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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6/21 하 지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1 - 반기문 UN 사무총장 '만장일치' 연임 확정
국제사회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연임이 확정됐습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현지시간으로 21일 오후 3시 미국에서 열린 유엔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연임이 확정됐습니다.
반 총장은 "사무총장으로서 유엔 체제 안에서 회원국들간의 갈등조정자의 역할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총회에서 넬슨 메소네 안보리 의장은 반 총장의 연임 추천 결의안을 제안했으며, 조지프 데이스 유엔총회 의장이 안건을 공식 상정하자 192개 전 회원국 대표들은 기립 박수로 결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YTN 2011-06-22 08:45
http://www.ytn.co.kr/_ln/0109_201106220845035425?ems=13329
1998 - 시인 윤동주, 육필원고 150점 공개
윤동주-정병욱교수 두 집안 운명적 인연 육필원고 보존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와했다.…"
일제말의 캄캄한 어둠 속에 이렇게 노래했던 시인은 조국의 광복을 몇달 안 남겨놓고 고문과 생체실험의 의혹 속에 이국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비명에 갔다. 그러나 그가 남겨놓은 1백50점의 육필 원고와 애장서 40권, 신문스크랩 등은 후손들에 의해 곱게 간직됐다가 광복 50주년이 되는 오는 8월15일 한권의 책이 돼 세상에 모두 공개된다.
21일 공개된 미발표시 8점을 포함, 윤동주의 모든 체취를 담아 민음사에서 발간되는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 전집'은 한국출판사상 처음 시도되는 종류의 시인 전집. 한 시인의 모든 원고들을 사진판으로 육필 그대로 공개한다는 발상은 지금까지의 한국 출판사에는 없었다. 윤동주의 조카 윤인석(성균관대 교수)씨는 "50년 넘게 집안에서 보관해 왔으나 분실 훼손의 염려가 항상 있어 더 늦기 전에 모든 자료를 컬러 사진 판으로 세상에 공개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번 전집 출판의 더욱 중요한 학술적 의미는 1차 자료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우리 학계 풍토에 대한 경종이라고 편집에 관계했던 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광복 후 윤동주에 대해 발표된 연구 논문과 저서는 2백49종.
그러나 지금까지 후손을 찾아가 그가 남긴 자료나 육필원고를 보자고 요청한 한국인 국문학자는 한 사람도 없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96년 한국인 학자론 최초로 이들 원고를 검토한 단국대 왕신영 교수는 "사진판을 통해 윤동주의 모든 육필원고들을 검토하면 그의
고심에 찬 퇴고 과정, 생각의 단초를 보여주는 메모 등을 볼 수 있어 시인이 어떤 과정을 거쳐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가를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윤동주의 육필원고가 이렇듯 온전하게 남아있는 데는 윤동주 집안과 고 정병욱 서울대 국문과 교수 집안간의 운명적 인연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떠나며 자필 시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등의 육필 원고를 연희전문 1년 후배이자 룸메이트였던 정병욱에게 맡겼고, 정병욱은 일제말 징병돼 떠나면서 "일제에 발각되지 않도록 마루 밑에 잘 보관하고 혹시 내가 전장에서 죽더라도 해방되거든 발간하도록 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이 윤동주의 남동생(일주)과 정병욱의 막내 여동생(덕희)이 후에 결혼, 50년 동안 자료들을 목숨처럼 지키고 관리해온 것이다. 윤동주의 제수이며 윤인석 교수의 어머니인 정덕희씨(68)는 "15세 때부터 간직해온 것을 세상에 내보내려니 감회가 새롭다"고 말했다. 정씨와 윤 교수는 "윤 시인의 시가 중요한 것이지 우리가 왜 나서겠느냐"며 한사코 사진 촬영을 사양했다. 이들은 "언젠가는 모든 자료를 신뢰할 만한 곳에 기증할 것"이라고 말했다.
< 김태익기자·tikim@chosun com> /조선닷컴 1998.06.22 22:18
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8062270456
1998 - 한국의 산업디자이너 김교만(金敎滿) 사망
김교만 [金敎滿, 1928.9.7~1998.6.21]
1928년 충청남도 공주에서 태어났다. 1956년 서울대학교 응용미술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세인트마틴스 미술대학에서 그래픽디자인을 공부하였다. 한국 산업디자인전 초대작가, 국전 초대작가, 서울올림픽환경디자인 심사위원, 서울 일러스트레이터협의회장 등을 역임하고, 1965∼1994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산업미술과 교수를 지냈다. 1996년 '한국을 대표하는 산업디자이너 1백인' 중 1위로 선정되었다.
시각디자인 중에서도 일러스트레이션에 관심을 가져 일러스트레이션을 현대의 산업회화라고 설명하였고, 포스터·우표·엽서·공예품 등 다방면에 일러스트레이션을 활용하였다. 1976년 첫번째 개인전을 열었고 풍물과 탈춤, 장승, 선녀 등 한국 고유의 소재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표현하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서울시문화상, 한국 산업디자인전 대회장상, 동탑산업훈장 등을 수상하였다.
〈86 아시안게임 문화포스터〉, 〈88 서울올림픽 문화포스터〉, 〈94 한국방문의 해 공식휘장〉 등과 김포국제공항 사인보드, 한일은행·주택은행·중소기업은행·한국과학기술원 로고 등의 작품이 있다. 1998년 7월 미국 뉴욕의 갤러리아트 54에서 〈김교만 유작전〉이 열렸다. /naver
1992 - 중국의 정치가, 주석 리셴녠(李先念) 사망
리셴녠 [李先念(이선념), 1909.6.23~1992.6.21]
중국 원로 이선념 사망
중국 전국 인민정치 협상회의 주석 이선념(83)이 1992년 6월 21일 북경에서 사망했다. 이선념은 중국의 정치를 배후에서 움직이는 이른바 8원로 가운데 한 명으로 중국지도부의 인사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보수파 본류`이다. 그는 지난 1983년 제6기 전인대에서 문화혁명 후 부활된 첫 국가주석으로 선출돼 5년 간 재임했으며 1988년 국가주석을 물러난 뒤엔 정협 주석직을 맡아왔다.
