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후 3
“전능하신 마제린이여. 당신의 권능에 비오니, 당신의 권능을 보이시어 어둠 속에 빛을 내리소서. 시력회복(Cure Blindness).”
의자에 앉아 신성력을 발동시킨 유이리의 손은 언제나처럼 밝게 빛을 뿜었다. 유이리의 손에서 뿜어진 빛은 바로 앞에 앉아있는 소년의 얼굴로 빨려들었다. 초점이 잡히지 않은 채, 먼 곳을 멍하니 바라보는 듯한 소년의 눈동자는 이내 사물을 인식했다.
“천.”
유이리의 말이 끝나자. 소년의 뒤에 서있던 남궁빙아가 하얀 천으로 소년의 눈을 감쌌다. 소년은 순간적으로 보았던 빛이 흐려지자 바둥거렸지만 빙아의 힘을 이길 수는 없다.
“지금은 참으렴. 오랫동안 어둠에 익숙해 있었기에 지금 밝은 빛을 보면 이 누나도 두 번 다시 고칠 수가 없단다.”
유이리의 말에 소년의 움직임은 멈췄다. 그리고 뭔가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일단은 천천히 익숙해지는 것이 필요해. 적어도 한 달 간은 낮에 헝겊을 푸는 것을 피하렴. 저녁때 달과 별을 보는 것은 괜찮아. 하지만 호롱불을 바라보는 것도 좋지는 않단다. 한 달이 지나면 헝겊을 지금 감은 것의 반으로 줄이고, 두 달이 되면 또 그 반으로, 그리고 세 달 째에는 완전히 풀어도 좋을 거야.”
“고맙습니다. 신녀님 정말로 고맙습니다.”
옆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소년의 어미는 소년의 얼굴이 자신을 바라보며 “엄마.”라는 말을 하자 이마를 땅에 대며 유이리에게 큰절을 올렸다. 여인이 큰 절을 올리는 바닥에 몇 개의 물방울이 떨어진다.
유이리는 미소 띤 얼굴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한마디 충고를 잊지 않았다.
“어린 아이임에도 침착하고, 기다릴 줄 아는 아이입니다. 이후 교육에 따라 크게 운명이 바뀔 수 있으니 좋은 스승을 찾아보십시오. 언젠가 이 아이의 재능을 키워줄 사람이 있을 겁니다.”
신관들은 일반적으로 신의 신탁을 받고, 신의 의지를 행하기 위한 그릇이다. 신의 힘을 받다 보면 자연스럽게 신에 가까워지고, 특이한 힘을 얻는 경우가 있다. 각성이라는 말을 사용하기에는 좀 부자연스러울 수도 있지만 가끔씩 타인의 운명이나 미래를 볼 수도 있다.
금방 유이리가 한 말은 그런 의미의 일종의 예언이다. 물론 유이리는 그 이상을 말하지 않았다. 자신의 일은 여기까지. 그 이후 그 운명을 잡느냐 놓치느냐는 소년에게 달린 일. 싸울 방향을 인도할 수는 있어도 대신 싸워줄 수는 없다.
두 모자가 나가고, 유이리는 숨을 깊이 몰아쉬었다. 시력회복은 대지의 모신 가도란의 사제라면 쉽게 행할 수 있는 신성주문이지만 전쟁과 전투를 주관하는 마제린의 사제에게는 높은 정신력의 소비를 가져오는 주문이다. 성지도 아닌 일반적인 곳에서 신성력의 소비가 많은 권능의 행사는 시전자를 쉽게 지치게 한다. 어느새 유이리의 옷은 땀으로 젖어있었다.
염무란(閻舞瀾). 의선(醫仙) 염준호(閻俊昊)의 증손녀인 그녀는 의선당의 의원 중 하나이다. 그러나 다른 형제자매들과 다르게 묘할 정도로 손재주가 없어, 침술이나 탕약을 만드는 등에 극악의 능력을 발휘한다. 다만 환자의 상세를 살피는 것과 분석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나 실제적인 환자의 치료활동에는 참여할 수 없는 반쪽짜리 의원이다.
그런 그녀에게 휘수신녀의 소문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은 차라리 장강의 물이 바다로 빠져나가지 말라고 하는 것과 같다.
침도, 탕약도 없이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으로 환자를 치료하는 신비미녀.
물론 수없이 과장되었을 내용을 적당히 감한다 쳐도, 조장군가 손녀딸의 얼굴에 있는 상처를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한 것이라던가, 전투 중에 독화살에 맞은 환자를 바로 전투에 참가할 수 있게 치료한 내용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후자의 내용이야 증인만이 존재할 뿐 증거가 없으니 과장된 소문으로 치부해도 그만이지만 전자의 내용은 하남성에 증거가 백주 대낮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니 믿을 수밖에 없다. 의선당에도 조장군가의 의뢰가 들어왔었기에 분명히 기억을 하고 있다. 상처는 아물게 할 수 있다. 그러나 흉터는 어쩔 수 없다. 상처가 생기기 전이라면 최대한 흉터가 남지 않게 노력은 할 수 있을지언정 생긴 흉터를 어떻게 할 수는 없다.
