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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시작과 과정, 결과
배덕만 목사/교수
종교개혁은 순수한 종교 운동으로 시작되었지만,정치적 이해 관계가 얽히면서
최초의 세계 전쟁을 일으켰어요.
역설적으로 신 중심인 중세에서이성 중심인 근세를 여는 계기가 되었어요.
1. 종교개혁전 시대 상황(원인)
시대적 배경
* 십자군전쟁(11세기~14세기)
* 흑사병(1347-1351)
* 신대륙 발견(1492)
십자군 원정도(출처: 교학사)
끊임없는 전쟁과 질병으로 수많은 죽음을 보게 되자 사람들은 불안했어요.
당시의 구원은 '은총'과 '공적'이었는데 공적은 그 기준이 모호했어요.
죽음 이후 천국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불안했던 중세인들은 교회에서 말하는 '연옥(죽은 후 영혼이 죄를 씻고 천국으로 가기 위해 머무는 곳)'에서 빨리 천국으로 가길 원했어요.
천국으로 직행하는 그 '패키지 상품'과 십자군 전쟁이 맞아떨어져죽음의 비즈니스가 발생했어요.
자기 가정에 예배실을 두고 신부를 고용해 예배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어요.
십자군 전쟁에서 죽으면 공적이 되어 천국 간다는 증서도 발행하게 되었어요.
이것이 면죄부의 시작이 되고 민간신앙이 되어갔어요.
대항해 시대 신대륙 발견으로 교회와 교황의 권위가 흔들리게 되었어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이 신대륙 발견으로 증명되었기 때문이죠.
교회는 법, 윤리, 과학 등에 권위를 갖고 있었고 당시에 지구가 평평하고 끝은 낭떠러지라고 가르치고 있었어요.
라틴어 성경 번역의 오류로 교회의 권위가 의심받게 되었어요.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그리스, 로마 문화가 복원되면서 언어와 문학에도 영향을 끼쳤어요.
라틴어 책을 보는 유럽인들이 그리스어로 된 원본에 가까운 성경을 만드는 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예요.
교회의 상황
* 돈으로 선출된 교황
* 면죄부
면죄부를 판매하는 성직자 / 교황(레오 10세)이 발행한 면죄부
십자군 전쟁 중 교역으로 부가 쌓이면서 고대 그리스풍으로 건축물을 집고 싶어 하는 분위기도 형성되었고, 점차 그 규모를 경쟁하게 되었어요.
교황의 업무 공간인 바티칸 구내에는 가톨릭 총본부인 산 피에트로(성 베드로) 대성당이 있어요.
이 성당이 개축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부족한 공사비를 마련하기 위해 로마 교회는 면죄부를 판매했어요.
살인 500만 원, 사기 300만 원, 절도 200만 원 같은 식으로 말이죠.
면죄부를 사면 죄가 사라지고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을 바보가 있을까만은, 당시엔 로마 가톨릭의 권위 앞에 절대적인 믿음을 가졌고 확고했어요.
중세 이후의 사람들은 이런 중세를 암흑의 시대라고 말하며 계몽주의 사상을 이끌게 돼요.
로마의 교황은 '레오 10세'였는데 돈으로 선출된 메디치 가문 출신이었어요.
십자군 전쟁 이후 이집트·중동 지역과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12세기 유럽·지중해는 유래 없는 호황기에 접어들었어요.
남북으로 연결된 간선 루트가 형성되며 독일 북부(한자동맹), 벨기에 북부(플랑드르), 독일 남부(아우크스부르크), 이탈리아 북부(롬바르디아 동맹)가 크게 발달했어요.
이탈리아 북부 피렌체에 위치한 메디치 가문은 향신료, 약품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척했어요. medicine(약품)이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했어요.
2. 종교개혁을 추진한 사람들
종교개혁가와 연대표
그 시대에 루터와 같은 생각을 가졌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어요.
