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過去)는 있다!
천지(天地)가 모두 백설(白雪)로 덮였다.
아아, 어머니 품속같이 화사한 흰 눈이여!
눈은 내내 내렸다. 그리고 그는 사흘 내내 눈 속에 누워 흐느낌을 바람 소리로 달래고 있었다.
"나… 나는 마무정(魔無情)! 이제는… 모든 것이 기억난다!"
그는 창백한 얼굴을 폭설이 내리는 하늘 쪽으로 돌렸다.
아아, 그 하늘(天)을 닮은 얼굴… 그림보다도 아름다운 사내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붓으로 힘있게 그은 듯이 귀 위쪽으로 쭈욱 뻗어 나간 검미(劍眉), 봉황의 눈으로 신비하게 박혀 있는 두 개의 젊은 눈동자, 한 일자로 다물려져 있는 입술.
섬약(纖弱)해 보이는 청년, 그의 윗머리 뇌호혈 부위에는 커다란 상처가 있었다.
이상한 것은, 다른 사람 같으면 열 번은 죽었어야 할 커다란 상처를 입은 가운데에서도 그는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몸은 아무런 약의 도움도 없이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긴 꿈이었다. 나는… 꿈 속에서 자객이 되었었다!"
아름답고 차가운 입가, 거기 매우 오묘한 미소가 드리워진다.
"나는 밤의 아들이 되었다."
그는 바로 그인가?
"너무도 긴 밤이었다. 나는… 너무도 긴 잠에 빠져들었다. 그것이 정확히 어떠한 내용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는 눈가를 가늘게 찌푸렸다. 몽롱한 기억 속에 여러 얼굴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볼이 붉은 미인, 그녀는 누구일까?
그녀는 그를 향해 지극히 간절한 눈빛을 던지고 있었다.
-떠나면 안 돼, 무화(無花)! 떠나지 마!
무화, 그는 대체 누구일까?
-기다리겠네, 자네를!
-와서 우리들의 주인이 되어 주게!
늙은 사람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하지만 그들이 누구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들은 그를 향해 매우 간절한 눈빛을 던지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얼굴들도 나타났다.
거울(鏡)이 있고, 여인이 있다. 여인은 바로 꿈인 양 아름다웠다. 그녀는 매우 창백한 볼을 갖고 있었다.
수정(水晶)처럼 투명(透明)해 보이는 여인, 그녀의 입술은 두 장의 홍매화(紅梅花) 같았다.
그 입술이 달싹여지며… 아아, 바로 꿈의 소리 같은 목소리가 아련히 흘러 나왔다.
-나를 찾아 주어야만 해요. 왜냐하면 나는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대는 나와 약속을 했어요. 내 곁에 와서 나를 일으켜 주겠다고!
우수에 찬 미인, 화용월태(花容月態) 침어낙안(沈魚落雁)의 미인은 그렇게 말하다가 스르르 사라졌다.
그리고 그의 뇌리에는 또 하나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도 여인이었다. 그는 매우 차가운 기질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녀의 눈빛은 얼음 조각을 닮았다.
그 눈빛은 깜박이지도 않고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자객, 감히 나를?
눈을 부릅뜨는 여인, 공작마냥 기품이 있어 보이는 여인.
그녀의 미간(眉間)에는 이상한 꽃이 한 장 붙어 있었다.
옥화(玉花).
여인의 눈썹 가운데에는 옥화 한 장이 달려 있었다.
-떠나도 좋아. 모든 장소는 짐의 대지(大地)이니까!
중후하고 온화한 인상을 풍기는 사내의 얼굴도 흐릿하게 나타났다. 그는 매우 거만한 자태로 그를 바라봤다. 그의 입가에는 단아한 미소가 매달렸다.
하늘의 기도, 그는 광활한 기도를 지니고 있었다.
강(强)하다기보다 유(柔)하고, 지배하기보다 포용적인 기도!
그러한 기도는 청년을 압도할 만했다.
-떠나도 좋으나, 돌아와야만 한다! 아는가?