직접 눈으로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군부 고관 댁서 금방 들통이 날 거짓말을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낙양에 있는 다른 고위 관료들의 자제들은 자신들이 모르던 숨겨진 미녀의 등장에 모두들 아까워했고, 실제로 혼담이 오가다 냅다 차버렸던 몇몇 공자들은 땅을 치며 후회를 하고 있다는 소문대로라면 거짓으로 볼 수가 없다.
소문속의 인물을 만나보기 위해 증조부를 조르고 졸라 낙양으로 떠날 준비 했다.
그러나 이미 낙양을 떠났다는 하오문의 정보가 있었기에 목적지를 바꿨다. 하오문. 개방에 버금가는 정보력을 지닌 문파. 문파라 부르기는 곤란하지만 이들의 정보력을 능가하는 단체는 개방이 유일하다.
이런 정보단체를 모두들 손에 넣고자 하지만 지난 백년간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우선 총수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이름도, 나이도, 성별도. 단지 있을 것이라는 추측만을 하고 있다. 또한 구성원들의 신분도 문제가 된다. 기녀(妓女), 마부(馬夫), 도수(盜手), 투전꾼. 가장 밑바닥의 일원이기에 이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명문정파로써 곤란하다. 그리고 설사 하부단체로 넣으려 해도, 이러한 강대한 힘을 한문파가 손에 넣는 것을 보고만 있을리는 만무하다.
결국 하오문은 문파들의 알력과 이런저런 이유로 스스로의 주체성을 가진 독립된 세력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개방과 비슷한 경로로 손에 넣은 하급 정보에서부터,
전혀 다른 경로를 통해 접수되는 고급 정보까지. 일부는 개방보다 하오문의 정보를 더 신뢰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의선당은 하오문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밑바닥의 인생이니 만큼 수많은 병을 안고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의원에게 보일 수 있을 정도의 돈이 이들에게 있을리 만무하다. 의선당은 이들을 치료해주며 병아리 의원들을 현장실습 시킨다. 그러면서 의원으로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나 이제껏 알지 못했던 세상에 대해 경험을 시킨다.
물론 하오문 측에서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의원에게 자신의 병을 보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들은 만족을 한다. 그렇기에 특별한 정보를 의선당측에 제공하는 등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주면서 의선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을 한다. 휘수신녀에 대한 정보 역시 이런 이유로 얻게 된 정보다.
낙양으로 출발을 했다면 헛물만 켰을 상황. 그러나 보고서의 끝에는 목적지까지 친절하게 표기되어 있었다. 사천성에 있는 사천당가. 그래서 사천으로 향하던 길에 이들을 만나게 되었고, 실제로 휘수신녀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비한 기운이 느껴지는 빛. 아물어 가는 상처와 멍. 염무란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오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했던가?
휘수신녀의 위명은 이곳에까지 퍼져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환자들이 객점으로 몰려들었다.
유이리의 체력을 걱정하는 남궁상욱은 이를 막고자 했지만, 똥마려운 강아지 마냥 바라보는 민초들과 가능한 치료를 해주고 싶어 하는 유이리의 의견을 무조건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내놓은 절충안이 가장 심각한 환자 열 명만의 치료. 몰려든 환자의 수는 기백. 물론 단순한 감기서부터, 요통, 관절염까지 다양한 환자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을 모두 치료하려 했다가는 또 정신을 잃을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상황. 이를 막기 위한 최대한의 양보였다. 그리고 그 외의 환자들은 당화연이 봐주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몰려든 환자들은 원망의 소리를 높였지만 유이리 일행이 모두 무림인이라는 것과 사천당가의 소가주가 있다는 점, 그리고 곽명신의 한마디에 수그러들었다.
“여기 있는 낭자가 너희들을 치료해 줘야 하는 의무라도 있나?”
없다. 돈을 지불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들에게 받아야 할 빚이 있는 것도 아니다. 유이리가 이들을 치료해주는 것은 그저 유이리의 선행일 뿐이지, 꼭 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주변 정리가 이뤄지자 유이리는 자신이 치료를 할 환자들의 원칙을 정했다.
가난하여 의원에게 병을 보이기 어려울 것, 이곳의 의원들로는 치료가 불가능 또는 어려운 병, 가능한 어린환자일 것.
운이 좋게도 객점 주인의 딸이 이 기준에 들어갔기에 이후 환자의 선별을 맡겼다. 객점주인의 딸은 고관의 마차에 치인후로 왼팔을 움직이지 못했다. 유이리가 보기에는 팔을 움직이는 근육이 끊겼다. 팔이 괴사(壞死)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다행이 다른 부분은 큰 문제가 없었기에 쉽게 치료했다.
