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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지리를 잘 몰라 충무로역에서 나와 길가에 근무 중인 경찰관에게 남산골 한옥마을을 가는 길이 어디냐고 물어보니..... 웃으면서 바로 저 골목으로 들어가면 된다고 알려 주었다. 막상 찾고 보니 웃음이 나올 정도로 아주 가까운 곳에 떡하니 자리 하고 있어서 길을 물어 본 내가 무척이나 쑥스러웠었다.(경찰관의 웃음의 의미를 알게 되었지 뭔가.....ㅋㅋㅋ) |
입구엔 자그만 공간이 있었는데 외국인 관광객을 실어나는 관광버스가 독차지하고 있었다. 일본과 중국 등등..... 이날은 중국관광
객이 특히 많았다.
서울의 상징인 남산은 옛 이름을 목멱산이라고 하였으며, 도성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남산으로 불리어 왔다. 남산은 그 자연의
경치가 아름다워 우리의 조상들이 골짜기마다 정자를 짓고 자연의 순리에 시(詩)·화(畵)로 화답하는 풍류생활을 하던 곳으로서
각종 놀이와 여가생활을 위하여 수려한 경관을 찾는 선남선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곳 남산골 한옥마을은 원래 조선시대 후기부터 남별영(南別營)과 남소영(南小營)으로 수도방위의 임무를 띤 조선후기의 군사
주둔지로 사용되었다가 해방이후 수도방위사령부로 사용되던 것을 1989년 서울시가 토지를 매입하여 남산골 되찾기 운동의
일환으로 조성되어 1998년 4월18일 개관된 전통공원(傳統庭園)에는 그 동안 훼손되었던 지형을 원형대로 복원하여 남산의
자연식생인 전통 수종을 심었으며, 계곡을 만들어 물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하였고, 또한 정자 · 연못 등을 복원하여 전통양식
의 정원으로 아주 잘 꾸며 놓았다.
입구에서 들어서면 왼쪽으로 조선시대의 피서지로 유명한 천우각泉雨閣(75.6㎡)을 지나면서 전통정원의 북동쪽 7,934㎡ 대지에는 서울시내에 흩어져 있던 서울시 민속자료 전통한옥(傳統韓屋) 5채를 이전, 복원하고 이 한옥에 살았던 사람들의 신분성격에 걸맞은 가구 등을 배치하여 선조들의 살아왔던 삶의 흔적을 재조명 하였으며, 전통공예관(傳統工藝館)에는 무형문화재(無形文化財)로 지정된 기능보유자들의 작품과 한국을 상징하는 관광상품 등을 전시·판매하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무더위를 식힐 겸 해서 잠시 들어가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의지하며 한참(?)을 구경하고 나왔다. |
전통 가옥
남산 북쪽 기슭 한옥마을이 들어선 필동(筆洞) 지역은 조선시대에는 흐르는 계곡과 천우각(泉雨閣)이 있어서 여름철 피서를
겸한 놀이터로 유명했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청학이 노닐었다고 하여 청학동(淸鶴洞)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청학동(淸鶴洞)은 신선이 사는 곳으로 불리울 만큼 경관(景觀)이 아름다워 한양에서 가장 경치 좋은 삼청동(三淸洞), 인왕동
(仁王洞), 쌍계동(雙溪洞), 백운동(白雲洞)과 더불어 한양 5동(漢陽五洞)으로 손꼽히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남산골 한옥마을은 남산골 제모습찾기의 일환으로 이곳의 옛 정취(情趣)를 되살려 시민들에게 제공하기 위하여 골짜기를 만들고
물을 흐르게 하였으며, 정자(亭子)를 짓고, 나무를 심어 전통정원(傳統庭園)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7,934㎡ 대지 위에 서울의 사대
가로부터 일반평민의 집에 이르기까지 전통한옥(傳統韓屋) 다섯 채, 관훈동 민씨(민영휘)가옥, 옥인동 순정효황후친척인 윤씨(윤
덕영 별장으로 알려짐) 가옥, 제기동 해풍부원군 윤택영 재실, 삼각동 도편수 이승업 가옥, 삼청동 오위장 김춘영 가옥을 옮겨놓
았다고 한다.