공식전기에 따르면 1909년 중국중부의 호북성에서 출생한 이선념은 27년 공산당에 입당, 1930년대엔 인민해방군 연대장으로 항일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모택동과 함께 대장정에 참여했고 그때 입은 총상으로 평생 다리 속에 총알이 박힌 채 지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에는 호북성 전후복구사업을 맡았고 1954년엔 부총리 겸 재정부장으로 발탁돼 모의 대약진운동을 도왔다. /조선
- Aid to Earthquake Victims, 1990
1990 - 이란 라쉬트 대지진 발생 - 5만여명 사망, 20여만명 부상
1990년 6월 21일 자정, 이란 북서부 카스피해 인접지역을 강타한 대지진으로 5만여명의 사망자와 20여만명의 부상자, 50여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하는 참극이 빚어졌다. 리히터 지진계로 7.3을 기록한 이 대지진은 1백30여개 도시와 마을을 완전히 폐허화시켰으며 수일 동안 3백60여 차례의 여진이 계속돼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1979년 회교혁명 이후 폐쇄적인 자세를 보였던 이란 정부도 어쩔수 없이 서방측에 긴급원조를 요청했으며 세계각국은 신속하게 구호의 온정을 전달했다. 이라크와의 8년전쟁에 이은 이 지진참사는 이란을 덮친 또하나의 비극으로 기록됐다. /조선
1989 - 유네스코 ‘세종대왕상’ 제정
[어제의 오늘]1989년 유네스코 ‘세종대왕상’ 제정
ㆍ영어 사대주의가 부끄러운 날
한글은 정말 위대한 문자입니다. 창제자의 백성 사랑이나 문화적 자주사상은 둘째 치고, 문자에 담긴 과학적 원리에 세계의 언어석학들이 상찬의 말을 쏟아냅니다.
미국 메릴랜드대 언어학 교수인 로버트 램지 박사는 지지난해 워싱턴에서 열린 한글날 기념 강연에서 한글을 ‘세계의 알파벳’이라고 극찬했습니다. 미국 시카고대의 저명한 언어학자 제임스 매콜리 교수가 생전에 보여준 ‘한글 사랑’은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1999년 작고한 그분은 생전에 매년 10월9일이면 자신의 강의를 휴강하고,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해 잔치를 벌였는데요. 사람들에게 “세계의 위대한 유산이 탄생한 날을 찬양하고 휴일로 기념하는 것은 언어학자로서 당연한 일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한글의 위대함은 유네스코(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가 문맹 퇴치에 뛰어난 공적을 쌓은 사람이나 단체에 ‘세종대왕상’을 수여한다는 사실에서도 입증됩니다. 정확한 명칭이 ‘세종대왕 문해상(King Sejong Literacy Prize)’인 이 상은 1989년 6월21일 제정된 후 이듬해부터 매년 9월8일(문맹 퇴치의 날) 시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이렇게 위대한 문자를 가진 나라의 공직자들이 그 문자를 가지고 하는 일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고요?
궁금하면 지금 당장 교육과학기술부 누리집(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십시오. 그곳에는 지난 17일 띄워 놓은 공고가 하나 있는데, 그 제목이 ‘2011년도『글로벌 프론티어 사업』공고’입니다.
곱디고운 우리말을 제쳐두고 영어 사대주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공직자들의 모습이 눈에 가시처럼 박힙니다. 더욱이 국어사전에도 올라 있는 외래어 ‘프런티어’를 ‘프론티어’로 써 놓은 무식함은 무엇으로 변명해야 할까요. 세로체에 쓰는 문장부호인 겹낫표(『 』)를 가로체 문장에 버젓이 써놓은 것은 또 뭐고요.
그뿐 아닙니다. 지난 7일자 공고에는 ‘호찌민’을 ‘호치민’으로 잘못 써 놓았고, 5월26일자 공고에서도 ‘타이베이’를 ‘타이뻬이’로 잘못 적어놓았답니다. 제 나라의 말을 제쳐두고 남의 나라 말을 빌려다 쓰기 좋아하고, 교과서에 올라 있는 외래어 표기 하나 제대로 적지 못하는 사람들이 세운 교육 방침을 우리가 따라야 하는 건가요. 절로 한숨이 나옵니다. 만약 세종임금이 교육부 누리집을 봤다면 “예끼, 이놈들” 하고 호통을 치셨을 듯합니다.
엄민용 기자 /경향신문 2011-06-20 21:28:24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106202128245&code=100100&s_code=ap005
1982 - 영국의 왕자 윌리엄(Prince William of Wales) 출생
윌리엄 왕자 [Prince William of Wales, 1982.6.21~ ]
웨일스의 왕자 윌리엄(Prince William of Wales, 본명: William Arthur Philip Louis, 1982년 6월 21일 ~ )은 영국의 웨일스 공 찰스와 웨일스 공작 부인 다이애나 사이에 태어난 맏아들이자 엘리자베스 2세의 손자이다. 아버지 찰스에 이어 영국 왕위 계승 순위 두 번째에 있다. 형제로는 2세 연하인 남동생 헨리가 있다. 공식 칭호는 ‘His Royal Highness Prince William of Wales'로 '웨일스의 윌리엄 왕자 전하'이다. /위키백과
- Menachem Begin
1977 - 이스라엘 새 내각 출범
1977년 오늘!
이스라엘의 새 내각이 출범한다.
이스라엘의 제6대 신임 총리는 보수우익 정당인 리쿠드당의 당수 메나헴 베긴(Menachem Begin)!
베긴이 이끈 리쿠그당은 한 달 전 총선에서 시몬 페레스의 노동당연합에게 승리했다.
1949년 1차 총선 이래 28년 만의 정권 교체다.
베긴 총리는 중동 지역에서 더 이상의 전쟁은 없어야 한다며 온건파 인물인 모세 다이안을 외무장관으로 임명했다.
베긴 총리는 이집트와 평화 교섭에 힘쓴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받는다. /YTN
1970 - 브라질, 제9회 월드컵 결승전에서 이탈리아를 꺾고 통산 3회 우승 달성
브라질이 1970년 6월 21일 열린 제9회 월드컵 경기 결승전에서 이탈리아를 4:1로 꺾고 우승해 통산 3번째 우승을 달성했다. 3번째 우승으로 브라질은 줄리메컵을 영구 보관하게 됐다.
결승전은 11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12시부터 멕시코시티 아즈테카경기장에서 열렸다. 시합전에 내린 비로 운동장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양 팀은 전력투구, 멋진 묘기를 관중들에게 보여주었다.