그 외에도 몇몇의 환자를 살폈지만 쉽사리.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너무도 쉽게 완치를 시켰다. 그러나 상욱이 보기에는 전혀 아니었다. 무리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남궁상욱은 유이리가 힘들어하는 것을 보며 이를 갈며 환자들을 원망했지만 일단 마지막 남은 환자까지는 치료하기로 했으니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반신 마비의 소녀를 끝으로 유이리가 치료하기로 한 숫자가 끝났다. 유이리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또다시 현기증을 일으키며 비틀거렸다. 남궁상욱은 급히 유이리를 부축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유이리를 바라보던 사람들은 유이리에게 손을 내밀었으나 남궁상욱의 살기어린 시선에 뒤로 물러났다.
유이리는 남궁상욱에게 손짓을 해서 그냥 이 자리에서 쉬기를 원했다. 몸에 힘이 빠진 상황에서 움직인다는 것은 현명한 행동이 못된다. 치료는 끝났지만 환자들은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객점 주변을 맴돌았다.
“끙~~~.”
객점 바닥 한구석에 널브러져 있던 물체가 꿈틀거렸다. 사람들의 시선은 어느새 그곳으로 집중됐다. 그리고 그중 한명은 얼굴이 파리해졌다. 부스스 일어난 물체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오른손으로 왼 손바닥을 내리치며 외쳤다.
“……. 남궁상민! 이 개자식!”
슬금슬금 아무도 몰래 객점 밖으로 나가려던 상민은 깜짝 놀라며 슬며시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여수라(女修羅)가 상민을 노려보고 있었다. 상민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저기 말이지.”
“이 자식! 여자의 적! 네놈이 염매에게…….”
“왁!!! 악 악 악!!!!!!”
모용영련이 분노어린 표정으로 뭐라 말을 하려 하자 상민은 정색을 하며 악악거려 모용영련의 말을 묻어버렸다. 그리고 놀란 표정의 모용영련의 뒤로 있는 유이리의 안색을 살폈다. 다행이 유이리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상민에게 다시 정신을 차린 모용영련이 천천히 다가갔다. 그녀의 온 몸에서는 살기가 흘러 나왔고, 주변에는 묘한 기류의 흐름이 발생했다. 상민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아차 했다가는 유이리에게 막 되먹은 놈으로 비춰질 우려가 있다.
단지 자신은 남아로써 풍류를 즐겼을 뿐이다. 그러나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여인들이 가끔 존재를 한다. 아주 가끔. 그러나 매우 유감스럽게도 유이리는 이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부류에 들 가능성이 높다. 설사 아니라도 해도 쓸데없는 모험은 피하는 것이 좋다.
“여자의 적?”
유이리는 묘한 어휘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욱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보나마나다. 분명 어디서 여자를 건들다가 문제가 발생한 거다. 모용영련이라는 여자를 직접 건드렸을 리는 없고, 확률상 저 여자의 동생이나 언니임에 분명하다. 아니면 비슷한 존재의 여인이거나.
상욱이 혀를 차고 있을 무렵, 상민의 머리는 필사적으로 손익계산서를 짜고 있었다. 이 여자가 원하는 것은 자신과의 대련이다. 싸워주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다만 이길 경우 예전처럼 거머리마냥 달라붙을 것이고, 진다는 것은 자신이나 가문의 자존심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대로 피하려 하다가 이런저런 일을 떠벌리기라도 한다면 얻은지 얼마 되지 않은 동생과 형수에게 안 좋은 이미지로 비쳐질 우려가 컸다.
“좋아. 네 소원을 들어줄게.”
“정말?”
모용영련은 불신에 가득한 얼굴로 상민을 노려보았다. 객점에 있는 유이리 일행은 호기심과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상민을 주시했다.
과연 두 사람의 관계는? 그리고 소원이라는 것은 무엇?
상민의 정체에 대해 아는 상욱이라던가 이현진, 당세보는 뻔한 상황이지만 의외의 반전을 기대했고, 상민에 대해 소문만을 들어온 곽명신, 위연린 등은 호기심에 가득한 표정으로, 그리고 상민의 본성에 대해 전혀 모르는 유이리나 남궁빙아는 지금의 상황을 도저히 알 수가 없어 누군가 설명을 해주기를 바랐으나 모두들 눈앞의 상황에 집중하느라 정신이 없는 상황이다.
상민은 있는 대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전력을 다해서 비무에 응해주마. 되었냐?”
“좋아.”
상민의 말에 모용영련의 얼굴은 순식간에 밝아졌다. 방금 전까지 살기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의 변화다.
“단. 조건이 있다.”
모용영련의 얼굴이 다시 험악해 졌다. 다만 하지 않겠다는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좀 전에 비해서는 덜 살기가 피어났다.
“비무는 단판승부. 판정은 내 일행이 본다. 그러나 편파판정에 대해 걱정하지는 말 것, 형이라는 사람은 이런 승부에서는 철저한 중립을 취하니까. 그리고 이후로는 또 엉겨 붙지 말 것.”
