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작은 세상이다(3)
사사지옥관(四四地獄關)은 십자성의 지하에 자리 잡은 거대한 공동에 만들어진 기관이었다.
이곳은 초대 십자성주의 사후에 만들어진 곳으로 역대 십자성의 주요전력을 키워내기 위해 이용되는 곳이었다.
역대 십자성의 후계자는 항상 이곳에 자신의 심복이 될 자들과 함께 들어왔다.
죽음의 관문을 함께 통과하면서 끈끈한 우의와 동질감을 나눔으로써 십자성의 후계자와 함께 들어온 이들은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세상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혈전대 역시 그렇게 해서 탄생된 조직이었다.
그들은 모두 현 십자성주인 마영백과 같이 이곳에 들어왔고, 영혼의 충성을 맹세했다.
그리고 음지에 숨어 마영백을 지키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아는 자는 모두 세 명,
그러나 그들의 정확한 존재를 아는 자는 오직 십자성주 마영백 한 명뿐이다.
마정옥은 자신의 등 뒤에 도열한 백 명의 기재들을 바라보았다.
그가 웅풍대라고 이름붙인 조직의 구성원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긴장된 시선으로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지하공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들 중에 반수는 죽어 나갈 터. 그러나 상관없다. 앞으로 나를 도와 강호를 지배하려면 쭉정이는 필요 없으니까.
오직 살아남은 자들만이 나와 함께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다. 흐흐흐!’
이들을 뽑은 것은 마정옥의 아버지인 마영백이었지만 이들을 이끌자는 마정옥 본인이었다.
마정옥의 눈이 다른 부대주를 거쳐 서문아에게 이르렀다. 순간 그의 눈에 아쉬운 빛이 스쳐지나갔다.
‘아까운 계집이야. 하지만 한번쯤은······.’
웅풍대에 여자대원은 몇 명 있었다. 그들 대부분이 상당한 미모를 가졌으나 그 누구도 서문아 만큼 아름답지는 못했다.
때문에 웅풍대에 있는 남자들 중 상당수가 서문아에게 은근한 흑심을 품고 있는 상황이었다.
서문아 역시 그런 남자들의 시선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남자들의 시선을 무시했다.
저들이 원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자신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이곳에서의 생존이었다. 그래야 복수를 할 수 있었다.
그녀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눈앞에 지옥이 기다리든 죽음이 기다리든 상관없었다. 그녀는 반드시 이곳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그녀의 등 뒤에 있는 스무 명의 부대원들이 그녀와 같은 눈빛을 했다.
꾸욱!
풍혼의 차가운 감촉이 그녀의 정신을 일깨웠다.
‘내 친구는 너밖에 없어. 우리 잘해보자.’
웅웅웅-!
풍혼이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몸을 떨었다. 그것은 오직 서문아만 느낄 수 있는 울음이었다.
“크으~!”
자다 말고 적무강은 벌떡 일어나 가슴을 부여잡았다. 가슴속에서 지독한 열기가 느껴졌다.
얼마 전부터 느끼고 있었던 것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몸의 열기가 강해지고 있었다.
그것은 이제는 화륜심결로도 다스리기가 힘들 정도였다. 때문에 이제는 자다가도 지독한 열기에 잠이 깨기 일쑤였다.
적무강은 어려서부터 화륜심결을 익혀왔다. 더구나 철이 들면서부터는 천하제일의 화로 곁에서 화륜심결을 익혔다.
때문에 그의 내공은 무척이나 정순하면서 웅혼했다. 단순하게 화륜심결의 성취도로만 따지면
이제까지 적 씨 가문의 조상들을 능가하는 속도였다. 때문에 내공은 훨씬 강하지만 덕분에 부작용도 일찍 나타났다.
조상들이 삼십대 이후에나 느꼈던 화륜심결의 부작용을 이제 이십대 초반에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적무강 아버지의 예상보다 십년이나 빨랐다. 그분께서는 적무강이 삼십 세가 되었을 때에나
자신과 같은 길을 걸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으···음!”