관훈동 민씨 가옥
관훈동 민씨 가옥은 이곳으로 옮겨진 가옥중 가장 규모가 큰 가옥으로 처음에는 부마도위 박영호의 가옥으로 알려졌으나 나중에 알려진 것은 명성황후 민비의 먼 친척인 민영휘(1852~1935)의 집으로 밝혀졌다. 옛터는 종로구 관훈동30-1번지에서 여러집채가 있었으나 소유자가 바뀌면서 안채와 여기에 연결된 중문간채만 남기고 모두 헐렸다고 한다. 1998년 이 곳으로 옮겨 질때 철거되었던 건넌방쪽을 되살렸으며 사랑채와 병당채를 새로지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안채, 사랑채, 별채가 있는데 실제로는 더 많은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안채 뒤편에는 별채가 있는데 가운데 대청마루 양쪽에 방이 꾸며진 아담한 건물이다. 사랑채는 안채와 담으로 구분되어 지어졌으며 규모는 작지만 고급스럽게 지어진 구한말의 대표적인 건물로 알려지고 있다. |
서울지방에서는 흔치 않은 안방과 부억의 나란히 배치하여 크고 넓은 목조구조로 6칸에 달하는 부엌 규모는 당시 일반 가옥과
는 다른 최상류의 가옥구조를 보여 주고 있다고 한다.
옥인동 윤씨 가옥
옥인동 윤씨 가옥은 1910년에 지은것으로 알려진 옥인동 47-133번지의 가옥으로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의 황후인 순정효황후의 친가로 알려졌으나 황후의 친척인 큰아버지 윤덕영의 집으로 밝혀졌으며 윤덕영의 첩을 위해 지어진 건축물로 다른 양반가옥과는 달리 폐쇄적이며 밖에서는 화려해 보이지 않지만 안에서 보면 화려하고 궁궐을 본떠서 지은 건축물로 화려한 저택으로 알려지고 있다. 통로인 마루에는 구한말의 특징인 난간을 설치하고 있으며, 일반 한옥과는 달리 문간방이 있어서 할 위치에 큰방이 있어서 사랑채의 역할을 하고 있어서 당시 최상류층의 주택의 면보를 보여주고 있었다. |
제기동 해풍부원군 윤택영 재실
제기동에 있던 순종(1874~1926)의 장인인 해풍부원군 윤택영이 1906년에 그의 딸 순정황후가 창덕궁에 들어갈 때 지어진 건축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재실은 순종이 제사를 지낼 때 불편함을 덜어주기 위해 사용되었던 재실이라고 하는데, 근처에 있는 명성황후의 홍릉으로 행차시에 머무르며 들렸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 재실 원래 동대문구 제기동 224번지에 있던것을 이전 복원한 것이다. 집의 평면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元자 모양인데, 제일 위터에 사당(祠堂)을 두었다. |
안채는 여인들이 주로 머물렀던 공간 이며 ‘ㄷ’ 자형의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건물 뒤편에 사당이 있는데 맞배지붕으로
앞면이 4칸으로 일반 양반 가옥과 다른면이 있었다. 사랑채 또한 ‘ㄷ’형을 하고 있었으며 크고 화려한 누마루를 두고 있었다.
삼각동 도편수 이승업 가옥
이 가옥은 1860년 경복궁 증건공사(1865~1868)할 때 참여했던 당대의 대표적인 최고 목수인 도편수가 지은 건축물로 유명하며 청계천부근의 중구 삼각동 36-2번지에 있었으며, 실제로는 구한말 경주 이씨가 살았던 곳으로 대표적인 양반가옥이라고 한다. 현재는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안채, 사랑채와 중문만이 남아 있지만, 원래 이 집은 문간채,앞뒤 행랑채,사랑채 등 모두 8개의 건물로 이루어진 큰 주택이였었다. |
안채를 중심으로 지어졌으며 방의 개수는 많지 않지만 지붕의 높낮이와 모양을 달리하는 세련된 솜씨로 품격 있게 꾸며져 있었다.
앞면이 3칸으로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으로 방이 있는 사랑채도 단아하게 지어졌다.
