加耶史의 再照明 오순제 박사(한국고대사연구소 소장)
1.가야(加耶)의 자출(自出)에 대한 검토 가야족은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해 문정창(文定昌)은 흉노족에 속해있던 소호금천씨의 후예인 휴도왕이 전한이 흉노를 격퇴할때 그들에게 투항하였는데 그 아들인 김일제(金日 )의 후손인 왕망(王莽)으로 그가 전한을 멸망시키고 신(新)이라는 국가를 건국하나 후한의 유수에게 멸망당할때 그일족이 동쪽으로 이동하여 가야지역에 정착했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는 문무대왕비문에 "枝載生○○○侯祭天胤之傳七葉以○"이라하여 투후(禾宅侯) 김일제(金日 )와 그 자손들 7대 129년간 영화를 누렸으며 문무왕이 그들의 후손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三國史記)} 김유신전(金庾信傳)에도 "신라(新羅) 사람들이 자칭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예이므로 성을 김(金)이라 하였으며 '김유신의 비문'에도 유신이 헌원(軒轅)의 후예요 소호(少昊)의 종손이라 하였으니 그러면 남가야(南加耶)의 시조 수로(首露)도 신라(新羅)와 동성(同姓)이 되는 것이다"이라 하였다.
근래 김해지역의 고고학적인 발굴을 보면 동복(銅馥) 등 북방기마족의 유물이 나오고 있어 이러한 주장에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흉노족과 연결되는 것보다는 부여족과 연결된다고 보는 견해가 있어 주목된다. 그것은 신경철(申敬澈)로 그는 금관가야와 북방문물에 대해 2류의 목관묘가 묘광내에 통나무기둥을 세우고 여기에 통나무를 대어 목곽을 조립한 점과 순장 및 말을 희생시키는 것은 북방유목민족의 묘제인 목곽묘와 특징을 같이하는 것이고 보았다. 특히 김해 대성동 29호분, 47호분에서 출토된 동복(銅馥)은 기본적으로는 오르도스(匈奴)형의 동복에 속하지만 세부형태와 제작방법 등에서 오르도스지방과는 차이가 있고 오히려 중국의 길림성 북부 유하 노하심에서 출토된 것과 가장 가까운 것이다. 2류의 목곽묘인 김해 예안리 150호 목곽묘에서 출토된 몽고발형주(蒙古鉢形胄)의 형태가 중국길림성 북부의 유수노하심에서 출토된 것과 매우 유사한점과 대성동 2류목곽묘및 동래 복천동 2류 목곽묘에서 출토된 표비( )들은 기본적으로는 선비계통의 것이지만 이들의 조형들 역시 유수노하심의 중층8분묘에서 출토되고 있다. 그리고 현재 한국의 고대종족 중에서 문헌에 순장의 습속이 기술되어 있는 종족은 부여 뿐임을 각별히 유념해야 할것을 지적하였다. 그외에도 장신의 철모, 환두대도의 출현은 이 무기들이 말을 타고 적진을 돌파하는데 효력이 있는 기마용의 무기인 점이며 특히 북방유목민족들이 철도를 구부려 부장하는 습속이 대성동 45호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와 아울러 이당시 기층문화의 일대변혁을 일으킨 도질토기(陶質土器)는 김해-->울산-->경주로 전파되었음을 논술하였다.
한편 이고선(李固善)은 AD 9년 마한(馬韓)의 마지막 왕인 영왕(寧王)이 백제에게 멸망당하여 낙동강가로 피신하여 구지봉(龜旨峰) 아래에 거하여 가라를 세우고 가야왕(伽倻王)이라 칭하고 아비가지(夷毗訶之)로 세자를 삼았는데 AD 10년에 아비가지가 가야산(加耶山)의 정견모주(正見母主)와 결혼하여 AD 11년에 뇌실주일(惱室朱日)과 AD 14년에 뇌실청예(惱室靑裔)를 낳았는데 AD 16년에 가야왕이 구한(九干)을 토벌하였는데 이들의 백성은 총 7만5천인이였다. AD 17년에 가야왕이 죽었다. AD 42년에 아비하지가 죽자 큰아들인 뇌실주일은 어미의 본향인 고령에 대가야(大伽倻), 동생인 뇌실청예는 김해에 가락(駕洛)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것은 최치원이 지은 석리정전(釋利貞傳)에도 나와있어 앞으로 연구되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필자(筆者)는 가야를 고고학적인 발굴성과를 들어 부여계통으로 본 신경철(申敬澈),대총초중(大塚初重)의 의견에 동의한다. 즉 동부여가 고구려에게 패망하는 AD 22년에 하나의 세력이 갈사수가 있는 훈춘지역으로 빠져나가 갈사국을 세우는 것을 볼때 그하나의 줄기가 남하하여 내려오다가 대구, 안동지역에서 하나는 경주로 또 하나는 김해로 이동해 간것으로 추정한다.