걷잡을 수 없는 살심이 올라왔다. 아니 그것은 살기라기보다는 파괴의 욕구였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싶은 욕구, 몸속에 존재하고 있는 기운을 모두 배출하고 싶은 욕구가 적무강의 가슴을 지배했다.
적무강은 끓어오르는 파괴욕구를 애써 억누르며 중얼거렸다.
“이제 더 이상 생사도를 복원하는 것을 미룰 수가 없다. 이 상태라면 삼사년 후면 나도 아버지와 같은 길을 가고 말 것이다.”
적무강은 죽는 것이 두려웠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냥 죽는다는 것, 적무강은 그것이 두려웠다. 아직까지
그는 아무것도 제대로 이뤄 논 것이 없었다. 그냥 이렇게 태어나 아무런 흔적도
없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견딜 수가 없었다.
강렬한 화로의 불길 앞에서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던 적무강의 전신이 흠뻑 땀에 젖어 있었다.
그만큼 그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극양의 불길은 적무강의 내부를 태울 듯 일렁이고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내부에서 끓어오르던 가공할 열기가 겨우 가라앉았다.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다. 당장이라도 생사도를 복원을 시작하는 수밖에. 어차피 생사도를 복원하지 못하면 죽음밖에 없다.”
이미 오년동안 생사도를 복원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생사도가 준비가 되었을지는 그 자신도 몰랐다. 모든 것은 하늘의 뜻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적무강은 이마의 땀방울을 닦으며 거친 숨을 가다듬었다.
또 다시 하가철방의 하루가 시작됐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장인들은 하루일과를 위해 재료를 점검하고 화로주위와 작업대를 손봤다.
평소 같으면 제일 먼저 앞장서 일을 시작했을 적무강이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직 화로의 불길만 뚫어지게 바라봤다.
하가 철방이 생긴 이래 한 번도 꺼지지 않고 철방을 밝히는 순백색의 불길, 다른 철방의 불들처럼 파란색이 아니다.
이 순백색의 불길이야말로 이제까지 하가철방이 명맥을 이어올 수 있도록 도와준 일등공신이었다.
그리고 적무강이 하가철방으로 들어온 이유 중의 하나였다.
“아니 아침부터 뭘 그렇게 넋 놓고 쳐다보는 겐가?”
적무강이 화로만 바라보자 장인 중 한명이 의아하단 얼굴로 물었다. 평소 적무강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무강은 이내 웃음을 지으며 평소의 얼굴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냥······.”
적무강은 손을 휘저으며 자신의 작업대로 갔다. 그러자 말을 걸었던 장인이 이상하단 눈빛을 했지만 뭐라 말하지는 않았다.
적무강이 가끔 저런 눈빛으로 화로를 본다는 것은 이젠 비밀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성문은 철방의 한쪽에서 누군가를 맞고 있었다.
무척이나 비대한 체구의 남자, 그는 철방에서 일어나는 열기에 연신 땀을 뻘뻘 흘
리며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조용히 서있었다.
“누굽니까?”
적무강이 옆에서 한참 조각도를 손질하고 있는 마 씨 아저씨에게 물었다.
그러자 마 씨 아저씨가 대단한 비밀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그만 소리로 속삭였다.
“저 양반 몰라? 왜 이곳 외성의 총관이잖아.”
“외성에 총관도 있어요?”
“그럼! 저 뚱뚱한 사람이 이곳 외성의 총관인 감사여야. 아마 이번에 내성에서 대
량의 물건을 발주할 모양이야.”
“그래요?”
적무강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감사여를 바라봤다.
아무도 믿지 못할 것이다. 저렇게 뚱뚱한 남자의 특기가 경공이라는 것을.
강호에서는 감사여를 일컬어 섬전비호(閃電飛虎)라는 별호로 불렀다. 그만큼 그의 경공은 강호의 일절이었다.
“그럼 옆에 있는 여자는 누군가요?”
“글쎄! 나도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라서. 얼굴을 천으로 가리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알겠냐?”
“흐음!”
적무강이 흥미롭다는 빛으로 감사여와 옆에 있는 여인을 바라봤다.