전반전은 1:1이었지만 후반들어 대공세를 펼친 브라질이 연거푸 3골을 넣어 이탈리아를 압도했다. 이로써 월드컵 우승 회수는 브라질이 3번, 이탈리아와 우루과이가 2번, 독일과 영국이 각각 1번을 기록하게 됐다. /조선
1970 - 인도네시아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Sukarno) 사망
수카르노 [Sukarno, 1901.6.6~1970.6.21]
동부 자바에서 출생했다. 고교시절부터 민족운동에 눈 떠, 1920년 반둥공과대학 입학 때는 ‘형제수카르노’로 유명하였다. 1928년 국민당을 결성하여 민중주의(民衆主義)를 주창하다가, 1929~1933년 투옥 후에 플로레스섬의 엔데, 수마트라섬의 펜쿠렌에서 유배생활을 보냈다. 1942년 일본군에 의하여 석방되어 일본군에 협력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네덜란드로부터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선언, 1950년 인도네시아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55년 제1회 아시아아프리카회의(반둥회의)를 주최, 비동맹중립외교의 주역으로 각광을 받았는데, 내정면에서는 다당난립 때문에 단명내각의 연속이었다. 1957년 그는 내부혼란의 원인이 서구형 의회정치에 있다고 하여 대통령중심제를 채택, 촌락민주주의의 전통에 입각한 이른바 교도(敎導)민주주의를 제창하였다. 그 후 국내에서 절대권력을 장악하고, 네덜란드에 대항해서 서(西)이리안해방투쟁을 전개, 1963년 목적을 달성하고 종신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1965년 9월 30일에 발생한 쿠데타에서 공산당을 감쌌다고 하여, 1966년 3월 장군 수하르토가 지휘하는 반공 육군에 실권을 넘겨주고, 이듬해 종신 대통령의 지위를 박탈당했으며, 정치활동이 금지된 가운데 보고르 교외의 바트트리스의 자택에 살다가 정계복귀도 못한 채 죽었다. /naver
1965 - 영국 의회 7백주년 기념식
1965년 오늘, 영국 웨스트민스터 의사당!
영국 의회 개원 7백주년 기념식이 성대하게 거행된다.
세계 21개 나라의 대표들이 축하객으로 참석했다.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7백년 전 처음으로 영국 의회를 소집한 시몽 드 몽포르(Simon de Montfort)백작의 공을 찬양한다.
몽포르 백작은 당초 헨리 3세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왕의 실정(失政)에 대한 귀족들의 불만이 커지자 그 지도자가 돼 1258년 헨리 3세에게 국정개혁안인 '옥스퍼드 조례(條例)'를 시행하도록 했다.
그러나 왕이 이를 무시하자 1262년 궐기를 주도하고 1264년 루이스전투에서 왕을 포로로 잡았다.
몽포르 백작은 이듬해인 1265년 1월 귀족·성직자 외에 기사·시민도 참가한 의회를 소집했는데 이것이 영국 의회의 시초로 기록됐다. /YTN
Important Dates- Simon de Montfort
Captured King at Battle of Lewes: May 14, 1264
Calls first English Parliament: Jan. 20, 1265
Killed: August 4, 1265
/http://historymedren.about.com
1962 - 러시아의 전설적인 락 가수 빅토르 최(Tchoi, Viktor) 출생
빅토르 최 [Tchoi, Viktor (Robertovich), 1962.6.21~1990.8.15]
한국계 러시아의 록가수, 영화배우.
카자흐스탄공화국 크질오르다 출생. 한국인 2세와 우크라이나 태생의 러시아인 사이에 출생하여 5살 때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림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져 세로브 미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교내에서 ‘팔라타 세스토이(제6병동)’라는 그룹을 결성하여 반국가적인 노래를 연주한다는 이유로 퇴교당하였다.
그 뒤 시립 제61기술전문학교에서 목각을 전공하였다. 1982년 키노(KINO)라는 록그룹을 결성, 《혈액형》이라는 노래를 발표하여 밀리언셀러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글라》라는 영화에도 출연하여 1989년 1500만 명의 관중을 동원, 그 해 오데샤에서 열린 황금의 쥬크영화제에서 최우수 배우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그의 음악성향은 펑크록 스타일에 러시아 특유의 우울하면서도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저항적이며 자유지향적인 노래로 소비에트 전역의 젊은이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다. 라트비아공화국 리가에서 자동차 사고로 요절하자 소비에트 전역에서 5명의 여자가 자살하였으며,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카잔 ·키예프 ·알마아타 ·타슈겐트 등지에 생겨났다.
또한 모스크바 예술의 거리인 아르바트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모의 벽이 생기기도 하였다. 1993년 모스크바 콘체르트 자르 앞 스타광장의 명예가수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네이버
1957 - 독일의 실험물리학자 슈타르크(Stark, Johannes) 사망
슈타르크 [Stark, Johannes, 1874.4.15~1957.6.21]
독일의 실험물리학자.
바이에른의 시켄호프 출생. 베이루트·레겐스부르크 등에서 교육을 받고, 1894∼1898년 뮌헨대학교에서 물리학·화학·수학·결정학(結晶學)을 배웠다. 그 후 괴팅겐대학교 강사(1900), 하노버공과대학교 조교수(1906), 아헨공과대학 교수(1909), 그라이프스발트대학교 교수(1917), 뷔르츠부르크대학교 교수(1920), 샬로텐부르크의 국립물리공학연구소장(1933∼1939) 등을 역임했다.
기체 중의 전류, 분광(分光) 분석, 원자가 등 여러 분야를 연구, 특히 분광학 분야에 크게 공헌했다. 즉, 커낼선(線)의 도플러효과를 예상, 1905년 수소원자 스펙트럼의 도플러효과에 의한 변위(變位)를 관측했다.
이때까지 지상의 광원에 대해서는 도플러효과가 관측되지 않았다. 또한 광원이 전기장에 놓여졌을 때 스펙트럼선이 분기하는 현상(슈타르크효과)을 발견, 이러한 공로로 1919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1933∼1939년 독일 국립이공학연구소장이 되어 실업계와도 접촉하였다. /네이버
1953 - 파키스탄의 정치가, 총리 베나지르 부토(Bhutto, Benazir) 출생
부토 [Bhutto, Benazir, 1953.6.21~2007.12.27]
베나지르 부토(Benazir Bhutto, 1953년6월 21일 ~ 2007년12월 27일)는 파키스탄의 정치가이다. 고 줄피카르 알리 부토 전 총리의 딸로,1988년 선거의 승리로 이슬람 국가에서는 사상 최초로 여성 수상이 되었지만 20개월 후 쿠데타로 군부의 지지를 받은 그람 이스하 크한 대통령에 의해 수상직에서 물러났다. 1993년 재선되었으나, 3년후에 여러 비리와 부패혐의로 인해 파르크 레가리 대통령에 의해 또 한번 해임되었다. 이 스캔들중에 몇가지는 그녀의 수상재임중에 스위스 기업에게 의도적인 편의를 제공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이것은 미해결된채로 남아있다. 그녀의 남편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는 스캔들에 관여한것으로 인해 체포되어 2004년 11월까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2006년 국제 형사 경찰 기구는 파키스탄 정부의 요청에 응하여 부토와 남편 두사람의 체포를 요구하는 국제수배서를 발행했다.
1984년 영국으로 망명하는 것이 허락되어 그녀는 망명상태에서 부친의 정당인 파키스탄 인민당(PPP)의 당수로 취임하였다.
2007년 12월 27일, 2주 후의 총선을 앞둔 채 암살되었다.