2.허왕후(許王后)의 도래와 소승불교(小乘佛敎)의 전래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후의 자출에 대한 것은 이종기(李種琦)의 연구로 그는 김수로왕릉 납릉정문에 있는 물고기문장이 인도의 아요디아에서도 나타나고 있으며 초선대의 인물상은 가야의 2대왕인 거등왕의 초상으로 그형태가 인도의 모헨조다로에서 출토된 인물상 및 드라비다족과 비슷하다고 보았는데 그앞에는 불족적이 있다. 명월사지에서 발견된 탑신에 새겨진 조각은 삼매에 잠긴 불타를 한마리의 거대한 뱀이 감고 있는 형상으로 뱀의 목덜미에는 동그란 무늬가 있어 이것이 인도에 사는 코브라임을 알수 있었고 이것은 소승불교에서 나타나는 조각임을 알수 있다. 그리고 인도에서 가져온 파사석탑을 말하였다. 허명철(許明徹)도 파사석탑이 1978년 인도학자들의 현지조사에 의해 인도산임을 확인 하였다고 하였으며 닭의 피에는 녹아서 없어지는 특이한 돌인을 입증하였다. 파사(婆裟)라는 명칭도 "바사"라는 범어에서 나온 것임을 입증하였다.그리고 인도 갠지스강 하구의 탐록에서 출발하여 니코발군도를 거쳐 쟈바, 수마트라를 거쳐 중국의 광주에서 가야로 왔는데 총 90일이 걸렸을 것으로 보았다. {가락국기}에 출발일이 5월 도착일이 7월 27일로 약 3개월에 걸친 것으로 인도에서 남행하려면 4-6월에부는 계절풍을 이용했으리라고 보아 출발일시가 5월이였음이 타당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창원공단 개발시에 중국 호남지방과 교역한 흔적이 있는 부족국가취락지가 발견되었고 인도의 쿠샨왕조가 중국의 항구에 진출하여 비단을 싣고 갔다는 것은 이러한 인도에서 가야까지의 뱃길이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허황후의 시호인 보주(普州)란 넓다, 위대하다, 훌륭하다라는 뜻으로 보았다. 그리고 허왕후의 오빠인 장유화상의 존재로 고구려 소소림왕 때에 대승불교가 들어오기 전에 가야에는 이미 인도의 소승불교가 들어왔음을 밝혔다.
한양대학의 김병모(金秉模)교수는 허황후 일족이 인도의 아요디아에서 중국사천성 안악으로 이동하였는데 그곳은 허황후능비에 "보주태후(普州太后)"라고 한 보주(普州)지역으로 허황후가 나타날 당시 쌍어문이 나타나는 사천성은 촉(蜀)이라 불렀는데 {후한서(後漢西)}에는 47년에 촉지방에서 신전에 쌍어를 모시는 소수민족신앙집단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하여 무창으로 강으로 강제이주 당하는데 그반란의 주동자가 허성(許聖)이였다. 이러한 허황후 일행은 양자강을 따라 배를 타고 동남쪽으로 바다를 건너 가락국으로 왔다는 것이다.그는 쌍어문(雙魚文)이 인도의 아요디아, 중국의 사천성 안악, 무창, 한국의 김해에 나타나며 특히 김해의 다호리 가야고분에서 중국 한나라때의 구리거울과 사천성의 대표적 사물인 칠기가 다량으로 나타나 허황후일족이 인도의 아요디아-->중국의 보주-->양자강--->황해--->김해로 이동해왔다고 보았다. 이것에 대한 연구는 계속 진척되어야 한다고 본다.
김영태(金煐泰)는 가야의 초기불교는 김수로왕의 일곱왕자가 허황후의 동생인 보옥선인을 따라 지리산으로 들어간 칠불암을 보면 왕실중심의 소승적 불교로 대중과는 격리되어있음을 알수 있다. 제8대 질지왕이 452년 즉위하자마자 왕실의 권위를 신성하게 하기위해 시조왕의 왕후를 기리고 명복을 비는 "왕후사(王后寺)"를 세우고,허황후의 동생 보옥선인을 기리는 "장유사(張遊寺)"를 세웠는데 이절들이 왕실의 복을 비는 곳일 뿐만 아니라 왜를 진압하기 위한 호국적 불교의 성격을 띄고 있어 이당시 초기의 소승적 불교에서 대중적 불교로 전환,공인 되었음을 지적하였다.
필자(筆者)는 대승불교의 유입은 백제를 통한 것으로 보고자 하는데 그것은 고령(高靈)의 고아동벽화고분의 구조가 터널형천정으로 공주의 송산리 6호분,무녕왕능과 유사하고 연화문의 형태와 필법이 부여 능산리벽화고분의 것과 유사하여 백제(百濟)의 영향을 나타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연화문이란 불교적인 것으로 이것은 고구려, 백제의 고분에 나타나고 있으며 대승불교의 전래 이후 있엇던 것이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의 불교의 특징을 보면 고구려는 대승불교를 처음으로 받아들인 나라이며 백제는 중국을 통해 인도불교를 직접 받아들여 일본까지 전파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가야불교의 특징은 소승(小乘:南方)불교 전래의 최초국가가 되는 셈이다.이러한 견지에서 본다면 허황후는 인도에서 가야로 직접왔을 가능성이 매우높다.