-짐은 그대를 통해 할 일이 있다.
-핫핫… 모든 것은 짐의 것이지. 자네도, 하늘도…….
큰 웃음소리 가운데 모든 것은 환각이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눈(雪)… 천지가 눈에 휘감겼다는 것만이 청년의 눈에 남았다.
"모든 것이 흐릿하다."
그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나는 악몽을 꾸었던 것이다.'
그는 이를 악물며 천천히 손을 쳐들었다.
몸이 석고가 된 듯, 움직이는데 상당한 힘이 들었다.
"으음, 나는 분명… 살아 있는가?"
그는 아주 느릿느릿 자신의 옷섶을 풀어 헤쳤다.
얼음 조각이 매달린 옷섶이 풀어지며 가슴이 나타났다.
단단한 근육질의 가슴 위.
오오, 마의 꽃이여!
한 송이 마화가 금빛 찬연하게 피어나 있지 않는가?
"천년마화(千年魔花)! 훗훗, 나는 바로 이것이다."
그는 아주 차고 사악하게 웃었다.
"하늘, 바람과 별과 꽃과 인간들을 나는 사랑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그의 눈길은 천천히 동쪽으로 돌려졌다.
그 곳, 설봉(雪峰) 하나가 거인(巨人)처럼 서 있었다.
마황단(魔皇壇).
눈에 뒤덮인 만 장의 거봉(巨峰), 그는 눈길을 오랫동안 거기 드리운다.
마치 물안개처럼 차고 흐릿한 기운이 그의 눈에서 흘러 나왔다.
"나는 구대마병(九大魔兵)에 당한 채 달려나왔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달렸지. 그리고 뇌호혈에 지극한 통증을 느끼며… 쓰러졌었다."
잔혹하게 웃는 청년, 그는 절대마가의 제일소가주였던 마화삼 마무정이었다.
그는 의식을 잃고 천백 일 간을 헤매다가 지금 스르르 깨어나는 것이다.
이전의 모든 것은 기억나지 않았다. 얼굴이 십여 개 기억나기는 했으나, 자세히 기억나는 얼굴은 없었다.
"백무엽(白武葉)! 훗훗, 그런 이름이 문득 생각나는군!"
마무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아, 이럴 수가?
대자객(大刺客) 백무엽이 아닌가?
그는 바로 인문제일의 살수였던 백무엽이었다.
한데, 그는 자신이 백무엽이라는 것을 잊고 마는 것이다.
-너는 모든 것을 잊어야 한다!
누구의 목소리일까?
매우 흐릿하게 들리는 목소리, 그 소리는 점점 작아져 갔다.
-너의 과거(過去)는 무(無)다.
-너는 새롭게 태어나는… 새롭게…….
꿈 속이었을까? 그런 말을 들은 시기는?
바람이 화살 마냥 다가섰고, 가슴이 차가워졌다.
"후우……!"
마무정은 숨을 아주 깊이 들이마셨다.
'유정, 그 천하 역도의 검에 뒷머리를 다친 탓에… 나는 미쳤던 것이다. 그래서 오랜 나날을 떠돌며 악몽을 꾸었을 것이다. 가치 없는 꿈을…….'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의 얼굴 가운데 나타나던 번뇌지색(煩惱之色)은 스르르 자취를 감췄다.
-불어라, 마(魔)의 바람(風)! 천년제일가(千年第一家)!
너는 마(魔)를 운명(運命)으로 태어났다. 전 마가의 절대자여! 이제… 날아오르리라!
그의 가슴에는 사악한 밀어가 가득 찼다.
"좋아, 운명대로 모든 것을 짓밟는다. 제일 먼저, 마유정의 무리들이 내게 처단되리라!"
그는 차고 사악하게 말하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가슴이 비수에 베어지는 듯, 번갯불이 백회혈(百會血)에서부터 불두덩이까지를 데이는 듯, 몸이 반으로 갈라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혼절해야 마땅한 지독한 고통. 그러나 그는 놀랍게도 웃고 있었다.
