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자의 등물’이며 ‘달동네 주민의 대부’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안광훈 신부
서룰시 복지대상 받고 명예시민권 획득
‘가난한 이들의 등불’이며 ‘철거민과 달동네 주민들의 치구요 대부’인 뉴질랜드 출신의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 안광훈(본명 브래넌 로버트 존) 신부에게 2012년은 매우 특별한 해였다. 1966년 서품 직후 한국으로 파견돼 선교해온 지 46년, 1981년 서울 목동 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해 철거민과 달동네 주민들의 일자리 사업과 주거복지, 대안 금융 사업 등에 헌신한 32년에 대해 작지만 의미 있는 보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9월 4일 서울특별시 복지대상을 수상한 데 이어 10월 29일에는 명예 시민권을 획득했고, 12월에는 환경재단에서 주는 ‘세상을 밝게 만드는 사람들’ 트로피를 받았다. 안 신부는 이에 그치지 않고 2013년 1월 1일 0시 서울 종로1가 보신각에서 있었던 ‘제야의 종’ 타종식에 시민 대표로 참여해 온 세상에 새해가 밝았음을 알렸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수여한 복지대상 상패에 적힌 공적은 안 신부가 25살 젊은 나이에 가난한 이 땅에 와서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단편적이나마 짐작하게 한다.
“귀하는 어렵고 힘든 복지 현장에서 남다른 열정과 투철한 사명감으로 저소득 지역 주민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함으로써 더불어 사는 복지도시 희망 서울 구현에 기여한 공이 크므로 천만 시민의 정성을 담아 이 상패를 드립니다.”
베론 성직자 묘지에 안식처 마련한 노사제 아직도 현역
72살의 안 신부는 지금도 서울 강북구 삼양동 다세대 주택 전세방에서 살며 왕성한 열정과 투철한 사명감으로 빈민들과 함께 살며 빈민사목을 펼친다. 지금도 골롬반회 서울지부 재정 담당, 삼양 주민연대 대표, 강북구 실업자사업단 주거복지센터 운영위원,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 등 10여 가지 직함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밤낮 없이 뛰고 있다. 이렇게 직책이 많다 보니 하루 3~4번씩 회의에 참석할 때도 있다. 미아동 선교본당인 솔뫼공동체에서 주임 사제를 도와 미사를 봉헌하고 성사를 집행하는 일은 기본이다.
고향 오클랜드 요양원에서 사는 93세의 노모 마리 브래넌 님이 선종하면 더 이상 뉴질랜드에 갈 일이 없을 것이란다. 5년 전 넘어져 허리를 크게 다치는 부상을 입고 휠체어에 의지해 생활하는 어머니 생각에 눈시울을 잠시 적신다. 3년 전 정선 본당 설립 50주년 기념식에서 만난 원주교구장 김지석 주교에게 요청해 베론성지 내 성직자묘지에 평생 수고한 육신의 안식처를 마련해 둔 파란 눈의 노사제에게 은퇴는 없어 보인다. 한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청춘을 바쳤고, 이 땅에 뼈까지 묻을 각오로 마지막 남은 생을 오롯이 희생 · 봉사하겠다는 안 신부다.
이렇게 살아온 안 신부가 지난해 영주권을 신청하자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이 서류를 슥 훑어보더니 “한국에서 오래 사셨지만 교회일밖에 한 일이 없군요.”라면서 거절했다고 한다. 그 일이 섭섭하지도 않은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말한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
“교회의 사명은 바로 루카복음 4장 18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사명을 그대로 이어받아 어김없이 수행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는 일을 성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그럼 오늘의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많은 재산의 몇%나 가난한 이웃을 위해 내놓습니까? 과연 복음적 가치에 따라 사용하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재산을 관리하는데 과연 양심껏 하느님의 뜻대로 쓰고 있는지 자문해봐야 합니다. 제가 보기엔 문제가 많다고 봅니다.”
