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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김영환 (金永煥)과 윤택림
1989년이면 제6 공화국 노태우 정권 시절이다. 그해 1월 1일 해외 여행이 전면 자유화되었고, 5월 2일 동의대학교 사건이 발생했으며, 6월 4일 중국 천안문 사건이 일어났고, 7월 1일 의료보험제도가 모든 국민에게 확대 실시되었다. 6월 30일 전대협 대표 임수경 (그 당시 한국외국어대 불어과 4년)이 단신으로 극비리에 평양에 도착해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 뒤 8월 15일 판문점을 통해 돌아왔다. 그녀는 평양 축전에 참가해서 북한 학생위원회 위원장 김창룡과 함께 1995년까지 조국통일 위업을 실현하기 위한 공동투쟁 등 8개 항의 ‘남북 청년학생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1984년 봄이다. 겨울이 오면 봄이 어찌 멀겠는가. 언뜻 보기에는 잠을 자는 듯 게으른 봄이 이제는 눈이 부시게 다가온다.
그해 봄, 파란 하늘은 부드러운 햇살로 가득했지만 봄의 색깔인 초록빛은 아직 옅었다. (오만불손한) 전두환 군사정권은 독재정권의 본색을 점점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암울한 시절이었다.
김영환은 어느덧 3학년이 되었다. 그 무렵 김영환이 활동하던 서울대 공개 서클인 고전연구회 멤버들 가운데 언더의 필요성을 느낀 사람들이 뭉쳐 (주로 82학번을 중심으로) 그들만의 언더를 만들었다. 그들은 그것을 ‘고연 언더’라고 불렀다. 그때 멤버들이 나중에는 구국학생연맹, 반제청년동맹, 그리고 민족민주혁명당 (민혁당)까지 이어지는 주사파 핵심 그룹의 인맥을 탄생시켰다.
이듬해 (1985년) 지하 서클 고연 언더의 명칭을 단재사상연구회 (단연)로 바꿨다. 단재는 초기에는 강력한 민족주의자였지만 나중에 아나키스트가 되었던 신채호 선생의 호다.
1986년 3월 서울대 한 강의실에 지하 서클 소속인 운동권 학생 1백여 명이 집결했다. 참가자들은 이곳에서 국내 최초 NL (national liberation) 노선의 학생운동조직인 ‘구국학생연맹’을 조직하기로 했다. NL은 반제직투론을 주창한 반미 자주화 노선이었다. 한국 사회는 미국의 식민지이기 때문에 맨 먼저 미국을 축출하는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만 CA와 PD는 사실 1970년대 운동권에서부터 맹아가 존재했기 때문에 NL은 나중에 생긴 그룹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반면에 PD (people’s democracy) 노선은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을 모델로 삼아 민주주의 혁명 이후 사회주의 단계로 간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사회주의 혁명을 하려면 북한을 동맹 세력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CA는 제헌의회 (constituent assembly)의 약칭으로 대한민국 정부를 원천적으로 부정하면서 제헌의회를 소집하여 다시 헌법을 만들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자는 가장 노골적인 혁명 노선이었다.
NL노선이 대학 캠퍼스를 벗어나 사회 운동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다. PD계열은 6월 항쟁 당시 제헌의회 소집이라는 관념적이고 과격한 구호를 외쳤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런데 NL계열은 독재 타도, 직선제 쟁취라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구호를 내걸고 여러 반체제 세력과 연대해서 활동했다. 6월 항쟁이 승리로 끝나면서 PD계열은 몰락에 가깝게 위축된 반면 NL계열은 활동 범위가 크게 넓어졌다.
하지만 80년대 학생운동의 시작은 80년 5월 광주였다.
김영환이 언젠가 말했다. 80년 5월 광주는 80년대 초반 학번인 우리의 20년대 청년 시절을 정면으로 관통한 시대의 키워드였다. 누군가는 함께하지 못해 미안해했고 누군가는 진실을 알려야 한다고 피가 끓었으며 또 누군가는 배후를 찾고 책임자를 처벌하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그것이 역사적 숙제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5월이고 광주였다.
80년대 중반 무렵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이 발악을 하던 시절이어서 고문 기술자들의 전성기였다. 그 당시 악랄한 고문의 3대 명소는 안기부 남산 분실, 보안사 서빙고 분실,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 등이었다. 1980년 봄, 김재규 장군은 서빙고 분실에서 필설로 형언할 수 없는 온갖 몹쓸 고문을 당했다. 1985년 가을,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의 의장 김근태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20여 일에 걸쳐 순서대로 몽둥이질, 잠 안재우기, 물고문, 고춧가루 고문, 고문 기술자 이근안 경감에 의해 전기 고문을 당해서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1986년 6월에는 권인숙 양이 주민등록증을 위조한 공문서 변조 혐의로 부천경찰서에 연행되어 문귀동 경장으로부터 성고문을 당했고, 1987년 1월에는 박종철 군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당하는 과정에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1986년 11월 ‘민족해방노동자당’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김영환은 1심에서 징역 15년 구형에 7년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2년 1개월을 복역하고나서 1988년 12월 정치범들이 대거 풀려날 때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물론 그 역시 체포되고 나서 어김없이 심한 고문을 당했다. 조사를 받기 위해 끌려간 곳은 안기부 남산 지하실이었다. 거기서 장장 47일 동안 조사를 받았다. 첫 사흘은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고 잠 안재우기와 몽둥이 찜질만 했다. 먼저 기를 쑥 빼내어 저절로 불도록 하는 수법이었다. 나흘째 되는 날부터 처음으로 조사가 시작되었다. 연속 27일 동안 쉼 없이 정말 죽지 않을 만큼 얻어맞았다. 사람이 이렇게 맞아도 과연 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맞았다. 온몸이 퉁퉁 부어올라 얼굴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여서 세면대에 고인 물에 비친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지를 뻔한 적도 있었다. 빵처럼 부어오른 살을 꾹 누르면 푹 들어갔는데 다시 원상태로 되돌아오기까지 몇십 분이 걸렸다. 계속 얻어맞다보니 동물적 심리상태가 되어 고통받는 것과 고통받지 않는 것, 이 두가지만이 사고의 모든 것을 지배했다. 고문 집행자는 ‘너는 골병이 들어 제 명에 못살 거다’ 라고 악담을 퍼부었다.)
