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둘레길 11코스(연탄길) 12코스(성창포길)
- 11코스(도원역↔배다리↔동인천역) 5.2km / 01:20소요 -
- 12코스(동인천역↔공화춘↔인천역) 5.0km / 01:20소요 -
( 2016 / 04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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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둘레길 마스코트
- 인천에는 S자 녹지축이 있다. 가현산에서 청량산까지 인천의 중심부를 S자 형으로 지나며, 대기를 정화하고 시민들에게 안락한 휴식공간을 제공한다. 숲이 있던 곳에 도로, 공장, 아파트가 들어서고 과다한 이용으로 수많은 샛길이 생겨나고 무단 경작으로 녹지축이 많이 훼손되었다. 녹지축을 보전하기 위한 방법으로 아름다운 오솔길을 이어서 인천둘레길(120km / 32:20 소요)을 조성하였다.
인 천 중구와 동구 일대는 개항이후 인천의 중심지로서 수많은 근대 문물과 사람들이 오고갔던 곳이다. 그런데 개발의 손길이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면서 번성했던 도시의 모습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영화로웠던 근대 인천의 옛 모습은 간직해야 할 인천의 자산이다. 이를 기억하고자 원도심을 가로지르는 인천둘레길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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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둘레길 종합안내도
01코스(계양산) 10.4km/03:00 : 계산역⑤→연무정→무당골→청수수목원→목상동→솔밭쉼터→피고개→중심성지→징맹이고개→지선사→계산역
02코스(천마산) 08.7km/02:20 : 징맹이고개→공촌청수장→연희샘터→인재개발원뒷길→동우약수터→동우아파트/시가지길→고속도로 연결통로
03코스(원적산) 09.8km/02:40 : 세일高→경인女高뒷길→석남약수터/가좌女中→팔각정→나비공원→장수산→원적산공원→원적산체육공원→세일高
04코스(함봉산) 06.0km/01:30 : 원적산생태통로→보각사→장고개→열우물약수터→경원대로벽화거리→백운공원→부평아트→십정공원→신명요양원
05코스(만월산.금마산) 09.8km/03:10 : 신명요양원(횡단보도)→약사사입구→사회복지회관뒷길→향촌마을뒷길→주안산길(연결통로)→만월산터널입구→도룡뇽마을→불로약수→만수산 정상→송수천약수→미추홀校(성현로)→수현부락길→인천대공원(수목원→장미원→호수광장)
06코스(소래길) 08.5km/02:00 : 인천대공원 호수광장→장수천(장수교→담방마을아파트→서창IC→만수물재생센터)→소래습지생태공원(습지원→전시관→주차장)→소래포구 시장
07코스(해안길) 09.7km/02:30 : 소래포구역→소래광장→환화에코메트로아파트앞 해변공원→유수지(한화교→금개구리서식지)→고잔톨게이트 육교(운전면허시험장 앞길)→남동유수지→동막역
08코스(승기천.문막산) 12.7km/03:20 : 동막역→승기천→선학역→문학산(길마재→고마리길→삼호현)
08-1코스 : (길마재까지는 8코스와 동일) 길마재→문학산성→삼호현
09코스(청량산.봉재산) 09.5km/02:30 : 삼호현(사모지고개)→연경동쪽 계단 아래→노적봉→송도역→청룡공원→청량산 병풍바위→숲유치원→뱀사골약수→청량터널 윗길→봉재산→인천환경공단
10코스(신 먼우금길) 11.3km/02:50 : 인천환경공단→새아침공원→달빛공원→아암도해안공원→용현갯골유수지→중구문화회관→신선初校→인하대병원사거리→능안삼거리→숭의공구상가→도원역
11코스(연탄길) 05.2km/01:20 : 도원역→우각로문화마을 옛→인천세무서→금창동주민센터→창영初校→배다리 헌책방거리→송현근리공원→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동인천역
12코스(성창포길) 05.0km/01:20 : 동인천역→중앙시장→배다리사거리→답동성당→신포시장→홍예문→자유공원→송원장로교회→공화춘→개항박물관→제물포구락부→자유공원광장→삼국지벽화거리→인천역
