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순 일상탈출 스케치 뷰 제182화]
♤ 제 목 : 수원 화성(華城) 역사 문화 탐방여행
♤ 언 제 : 2023년 1월 29일 (일요일)
♤ 장 소 : 경기 수원 팔달구 정조로 825
♤ 목 차 :
1. 수원 화성행궁 (水原 華城行宮)
2. 신풍루 (新豊樓)
3. 성신사 (城神司)
4. 서포루 (西砲樓)
5. 서암문 (西暗門)
6. 화성장대(華城將臺) 서장대 (西將臺)
7. 서노대 (西弩臺)
8. 화서문 (華西門)
9. 서북공심돈 (西北空心墩) 악양루(岳陽樓)
10.장안문 (長安門)
11.화홍문 (華紅門) 북수문 (北水門)
12. 뒷풀이 (용성통닭)
# 프롤로그
어제 북한산둘레길 8~10구간 트레킹
땀 많이 흘려 뒷풀이 내내 컨디션 난조로
2차 참여하지않고 집으로 곧바로 직행했다
바로 오늘 수원 일정이 있기도 하였기에
자제하려 함도 내심 있었던 것도 사실
이젠 술 에 대한 욕심도 예전만 못 하다는 …ㅋ
어쨌거나 저쨌거나
샤워하고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기절하여 곧바로 꿈나라로…
다음날 아침일찍 일어나
서둘러 아침 챙겨먹고 커피 내리고
수원 출발 채비 마친다
출발 하기전 까지
차를 가지고 갈까 말까 갈등 때리다가
그냥 지하철 타고 가기로…
수원역으로 곧바로 가서
버스타고 수원 행궁가면 되리라 생각하고
두시간 텀 잡고 출발하노라니
에고지고 이를어째
좀 더 여유시간을 가졌어야 했나보다
생각보다 늦어서 지각했다요…ㅋ
수원역에서
친구들 전화 빗발치게 오는데 이런Jan장
오늘따라 전화 음성이 전혀 들리질 않네그랴
안되겠다 싶어 그냥 택시 잡아타고
수원 행궁 주차장으로 달려간다
행궁 앞에서 내려보니 광장에 빙둘러 서 있는
탐방객들이 보여 친구들이다 직감했다는...
에효 X 팔려서리!
빨리 오라는 친구 손짖에 후~다다다닥!
참석 순서 번호 부르고 있네그랴...
형순까지 40번...
맨 꼴찌로 참석완료...ㅋ
사설이 너무 길었다요
각설하고,
오늘 수원 화성행궁 탐방은
평소 개인 버킷리스트 순서 상단에 있을만큼 고대하고 고대하였던 바 드디어 뜻 을...ㅎ
특히 조선왕조 많은 왕들 중
세종 다음으로 좋아하는 성군 이었기에
오늘 탐방여행이 너무 기대가 크다는...ㅎ
1. 수원 화성 행궁
화성행궁은
조선 정조 13년 (1789)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부 읍치 자리로 옮기고,
원래 수원부 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옮겨 오면서 관청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왕이 수원에 내려오면 머무는 행궁으로 사용
정조는 수원도호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
위상을 높이는 한편, 1795년 화성행궁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치르기 위하여 건물의 이름을 바꾸거나 새로 지었다.
1796년에 전체 600여 칸 규모로 완공되었다.
조선시대 전국에 조성한 행궁 가운데서
가장 돋보이는 규모와 격식을 갖추었으나,
1911년부터 일제에 의해 병원과 경찰서로
쓰이기 시작하면서 건물이 파괴되어,
현재는 낙남헌과 노래당만 본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1996년부터 복원사업을 시작해
2002년에 중심권역의 복원공사를 마쳤다.
2. 신풍루 (新豊樓)
택시에서 내려 광장을 바라보니
홍살문 너머로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어
혹시 우리 친구들이 아닐까 추측해 보았는데...
역시나 우리 친구들이 맞았다는...ㅋ
홍살문
능·원·묘·궁전 또는 관아 따위의
정면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나무 문.
홍전문(紅箭門) 또는 홍문(紅門)이라고도...
둥근 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 없이 화살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워 놓았고,
그 중간에는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다.
이 태극 문양은 네가지 형태로 구분되는데,
삼태극, 이태극, 및 빛을 넣는 삼태극 등으로 표현되어 있고, 태극 문양 위의 지창(枝槍)은 2지창과 3지창의 두 가지로 구분되어 있다.
이 홍살문이 언제부터 어떤 연유로 해서
세워지게 되었는지는, 문헌상 기록이 없어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세워진 장소로 보아서는
경의(敬意)를 표하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지 않나 생각될 뿐이다.
신풍루 앞에 둥글게 둘러 모여서
오늘 특별히 역사 탐방에 맞춰서 영록대장이
모셔온 한신대 사학과 김준혁 교수님 초빙해
설명을 듣고 있었더이다...
