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자신을 살피라(고후13:5-10)
우리는 흔히 생활이나 사업에서 주말이나 월말 또는 한해를 결산하는 것을 매우 중요시합니다. 가정에서는 가계부를, 회사나 사업에서는 월수입과 지출을 꼼꼼히 살핍니다. 왜냐하면 반성하고 결산할 줄 모른다면, 자기 만족에 빠져 오히려 퇴보 내지는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도 신앙의 결산을 합니다. 저 번주(16. 1. 17) 말씀을 전했던 것처럼 민수기 33장은 이스라엘 신앙의 회고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광야 40년 역사를 회고하면서 ‘기억하라’고 반복합니다. 무엇을 기억하라는 것일까요? 광야 역사의 주인이 누구신가? 그리고 어떻게 40년을 보냈는가?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권능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40년동안 이스라엘의 주인되신 하나님은 장차 믿음의 사람들을 권능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바울을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신앙의 회고를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좋은 교회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교회, 다양한 은사자들이 있고, 열정과 부흥이 있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개척자이며 신앙의 스승인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한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4당파가 생겼고, 사람들이 주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본문에서 고린도 교인들은 여태껏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고 오히려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미혹되었는데, 그것은 그들의 신앙이 미성숙했거나 믿음에서 멀리 떠나 있는 상태에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밝힙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올바로 서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회개하지 않을 경우에는 단호히 벌할 것을 예고하였습니다. 이렇게 단오하게 권하는 것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주안에 바로 서서 선을 행하며 온전하게 되는 것을 바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시험하여 보고 확증하라(5절)
“너희는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13:5)1
'너희 자신'이라는 말을 본 절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이 ‘너희’라는 말이 6번이나 나옵니다. 그것은 자신의 믿음에 관하여 남을 운운하지 말고 자기 스스로를 시험해 보고 확인해 보라는 뜻입니다. 가끔 우리는 ‘내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이나 환경’에 눈을 돌립니다. ‘너 때문이야’, ‘상황때문이야’ 하며 탓을 돌립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번성하고, 다스리고, 정복하라고 하시면서 책임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과 하와에게 탓을 돌렸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여인‘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방어기제‘라고 합니다. 공항장애, 충동조절장애, 불안심리, 의부증, 의처증 등. 많은 정신질환의 근본원인은 나로부터 시작됩니다. 내 책임을 인식하고 해결해야 하는데 전부 남에게 전가하다보니 스스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사실 삶의 모든 문제는 근본적으로 믿음의 결여에서 온 것입니다. 그것은 ‘나’ 때문입니다. 아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와를 만들기 이전 이미 아담에게 명령한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 반드시 죽으리라. 그런데 책임을 전가하면서 내 문제가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내 자신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스스로 믿음이 있는가를 시험하고 확증하는 것은 언제나 잊어서 안 될 근본적 문제입니다.
'시험하고 확증하라'는 “순금을 골라내고 남은 불합격된 찌꺼기로서 제거된 부분”를 의미하는데, 지난 과거의 시간에 자기가 믿음 안에서 바로 살았는가를 가려 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생활의 결점과 약점이 무엇인지를 잘 살펴보고 골라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 안에, 나의 마음과 삶 속에서 계신가를 알아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린다면, 믿음이란 '그리스도와 같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그들에게 '믿음에 있는가'를 스스로 살필 것과 '그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신가'를 확증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나는 정말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까? 삶의 시작이 주님으로부터입니까? 아니면 내 경험, 내 생각입니까? 기도하면서 말씀으로 시작한다면 그것은 나를 잘 보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이러한 본문의 물음은 곧 우리 성도들이 스스로의 신앙을 점검할 수 있는 좋은 지침이 됩니다. 믿음이 있으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 것이요, 이것을 알지 못 한다면 믿음이 없는 것이요, 버리운 자라는 것입니다. '버리운 자'란 앞서 지적한 것같이 '순금을 골라내고 남은 불합격된 찌꺼기로서 제거된 부분'을 가리킵니다. 이 말은 신약에 8회 나타나는데, 그 중 7번은 바울의 용어입니다(롬 1:28, 고전 9:27, 고후 13:5,6,7, 딤후 3:18, 딛 1:16, 히 6:8).