"좋아, 나의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가끔 이러한 고통이 생기는 것도 좋아."
차고 강하고 아름다운 목소리, 그는 고소를 흘리며 비틀비틀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가자, 가야만 한다. 내가 가야 했던 곳으로! 천 년의 모든 것이 비장되어 있는 곳으로……!"
바람이 빠르게 불어 닥쳤다. 눈은 모든 것을 휘감아버렸다. 그의 蹄摸?? 어깨도, 등 모습도…….
휘리리리링-!
북방의 거산 기련산은 늘 겨울이다. 만 년을 두고 녹지 않는 눈이 있고, 천 년을 두고 녹지 않는 빙벽(氷壁)이 있다.
귀기 서린 빙무가 몰아 닥쳤다. 그리고 마무정의 모든 것은 뿌연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천 년의 눈과 함께, 그는 끝없이 떠나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노을이 검붉은 장동(長冬)의 저녁 무렵,
난석곡(亂石谷) 어귀였다.
봉두난발한 청년 하나가 소매를 들어 입가의 피를 닦으며 선 곳은.
"이 곳이다. 가주께서 죽기 얼마 전, 내게 말해 주신 장소는! 훗훗, 이 곳이야말로 진짜 천년마고이다."
웃는 청년, 그는 인간의 모든 고통을 쉽게 극기하고 있었다.
참는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아주 쉬운 일이다.
그는 쓰러질 듯 휘청이며 걸음을 내딛었다.
"모를 일이군. 이 곳에 진기(眞氣)가 흐르고 있다는 것이 나도 모르는 사이 느껴지다니……."
마무정이었다, 그는!
마무정은 절곡 어귀로 비틀비틀 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가 그에게 일러 주는 것일까?
그가 마가에서 배우지 않은 하나의 구결이 선명히 기억되고 있었다.
은잠허형보(隱潛虛形步).
정말 놀랍게도 모든 것이 한 자 어김없이 기억났다.
"이상한데? 내게 마가의 정통적인 수법 말고 또 다른 수법이 있다니… 내가 배운 것은 모두 마공뿐인데?"
마무정은 흠칫 놀라 몸을 세웠다.
'나는 무엇이었을까? 으으, 기억을 잃고 헤매었던 그 무수한 나날 동안… 나는 무엇이었을까?'
마무정은 과거를 기억하려 했다. 그는 절대마가에서 자란 모든 것을 기억했다. 운기행공하다가 암습당하던 그 순간도, 그리고 이를 막물고 도망치다가 눈 속에 누운 것도…….
눈이 따뜻한 이불처럼 그의 몸을 덮어 주었던 것까지 그는 기억했다. 한데, 그 이후부터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인(忍), 백무엽(白武葉), 무화과(無花果), 십(十)……!
그런 말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으으, 악념(惡念)이다… 악념! 기억할 필요조차 없는 악몽이 자꾸 느껴진다."
마무정은 두 손으로 머리를 휘어 감으며, 거인이 쓰러지듯 서서히 무릎을 땅에 댔다.
쿵-!
그는 앞으로 거꾸러지며 옆으로 쓰러졌다.
아아, 귀기 어린 안개.
바람이 흐를 때마다 힐끔힐끔 나타나는 마벽(魔壁), 수없이 많은 부조(浮彫)와 석상(石像).
<천년마고(千年魔庫) 제일고(第一庫)>
안개 가운데 그러한 글이 보였다. 그 글은 인광(燐光)으로 인해 허공에 응집된 채 흐트러지지 않고 쉬임없이 번쩍거렸다.
차고 사악한 악마의 불길은 또 하나의 글을 만들고 있었다.
<제일고(第一庫) 마병고(魔兵庫).
얻거나, 죽으리라!
마화의 주인에게만 들어섬이 허용된다.
운명의 주인이 아니라면 올 수 없다.>
불길은 흐르고, 마무정의 몸도 둥둥 떠서 흐르고 있었다.