그냥 서있는 것뿐이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도도하게 느껴지는 여인이었다.
‘저런 기운은 사람들의 위에서 부리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나 나타나는 것인데
무척이나 많은 사람을 부리는 모양이군. 모습이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
적무강의 짐작대로 여인의 신분은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의 이름은 문수영, 이곳 십자성의 문상이란 지고한 신분이었다.
그녀는 이번에 대공자를 비롯해 웅풍대의 부대주들에게 무기를 만들어주었다는 철방의 소식을 듣고 직접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문수영은 한마디 말도 없이 모든 흥정을 감사여에게 시키고 자신은 철방 안을 구석구석 살폈다.
문수영은 외성에 자신도 모르는 철방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의심부터 가졌다.
또한 대공자와 웅풍대의 부대주들에게 귀한 무기를 만들어준 데에는 무언가 속셈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십자성 같은 거대한 세력의 문상이란 자리를 맡으려면 무엇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수많은 지식과 병법, 그리고 사람부리는 법과 정보의 흐름까지.
그중에서 문수영이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정보였다.
그녀는 천왕성과 중원의 수많은 문파에 관해 완벽하게 꿰뚫고 있었다.
아무리 그들이 은밀하게 행사를 하더라도 그녀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십자성 내부에서 그녀가 모르는 철방이 나타났다.
그것은 매우 하찮은 일일수도 있었지만 문수영의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대공자나 웅풍대의 부대주들이 마음에 들 정도로 뛰어난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철방이 십자성 내부에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들의 정보망에 허점이 생겼거나 철방이 이제까지 의도적으로
자신들의 모습을 숨겼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코 좋은 목적으로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본래 하가철방은 단순히 장인들이 모여 있는 철방인데 문수영은 매우 복잡하게 생각하고 추론하고 있었다.
그것은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복잡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종종 오류를 일으키는 맹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 자신은 전혀 그런 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문수영은 혹시 이곳이 엉뚱한 목적을 갖고 생긴 곳이 아닌지 무공을 익힌 자는 없는지 무척 날카로운 눈으로 살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이곳은 그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철방에 불과했다. 또한 무공을 익힌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주위를 살폈다.
‘응?’
철방을 둘러보던 문수영의 눈에 한 남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평범한 얼굴에 평범한 체구, 그런데 남자가 웃옷을 훌훌 벗는 게 보였다. 그리고 화로의 곁에서 풀무질을 하는 모습도.
뜨거운 화로의 불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풀무질을 하는 적무강의 모습에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가 어디론가 전음을 보냈다.
‘청안(靑眼), 의심 가는 것은?’
‘지금 저의 부하들이 철방 안쪽을 샅샅이 뒤지고 있으나 의심스런 징후는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 진짜 보통의 철방이란 말인가? 보통의 철방이 우리의 눈을 속이고 이제까지 존재했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그건·······.’
‘이곳은 필경 보통의 철방이 아닐 것이다. 어떻게 하든 이곳이 다른 곳과 연관 돼 있다는 증거를 찾도록·······.’
‘존명! 그런데 확실히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긴 합니다.’
청안의 말에 문수영의 눈가에 득의의 빛이 떠올랐다. 자신의 짐작이 맞아떨어졌
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게 무엇이지?’
‘눈앞에 보이는 청년입니다. 그의 이름은 적무강, 오년 전에 이곳에 들어온 자입니다.
신분에 특별히 이상한 부분은 없으나 이곳에 들어오기 전의 행적이 불분명 합니다.’
‘그래? 일단 그의 지난 행적을 파악하도록. 또한 이곳 하가철방을 우선 감시대상으로 올리고 주의를 기울이도록 한다.’
‘존명!’
문수영의 정보조직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이곳에 대한 모든 것을 파악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철방 안쪽에 대한 수색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철방 안에 있는 사람들 누구도 그런 사실을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다. 아니 오직 단 한명만 빼고.
적무강은 열심히 풀무질을 하며 안쪽의 동향에 귀를 기울였다.
스스스-!
불청객들이 열심히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는 평상시와 똑같이 움
직이며 미소를 지었다.