3.가야(加耶)의 일본(日本) 진출
{삼국유사(三國遺事)} [가락국기]에 가야의 영역을 동은 황산강, 서남은 창해, 서북은 지리산, 동북은 가야산이라 하였는데 남쪽만은 "南而國尾"라하였는데 이것을 이병도는 "남쪽은 나라의 끝"이라고 풀었다. 그러나 끝이 없는 나라가 어디있겠는가 위에서 모든 방위가 지명을 나타내고 있어 이종기는 국미(國尾)를 지명으로 보아 현재의 대마도로 추정하였다.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 보면 "임나는 본래 대마도의 서북 경계였다.북은 바다로 막히고 치소가 있었는데 국미성이다.동서에 가각 마을이 있다.어떤 자는 조공하고 어떤자는 반하엿다.후에 대마의 두섬을 마침내 임나가 통제하는 바 되었다. 그 때문에 임나는 이때부터 대마도 전체를 칭하는 말이 되었다.옛부터 구주와 대마도는 곧 삼한이 나누어 다스렸던 땅으로 본래 왜인들이 사는 땅이 아니였다. 임나가 또 갈라져 삼가라가 되었는데 소위 가라란 수읍을 칭함이다"라고 하여 국미성은 지명으로 대마도의 서북단에 있었음을 말하고 그것이 임나로 변한 즉 가야에 속하였음을 밝혔다. 부산대의 이병선교수는 이러한 국미성을 대마도 목판(木坂)의 수미(狩尾)로 비정하였다.
{일본서기(日本書記)},{고사기(古事紀)}에서 나타나는 변한(加耶)계의 일본진출은 숭신천황인데 그는 신무천황과는 다른 계통 시조인 조국천왕(肇國天皇)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숭신(崇神)의 활동은 부의가야=미마나=어간성=임나로 이어지는 세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그의 이름이 어간성입언오십담식, 황후의 이름은 어간성희로 되어있다. 그런데 어간성은 임나로 일본서기 숭신 65년에 "임나는 축자에서 2천여리 떨어져 있는데 북은 바다로 막혀있고 계림의 서남쪽에 있다"고 하였는데 축자는 구주를 말한다. 그런데 {삼국지(三國志)} 동이전 왜인조에 대방군에서 왜까지의 경로가 나와있는데 구야한국(김해)에서 바다를 건너 1천리를 가면 대마국(對馬島)이 되고 다시 바다를 건너 1천여리를 건너면 일지국(一支島)이 되고 다시 바다를 건너 1천여려를 건너면 말로국(九州의 唐津)이 된다"고 하여 구주에서 2천여리를 역산하면 대마도가 되어 임나가 대마도임을 알게되었다. {환단고기},[대진국본기]에는 "이도국은 축자에 있으며 일향국이다. 여기서부터 동쪽은 왜에 속하는데 왜인들은 갈리어 산도에 의거하여 살며 각각 100여국이 있었다. 그 가운데 구야한국(狗邪韓國)이 제일 크니 본래 구야본국(狗邪本國)이 제일 큰데 그것은 구야본국 사람이 다스렸던 곳이다. 이도국은 반여언(神武天皇)의 고읍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그 당시 일본에는 구주와 본주에 서로 다른 왕통이 전개되고 있었음을 알수있다. 즉 구주에는 신무, 경행, 신공의 야마대국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으며 본주에는 왜라고 불리웠는데 100여개의 나라가 있었는데 그것을 다스리던 것이 구야한국이다. 구야한국은 구야국의 식민지였으며 현재 기비지역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윗책에서는 "비자체는 변진비자벌사람들의 취락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창녕에 있던 변진비자벌(非火加耶) 사람들도 일본에 진출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고고학적으로 일본의 구주(九州)에는 세형동검, 동모, 동과가 집중적으로 분포되어있고 본주(本州)의 서부지역인 도근, 도취, 광도, 강산, 석천, 지부, 정강 등에는 동탁이 분포되어 있어 서로 다른 문화가 존재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구주의 복강, 좌하, 장기, 웅본현에만 고인돌이 나타나고 있고 야마대국의 풍습이 구주의 것과 일치하고 있어 본주에는 구주와 다른 문화가 존재하였음을 명백히 해주고 있다.