1988년 11월 16일 같은해 부토는 피플지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5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위키백과
1949 - 농지개혁법 공포
1949년 6월 21일 남한에서 농지개혁법이 공포됐다. 이로써 전체 농지의 92%가 자작농에게 돌아갔고, 수천년간 이어온 지주계급을 몰락했다. 북한이 1946년 토지개혁을 실시했지만 남한에서는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과 함께 토지개혁 논의가 본격화됐다. 농민운동의 고양, 북한의 토지개혁에 자극받은 바가 컸다.
당초부터 ‘무상몰수 무상분배’안, ‘유상매수 무상분배’안, ‘유상매수 유상분배’안이 집중 논의됐으나 좌익세력의 약화와 농민운동의 분열-쇠퇴에 따라 ‘유상분배’ 토지개혁안이 거의 확정됐다.
국회는 농림부가 작성해 국회에 제출한 농지개혁법안과 국회가 독자적으로 작성한 농지개혁법안을 비교 검토한 끝에 보상과 상환액은 각각 평년작의 15할 및 12할 5푼, 보상과 상환은 5년으로 하는 ‘농지개혁법’을 1949년 4월 28일 통과시켰다. 재정상의 이유로 정부가 보상액을 일치시켜줄 것을 국회에 요구했으나 국회는 이를 거부하고 이날 공포했다.
그러나 지주층의 광범위한 소작지 방매행위로 불완전한 농지개혁이 돼버렸다. 그러나 이 농지개혁도 시행에 들어갈 즈음 발발한 6·25전쟁으로 일시 중단되었고 더구나 관계서류가 없어진 탓에 대상농지가 축소됐다. 한편, 전체 농지의 92%가 자작농에게 돌아가게 한 농지개혁법은 남한에서 6.25때 농민들의 적화를 막는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조선
1948 - 미국 콜롬비아사 LP레코드 첫 공개
미국 콜롬비아사가 개발한 지름 30cm LP 레코드가 1948년 6월 21일 처음으로 공개됐다. 종래 1분에 78회씩 회전되는 SP를 대신해 1분에 33과 1/3을 회전하는 이 LP 개발로 연주시간이 최대 25분으로 늘어났다. 더구나 원음에 가까운 사운드를 재생할 수 있어 SP에 비해 음질이 뛰어났다.
LP개발은 음악감상자나 연주자, 가수에게도 혁명적인 변화를 초래했다. 1949년 콜롬비아사의 라이벌인 RCA빅터사가 지름 17cm의 45회전 레코드 EP를 발표했다. LP와 EP의 대결은 수년동안 계속됐으나 결국 EP는 SP와 마찬가지로 싱글곡을 수록하는 미디어가 되었다. 이로써 LP의 독주시대는 30여년 이상 계속되다 1980년대 들어 CD에 그 자리를 내주었다. /조선
- Austria, 1000 Schilling (Banknote)
1914 - 오스트리아 소설가, 평화주의자 주트너(Suttner, Bertha von) 사망
주트너 [Suttner, Bertha von, 1843.6.9~1914.6.21]
오스트리아의 소설가.
최초의 여성 평화주의자의 한 사람으로, 알프레드 노벨이 노벨 평화상을 제정하는 데 영향을 준 인물로 간주되며, 그녀 자신이 1905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였다. 주요소설 〈무기를 내려놓으시오! Die Waffen nieder!〉(1889)는 인기와 영향력에서 해리엇 비처 스토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 Uncle Tom's Cabin〉과 비교되어왔다. 영락한 오스트리아 원수의 딸로 1873년부터 부유한 주트너 가(家)의 가정교사로 있었고, 엔지니어이며 소설가인 7년 연하의 아르투르 군다카르 폰 주트너 남작(1850~1902)과 약혼했다. 남작의 가족이 그들의 결합을 반대하여1876년 그녀는 파리에 있는 노벨의 저택에서 비서 겸 집사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파리로 갔으나, 1주일 만에 빈으로 돌아와 비밀리에 주트너와 결혼했다. 1876년 이후 노벨을 만난 것은 2번뿐이었으나 1896년 죽을 때까지 계속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녀는 베른 평화회의에 참석했는데, 회의가 끝난 후 1892년 8월 취리히에서 마지막으로 노벨을 만났다. 1891년 오스트리아 평화주의협회를 창설하는 등 평화운동에 더욱 동참하게 되었고, 또 이 문제에 대해 노벨에게 편지를 써보냈기 때문에 노벨이 유언장에다 평화상 부문을 포함시킨 것으로 여겨진다. 1892~99년 자신의 가장 유명한 소설 제목과 같은 〈무기를 내려놓으시오!〉라는 국제평화주의 잡지를 편집했다. 그녀의 평화주의는 과학적·자유주의적 바탕 위에 H. T. 버클, 허버트 스펜서, 찰스 다윈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그녀에 관한 책 가운데 〈플로렌스 나이팅게일과 주트너 남작부인 Florence Nightingale und Baroness von Suttner〉(1919)은 스웨덴의 유명한 급진주의자 엘렌 K. S. 케이가 쓴 것이다. /브리태니커
- 윤봉길의사 의거 70주년 기념 (2002.4.29. 발행)
1908 - 독립운동가 윤봉길(尹奉吉) 출생
윤봉길 [尹奉吉, 1908.6.21~1932.12.19]
매헌 윤봉길의사는 1908년 6월 21일(음력 5월 23일, 오후 8시 경)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태어났다. 덕산보통학교와 오치서숙에서 수학하고, 19세 때인 1926년부터 고향에 야학을 세워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했으며, 20세때에는 각곡독서회를 조직하고 농민독본을 편찬했다. 22세 때에는 월진회(月進會)와 수암체육회를 조직하여 농촌운동과 민족운동을 더욱 열성적으로 전개하였다.
고향에서 농촌계몽운동으로 민족자주독립의 기반을 다지던 윤봉길 의사는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23세 때인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 生不還)" 이라는 글을 써놓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청도를 거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있는 상해에 도착하였다. 일본군이 1932년 1월 28일 상해를 침공하여 점령한 후, 4월 29일 천장절 겸 전승경축 기념식을 옹구공원에서 거행하게 되어 상해점령 일본군 수뇌부와 정관계 인사들이 여기에 참석하게 되자, 윤의사는 백범 김구선생이 지휘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특공작전을 감행할 것을 자원하였다.