필자는 그래도 많이 늦지를 않아
공식 설명 듣기전에 도착하여 다행이었다는...ㅋ
그리고 참석 순번 맨 마지막 번호 40번을
부여(?) 받았다요...ㅎ
수원 화성 신풍루 앞에서 단체사진...
신풍루 (新豊樓)
화성행궁의 정문
처음에는 진남루라 부르다가 1795년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면서 이름을
신풍루로 바꿨다.
신풍루는
중국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고향인 풍패(豊沛)에서 따온 이름으로 제왕의 고향 풍패지향
(豊沛之鄕)으로서 화성을 자리매김하고자
했던 정조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고...
신풍루 앞 광장에 심어져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 세 구루가 보이는데
행궁을 건축할 당시부터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는데 문헌상 사료는 없다는...ㅎ
정승나무라고 불리기도 하였는데,
궁궐의 조경제도에 의해 품자 형태로
심어진 것으로 영의정, 좌의정, 우이정이
이 나무 아래에서 백성을 제대로 돌보고
올바른 정치를 하라는 의미를 담고있다...
(인터넷에서 발췌함)
100여년 전,
일제에 의해 행궁이 훼손되는 장면을
이 느티나무들은 울분을 삼키며 당시 오롯이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단체사진을 마치고
팔달산 서장대방향으로 올라가는데
주변엔 아직도 수원 행궁 2단계 복원공사가
한창이었다는...
수원 행궁을 둘러싸고 있는 팔달산
도로를 교수님을 따라 줄지어 걸어 올라간다...
3. 성신사 (城神司)
성신사 (城神司)
수원 화성을 지키는 사당으로 성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사용되었던 건물
정조는 수원화성 축조가 완성되는 무렵에
성신사를 축조할 것을 명하고 축문을 지어
내렸으며 1796년 9월에 완공 하였다...
정조의 축문 내용은,
"우리고장 수원을 바다처럼 평안하고,
강물처럼 맑게 하소서..." 라 하더이다
매년 봄, 가을에 사당 안에 모시고 있는
신주에게 제사(고유제)를 지냈다고 함...
일제시대때 사당과 제사도 없어졌다가
2009년에 화성성역의궤와 발굴유구를
옛 강감찬 장군 동상 자리에서 발견하여
참고하여 복원 된 것이라고 합니다...
김준혁 교수는 정조대왕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분이시고, 행궁 복원 작업에 참여하시기도 하여 해박한 지식으로 성신사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팔달산(八達山)
해발 128m의 아담한 산
광교산 남쪽에 위치한 탑모양의 산이라 해서 옛이름은 남탑산이다.
현재의 이름은 태조 이성계와 관련이 있는데,
남탑산 기슭에 은둔한 한림학사 이고에게
태조가 벼슬을 내렸으나 이고는 산의 아름다움을 말하며 사양했다고 한다.
궁금해진 태조가 화공을 시켜 남탑산의 풍광을 그려오게 해 보고는 “역시 아름답고 사통팔달한 산”이라고 해 팔달산이라 명명했다나 뭐라나...ㅎ
지금은 수원의 중심지 화성을 품은 문화유산
공원으로 자리매김하여 관광지로도 유명하고
수원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문화공원 이라는...ㅎ
성신사 설명을 마치고
우리는 다음 유적지 서장대로 향한다...
소나무 숲 사잇길을 올라가노라니...
서장대로 가기 전
화성 성곽 축성에 얽힌 일화와 사연들과
당시 축조에 참여한 백성들의 애환 등등
나중 복원작업에 따른 경험담을 생생히
설명해 주고있는 김준혁 교수...
설명이 끝나고 나서 우리는
잠시 휴식시간을 가지기로 하였다...
복원된 화성 외곽 성벽 풍경 이모저모...
잠시 후, 외곽성벽을 따라 가노라니
예전 그대로의 성곽과 복원된 성곽들은
색깔로도 확연히 구분할 수 있었다...ㅎ
바람에 실려와 성곽 틈 사이 떨어져 있는
흰 깃털이 필자의 시선을 사로 잡았다...
마치 정조의 분신이 왕림한 것 처럼 느껴짐은
필자만의 과도한 생각 일런지요...ㅎ
외 성곽 따라 걷다보니
불쑥 튀어나온 건물이 보이는데...
4. 서포루 (西砲樓)
포루는 벽돌로 만든 3층 구조로
아래 두 층은 화포나 총을 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상층은 군사들이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누각을 만들었다.
북서포루와 북동포루는 안팎의 지붕 형태가 다르다. 이는 화성성역의궤에 수록되어 있는 각 시설물 자재 목록을 바탕으로 복원된 것이다.
세월의 흔적이 오롯이 묻어나는
성곽 바위들의 색상과 조각조각 이어진
선들이 너무나도 아름답다요...ㅎ
성곽 중간엔 이렇게 배수로로 생각되는
구멍이 몇 군데 뚫여있어 세밀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다는...
이곳 성곽 위에 세워진 건물은
바로 서포루 라 하더이다...