이전 사람들은 실행에 옮기려다 죽게 되었고 루터에게 축적되어 폭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존 위클리프(1320-1384, 옥스퍼드 대학 출신 신학자)
위클리프 / 위클리프의 재판
존 위클리프는 영국 왕(에드워드 3세)의 궁정 사제로서성직들에 대한 교황의 세금과 임명권 같은, 잉글랜드와 로마 사이의 중요한 이견들을 논의하기 위해 대표단을 이끌고 브뤼헤(벨기에의 도시)로 갔어요.
여기서 교황(그레고리오 11세)의 돈 욕심을 확인하고, '진리의 근원은 교황이 아니라 성경'이라고 비판해요.
이것은 당시 대중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어요.(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
교황과 성직자의 청빈, 모든 기준은 성경이어야 한다고 했어요.
당시 성경은 라틴어였고, 라틴어 책은 학자들만 봤어요.
영어로 성경을 번역하려고 했는데 교회는 자국민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을 막았어요.
일반인의 오역을 핑계로 교회가 성경을 독점, 교인을 종속시키려는 것이었어요.
존 위클리프는 일반 교인이 성경을 읽게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성경을 번역하고 2년 후 죽게 돼요.
그후 20년이 지나 콘스탄츠 공의회(1415년)에서는 위클리프를 이단으로 결정하고,
그 시신을 부관참시까지 하는 일이 벌어졌어요.
얀 후스(1372-1415, 프라하 대학 총장)
얀 후스 / 그의 동상과 골즈킨스키 궁전(프라하)
체코에서는 얀 후스가 위클리프의 사상을 받아들였어요.
영국과 체코가 왕실 간 결혼으로 가까워 젊은이들이 영국으로 유학을 많이 갔어요.
얀 후스는 성경이 중요하다, 교회가 금권에 사로잡혀 부패했다고 주장했어요.
십자군을 모병하기 위해 면죄부를 파는 행위도 비판했어요.
이후 콘스탄츠 공회에서 얀 후스를 소환했는데 결국 그는 화형에 처해 졌어요.
얀 후스는 자기 나라 말로 민중에게 성경을 전해 교회를 다시 세우고 싶어 했는데 교회는 그것을 가장 위험스러운 것으로 생각했어요.
에라스무스(1469~1536, 네덜란드 로테르담, 신약성경 최초 편집, 우신예찬)
에라스무스 / 우신예찬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생각과 같았지만 가톨릭에 남아서 개혁하길 원했어요. 그는 유럽 최고의 유명한 학자였으며 루터와 츠빙글리에게 영향을 미쳤어요.
에라스무스는 가톨릭 사제의 사생아로 태어났어요. 비상한 머리로 고위 성직자가에게 비서로 일하며 글을 썼어요. 그러던중 영국 방문시에 '존 콜레트'의 영향으로 그리스어를 공부했어요. 에라스무스는 유럽의 신약 사본을 수집해서 라틴어와 그리스어 합본 성경을 출판했어요. 당시는 비유적(알레고리)으로 설교하는 관행이 있었는데, 성지순례, 마리아 숭배,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등은 성경과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모든 사람이 성경을 읽도록 교회가 힘써야 된다고 주장을 해요. 1516년 출판된 에라스무스의 성경을 보던 루터에 의해 1517년 종교개혁이 시작돼요.
에라스무스는 가톨릭 내부로부터는 루터를 부추겼다고 비난받았고, 루터파로부터는 가톨릭에서 발을 빼지 않았다고 비난을 받았어요. 하지만 신앙의 정통성보다 자유를 더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은 에라스무스를 따랐어요.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예정설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교황이 주장하는 권력도 인정하지 않았어요.
마르틴 루터(1483~1546, 독일 아인스 레벤)
루터 / 95개조 반박문을 붙인 비텐베르그 교회 정문
루터의 아버지는 광부에서 시작해서 광산을 소유한 사업가로 변한 사람이었어요.
