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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
부천 예인교회의 2023년 종교개혁주일에 발표한 원고를 용감하게 올립니다. 무식하면 용감하군, 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저는 역사 공부가 일천합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에 더해 장기려 종교개혁까지 이야기해 달라는 부탁에 따랐습니다. 설교도 아니고, 역사 강연은 더더욱 아닌 설익은 생각입니다. 그런데도 욕먹을 각오로 올리는 것은 루터와 그가 일으킨 종교개혁의 이면과 혐오스런 면을 한국 개신교가 교회에서, 특히 설교에서 지금까지 틀어막고 있다는 안타까움 때문입니다. 그건 옳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국 개신교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루터와 칼뱅 치켜세우는 이야긴 지겹게 했습니다. 그러니 균형 차원에서 이런 이야기 하나 쯤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에서, 그것도 주일 오전 예배 설교에서 이런 이야기에 길을 냈으니 이후 사람들은 제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 조금 더 균형잡힌 시각으로 루터와 종교개혁을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감히 원고를 여기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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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종교개혁에 생각하는 반면교사 루터
- 다시 기본으로, 장기려와 종교개혁
우리가 어떤 사건이나 사람을 기억하여 기념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의 억울한 사연을 잊지 않고 그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함이 첫 번째이고,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 문제를 푸는데 도움을 얻기 위함이 두 번째입니다. 506년 전에 일어났던 종교개혁은 우리가 그들을 위해 해 줄 일은 없어 보입니다. 종교개혁기념주일은 그게 무엇이 됐든 우리의 유익만 생각하면 됩니다.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에 시작해서 1564년에 끝났습니다. 독일을 위시해 10여 개 나라에서 47년간 진행된 사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개혁주일에 이 모두를 살피는 건 불가능하니 어느 나라, 어떤 인물에게 배울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16세기 종교개혁에 대한 한국 개신교인들의 지식은 일천해 보입니다.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 문에 95개조를 부착했다,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가 모토였다, 파문 당한 루터는 화형 당할 위기에서도 자기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성경을 모국어로 번역함으로 사제가 독점했던 성서를 민중에게 되돌려주었다, 일반 교인들도 회중 찬송을 할 수 있게 됐다 정도가 한국 크리스천의 평균 지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 지식으로는 종교개혁을 아무리 묵상하고 기도해도 문제 해결에 별 도움은 못 될 것입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해 한국 개신교나 개별 교회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면 우선 묵상이나 기도를 할 게 아니라 역사가 필요하겠다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루터에 한정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멜란히톤은 루터의 장례식에서 사도 바울 이래 가장 위대한 통찰력을 지닌 신학자가 루터라고 치켜세웠습니다. 그 이후 루터는 16세기 종교개혁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특히 독일에서 루터는 민족의 영웅 대접을 받았습니다. 히틀러는 1933년에 집권에 성공하자 루터 탄생 450년 기념으로 ‘루터의 날’ 행사를 거국적으로 실시했습니다. 나치 홍보에 루터를 이용한 것입니다.
21세기에도 종교개혁과 루터를 사실상 동일시하는 설교나 글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은 수많은 사람의 희생과 협력의 결과물이기에 한두 사람의 업적으로 만드는 일은 매우 부적합합니다.
더 큰 문제는 루터를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그의 치명적 약점과 실패를 은폐하거나 애써 외면한다는 점입니다. 루터에 대한 비판은 당대에 이미 시작됐습니다. 교황청의 비판과 저주를 빼더라도 그렇습니다. 농민 전쟁을 일으켰다가 고문 끝에 참수형을 당한 토마스 뮌처가 보기에 루터는 ‘귀족의 코에 입 맞추고 꿀을 발라 준 권력의 대변자’에 불과했습니다.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역사가 중 한 사람인 루시앵 페브르는 “루터의 개혁은 성공하지 못했다”고 잘라 말했고, 에릭 에릭슨은 <청년 마르틴 루터>에서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 때문에 종교개혁에 뛰어들었다며 평가절하했습니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루터가 세속 권력에 철저히 복종했음을 고발했습니다. 이처럼 루터에 대한 평가는 나라마다, 교단마다, 시대마다 다릅니다. 특히 현대로 오면서 일반 역사가들의 평가는 더욱 혹독해 졌습니다.