4.가야전기연맹(加耶前期聯盟)의 영향권
전기가야는 아라가야, 고령가야, 대가야, 성산가야, 소가야로 맹주는 김해에 있는 금관가야이다. 김태식(金泰植)은 {택리지}에서 "동해는 바람이 높고 물결이 험하여 서해와 남해의 선박이 잘 닿지 않는데 비하여 서, 남해는 물결이 완만하여 전라, 경상도로부터 한양, 개성, 황해도, 평안도까지 상인들이 이어지며 낙동강 입구에서는 강줄기를 따라 상주, 진주까지 배가 미치는데 경상도에서는 그러한 남북해륙지리(南北海陸之利)를 김해(金海)가 관장한다"고 한것을 들어 김해의 금관가야가 해운교역의 구심점 역활을 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고녕가야의 위치는 진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함창에서 나온 토기가 가야토기이며 그곳에는 가야왕능이라고 전해오는 쌍릉이 존재되고 있어 고령가야를 함창으로 비정하고자 한다. 가야고분의 분포는 의성, 대구, 경산, 양산, 영주, 안동, 문경, 동래, 칠곡, 창녕, 고령, 함안, 김해, 성주, 진주, 고성 등으로 매우 넓은데 문정창(文定昌)은 신라가 청주지방인 낭자곡성에 진출안 AD 63년 이전에 이미 추풍령이북의 고령가야가 신라에게 흡수되었다고 보았다. 김수로왕 시기에 석탈해가 가야를 침공하려다가 실패하여 신라로 들어감을 볼수있는데 이것은 본주를 장악하고 있던 가야에 구주의 막강한 세력인 다파라국, 다라국, 완하국의 왕자인 석탈해가 도전해온 것이다. 그런데 다라국은 고구려의 건국공신이였으나 유리왕과 정견을 달리해 남으로 달아난 협부의 후손으로 졸본인들이였다. 그들은 아소산 부근에 그들과 같은 종족이 세운 안나국과 나란히 있었으며 완하국은 고구려의 속노라 하였다. 그가 대장장이였다는 것은 고구려 출신으로 이미 야금술을 습득하고 있었음을 알수 있고 이것을 배경으로 신라에서 왕위에 까지 오르게 됨을 알수 있다.
석탈해 21년(67)에 아찬 길문이 황산구(黃山口)에서 가야와 싸워 1천여급을 잡았다. 파사이사금 8년(87)에는 서로 백제와 남으로 가야의 침략을 대비해 가소,마두성을 쌓았다. 15년 가야가 마두성을 공격해 포위하자 아찬 길원으로 기병 1천을 이끌고 나가 쫓았다. 17년 가야가 남쪽 경계를 쳐들어 오자 가성주 장세를 보내나 패하자 왕이 오천의 군사를 이끌고 나가 이겼다.18년에는 가야를 치고자 하니 가야왕이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다. 23년(102)에는 음집벌국이 실직곡국과 함께 경계를 다투다가 신라왕의 중재를 청했으나 왕이 처리하기 어려워 가야의 김수로왕을 초대하여 처리해줄 것을 청하니 그땅을 음짐벌국의 영유로 하라 하였다. 파사왕이 6부의 촌장들에게 명하여 수로왕을 위하여 향연을 베풀었는데 한기부의 촌장이 출석하지 않았으므로 노복 탐하리에게 한지부의 촌장인 보제를 죽이라고 명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탐하리는 보제를 죽이지 않고 음집벌국의 왕인 타추간의 집으로 달아났다 파사왕이 그를 내놓으라하나 듣지않자 파사왕이 음집벌국을 치쳐서 멸하자 실직국까지 항복해왔다.26년(105) 마두성주에게 가야를 치라 명하였다. 지마이사금 4년(115년) 가야가 남쪽 경계를 쳐들어오자 왕이 군사를 이끌고 가야를 쳤다. 황산하를 건너자 가야는 복병으로 에워쌓는데 왕이 포위를 뚫고 물러왔다. 5년 장수를 보내 가야를 치게하고 왕이 정병 1만으로 그뒤를 이으니 가야가 성을 굳게 지켰는데 마침 비가 오래 오므로 돌아왔다. 나해이사금 6년(203) 가야국이 화친을 청했다. 14년(209)에 포상8국이 가야를 침략하자 가야가 신라에 구원을 청하였는데 태자인 우노와 이벌찬 이음을 보내 구원병을 이끌고 나가 8국의 장수를 쳐죽이고 그들이 노략한 6천인을 빼았아 돌아왔다. 17년(216) 가야가 왕자를 보내 볼모로 삼았다.