안개가 그의 몸을 휘감은 채 떠오르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너무나도 강한 힘이 흘러들어 그의 몸을 들어올리는 것이다.
"마화(魔花)다! 우리가 기다리던 사람이다."
"다친 것으로 보아, 걱정했던대로 구대마가가 반란을 일으켰다."
"저리 다치고도 살아 있다니… 훗훗, 첫인상이 괜찮군. 하지만… 뛰어나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를 갈고 여기까지 기어온 것을 오히려 후회할 거야."
안개가 흐르는 가운데, 신비한 목소리들이 흘렀다.
그리고 마무정의 몸은 둥둥 떠서 절곡 안으로 사라졌다. 아니, 그는 백무엽이다.
아니, 마무정이다. 격공이물진기에 끌려 안개 속으로 사라져 간 사람은…….
백무엽이다. 아니, 마무정이다. 그는…….
* * *
-천 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근골이오. 아아, 이러한 근골이라면 능히 천년마경(千年魔經)을 십 성 익힐 수 있소.
-극독한 내외상으로 인해 내공이 거의 폐쇄되었으나 무궁무진한 잠재력이 남아 있소. 그 힘을 일깨우기만 한다면 무림사상 가장 강한 내공을 지닌 고수가 탄생될 것이오!
-선주(先主)가 바라던 그런 사람이오!
-이분은 우리들의 소주인(少主人)이오!
마무정은 연무(煙霧) 가운데 있었다. 그는 흐릿한 눈길을 사위에 던지며 입가를 일그러뜨린다.
짜증스럽고 권태롭다는 표정, 차가운 매력을 일으키는 준미한 모습이다.
석굴은 온통 안개에 잠겼다.
안개는 석굴의 아주 미세한 틈을 통해 흘러들었는데, 이상하게도 한 번 흘러들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힘을 지니고 있다, 이 안개는!"
안개는 사슬과 같았다. 안개는 마무정의 몸을 칭칭 휘감았고, 마무정은 그럴 때마다 전신 혈맥이 쩌릿함을 느껴야만 했다.
그는 과거의 면모를 완전히 찾은 상태였다.
"안개는 내외상을 아물게 한다."
그의 뇌호혈에는 상처 자국이 남아 있었다.
마무정은 자신이 꽤 오랜 나날을 잃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나날에 대해 애써 기억하지 않으리라 결심한 후였다.
'나의 일생을 복수에 바치겠다. 기억나지 않는 과거에 대해 연연할 정도로 한가하지 못하다.'
마무정의 눈빛은 잘 갈아진 비수의 빛과 같았다.
차디찬 눈빛, 그는 그 눈빛으로 사위를 쓸어 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 안개는 분명 개세활천무(蓋世活天霧)이다!"
차고 강인한 목소리였다.
"개세활천무는 마가비전(魔家秘傳)이다. 그것은 끊어진 맥(脈)을 잇게 하고, 내공을 증진시키는 신효를 갖고 있다!"
고집스럽고 거만한 목소리이다.
주위는 조용하기만 했다.
마무정은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흥! 개세활천무로 보아 이 곳은 분명 마가의 대지(大地)이며, 마가의 대지라면 나의 대지이다. 한데, 어이해 이 곳의 종놈들은 주인을 가두어 놓고 대가리 하나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그가 사납게 쏘아붙일 때 짙은 안개 속에서 기관음이 들려 오더니, 꽤 먼 곳에서 암문 하나가 열렸다.
"아직은 자네의 종이 아니지. 크크……!"
암문을 통해 들어선 사람은 계피학발의 노인이었다. 그는 허름한 가죽옷을 입었고, 손에는 갑(匣) 하나를 들고 있었다. 키가 다섯 자도 되지 않는 지독한 단구, 밀랍처럼 흰 얼굴에는 무수한 상처 자국이 있었다.
그는 입을 가볍게 벌리고 웃는데, 입 안에는 이빨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크크… 주인(主人)이 되기 위해서는 열 번의 관문을 거쳐야만 한다. 그 이전에는 주인이 아니다!"