13코스(월미도) 04.8km/01:20 : 인천역→대한제분→월미공원 정문→월미문화의 거리→월미테마파크→월미공원(돈대삼거리→한국이민사박물관 뒷길→만남의광장 사거리→정문)
14코스(부두길) 08.6km/02:20 : 인천역→대한제분→북성두부→동일방직→만석동주민센터→화평동냉면거리입구→민들레국수집→화도진공원→만석初校→만석부두→두산인프라코어→화수부두→송현初校→동인천역
1. 일정
출발지 도착지 출 발 도 착 소요 이동 비 고
역삼역 동막역 08:15 09:35 01:20 전철 신도림역(08:43)→도원역(08:50~09:35)③번출구
도원역 동인천 10:20 12:30 04:11 도보 11코스 시작점, 도원역③번출구→11코스 끝점, 동인천역
동인천 공 원 12:30 13:50 01:20 도보 12코스 시작점, 동인천역→자유공원
공 원 공 원 13:50 16:10 02:20 점심 자유공원, 한미수교100주년기념탑
공 원 인천역 16:10 18:00 01:50 도보 자유공원→ 12코스 끝점, 인천역
인천역 신도림 18:04 18:56 00:52 전철 1호선 인천역→2호선 신도림역
신도림 역삼역 19:00 19:30 00:30 전철 2호선 역삼역
총산행 11.3㎞ / 소요시간 04:50
인천둘레길 11, 12코스 안내도
2. 가는 길
(1) 인천둘레길 11코스(연탄길) 도원역 ↔ 동인천역 / 5.2km / 01:20 소요 : 2호선 역삼역(08:15)→2호선 신도림역(08:43)환승→1호선 도원역(08:50~09:35) ③번 출구→우각로 문화마을 옛 전도관→인천세무서→금창동주민센터→창영초등학교→배다리 헌책방거리→송현근린공원,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 향적寺(10:55)→송현시장(12:30)→화평동냉면거리, 동인천역→(2) 인천둘레길 12코스(성창포길) 동친천역 ↔ 인천역 / 5.0km / 01:20 소요 : 동인천역 북광장→중앙시장소→배다리 사거리→가구거리, 답동성당→신포시장(13:10)→홍예문→자유공원, 점심(13:50~16:10)→송월장로교회, 초한지 벽화거리→차이나타운, 공화춘→대불호텔터→개항박물관(17:30)→제물포구락부 →자유공원광장→삼국지 벽화거리→인천역(18:00)→신도림역(18:04~18:56)→2호선 역삼역(19:00~1930) ③번출구
인천둘레길 방향표시판
3. 볼거리
(1) 배다리골우각로 문화마을 : 인천 동인천역 앞에 '배다리골'이라는 곳이 있다. 동구 금창동과 창영동, 송현동 일대를 아우른다. 예전에는 이곳에는 수문통 갯골과 이어지는 큰 개울이 있었고 밀물 때면 바닷물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배다리라는 이름은 배를 대는 다리가 있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배다리골은 흥미로운 풍경을 보여준다. 근대와 현대와 교묘하게 맞물려 있다. 고층 아파트와 붉은 벽돌을 쌓아 올린 근대건축물이 나란히 서 있다. 1960~70년대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골목도 만날 수 있다. 배다리골의 시작은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9년 한국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개통되고 제물포에 조선 침탈을 위한 조계지가 만들어지자 그곳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배다리와 송현동, 수도국산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시장이 만들어지고 공장과 학교가 세워졌다. 당시 중심 거리였던 우각로에는 외국인 여선교사 사옥, 창영초등학교 등 근대 건축물이 들어섰다. 한국전쟁 후에는 고향을 잃은 피란민들도 모여들었다. 배다리골을 걷다보면 19세말과 21세기 사이를 훌쩍 넘나드는 경험할 수 있다. 동인천역앞 중앙시장을 지나면 배다리삼거리에서 배다리길, 우각로, 창영1길, 금곡3길, 창영5길 등이 이어진다. 중앙시장 초입의 한복상가 골목은 주안역과 중구쪽으로 상업 중심지가 옮겨 가면서 예전에 비해 한산하다. 