위의 기록에서 가야는 초기에 신라를 제압하던 세력이였으나 203년이후에는 매우 약화되고 있음을 알수있는데 그것은 포상8국의 가야 영향권에서의 이탈로 볼수 있다. 포상팔국(浦上八國)이란 현재 골포(馬山), 고사포(鎭海), 칠포(漆原), 사물국(泗川), 고성 등에 있던 세력을 말한다.그당시 세력권을 김해, 웅천 중심의 금관가야권(金管加耶圈), 고령, 대구 중심의 대가야권(大加耶圈), 함안, 진해, 창원, 칠원 중심의 아라가야권(阿羅加耶圈), 충무, 고성, 거제 중심의 소가야권(小加耶圈)으로 나누어 볼때 고성, 함안을 중심으로 한 아라가야, 소가야권이 금관가야의 영향권에서 이탈해 나가고 있음을 감지 할수 있다. 경주 황오동 출토의 토기 중에는 지금까지 알려진 함안계 고배 중 최고 것이 나타나는데 아라가야는 후기의 강자였던 대가야보다 거의 1세기 정도 앞서서 가야의 강자로 군림하고 있었음을 알수있다. 즉 이들 세력은 4세기 후반대에 김해의 금관가야와 필적할만한 강력한 정치집단으로 성장하고 있었으며 5세기대에 들어서면 김해,부산의 금관가야가 갑자기 급격히 쇠퇴하는 반면 아라가야는 여전히 강자의 면모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이들은 후기연맹의 대가야 때에도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대가야의 것과는 달리 고배에 불꽃모양의 투창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5.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의 남정(南征)과 가야전기연맹의 붕괴
고구려(高句麗)의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은 396년 백제의 도성을 함락하여 그 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는데 그후 400년에는 신라를 공격해온 왜를 쫓아서 임나(任那)와 가야(加耶)를 점령한 후에 안나(安羅)인으로 술병을 삼아 그들을 감시하였다. 이당시 대마도에 있던 임나를 점령하고 일본(日本)의 구주에 상륙한 광개토대왕의 군사는 404년에 본주를 공격하여 이중천왕을 제거하고 406년에 고구려계의 반정(反正)천왕을 세웠다. 광개토대왕이 일본으로 향하던 한반도 최남진의 기지를 동래(東萊)에 두었는데 그 증거가 복천동고분이다. 이당시 백제, 가야, 왜의 동맹국 중에서 가야의 종주국 노릇을 했던 금관가야(金管加耶)는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무너져 버리고 그 중심축이 고구려의 공격에서 살아남은 내륙 깊숙히 있던 고령의 대가야(大加耶)로 옮겨 가게되었으니 이것이 후기가야연맹인데 이 시대에 또 다른 축은 소가야(小加耶)와 함안의 아라가야(阿羅加耶)였다. 광개토대왕, 장수왕 당시 가야지방에 끼친 고구려의 영향은 매우 지대한 것으로 기마용의 마구, 갑옷, 화살촉 등이 전래되었고 수혈식의 묘제가 고구려의 횡혈식(橫穴式)고분의 영향을 받아 횡구식과 횡혈식의 고분이 발생하게 된다. 부산시립박물관의 홍보식(洪潽植)은 영남지역 6세기 중엽 횡혈식석실묘의 출현전에 수혈계횡구식석실묘는 낙동강 이동에만 한정 분포되어 있는데 이것은 수혈계횡구식석실묘가 신라지역에서 먼저 출현하여 낙동강 이서지역으로 확산되어갔다고 보았다. 그리고 고령(高靈)을 중심으로한 낙동강 서안(西岸)지역은 수혈계횡구식석실묘의 단계를 거치치지 않고 6세기 중엽이 되어서야 기존의 수혈식석실묘가 곧바로 횡혈식 석실묘로 교체되어갔다. 함안34호분에서 보이는 감(龕)이 백제지역의 횡혈식석실묘에는 보이지 않으나 평양부근의 약수리벽화고분, 태성리2호분, 안악2호분 등 5세기 전반대 이전의 횡혈식석실묘에 있을 뿐만 아니라 인동1호분의 시상구조가 평양의 이른바 동명왕릉 부근의 진파리16호분의 것과 유사하다. 낙동강 동안(東岸)지역의 수혈계횡구식석실묘에서는 백제계의 유물이 전혀 나오지 않는 사실은 이것이 백제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횡혈식석실묘의 매장법이 낙동강유역의 수혈식석실묘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이다. 즉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400년에 남정한 이후 남부지역에 고구려의 영향력이 증대하였고 장수왕의 평양 천도이후 시작된 적극적인 남진정책으로 인해 남부지역으로 문화가 전파되었다고 보았다.
영남지역의 갑주는 비기마용갑주와 기마용갑주로 나누어지는데 비기마용갑주는 4세기대의 김해 예안리 150호 목곽묘 출토의 종세장판혁철주와 경주 구정동 3호 목곽묘 출토의 종장판혁철주 등에서 출토되는데 이것은 한반도 남부의 독특한 토착계 갑주이다. 기마용갑주는 몽고발형주로 불리우고 있는 복발형주와 유동이 자유로운 기마용갑옷인 괘갑(卦甲)으로 구성되는데 이것은 5세기초이후 영남지역에서 폭발적으로 다수 출토되고있다. 이것은 5세기 전반대의 동래복천동 고분군의 출토품이 잘 증명해 주고있는데 이러한 갑주는 고구려에서 들어온 외래계 갑주로 기마용 마구와 함께 출토되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광개토대왕의 남정의 소산으로 추정된다. 즉 신라의 고구려와의 직접적인 교류의 증거로는 경주 월성로고분에서 출토된 북방계 단갑(短甲), 고구려계 녹유토기(綠釉土器)와 호우총에서나온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이라는 명문이 있는 호우(壺盂), 중원고구려비의 "고려대왕(高麗大王)"과 "신라매금(新羅寐錦)"과의 관계 등이다. 이것은 바다 건너 구주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는데 그후 일본의 고분은 횡구식, 횡혈식이 나타나고 기마용의 유물이 나타나게 된다. 신경철은 신라토기 분류하는 중에 복천동 31, 32호분에 해당하는 4단계 초에는 낙동강하류지역에 갑자기 "고식경주토기"가 폭발적으로 등장하는데 이러한 현상을 400년에 있는 고구려,신라의 연합군에 남정에 의한 정치적,군사적 소산으로 보았다. 특히 이고분에서 출토되는 마구류, 갑옷류 등이 고구려 계통의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신라와 가야토기로 나누어지는 시기를 상정하는데 있어서 상하교차투창의 고배와 직선적인 구경부의 장경호로 특정지워지는 신식신라토기(廣義 개념의 신라토기)는 신라 최고의 적석목곽분인 황남동 109호분 3, 4곽에 해당하는 300년에 나타나는데 정형화신라토기(狹議 개념의 신라토기)의 출현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하시기 후인 430년으로 보았다. 특히 광개토대왕이 차지한 구주와 대마도지역에는 임나연정(任羅聯政)이 베풀어 지는데 이당시 그곳에 포함된 나라는 다라국, 안나국, 말로국 등 육지(九州)에 7개 대마국, 일지도, 오호열도(자타국)은 바다에 있던 3개국으로 총 10개국이다.이중에서 구주 아소산 부근의 웅본(熊本)에 있었고 졸본(卒本) 출신인 안나국(安羅國)을 술병(戌兵:감시병)으로 삼아 다스렸다.