윤봉길 의사는 단신으로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상해점령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가와 등 군부와 정관계 수뇌들에게 폭탄을 투척하여 섬멸하는데 성공하였다. 윤의사는 현장에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5월 25일 현지의 군법재판 단심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11월에 일본으로 이송되어 그해 12월 19일 25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대한민국 문화지도 소구리 Soguri
http://www.soguri.com/seoul-teukbyeolsi/seocho-gu/yangjae2-dong/2004-02/1122067_000_006.html
1908 - 러시아의 작곡가 림스키 코르사코프(Rimskii-Korsakov, Nikolai) 사망
림스키 코르사코프 [Rimskii-Korsakov, Nikolai Andreyevich, 1844.3.18~1908.6.21]
러시아의 작곡가이자 사회운동가이다.
1844년 3월 18일 노브고로트 근처 티흐빈에서 출생하였다. 유년시절부터 음악적 재질을 보였으나, 정식 음악교육은 받지 않고 1856년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졸업 후 해군사관이 되었다. 이 무렵 발라키레프와 사귐으로써 ‘5인조(발라키레프, 큐이, 무소르크스키, 보로딘, 림스키코르사코프)’의 한 멤버가 되었으며, 그때부터 작곡지도도 받았다. 1871년 페테르부르크음악원 교수로 초빙되고 또 해군군악대의 지휘자로서 내외의 명곡을 편곡하는 한편 궁정성가대지휘자도 지냈다.
1881년 무소르크스키가 사망하여 ‘5인조’가 해산되자, 악보 출판업자인 벨라예프의 도움으로 ‘벨라예프그룹’을 결성, 후진인 글라즈노프, 랴도프 등을 지도하였다.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이 계기가 된 혁명소동 때는, 스트라이크를 일으킨 학생측에 서서 학원에의 권력개입을 거절한 탓으로 페테르부르크의 교수직에서 쫓겨났으며, 그의 작품은 연주 금지처분을 당했다. 그후 복직이 되었으나 퇴직하고, 심장병으로 급서할 때까지 자택에서 작곡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그의 작풍은 대체로 색채적이고 묘사적이며 명쾌하고 이해하기 쉬운 화성적인 표현에 차 있다. 관현악의 묘사성 등은 러시아의 오페라, 표제교향시, 가곡 분야에 큰 영향을 끼치고 라벨, 레스피기 등 근대 작곡가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주요 작품에는 《스페인기상곡》(1887) 《세헤라자데》(1888)와 같은 표제음악과, 《사드코》(1898) 《설희(雪姬)》(1882) 《금계(金鷄)》(1909) 등의 오페라가 많으며, 이들의 소재로는 러시아의 민요와 권력에 대한 저항, 그리고 이교적인 세계를 다룬 것이 대부분이다. 이 밖에 합창곡 ·가곡 ·피아노곡 ·관현악곡 등도 많다. 저서에는 《러시아민요 100곡》(1877) 《화성학 실습》(1884), 《관현악법 원리》(1913) 자서전인 《나의 음악 연지(年誌)》(1909) 등이 있다. /naver
1905 - 프랑스의 사상가, 소설가, 극작가 사르트르(Sartre, Jean-Paul) 출생
사르트르 [Sartre, Jean-Paul, 1905.6.21~1980.4.15]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프랑스 철학자이자 작가이다. 그는 후설의 현상학, 헤겔 및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이론 등을 실존주의라는 측면에서 종합함으로써, 철학적 이론을 삶과 문학, 정치적 행동 등과 결합시키려 했다. 소설 <구토 La Nausée>(1938)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는데, 이 작품이 보여주는 인간과 세계의 관계, 인간의 실존적 의식 등은 초기 철학 저작인 <존재와 무 L'Etre et le néant>(1943)에서 철학적으로 심화되었다. 그는 인간이란 주어진 규범들에 항거해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며 자신이 선택한 행동에 책임을 지는 존재라고 규정함으로써 개인의 자유와 인간의 존엄을 옹호했다. 나아가 사회적 책임에 눈을 돌려 참여문학을 주창했고, 행동하는 지식인의 본보기가 되어 정치적 참여에 앞장섰다. <변증법적 이성 비판 Critique de la raison dialectique>(1960)은 사르트르 특유의 사회주의 이상을 피력한 저서이다. 자서전 <말 Les Mots>(1963)로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되었으나 수상을 거부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브리태니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갓 태어난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며 평생 동안 그는 자신의 과거 행동들의 총화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의지 이외의 어떤 것을 믿는 것도 맞지 않다.
실존주의적 절망과 고뇌는 인간이 자유로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의 인식에서 비롯된다.
신이 없으므로, 인간은 자신의 불완전한 의지와 도덕적 통찰력에 의지해야 한다.
그는 선택을 피할 수 없다."
- 장 폴 사르트르
1900 - 중국 '의화단 사건' 발발
제국주의 열강들이 앞다퉈 중국을 향해 탐욕의 발톱을 곧추 세우던 시기, 중국에서도 의화단이라는 비밀결사 농민집단이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부패한 청조, 열강의 침략, 청일전쟁 배상금 등이 불러온 민중의 고통은 의화단의 세력확대를 도와준 자양분이었고, “권법과 봉술을 익혀 주문만 외우면 총탄도 피할 수 있다”는 믿음과 소문은 이들을 지탱해 준 힘이 됐다.
산둥성에서 처음 일어날 때만 해도 미미했던 세력이 1900년 5월에 부청멸양(청을 돕고 서양을 멸한다)을 기치로 베이징에 입성할 때는 어느덧 20만의 세력으로 커져 있었다. 외국공관이 포위되고 서양 선교사가 피살되는 등 베이징 거리는 폭동과 테러가 난무하는 아수라장이었고, 철도·전선 등 서양과 관계있는 시설이라면 닥치는 대로 파괴됐다. 영국·프랑스·미국·러시아·이탈리아·일본·독일·오스트리아 등 8개국이 500명의 군대를 파견했으나 이미 톈진이 점령되고 베이징·톈진 간 통신선마저 파괴돼 오히려 고립되는 결과만 낳았다.
처음에는 의화단을 탄압했던 청조도 이들의 힘을 빌려 6월 21일, 열강들에 선전포고를 했지만 결과적으로 군사개입만 자초했다. 2만명의 연합군이 톈진을 공략한 데 이어 8월 14일에는 베이징까지 점령함으로써 이미 실권자 서 태후가 빠져나가 주인없는 도시가 된 베이징은 연합군의 약탈장으로 변했다. 민족의 각성을 촉구하며 일어난 반제운동이었지만 그 실패는 그나마 명맥을 유지해 오던 청조의 숨통을 빨리 끊어 버렸다. /조선
- Leland Stanford and Thomas C Dunant
1893 - 미국 대륙 횡단철도 건설자, 상원의원 스탠퍼드(Stanford, Leland) 사망
스탠퍼드 [Stanford, (Amasa) Leland, 1824.3.9~1893.6.21]
미국 캘리포니아 주 출신의 상원의원, 미국 최초의 대륙횡단철도 건설자.