중앙시장을 나오면 배다리삼거리, 건널목을 건너면 배다리길. 요즘 보기 드문 여인숙(길조, 성진, 진도) 골목이 가득하고, 익소을 빠져 나오면 왕복2차선 우각로는 한때 헌책방(30~40곳) 거리로 유명했다. 지금은 37년된 아벨서점 등 서너 곳 정도가 겨우 남아있고,. 문구 도매상점이 대부분이다. 우각로 좌우로 금곡3길과 창영길이 이어진다. 우각로는 개항장으로 들어온 서구 문물을 서울로 전하던 곳이다. 최초의 공립 보통학교인 창영초등학교와 미국 감리교회 여선교사를 위한 기숙사 등이 남아 있다. 모두 100년도 더 된 건물이다. 1920년대 문을 열어 인천의 막걸리 ‘소성주’를 제조했던 옛 양조장 건물도 있는데 현재 갤러리 ‘스페이스 빔’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진, 미술, 건축 등 다양한 전시를 열고 지역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미술교실 등을 운영한다. 우각로를 중심으로 부분적으로 5~10m 정도씩 옛 골목의 흔적이 남아있다. 금곡길은 꺾임길과 갈림길이 있고 담과 창문, 생활소품 등에서 골목길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배다리골이 재개발과 도로 건설로 시끄러워진 2006년 이후 문화예술집단 ‘퍼포먼스 반지하’는 ‘기억과 새로움의 풍경’이라는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낡은 담벼락에는 벽화를 그렸고 버려진 옛 집터는 텃밭으로 가꾸었다. 학교 담벼락에는 동네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 그림이 그려졌고, 공동 주차장은 ‘나무그늘 주차장’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골목길은 기분 좋게 산책할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배다리삼거리 동쪽 송림초등학교 뒤편 인천의 대표적인 달동네 송현동은 아직 골목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도시형 한옥의 붉은 벽돌과 칠이 벗겨진 푸른색 대문, 회색과 흰색의 슬레이트 담, 초록색, 파란색 등 원색의 지붕이 어울려 밝은 분위기를 낸다. 중앙동 시장이 가까워서인지 미용실, 이발소, 세탁소, 철물점 등 골목에서 만날 수 있는 오래된 가게들은 좀처럼 만날 수 없다.
(2) 송현배수지 제수변실 :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상수도 확보를 위해 노량진에서 취수한 물을 32.62km를 끌어 와 쓰기 위해 1906년 착공해 1908년 준공한 면적 36.78㎡의 배수지이다, 3개 저수조(5000㎡)에 저수용량은 20,000t에 이른다.
(3) 인천 송현근린공원 : 인천 동구 송현동 수도국산에 조성된 근린공원이다. 달동네로 유명했던 수도국산(水道局山)에 들어선 공원으로, 1996년 공원 조성 사업에 착수하여 2003년 9월 완공되었다. 면적은 7만 2,663.6㎡이다. 수도국산의 원래 이름은 송림산 또는 만수산이었는데 1906년 인천과 노량진을 잇는 상수도 공사가 착수되어 1908년 이곳에 송현배수지가 준공되자 그때부터 수도국산이라 불리기 시작하였다. 공원 내에 있는 송현배수지는 인천 최초의 상수도시설로 2003년 10월 27일 인천광역시문화재자료 제23호로 지정된 바 있다. 공원에는 2005년 10월 개관한‘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도 있다. 건축총면적 1,950.85㎡, 지하 1층·지상 1층 규모의 박물관 내부에는 1960~1970년대 수도국산 달동네의 옛 모습이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는데, 전시된 인물 모형들은 모두 달동네에 살았던 실존인물의 모습 그대로 만들어졌다 한다. 