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1-4
사람은 언제 무너지는가? / 김영주 목사
1. 무너진 두 사람
오늘 말씀은 대조적으로 무너지는 두 사람을 보여줍니다. 한 사람은 이세벨이고 또 한 사람은 엘리야입니다. 이세벨은 회개할 수 있을 때 회개하지 않고, 분노함으로 후에 비참하게 죽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엘리야는 위대한 갈멜산 승리 후 무너지게 됩니다. 대개 사람들이 무너질 때는 이 두 가지 케이스 중의 하나에 해당되지 않나 생각됩니다. 먼저 이세벨을 보시겠습니다.
1절)“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아합 왕은 갈멜산에서 되어진 모든 일을 집에 가서 그 아내, 이세벨에게 말합니다. 이세벨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바알 신의 제사장의 딸입니다. 바알 신앙을 이스라엘에 전파했던 선구자입니다. 이스라엘 온 땅에 바알 신전을 세우고, 제사장들을 세우고, 바알의 부인 신 아세라 신전을 세우고 아주 열심히 일했던 사람입니다. 평생의 공을 들였는데 이런 수고가 갈멜산에서 벌어진 바알 제사장들과 엘리야 한 사람의 전투로 한 순간에 무너져버렸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제사장 850명이 한 날에 죽임을 당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바알 신앙에서 하나님 신앙으로 돌아섰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만이 참 신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들이 너무 많이 나왔습니다. 그 증거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➀그렇게 찾아도 보이지 않던 엘리야가 스스로 나타난 것
➁하나님이 엘리야를 숨기고, 까마귀 통해 삼년간 먹이신 것
➂바알과 아세라 제사장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예배하고, 제사했으나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것
➃엘리야가 기도 했을 때, 하늘에서 불 내린 것
➄백성들이 바알과 아세라 제사장을 전부 죽인 것
➅엘리야의 기도 응답으로- 비 온 것
➆백성들이 바알 신앙에서 하나님 신앙으로 돌이키게 된 것
➇엘리야가 아합의 마차보다 앞서 달린 것
이 정도 얘기를 들었다면 정상적인 경우 어떤 반응이 나올까요? “그랬습니까? 놀랍네! 우리가 잘못 믿었네, 하나님은 참 신이시네. 돌아서야지.”라고 해야 합니다. 너무나 명백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예)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지역에 가서 전도 방법-
마을 가서 병든 사람 나오라 하고 예수이름으로 치유 기도하면 거의 다 낫는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 하나님이 더 능력 있는 신이구나 하면서 다 믿는답니다. 우상들은 병 고침, 축귀를 해 본 일이 없습니다. 당연히 참 신이 아닙니다.
이렇게 깨닫고 돌아서면 희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세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2절)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오히려 엘리야에게 사신을 보내 내일 이 맘 때 쯤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협박하고 있습니다. 참 대단한 고집입니다.
왜 오늘 죽이지 내일까지 미뤘을까요?
1)오늘은 분위기가 아니니 손을 못 댄다는 것입니다.
이세벨도 조심스러웠을 것입니다. 아니 사실은 떨고 있습니다.
2)분위기가 조금 진정된 뒤에 죽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일 이맘때라고 했습니다. 죽이려는 맘보다는 협박용으로 한 것이라 알 수 있습니다. 정 죽이고자 한다면 바로 그날 자객을 보내 죽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세벨도 은근히 겁이 난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주목할 것은 엘리야의 반응입니다. 엘리야의 믿음이 정상적일 때, 이런 소리를 들으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그래? 너 봤지? 너도 죽어봐라”
아니면 “내 생명을 건들기 전에 네가 먼저 죽을 것이다.”
또는 “ 너도 한번 붙어보자! 나와라! 갈멜산으로 와라!” 고 해야 하는 게 당연한 반응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하늘에서 불을 내리고, 엄청난 기적들을 행하셨는데 뭐가 두렵겠습니까? 그것도 한참 지난 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 있었던 사건입니다. 얼마나 생생하겠습니까? 그런데 엘리야는 이렇게 당당하게 반응하지 못합니다.
2. 지금 이세벨은 뭐하고 있는 겁니까?
하나님을 대적하기로 했습니다.
