 중엽 이후 불화의 전형적인 특징을 나타낸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138호(연천군 심원사지 부도군) 제월당 대사비 취운당 대사비 연천군 심원사지 부도군 경기도 유형문화재138호
부도(浮屠)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이다. 심원사(深源寺)는 신라시대 647년(진덕여왕 1)에 창건되어 8·15광복 이전까지 불교성지로 널리 알려진 사찰로,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보개산 심원사 터(深源寺址)에는 모두 12기에 이르는 부도와 3기의 비가 자리하고 있다. 일제 때 발간된『심원사지(深源寺誌)』에 의하면, 1925년 심원사(深源寺) 동쪽에 있던 비와 부도 전부를 지금의 터로 옮겼다고 하나, 한국전쟁을 겪으며 파손 또는 밀반출되어 현재의 상태로 남아 있다. 이곳에 있는 비와 부도(浮屠)의 주인공들은 17세기 전반에 활동하던 제월당(霽月堂)·취운당(翠雲堂)·풍담당(楓潭堂)·호연당(浩然堂)·청하당(靑霞堂)·청심당(淸心堂) 등 청허(淸虛) 휴정(休靜, 1520∼1604)의 법맥을 이은 승려들이다. 부도(浮屠)들은 8각을 기본형으로 하고 있는 것이 많으며 종모양도 섞여 있다. 8각을 한 부도들은 모두 지붕돌 윗면이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오른쪽 비 옆에 있는 종모양의 부도는 상태가 좋은 편이고, 기타 다른 몇 개의 부도(浮屠)들은 부재들이 서로 섞여 원래의 모습을 잃고 있다. 3기의 비 중 부도밭 내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제월당(霽月堂) 경헌(敬軒, 1542∼1632)대사비이다. 옆면에 안상(眼象)을 새긴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후 구름과 용을 조각한 4각 지붕돌을 올렸다. 조선 인조 14년(1636) 8월에 세운 것으로, 현재 비문이 심하게 닳아 있다. 가장 왼쪽에 자리한 비는 취운당(翠雲堂) 학린(學璘, 1575∼1651) 대사비이다.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받침돌 삼아 그 위로 비몸을 세웠는데, 비몸이 위로 올라갈수록 넓다. 효종 3년(1652) 8월에 세운 것으로, 앞면에 총탄의 흔적으로 일부가 파손되긴 하였으나 보존상태는 좋은 편이다.
장육사 대웅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138호
장륙사(莊陸寺)는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 때 나옹선사(懶翁禪師)가 처음 세웠다고 전한다. 조선 세종(재위 1418∼1450) 때 산불로 인해 불에 타고 그 후 다시 절을 세웠으나 임진왜란(1592) 때 훼손되어 다시 절을 세웠다. 고종 광무(光武) 4년(1900)광무 4년(1900)에 수리하였다고 한다. 장륙사(莊陸寺) 대웅전(大雄殿)은 태조 4년(1395)에 태조와 그의 부인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를 기리기 위하여 지방관리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었고, 태종 7년(1407)에 다시 금을 입혔다. 또 숙종 3년(1677)에 수리하였다는 등 자세한 기록이 있어 유명하다.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모습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방식으로 건축되었다. 특히 안에 모셔진 삼존불중 오른쪽에 있는 관세음보살좌상(觀世音菩薩坐像)은 종이로 만든 불상으로 지금까지 전해지는 불상 중에 종이로 만든 불상은 드문 예이며, 또한 불상을 만든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있어 중요시되고 있다.
용문사 석불 경상남도 유형문화재138호
약 300년 전 남해군 이동면 용문사(龍門寺) 경내에서 발견된 보살상이다. 하얀 분칠을 한 상태여서 본래의 모습을 자세히 알 수 없다. 사각형에 가까운 얼굴은 원만하나 눈과 입이 작고 코가 큼직하여 다소 형식화된 면이 보인다. 긴 상체에 넓은 무릎 등은 부피감이 풍부하고 탄력적이어서 보살상의 격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흘러내리고 있는데, 띠주름 무늬가 자연스러워 불상의 특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왼손은 배에 대고 병을 들고 있으며 오른손은 가슴에 대었는데 연꽃가지를 잡고 있었던 것 같다. 통일신라 후기의 원만한 특징이 표현된 작품으로 통일신라 후기 내지는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전북 유형문화재 138호 : 송광사동종 (松廣寺銅鐘)
조선시대 만들어진 높이 107㎝, 입 지름 73㎝의 종이다.