오늘의 교회 모습에 대해 뼈아픈 지적을 서슴지 않는 노사제는 우리 교회가 나아갈 길에 대한 애정 어린 고언을 폭포수처럼 쏟아낸다.
“제가 호주 브리즈번을 거쳐 화물선을 타고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도시와 농촌 할 것 없이 모두가 가난했습니다. 빈부격차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산업화의 영향으로 노동자와 사업주가 갈라져 다투고, 도시와 농촌의 차이가 심해졌으며,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들이 나뉘어졌습니다. 서울대교구의 경우 한강을 중심으로 남쪽과 북쪽이 확연히 갈라졌습니다. 부자인 강남 사람들은 가난한 강북 사람들에게 관심 없습니다. 교회도 그렇게 갈라져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뿌리치신 세 가지 유혹은 바로 재산과 명예와 권력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그렇게 해야 마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가시는 순간까지 마지막 걸치고 있던 옷가지마저 내 주셨습니다.”
고등학교 진학 때 가난한 나라 선교사 결심
안 신부는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1941년 전기 기술자인 아버지 로버트 에드워드 브래넌(1996년 77세로 선종) 님과 어머니 마리 브래넌 님 사이의 3남 2녀 가운데 맏이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신앙심 깊은 어머니의 영향으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할 수 있었다. 특히 매달 집으로 배달되는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회보를 통해 본 한국과 중국, 필리핀 등지에 나가 활동하는 선교사들을 동경했다. 수녀들이 운영하는 착한 목자 초등학교와 성 베드로 중 · 고교를 졸업하던 1959년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에 입회했다. 고등학교 입학 때 이미 자신의 진로를 확정지었기 때문에 골롬반회 입회는 자연스러웠다.
1966년 호주 시드니의 골롬반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동기 4명과 함께 서품 받았다. 고 미카엘 신부와 함께 한국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순명했다. 당시 골롬반회 한국지부는 가난한 나라에서도 상대적으로 더 가난한 전남과 제주도, 강원도를 선교지로 선택해 활동하고 있었다.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 명도원에서 2년 동안 한국말 연수를 마치자 지부장 신부는 1968년 9월 강원도에 가서 선교하라고 명했다.
그 때까지 강원도 전역을 춘천교구가 관할했으나 1965년 구(具) 토마스 주교가 교구장직에서 은퇴하면서 강원도의 남쪽을 맡는 원주교구가 탄생했다. 원주교구 초대 교구장 지학순 주교는 골롬반회에 원주교구에 와서 선교활동을 계속해 주기를 요청했다. 지 주교와 안 신부의 만남은 그렇게 이뤄졌다.
서슬 퍼렇던 유신독재시절, 지학순 주교와 함께
지 주교는 안 신부에게 첫 임지로 탄광지대인 삼척 사직동 본당 주임으로 가라고 명했다. 1년 동안 사직 본당에서 사목한 뒤 1979년 12월까지 11년 동안 정선 본당 주임으로 봉직했다. 정선 본당은 본당 신자 400명보다 14곳 공소 신자가 800명으로 훨씬 많은 지역이었다. 주일 헌금은 1주일에 겨우 400원 정도 나오는 가난한 본당이었지만 안 신부는 열정을 쏟아 사목했다.
가장 먼저 성당부터 새로 짓기로 하고 초대 춘천교구장 구 주교가 미 8군에서 얻어 쓰던 철근 콘크리트 건물을 헐고 신자들 모금과 골롬반회 및 교구 지원, 뉴질랜드 고향 교구 지원(1만 달러) 등 모두 1,200만원을 들여 주님의 새 성전을 지었다.
가난한 신자들을 위해 30명이 100원씩 출자한 3,000원으로 정선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해 지금 400억 규모의 조합으로 우뚝 서게 했다. 이와 함께 부산에 있던 프란치스코병원을 교구장의 도움으로 옮겨 와 주민들의 건강을 돌보게 했다.