영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일을 인간 엘리야가 한 것으로 봤습니다. 그 뒤에 하나님이 있다는 생각을 못 했습니다. 하나님 보지 않고 사람 엘리야만 보았습니다.
이 순간이 이세벨이 돌이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회개하면 하나님이 용서해 주십니다. 하나님 믿고 돌아서면 살 수 있습니다. 회개하는 자는 소망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도전하는 자는 끝이 온 것입니다. 마음이 찔릴 때 회개하고 돌아서는 자는 소망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화내면서 분노하는 사람은 소망이 없습니다. 똑 같은 말씀을 들어도 속으로 분노하면서 듣는 사람 있고, 찔림으로 아파하면서 다시는 그러지 말아햐지 하면서 듣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세벨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화를 냅니다. 깨달을 기회가 없어서 못 한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기회가 있었으나 마음이 강퍅해서 못 한 것입니다. 이미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대세가 기울었습니다. 하나님이 참을 만큼 참아주신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참 신인 것이 여러 가지로 증명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고, 엘리야를 잡아 죽이고 바알과 아세라 퍼뜨리는 것이 자기 사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상적으로 사고, 판단, 분별을 못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어리석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이세벨이 어둠의 영에 잡혀 있는 것입니다. 어둠의 영이 이세벨의 생각을 주관해서 어리석은 것을 진리처럼 믿고 붙들게 하는 것입니다.
예)어둠의 영, 이 세상 신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분별력, 판단력, 결단력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그 영들의 노예가 되게 합니다.
(고후4:3~4)“3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바로도 그랬습니다. 애굽에 재앙이 계속해서 내리는데도 아직도 하나님을 대적하고 모세의 요구사항을 들어주려 안 합니다. 오죽해야 신하들이 나서서 조언을 해주겠습니까?
(출10:7)바로의 신하들이 그에게 말하되 어느 때까지 이 사람이 우리의 함정이 되리이까 그 사람들을 보내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소서 왕은 아직도 애굽이 망한 줄을 알지 못하시나이까 하고“
바로는 아직도 이 나라가 망한 줄 알지 못했습니다.
사람들 안에는 자기가 세운 견고한 틀이 있습니다. 이 사상, 철학, 논리의 틀 때문에 갇혀 버립니다.
예)전통적인 가부장적인 한국 남자들은 몇 가지 틀을 가지고 계신 분이 있습니다. ‘남자는 월급만 갖다 주면 된다. 남자는 집에서 말을 적게 해야 한다. 울면 안 된다. 부엌에 드나들면 안 된다.’ 이러면 부부대화가 안 됩니다.
지금 이세벨은 어둠의 영이 심어 논 생각에 잡혀있습니다. 자기 의지를 가지고 결단하거나 하나님 앞에 새롭게 살거나 할 힘이 없습니다. 지금은 엘리야를 죽이려 할 때가 아니라 회개하고 돌아서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바알 신앙을 전파하는 것이 자기 사명이라 여겼습니다. 이 사명 감당하다 자기가 죽는데도 그걸 모릅니다.
이런 죽음은 영광이 아니라, 개죽음입니다.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이세벨이 치우쳤을까요? 옆에서 진정한 충고를 해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 자기편이요, 자기 말만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 밖에 몰랐습니다. 남편 아합도 그런 말을 못 했습니다. 그러니 자기 생각이 법이요, 진리라고 믿고 있다가 죽는 것입니다.
3. 엘리야의 반응(3~4)
갈멜산에서 기도하던 엘리야는 믿음으로 무장한 겁을 모르는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세벨의 내일 내가 네 생명을 찾겠다. 이 말 한마디에 너무 쉽게 무너져 버립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3절)“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엘리야는 형편, 상황, 현실을 봤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믿음으로만 나왔을 때는 상황, 형편이 문제가 안 되었습니다. 오히려 상황이 안 좋은 것이 더 즐겁습니다.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기회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승리 후, 하나님을 바라보던 시선을 놓치고, 주어진 형편을 보니 겁이 더럭 나고 두려움이 엄습해왔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약한 존재입니다. 믿음의 시선을 놓치면 그냥 넘어지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는 주로 언제였습니까? 기도할 때였습니다.