그밖에 분수광장을 비롯한 광장 13개소, 어린이놀이터 2개소, 휴게소 4개소와 인라인스케이트장·배드민턴장·체력단련장 등의 체육공간, 연못·분수·벽천·암석원 등의 조경공간, 산책로와 조깅로 등 갖가지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송현배수지 정상에는 별도로 체육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2008년 12월 19일 문을 연 체육공원의 면적은 4,502㎡로, 인라인스케이트장과 조깅트랙, 체력단련기구·파고라·벤치·조명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4)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 : 인천 동구 송현동 163번지 송현근린공원 내에 있으며 지난 2005.10.25.에 개관하였다. 연면적 618평(지하 1층, 지상 1층)의 제1종 근현대생활 사전문박물관으로 1960~70년대 달동네 서민의 생활상을 테마로 한 체험중심의 박물관이다. 수도국산달동네는 인천인들에게는 정겨운 고향같은 곳이다. 인천에서 3대 이상을 산 토박이라면 '수도국산'하면 '달동네'를 떠올릴 것이다. 수도국산(水道局山)의 원래 이름은 송림산(松林山)이다. 이 주변 일대가 매립되어 바다가 땅으로 변하고 공장이 지어지고 사람들이 몰려들기 전에는 이 자그마한 언덕은 바닷가의 조용한 소나무 숲이었다. 소나무를 베고 언덕에 정착하여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달동네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송림산이 수도국산으로 산이름이 바뀌게 된 데에는 근대 개항기 인천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 인천은 본래 우물이 적을 뿐 아니라 수질 또한 나빠서 개항 이후 증가한 인구와 선박으로 물 확보가 큰 고민이었다. 일제 통감부의 강압에 의해 한국정부는 1906년 탁지부(度支部)에 수도국(水道局)을 신설하고 인천과 노량진을 잇는 상수도 공사에 착수하였다. '수도국산'이라는 명칭은 이곳에 수돗물을 담아두는 배수지를 설치하면서 생겼다. 즉, '수도국산'은 '수도국이 있는 산'이었다. 달동네는 아직도 전국의 대도시 주변에는 어디서나 볼수 있는 일반적인 모습이지만 특히 수도국산달동네는 달동네 중에서도 그 유래와 역사가 깊은 곳이다. 인천시 동구청은 '송현지구 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 이미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지고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는 수도국산달동네의 삶을 되살리고자 달동네 터에 박물관을 건립하였다. 역사 속에 실존했던 수도국산 달동네 서민의 평범한 삶을 박물관의 주된 테마로 삼은 점은 우리나라 박물관의 역사에서도 이례적인 일이라고 하겠다.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은 기성세대들에게는 향수를, 현 세대들에게는 기성세대를 이해할 수 있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될 것이다.
(5) 인천 답동성당(畓洞) : 인천 중구 답동3-1에 있는 성당이다. 1981.9.25. 사적 제287호로 지정되었다. 벽돌조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로 건축면적이 약 1,015㎡이다. 1890년대에 건축된, 한국 성당 중 가장 오래 된 서양식 근대 건축물 중 하나이다. 파리 外邦傳敎會 소속 E.J.G.코스트(高宜善) 신부의 설계로 1897년에 처음 건립되었고, 1937년 코스트 신부와 같은 소속인 P.시잘레(池士元) 신부의 설계로 증축되었다. 앞면에 설계된 3개의 종탑은 건물의 수직 상승감을 더해주며, 8개의 작은 돌로 된 기둥(pilaster)이 8각(角)의 종머리 돔(dome)을 떠받들고 있다. 앞면의 출입구는 화강석을 사용하여 벽감(壁龕) 모양의 아치로 하였고, 처마는 盲아치로 설계하였다. 6·25전쟁 때 훼손된 부분은 모두 복원되었고, 1979년에는 창문에 스테인드글라스를 설치하는 등, 이 성당은 그 위용과 아름다움으로 開港場 濟物浦 시대부터 이 곳의 역사적인 건축물로 꼽혀왔으며, 인천교구 내 102개 본당의 주교좌 성당이다.