성곽 쌓을때 바위 원형을 많이 훼손하지 않고 가진모양 그대로 쌓아 올리며 중간 중간 틈새를 메우며 축조 하는 선조들의 미적 감각과 축성 기술은 그 어느 나라를 가 보아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독보적이어 필자는 성곽의 치명적 아름다움에 도저히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가히 하나의 작품으로 볼 수밖에 없음 이로세...
華城 성곽
네모지고 마름모꼴
커다란 바위 작은 바위 완벽 조화로움
생긴 모양새 제 각각 원형 그대로
자연스럽지만 밋밋함도 없나니
중간중간 틈새 박아놓은 알맞은 쐬기돌
이리삐뚤 저리삐뚤 균형감 예술이네
제멋대로 쌓아 놓은듯 하나
가만 뜯어 세세히 살펴 볼라치면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음이야
바위들 모양대로 짜 맞추어진
형이상학적 도형, 이어진 선 의 미학
가히 명불허전 이로세
그 어느 유명화가 흉내 낼 수조차 없는
성곽 자체 그대로 하나의 예술 작품 이로니
성곽 매력에 흠뻑 빠져 버릴밖에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한 민족의 끈질김과 억척스러움 닮았음일런가
독창적이고도 투박한 자연미 말야
선조들의 예술적 감각
도자기와 더불어 성곽에도 있었나니
소중한 문화유산 보존하세나
백범 김구선생 문화의 힘 강조
우리를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 에게도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라 했던가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만이
세계만방에 크게 어필될 수 있나니
현재 한류 바람처럼 말야...
백번, 천번 동감 또 공감 하누나...
(230129 수원 화성 탐방 성곽 바라보며...)
조선 성곽의 표면의 아름다움...ㅋ
이곳 성곽들은 어딘가 모르게 자연미가
없어보이는데 복원 성곽이라 그럴지도 몰라...ㅋ
5. 서암문 (西暗門)
잠시 후, 우리는 서암문에 도착...
인터넷에서 자료수집 차원 가져왔다...
서암문 (西暗門)
암문은 성곽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도록 만든 출입구...
사람이나 가축이 통과하고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된 문...
화성에는 5개의 암문이 설치되어 있고,
서암문은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가까이 접근하기 전에는 암문이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감춰져 있다...
1796년(정조 20) 6월 18일 완공되었다.
(인터넷에서 발췌함)
형합과 필자가 함께
김준현 교수의 설명을 경청하고 있다...
김준현 박사의 열띤 설명이 이뤄지고...
박사님의 설명에 따르면
정조는 일반 국내성 축성법에 의존하지 않고
중,일 축성법 중 좋은점은 받아들이는 포용력을
발휘해 중국식 벽돌 축성법 도입하여 지었다고
하네요...
암문을 통해 성곽 안으로 올라간다...
성 안에서 보는 서암문 출입구...
서암문으로 성 안쪽으로 들어와 좌측으로
올라가노라니 드디어 서장대 건물이 보인다...
6. 화성장대(華城將臺)
조선시대 군 지휘소
화성에서는 연무대라 불리우는 동장대와
화성장대라 불리우는 서장대 두곳의 장대가
설치되어 있답니다...
산상서성
산상서성이란 말 그대로 산 위에 지은 성...
팔달산에서 보았을때 서장대, 서남각루, 화서문, 서쪽방향 경계위한 성곽이라 보면 된다...
서장대를 배경으로 셀카를...
서장대 앞에서 내려다 본 수원 시내풍경...
이크! 서장대가 아니라 화성장대 인건가?
다 똑 같은 이름으로 서장대를 화성장대로
부르기도 하였다네요...ㅎ
화성장대 (華城將臺)
화성은 한국 성의 구성요소인
옹성, 성문, 암문, 산대, 채성, 치성, 적대, 포대, 봉수대 등을 모두 갖추어 대한민국 성곽 건축
기술을 집대성 했다고 평가된다...
지형에 맞추어 읍성과 산성의 구조가
모두 존재하도록 축조 되었다...
여사친들끼리 모여서 사진찍고 있나니
고럼 필자는 화성장대 배경으로 셀카를...ㅎ
화성장대 천장 아래에는
정조가 화성장대에서 군사훈련을 지켜본후
감회를 읊은 시가 걸려 있었다...
화성장대에서 친히 성 안에서 하는 군사훈련을 보시고 시를 지어 처마 위에다 씀' 이라는 제목의 시를 화성성역의궤 번역본으로 옮겼다.
華城將臺 親閱城操 有詩題于 楣上 (화성장대 친열성조 유시제우 미상)
拱護斯爲重 經營不費勞
(공호사위중 경영불비노)
城從平地迥 臺倚遠天高
(성종평지형 대의원천고)
萬垛䂓模壯 三軍意氣豪
(만타규모장 삼군의기호)
大風歌一奏 紅日在鱗袍
(대풍가일주 홍일재린포)
현륭원을 호위하는 일 중대하지만,
재용을 허비하지도 백성을 수고롭게
하지도 않았나니
성은 평지를 따라 둘러있고,
장대는 먼 하늘에 기대어 높이 솟아 있도다
수많은 성가퀴는 규모가 장대하고,
삼군의 의기가 호쾌하노라니,
한나라 고조의 대풍가 한 곡조를 연주하니,
붉은 해가 비늘 갑옷에 있구나.