아들은 교회에서 법률을 공부하길 원했어요.
불안한 사회적 배경에 예민했던 루터는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들어가요.
그는 수도원에서 철저하게 금욕 생활을 해요.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이 구원을 주신다'는 오캄의 사상을 따르고 있었어요.
금식과 자학과 심한 고행을 했지만 아무리 노력하고 공로를 쌓아도 구원에 확신이 오지 않았어요.
어느 날 루터는 로마서 1장 17절을 묵상하던 중 구원은 공로(자신의 의)가 아니라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덧입음으로써 이루어진다(이신칭의)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어깨를 짓누르던 짐이 벗겨지는 것을 체험해요.
루터의 서재는 탑에 있었는데 이것을 ‘탑의 경험’이라고 해요.
테젤(부흥회 전문가)의 설교를 들은 34세의 루터(신부, 교수)는 설교가 성경에서 벗어난다는 생각을 갖고 자기 학생들과 세미나를 열기 위해 1517년 10월 31일, 95개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붙어요.
이것은 누군가에 의해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인쇄기로 유럽 전역에 뿌려지고 그런 설교에 참고 있던 사람들이 폭발하게 돼요.
이렇게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어요.
하나였던 서방 교회가 분열하여 현재의 천주교와 여러 개신교회로 나뉘는 사건이기도 해요.
로마 교회는 루터를 공갈, 협박했으나 루터는 비판의 강도를 더 높여갔어요.
처음에는 종교 교의에 대한 것이 쟁점이었으나 점차 정치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어요.
그후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고함'이란 책으로 교황이 독점하는 성서 해석권, 공의회 소집권 등을 비판했어요.
교회가 개혁의지가 없으면 '평신도가 움직여야 한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사제다(만인사제설)', '평신도가 교회 개혁의 책임이 있다'라고 주장했어요.
루터의 종교개혁은 95개 조의 반박문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성경 안에서 복음을 재발견하는 순간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울리히 츠빙글리(1484~1531, 스위스 빌트하우스)
츠빙글리 / 그가 설교한 그로스뮌스터 교회
츠빙글리는 에라스무스에게 큰 영향을 받았으며 루터와 동시대에 스위스에서 종교개혁을 진행했어요.
그리스어에 능통해서 청년들과 공부하며 라틴어와 그리스어 성경을 펴놓고 오역을 지적했어요.
루터와 같이 성서를 최고의 권위로 받아들이고, 더 엄격하고 포괄적으로 모든 교리와 의식에 적용했어요.
하지만 츠빙글리와 루터는 성찬식 문제로 갈라섰답니다.
루터와 츠빙글리는 칼뱅에서 큰 영향을 주었어요.
장 칼뱅(1509~1564, 프랑스 누와용)
장 칼뱅 / 기독교 강요
신학과 성경해석의 문제는 학자의 영역이었어요.
하지만 교회는 조직과 문화, 제도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목회의 영역이었어요.
이 시기 목회 현장과 신학의 재정립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고 신학과 목회를 동시에 연구한 사람이 칼뱅이었어요.
그는 신학과 법률을 공부했어요.
친구인 '니콜라 콥'의 파리 대학장 취임 연설문을 작성하게 되었는데,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사상이 깃든 연설문에 사람들이 크게 반발하며, 칼빈을 범죄자로 취급했어요.
도피 생활을 하던 중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전향을 해요.
그 기간에 '기독교강요'라는 책을 쓰는데, 이 책은 간추린 개신교 신학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립하여 폭발적 반응을 일으켜 칼뱅은 유명인이 됩니다.