(6) 인천신포시장 : 인천은 1883년 개항되기 전까지는 그저 작은 포구에 불과했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배를 타고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들이 인천에서 출발했지만 조선시대부터 육로를 활용하게 되면서 인천은 오랫동안 잊힌 한촌이었다. 그러나 수도 한양과 가깝다는 지리적 이유로 가장 먼저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는 항구도시가 되었고, 내외국인이 몰려들게 되었다. 인천 신포국제시장은 인천의 개항 이후 형성된 전통시장이다. 개항기 때 외국인이 살았던 조계지 인근에 위치해서 외국 문물이 수입되는 창구 역할을 했고 오늘날에는 다양한 먹을거리와 생활에 필요한 상품들을 판매하고 있다. 인천은 바다와 면한 항구도시이다. 수도인 서울과 인접해 있고 철도와 도로 교통이 좋아 접근성이 뛰어나다. 시장이 발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인 교통이 완비된 도시이다. 해상교통과 육상교통이 맞물리는 지점에 자리하고 있는 신포국제시장은 역사적으로 인천의 격심한 변화를 함께 겪어왔다. 개항 이후 외국인들이 몰려들면서 이들의 생활을 지원하는 시장으로 형성된 신포시장은 당시 중국인과 일본인을 비롯해 여러 외국인들이 찾는 시장이었고, 말 그대로 국제시장이라 할 수 있었다. 신포국제시장은 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상설시장으로, 2002년 시장 현대화 작업을 통해 시설을 정비했다. 동인천역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어 접근성이 뛰어나며 반찬거리를 파는 골목, 수산물을 파는 골목, 의류를 판매하는 골목 들이 구획별로 잘 정리되어 있다. 신포시장이라는 이름은 신포라는 지명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포동은 바다로 통한 내가 있다고 해서 예부터 순우리말로 ‘터진개’ 또는 ‘탁포’라고 부르기도 했다. 1883년 개항 이후 이 마을은 터진개라는 이름을 한자로 써서 ‘개포동’이라 불렀다. 1903년에 ‘새롭게 번창하는 포구’라는 뜻에서 신창동이라고 부르다가 일제에 의해 1914년 일본식 이름인 신정(新町)이 되었고, 해방 이후 우리식으로 지명을 고치면서 신포동으로 바꾸어 불렀다. 매립해서 새롭게 생긴 땅이 많은 지역이다. 당시 신포시장은 채소 시장과 시장이 따로 있었다. 어시장 서쪽에 닭전과 달걀을 중심으로 육류를 파는 행상들이 때문에 시장의 성장에는 한계가 있었다. 채소는 주로 인천 거주 중국인들이 재배한 것이었다. 당시 모습을 조형화한 조각상이 신포시장 내에 세워져 있는데 화농(華農)이라 불리던 중국인이 재배한 채소를 일본인이 사는 모습이다. 당시 중국인들은 오늘날의 인천 남구 도화동과 숭의동 일대에서 농사를 지었다. 이들이 인천에서 농사를 짓게 된 것은 1887년 중국의 범선인 정크선 승무원들이 중국 산둥성 일대에서 종자를 가져와 채소를 재배하면서였다.
오늘날의 신포시장은 이렇게 중국인들이 주도했던 푸성귀전에서 유래했다. 푸성귀전이 자리를 잡고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그 주변에 수산물을 취급하는 어시장이 생겼다. 수산물은 주로 인천의 연안에서 잡은 것이었지만 충청도 지방의 수산물이 함께 거래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어시장을 처음 개설한 것은 한국인(정흥택)이었다. 그는 개항 이후 수산물을 유통할 수 있는 시장이 인천에 없다는 점에 착안해 1890년 초 신포동에 시장을 열었다. 인근에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생선가게들이 있었지만 규모 면에서 정흥택의 어시장을 넘어설 수 없었다. 당시 인천 연안에서 잡히는 어획물은 정흥택 일가가 운영하는 어시장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다. 일본인들은 이 상권을 빼앗기 위해 어선 10여 척을 마련하고 1898년 북성동에 새로운 어시장을 개설했으나 부진을 면치 못했으나 1932년 일본이 하루 15t의 얼음 생산이 가능한 제빙 공장을 세우고 얼음을 독점적으로 공급하면서 인천의 어시장을 완전히 장악했다.