일본의 식민사학자(植民史學者)들은 임나를 한반도 남부의 대구, 고령, 성주, 합천, 거창, 의령, 창녕, 진주, 사천, 함안, 창원, 김해 등 가야지역에다 이치 시킴으로써 일본인들이 임나일본부(任羅日本府)라는 식민지를 가야지방에 두었다고 역사를 왜곡 시켰다. 그래서 한일합방후에는 가야전 지역에서 임나의 유물을 찾기위하여 도굴을 자행하였으나 단한점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해방후 지금까지도 이병도(李丙燾)를 위시한 그의 제자들은 이들의 이론을 심화 발전시키고 있다. 예를 임나일본부를 부정하면서도 임나의 지명들을 가야지방에 비정하는 오류를 범할 뿐만아니라 합천군 쌍책면에서 나타나는 옥전고분(玉田古墳)이 대가야에 속했던 수장들의 무덤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합천의 쌍책면 다라리를 다라국(多羅國)으로 비정하였다. 그러나 이곳은 고대의 어느 사적에 6가야로 언급되지 않은 곳으로써 다라국이라는 것조차 없었던 곳이다.
6.가야후기연맹(加耶後期聯盟)인 대가야(大加耶)의 융성
후기가야연맹은 금관가야, 고령가야, 비화가야, 아라가야, 성산가야로 맹주는 대가야이다. 김태식(金泰植)은 {택리지}에 "경상우도는 땅이 비옥하며 특히 가야천 유역의 성주, 고령, 합천등은 한반도에서 가장 비옥한 땅으로 단위면적당 수확량이 가장 높으며 농업용수가 풍부하여 한재(旱災)를 겪지 않는다"는 기록을 들어 김해지역과는 달리 이곳이 전화도 입지 않고 최상의 농업입지조건을 안정적으로 유지한 가운데 선진문화를 보유하고 금관가야의 잔여세력이 유입되어 들어왔다고 추정하였다. 그것은 고령의 지산동고분을 비롯한 가야북부지역 고분문화의 번성기는 5세기로 추정되는데 이들의 묘제나 토기 형식은 백제, 신라의 것과는 달리 그 전단계인 4세기대의 김해, 창원, 부산 등의 경남해안지대의 문화와 가장 가까운 친연관계를 가지고 있어 4세기말 5세기초에 진행된 경남해안지역 세력의 몰락과 관련이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3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까지 낙동강 유역에 출토되는 토기를 모두 가야토기로 본다면 안동, 의성, 칠곡, 대구, 경산, 현풍, 창녕, 성주 등지의 낙동강동안형은 "신라중심형의 가야토기"이고 고령, 합천, 함안, 웅천, 고성 등지의 낙동강서안형의 토기는 "가야중심형의 가야토기"이다.
4세기 후반에서 6세기 중엽의 영남지역 묘제를 보면 고령이남 낙동강 서안 지방의 고령, 합천, 거창, 함양, 남원, 함안, 고성, 사천, 진주, 산청, 하동, 김해, 창원 등의 가야문화권(加耶文化圈)과 낙동강 동안지방 중심의 경주, 의성, 안동, 경산, 대구, 칠곡, 성주, 선산, 창녕, 울산, 양산, 부산 등의 신라문화권(新羅文化圈)으로 나뉘어진다. 가야문화권은 세장형평면의 수혈식석곽묘가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반면 신라문화권은 적석목곽분, 횡구식석곽묘, 횡혈식석실분, 짧은 장방형 평면의 수혈식석곽묘 등 다양한 묘제가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가야문화권이 전대이래의 문화전통을 거의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데 비해 신라문화권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여러방면으로 변용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거창 말걸리고분, 하동 고리리고분, 함양 상백리, 백천리고분, 남원 월산리, 건지리고분, 산청 중촌리고분, 사천 예수리고분군등의 것들은 고령 지산동 것과 비슷하여 대가야가 이들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하였음을 알수있다. 그리고 임실읍 동북으로 접한 관촌면 금성리 화성부락에 있는 석곽묘 중에서 5세기 중엽으로 편년되는 금성리 A호분에서 출토된 장경호는 고령지산동식이다.
