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9.21. 가락국 옛터 김해의 노거수老巨樹 이야기 04.
삼방동의 5백 살 '배롱나무'와 2백 살 '느티나무' -일문삼강 꽃피운 이씨 문중의 상징
경남 김해시 삼안로 297번길 10-18
지번 김해시 삼방동 581-4
노거수 탐사/1차
은하사에 석산을 보러 다녀 오는 길.
활천천따라 내려가다 관천재 삼문 활수문이라는 현판이 보여 차를 세웠다.
잠깐 들린 길이라 활천(지금의 신어천) 건너편에 서서 사진을 몇 컷하고 돌아서다.
2000년대에도 활천동이라고도 불렀다. 지금도 어르신들은 활천동이라 부르고 있겠지요.
지금 왼쪽과 오른쪽(1번과 2번 컷)으로 약간 보이는 배롱나무가 500년 된 배롱나무.
활수문 양쪽에 있는 은행나무 두 그루 튼실해 보였다.
(사진은 다시 교체할 것임.)
노거수이야기 · 04 삼방동의 5백 살 '배롱나무'와 2백 살 '느티나무'
'일문삼강(一門三綱)' 꽃피운 이씨 문중의 상징 |
'불가에 "방하착放下着'이란 가르침이 있습니다.집착을 놓으면 편하다는 말입니다. 나무가 사람보다 아름다운 것은 자신의 꽃과 잎을 때가 되면 놓을 줄 알기 때문입니다. 오직 사람만이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살려 합니다. 지금 그대의 손은 무얼 쥐고 있습니까? 무엇인가 놓기 싫어 꽉 쥐고 있는 것이 있다면 놓아 보시길, 빈손이란 모은茅隱의 백비白碑와 같아서 스스로도 보는 사람도 참 편안한 마음이 될 것입니다. 시인 정일근鄭一根이 함안의 '고려동' 에 서 있는 백비를 보고 어느 글에 남긴 소감이다. 고려동은 고려 말 성균관 전사 모은이 오선생의 유적이다. 모은茅隱은 고려 패망 후 은거지를 찾다가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 580번지 일대 폐허에 배롱나무꽃이 만발한 것을 보고 그 곳에 정착했다. 담장을 쌓고 고려 유민의 거주지임을 뜻하는 '고려동학高麗洞壑'이라는 비석을 세워 그 안의 논밭으로 자급자족하면서, 아들에게 조선조에 벼슬하지 말 것과 자신이 죽은 뒤라도 신주神主를 밖으로 옮기지 못하도록 유언했다. 또 비석에 아무 글도 새기지 말라고 당부했다. 망한 나라의 백성이 무슨 남길 말이 있느냐는 거였다. 그래서 후손들은 무덤 앞에 글자 한 자 없는 빈 비석을 세웠다. 바로 백비다. 비록 나라는 바뀌었지만, 자신만은 고려의 백성으로 땅에서 평생을 살다 간 것이다. 함안 고려동서 옮겨 오백 살 넘은 배롱나무 그런데, 모은선생의 불사이군 정신을 상징하는 고려동의 배롱나무 한 뿌리가 김해로 옮겨와 5백50년 넘게 붉은 꽃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시내 삼방동 581-4번지 '관천재觀川齋' 후원의 사당 앞에 선 배롱나무가 그 나무이다. 고려동에 세거하다 김해로 솔가하게 된 모은의 증손 이포李咆공이, 도포의 소매 자락에 넣어와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선조의 단심丹心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었을 것이다. 당초 묘목을 심었던 곳은 지금 자리에서 몇 백m 떨어진 삼방동 710번지 주변이었다. 90년대 초 신어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관천재를 지금의 자리에 중건함에 따라 95년 배롱나무도 옮겨 심었다. 배롱나무는 1백년 정도 살면 주간이 고사하고 밑뿌리에서 나온 새 순이 자라기를 반복한다. 관천재 배롱나무도 지난 5백 년 동안 몇 차례나 이 과정을 겪었다. 현재는 직경 30cm 정도 굵기의 둥치 두 개가 서 있지만 동쪽 것은 고사한 지 백년 가까이 지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새로 솟은 서쪽 둥치도 수명이 다해 간다는 뜻이 된다. 짐작대로였다. 개미들이 부지런히 오르내리며 고사한 부분을 갉아 굴을 뚫기 바쁘다. 