그는 서서 오지 않았다. 그는 백무를 딛고 다가서고 있었다.
낡디낡은 가죽옷을 걸친 오 척 왜옹(倭翁), 그의 이마에는 철테가 둘러져 있고 일(一)이라는 숫자가 철테에 새겨져 있었다.
괴노인은 안개를 타고 마무정 앞으로 다가섰다.
"십 일 만에 일어났다, 그대는!"
"십 일?"
"그렇다 열흘이다. 그대는 다 죽게 되어 천 년 절곡 앞에 와 쓰러졌다!"
"흠……!"
"우리는 그대를 구해 이 안에 넣었다. 이 곳은 바로 이 곳의 창건자이신 삼십일대 혈화삼이 후예를 위해 만든 활혼관(活魂關)이다. 그분은 훗날, 자신의 후예가 구대마가에게 쓰러진다는 것을 예측하시고 이런 안배를 남기셨던 것이다!"
"……!"
"여기서 보름 이상을 보냈다면 후계자의 자격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도 그대는 열흘만 보내고 신지를 찾았으니……!"
괴노인, 그는 마가(魔家)의 태상제일장로(太上第一長老) 지위에 오른 자였다.
태상십장로(太上十長老).
그들은 이 갑자(甲子)라는 긴 세월 동안 마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태상십장로는 십마천(十魔天)이라고도 불린다. 그들의 별호며, 과거에 지니고 있었던 능력 등등은 모두 비밀이었다.
그 일은 죽은 삼십이대 혈화삼도 모르는 일이었다.
개세활천무가 흐르는 활혼관 깊은 곳에서 태상제일장로는 즐겁게 웃고 있었다.
"크크… 그대는 후계자가 되는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대는 탁월한 근골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고맙군!"
마무정은 즐거워하지도 경건해 하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는 지극히 냉소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태상제일장로는 마무정의 그러한 표정 뒤에 있는 정말 거대한 어떤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산(山)이다. 흔들림이 없는…….'
태상제일장로는 마무정의 기도에 압도당했다.
'아니, 바다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창해다. 저분의 기세는……!'
제일장로는 은근히 감탄하면서도 여전히 조롱하는 표정이었다.
"물론, 완전히 좋다는 것은 아니다!"
"아니라고?"
"그렇다. 근골만으로 자격이 정해지는 것은 아니니까!"
"흠……!"
"그대의 근골은 지극히 탁월해 천골(天骨)이라고 불릴 만하나, 유감스럽게도 그대는 마골(魔骨)이 아니다! 오히려 그대는 정반대의 근골이다!"
"무엇을 말하려는 겐가?"
"그대가 신골(神骨)이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신골(神骨)! 그 말이 마무정을 섬뜩하게 했다.
마무정은 절대마가 안에서 마교경전을 읽고 외웠다. 그는 마가의 의전에 대해서는 특히 빼어난 재간을 갖고 있었다.
마골과 신골!
그것은 절대적인 상이함을 지니고 있다.
"그대는 유감스럽게도 신골(神骨)이다. 하지만 놀라운 수준의 살기(殺氣) 또한, 지니고 있다!"
"흐음……!"
"더욱이 그대의 신체 안에는 마가가 전하지 않았음에 틀림없는 여러 가지 힘이 깃들여 있다!"
"힘(力)?"
"그렇다. 그대는 무한한 능력을 몸 안에 지니고 있다. 그 덕에… 다 죽게 되었다가 쉽게 살아난 것이다!"
"아아, 그 힘이 어떤 것인가?"
"모르고 있다."
"모른다고?"
"그 힘이 너무도 강하기 때문이다!"
"……!"
"짐작하건데, 그것은 두 종류이다. 하나는 골수 속에 스며든 가공할 잠력(潛力)이며 절대 허물어지지 않는 금강불괴지력인 동시에 잡히지 않는 신비공력이며, 또 하나는 그대의 혈맥(血脈)에 흐르고 있는 용독(溶毒) 파사(破邪)의 힘이다. 그 힘은 공력이라기보다는 체질적인 힘이다!"