저들이 아무리 이곳을 헤집고 돌아다닌다 할지라도 무언가를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신분이나 물건을 노출시킬 만큼 미련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저···자!’
문수영은 아무래도 적무강이 마음에 걸렸다. 일상의 일을 하고 있지만 왠지 너무나 신경에 거슬렸다.
아무리 봐도 그럴만한 이유가 없는데도 신경이 쓰이다니. 그녀는 그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알 수 있었다.
‘그래! 너무 평범해서야. 너무 평범해서, 특징이 없어서······그래서야.’
십자성에 있는 사람들 중 평범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모두가 일성의 패주가 될 만한 실력이 있는 자들이다.
어떤 이는 강맹한 기도로. 어떤 이는 빼어난 외모로. 어떤 이는 뛰어난 심기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그러나 눈앞의 남자는 너무나 평범했다. 한번 보면 그냥 잊혀질 것처럼. 그것이 더욱 그녀의 신경을 날카롭게 건드렸다.
문수영은 더욱 눈을 빛내며 적무강을 살폈다. 그러나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으로도 별다른 이상한 점을 찾아내지 못했다.
‘흥~! 네가 누구건 숨겨진 무언가가 있다면 결국 나에게 밝혀지게 될 것이다. 십
자성, 이곳은 작은 세상이다. 그리고 이곳의 지배자는 성주님, 그리고 나이다.’
결국 그녀는 콧방귀를 끼고 돌아섰다.
십자성에서는 하가철방에 무기 백여 점을 주문했다.
그것은 문상 문수영이 개인적으로 낸 것으로 그녀가 관리하는 조직에 지급될 거라 했다.
그리고 물건의 질을 봐서 차후에 더 주문을 하기로 했다.
결국 하성문은 원하지 않았지만 하가철방은 내성의 눈에 들었고, 그들에게 물건을 만들어줄 수밖에 없게 됐다.
덕분에 하가철방은 평상시보다 더욱 바빠지게 됐다.
적무강은 밤늦게 철방에 나왔다.
아무도 없는 철방에는 여전히 화로불이 거세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적무강의 얼굴이 불길에 따라 짙은 음영이 드리워졌다.
모든 것을 녹여버리는 순백의 불꽃, 이제까지 적무강은 이 불꽃에 모든 것을 걸고 달려왔다.
마치 불꽃이 그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더욱 거세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부터 시작하려느냐?”
“할····아버지?”
적무강이 뜻밖이라는 눈빛을 하였다. 그의 곁에 다가온 사람은 다름 아닌 이곳 하
가철방의 주인인 하노인이었기 때문이다.
하노인은 자애로운 눈으로 적무강을 바라봤다.
적무강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내가 평생을 지켜온 화로야. 설마 몰랐을 것 같으냐?”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 없다. 너에게도 무언가 사정이 있었을 테니까. 넌 결코 쓸데없는 일
을 하는 성격이 아니니까 이번 일에도 필경 그에 맞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할···아버지.”
하노인은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눈으로 적무강을 바라봤다. 그에 적무강의 마음
이 짠해졌다.
오년 전에 처음 만났을 때도 이랬다. 남들은 꺼리는 기술도 아무런 조건 없이 가
르쳐줬다. 그때도 하노인은 이런 눈을 하고 있었다.
일찍 부모를 여위고 할아버지의 얼굴을 모르는 적무강에게 하노인은 할아버지 대
신이었다.
하노인이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너의 비밀을 보여주겠느냐?”
“이제는 때가 된 듯합니다.”
적무강도 웃음을 지었다.
그는 화로 앞으로 다가갔다. 지독한 열기가 덮쳐왔지만 적무강은 상관하지 않았
다.
적무강이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순백의 불길이 그의 손과 반응해 서서히
좌우로 갈라졌다.
“오······!”
순간 하노인의 축 쳐진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이어 그의 눈에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갈라진 화로의 불길 사이로 보이는 것은 붉게 달아올라 있는 두 동강 난 도신이었다.
지난 시간 동안 화로의 순백색 불길을 온몸으로 받은 생사도가 오년 만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