후손들은 "그래도 지난 7~8년 전보다는 훨씬 기운을 차렸다'고 하지만, 방부처리와 외과 수술이 시급한 상태다. 배롱나무craqpe myrtle는 도금양목 부처꽃과에 속하는 나무이다. 꽃은 붉은색, 흰색, 보라색 등으로 7월부터 9월까지 번갈아서 피고 지는데, 계속 피어 있는 것처럼 보여 '백일홍'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시대 강희안姜希顔(1417~1464)이 지은 원예전문서 『양화소록養花小錄』에도 '본명은 자미화紫薇花, 속명은 배롱나무'라고 기록되어 있다. 키는 3~5m, 줄기는 담갈색이다. 껍질을 손톱으로 긁으면 나무전체가 떨린다고 하여 '간지럼나무'라 부르기도 한다. 배롱나무는 표면이 매끄러워 여인의 나신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여염집 안마당에 심는 것을 금기시했다. 그런데도 절이나 선비들이 기거하는 사랑채의 앞마당에는 즐겨 심었다. 언뜻 생각하면 모순이지만, 이때의 배롱나무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껍질을 벗는 것을 스님들은 무소유의 상징으로, 선비들은 청빈의 상징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또 꽃이 오랫동안 피는 것은 변함없는 지조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았다. 자미화의 '미'자가 고비 Osmumda japonica Thunb를 가리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고비는 고사리목 고비과의 양치식물이다. '깨치미'라고도 한다. 고사리와 비슷해 굳이 구별하지 않고 나물로 먹는다. 주主나라 무왕武王의 녹봉을 거부하고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뜯어먹고 살았다는 백이伯夷·숙제叔齊의 고사로 인해, 고사리와 함께 지조의 상징이 되었다. 김해지역에도 그 사례가 있다. 조선 중기의 인물인 서강西崗 김계금金係錦(1405~1493)선생의 일화이다. 공은 단종조에 문과 급제해 의성현령 등을 지냈다. 세조의 와위찬탈과 사육신의 죽음을 보고 낙향해 은거하니, 세상 사람들이 생육신에 한 사람을 더할 만하다는 뜻으로 '육일六一거사'라 불렀다. 사후에 중북면 외룡동(지금의 진영읍 설창리)에 장사하자 이적이 나타났다. 묘역에 그때까지 주변에 나지 않던 고비가 자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후로 무덤이 있는 고개 이름을 고비 '궐'자를 써서 궐현蕨峴이라 하고, 고비 '미'자를 넣은 미양서원薇陽書院을 세워 지금까지 향사하고 있다. 한 집안에서 충신. 효자, 열녀 나와 삼방 관천재는 재령載寧 이씨 삼방문중의 재실이다. 조선 말기 경기전慶基殿(조선 태조의 영정을 봉안한 묘사, 전북 전주시 풍남동 소재) 참봉을 지낸 이현식李鉉式 공이 주관하고 문중 후손들이 힘을 모아 1911년 건립했다. 40년대와 60년대에 중수·중건한 후 지난 95년 다시 한 차례 중건 복원해 지금에 이러렀다. 그런데 관천재에서 향사하는 이는 배롱나무를 옮겨 온 입향조入鄕祖 이포선생이 아니라 그 손자다. 예상 밖의 일이지만, 선생의 손자가 '김해의 정신'으로 일컬어지는 임진왜란 사충신 중의 한 분인 이대형李大亨(1543~1592)공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공은 어릴 때부터 학문을 힘써 닦아, 놀이를 할 때도 지혜나 기품이 보통 아이들과는 달랐다. 향시에 여러 번 합격했으나 예조에서 행하는 경시에는 운이 없어 과거를 포기했다. 그 이후 공은 활천活川(지금의 신어천) 냇물 위에 집을 짓고 스스로 관천거사觀川居士라 불렀다. 문 밖 출입을 삼가고. 양친을 봉양하는 데만 힘을 기울이자 그의 학문과 인품을 높이 평가한 유림에서는 공론을 모아 두 번이나 조정에 천거했다고 한다. 