(왕상18:42~43)“42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43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쪽을 바라보라 그가 올라가 바라보고 말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이르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그 때는 담대했습니다. 그는 기도 중 아무런 사인, 증거가 없어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상황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환에게 혹시 바다 저쪽에서 구름이 떠오르는지 7번이나 다시 가라고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보통 확신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여러분, 몇 번 기도해도 아무런 가능성, 징조, 사인이 없는데도 계속 할 수 있습니까? 7번씩이나 다시 확인하라 할 수 있겠습니까?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러던 엘리야도 하나님을 놓치고, 형편을 바라보는 순간 상황이 너무 크게 보였습니다. 이세벨이 너무 커 보였습니다. 넘지 못할 산 같았습니다. 그 손에 걸리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붙어볼 생각도 못하고 도망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점 많고 연약한 인간들을 불러서 쓰십니다. 그래서 쓰임 받고자하면 자기 한계가 아니라 하나님만 바라보는 연습을 늘 해야 합니다. 어느 순간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면 사람 안에 숨어있던 문제들이 총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엘리야가 그랬습니다.
1)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그동안 엘리야의 생명은 하나님의 보호 안에 있었습니다. 이세벨, 아합이 그렇게 찾아도 못 찾았습니다. 몇 년 간 그렇게 보호 받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에 대한 믿음이 떨어졌습니다. 하나님 대신 형편을 바라보는 순간,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앞날이 불안해 진 것입니다.
이세벨이 협박에 하나님은 안 보이고, 믿음은 안 생기고, 두려움만 찾아 왔습니다. 그러니 이제 내 생명은 내가 책임져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내가 내 생명을 책임질 수 없고, 장래 어떤 일이 있을지 알지도 못 합니다. 또 책임진다고 해도 해답이 없습니다.
* 믿음 없는 사람들의 특징: 세상 모든 문제를 내가 다 짊어지고 삽니다.
① 어린 자녀들- 앞으로 어떻게 사나?
② 직장- 은퇴하면, 그만 두면 어떻게 사나?
③ 자녀들- 사춘기 때는 어떻게 감당하나?
④ 나이 들고, 힘없으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일찍 죽는 게 낫겠다.
2) 도망갔습니다.
그것도 국경을 넘어 남 유다로 도망갔습니다. 조금 전 그 위대한 갈멜산의 승리의 선지자는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3) 사명의 땅을 떠났습니다.
(3절 中)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하나님이 있으란 곳이 아니라 내가 있고 싶은 곳을 찾아 떠났습니다.
4) 사람 만나기 싫었습니다.
(3절 하~4절 上)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5) 죽기를 기도했습니다.
(4절 中)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6) 열등감이 도졌습니다.
(4절 下)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사람이 위대해지거나 초라해지지는 것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과 교통하고 있느냐 아니면 하나님은 잊고 현실, 형편만 바라보느냐의 차이입니다.
예)베드로, 바람과 풍랑을 바라볼 때 무서워 빠져 들어갔습니다.
마14: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14: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14: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의심, 두려움, 염려 이런 것들은 우리가 하나님 아닌 상황만 바라보고 있을 때 공통적으로 찾아오는 것들입니다. 이것들의 친구들은 불면증, 고민, 우울, 좌절, 무능력, 의기소침 이런 것들입니다. 환경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에게 우리 힘으로 감당할만한 싸움을 싸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항상 우리 힘으로는 감당이 안 될 것 같은 싸움만 하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봐야하고, 믿음으로만 나가야 합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같은 것이 우리 인생에 즐비하게 놓여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만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 놓치면 늘 무너집니다.
4. 승리하려면?
우리가 나의 한계를 극복하고 승리하려면 하나님만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늘 기도하십시오.
2) 성경을 수시로 읽으십시오.
읽으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초점 맞추어서 읽으십시오.
3) 과거의 하나님의 응답, 축복, 일 하심을 추억하십시오. (일기장, 기도 노트)
4) 입술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고백하고 시인하십시오.
5) 다른 사람들의 간증 집을 읽으십시오.
6)믿음의 사람들과 교제하십시오.
혼자 숨지 마십시오. 이때 잠수타지 말고 사람만나고 교제하고 대화해야 합니다. 권면 요청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