삼청동 오위장 김춘영 가옥
이 집은 1890년대에 지은 것으로 조선시대 말 오위장을 지낸 김춘영이 살았던 곳이다. 이집은 원래 종로구 삼청동 125-1번지에
있었으며, 김춘영의 손자인 김홍기에 이르기 까지 사용 되었다.
이곳에서 가장 작은 규모의 한옥으로 사랑채, 안채, 문간채로 이루어져 있으며 안채로들어가는 출입문과 사랑채로 들어가는 출입문이 따로따로 있다. 일반적인 한옥과 달리 도시형 기능에 잘 조화된 건축물로 구한말의 가옥구조를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ㄱ’자형의 구조로 된 안채는 전형적인 양반가옥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문간채와 붙어 있는 사랑채는 안채와의 독립된 공간으로 규모는 크지 않지만 실용적으로 꾸며져 있는 건축물이다. |
이들 한옥들에는 집의 규모와 살았던 사람의 신분에 걸 맞는 가구(家具)들을 예스럽게 배치하여 선조들의 생활모습을 직접보고
체험하며 알 수 있게 하였다. 각각의 집마다 체험프로그램을 열고 있어서 미리 인터넷이나 유선으로 예약을 하고 오면 한국의
옛문화와 풍습 또는 공예품을 직접 만들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통공예관(傳統工藝館)에는 무형문화재
(無形文化財)로 지정된 기능보유자들의 작품과 관광기념상품을 늘 전시하고 있었다.
전통정원의 서쪽에는 남산타워 쪽에서부터 물이 옛스럽게 계곡을 흐르도록 조성하였고, 주변에는 고풍의 정자를 지어 선조들이
유유자적하였던 남산 기슭의 옛 정취를 한껏 느껴 보도록 하였다.
계곡의 물이 내려오는 중간지점에 일석(一石) 이희승(1896~1989) 선생의 학덕추모비(學德追慕碑)가 있었는데, 후학들이 일석(一石)의 학덕(學德)을 추모하며 1994년10월31일에 세웠다. 일석 이희승선생은 배화여전교수,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 대한민국학술원 회장, 동아일보사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제의 탄압에서도 굴하지 않고 우리글을 지켜왔던 절개의 학자이셨다고 추모비는 설명하고 있다. |
서울1000년 타임캡슐
남산골 한옥마을 전통정원 남쪽에는 서울 정도(定都) 600년을 기념하는 타임캡슐을 1994년 11월 29일(최병렬 시장 재임시) 지하
15m 지점에 매설하였으며, 보신각종 모형의 타임캡슐 안에는 서울의 도시모습, 시민생활과 사회문화를 대표하는 각종 문물 600점
을 수장함으로써 현 시대의 사회상이 400년 이후인 2394년 11월 29일에 후손들에게 공개하는 것으로 계획되고 설치 되어 있었다.
설치의 의의 :
서울 정도(定都) 600년을 맞이한 오늘날의 시민생활과 서울의 모습을 대표할 수 있는 문물600점을 캡슐에담아 400년 후인 서울 정도 1000년에 후손에게 문화유산으로 전하고자 함.
매설과 개봉일시 : 매설 일시 : 1994. 11. 29 / 개봉 일시 : 2394. 11. 29
광장조성 : 시민공모 작품 중 최우수작 채택 / 4,960㎡(1,500평)의 광장
운석에 의한 분화구 모양 (시간의 영속성 의미)
- 원형광장 : 외경 42m, 내경 27m, 깊이 5.7m
- 중앙판석 : 지름 7.5m, 두께 0.7m의 화강암
- 12지 조명, 전실 등으로 구성
캡슐 : 보신각종을 본뜬 모양, 직경 1.4m, 높이 2.1m, 무게 2.5톤 FRP외장 스테인리스 특수강(STS 316L) 유리섬유, 실리카겔
등으로 구성된 5중 구조 진공처리(1/1000mm Hg) 및 아르곤가스 주입 보전
수장품 : '94 서울의 인간과 도시를 대표할 수 있는 문물 600점, 실물 축소 모형 마이크로 필름 Video-CD 형태로 수장함.