특히 6세기 전반의 고분으로 추정되는 지리산 서록의 남원(南原) 초촌리고분은 백제적 성격의 유물이 출토되어 이지역에 있는 교룡산성까지 백제세력이 미쳤음을 알수 있다. 그런데 남원의 월산리고분에서는 고령 지산동고분에서 출토되는 토기가 나오고 있어 대가야가 5세기 후반에는 이 고분에 근처에 있는 지리산 북록의 아막산성을 보유했음을 알수있어 백제와 가야의 경계가 아막산성과 교룡산성사이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즉 고고학적인 유적분포로 볼때 6세기 초 가야와 백제는 소백산맥과 지리산이 자연적 경계를 이루고 있었음을 알수 있다. 신라쪽을 보면 삼가고분 중에서 최고의 것으로 추정되는 1, 5, 6호분의 묘제 및 유물의 성격이 고령 지산동의 것과 거의 같다. 창녕 교동 고분군에서 출토되었다는 2단식직령투창유개고배와 단추형꼭지뚜껑은 고령 지산동의 6세기 전반 토기와 극히 유사하며 밀양 월산리의 파괴석묘에서 수습되었다는 고배중에서 2단직령투창이 있어 대가야가 삼가를 근거로 하여 일시적으로 밀양까지 힘을 미쳤던 것임을 알수있다. 그리고 5세기 중엽에서 후반에 걸쳐서는 김해, 창원지역에 고령의 대가야문화의 영향 아래 다시 복구 운동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김해 예안리 35호분에서 출토된 개배(蓋杯), 대호(大壺)가 고령 지산동 것으로 추정되고 예안리 36호분에서도 대가야계통의 단추형꼭지뚜껑을 덮은 2단직령투창유개고배가 3점이나 출토되면서 유물의 양이 증대되고 있다. 창원 도계동 고분군의 4, 19호 토관묘에서 2단직렬투창고배가 출현하면서 유물의 양이 증대되고있다. 6세기 전반의 예안리 39호분,예안리 62호분에서도 가야 서남부지역의 토기가 나오고 있다. 이것은 김해, 창원 등의 가야 동남부지역이 4세기이전단계에는 가야 전기의 전통적인 중심지였다가 4세기말에서 5세기 초에 걸쳐 크게 쇠퇴한 이후 신라에 반복속된 상태에 있으면서 신라계통의 문물을 받아 근근히 명맥을 이어오다가 5세기 중엽에서 후반에 걸치는 시기에 다시 가야북부 대가야지역의 문화적 영향을 받으면서 복구의 기운이 일어난 것이라 하겠다.
대가야(大加耶)는 백제와 동맹을 맺으면서 백제의 영향을 받았는데 고령의 고아동벽화고분의 구조는 터널형천정으로 공주의 송산리 6호분, 무녕왕능과 유사하고 연화문의 형태와 필법은 부여 능산리벽화 고분의 것과 유사하여 백제(百濟)의 영향을 나타내 주고 있다. 나제동맹(羅濟同盟) 기간인 신라 소지왕 3년(481)에는 고구려가 말갈과 더불어 신라의 북변을 쳐서 호명등 7성을 취하고 다시 미질부로 진군해오매 신라군은 백제,가야의 구원병과 더불어 길을 나누어 막았다. 18년(496)에 가야가 꼬리가 5척이나 되는 백치를 보냈다. 법흥왕 9년(522)에는 가야국왕이 사신을 보내 청혼하매 이찬 비조부의 매를 보냈다. 이당시 대가야의 왕은 이뇌왕이였다. 그후 신라의 진흥왕이 고구려로부터 빼았은 백제의 한강유역을 탈취하자 나제동맹(羅濟同盟)이 결렬되었다. 진흥왕 15년(554)에 백제의 성왕이 가야와 더불어 신라의 관산성을 쳤는데 신주의 군주 김무력이 병사를 이끌고와 도왔다.이때 삼년산군의 고우도도가 갑자기 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이것을 보면 가야는 나제동맹이 결렬된 후에도 백제와 긴밀한 동맹관계를 유지해 고구려 또는 신라와 경쟁하였음을 알수있다. 특히 가야왕의 아지는 479년에 중국의 남제(南齊)에 사신을 파견하여 보국장군을 받았는데 아지는 대가야의 가실왕으로 추측되어진다. 이당시 남조는 백제의 영향권 내에 있었음을 볼때 이것 또한 백제와 매우 밀접한 것이였음을 알수 있다.