"……!"
마무정의 볼이 가볍게 상기되었다.
'나는 무엇이었을까?'
마무정은 천백 일을 잃었다. 아무리 생각하려 해도 그 동안 무엇을 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대체 나는 무엇이었을까?'
마무정은 눈가를 찌푸리는데, 노인은 천천히 갑을 열며 말을 이었다.
"해서, 노부는 그대에게 한 가지를 시험하고자 한다! 그것은 그대에게 금침제맥(金針制脈)을 시술해 그대의 과거를 캐어 본다는 것이다!"
뚝-!
철갑은 큰소리를 내며 열렸는데, 그 안에는 침이 한 움큼 들어 있었다.
"천마구령침(天魔拘靈鍼)이라는 것으로, 노부 마병야(魔兵爺)가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든 물건이다!"
"마, 마병야? 그대가?"
"그렇다. 노부는 전 마가의 태상십장로 중 첫 번째 자리(第一座)에 있는 마병야이다. 클클, 노부의 이름을 아는가?"
"아, 아오. 마병야, 그 이름을!"
마무정의 얼굴은 대춧빛으로 물든다.
마병야!
마가에서는 전설적인 인물로, 그는 이십구대 혈화삼의 사제가 되는 인물이었다.
살아 있다면 현재 나이 삼백오십(三百五十) 정도.
그는 마병학(魔兵學)의 대가로, 마병천무경(魔兵天武經)과 십팔반마도병기요(十八班魔道兵器要)를 저술한 바 있다.
한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것이다.
마병야는 마무정이 놀라워하자, 키득거리며 말을 이었다.
"클클… 노부의 정체 정도로 놀랄 것은 없네그려."
"더, 더 놀라운 것이 있소?"
"있다오."
"무엇이오?"
"그것은… 듣기 슬픈 일이고, 들어야만 하는 일이고, 자네의 운명에 대한 일이 아니라 천 년의 운명에 관한 일이네!"
천 년의 운명!
마병야의 눈빛은 점점 강해졌다.
화로가 불줄기를 뿜어 내듯이, 극악하고도 장렬한 빛줄기가 진물투성이의 눈에서 쏟아져 나왔다.
"자네는… 멸망의 안배를 아는가?"
"멸, 멸망의 안배(按配)라니?"
"그것은 오래 전부터 계획된 절대마가의 최후병법(最後兵法)으로, 그것을 완성시킨 분은 바로 삼십일대 혈화삼이시네!"
"으… 으음!"
"그것은 시련 가운데 완성을 얻고자 하는 것이고, 없음 가운데 있음을 만드는 무중생유(無中生有)의 비법이네. 그리고 천 년의 반골(反骨)들을 일대척살(一代擲殺)하는 마계(魔計)이기도 하네!"
"그것이 무엇이오?"
"듣는다면… 기가 막힐 것일세!"
"……?"
"절대마가의 멸망은 이미 안배되었다네!"
"그, 그럴 리가?"
마무정의 얼굴이 시꺼매질 때였다.
마병야은 이제 감출 것이 없다는 듯 거침없이 말을 토해 냈다.
"십대마가(十大魔家)는 절대마가와 구대마가로 분리되었네. 절대마가와 구대마가는 늘 대립했고, 늘 절대마가가 이겼네. 하지만 구대마가의 힘은 일로확장되었고, 절대마가는 그들을 통솔치 못할 지경에 이르렀네! 그래서 그들을 멸망시킬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네! 그리고 일단은 절대마가가 멸망된 것이네. 겉보기로만!"
"멸… 멸망?"
"훗훗… 그들은 마의 정통보다는 사적인 이익을 위해 날뛰는 무리들일 뿐이네. 그들은 늘 반역하려 했네!"
들을수록 놀라운 말이었다. 절대마가와 구대마가 사이의 반목이 그 정도였단 말인가?