정조는 치세 중 학문과 문무도 함께 중시하며
군비확장에도 힘 을 많이 쓰신 군주 이셨지만
한편 그 시대 영국에선 산업혁명 시작...
프랑스는 루이16세 기요틴(단두대) 처형되며
군주제로부터 벗어나기 시작...
미국에선 영국식민지배 벗어나기 위해
독립운동이 한창 벌어지던 시기였다지요...
필자가 아쉽게 생각되는 건 정조와 정약용
이었다면 신문물 관심이 많았던걸로 아는데
그때 외국에 사신을 파견해서 신무기 및 신과학
배워오게 하였으면 대한민국의 현재는 많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ㅋ
그놈의 당파 싸움하는 정치세력들 몽니로
될 것도 안되는 구렁텅이로 빠지게 되었나니
정조 사후 벌어지는 조선의 운명은 혼돈의
회오리 바람 속으로 휘말리게 되었으니...ㅠ
가만히 하늘 바라보면서 상념에 잠겨본다...
김준현 교수님의 현장 강의는 계속되고...
화성장대 광장 앞 한 구루 소나무는
우뚝 서서 무슨 생각 하고 있을까나?
그 너머 새파란 하늘엔 새털 구름이
잔잔히 퍼지고 있네요...
화성장대 앞에서 단체사진을 ...
한편 화성장대 옆 에는
서노대(西弩臺)가 자리하고 있었으니...
7. 서노대(西弩臺)
서노대(西弩臺)
서노대는 기계식 활인 노(弩)를 쏘기 위해
높게 지은 시설로 군사지휘소인 서장대를
지키는 역할을 한다.
노대(弩臺)는 적의 동향을 살피고 깃발을
이용해 적의 위치를 알리는 용도로도 쓰였다.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가 있다.
서노대는 화성의 서쪽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팔달산 꼭대기에 있어 적을
감시하기에 적합하다.
팔각형의 몸체가 위로 가면서 줄어드는
안정적인 형태로, 안에는 흙을 채우고 겉은
벽돌로 마감하였다.
화성장대(서장대)를 호위하고 있는 서노대...
화성장대를 뒤로하고 성곽 따라 내려간다...
서이치(西二雉)
화성장대에서 내려와 성 바깥 쪽으로 나간다...
오목거울 속에서 친구들을 담아본다...ㅎ
성 밖으로 나와 오른 쪽으로 보노라니
아까 우리가 보았던 서포루가 보인다요...
성 밖 아래로 내려가다 보니 오른쪽
성곽아래로 갈대 군락지 숲 이 무성하더이다...
화성 성곽너머 하늘엔 흰구름이 하늘색깔 어쩜 저리도 새파란지 가슴 시리도록 청청하네... 뒤에 보이는 불쑥 튀어나온 성곽은 갈대숲 언저리에서 경계를 하기에 용이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성곽 위 우뚝 자리잡고 있는 서북각루가 보이기 시작한다... 경사진 능선을 따라서 내려오던 성벽길이 평지로 바뀌는 곳에는 화서문 일대 군사들을 지휘할 수 있는 장대(將臺) 기능을 갖고있는 서북각루가 설치되어 있다. 이곳은 맞은편 숙지산과 함께 서남쪽으로 연결되는 길을 감시하고 방어할 수 있는 곳이다. 서북각루를 보호하기 위 해 부근에 치성이 설치되어 있다. 소나무 두 구루가 다정하게 나란히 외벽을 경계하고 서 있었다...ㅎ 표토존인듯 계단까지 놓여 있었다는... 8. 화서문(華西門) 이름은 화성(華城)의 서쪽(西)이라는 것에서 유래되었다. 문루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2층 건물이며, 문의 앞부분에는 반달형으로 된 전축(塼築) 옹성(甕城)이 있는데 높이는 안쪽이 2.62m, 바깥쪽이 3.65m, 두께는 3.25m이다. 이 옹성은 한 평이 트여 있어 문을 출입할 때 지나갈 수 있도록 되있다. 문의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어 있어서 서장대와 장안문 쪽으로 갈 수 있다. 화서문을 중심으로 팔달산 방면으로 화서 공원이, 장안문 방면으로 장안 공원이 있어, 시민들의 휴식처로 사랑받고 있다고 하네요... 수원 화성의 서쪽문으로 문의 모든 시설과 크기는 동쪽의 창룡문과 거의 같은 구조로 되어있다. 