[기독교강요]
▶출판 동기
신성로마제국(독일)은 가톨릭과 루터파로 갈라졌어요. 프랑스의 프랑수와 1세는 원수지간인 신성로마의 칼 5세를 싫어해서 루터에게 자기를 지지하도록 편지를 보내요. 프랑스는 광신도(재세례파)를 탄압하는 것이지 루터파가 아니라는 내용이었어요. 칼뱅의 입장에서는 그 광신도파에 자기들도 포함되는 상황에 몰리게 되면서 가톨릭과 재세례파 사이에서 진정한 의미의 종교개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책을 썼어요. 1536년(26세)에 초판 되었어요.
▶내용
* 루터가 '이신칭의'의 교리라면 칼뱅은 이신칭의와 '성화(거룩한 삶)'를 강조하게 되고 장로교의 지침이 돼요.
* 루터는 떡과 포도주는 예수의 피와 살이 공존, 츠빙글리는 떡과 포도주는 상징할 뿐이라고 해서 둘은 갈라섰어요.
칼뱅은 중간 지점인 하나님이 임재하나 떡과 포주에 영(성령)으로 임재하신다고 강조해요.
* 구원받을 사람을 미리 정해 놓고 계시다(예정론)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요.
* 하나님의 지식은 오직 성경을 통해서 확립된다고 했어요.
* 그리스도의 모든 은혜가 나에게 적용되게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며 성부, 성자, 성령하님이 우리의 구원을 이룬다는 내용이 포함되었어요.
칼뱅은 가톨릭 국가인 모국 프랑스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하고 스위스로 망명했어요.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이루고 자기가 꿈꿨던 교회를 세웁니다.
루터가 신과 직접 대면하는 개인의 신앙을 중요시한다면,
칼뱅은 신권정치를 행하는 자로서 조직과 집단의 존재를 중시했어요.
목사, 장로, 교사, 집사로 구성하였고, 장로를 중심으로 당회를 조직하고 교사들의 지위를 매우 존중했어요.
칼뱅은 거대한 교단을 이끄는 경영자였으며, 운영에 따른 거액의 자금이 필요했어요.
기존 기독교의 교의에서 돈을 모아 이윤을 추구하는 것은 속된 것이었어요.
하지만 칼뱅은 이윤 추구, 재산 축적은 합당하다고 주장해 부르주아 자본주의를 옹호했어요.
선교사 양성을 위해 제네바 아카데미(제네바 대학)를 세우고 종교개혁의 신학을 가르쳤어요.
그 학생들이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스코틀랜드, 영국 등 전 유럽과 전 세계로 급속히 확산되었어요.
칼뱅은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실천하며 지지를 얻고, 정치적 권한이 주어지고 나아가 실질적인 통치권력을 갖게 되었어요.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칼뱅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청교도라고 불렀으며, 이들 상당수가 나중에 아메리카로 이주해 미국의 발전과정에 큰 영향을 끼치게 돼요.
하지만, 칼뱅은 예정론을 비판한 의사 볼섹을 제네바에서 추방하고, 삼위일체를 부정한 스페인 의사를 화형 시키는 오점을 남겨요. 이것은 가톨릭이 하던 관행이었어요.
3. 종교개혁으로 인한 전쟁
신성로마 황제인 칼 5세는 보름스 공의회(1521년)에 루터를 증인 소환해 비판했어요.
황제가 나섬으로써 나중에 독일 제후들까지 개입하게 되었어요.
당시 제후들은 황제가 권력으로 자기들을 위협할 것을 염려하여
루터를 보호, 황제 칼 5세와 직접 대결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었어요.
루터는 더 유명해졌으며 제후들은 자신들의 영내에 루터파 신앙을 강요하고, 가톨릭 세력을 배제했어요.
가톨릭인 황제는 독일의 지배에서 멀어지고, 이후 독립된 제후로 독일은 통일이 늦어져요.
스위스
스위스에서는 루터의 영향으로 몇몇 종교개혁의 의지가 있는 도시가 있었고 츠빙글리의 영향도 컸어요.
개신교인 취리히 주(canton)와 나머지 가톨릭 주가 전쟁(1531년 카펠 전쟁)을 일으켰어요.