1848~52년 위스콘신 주 포트워싱턴에서 변호사로 일하다가, 캘리포니아 주 새크라멘토로 이사하여 광산 보급품과 잡화를 파는 소매상을 차렸다. 장사에서 성공한 그는 지방 정계에서도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공화당원으로서 1861~63년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일했다.
스탠퍼드는 대륙횡단철도를 건설하는 계획에 많은 돈을 투자했고, 1861년에 센트럴퍼시픽철도회사가 설립되자 이 회사의 사장직을 맡았다(1861~93). 센트럴퍼시픽철도는 캘리포니아에서 동쪽으로 뻗어나가 1869년에 유타 주 프로먼토리포인트에서 유니언 퍼시픽 철도와 만났는데, 그는 이 철도의 건설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는 또한 캘리포니아 전역과 미국 남서부로 철도망을 확장시켰다. 1885~93년에 미국 상원의원으로 일했으며 아내 제인과 함께 1885년에 스탠퍼드대학교를 세웠다. /브리태니커
- 'Railroad Station, Rome' - 'Exhibition Hall', Turin
1891 - 이탈리아의 공학자, 건축가 네르비(Nervi, Pier Luigi) 출생
네르비 [Nervi, Pier Luigi, 1891.6.21~1979.1.9]
이탈리아의 건축구조가.
롬바르디아의 손드리오에서 태어났다. 1913년 볼로냐공과대학을 졸업하고 1946년 로마대학 건축학부 교수, 1957년에는 미국 미술 ·문학아카데미의 명예회원으로 추대되었다. 근대건축에서 철근 ·철골 ·콘크리트의 구조체가 지니고 있는 공학적 합리성과 미학적 가치를 강하게 표현하였다.
그의 명성이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된 최초의 작품은 1932년에 완성한 피렌체의 벨타경기장이다. 여기서는 노출된 구조물 몸체의 역학적 표현력의 추구라는 방향이 설정되었다. 그로부터 공장 ·창고 ·역청사 ·격납고 ·전시장 등 거대한 공간을 덮는 구조체를 필요로 하는 건축물에 기술의 독창적 해석과 시각적으로 박력이 넘치는 디자인을 채용하였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파리의 국립 공업센터(1955), 로마의 올림픽 경기장(1957), 토리노의 근로자회관(1961) 등이 있고, 또 다른 건축가와 구조면에서 협력한 것으로는 M.브로이어 및 B.제르퓌스와의 공동작품인 파리의 유네스코본부(1957), G.폰티와 협력한 밀라노의 피렐리빌딩(1958) 등을 들 수 있다. /네이버
- '수확(收穫)'
1856 - 일본의 서양화가 아사이 주[淺井 忠] 출생
아사이 주[淺井 忠, 1856.6.21~1907.12.16]
일본 메이지 시대[明治時代]의 서양화가.
호는 모쿠고[默語]·모쿠교[木魚]. 어려서 구로누마 가이잔[黑沼槐山]에게 일본화를 배운 후, 서양화가를 지망해 1876년 3월부터 도쿄[東京]에서 구니사와 신쿠로[國澤新九浪]에게 서양화의 기초를 배웠다. 1877년 11월 창립된 고부 미술학교[工部美術學校]에 입학, 이탈리아에서 초빙된 풍경화가 안토니오 폰타네시의 지도를 받고 그의 화풍과 정신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뒤 후임 교수에 대해 불만을 품고 오야마 쇼타로[小山正太郞] 등과 함께 자퇴한 후 주이치지카이[十一字會]를 결성해 연구에 정진했다.
1889년 동료들과 함께 일본 최초의 서양화 단체인 메이지 미술회[明治美術會]를 결성하여 서양화의 발전과 보급에 힘썼다. 〈봄이랑 春畝〉·〈수확 收穫〉은 이 시기에 발표한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1894년 청일전쟁에 종군했으며, 귀국 후 〈뤼순전 후의 수색 旅順戰後の搜索〉을 발표해 제4회 내국권업박람회(內國勸業博覽會)에서 묘기 2등상을 받았다. 1898년 도쿄 미술학교 교수로 임명된 후 문부성의 명령을 받고 서양화 연구를 위해 1900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파리와 근교 그레에 머무르면서 많은 작품을 완성하고 1902년 이탈리아·독일·영국을 거쳐 귀국했다. 같은 해 교토 고등공예학교 교수로 자리를 옮기고 자택에 쇼고인 양화연구소[聖護院洋畵硏究所]를 설치했으며, 이것이 간사이 미술원[關西美術院]이 되자 초대 원장으로 활약했다. 그림 외에 도안·도기·칠기·염직물 분야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취미로서 일본화를 그리기도 했다. 전원이나 바닷가에 인물을 배치하고 갈색을 주조로 폰타네시의 화풍과 기법을 사용한 그의 초기 작품은, 구로다 세이키[黑田淸輝] 등 하쿠바카이[白馬會]의 무라사키파[紫派]에 대해 야니파[脂派]라고 불렸다. 그러나 1897년경부터는 인상파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 발표되었으며, 프랑스 유학 당시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문하에서 야스이 소타로[安井曾太郞], 우메하라 류자부로[梅原龍三郞]와 같은 유명한 화가들이 배출되었다. /브리태니커
1852 - 독일의 교육개혁가, 유치원 창시자 프뢰벨(Fröbel, Friedrich) 사망
프뢰벨 [Fröbel, Friedrich (Wilhelm August), 1782.4.21~1852.6.21]
독일의 교육가.
1782년 4월 21일 튀링겐 오버바이스바흐에서 출생하였다. 예나대학교를 졸업하고 1807년부터 프랑크푸르트의 모범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던 중 교직이 천직임을 깨닫고 생애를 교육에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페스탈로치(Pestalozzi, Johann Heinrich, 1746~1827)에 감화되어 1816년에 그리스하임에 일반 독일 교육연구소(1819년에 카일하우로 옮김)를 창설하였고, 1840년 블랑켄부르크에 세계 최초의 유치원을 세웠다. 이후 보모양성과 유치원사업 보급에 주력함과 동시에 여성교육의 발전에도 힘을 쏟았다. 사상적으로 페스탈로치와 독일낭만주의의 영향을 입어, 만물에 신의 본성이 깃들여 있다고 믿고 신성(神性)의 발양(發揚)이야말로 교육의 임무라고 주장하였다.
아이들의 자기활동·연속발전·사회화·노작(勞作)·체험 등, 그의 이론 모두가 유아의 신성에 관한 확신에서 생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유아교육의 실천면에서 구체(球體)·점·선·정육면체 등의 장난감을 사용하는 유희를 통하여 인간성을 배양할 것을 제창하였다. 저서로는 《인간교육 Die Menschenerziehung》(1826), 《어머니와 애무의 노래 Mutter und Koselieder》(1844) 등이 있다. /네이버
- Brazil, 1000 Cruzados (Banknote)
1839 - 브라질의 시인, 소설가 마샤두 데 아시스(Machado de Assis) 출생
마샤두 데 아시스 [Machado de Assis, Joaquim Maria, 1839.6.21~1908.9.29]
브라질의 시인·소설가.