네모 반듯한 큰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축대 위에 1층의 건물을 세웠는데,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기둥 사이는 모두 개방되어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 건물이고, 축대의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과 문의 앞쪽에 벽돌로 쌓은 반달모양의 옹성이 있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지키기 위한 구실을 하며 2중의 방어 효과를 갖는다. 참고하기위해 화서문 안쪽에서 찍은 사진을 인터넷에서 가져옴... 9.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1796년(정조 20) 3월 10일 완공 3 층 건물로 아래쪽 부분의 치성(雉城)은 석재로, 위쪽 부분의 벽체는 전돌로 쌓았다. 내부는 전투에 편리한 구조를 갖추었으며 계단을 통해 오르내렸다. 1797년(정조 21) 1월 화성을 방문한 정조는 서북공심돈을 보고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든 것이니 마음껏 구경하라”며 매우 만족스러워 했다고 한다. 바로 자신의 아이디어로 만들었기에...ㅋ 독창적인 건축형태와 효과적인 재료 활용을 보여주는 서북공심돈은 역사적, 학술적,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1년 3월 3일 보물 제1710호로 지정되었다. 그림을 살펴보면 수원화성 성곽 시설물의 정식 이름 대신 친숙한 방화수류정, 각건대, 소라각 등을 비롯하여 생소한 이름인 악양루(서북공심돈) 등으로 표기된 것이 흥미로워서 ... 나중에 영록대장 나누어준 화성전도도설에도 공심돈 위 에 악양루라 쓰여있어서 궁금해서 자료를 찾던중 위 사진처럼 고종 사후 순종때 만든 화서도에 처음 등재 되었다고 합니다... 중국 동정호에 있는 악양루를 비견할 만큼 아름답다고 생각했을 것으로 사료됨...ㅎ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악양루(岳陽樓) 여기서 중국 두보의 시 한 수 소개함다... 登岳陽樓 (등악양루) 杜甫(두보) 昔聞洞庭水 (석문동정수) 예로부터동정호를 들었더니 今上岳陽樓 (금상악양루) 이제야 악양루에 오르네. 吳楚東南坼(오초동남탁) 오와초가 동남으로 갈라졌고 乾坤日夜浮(건곤일야부) 해와 달이 밤낮으로 이곳에서 떠 오르네. 親朋無一字(친붕무일자) 친척도 친구도 소식 한자 없고 老病有孤舟(노병유고주) 늙고 병들어 외론 배로 떠도는 몸 戎馬關山北(융마관산북) 관산(고향)북쪽은 여전히 전쟁소식 憑軒涕泗流(빙헌체사류) 누각 난간에 기대어 눈물콧물 흘리네. 서북공심돈 앞 에서 셀카 찍노라니 아까 거쳐왔던 서북각루가 저 멀리에서 손짖 하고 있는 듯 하다... 서북공심돈/화서문 앞 공원에서 잠시 휴식시간을 가지며 간식을 나누어 먹으며 틈새에 대인 리딩대장의 행운의 2달러짜리 지폐 신권 전달식이 벌어진다... 필자도 참석 댓글 세번째라 하여 2달라 짜리 1장 받았다요...ㅎ 고마우이 대인친구...^@^ 공원에는 비둘기 떼들이 우굴우굴 거린다... 공원에 계신 분들이 먹이를 간간히 뿌려 주시니까 이 녀석들 우루루 사람 있는 곳으로 몰려 다닌다...ㅋ 공원 광장 비둘기들 모습... 우루루 몰려 날아 다니기도...ㅎ 화서문 앞 광장 풍경 이모저모... 잠시후 김준혁 교수의 현장 강의가 다시 시작되고... 우리는 화서문과 서북공성돈을 뒤 로하고 다음 목적지로 출발한다... 공원 도로와 성곽 사이 잔디 밭엔 산수유나무 몇 구루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빠알간 산수유 열매가 수두룩 떨어져 있어 나무 아래엔 온통 벌거죽죽 하다요... 북포루(北砲樓) 화서문을 기점으로 걸어가는 방향이 북쪽이라 북포루가 자리를 점 하고 있었다... 북포루에서 서북공심돈 바라 다 보았다... 반대편 북쪽 성곽 방향으로 보노라니 북서포루가 빼꼼히 보인다... 북서포루로 향 하다가 김준혁 교수는 우리를 포루가 보이는 성곽으로 다가가 북서포루에 대해 설명을 시작한다... 잔듸밭에 심어져있는 어느나무 등걸엔 녹색 이끼가 끼어 시선을 사로 잡는다...ㅎ 성곽 위에는 군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고... 