오늘 우리는 '나 자신이 정말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가?,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는가?'를 확인하고 믿음 가운데 바로 서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이런 책망과 경고를 통하여 그들이 회개하기를 촉구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들은 진정 버리운 자들이며, 믿음의 합격자들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남을 비판하고 판단하기는 쉽지만 자기 스스로를 성찰하기란 어렵습니다. 형제의 티는 보면서 나의 들보를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말씀의 거울 앞에서 우리 자신을 살핀다면 결코 남을 비판할 만한 자고함이 사라질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은 신앙생활은 물론 자신의 일상생활까지도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2. 선을 행하도록 하라(6-8절)
“...오직 우리는 버림 받은 자 같을지라도 너희는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고후13:7)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궁극적 바람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선을 행하고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악을 행치 않게 해주시기를 바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버리운 자'란 '실패한 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실패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납득시키지 못한 실패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아 사역하는 사도 바울에게 오히려 어려움을 주었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는 일에도 소홀히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은 진리를 거부한 채 거짓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을 따라 명예나 부에 미혹되어 하나님의 진리를 등한히 여기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결국은 아무런 풍성함을 얻지 못하고 가장 약한 자로서 패배하는 삶을 사는 것으로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의 근본적 관심은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바르게 행하는 것입니다. 즉 그들이 올바르게 행하기만 한다면 그들이 비록 바울 자신의 권위를 부인하고 무시하더라도 개의치 않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곧 자기는 죽고 대신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드러나게 하는 참 목자로서의 행위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고후13:8)
"진리"는 고전어에서는 "사실"을 가리켰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하나님과 결부시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그리고 그리스도를 가리키게 되었습니다(요14:6). 바울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진리를 거스리고 형통하거나 번영할 수 없음을 확언하였습니다. 즉 바울은 자신은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해서 일할 때 능력 있게 삶을 살게 되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즉 '진리를 거스린다'는 것은 자기 속에 내재하시는 그리스도를 거스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될 때에는 우리가 능력을 받아 무엇이든 할 수 있으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면 담대하게 될 것이나 주님을 거역하면 그 삶이 공허와 무의미 속에 거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돌이켜 보면서 우리가 진리를 위해서 살았다면, 그것은 실로 능력의 삶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예수님을 내 삶에 모시고 살지 못하였다면, 그것은 실패의 삶이었을 것이고 늘 약점 가운데 사는 생활이었을 것입니다.
3. 온전하도록 하라(9-10절)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의 온전하게 되는 것이”(고후13:9)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기에게 행한 믿음의 결과를 보면 분명히 책망을 해야 하지만, 그래도 기뻐하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회개하고 악에서 떠남으로 진리 안에서 강하게 되고 온전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온전하게 되는 것"은 '개선하는 것' 혹은 '진보하는 것'이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는 말처럼 어제보다는 오늘 좀다 나아지는 삶입니다. 좀더 주님께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말씀 앞으로, 기도의 제단 앞으로 한걸음 더 가는 것이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온전하게 되는 것은 '수선함'의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기계의 각 부분이 모두 정상적으로 조립되어 제 기능을 잘 발휘해 주는 것'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고린도 교인들이 '온전하게 되는 것'이란 교인들이 끝내는 하나님 앞으로 바로 돌아와서 온전한 믿음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을 말해 줍니다.
오늘 우리는 나의 삶을 돌아보면서 우리 자신의 연약한 부분을 온전하게 하여 우리의 신앙 생활이 정상적으로 회복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참된 제 기능을 발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해 지고 능력 가운데 사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함께 하셔서 우리를 이끌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잘못된 모든 과거를 청산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 있는 변화의 삶이 있기를 원합니다.
“이를 인하여 내가 떠나 있을 때에 이렇게 쓰는 것은 대면할 때에 주께서 너희를 파하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내게 주신 그 권세를 따라 엄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후13:10)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어서 한 사람이라도 교회에서 추방당하거나 책망 받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권세로 그는 성도들을 책망하고 치리 할 수는 있지만, 그로 인하여 결코 그들의 인격을 파괴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교화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여튼 바울은 범죄한 교인에 대해서 처벌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자신의 생활 가운데 영육 간의 잘못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책망과 징계를 받는 일이 조금도 없도록 자신을 살피며 온전하여 지도록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뉘우침과 깨달음이 있기를 원합니다.