이 범종은 숙종 42년(1716년)에 만들어진 것으로서, 종을 거는 고리까지 포함하여 높이 107㎝(종부분만은 84㎝), 아랫부분은 지름 73㎝, 두께 4.5㎝ 크기이며, 동으로 만들어졌다. 종의 윗부분에는 60개의 입화식(立花飾) 꽃무늬가 있고, 그 아래에 방패모양의 꽃무늬를 양각하였다. 다시 그 밑에 연주형(練珠形) 돌기 60개가 둘러져 있고, 종의 위와 아래를 구분할 수 있는 9.5㎝ 두께의 띠가 그 밑에 있다. 종의 아랫부분에는 지름 6㎝의 원이 8개가 양각되어 있고, 그 원 안에 범자(梵字)를 새겼으며, 그 아랫쪽에 세로의 면에는 보살입상(菩薩立像)을 조각하였고, 나머지 한면에는 전패(殿牌)를 배치하였다. 보살입상의 크기는 ㄱㄹ이 24㎝이며, 머리 뒤에 광배(光背)를 두르고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전패 안에는 주상삼전수만세(主上三殿壽萬歲)라고 양각하였다. 종의 가장 아랫부분에는 지름 6㎝정도에 실상화당초(實相華唐草)의 무늬를 둘러 놓았다. 이 동종에는 "강희 55년 병신 4월 전라우도 광주무등산증심사대종조성(康熙 五五年 丙申 四月 全羅右道 光州無等山證心寺大鐘造成)…"으로 시작하여 시주자의 이름이 양각되어 있고 "대시주 계묘 채구 건융 34년 기축 9월 중수 문광득(大施主 癸卯 蔡龜 乾隆 三四年己丑 九月 重修 文光得)"이란 글이 음각되어 있다. 이에 따라 이 범종은 광주 무등산 증심사에서 만들어 졌으며, 그 뒤 영조 45년(1769년)에 보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138호
용추사 부도군 전라남도 유형문화재138호
소 재 지; | 전남 담양군 용면 용연리 8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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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추사(龍湫寺)는 용추산 용추봉 아래에 자리하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 백양사의 말사이다. 절에서 전하기로는 백제 성왕 4년(526년)에 혜총(惠聰)·혜증(惠證) 스님이 창건하고 624년(무왕 25)에 원광대사(圓光大師)가 중창했다고 한다. 혜총(惠聰) 스님은 백제의 스님으로서, 588년(위덕왕 35)에 일본에 부처님 사리를 전하였고 595년에 다시 일본에 건너가 불교를 널리 전한 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창건에 관한 분명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서는 임진왜란 때 소요 태능(逍遙太能, 1562∼1649) 대사가 주지로 있으면서 승군을 모아 김덕령(金德齡) 장군과 연합해서 왜적과 싸웠는데, 그 영향으로 절은 폐허가 되었으나 전쟁 후 1630년(인조 8)에 소요 태능(逍遙太能) 스님이 다시 중창했다. 그 뒤 근대에 들어와 6.25로 다시 폐허가 되었다가 1961년 본래의 절터에서 윗쪽으로 300m 가량 떨어진 곳에 초막을 지은 채 유지되었다. 최근에도 별다른 발전은 이루지 못한 채 법당과 요사 각 한 채씩만 있을 뿐이다. 절 부근에는 소요 태능(逍遙太能) 스님의 부도(浮屠)를 비롯해서 춘담(春潭)·월파당(月波堂)·연봉당(蓮峰堂) 태원당, 일곡당 등의 부도와 그 밖에 부도(浮屠)편 여러 개가 있다. 당호를 알 수 있는 것은 6개로, 부도(浮屠)는 9개인데, 3기는 최근에 건립된 것이다. 부도(浮屠)의 형식은 훼손이 심하여 설명하기 어렵다. 용추사(龍湫寺)의 부도(浮屠)는 주로 조선후기의 것이고, 팔각원당형이 2기, 오륜형이 3기, 나머지 한 기는 탑신석은 유실되고, 상륜부 부재만 남아 있다. 