역사가 이러함에도 한국 개신교는 루터를 종교개혁의 영웅으로 받드는 모양새입니다. 최근 들어 루터의 약점까지 드러내는 책이나 논문이 가끔 나오긴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신학자와 역사학자들은 루터의 치명적 과오에 침묵하거나 21세기 기준으로 루터를 재단하지 말라며 핏대를 올립니다. 루터의 실패와 한계를 외면한 채 그를 치켜세우기만 한다면 우리는 종교개혁 역사에서 배울 게 별로 없습니다. 이제라도 한국 교회가 16세기 종교개혁의 실패를 통해 조금이라도 새로워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세속 권력과 타협의 산물이다.
1517년 10월 31일에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문에 붙였을 때 로마 교황청은 별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면벌부 판매 책임자 수도사 테첼이 1518년 6월에 루터를 고발하자 교황청은 그제서야 루터를 소환해 이단 재판을 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두 달 뒤에 루터는 아우크스부르크 카제틴 추기경에 불려가 심문을 받았으나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추기경은 작센 선제후에게 루터 추방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루터는 작센 선제후 현명공 프리드리히 덕분에 그때 죽지 않았습니다. 루터는 선제후라는 든든한 배경 때문이었는지1519년 6월에 처음으로 교황을 공개 비판했습니다. 1520년 6월 11일 100여 명의 기사가 루터를 보호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로부터 나흘 뒤인 1520년 6월 15일, 루터에게는 파문 경고 교서가 발부됐습니다. 루터는 서둘러서 <독일 그리스도교 귀족에게>란 논문을 써서 8월에 발간했습니다. 이 논문은 2주만에 4천부가 다 팔릴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습니다. 6개월 뒤인 1520년 12월 10일 루터는 교황의 파문 경고 교서를 만인들 앞에서 불태워버렸습니다. 그러자 1521년 1월 초에 교황은 루터 파문 교서를 발부했습니다. 소환된 루터는 95개 논조를 철회라라고 최후 명령을 죽기를 각오하고 거부했습니다. 루터는 법의 보호를 상실했습니다. 누군가가 루터를 죽여도 처벌받지 않을 상황을 맞은 것입니다. 이때도 작센 선제후는 루터를 납치로 위장해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데려가 가명을 쓰게 하고 1년간 숨어 지내게 했습니다. 거기서 루터는 독일어 성경 번역을 끝냈습니다.
과거에는 저 장면을 읽는 것만으로 심장이 쿵쾅거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루터가 믿는 구석이 있어서 저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루터가 쓴 <독일 그리스도교 귀족에게>란 논문은 작센 선제후와 독일 여러 도시 귀족들이 열광할 만한 내용의 논문입니다. 루터는 이 논문을 통해 로마 교황과 제세례파와 같은 "광신자들", 농민 전쟁을 일으킨 "폭도들"로부터 루터교를 수호하고 교회 질서를 유지할 권력을 제후들에게 귀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교황의 지배를 거부함으로 공백이 생긴 교회 권력을 "비상시 주교"인 제후들에게 갖다 바친 것입니다. 루터 덕분에 제후들은 자기 지역 교회의 입법, 사법 감독권을 손에 넣었습니다. 이들은 수도원과 수녀원을 폐쇄하고 교회 재산을 몰수해 마음대로 처분하였습니다. 수많은 수도원과 수녀원이 문을 닫았습니다. 루터교와 로마 가톨릭이 싸움 덕분에 제후들은 수도원 수녀원을 폐쇄하고 교회 재산을 멋대로 처분했습니다. 이처럼 루터의 종교개혁은 교황으로부터 교회를 해방시키긴 했으나 또다시 제후, 혹은 자유도시 주권자들로 하여금 "교회 지배"의 길을 터 주었습니다. 교회의 최종 권력은 하나님이 아니라 결국 시의회와 시청으로 넘어갔습니다. 루터는 이전에 교회개혁을 부르짖다가 화형을 당한 사람들처럼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해야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개혁을 절반의 성공이고, 미완의 개혁인 것입니다.