스위스는 토지도 척박해서 농사도 지을 수 없고 높은 산으로 무역업이 발달하지도 못했어요.
그래서 다른 나라의 전쟁에 참여하는 용병제가 발달되어 스위스 사람들은 '싸움 전사'라고 할 수 있어요.
이 전쟁에서 츠빙글리도 전사했어요.
프랑스
프랑스 왕비 '카트린(메디치 가문)'은 자기 아들을 계속 왕이 되게 하기 위하여 상항에 따라 가톨릭 편과 개신교편을 오갔어요.
가톨릭의 기즈 가문과 위그노의 부르봉 가문이 대립하였고 모후 카트린은 종교 갈등을 이용해 왕권을 강화하고 있었어요.
카트린의 아들 샤를 9세는 겁 많은 소년왕으로 유일하게 마음을 터 놓은 사람이 콜리니 해군 제독이었어요.
왕실을 차지하려는 가톨릭 기즈 가문이 콜리니와 왕을 이간질시켜 프랑스 왕실이 개신교를 살해하게 됩니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1562년 바시라는 작은 마을의 '위그노'인들을 학살하면서 위그노 전쟁이 시작됐어요.
이어서 카트린의 딸 마그리트와 앙리(나바르 왕국의 왕)의 결혼식 날이자 '성 바르톨로메오 축제일'에 콜리니와 개신교 하객들을 살해(1572년)했어요. 또한 전국의 수많은 개신교인을 숙청시켰어요. 이 전쟁은 가톨릭으로 개종당한 앙리(앙리 4세)가 1598년 낭트칙령을 공포하면서 종결되었고 개신교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게 되었어요.
영국
헨리 8세 왕은 궁녀(앤 볼린)와 재혼하기 위해 본 부인(캐서린)과 이혼하려 했지만 가톨릭 법으로는 그럴 수가 없었어요.
가톨릭에서 나와 결혼하고 개신교로 개종하게 돼요.
겉은 가톨릭의 전통으로 속은 개신교를 받아들여 영국 국교회(성공회)를 만들어요.
성공회는 우두머리가 영국 왕이고 그 밑에 캔터베리라는 대주교가 종교적 지도자예요.
하지만 청교도(프로테스탄트)는 제네바의 칼뱅과 같은 순수한 교회를 만들고 싶어 했어요.
왕실(성공회)과 의회(청교도)의 대립이 전쟁으로 치닫고 크롬웰이 이끈 의회파가 찰스 1세 왕을 죽이게 됩니다.(청교도 혁명 1642~1660)
네덜란드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식민지였어요. 상인들이 칼뱅 신학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종교전쟁이 그들의 독립운동이 되었어요.
결국 북쪽은 개신교로 독립해서 네덜란드가 되고(1648년), 남쪽의 벨기에, 룩셈부르크는 스페인의 지배하에 남게 돼요.
이 전쟁에서도 종교의 자유를 가톨릭으로부터 얻어내기 위해 수많은 피를 흘렸어요.
가톨릭도 자기 영역이 줄어들면서 반격을 가하기 시작해요.
종교 재판소를 통해서 가톨릭 안에 반가톨릭적인 세력을 이단으로 몰아내요.(종교재판)
한편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해서 자기 내부의 개혁을 하고 성직자의 교육 수준을 높이려고 신학교를 세웠어요.
모든 주교가 자기 교구에 상주하도록 해서 내부 기강을 확립해요.
이슬람 선교를 위해 세워졌던 예수회가 교황에게 절대 충성하는 홍위병 역할을 해요.
또한, 교육과 선교를 담당하면서 일본 오사카를 통해 임진왜란 때 최초의 외국인 신부인 페르 세레스 포르투갈 신부가 우리나라에 와요.
우리나라의 서강대도 예수회를 통해 세워졌어요.
무너져가는 가톨릭이 자체 노력을 했어요.