젊은 친구 두 사람이 술을 마시며 방탕한 길거리를 휘젓고 다니다가 교회 앞에 붙어 있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글귀에 눈길을 마주 쳤습니다. 이 때에 한 사람은 그 길로 새 삶의 길을 걸었고, 다른 한 사람은 계속 방탕의 길을 걸었습니다. 30년후 미국 제 24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사람은 바로 때에 큰 결단으로 새 삶을 살았던 크래브랜드 청년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시간에 계속 방탕의 길을 걷던 친구는 감옥에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비참함을 슬퍼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 정리할 것은 정리하고 평가할 것은 냉정히 평가하는 신앙적 결산이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은 본서의 최종 결론으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들의 죄를 속히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시험해 보고 확증하고 믿음에 서 있는가를 살피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렇지 않다면 이제부터라도 선을 행하도록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온전하게 되어 잘못을 고치고 정상적으로 믿음의 바른 자리에 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활을 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13:5)
1) 감사합시다.
많이 가졌다고 감사하는 사람 보셨습니까? 건강한 사람 중에 감사하는 사람 보셨습니까? 자기 뜻대로 다 소원성취 하는 사람 입에서 감사가 나오는 것 보셨습니까? 진정한 감사는 예수님을 아는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면 진정한 감사가 나옵니다. 예수님 때문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감사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앞길이 막막함에도 불구하고 입에서 "하나님, 제 앞길 캄캄하지만 주님이 제 앞에 있는 구름을 걷어내고 어둠을 쫓아 주실 날이 올 줄을 믿고 감사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셔서 이런 고난을 주시는 줄로 알고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감사하는 사람의 믿음은 성숙한 믿음입니다. 감사하는 것만큼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사하는 것만큼 행복할 수 있습니다. 100 평짜리 아파트에 살아도 감사가 없으면 절대로 행복한 사람이 아니고 스무 평짜리 집에 살아도 눈만 뜨면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그 입에서 찬송이 나올 정도로 주님 앞에 감사하는 심령을 가지면 그 사람은 행복한 것입니다. 그 사람의 행복을 누가 빼앗아갈 수 있습니까? 우리는 감사하는 것만큼 다릅니다. 누구하고 다릅니까? 세상 사람하고 다릅니다.
2) 칭찬합시다.
어떤 기관에서 남자들 수백 명에게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남자들이 살아가는 동안 살맛나는 때가 언제냐고 물었더니 첫째는 아내의 인정과 칭찬을 받는 때라고 대답을 했고 두 번째는 직장에서 일이 잘 되고 동료와 상사들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는 때라고 대답했습니다. 칭찬은 사람들을 신나게 하고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합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가장 무시무시한 바다의 포식자 범고래, 3톤이 넘는 범고래, 사람이 다루기에는 너무 호전적이고 한 입에 물어 찢어 죽일 수도 있는 범고래를 채찍으로 조련한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하지만 3톤이 넘는 무게의 범고래를 춤추게 하는 것, 그것은 바로 칭찬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착안해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책을 쓰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사람 사이의 반응을 두 가지로 나누는데 그것은 ‘뒤통수치기 반응’과 ‘고래반응(칭찬반응)’이라는 겁니다. ‘뒤통수치기 반응’은 비판할 항목들을 모아 놓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뒤통수를 치듯이 쏟아 부어 놓는다는 것이고, 반면에 ‘고래반응’은 비판과 비난 보다는 늘 칭찬과 격려를 하는 것인데 아주 간단한 이론이지만 결과에서는 엄청난 반응의 차이를 가져온다는 겁니다. 인간은 칭찬과 격려를 받을 때 활짝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네 삶의 현실은 칭찬과 격려 보다는 질책과 책망, 정죄와 저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최근에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아 본지가 얼마나 되었습니까?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는 것을 보면 여러분은 칭찬부터 합니까? 비난부터 합니까? 자녀가 시험점수를 받아 오고 아내나 남편이 무슨 일을 하면 칭찬부터 합니까? 비난부터 합니까?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마음으로 아침 일찍 일어나 차를 닦았는데 이 때 남편이 "당신 왠 일이이냐? 오늘 해가 동쪽에서 뜨겠네"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남편이 아내를 기쁘게 하기 위해 장미 꽃 한 송이를 사 가지고 저녁에 들어갔는데 이것을 받고 아내가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 것 아니야?" 라고 말한다면 주는 사람의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아이가 모처럼 100점을 받아 왔는데 엄마가 그것을 보자마자 "너 누구 시험지 컨닝한 것 아니니?"라고 말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여러분은 다른 사람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며 칭찬부터 합니까? 비난부터 먼저 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