약자와 반대자에게 무자비했던 종교개혁
루터는 평생 교황과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싸움은 상대적이라지만 교황을 향한 루터의 비난과 조롱은 저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혐오스럽습니다. 루터는 교황 바오로3세를 남색자이고, 거룩한 동정녀, 여자 교황이라고 조롱했습니다. 루터는 교황을 저주하고 성적 모욕하고, 짐승에 빗대고, 사탄이라고 했습니다. 교황에게 분명 그런 측면이 있지만 루터의 비난과 조롱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그보다 견디기 어려운 건 농민, 유대인, 당시의 급진적 좌파 교회 개혁 세력인 아나뱁티스트, 그리고 퀴르크인으로 통칭되는 이슬람에 대한 루터의 독설과 저주입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하고 꼭 7년만에 농민들이 제후와 영주들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루터는 1523년에 <세속 정부에 대하여 어디까지 복종해야 하는가>와 <그리스도교 회중은 모든 교의를 판단할 권리와 힘을 가진다>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1520년에 발표한 세 개의 논문도 크게 주목을 받았습니다. 농민들은 루터가 교황에게 반기를 든 것이 영주의 강탈로부터 자신들의 해방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루터가 작센 선제후의 보호 아래 있게 되면서 루터는 경건한 통치자든 사악한 통치자든 항상 복종하고 저항하면 안 된다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토마스 뮌처가 농민 전쟁을 일으켰을 때 루터는 극도의 적개심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30만 명의 무장 봉기를 일으킨 농민과 도시 하층민들에게 저 강도, 살인자들을 개처럼 때려잡으라고 요청했습니다. 농민 반란자는 어디서든 두들겨 패고 목을 조르고 칼로 찌르라는 것입니다. 농민들은 그 전쟁으로 10만 명이나 죽었습니다. 루터가 시작한 종교개혁의 한계는 7년만에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루터가 유대인을 향해 드러냈던 분노와 적의는 루터교에서 가장 난처해 하는 대목입니다. 루터도 초기에는 유대인을 적대시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에 대한 루터의 기본 생각은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 1500년 동안 하나님께 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1531년에 루터는 유대인은 악당이기 때문에 세례를 주는 게 헛일이라 했습니다. 죽기 3년 전에 쓴 <안식일주의자들 반박>이란 논문은 끔찍합니다. 이 논문은 히틀러 이전에는 거의 잊혀졌던 글입니다. 이 논문은 히틀러의 독일 제3제국이 반유대주의적 이데올리기와 인종주의 선전에 활용하면서 부활했습니다. 루터는 이 논문에서 유대인이 예수와 기독교인에 대해 거짓과 신성모독 행위를 용납해선 안 된다며 여섯 가지 실천 방안을 제안했습니다. 첫째, 모든 유대교 회당과 학교를 폐쇄하라, 둘째, 집을 소유할 수 없도록 파괴하라, 셋째 유대인의 기도서와 탈무드를 빼앗으라, 넷째, 유대교 랍비들의 교육을 금지하라, 다섯째, 유대인의 통행 보호를 철회하라, 여섯째 유대인의 대부업을 금하고 저들의 금과 은과 현물을 빼앗으라는 겁니다. 루터 당시 유대인은 어디서든 저주받은 소수였습니다. 이미 여러 유럽 국가에서 추방당했습니다. 그런데도 루터는 유대인 랍비가 손톱으로 성기 포피를 찝는 모습을 묘사하여 할례를 조롱하고, 하나님의 선지자를 무시한 더러운 신부요 가장 추악한 창녀라고 모욕했습니다. 물론 루터는 평생 이렇게 사람을 공격하고 차별하며 살았던 건 아닙니다. 감동할 만한 사건도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순간 인간 존재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장기려와 교회 개혁
루터는 베드로 대성당을 건축하고, 사치와 예술 지원 때문에 진 어마어마한 부채를 청산하기 위해 면벌부를 판매한 로마 가톨릭에 맞서 복음의 바른 교리를 수호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싸웠습니다. 그를 존경하는 따르는 후대의 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루터가 바로 세우려 했던 교리를 너무 중시한 나머지 종교개혁이란 거대한 사건을 드러내는 일과 루터 개인의 일상과 실천에 소홀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루터가 교황의 권세와 다스림을 빼앗아 귀족에게 갖다 바침으로 복음이 얼마나 후퇴했는지를 보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장기려 선생은 루터나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과 달리 교리에 정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웃의 고통이나 아픔을 줄여주는 실천이었습니다.
“하나님 교회의 일과 신앙 교리에 관한 일을 내가 바로 하고 개혁하겠다는 생각은 망상이고, 악마의 계교에 걸리기가 쉽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장기려 선생이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겪은 일을 눈여겨 봐야 합니다. 1949년에 산정현교회가 중심이 된 순교 신앙을 수호하던 장로교회 일부는 일제 때 신사참배를 한 죄를 회개하기 위해 3일 금식하고 혁신 복구식을 거행했습니다. 이를 행한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지만 거부한 교회는 신사에 더렵혀진 교회라고 단정했습니다. 혁 신・복구를 하지 않은 교회와 신자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했습니다. 장기려 선생은 이런 글을 썼습니다.