임진년(1592) 4월 열 닷새 경, 은둔중인 공의 처소에 한 장의 서찰이 닿았다. "왜적이 침공해 김해성을 향하고 있으니 급히 입성 바람." 인척 관계인 김해부사가 보낸 급보였다. 2~3일 전부터 죽도竹島(지금의 부산 상서구 가락동)남쪽 해구에 왜선들이 모여든다더니, 장사배로 위장한 왜적들이었던 것이다. 공은 황급히 두 아들을 불러 당부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국은을 입었다. 나는 비록 벼슬은 없으나 이른 위급한 날을 당해 의리를 버리고 살기를 도모하는 것은 신민의 도리가 아니다. 가서 주장主將과 더불어 성城을 등지고 싸워 순국의 혼령이 될 터이니 너희들은 먼 곳으로 피해 조상의 제사가 끓어지지 않도록 하라." 급히 장정 백여 명을 모집한 이공은 김해성으로 달려갔다. 왜적이 욱일승천의 기세로 몰려온다는 소식에, 백성들은 병사들의 사기도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김해부사가 성을 포기하려하자 공은 "평시에 나라의 후은厚恩을 입고도 나라가 어리러운 때 보국지심을 잊어서야 되겠소? 어찌 영남의 요지로 가장 먼저 적을 맞는 분성盆城(김해)을 보장하지 않는단 말이오?"하고 크게 꾸짖었다. 그러나 힘에 부치는 싸움이었다. 4월 17일 새벽, 밤 내내 허수아비를 성 안으로 던져 넣어 혼란을 유도한 왜적은 보릿대로 언덕을 쌓아 마침내 성벽을 넘었다. 한 명의 적이라도 더 베기 위해 피투성이가 되도록 칼을 휘두르던 이공은 송 빈, 김득기, 류 식 등 세 충신과 더불어 장렬히 최후를 맞았다. 더 애석한 것은 공의 맏아들 우두友杜(?~1592)의 죽음이다. 조상의 제사를 잇도록 멀리 피난하라는 공의 유언에도 차마 걸음을 떼지 못했던 우두는, 부친이 순절했다는 비보를 접하고 김해성에 잠입했다. 시신이라도 수습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왜적에게 발각되어 목숨을 잃고 말았다. 문중 후손들이 두 부자의 초혼례招魂禮를 치르고 두 개의 빈 상여로 상동면 봉발산을 향하자, 부민들이 모두 나와서 애도했다. 이씨 문중의 의로운 죽음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파죽지세로 북진하다 진주정에서 패퇴한 왜군은 이듬해 전열을 정비하고 8만 대군을 투입해 진주성을 함락했다. 이에 경상도 곳곳에서는 의병이 창의했고, 함안지역의 주익창 周益昌 · 필창必昌이라는 선비 형제도 분연히 일어나 칼을 잡았다. 지리산 대갈동大葛洞에 왜적과 맞닥뜨렸지만, 애초부터 승산은 없다. 형제가 장렬히 산화하자 아내들도 천 길 못에 몸을 던져 지아비를 따랐다. 이씨李氏 · 김씨金氏 부인이었다. 익창의 아내 이씨가, 바로 대형공의 질녀(백씨 대윤大胤의 딸)이다. 임진왜란 종전 후 민심수습을 위해 파견된 순안사 정표鄭慓가 이 사실을 듣고 조정에 보고하니 두 연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죽음이 세상에 알려졌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진 대형공은 군위신강君爲臣綱이요, 아들 우두가 아버지의 시신을 찾다 죽었으니 부위자강父爲子綱이요, 이씨 부인이 지아비를 따라 자진했으니 부위부강夫爲婦綱이었다. 한 고을에 한 사람의 충신이나 효자가 나는 것도 어려운데, 같은 지붕 아래 이른바 "일문삼강一門三綱"이 났으니 청사에 남길 일이었다. 선조임금은 이대형공에게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추증했고(훗날 고종임금이 사충신의 벼슬을 가증加贈할 때 호조 참판을 제수 받았다.) 질녀 이씨에게는 열녀문을 내렸다. 또 대형공이 살던 마을은 나무다리로 활천을 건너다녀 판교동板橋洞이라 불렀는데, 조정에서 "충신, 효자,열녀가 났으니 세 가지 꽃다운 일"이라 하여 '삼방'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마을 공동 소유지에도 선조 얼 깃든 노거수 두 그루 90년대 토지구획정리 시행 전만 해도, 삼방마을은 전체 1백여 가구의 90% 이상이 재령 이씨인 집성촌이었다. 