소요당(逍遙堂) 부도(浮屠)의 전체적인 형태는 팔각원당형으로 현재 남아있는 부도 중에서 원형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으나 원래의 위치나 모습은 훼손되고 다시 복원된 것이다. 전체의 높이는 214cm이다. 기단부는 상중하대석으로 이루어져있고 하대석은 별석을 사용하였으며 중대석과 상대석은 일석이다. 하대석은 복련의 팔각형으로 연화문은 연잎을 조각하였고 연잎의 정면에는 조선시대 부도에서 보이는 두 마리의 작은 거북과 사자와 다람쥐로 보이는 2마리의 동물이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바닷게와 두꺼비 등을 새겨 더욱 장엄함을 느끼게 한다. 거북은 오른쪽은 올라가고 왼쪽은 내려오는 형태이며 간략하게 표현하였으나 생동감이 있다. 사자는 길게 옆으로 엎드려 있으면서 고개를 돌리고 시선은 아래를 보고 있다. 다람쥐 역시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오르려다 고개를 돌려 뒤를 보고 있는 모습으로 역동적으로 표현하였으나 간략하다. 하대석에는 중대석을 받치기 위한 별도의 단을 두었는데 중대석 받침의 측면에는 16엽의 앙련을 새겼다. 하대석의 높이는 35cm이다. 중대석은 원형으로 하대석과 상대석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우 낮은 편이고 별다른 문양은 없다. 높이는 8cm이다. 상대석은 팔각으로 각 모서리에는 앙련을 얗게 조각하였으며 높이는 15cm이다. 탑신은 팔각으로 배흘림과 모서리가 표현되어 있다.높이는 51cm이다. 옥개석은 넓으며 아랫면에는 각형 연목을 얗게 이중으로 조각하여 목조건축의 양식을 보이고 있다. 옥개의 높이는 32cm이다. 상륜부는 옥개 정상에 1단의 사각형 괴임을 하고 있는데 앙련, 복발, 보륜이 차례로 놓이고 보주도 잘 남아 있다. 월파당(月波堂) 부도(浮屠)의 전체적인 형태는 팔각원당형으로 총 높이는 116cm이다. 지대석은 자연석을 약간 다듬어 원형으로 만들었고 지름은 72cm, 두께는 11cm정도이다. 기단석의 상면은 수평이며 연화문을 음각하였다. 기단석 측면의 각 모서리에는 구슬을 이은 연주문을 새겼는데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탑신석의 높이는 53cm이다. 팔각의 옥개석은 지대석과 같은 넓이고 아랫면은 평평하다. 상륜부는 일석으로 보륜과 보주를 놓았다. 상륜부의 높이는 41cm이다. 1988년 도난되어 해지.
진천 용화사 석불입상 충청북도 유형문화재138호
소 재 지; | 충북 진천군 진천읍 신정리 58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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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군 진천읍 신정리에 있는 높이 7m의 커다란 보살입상(菩薩立像)으로 타원형의 얼굴에 은근한 미소가 보인다. 머리 꼭지에는 벙거지 같은 것이 올려져 있는데 나중에 고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목에는 3줄로 새겨진 삼도(三道)가 있고 그 아래에 표현된 목걸이 장식은 얼굴과 함께 불상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신체는 부피감이 거의 없는 커다란 직사각형을 이루고 있다. 옷은 가슴을 드러낸 채 양 어깨에 걸쳐 입었고 하체에는 U자 모양의 주름을 겹쳐 나타냈다. 가슴 앞에 들고 있는 오른손이나, 연꽃을 들고 배에 댄 왼손은 작게 표현되었다. 거대한 크기, 부피감 없는 사각형태, 빈약한 세부표현에서 고려시대 지방화된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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