“하루는 산정현교회에 있는 30세에 가까운 청년과 감리교 신도인 여자와 약혼문제가 일어나 당회가 열렸는데 혁신・복구하지 않은 교회의 신도는 신도로 볼 수 없다 하여 만일 결혼을 하게 되면 불신자와 결혼한 결과가 됨으로 교회법에 의한 치리를 받아야 한다는 결론을 낸 것이다. 그때 당회원으로 있으면서 나는 이상하게 생각 했다. 나는 감리교인도 예수를 믿는 신자로 인정하고 싶은데, 혁신복 구식을 거행하지 아니했다고 불신자로 규정하는 것은 과연 옳은 판단일까. 하나님께서 판단하셔야 할 일을 단지 혁신・복구식을 거행하 였는가 아니 하였는가의 의식으로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 되었으므로 나는 이남에 내려와서 한 번도 혁신・복구 운동을 강조한 일이 없다.
평생 간직한 교회 개혁 열망
장기려는 평생 예닐곱 교회를 다녔습니다. 선생이 출석했던 대다수 교회는 쪼개졌고, 신사에 굴복하였습니다. 해방 후 북한 교회의 절대 다수는 일제에 굴복했듯 김일성에 굴복해 변절했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교회 개혁은 일평생 장기려의 중요 관심사였습니다. 장기려 선생은 그 바쁘고 힘든 병원장과 대학 교수 생활을 하면서 31년간 30여 명이 모이는 부산 모임을 이끌었습니다. 밤잠을 줄이며 부산모임 소직지에 발표할 글을 수백 편 썼습니다. 정말 온 힘을 다해 썼습니다. 장기려 선생이 1957년에 이 모임을 만든 목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일찍이 한국의 기독교는 혁신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1956년 서울에서부터 부산 의과대학 외과교수가 되어 내려온 후에 외과교실원들에게 일본 무교회지도자들의 성서 강해를 한국말로 번역하여 전했다. 교회의 형식은 양하고, 기도 후 성경말씀 강해의 전달로 들어갔다.”
이토록 중요했던 부산모임을 해산하고, 일흔일곱 살에 제도권 교회를 버리고 이름도 조직도 없는 종들의 모임에 나가는 결단을 한 것도 저들에게서 참된 교회 개혁의 실천을 봤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을 만나고 장기려 선생은 루터, 칼뱅, 존 웨슬리, 퀘이커, 우치무라 간조 등의 종교개혁보다 종들의 모임이 더 진정한 교회 개혁이란 사실을 확신했습니다. 기독교가 개혁되려면 저들처럼 초대교회 전도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1987년 10월에 쓴 다시 인용해 봅니다.
“우리들이 바라는 교회생활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전도 방식(마태복음 10장)을 그대로 따르는 저희들의 신앙생활임을 알게 되어, 기독교의 개혁은 저희들의 신앙생활과 예수님의 교훈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이것이 또한 제가 바라던 기독교의 개혁의 방양이 아닌가 하고 생각이 되었다.”
한국 개신교 성장세가 정점을 찍었던 1974 년에 장기려는 한국 교회를 강하게 질타했습니다. 1973년과 1974년에는 100만이 모였다는 빌리그레이엄 전도집회와 엑스폴로 74 민족복음화대회를 보고 선생님은 크게 실망했습니다. 엑스폴로 74 민족복음화대화에 참석했다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현재의 기독교로서는 인류를 구원하지 못하겠다는 것이 소위 뜻있는 사람들의 말이다. 형식과 타산 효용에 치중하고 위선과 허식을 용납하는 불진실의 기독교는 생명이 없는 까닭이다. 기독교는 새 혁명을 요구하고 있다.”