바로 이 시기는 유신독재 통치가 시퍼렇게 펼쳐지던 때다. 유신헌법이 선포되고 긴급조치가 내려진 가운데 원주교구가 대주주이던 원주MBC 강탈사건도 일어났다. 원주 주교좌 원동성당에서는 시국 기도회와 미사가 연일 이어졌으며 주교회의 선언문도 낭독되었다. 그 대열 맨 앞에는 지 주교가 섰고, 그 곁에는 언제나 안 신부가 있었다. 지 주교는 결국 소위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이하 인혁당 사건)에 연루돼 1974년 7월 구속됐다.
“지 주교님은 참 좋은 목자이셨습니다. 가난한 시골 본당인 정선에서 가끔 전 신자 야외 미사를 봉헌할 때 청하면 거절하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소박하고 인자하신 분이셨지만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는 정의감과 리더십을 갖추셨습니다. 구속 사유가 된 ‘인혁당 사건’은 완전히 조작된 사건이었지요. 지 주교님께서 사회정의를 위해 어렵게 활동하던 그들에게 후원금을 좀 주신 것은 사실이지만 유신독재정권이 말하던 ‘인혁당 재건위’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공산주의자들의 모임도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등불’이 되어
안 신부는 정선 본당 주임을 마치고 안식년 1년 동안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전례학과 영성학을 공부해 석사학위를 취득한 뒤 다시 돌아와 1981년 6월 서울 목동 본당 주임으로 발령을 받았다.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이 막 들어서던 때였다. 1965년부터 한 밤 중에 쓰레기차에 실려 버려진 청계천 등지의 철거민들이 판자촌을 이루고 살던 3㎞에 이르는 안양천변이 관할 구역에 속해 있었다. 1,500명 신자 가운데 2/3가 안양천변 사람들이었다. 부임한 지 두 달 후 ‘목동 신시가지 개발 계획’이 발표됐다. 외국 순방을 마치고 김포가도를 통해 귀경하던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지저분한 철거민촌을 외국 손님들에게 보여줄 수 없다는 판단에 따른 조치였다.
보상금 한 푼 못 받고 다시 쫓겨나야 하는 철거민들을 안 신부는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철거민과 달동네 주민들의 대부’요 ‘빈자의 등불’로서의 역할을 시작하는 계기였다. 철거민들과 함께 반대운동에 나서고, 성당 시설을 빌려주며 활동을 도왔다. 신시가지 개발로 이득을 보게 될 나머지 1/3 신자들과의 갈등이 생긴 것도 이 무렵이었다. 쫓기는 철거민들이 성당 안에 있으니 그들을 잡으려는 경찰과 연일 대치 상태였다. 성당을 둘러싸고 있는 경찰 때문에 성당 출입조차 불편해진 다른 신자들의 불만은 결국 안 신부에게 돌아갔다. 안 신부는 신자들이 두 패로 갈라져 다투던 그 때를 “슬펐고, 실망했고, 가슴 아팠다.”고 회고한다.
1984년에는 시흥에 골롬반회 예산 1천만 원을 지원받아 110가구가 살 수 있는 보금자리인 목화마을도 마련했다. 고 제정구 전 의원과 예수회 존 V. 데일리 신부가 시흥에 지은 보금자리에 이은 세 번째 철거민들을 위한 시설이었다.
신자들과 불편한 관계를 이어가다가 1985년 골롬반 신학원 초대 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6년 동안 재임하면서 한국인 사제 6명을 배출했다. 1년 동안 얻은 안식년 기간에 그리스와 이스라엘, 이집트 성지를 돌며 예수님과 모세, 바오로 사도의 발자취를 순례한 뒤 미국 시카고 신학대학(Chicago Theological Union)에서 성서학을 공부했다.
1992년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서울 강북구 미아 6동에 전세방을 얻어 살기 시작했다. 1995년 개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미아 7동, 정릉 4동, 삼양동 등지로 쫓겨나는 아픔을 겪으며 지금까지 가난한 사람들과 고락을 함께 하고 있다.
글 최홍운 alsemffp34@naver.com
사진 인영호 05ernst@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