뭔가 어감이 불쾌감을 불러 일으켰지만 큰 문제는 없다. 모용영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민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하나의 고비는 넘겼다. 이제 하나의 고비만 더 넘기면 된다. 그러나 이 오소리가 쉽사리 응할지는 고민이다. 다만 달콤한 미끼를 던짐으로써 유인해 내면 된다.
-듣기만 해라. 다른 조건은 저번에 있었던 일을 두 번 다시 입에 담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 것.
상민의 전음을 들은 모용영련의 얼굴이 다시 밝게 피었다. 왠지는 모르지만 약점을 잡은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전음에 고민에 빠졌다.
-대신 이 조건을 들어줄 경우 네 구미에 맞는 정보를 주마.
확실한 작은 것 하나와 덤, 매우 낮은 확률의 큰 것. 그러나 따지고 보면 상민과의 대련은 작은 것이 아니다. 모용영련의 별호는 월향혈화(月香血花). 또 다른 별호로 권후(拳后)라 불리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권각술을 쓰는 여인이 없기에 그렇게 불릴 뿐이다.
상민은 현 무림에서 보기 드문 같은 권각술을 쓰는 무인. 언제나 검만을 사용하는, 실력도 없는 주제에 자신이 여자라고 깔보는 수준 낮은 애송이들과는 다른. 싸우는 순간만큼은 진지한 무인. 모용영련의 저울은 이미 기울어졌다.
고개를 끄덕이는 모용영련.
상민은 가슴을 쓸어 내렸다. 다행이 미끼를 물었다. 그리고 덤으로 앞으로 자신에게 날아올 화살을 돌릴 수도 있다. 앞으로 이 벽력탄에게 시달릴 몇 사람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했지만 미안한 것은 미안한 것이고, 우선은 자신이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
-내 일행 중에 육룡 중 셋이, 삼봉 중 하나가 있다.
상민의 말에 모용영련의 관심은 증폭되었다. 범상치 않은 실력을 지녔으리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자신과 같은 육룡사봉 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상민의 전음은 계속되었다.
-내 형님이야 알 테고, 매화가 그려진 의복을 입은 얌전하게 생긴 녀석이 화산검룡 이현진, 까만 옷을 입고 건들거리고 있는 게 청아흑랑 곽명신, 그리고 너와 싸웠던 아미제자가 백봉황 위연린. 그 외에도 사천당가의 소가주이신 당세보 형님도 계시니 잘만 하면 비무 상대는 충분히 확보할 수 있을 거다.
상상 이상의 정보. 뭐 조금만 알아본다면 못 알아낼 사실도 아니지만 그래도 고마운 것은 사실이다. 모용영련은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며 자세를 낮췄다.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고 약속대로 대련을 할 차례.
상대와 맨몸을 부딪치는 긴장감 넘치는 싸움. 목숨을 건 진정한 싸움은 아니지만 그래도 간만에 느껴보는 긴장감에 온몸이 짜릿짜릿했다. 넘치는 투기에 객점내의 모두는 긴장했다. 그리고 둘이 동시에 기(氣)를 발출하려는 찰나.
“식사 준비 되었습니다.”
눈치가 없는 건지, 고단수인건지. 객점주인의 한마디에 남궁상민과 모용영련은 몸에 힘이 빠지며 기가 역류할 뻔 했다. 상민은 비틀거리는 몸을 가다듬으며 모용영련을 보았다.
“먹고 할까?”
모용영련 역시 힘이 빠졌는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침묵에 휩싸인 객점에 주방에서 고개를 내민 여주인은 눈만 껌뻑였고, 킥킥거리는 당세보의 웃음소리가 객점에 울렸다.
권후 4
저녁식사는 푸짐했다. 객점 여주인은 딸을 고쳐준 것에 대해 조그만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 저녁식사에 갖은 재료와 조미료를 가지고 모든 정성을 기울여 만들었다.
향긋한 냄새와 어울린 부드러운 송아지 고기의 육질은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유이리는 눈을 감은 채 맛을 음미했다. 여러 지방을 다녔고, 음식을 접해봤지만 그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맛이 좋았다. 다른 사람들 역시 연신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음식을 먹었다.
유이리 일행은 배에 구멍이라도 난 듯 연신 음식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객점 여주인은 계속해서 음식을 날랐다.
걸신들린 듯 먹어대던 유이리 일행은 이윽고 만족한 듯 배를 두드리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여주인은 쟁반에 차를 담아왔다. 차(茶) 역시 이런 중급 객점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향이 좋다.
“가끔 높으신 분들이 묵으실 때가 있으셔서요.”
여주인은 별일 아니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저 미소로 대답하기에는 대단한 고가품이다. 이런 중급객점에서 취급하기에는 부담이 큰 물품이지만, 여주인은 간단히 내놓았다. 그러나 유이리 역시 큰 문제없다는 듯 고맙게 받았다.
“고맙습니다. 향이 참 좋네요.”