신포시장의 설립에 대해서는 두 가지 주장으로 엇갈린다. 1951년과 1970년으로 의견이 나뉘는데, 당시의 사정과 1955년 발간된 '인천석금'의 기록을 토대로 추정해보면 1951년에 세워진 것이 맞는 듯하다. 한국전쟁 때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인천이 안전한 땅으로 인식되며 많은 피란민이 몰려들었다는 사실과 그 무렵 인천 동구에 배다리시장이나 송현자유시장 등 여러 개의 시장이 형성된 것에서 충분히 예상해볼 수 있다. 신포시장이라는 이름도 이때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정식으로 건물을 갖추고 시장으로 등록한 것이 1970년이므로, 1950년대의 신포시장은 지금과 달리 노점 형태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사례가 하나 있다. 1966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세계아마추어레슬링대회에서 금메달을 땄던 정창선은 자신의 성공을 어머니에게 돌렸다. 당시 정창선의 어머니가 신포시장에서 콩나물 장사를 하면서 아들의 뒷바라지를 했다는 신문 기사를 보면 시장 상인 특유의 억척스러운 생활력과 신포시장의 분위기를 짐작해볼 수 있다.
또한 1970년 이후 신포시장 건물을 갖추고 시장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그것은 좀 엉뚱하지만 베트남 피난민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베트남의 유력 정치인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생명이 위험한 상황에서 한국인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웬 레슨 부인이 은인의 나라에서 살겠다며 한국에 정착해 신포시장 앞에 리어카로 만든 노점을 차렸다는 이야기가 신문 기사로 소개된 바 있다. 아오자이 차림으로 ‘따이한 까멍(한국인이 고맙다)’을 연발하며 주스와 냉차, 과일을 팔았다는 그녀의 노점이 신포시장 입구에 있었다고 하니 이때 이미 신포시장은 건물을 갖춘 시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신포시장이 지금의 모습으로 갖춰진 것은 2002년이다. 이때 시장 현대화 작업을 통해 바닥을 재포장하고 가로등과 조형물을 설치했으며 화장실과 같은 편의시설도 정비했다. 현재 신포국제시장은 전통시장의 분위기를 간직하면서도 인근의 차이나타운을 비롯해 근대 건축물이 즐비한 거리와 연계해 수도권 관광을 주도하는 시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시장의 이름도 인천의 독특한 역사에 현재를 접목시켜 신포시장에서 신포국제시장이라는 이름으로 바꾼 것이다. 시장 내에 작은 공원과 조형물을 만들고 근대 건축물을 본뜬 카페가 생긴 것도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7) 인천 홍예문 : 1908년에 축조된 石門으로 인천 중구 송학동 자유공원 근처에 있다. 2002.12.23. 인천유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었다. 인천 홍예문(虹霓門;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문)은 응봉산 산허리를 잘라 높이 약 13m, 폭 약 7m의 화강암 석축을 쌓고 터널처럼 만든 石門이다. 대한제국 시대에 철도 건설을 담당했던 일본 공병대가 1906년 착공하여 1908년 준공하였다. 당시 인천 중앙동과 관동 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수가 급격히 늘자 만석동 방면으로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이 홍예문을 뚫었는데 일본인들은 혈문(穴門)이라 불렀다. 공사를 진행할 때 예기치 못한 거대한 암석을 만나 공사 기간이 오래 걸렸다 한다. 당시 일본의 토목공법을 알 수 있는 사료로서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자유공원 근처에 있는 홍예문은 지역주민과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인천의 명물이다. 홍예문을 통과하여 폭이 좁은 2차선 도로가 지나가며 홍예문 위쪽 길에 서면 인천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8) 인천 자유공원 : 인천 중구 송학동 응봉산(鷹鳳山)에 조성한 공원이다. 응봉산 전체를 자유공원이라 부르는데 조성연대는 서울의 파고다공원(1897)보다 몇 년 앞서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인천항 개항 뒤 1888년 외국인 居留民團에서 관리 운영하여 당시 시민들은 이를 各國公園이라 불렀고, 그 뒤 일본의 세력이 커지면서 1914년 각국 거류지의 철폐와 함께 공원 관리권이 仁川府로 이관되자 그 때부터는 西公園(일본인이 이른바 神社를 지어놓은 동공원이 따로 있었음)으로 불렀다. 1945년 해방 후에는 萬國公園으로 불렸다. 자유공원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응봉산 정상에 세워진 1957.10.3.부터이다. 지난날 이곳에는 존스턴 별장(인천각)·세창양행숙사(청광각) 등의 건조물이 들어서 있었으나 6·25전쟁 때 없어졌다. 충혼탑을 비롯하여 石汀樓·然吾亭 등이 있으며, 학익고인돌[鶴翼支石墓]을 옮겨 보존하고 있다. 자유공원은 인천 시가지와 주위의 連山항만·앞바다 등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시민의 휴식·위락장소이며, 미술대회·글짓기대회 같은 각종 행사도 자주 열린다.