7.가야(加耶)의 멸망(滅亡)과 그 영토의 후속처리 문제
신라 법흥왕 19년(532)에 금관가야의 구형왕이 투항해왔다. 540년에 신라가 대병으로 아시랑국(阿羅加耶:咸安)을 멸하였다. 신라의 진흥왕은 관산성 전투 다음해인 16년(555)에 비화가야(非火加耶)인 창녕에 완산주를 설치하였고 561년에는 진흥왕이 하주(下州)인 창녕에 친행하였는데 현재에도 화왕산성과 목마산성 밑에 진흥왕의 순수비가 있다. 진흥왕 23년(562)에 이사부, 사다함을 보내 대가야를 멸하였다. 정약용의 {강역고}에는 지증왕 6년(505)에 신라가 이사부를 보내 소가야를 멸하였다고 하였으나 천관우(千寬宇)는 이 년대가 잘못된 것으로 고성의 소가야는 562년에 대가야가 멸망할때까지 존재하였을 것으로 본다. 백제가 가야와 동맹관게를 구축하게 된것은 가야는 400년 광개토대왕이 왜에게 공격 당한 신라를 구하고 그들의 후원세력인 금관가야를 공격하고 404년에는 일본의 구주와 본토를 공략해 들어가는 과정에서 가야의 전기연맹이 무너지고 후기연맹이 성립되고 백제는 475년 장수왕의 공격으로 개로왕이 전사당해 한강유역을 상실하고 공주(公州)로 천도하였다. 그당시 고구려의 세력권으로 들어간 신라는 내물왕 37년(392)에 이찬 대서지의 아들인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으며 실성왕 11년(412)에는 내물왕의 아들인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눌지왕 8년(424)에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눌지왕 34년(450)에 고구려의 변장이 실직원에서 사냥하자 하슬라성주가 군사를 보내 그를 공격해 죽인이후 38년(454)에도 고구려가 신라의 북변을 공격해 왔다. 이로서 여제동맹은 깨어지고 39년(455)에 백제가 고구려의 공격을 받자 신라가 군원병을 보냄으로서 나제동맹(羅濟同盟)이 성립되게 되었음을 알수 있다.
이당시 내물왕은 자기의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시키기 위해 정치적 라이벌인 실성을 인질로 고구려에 보냈으며 고구려의 세력을 업고 귀국한 실성에게 피살되었는데 왕위에 오른 실성은 내물왕의 아들인 복호를 고구려,미사흔은 왜로 추방하였다. 그러나 정치적 도피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내물왕의 장남인 눌지는 실성왕을 살해하고 자립하여 고구려의 세력을 극복하려고 나제동맹을 결성하게된 것이다. 소지왕 3년(481)에는 고구려의 신라 공격을 백제와 가야가 구원병을 보낸 사실을 보면 신라, 백제, 가야가 동맹관계를 유지해 고구려의 남침을 막고 있음을 볼때 백제와 가야가 동맹관계 유지해 오다가 고구려의 영향권에서 벋어나고자하는 신라가 이들과 제휴하게 되었음을 알수 있다. 이렇게 고구려의 영향권에서 벋어난 신라는 의성, 안동, 경산, 대구, 칠곡, 성주, 선산, 창녕, 울산, 양산, 부산(동래) 등으로 그 영역을 확대시켜나가 가야의 서쪽 경계를 조여들어왔다. 이들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가야는 백제와 계속적으로 결속하게 된다. 예를 들면 신라의 진흥왕이 백제의 성왕을 도와 고구려를 밀어낸후 백제의 한강 유역마저 빼았음으로서 나제동맹이 결렬되고 백제(百濟)의 성왕이 554년에 신라의 관산성 공격하게 되는데 이때에 가야, 왜의 구원병이 참전하고 있음을 볼때 가야(加耶)는 백제, 왜와 연결된 동맹세력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수 있기 때문이다. 532년 금관가야의 멸망으로부터 562년 대가야가 멸말 당하기까지 신라가 가야의 서쪽을 조여왔는데 대가야가 멸망당한 후 그 땅은 신라와 백제의 각축장으로 변하게된다.
백제의 무왕 3년에 신라의 아막산성(雲峰)을 공격하였고 17년에는 신라의 모산성(운봉)을 공격했다. 25년네 신라의 석함(咸陽) 등 6성을 쳐서 빼았았다.의자왕 2년 7월에는 백제 의자왕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서쪽 40개의 성을 공격하여 빼았았으며 8월 윤충장군을 보내 신라의 대야성(陜川)을 쳐서 성주 품석을 죽였다. 4년 신라의 김유신장군이 백제를 쳐서 7성을 빼았았다. 5년 신라를 쳐서 7성을 빼았았다. 7년 백제의 의직 장군이 신라의 무산성(무주군 무풍면)에 밑에 진군하여 감물(금릉군 개녕면),동잠성을 쳤으나 김유신에게 패하여 돌아왔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가야가 멸망한후 신라(新羅)는 합천, 거창, 고령, 함양, 고성, 함안, 창녕, 김해지방을 백제(百濟)는 남원, 임실, 순창, 진안, 장수, 구례, 무주, 진주, 남해, 하동를 차지하였음을 알수 있다. 이당시 백제가 신라가 차지한 옛 가야 땅의 가장 깊숙히 침공해 들어간 것은 신라 40개의 성을 빼았은 후 합천에서 벌어진 대야성(大耶城) 전투였다. 이것은 이미 차지한 함양과 남쪽의 거점인 진주에서 공격한 것으로 40개의 성은 주로 이들 지역과 합천 중간에 위치한 거창과 산청지역에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 가야사의 재조명 | 글쓴이 : 맥돌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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