김준혁교수는 북서포루에 대해 설명 하는데 북서포루 전각 지붕을 볼라치면 오른쪽 지붕이 잘라진 것 같은 비대칭에 대하서도 우리나라 전각에 저런 사례가 다른곳에서는 볼 수없는 형태라고 한다... 바깥쪽은 우진각 지붕이고, 안 쪽은 맞배지붕...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자재조달 및 공기단축 요인으로 의도적으로 맞배지붕으로 만들었다는 야그...ㅋ 북서포루 (北西砲樓) 북서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砲樓) 중 하나이다. 화서문과 장안문 사이에 위치하며 1794년(정조 18) 9월 24일 완공되었다. 포루는 성벽의 일부를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치성 위에 3층의 내부를 비워두고 그 안에서 화포(불랑기)공격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이다. 근처의 북포루와 함께 적을 공격할 수 있다. 불랑기(佛郞機 조선후기 대표적인 휴대용 화포... 불랑은 Frank 라는 유럽인을 뜻 하는 말로 서양에서 만든 화포를 불랑기라 불리윘다... 북서포루와 산수유... 북서포루를 뒤로하고... 성벽 표면의 얼굴들... 화성 성벽 표면 얼굴들을 감상하며 걷노라니 어느덧 장안문에 도착한다... 장안문과 볼록 튀어나온 북옹성이 서서히 가까워져 오고... 10. 장안문 (長安門) 참고용으로 인터넷에서 가져옴... 장안문 전경 장안문은 화성의 북문이자 정문이다. 보통 성(城)의 남문을 정문으로 정하지만, 조선시대 당시 임금이 한양(지금의 서울)에서부터 수원으로 오실때 가장 먼저 맞이하는 문이 북문(장안문) 이었기 때문에 북문을 정문으로 정했다. 잘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은 석축에 홍예문을 냈고 그 위에 정면 5칸 측면2칸의 다포양식으로 이루어진 중층의 문루가 세워져있다. 또한 가운데에 홍예문이 나있는 벽돌로 쌓은 옹성이 있으며, 양옆에 다른 성벽보다 높이가 약간 높은 두개의 적대를 설치하였다. 장안문의 이름은 중국의 옛 왕조인 전한(前漢), 수(隋), 당(唐)나라의 수도였던 장안(현재의 시안시)에서 따온 것으로 이는 당나라 때의 장안성 처럼 화성 또한 융성한 도시가 되라는 정조의 뜻이 담겨 있다... 역시 외관을 볼라치면 국내 조선 성문과는 다르고 삼국지 에서나 나오는 성문이 연상 되는건 필자만의 생각 일런지요? 실제로도 초반에 언급한 바 있드시 정조께서는 조선 축성 방식만 고수하지 않고 채제공, 정약용 등에게 각 나라별 성문의 장 단점을 연구하여 장점만을 살리는 실리적 성문을 만들도록 하셨다지요...ㅎ 바로 그러한 면 실리주의를 필자가 정조를 흠모하는 이유 중 한 면인 것이다...ㅎ 화려한 용 문양이 두 눈을 부라리며 날카롭게 지켜보고 있었다요... 좌측 가파른 계단을 올라간다... 구멍사이로 바깥 북옹성 대문을 바라다 보았다... 둥근표시 문양이 장석에 세겨져 있어서 담아 보았다... 성곽은 도로를 가로지르며 이어져있고 친구들도 몇몇 눈에 띈다요...ㅎ 통로가 타원형으로 이어지는데, "적 들이 안 으로 들어오면 다 디졌어..."ㅋ 홍이포(紅夷砲) 1604년 명나라 군대가 네덜란드와 전투할 때 중국인들은 네덜란드인을 ‘홍모이(紅毛夷: 붉은 머리를 한 오랑캐)'라고 불렀고, 이때 네덜란드인들이 사용하던 대포인 컬버린을 ‘홍이포(紅夷砲)’라 부르게 되었다. (셀카를 너무 많이 찍는거 아니냐 굽쇼? 내 맘이다 뭐...ㅎ) 장안문도 암울하게 검은 빛을 띄운다 우리와의 조만간 헤어져야 함 을 눈치 챘나 보다요...힝! 오늘 우리들의 화성행궁 문화탐방 종착지 화홍문(북수문)이 시야에 들어온다...ㅋ 11. 화홍문(華紅門) 북수문(北水門) 화홍문 (華紅門) 북수문(北水門) 수원성곽(사적 제3호) 내의 북쪽 수문이다. 일명 ‘북수문(北水門)’이라고 하며, 아래에 수문이 있고 그 위에 문루가 있다. 수원시내를 남북으로 흐르는 광교천(光敎川)이 여름에 자주 범람 1796년(정조 20) 성곽을 신축하면서 준설하고 남북에 각각 수문을 만들었는데, 그 중 상류에 해당하는 북쪽 수문이다. 