(9) 인천 차이나타운 : 인천 중구 선린동과 북성동 일대에 있는 중국인 지역이다.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되고 이듬해 청나라 조계지가 설치되면서 중국인들이 현 선린동 일대에 이민, 정착하여 그들만의 생활문화를 형성한 곳이다. 화교들은 소매잡화 점포와 주택을 짓고 본격적으로 상권을 넓혀 중국 산둥성 지역에서 소금과 곡물을 수입, 1930년대 초반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1920년대부터 6·25전쟁 전까지는 청요리로 명성을 얻었는데 공화춘, 중화루, 동흥루 등이 전국적으로 유명하였다. 한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외환 거래규제, 무역 규제, 거주자격 심사 강화 등 각종 제도적 제한으로 화교들이 떠나는 등 차이나타운의 화교사회가 위축되었으나 한중수교의 영향으로 활기를 되찾고 있다. 오늘날에는 역사적 의의가 깊은 관광명소로서 관광쇼핑, 특화점, 예술의 거리 등 권역별로 변화하고 있으며 풍미, 자금성, 태화원, 태창반점, 신승반점 등이 중국의 맛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 이곳에는 화교 2,3세들로 구성된 약 170가구, 약 500명이 거주하고 있다. 담벽락에 그림을 그린 벽화(초한지, 삼국지)를 볼수 있다.
(10) 인천항 개항박물관 : 인천 중구에 위치한 역사박물관이다. 2010.10.2. 개항기 인천의 모습과 근대 문화를 학습할 수 있도록 연면적 428㎡, 지상 2층 규모로 개관하였으며,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어 있다. 옛 일본제1은행에 조성되었으며, 중앙 돔형식의 석조 단층 후기 르네상스양식의 건축물을 리모델링하여 근대건축의 아름다움을 엿볼수 있다. 4개의 상설전시실과 유물수창고, 학예실, 편의시설 등을 갖추고 있으며, 1883년 개항 이후부터 일제강점이 시작되는 1910년 이전까지의 유물 321종, 669점이 전시되어 있다. 갑문식 도크에 대한 영상 자료, 최초의 해관자료를 비롯해 개항기 우표자료, 인천전환국 압인주화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인천 중구 신포로 23번길 89(중앙로)에 있다.
(11) 제물포구락부 : 개항기 인천에 거주하던 미국·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 및 기타 외국인과 소수의 중국·일본인들이 친목을 돕는 사교장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1901년에 지었다. 벽돌로 된 2층 건물로 지붕을 양철로 덮었으며 내부에는 사교실·도서실·당구대 등을 마련하였고, 따로 테니스 코트도 가지고 있었다. 1914년 외국인 거주지역인 各國租界가 철폐되고 일본 재향군인회관, 부인회관, 광복 후에는 미군이 사용하였다. 1953년부터 1990년까지는 인천시립박물관으로 이용하였고, 1990년부터 2006년까지 인천문화원으로 사용되었으며, 2007년 제물포구락부로 재탄생하였다. '제물포구락부'의 원래 명칭은 '제물포 클럽'이었다. 그러나 조계 제도가 폐지된 이후 '클럽'이 일본식 가차음인 '구락부'로 불리고, 그것이 그대로 굳어져 오늘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17호 지정(1993.07.06) 되었다.