장기려 선생이 ‘종들의 모임’이란 부른 이 소종파 신앙 공동체는 1897년 아일랜드에서 윌리엄 어바인(William Irvine)이 시작했습니다. 어바인은 기독교 사역의 유일한 기초가 마태복음 10장 5-15절에 있다는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교회가 조직되기를 원하는 방식으로 이 말씀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어바인은 마태복음 10장을 예수가 모든 사람을 위해 제정한 사역의 모범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종들의 모임의 모든 설교자들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교회에서 월급을 받지 않습니다. 각자 직업을 갖고 마태복음 10장에 따라 둘씩 꼭 짝을 지어 복음을 전합니다. 이들은 가정에서 모입니다. 이 운동은 처음에는 아일랜드 전역에서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초기의 주의 종들이 미국과 캐나다, 뉴질랜드, 호주 및 남아프리카에서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 소종파는 기존 교회에 강한 반감을 보였고, 성직자 및 기타 교파를 비판했습니다.
장기려 선생이 진정한 교회 개혁이라고 한 종들의 모임 또한 교리를 조금도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만족하고 예수님이 마태복음 10장에서 가르쳐 준 대로 믿고 그 방식대로 복음을 전합니다. 그래서 종들의 모임에는 교단 건물이 없고, 신학교도 없고, 교단 헌법도 없습니다. 이들은 성경과 찬송가 이외에 그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습니다. 종들의 모임에서는 설교를 기록하는 것을 배신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니 종들이 설교 원고를 작성하지도 않습니다. 물론 녹음이나 녹화도 하지 않습니다. 이들에게는 전화번호부가 전부입니다. 종들의 모임의 가정 모임에는 가정을 오픈한 장로가 있습니다. 장로는 가정을 늘 오픈해서 여행객을 무료로 대접합니다. 그래서 종들의 모임 교인들은 세계 어느 곳을 가든 호텔이 아니라 그 지역 종들의 모임 가정교회에서 유숙합니다.
종들의 모임은 춤, 텔레비젼, 청바지, 보석 착용, 메이크업, 영화, 흡연, 스포츠, 머리 자르기 등을 금합니다. 매우 보수적인 삶을 삽니다. 아미쉬 공동체만큼 모든 문명을 거부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나라 60-70년대 여전도사님들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시대에 뒤떨어진 복장과 대다수 현대 문명을 거부하며 살아갑니다. 찬송가만 허락된 안식일과 토요일 밤을 제외하고는 클래식 음악은 허용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요즘 종님들은 휴대폰을 쓰고 공용 자가용도 타더군요.
이들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곧이곧대로 믿고 실천합니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이렇게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공동체가, 예수님이 마태복음 10장을 주실 때와 똑같이 신앙생활을 하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면서도 여성 주의 종을 세운다는 점입니다. 또 한가지 마태복음 10장 말씀을 선택적으로 적용하는 부분은 마태복음 10장 10절 하반절에서 분명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음에도 이 대목을 외면하고 일절 교회로부터 월급을 받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사실 종들의 모임에는 헌금도 없습니다. 필요한 만큼 자발적으로 낸 돈으로 모임을 이끌어 갑니다.
이제 정리해 봅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나 종들의 모임 모두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게 진정한 종교개혁이라 확신했습니다. 16세기 개혁자들에게 근원은 교리였는데 반해 19세기 말 아일랜드에서 시작된 종들의 모임은 생활의 실천이자 예수님이 복음을 전한 방식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 종교개혁이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가들은 가톨릭을 개혁하는 게 목표였으나 실패해 개신교를 세웠지만 종들의 모임은 기존 제도권 교회를 비판하긴 했으나 저 교회를 개혁하겠다는 목표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종들의 모임의 복음 전도자들은 무소유를 실천하며 이 세상 부귀영화에 관심이 없는 삶을 실천하여 장기려 선생을 감동시켰지만 그들 모임에도 부끄럽고 참담한 어두운 그늘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평생 무소유를 실천하고 결혼도 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겼지만 성적 유혹 앞에 무릅을 꿇었고, 비밀 결사체나 다름 없는 종들의 모임을 지키기 위해 성적으로 학대당하고 피해를 입은 아이들과 여성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우리 주님이 오실 때까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와 성도는 결코 완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종들의 모임은 생생하게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장기려 선생이 몇 년 동안 점검하고 테스트하고 선택한 종들의 모임도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이 점 하나만 기억한다면 우리 눈에 보이는 교회 공동체나 그 멤버들이 우리에게 충격과 엄청난 실망을 안긴다 하더라도 낙심치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있었던 그 어떤 교회도 이런 아픔과 모순을 극복하지 못한 채 주님을 섬기다 갔기 때문입니다. 루터의 실패와 끝내 극복할 수 없었던 약점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참 지혜를 얻게 되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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