야유. 신녀님께 너무 보잘 것 없는 것이 아닌가 걱정스럽네요.”
“아니요. 가치는 정성을 따르지 못합니다. 정성이 담긴 대접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있습니다.”
객점 여주인은 유이리의 말에 가당치도 않다는 듯 손을 내저었지만, 이내 유이리의 칭찬을 받아들이고 다시 조리실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객점에는 휘수신녀의 모습을 보고자 하는 구경꾼들로 가득 찼지만 아무도 없는 듯 조용했다. 객점 안은 가끔씩 들리는 침 넘어가는 소리와 향긋한 차향으로 가득 찼다.
드르륵!
차를 다 마신 모용화련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남궁상민을 노려본다.
“소화도 대충 되었을 테니 시작하지.”
“그렇군.”
상민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덧 상민의 몸에서는 장난기 많은 기운은 사라지고, 팽팽한 긴장감만이 맴돌았다.
“따라오라고. 내가 봐둔 곳이 하나 있으니까.”
모용영련은 대답도 듣지 않고 객점 밖으로 나섰다. 상민을 비롯한 유이리 일행도 그 뒤를 따랐다. 식사를 하면서 이미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비무의 공증과 배심원의 역할. 일반적으로 타 문파끼리의 대전이나 비무를 할 경우 공식적으로 세 명의 공증을 두게 되어 있다. 양측에서 한명씩 그리고 중립문파에서 한명.
비겁한 암습과 음모를 막고 정정당당한 싸움을 위한 제도로, 이것이 지켜지는 경우는 매우 드물지만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는 지켜야 하는 무림맹의 규정중 하나다.
모용영련은 상민과의 대전에서 곽명신을 자기 측의, 당세보는 중립문파의 공증인이 되어주기를 요청했다. 곽명신과 당세보는 모두 남궁상민의 일행으로 만에 하나 문제가 생겼을 경우 모용영련에게 매우 불리하게 작용할 우려가 컸다. 아니 그 이전에 대련 자체도 크게 불리할 수가 있다. 그러나 모용영련은 그런 사항은 전혀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듯 당당하게 요청했다.
그 당당한 모습에 곽명신과 당세보는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모용영련은 유이리 일행이 저녁식사를 하는데도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위연린은 매우 불쾌한 듯 으르렁댔지만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친근하게 다가오는 모용영련을 혼자서만 내칠 수는 없었다. 한 끼의 식사를 하면서 모용영련은 자연스럽게 유이리 일행에 녹아들었다.
유이리 일행도 모용영련이 그리 싫지는 않았다. 다만 입이 좀 거칠고, 투박한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 나름대로 개성이고, 특징이라고 생각하면 문제될 일도 없다. 다만 한 가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의문사항이 있다. 모용영련의 옆에 꼭 붙어 있는 여인. 염무란.
모용영련은 여자치고는 훤칠한 키에 짧은 머리를 하고 있다. 거기에 영웅건을 두르고 남자들이 입는 경장무복을 입고 있어 얼핏 보기에는 남자로 착각하기 십상이다. 그런 모용영련의 품에 가냘픈 체구의 염무란이 자리하고 있으니, 연인(戀人)사이라 말해도 지장이 없어 보였다.
모두들 묻고자 하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필사적으로 참아 넘겼다. 어쩌면 두 사람에게 있어 역린(逆鱗)일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함부로 할 수는 없다. 함부로 상대의 사적인 것을 물을 수는 없는 일. 그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모용영련을 따라 나간 곳은 객점의 뒷마당이다. 사방이 건물로 둘러쳐져 있어 외부에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있다. 넓다고 하기는 힘들지만 그런대로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 다만 일반 중소세가의 연무장만큼도 안 되는 크기이기에 운신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모용영련이 마당은 한 지점에 서자 상민은 그 정면에 섰다. 당세보와 곽명신은 가상의 연무장 경계, 꼭지 점 부분에 위치했다. 다른 사람들은 둘에 방해되지 않게 멀찍이 물러났다. 마지막으로 상욱이 두 사람에게 선언했다.
“각자의 실력과 그간의 수행의 결과를 겨누는 장으로. 정정당당하고, 자기 자신에게 후회가 없는 비무가 되기를.”
말을 마친 상욱이 유이리들을 보호하기 위해 뒤로 물러서자 둘은 상대를 향해 포권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천천히 한발을 뒤로 물러서며 기수식을 취했다. 모용영련은 자세를 낮추며 언제든 상대에게 파고들 준비를 갖춘데 반해, 상민은 왼손을 자연스럽게 앞으로 내밀며 몸의 균형을 유지했다.
둘 사이에는 강한 투기가 감돌았다.
“타럇!”
역시 먼저 움직인 것은 모용영련이다. 모용영련은 몸을 날리며 상민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강맹한 기세를 싣고 모용영련의 우권이 상민의 얼굴을 노렸다. 그러나 상민은 앞으로 내밀어진 왼손을 돌려 모용영련의 권을 흘렸다.