후손들은 선조의 얼이 깃든 마을 이름에 대한 자부심과 경모敬慕정신이 대단하다. 문중은 입향조의 관직을 따서 '사직공파'라 부른다. 이들 역시 함안 모곡의 '고려동'처럼 마을 공동소유의 땅을 조성해 대대로 물려주며 소출로 마을 경로행사 비용이다. 제전祭錢에 충당하도록 했다. 그 땅은 지금은 삼방근린공원으로 바뀌었는데, 250년 된 팽나무와 200년 된 느티나무 등 노거수 두 그루가 마을의 역사를 알려주고 있다. 팽나무는 쉼터의 정자나무로 심은 것이어서 특별한 일화가 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선조들이 마련해 준 동답洞沓을 긴 세월 동안 분쟁 없이 관리하고 늘려온 화목의 표상이라는 점만 해도 충분히 가치 있는 노거수이다. 가슴높이의 직경이 110cm, 키는 13m 정도다. 지상 2m 높이에서 가지를 벌려 사방 15m 내외의 수관폭을 형성하고 있다. 군데군데 썩고 부러진 곳은 김해시가 외과 수술로 말끔히 치료했다. 왼쪽에 선 느티나무는 관천재 배롱나무처럼 이씨 문중의 명목名木이다. 심은 내력이 분명한 요즘으로 치면 '기념식수'격인 나무를 옛사람들은 명목名木이라 부르며 더 정성들여 가꾸었다. 나무감 자랄수록 후손들의 긍지도 높아갈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이 나무는 2백여 년 전 이군상李君祥공이 심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보첩에는 공이 통정대부에 올랐고 부친인 종문宗文공이 증직贈職으로 가선대부에 제수된 것으로 나와 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김해읍지』에 공에 대한 언급이 없어, 더 이상 자세한 행적은 알기 어렵다. 재령 이씨 사직공파 종친회장인 이병태李秉台(유도회儒道會 김해 동부지회장)시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일 때 팽나무 한 그루로는 그늘이 부족한 것을 본 그 어른이 아랫사람들을 시켜 다른 곳에서 옮겨 온 것이라 들었"고 문중 구전을 일러 주었다. 팽나무와 느티나무가 선 삼방근린공원은 90년대 토지구획정리사업 때 주성했다. 경내에는 삼방마을의 유래와 두 노거수의 내력을 전하는 기념비가 서 있다. 작고한 한학자 오천悟泉 김정식金正植 선생(초대 김해문화원장)이 비문을 짓고 썼다. 오천선생은 비문에서 함안에서 옮겨 온 자미수의 의미와 관천공의 충절을 칭송하고 조상들의 얼이 서린 마을 땅을 근린공원으로 꾸미게 된 연유를 밝혀 놓았다. 오천선생 역시 입란 사충신 중 한분인 김득기金得器 선생(1549~1592)의 후손이다. 공원 광장에는 놀이터와 각종 운동시설이 설치됐고, 남는 공간은 배구장과 족구장으로 쓰인다. 한창 힘이 넘치는 청소년들이 드나들다보니, 노인들은 북쪽 생나무 울타리와 두 노거수 사이의 좁은 공간으로밀려났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햇살을 막아주는 그늘이 있으니 그나마 낫다. 그래도 소년들은 무심하다. 저 팽나무와 느티나무 아래 모여 조상을 경모하고 후손을 애육하던 풍습을 알 리 없다. 공원에 세운 기념비를 올라타고 온갖 낙서를 해대는 통에 설치했다는 보호철책이, 오늘 우리 모두의 자화상처럼 느껴져 부끄럽다. 가락국 옛터 김해의 노거수老巨樹 이야기 (도감) |
90마라 전체 전경이 나오지 않았다.(사진 다시 교체할 것임)
그리고 관천재의 정면 사진을 찍지 못했다.일반인이 수시로 들어 갈 수 있는지 알아보고 한번 가야겠다.
관천재의 100년 된 은행나무 두 그루라고 하는데 이 나무인지는 모르겠다.
사진 찍는 곳에서 느티나무는 보이지 않있다.
들어가는 입구.
정문 입구 오른쪽 건물.
관천재의 배롱나무(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