브라질 고전문학의 대가로 그의 저술활동은 유럽 문화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어 브라질 문학 유파들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흑인과 포르투갈인의 혼혈인 도장공(塗裝工)의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역시 혼혈계인 계모에게 양육되었다. 병약하고 호감을 주지 못하는 외모에 간질병과 말더듬 증세까지 지닌 그는 17세에 인쇄공의 도제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틈틈이 글을 써 낭만주의 전통의 단편소설·시·장편소설 등을 출판했다.
1869년 무렵 브라질에서 문인으로 성공한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으며, 정부가 마련해준 좋은 직책에 있으면서 교양있는 여인 카롤리나 아우구스타 사비에르 데 노바이스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바로 그해에 병으로 작품활동을 중단해야 했지만, 그뒤 곧 당시의 문학관습을 깨뜨리는 매우 파격적이고 독창적인 문체로 새로운 소설을 써 다시 인기를 끌었다. 이것이 〈브라스 쿠바스의 사후 회고록 Memórias Póstumas de Brás Cubas〉(1881)인데, 자유로운 연상과 다양한 여담을 담았고 괴팍한 1인칭 화자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다. 줄거리가 종종 이어지지 않는 160개의 짧은 장(章)으로 된 이 작품에서 '작은 승리자'라고 불리는 브라스 쿠바스는 자신의 생을 냉소적으로 회고하면서, 선과 악을 비교한 뒤 자신은 인류의 불행한 유산을 영속화하는 아이를 갖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앞선 사람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이 작품을 비롯해 그에게 명성을 안겨준 작품들로는 여러 편의 단편소설과 〈철학자냐 개냐 Quincas Borba〉(1891)·〈돔 카스무로 Dom Casmurro〉(1899) 등 2편의 후기 장편소설이 있다. 특히 〈돔 카스무로〉는 그의 걸작으로 꼽히는 소설로서 질투로 뒤틀린 마음을 탐구한 무섭고 끔찍한 작품이다. 단편소설 번역본으로는 〈악마의 교회 외(外) The Devil's Church and Other Stories〉(1977)·〈정신과 의사 외(外) The Psychiatrist and Other Stories〉(1963) 등이 있다.
세련되고 귀족적인데다 초연하고 냉소적이며 세계주의자인 마차도는 브라질의 독립이나 노예제도폐지 같은 사회적 문제를 간과했으며, 지방색과 민족주체의식이 강한 브라질인의 열정을 공유하지 못했다. 소설의 배경은 주로 리우였고 그 외의 다른 곳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의 작품 속에는 자연세계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경쾌한 어구와 재치가 아니었더라면 참기 어려운 것이 되었을 성싶은, 뿌리깊은 염세관과 환멸감이 깔린 글을 썼다. 1896년부터 브라질 학술원의 초대 원장으로 일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브리태니커
- Arthur Wellsley Wellington
1813 - 비토리아 전투[Battle of Vitoria] 발발
1813년 6월 21일 이베리아 반도에서 프랑스군과 영국·스페인·포르투갈 동맹군 사이에 벌어진 반도전쟁의 결정적인 전투인 비토리아 전투가 일어났다. 반도전쟁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여러 지방에서 오랫동안 전투가 계속되면서 프랑스군은 병력과 물자가 부족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포르투갈을 방어하던 영국의 웰링턴이 1812년 스페인으로 진군했다. 결국 1813년 웰링턴 공작이 지휘하던 영국·스페인·포르투갈 동맹군과 조제프 보나파르트 왕이 지휘하던 프랑스군이 전선에서 맞섰다. 프랑스군은 힘겨운 전투 끝에 무너지고 팜플로나로 퇴각했다. 동맹군은 이 전투의 승리로 바스크 지방을 장악했고, 프랑스군은 피레네 산맥 너머까지 퇴각했다. /브리태니커
1806 - 프랑스의 저널리스트 지라르댕(Girardin, Émile de) 출생
지라르댕 [Girardin, Émile de, 1806.6.21~1881.4.27]
프랑스의 저널리스트.저렴한 신문을 발간해 엄청난 발행부수로 성공을 거두어 '언론의 나폴레옹'이라고 불렸다. 알렉상드르 드 지라르댕 백작과 파리의 법률가 부인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그는 첫번째 작품인 자전적 소설 〈에밀 Émile〉(1827)을 발간하면서 아버지의 성(姓)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1828년 최초의 정기간행물인 예술과 과학 분야의 월간 평론잡지 〈볼뢰르 Le Voleur〉를 창간했다. 1831년 작가 델핀 기와 결혼하면서 곧 파리 사교계의 주요인사로 떠올랐다. 지도책과 연감 및 몇몇 간행물 등의 거듭되는 성공으로 명성이 더욱 높아졌으며, 1834년에는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지라르댕의 가장 큰 업적은 보수주의적인 신문 〈프레스 La Presse〉(1836)를 창간한 것이다. 특히 이 신문은 경쟁지의 절반도 안 되는 저렴한 판매가격과 기발한 선전활동으로 엄청난 발행부수를 기록했고, 차츰 이윤을 보기 시작했다. 1836년 7월 22일 지라르댕은 〈나시오날 Nationale〉의 발행인이었던 아르망 카렐과 사사로운 정치적 말다툼 끝에 결투를 벌이다가 그를 죽이고 말았다. 그 일로 수년 동안 지라르댕의 인기는 점차 떨어졌다. 더욱이 한 논쟁에서 그의 국적이 문제시 되어 1839년 하원에서 축출되었으며, 그후 몇 주 안 되어 그가 프랑스 태생임이 밝혀졌으나 1842년까지 하원의원으로 재선되지 못했다.