성곽 내의 시설물 중 상당수가 20세기에 들어오면서 파괴되었으나 이 부분은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었다. 수문은 모두 7개의 석조아치로 만들어졌는데 가운데 한 칸이 약간 넓고 나머지는 아치 너비가 8자, 높이 7자 8치이다. 아치와 아치 사이는 네 개의 돌기둥을 세워 물이 잘 빠지도록 하였다. 아치 위로는 다리돌을 놓아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하였으며 바깥쪽으로는 벽돌로 낮은 성벽인 첩(堞)을 쌓았다. 첩에는 네모난 대포 구멍을 뚫고 그 위에 소포 (小砲) 구멍 14개를 뚫었다. 각 아치에는 쇠로 만든 살창을 설치하여 이곳으로 적이 침입하는 것에 대비하였으며, 이 수문은 좌우로 성벽에 이어지도록 하였다. (사진, 자료는 인터넷에서 발췌함) 커다란 짐승의 언굴 그림을 크게 그려놓고 눈 에 구멍을 뚫어놓아 총을 쏠 수 있게 하였다... 아래로 흐르는 광명천 물줄기 바라보며 담아본다... 우리 친구들이 탐방을 마치고 모여 있었다... 얼른 홍화문 현판만 부리나케 찍고나서 서둘러 곧바로 뛰어 아래로 내려간다 언덕 높은 곳에 동북각루(東北角樓) 와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라는 정자가 있고 그 아래로 용연(龍淵)이 있으며, 수문 위 아래로는 흐르는 물 사이로 넓적한 바위가 드러나 있어 수원성곽 주변에서 가장 경관이 뛰어나다.... 찍는게 어려워 인터넷에서 주, 야간 사진 가져와 올려본다... 야간 개장도 한다고 하니 한번 와 봄직 하다는...ㅎ 긴 머리, 아니 긴 나뭇가지들을 늘어뜨리고 가로수 되어 길게 뻗어 서 있다요... 능수버들 본 지도 언제였던가? 기억이 가물가물 하기만 하여이다... 봄 철에 파릇파릇한 새 이파리들이 나오면 장관이 펼쳐질듯 하겠더이다...ㅋ 걸음 하셔서 해박한 지식으로 역사 현장 문화 강의를 하여주신 김준혁 교수님과는 여기서 작별을 고했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교수님...^@^ 12. 뒷풀이 (용성통닭) 오른 쪽 골목으로 들어가 용성통닭집으로 뒷풀이 하러 들어간다... 소맥 한 잔씩 말아서 건배 외치며 뒷풀이 하면서 오늘 수원 화성행궁 역사 문화탐방 여행을 마무리 짖는다...ㅎ 고대하던 수원 화성행궁 성신사, 화성장대, 화서문, 서북공성돈, 북옹성 장안문, 화홍문(북수문), 정조대왕과 정약용의 실리주의 입각한 자재조달과 국내 축성법 만 고집하지않고 타국 축성법 장ㆍ단점 연구 도입 하는 합리적 사고방식 등등 화성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지며 걷는 내내 행복 했답니다...ㅎ 리딩대장 대인친구, 역사 문화탐방 이해력 돕기 위해 김준혁 교수 초빙 하여 준 영록대장,그리고 함께 탐방하며 걸었던 여러 회원 친구들 함께여서 너무나 즐겁고 행복한 여행 이었나니 모두에게 감사를 표 합니다...^@^ 친구들은 2차 갈 팀과 각자 집으로 갈 팀 나뉘어서 필자는 귀가길에 영달친구가 과천대공원까지 태워주는 관계로 아주 편히 집으로 올 수 있었답니다... 영달친구 태워주어 고마우이...^@^ 이렇게 지하철 4호선 타고 집으로 가면서 오늘 수원 화성행궁 역사 문화탐방 여행기를 갈음코져 합니다... 주인공이라고 행운의 선물 미화 2달라 짜리 신권 지폐를 감사히 받았답니다...^@^ 우리친구들에게 선물하여준 華城全圖 圖設 감사히 받았읍니다...^@^ # 에필로그 정조라 불리우는 이산이여! 그토록 가고자 소망했던 수원 화성(華성) 현장 찾아오노라니 설레는 마음 가눌길 없네 정조의 숨결 흔적 찾아 수원 화성행궁 외곽 도성의 곳곳 발자취 두루두루 걸으면서 탐방하여 보리라 선왕 할아버지 영조 노론 소론 당파싸움 소극적 탕평책 펼쳐 잠재우려 노력 했건만 결국 정쟁에 휘말리더니만 사도세자 죽음에 이르게 하나니 아비가 자기자식을 죽일수 밖에 없는 지경에 어찌 이르렀단 말이더냐... 모든 현장 다 지켜본 세손 이산 생각은 있으되 입을 닫고 귀를 막고 살았으니 사무친 속내 새카맞게 타들어 갔을 터 끝내 버티어 권자에 오르나니 지난날 한 에 맺혔던 응어리 어찌 풀것인가 위정자들 아직 속내 감추고 있나니 하물며 피붙이 외척들까지 말야 권력 다툼엔 피도 눈물도 없단 말이드뇨? 