"삼십일대의 혈화삼은 용단을 내리어 그들의 괴수를 쓰러뜨렸네! 하지만 뿌리마저 잘린 것은 아니네!"
"으음……."
"그들의 힘은 너무 컸네. 그래서 삼십일대 혈화삼은 최후의 방법으로 천년마고의 안배를 하셨네!"
마병야는 감정이 없는 사람 같았다. 그는 엄청난 이야기를 하면서도 안색 하나 바꾸지 않았다.
"그분은 구대마가를 쳤고, 구대마가는 일시 굴복했네. 하지만 그들의 역심(逆心)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네!"
"……!"
"그들이 역심을 품고 있는 한, 전 마가는 일통되지 않고… 결국 천하일통 역시 이루어지지 않네!"
"으… 음!"
"그래서 용단이 내려졌네."
"용단?"
"백이십 년 전이지. 절대마가의 주력(主力)을 후퇴시켜, 훗날을 위한 안배로 하자는 대결정이 내려진 것이네!"
"주, 주력을 후퇴시킨다고?"
"천 명의 절대고수, 억만 냥(兩)의 황금(黃金), 마병일천좌(魔兵一千座), 천 마리의 천마응군(天魔鷹軍), 천마혈총(天魔血聰)… 모든 것을 훗날을 위해 감추게 된 것이네! 그리고… 지금 자네가 여기 오게 된 것이네! 운이 좋다면 이 갑자 이전에 안배된 모든 것을 자네 것으로 할 수 있지."
"아아……."
"훗훗… 좋아할 것은 없어. 얻기보다는 얻지 못하기가 쉬우니까! 우선 자네는 뱃속의 비밀부터 게워 내야 한다!"
"게워 내다니?"
"모든 것을 빠짐없이 이야기해야 한다! 노부는 이것을 써서 자네의 심중 비밀을 하나 남김없이 꺼낼 것이네!"
마병야는 손을 천천히 쳐들었다.
천마구령침(天魔拘靈鍼).
백마겁혼(百魔劫魂)이 스며 있다는 마물(魔物)로써, 담금질을 할 때 옥녀(玉女)의 선혈로 담금질을 해서 생령(生靈)을 지배하는 요기(妖氣)를 띠게 되었다는 물건이다.
빛은 푸르고, 강한 광채를 뿜어 내는 일 촌(寸)의 옥침.
마병야는 그것을 진기로 날려 보내기 시작했다.
"풍부(風府), 옥형(玉衡), 자개(紫蓋), 기해(氣海), 백회(百會), 승장(昇將)……!"
파- 파- 파-!
푸른 불길이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듯, 삽시간에 백팔 개의 천마구령침이 마무정의 가슴에 틀어박혔다.
단 하나로 거룡(巨龍)을 십 일 간 만취시킬 수 있는 마력(魔力)에, 돌마저 녹이는 독성(毒性)에, 철석간장을 녹이는 최혼력(最魂力)에, 천 년의 마력(魔力)을 지닌 천마구령침은 마무정의 가슴을 푸른빛으로 뒤덮었다.
"……!"
마무정은 앉은 채 마병야를 보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무심하고 우울한 눈빛을 띤 채.
마병야는 아주 천천히 허리에서 곰방대 하나를 꺼냈다.
"연초 다섯 모금 필 시간은 있겠지! 자네가 쓰러질 때까지는."
그는 느릿느릿 연초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는 천마구령침이 힘을 발휘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마병야는 연초를 백 모금 이상 빨아댔다.
'이상하다. 정말… 정말 이상하다.'
이 곳은 매우 추운 곳인데, 그는 땀을 줄줄 흘린다.
그는 한서불침지경에 이르렀는데에도 지금 추위를 느꼈다. 손끝이 부들부들 떨리고, 머리카락이 올올이 곤두섰다. 바로 마무정 때문에 그는 경악, 전율하는 것이다.
"왜 묻지 않소?"
마무정은 고졸한 미소를 던지고 있었다.