4. 먹거리
(1) 신포닭강정 : 신포시장 초입에 있는 ‘신포닭강정’ 가게들은 주말이나 휴일에는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려야 맛볼 수 있다. 1985년 문을 연 신포닭강정은 일제강점기 때 그 자리에서 닭과 달걀을 비롯해 꿩, 오리 등을 팔았던 닭전거리를 회상하게 만드는 추억의 힘이 작용하며 신포시장의 대표 먹을거리로 떠올랐다. 신포닭강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튀김옷의 바삭거리는 맛이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물엿을 넣는 한편 지나치게 강한 단맛을 잡기 위해 고춧가루와 청양고추를 넣어 매콤하고 칼칼한 맛을 더하는 등 지속적 노력으로 오랫동안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2) 신포우리만두 : 신포라는 이름을 전국에 알린 것은 ‘신포우리만두’ 덕분이라 할 수 있다. 1971년 사업에 실패한 사람이 자살을 선택하는 대신 용기를 내서 시작했다는 만두가게가 유명세를 타면서 한때 전국적으로 체인점이 생길 정도로 성업했다. 하지만 신포우리만두의 시작은 원래 동인천역 북쪽에 있는 송현시장이었다. 소문을 타면서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고 줄을 서서 먹어야 하는 만두집이 되었다. 한창 때에는 만두를 포장해 주는 사람만 10명이 있었다고 한다. 송현시장의 3평짜리 가게에서 시작한 만두집이 만두를 생산하는 공장을 소유한 기업이 되고 한때는 전국에 가맹점이 250개가 넘을 정도로 급성장한 것이다. 전국적인 불황이 밀어닥쳤던 IMF 때에도 20% 이상의 매출 성장을 이루며 견실함을 유지해왔다. 신포우리만두에서 만들어낸 것은 만두만이 아니다. 녹말가루를 추가해 더욱 쫄깃한 면을 만들고 비빔국수처럼 매콤하게 비빈 데다 콩나물과 오이, 양배추 등의 채소를 넣어 만든 쫄면도 신포우리만두에서 유래했다. 이제 분식점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메뉴의 하나로 자리 잡은 쫄면의 고향이 바로 신포시장인 것이다.
(3) 청실홍실 메밀국수 : 신포우리만두는 신포시장의 과거를 대표하는 음식점이라면 ‘청실홍실’은 현재 신포시장의 맛집으로 새롭게 조명 받고 있는 음식점이다. 전국으로 체인점을 넓히고 있는 청실홍실의 대표 메뉴는 메밀국수이다. 함께 파는 만두도 맛이 좋아 시원한 메밀국수에 고기만두를 곁들여 먹는 사람들이 많다.
인천둘레길 11코스 시작점/도원역
한국철도 최초기공터
옛 박태선장로 전도관 진입로
옛 박태선장로 전도관
우각로 문화마을
우각로 문화마을
우각로 문화마을
인천세무서 입구
인천세무서
금당동 배다리 헌책방거리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1시간을 돌아서 길건너편 중앙시장 출구로 나온다
송현터널 입구
송현터널 공사중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
수도국산 당동네박물관 내부
수도국산 당동네박물관
금당동 솔빛로
인천둘레길 11코스 끝점, 12코스 시작점/동인천역
중앙시장 전통혼수거리 입구
중앙시장 전통혼수거리 출구 오른쪽 배다리사거리
가구거리
답동성당 입구
답동성당
신포시장 지하보도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
개항기 유적 안내도
홍예문
홍예문
자유공원 맥아더 장군상
자유공원 광장
광장에서 본 인천항과 월미산
타이나타운/삼국지 벽화거리
인천중구청
인천아트플랫폼거리
인화문(패루)
한중문화관
차이나타운
인둘레길 12코스 끝점/인천역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
천지는 어질지 않아 만물을 짚으로 엮은 것처럼 다룬다. 대지가 한 번 몸을 털면 인간이 쌓아올린 세계는 지푸라기처럼 바스러진다.
재앙이 휩쓸고 간 땅에서 힘을 쓰는 것은 무정한 자연의 섭리일 뿐이다/노자 도덕경
[ 福 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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