자신의 공격이 흘려질 것을 예상이라도 한 것일까? 모용영련은 몸의 균형을 오른 발로 잡으며 오른쪽으로 몸을 돌렸다. 원심력이 실린 왼발의 뒤꿈치가 상민을 향했다. 상민은 급히 상체를 숙이며 공격을 피해냈다. 숙여진 상민의 상체로 다시 한 번 돌려차기가 파고들었다. 상민은 양손을 십자로 교차시키며 모용영련의 공격을 막았다.
팍! 팍!
상민과 모용영련의 몸에서 강한 타격음이 울리며 뒤로 밀려났다. 동시 공격. 양측 다 방어를 해내기는 했지만 충격을 완전히 줄이지는 못했는지 팔이 부르르 떨렸다.
다시 한 번 모용영련이 움직였다. 똑같이 공격을 주고받고, 상대의 기를 방어해 냈지만 충격의 축적이나 회복에 있어 자신이 더 불리함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렇다면 현재의 기세를 몰아 더욱더 공세를 취하는 것이 유리했다.
이번의 공격은 조금 전에 비해 더욱 세밀하게 파고들었다. 오른발로 상대의 선축을 흔들며 연권을 날렸다. 그러나 상민의 선축은 허보로 모용영련의 하단 쓸기에도 균형을 잃지 않고, 뒤로 한걸음 물러서며 침착하게 막아냈다. 계속되는 실패에도 모용영련은 연계를 이었다.
상민은 우선 모용영련의 공세를 꺾는 것에 주력했다. 예전에 잠시 겨뤄본 바로는 모용영련은 지극히 공세적인 무인이다. 몸의 탄력과 원심력 등 몸의 움직임과 힘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는 초식을 사용한다. 여자로써 겪을 수밖에 없는 신체적 차이를 극복하는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의 또 다른 약점을 지닌다.
공격이 강맹해지면 강맹해질수록 과도한 심신의 소비를 가져온다. 온 몸을 사용하는 초식으로 속도와 힘의 차이를 줄인 만큼 체력소비도 늘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모용영련의 공격은 상상한 것 이상으로 강맹했다. 뼈가 울릴 정도의 충
격. 물론 틈새를 노린 공격을 하느라 몸의 균형이 흔들린 상태에서의 방어였다고는 하나 이 정도라면 쉽게 생각할 수 있을 수준이 아니다.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방어하기에 급급하다가 정타를 허용하고 나가떨어지기 십상이다.
게다가 한번의 공격을 주고받은 뒤, 자신의 반격에 주의를 하는 것인지 세밀하고 자잘한 공격을 이었다. 위력은 떨어지지만 빈틈이 줄어들고, 더욱 방어하기 어려워진 공격. 뭔가 타개책을 찾아야 했다. 빠르고 예리한 빈틈이 없는 공격. 그러나 그만큼 힘이 부족했다. 활로는 그곳에 있다.
모용영련의 선풍각을 상체를 뒤로 빼며 피해내자 쌍장이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기다리던 기회. 상민의 뇌아신권이 모용영련의 기를 파쇄(破碎)하며 날아들었다. 상대에 비해 힘과 내공이 앞서기에 가능한 기. 상대에 비해 힘과 내공이 앞서야 함은 기본이고, 상대의 기가 최고 위력을 발하기 전을 파고드는 예리함이 없이는 불가능한 묘기다.
상민의 일격에 모용영련의 몸은 크게 흔들리며 뒤로 물러났다. 힘과 내공에서 완벽한 우위를 보이고 있음을 알리는 일격. 상민의 일격은 모용영련의 정신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모용영련은 이를 악물고 재 공세를 이었다.
힘과 내공에서는 떨어진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었다. 그 차이는 속도와 기로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대의 기는 자신보다 앞섰다. 자신에게 남은 것은 속도뿐. 그나마도 확신할 수 없을뿐더러 속도의 이점을 살리기에는 연무장이 너무 좁았다. 헤픈 웃음의 바람기 많은 멍청한 남자라 생각을 했는데. 불리한 상황임에도 모용영련의 얼굴은 어디한군데 일그러진대가 없다. 오히려 웃음 띤 얼굴이 되어갔다.
일격으로 모용영련의 기를 꺾어놓은 뒤로 주도권은 남궁상민에게 넘어왔다. 주도권을 잡은 상민은 거세게 몰아쳤다. 승리가 손위에 올라탔다고 방심하는 녀석은 멍청이다. 승리의 여신은 변덕스럽기 이를 때 없다. 손에 쥐어서 주머니 안으로 넣을 때까지 자신의 것이 아니다. 방심해 놓고, 손에 다 넣었었다고 아쉬워해봐야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상대가 여자라고는 하나 지금은 서로의 주먹을 나누는 무인이다. 봐줄 이유도, 필요도 없다.