종교개혁으로 인한 최초 세계대전
30년 전쟁
가톨릭과 루터파로 양분되었던 기독교는 20년 후에 가톨릭, 루터파, 칼뱅파로 삼분되었어요.
하지만 1555년 9월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영주가 믿는 종교를 그 지역의 종교로 한다는 결정을 했고, 여전히 가톨릭과 루터파만 인정되고 칼뱅파는 배제되었어요.
종교적 갈등을 임시봉책으로 덮어둔 결과 피를 부르는 전쟁이 올 수밖에 없었어요.
국내에서 싸우던 사람들이 최초의 세계전쟁(30년 전쟁, 1618~1648)을 일으켜요.
가톨릭의 입지가 좁아지던 중 페르디난드 2세가 유럽을 다시 가톨릭으로 바꾸려고 해요.
보헤미아는 체코의 서부 지역으로 얀 후스의 후예들이 사는 개신교 지역이었어요.
이곳에 왕의 사신들이 와서 가톨릭을 강요하자 귀족들이 사신들을 창밖으로 던졌어요.(1618년, 창문 투척 사건, 프라하)
창문 밖 투척 사건(30년 전쟁의 시작)
이 사건을 계기로 황제가 전쟁을 일으켜 보헤미아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가톨릭으로 바꾸게 돼요.
보헤미아를 돕기 위해 루터파인 덴마크가 참전했으나 덴마크가 패배해요.
불안해진 스웨덴이 독일로 내려와 참전해서 스웨덴이 이기게 돼요.
그후 신성로마는 스페인(합스부르크)을 동원해 스웨덴을 무찔러요.
마침 합스부르크와 같은 가톨릭이지만 적대적이었던 프랑스가 개입해 스웨덴 편에 서서 전쟁을 벌이게 돼요.
베스트팔렌 조약(헤라르트 테르뷔르흐, 네덜란드화가)
30년 전쟁은 베스트팔렌조약(1648년)으로 끝났어요.
이 조약으로 가톨릭, 루터파, 칼뱅파는 동등한 지위를 얻고 신성로마제국(독일)의 지배력은 상실돼요.
독일 땅에서 전쟁이 벌어졌고 이로 인해 독일은 통일이 늦어졌어요.
사람들은 종교가 진리가 아니라 죽음이 될 수 있겠고 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계몽주의가 나타나요.
믿음이 아닌 이성으로 세상을 끌고 나가야 한다는 사상이 일어나고 반기독교적 정서가 나타나게 되었어요.
순수한 종교개혁이 돈·권력과 결부되면서 종교를 더 배척하는 결과를 낳았어요.
하지만 종교개혁의 사상은 살아남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성찬식에 대한 다른 해석(굿 위너스 자료)]
1) 천주교에서는 성찬식 때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을 화체설(化體說)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찬이 정당한 형식에 따라 정당한 의도로 집행되면 실제로 은혜를 끼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런 것을 전혀 가르치지 않습니다.
2) 루터교회에서는 성찬식 때 빵과 포도주는 변하지 않고 있지만 그 안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함께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을 공재설(共在說)이라고 합니다.
루터는 그리스도가 편재한다(두루 퍼져 있다)는 생각으로 이런 주장을 한 것 같습니다.
3) 칼뱅은 성찬식 때 빵과 포도주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영적으로 함께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을 영적 임재설(靈的臨在說)이라고 합니다.
이 경우 성령님의 역사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단순히 떡과 포도주에 참여하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 때문에 참여자가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4) 츠빙글리는 성찬식의 빵과 포도주는 오직 상징적인 의미만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을 상징설(象徵說) 또는 기념설(記念說)이라고 합니다.
이 경우 성찬은 메시지의 역할만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만 간단히 정리하려고 했는데, 시대상황과 루터와 칼뱅 이외에 많은 종교개혁가들을 만나게 되고 불행한 전쟁도 알아본 시간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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