지라르댕은 국민의 여론에 따라 자신의 정치적 노선을 수시로 바꾸면서 이따금씩 진보적 성향도 보인 중산층 보수주의자였다. 1848년에는 루이 필리프에게 오를레앙의 공작부인에게 왕위를 넘기고 물러나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제2공화정을 지지했으나, 1848년 6월 혁명 이후부터는 루이 나폴레옹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제2제정 때도 여전히 갈팡질팡했다. 6년 동안 〈프레스〉를 떠나 있다가 1862년 다시 돌아온 그는 자유당에 합류하여 프로이센과 전쟁할 것을 촉구했다. 1866년에는 세인의 주목을 별로 끌지 못했던 잡지 〈리베르테 La Liberté〉를 재발간했다. 몇 년 뒤에 공화당원이 되어 1872년 〈프티 주르날 Petit Journal〉을 인수하여 발행부수를 50만 부로 늘렸다. 1874년에는 〈프랑스 La France〉의 정치부 논설위원이 되기도 했다. 이 두 신문의 힘을 입어 공화당은 1877년 선거에서 승리했다. /브리태니커
1633 - 교황청, 지동설 주장한 갈릴레이에게 유죄 선고
갈릴레오는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접하고 그의 이론의 탁월함에 감복하며 그의 이론을 지지하게 되었다. 1610년에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토대로 스스로 알아낸 천문학의 새로운 발견들을 다룬 《별의 전언》이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하지만, 당시 교황청 세력의 주류들은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성서직역주의를 따랐는데, 《별의 전언》은 성서를 문자 그대로 해석할 경우에 성서와 상당히 배치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 이론의 열렬한 지지자이기는 했지만, 결코 교황청과 대립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우선 갈릴레오는 한때 가톨릭 신부가 되려고 했을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고, 그의 명석함 덕분에 그는 교황청의 신분이 높은 사람들과도 꽤 친분이 있는 편이었다. 갈릴레오는 그들 앞에서 성서의 천동설을 암시하는 내용을 문자 그대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며,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꼭 성서와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교황청의 일부는 그런 그의 주장에 동조하기도 하였지만, 일부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주장하는 갈릴레오를 가톨릭의 교리에 어긋나는 이단으로 규정할 것을 주장하였다.
1615년, 갈릴레오는 검사성성에 고발되었고 이것을 알자 자신과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변론하기 위해 로마를 방문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이 방문은 별 소용이 없었다. 1616년,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는 로마교황청에 의해 지정된 금서 목록에 올랐고, 갈릴레오는 지동설을 유일한 진리로서 지지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그리하여 고향인 피렌체에서 지내던 1623년, 갈릴레오와 친분이 두터웠던 마페오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어 우르바노 8세로 즉위하였다. 이듬해, 갈릴레오는 다시 로마를 방문하여 교황의 환대를 받았고, 교황과의 변함없는 우정을 확인한 그는 자신의 이론을 추론 수준에서라면 발표해도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두 가지 주요 세계관에 관한 대화》의 원고를 완성하였고, 1630년에 이 책의 출간 허가를 받기 위해 다시 로마를 방문한다. 이 책은 우여곡절은 겪은 끝에 1632년 피렌체에서 발간되었는데, 곧이어 갈릴레오 반대 세력의 격렬한 항의가 이어졌다. 우르바노 8세마저 이 책의 발간을 자신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하였다.
결국 우르바노 8세는 이 책의 배포를 금지하고 지동설을 지지하지 않겠다는 교회와의 약속을 어긴 갈릴레오를 종교재판소에 회부한다. 1633년, 갈릴레오는 종교재판소에서 궐석재판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투옥될 예정이었지만, 건강이 나쁘고 고령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곧바로 가택연금으로 감형을 받았다. 종교재판이 끝나고 재판정을 나서면서 갈릴레오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을 했다는 일화가 그의 과학적 진리 탐구에 대한 열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갈릴레오가 진짜 그러한 말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신빙성 있는 근거는 없다. /위키백과
1527 - 이탈리아의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Machiavelli, Niccolò) 사망
마키아벨리 [Machiavelli, Niccolò, 1469.5.3~1527.6.21]
정치행위의 냉혹한 일반이론을 제시한 비수 같은 이성의 소유자, 마키아벨리가 1527년 6월 21일 사망했다. 58세였다. 종교를 정치의 수단쯤으로 치부하고 윤리를 군주의 화장술인 양 묘사한 마키아벨리였다. 사상사에서의 그의 공적은 정치영역이 윤리나 종교 등 다른 영역과 구분된다는 점을 명료하게 밝히고, 나아가 정치행위가 종교적 규율이나 도덕적 가치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명시적으로 주장함으로써 현실주의 정치사상을 대변한 데 있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29세 때 피렌체 공화국의 제2서기장을 맡아 내정과 군사를 담당했으며, 대사로도 활약했다. 그러나 1512년 한동안 쫓겨났던 메디치가가 피렌체로 복귀, 권력을 잡으면서 공직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정계에서 축출됐다. 세상 사람들이 그의 생각에 동조하고 그를 이해하게 된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수백년이 지나서였다. 그는 평생 가난했고 정치적으로는 불운했다.
그의 대표작 ‘군주론’ ‘리비우스 논고’와 같은 역사적인 저작은 공직에서 밀려난 그가 자신의 무력한 처지에 대한 울분과 공직 복귀에 대한 가망없는 기대 속에서 써내려간 불행이 탄생시킨 작품이다. 특히 ‘군주론’은 마키아벨리즘이란 용어를 탄생시킨 저작물로, 그는 이 책에서 정치는 도덕으로부터 구별된 고유의 영역임을 주장했다. 더 나아가 프랑스 및 에스파냐 등 강대국과 대항해 강력한 군주 밑에서 이탈리아가 통일되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가 죽자 로마 교황청은 ‘군주론’을 비롯한 그의 저서 전부를 금서로 지정했다. /조선
1377 - 잉글랜드의 국왕 에드워드 3세(Edward III) 사망
에드워드 3세 [Edward III, 1312.11.13~1377.6.21]
플랜태저넷왕가의 잉글랜드 왕(재위 1327∼1377).
윈저 출생. 윈저의 에드워드(Edward of Windsor)라고도 한다. 에드워드 2세의 아들이다. 왕위에 오른 당시에는 모후(母后) 이자벨라와 그녀의 총신 모티머가 권력을 쥐었으나, 모티머를 처형하고 권력을 장악한 뒤 에드워드 1세의 유업을 이어받아 왕권과 국력의 신장에 주력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스코틀랜드군을 무찔러 자신의 주권을 인정하게 하고, 다시 프랑스 카페왕조의 단절을 계기로 왕위계승권을 주장, 백년전쟁을 일으켰다. 황태자 에드워드 흑태자의 분전 등으로 크레시전투(1346)와 푸아티에전투(1356)에서 승리를 거두고, 브레티니 화약(1360)에서는 서남 프랑스와 칼레의 영유권을 인정하게 하였다.
또, 영국의 교회에 대한 로마교황의 간섭을 물리치고 영국의 종교개혁자 J.위클리프를 보호하였다. 내정면에서 특히 괄목할 만한 치적으로는, 네덜란드에서 직인(職人)을 불러들여 모직공업의 진흥을 도모한 일을 들 수 있는데 영국이 양모 생산국에서 모직물 생산국으로 발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가터 훈장은 이때 제정되어 맨 먼저 그의 맏아들인 에드워드 흑태자에게 수여되었다. /nave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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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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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지식 얻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