상민의 공격이 거세지자 모용영련의 공세역시 거칠어 졌다. 모용영련이 불리한 것은 변함이 없지만 일방적으로 밀리지는 않았다. 세 번의 공격을 받으면 적어도 두 번은 반격에 성공했다.
유이리는 두 사람의 대련을 숨을 죽이며 지켜봤다. 대련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의 몸에 축복의 권능을 시전 해놓았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그들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있다. 검을 든 상대끼리의 대전과는 또 다른 싸움.
검을 든 무인들끼리의 싸움도 속도감 있고 치열하지만, 권각술끼리의 대전은 그보다 한수 더했다. 두보에서 반보 사이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공방. 물론 때때로 거리를 벌리기는 하지만 대부분이 상대와 한보 전후에서 공방이 이뤄졌다. 한 번의 호흡사이에 셀 수 없을 정도의 허초와 실초의 공방이 지나간다. 부끄럽지만 유이리는 그들의 공방을 따라갈 수가 없다. 놀라운 무학. 유이리는 싸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모용영련은 선전했지만 슬슬 한계에 다다랐다. 속도도 힘도 처음과는 비교될 정도로 처졌다. 상민은 모용영련의 우장을 흘리며 왼발을 내딛었다. 자연스럽게 왼쪽 어께가 모용영련의 오른팔을 밀어내며 균형을 흔들었다. 상민은 틈을 주지 않고 왼손을 쳐 올렸다.
상민의 연격을 막기 위해 몸 앞으로 모아두었던 모용영련의 양손은 있어야 할 위치를 떠나 공중으로 띄워졌다. 상민은 오른손은 장으로 변화하며 모용영련의 복부에 자리했다. 그리고 앞으로 나가며 힘찬 진각. 상민의 절기 뇌아발경(雷牙發勁)이 모용영련의 내장을 휘저었다.
“쿠억!”
모용영련은 저녁으로 먹은 것을 한 움큼 토해내며 앞으로 무너졌다. 흐릿해지는 정신. 완벽한 패배다. 그럼에도 모용영련의 입은 미소를 띠고 있다.
과거 오대세가의 수위를 다툴 정도로 거대한 세력을 자랑하던 모용세가. 그러나 혈풍 때 북부와 동부의 흑도 연합의 기습을 온몸으로 막아내며 치유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입었다. 가주를 비롯한 좌우호법과 장로단의 전멸. 모용세가와 하북팽가가 벽이 되어 줌으로 무림맹은 혈마 여신우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싸움을 기점으로 모용세가는 끊임없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무공의 실전.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큼은 치명적이다. 약해진 세력은 다시 키우면 된다. 전사한 고수는 다시 길러내면 된다. 둘 다 시간만 있다면 얼마든지 되돌릴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위해서는 선결되는 것이 힘이다. 무림세가에게 있어서 힘은 무공. 무공을 실전한 무림세가에게는 어떠한 힘도 없다. 여타 문파들도 북쪽과 동쪽의 흑도문파를 막아준 모용세가에게 감사를 표했지만 다른 특별한 도움은 없었다.
옛 영화를 뒤로하고 그렇게 모용세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저 무기력 하게 주저앉지는 않았다. 다시 발돋움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 그 노력은 단기적인 성과를 보고 계획되지 않았다. 혼례를 통한 대외세력과의 결집. 여러 문파들과의 교류. 재능 있는 아이들의 유학과 교육을 통한 육성.
거대 세가로 가기 위해서는 특히 고수의 존재는 필수불가결의 존재다. 그랬기에모용세가는 가문의 모든 것을 걸고 고수를 육성해 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런 모용세가의 기대를 한 몸에 받게 된 것이 바로 모용영련.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다른 형제를 능가하는 오성으로 실력을 쑥쑥 키워 나갔다. 그러나 이런 필사적인 교육은 모용영련의 인생을 빼앗았다.
철이 들기 전부터의 가혹한 훈련. 어려서는 몰랐으나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자신이 다른 이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조금씩 느꼈다. 머리에 장신구를 달고, 연지를 바르며, 아름다운 옷은 입는 다른 세가의 여식들. 자신이 여자임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도 저렇게 아름답게 꾸며보고 싶었다. 아름다운 옷을 입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가혹한 구타와 훈련.
여자임을 잊으라는 부친. 여자임을 버리라는 조부. 그래. 여자임을 잊어주지. 그리고 여자임을 버려주지. 그리고 댁들이 원하는 대로 고수가 되어주지. 권각술의 고수가. 모용영련은 삐뚤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자임을 잊고 무공에만 매진했다. 그리고 권각술을 익혔다.
모용영련의 부친과 조부는 이상한 감이 들었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왠지는 모르지만 딸년이 무공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다만 권각술에 매진하고 있지만 어차피 만류귀종(萬流歸宗). 권각술은 모든 무공의 기초이니 만큼 이후 검술을 배우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저번의 일도 있고 하니 우선은 의욕을 가지고 있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좋으리라.