한옥마을 조성연혁
1989년 09월25일 수도방위사령부로부터 토지 매입
1990년 08월17일 남산 제모습찾기 기본방침 확정
09월18일 남산 제모습찾기 100인 선정위원회 구성
1993년 11월06일 남산골 조성사업 기본계획 및 실시설계 완료
11월16일 남산골 조성사업“남산 제모습찾기”로 명칭 변경
12월28일 지형복원 및 전통정원 조성공사 착공
1994년 01월13일 남산골 제모습찾기 조성사업 지구내 민속자료(한옥)이전 복원방침 결정
12월14일 남산골 한옥촌 조성 설계용역(기간:94.12.14~95.07.10)
1995년 11월28일 남산골 한옥촌 조성 공사(기간:95.11.28~ 98.01.24)
1998년 04월18일 남산골 한옥마을 개관
누와 정(樓와 亭)
천우각 泉雨閣(75.6㎡) ; 조선시대에는 흐르는 계곡과 천우각이 있어서 여름철에 피서를 겸한 놀이터로 이름난 곳이다.
망북루 望北樓(35.19㎡) ; 임금을 그리워하며 북쪽기슭 근정전을 바라보는 8각 누각.
청류정 聽流停(08.41㎡); 흐르는 물소리를 듣는 6각 정자
관어정 觀魚停(11.05㎡); 고기가 유영하는 것을 바라보는 4각 정자
피금정 被襟停(11.05㎡); 더위에 옷고름을 펼쳐 보이는 4각 정자
연못 및 계류
▲ 천우각 泉雨閣(75.6㎡) 위로 남산 타워가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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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북루 望北樓 |
▲ 피금정 被襟停 |
▲ 관어정 觀魚停 |
▲ 청류정 聽流停 |
남별영터(南別營址)와 남소영터(南小營址)
남별영과 남소영은 수도방위의 임무를 띤 조선후기의 군사 주둔지이다. 남별영은 군사영 남소영은 어영청의 분영으로 각각 설치
되었으며, 남별영의 남쪽과 남서영의 북쪽에는 큰 군수창고가 자리 잡고 있었다.
서울남산국악당
서울남산국악당은 청류정 聽流停(08.41㎡) 의 흐르는 물소리를 듣는 6각 정자를 지나면서 오른쪽 남산골 한옥마을 내에 위치하고 있었다. 국악예술의 진흥과 전통문화 체험의 전당으로 국악의 다양한 장르를 바탕으로 요일별 레퍼토리를 구성하여 다양한 공연 및 계절별 전통예술 기반을 활성화하기 위한 다양한 테마로 축제를 운영하고 있었다. 공연장은 지하에 설계되어 있었으며, 공연이 비어있는 낮 시간을 중심으로 강좌와 다양한 계층이 즐길 수 있는 체험프로그램을 개설하여 운영하고 있어 전통 문화 체험과 시민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고 있었다. |
공연장 입구 옆 별관엔 차를 마시며 즐길 수 있는 “Cafe 다반사”라는 간판이 달려있는 공간이 있어서 차를 즐기시는 분들에게
는 시선을 끌 수 있는 곳으로 충분 하였다.
서울남산국악당을 뒤로하고 내려오다 보면 오른쪽으로 천우각(泉雨閣)이 보이는 광장이 눈앞에 들어온다. 한 켠에선 짚으로
공예품을 만드는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분이 열심히 짚공예품을 만들고 있었고, 그 앞엔 작품들이 전시되어 관광객들의 시선을
끌어 모았다.
천우각(泉雨閣) 바로 앞에는 9월 달 한가위 추석맞이 행사가 치러질 무대장치를 하는 분들의 손길이 분주하게 움직였고 천우각
안에는 외국관광객들이 쉬면서 연못을 구경하고 한편으론 남산타워를 바라보며 남산골의 정취를 흠뻑 취해보고 있었다.
뜨겁게 작열하는 8월의 마지막 태양이 남산골 한옥마을을 달구었으며, 어느 예비 신혼부부의 결혼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이
정겹고 행복해 보였다.
▲ 짚신공예 무형문화재 분에게 양해를 구하고 촬영했으니 안심하세요....ㅋㅋㅋ.. 건강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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