에라이 후안무치 족속들아... 슬기로운 정조 선왕 유지 받들어 강력한 탕평책 펼치며 노심초사 왕권강화 모색 홍국영 세도정치 밀어주며 정적 외척세력 복수전 펼쳐 제거 하였으나 충복 홍국영마저 나중에 배신 실망 예나 지금이나 사람 속 알다가도 모른다 하지 않던가 말야 위정자들 정권 야욕은 끝이 없나니 어려서부터 외로웠으리라 그래서 한 여자 마음속 깊히 은혜 했다더라 성가 덕임 의빈 성씨 말야 하지만 세상은 잔인했으니 고작 5년도 같이 살지 못 하였나니 얄굿다 정조의 사랑이여 아시나요? 의빈 성씨 묘원이 아들 문효세자와 도산공원에 있었다는 사실 일제때 그 옆에 골프장을 설치했던 것도 아들 문효세자와 함께 서삼릉으로 이장 아들 문효세자는 효창원으로 조성 되었으나 의빈 성씨 묘역은 서삼릉 태실 언저리에...ㅠ 옷소매 붉은 끝동 드라마 보며 머스마 체면이고 뭐고 눈물 마구 쏟아지더이다 영남 만인소 사도세자 죄를 신원하고 그를 모해한자들 처벌 상소 접 하메 힘입어 화성 경영계획 박차 정조 이산 아비 사도세자, 모친 해경궁 홍씨 위로하려 효심으로 수원 화성 행궁 지었더라 어찌보면 끝 없는 신하들 당파싸움 지치노라니 정치개혁 화성에서 실현코자 1794년 화성 축조계획 발표 총 감독 채제공, 계획설계 정약용 주도 아래 2년 6개월 만에 완공 하였더라 정조의 애민주의, 정약용의 실리주의 입각한 설계도면 밎 거중기등 신기술 도입 주효했으니 가능 했으리라 읍성과 산성을 합쳐놓은 듯 기존 조선 축성법 고집않고 외국 축성법 중 장.단점 고려하여 독창성 발휘하나니 창룡문(동),화서문(서),팔달문(남),장안문(북) 화성장대,서북공심돈(악양루),화홍문, 동장대, 까지 정조 자신의 이상적인 꿈 을 펼칠 도시를 만들고자 함 아니었을까... 화성 행궁 단기간 완성에 힘 입어 정조는 평생 한 맺힌 사도세자 복원작업 오희연교, 임오의리를 천명 사도세자 억울한 죽음으로 규정 관련자는 처단 안 하겠다 설득 했으나 노론 벽파 아연실색 정국은 냉각 오호 통재라! 오희연교 발표한지 한달도 채 되기 전 갑작스레 죽음을 맞노라니 그의 죽음에 많은 의문점 남았으나 그러나 어이하리요 이미 스러져 버렸노라니 사후 조선 운명은 혼돈의 회오리 속으로... 개혁세력 급격 와해 탕평책도 폐기, 권력기관 장용영도 혁파되나니 정조의 꿈 은 산산조각 나 버렸더이다 왜? 예나 작금이나 위정자들은 정적의 모든것 무조건 배척하고 좋은 점도 무참히 밟아버리나니 현재 정치세력 하는 꼬락서니 옛 정치꾼들과 비견해도 전혀 다를바 없나니 기득권 지키려 과욕, 후안무치 아닐런가 에효 어쩜 그리도 똑 같을까 말야...ㅉㅉ 나는 정조를 사랑한다 그의 애민사상과 실리주의 원칙과 고집을 그리고 학문사랑과 사랑법도 말야 이산이시여! 그대는 의빈 성씨와 지금 행복 하신가요? 순간은 곧 영원이라 했던가요? 정조라 불리우는 이산이여! 나는 그냥 당신이 행복을 누렸으면 좋겠다요 범부 이산으로서 말이다요... THE END... |
첫댓글 형순아^^
세월을 거스리지 못 하고..
지난 주말에 바닷가 찬바람 쐐고 ...지금 독감과 전쟁 중..
수원화성 뒷풀이에서 만나 조으다여 ^^
오대산 진고개에서 다시 재회를 하자^^☆☆☆☆☆
헐~~ 울 동주 어쩔
어머니 큰일 치루고 무리가
없지 않았을 터...
몸 잘 추수리고 건강 잘 챙기래이
조만간 연락 하자요...^@^
사설에 한번씩 웃어가며
긴글 읽노라니 또한번 감탄을
같은길 같은시간에 교수님 열변은 들었건만
어느세 샛물 흐르듯 흘려보내고
그래도 형순친구 후기글읽다보니
2번째라서 그런지 기억이 슬금슬금 나는듯하내요
수원시민들의 화성행궁보존 사랑에
깊은 감명을 받았내요~~^^
긴글 읽느라 수고 많이했슈…^^
그래도 한번 들었다고
형순님 후기 글 읽으니
째끔 이해가 쉽네요..ㅎ
동분서주 바쁘게 움직이더니
세심하고 정갈한 정리
형순님이 역사 기행문을 집필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듯 합니다~
수고많으셨어요~^^
에구 어지럽게 늘어쓴 글
항상 너그러운 평 하여주심
감사드립니다. 미숙님…^^
멋진친구~~!!
이리적기도
힘들텐데 므튼
수고많았다요
즐감하고 간다네 화이링~!!
감사합니다. 재명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