그러나 이는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미친 듯이 무공에 매진을 하다가 말없이 가출. 그리고 타 문파와의 비무. 복귀. 그리고 다시 무공에의 매진. 가출. 비무행.
끊임없는 시비와 싸움. 끊임없는 반복. 모용세가의 어른들은 점차 초조해 지기 시작했다.
무림은 매우 넓으면서도 좁은 곳이다. 적수공권의 여 무림인. 이미 여러 문파가 그 여인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 다만 여자에게 당했다는 소리를 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했기에 쉬쉬할 뿐. 이미 모용세가에서는 모용영련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모든 영약과 정성을 들여 키운 고수. 게다가 풍부한 실전 경험을 가지고 있는 모용영련은 막기에는 모용세가는 너무도 쇠약했다.
쓸데없는 허명을 노린 수많은 도전자들. 모용영련은 싸우고 또 싸웠다. 무림에는 모용세가의 벽력탄. 월향혈화 모용영련의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갔다.
거친 싸움 속에서 모용영련은 자신의 존재를 느꼈다. 어느덧 모용영련의 별호 앞에는 권후(拳后)라는 칭호가 붙었다.
그리고 염무란과의 만남. 가장 가까워야 하는 가족에 의해 깊은 상처를 입은 두 사람은 급격히 가까워져갔다. 어느새 염무란은 모용영련이 지켜야 하는 가장 우선순위의 인물이 되었다. 편안한 느낌. 염무란의 곁에 있으면 우울해지는 마음이 진정되었다. 단 한순간만 빼고.
“영련. 영련. 이 바보. 말미잘. 멍청이.”
뿌연 시야 속에서 누군가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것이 들렸다. 시력이 모두 회복이 되자 눈물을 글썽이는 염무란의 얼굴이 보였다. 모용영련은 손을 들어 염무란의 눈가를 닦아냈다.
“울지 말라고 했잖아. 널 울린 녀석은 누구도 내 주먹을 피해가지 못했는데 나 때문에 울면 나보고 어쩌라고.”
“바보야.”
염무란은 모용영련의 가슴에 얼굴을 품고 엉엉 울었다. 유이리 일행은 묘한 분위기에 침을 삼키며 바라봤다. 그리고 각자의 머리에는 지금의 상황을 유추하기 위한 분석에 여념이 없다. 분명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다.
모용영련은 몸을 일으켰다. 아니 정확히는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상민의 손에 의해 제지되어 일어날 수 없었다. 모용영련은 자신을 쓰러트린 남자를 바라보았다.
상처하나 없는 깨끗한 얼굴. 실력의 차이가 있다는 것은 분명 알았지만 저 빙글대는 면상에 한방도 꽂아주지 못하다니. 하지만 싸움이 끝나고 상민의 얼굴은 전혀 멀쩡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사정을 모르는 모용영련은 억울함에 이를 갈뿐이다.
“힘주지 말고 가만 누워있어. 지금 누님이 치료중이니깐. 땀을 흠뻑 흘렸으니 시원한 소흥주(紹興酒)로 땀을 씻어야 하지 않겠어? 하지만 지금 일어났다가 누님의 치료를 못 받게 되면 소흥주는 고사하고 한동안 음식도 입에 대지 못하니 얌전히 누워있으라고.”
뭔가 짜증을 유발하는 말이지만 치료를 해준다니 모용영련은 그대로 몸에서 힘을 뺐다. 몸을 휘어 감는 따뜻한 힘. 모용영련은 상처 입은 몸이 편안해 짐을 느끼며 자신의 옆에 쪼그려 앉아 있는 여인을 보았다.
턱선과 목선이 아름다운 여인. 면포를 하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면포의 틈으로 보이는 얼굴의 일부로도 충분히 미인임을 추측할 수 있다.
자신의 몸에 손을 올리고 있는 미녀의 손은 밝게 빛나고 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빛. 모용영련은 말을 잃고 유이리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모용영련의 시선을 느낀 것일까? 유이리는 모용영련의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면포의 아래 살짝 드러난 입은 부드러운 호를 그리고 있다. 모용영련의 얼굴은 순간 붉게 물들었다. 상민은 그런 모용영련의 변화를 모두 바라보았다.
“어이. 분명히 말하지만 난 누님이라고 했어. 반하면 곤란해.”
“닥쳐.”
“아직 치료가 끝나지 않았어요.”
상민의 말이 모용영련의 심기를 거슬렸는지 모용영련은 으르렁댔다. 그러나 아직 치료중이라는 유이리의 엄한 말에 조용히 순종했다. 사야에서 히죽거리는 상민의 얼굴에 매우 심기가 불편했지만 일단은 자신의 인내심의 한계가 어디인지를 시험해 봐야할 듯 하다. 적어도 자신의 내공을 사용해서 은혜를 베푸는 여인에게 해를 끼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단 약속도 있고 하니 저 희죽 대는 면상에 한방 먹이는 것은 나중의 나중으로 미뤘다. 적어도 자신의 정신이 인내심의 끈을 쥐고 있는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