아아, 철(鐵)! 마무정은 강철덩어리 같았다.
그는 신지를 잃어버리지 않았다. 백팔 요혈 속으로 박혀 든 천마구령침은 그의 심령을 제압하지 못했던 것이다.
보라! 그의 가슴에서 푸른 김이 피어 오르는 것을.
천마구령침이 그의 살 속에서 녹아 버리고 있었다.
본래 그는 정신을 잃고 마병야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
마병야는 마취상태를 이용해 마무정의 과거를 캐어 볼 예정이었다. 한데, 마무정은 천마구령침에 제령당하기는커녕 오히려 웃고 있었다.
"큿큿… 이 정도면 노인의 주인이 될 만한가?"
"으음, 이미 절대인가… 그대는?"
마병야는 곰방대를 쥐었고, 곰방대는 그의 손아귀 안에서 고운 가루로 부서졌다.
"큿큿… 나도 모르겠군. 내가 왜 이리 독종(毒種)이 되었는지!"
"으음, 천마구령침을 녹이다니! 이미 그대는 무적의 경지란 말인가?"
"글쎄, 모르긴 해도 꿈 속에서 모진 고생을 하며 강철이 된 듯하다!"
"꿈(夢)?"
"생각이 나지는 않으나, 매우 괴로운 꿈이었다."
마무정은 놀라운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마가에서 배운 것과, 어디서 배웠는지 모를 놀라운 잠재력과 무수한 구결들!
과거사는 기억나지 않으나, 무공구결은 소상히 기억되었다.
스으으… 스으……!
천마구령침은 하나도 남김없이 녹아 연기로 화했다.
그리고 마화(魔花)의 생동감이 더욱 새로워졌다.
가슴 위에 피어난 한 송이 금화!
그것은 정녕 살아 있는 꽃 마냥 아름다워 보였다.
"마병야, 나를 통해 또 할 것이 있는가? 나는 바쁜 사람이야! 나를 해친 자들을 죽이러 다니기 위해 수십 년을 써야 할 사람이란 말일세. 그러니, 시시한 시험으로 나를 오랫동안 옭아매려 하지 말게!"
"그, 그대는… 이미 하늘(天)이오?"
마병야는 우는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전율 가운데에는 마무정에 대한 지극한 존모의 정이 스며 있었다.
"이것은 하나의 시험입니다. 안배되어 있는 시험 중 오직 하나일 뿐입니다.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열 가지 시험을 거쳐야 합니다! 그것은 천마십관(天魔十關)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경지를 초월하는 열 가지 시험이지요! 그것을 주관하는 사람은 십마천(十魔天) 중의 세 사람입니다. 노부와 마박사(魔博士), 그리고 흑강(黑剛)."
"다른 장로들은 어디에 있소?"
"각처에 흩어져 있습니다!"
"각처?"
"중원과 변황에 두루 퍼져 있습니다!"
"……!"
"주인이 주인으로 인정받으시는 날, 그들은 휘하에 모일 것이고… 그 순간, 무너진 절대마가보다 백 배 거대한 진짜 마의 성이 하나 세워집니다. 그 성은 바로 마화성(魔花城)입니다!"
"마… 화… 성?"
"예! 그것은 바로 멸망의 안배에 있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는 것입니다. 마화성의 안배는 마화성에 깃들일 사람이라도 다 알지 못하는 것으로, 마화성의 주인이 되시는 분만이 알게 될 그러한 것입니다!"
마무정은 하품을 해야 했다. 천마십관은 지극히 엄청난 고통을 주는 관문인데도 그를 괴롭히지는 못했다.
예를 들어 팔천 번의 채찍질 가운데 신지를 잃지 않아야 하는 천삭마형관(天索魔刑關)이라든가, 극한천(極寒泉) 안에 들어가 한기와 싸워야 한다든가, 태양마동(太陽魔洞) 속에서 열기와 싸워야 한다든가…….
그에게 있어 그러한 것은 아픔이 아니라, 지겨움이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