그 무렵 김영환과 서울대 법대 82학번 동기이자 고전연구회 멤버였던 하영옥은 자신이 주도해서 주체사상을 지도 이념으로 하는 지하 혁명조직인 ‘반제청년동맹 준비위원회’를 이미 만든 상태였다. 반제청년동맹은 김일성이 청년 시절 만주 길림에서 결성한 비합법 지하 청년 혁명조직의 이름이다. 반청은 민혁당의 모태가 된 전위조직이었다. 반청은 1989년 3월 3일 공식 출범했는데, 김영환은 하영옥의 권유로 이 조직에 가입해 중앙위원이 되었다.
반제청년동맹 활동을 하면서 대외적으로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회 (전민연)’ 조국통일위원회 위원 직함으로 활동하던 김영환은 1989년 7월 초 한겨레사회연구소 연구원 ‘김철수’라고 자신을 소개한 중년 남성으로부터 만나자는 전화를 받았다.
약속 장소에 나가자 전화를 걸어왔던 그 남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김영환을 만나자마자 서슴없이 자신의 정체를 털어놨다.
북한은 1989년 7월 남한 주체사상의 원조라 불렸던 김영환과 접촉했다. (그가 강철이라는 필명을 사용해서 여러 글을 썼던 것은 86년의 일이었고 「강철서신」이라는 책은 89년에 나왔다. 이 책은 그가 편집 과정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쇄되고 나온 다음에 이런 책이 나온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 책에는 그가 쓰지 않은 글이 강철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글도 한 편 있었다.) 남파 간첩 윤택림은 김영환을 만나 북한과의 연계를 권유했다. 그는 북한과 직접 연계하는 것이 가져올 여파 때문에 고민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혁명을 위해서 협력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공감하고 이를 수락했다. 윤택림과 접촉을 통해 북한과 긴밀히 연결되면서 김영환은 이를 계기로 반제청년동맹 (민혁당의 전신) 위원장을 맡게 되고 1992년 3월 민족민주혁명당 (민혁당)을 출범시킨다. 민혁당은 그 당시 남한 내 최대 규모의 주사파 지하조직이었다.
민혁당의 정조직원은 100명가량이었다. 거기에 17개의 RO (revolution organization, 혁명조직)을 포함한 400명 정도의 조직원이 있었다. 그들이 민혁당의 뿌리였다.
김영환이 말했다.1989년의 4월과 1990년 4월의 내 신분은 달랐다. 1989년에 나는 다른 중앙위원들과 다를 바 없는 남한의 자생적 주사파였지만, 1990년에 나는 남파 간첩을 만나 조선노동당에 비밀 입당한 신분이 되었다. 북한과 직접적인 연계선을 갖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냐 하는 것은 주사파 운동권에서는 상하 지위와 명령 복종 관계를 규정하는 결정적인 차이를 갖는 요건이다.
1989년 6월 중국 북경의 천안문 광장에서 민주화를 요구한 학생과 시민들을 인민해방군이 무력으로 진압했다. 그 해 내내 인민해방군은 천안문 광장에서 민중 봉기의 마지막 흔적들을 지우고 있었다. (동과 서, 독재주의와 민주주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대결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이 11월 붕괴되고 나서 소련의 서기장 고르바초프는 12월 몰타 회담에서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과 함께 냉전의 종식을 선언했다.
그해 5월 3일 부산 동의대학교에서 입시 부정을 이유로 학내 시위가 벌어졌다. 그때 전경 5명이 학생들에 의해 감금되고 이를 구출하려던 경찰관 7명이 화재와 추락으로 사망하고 10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현장에서 학생 94명이 연행돼 그중 77명이 구속되어 31명이 2년에서 무기징역까지 선고받았고 46명이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다.
1989년 7월 초 그날 김영환이 집에 있는데 전화가 왔던 것이다.
“지금 집 앞에 있는데 만날 수 있습니까?”
그는 당시 운동권 사람들은 대개 가명이나 위장된 직함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또 누가 연구 자료 같은 것이 필요한가 싶어서 별다른 의심 없이 나가보았다. 4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그 남성이 노량진 사육신 묘지 건너편 골목의 공중전화 박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중간 키에 풍채가 좋았지만 평범한 얼굴이었다. 검은 테 안경을 썼고 서울 말씨였다. 넥타이를 매지 않았으나 흰 와이셔츠에 검은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그 남성이 말했다.
“잠깐 함께 걸을 수 있겠습니까.” 그가 살며시 미소를 건네면서 말했다.
“무슨 일로……?”
그가 주저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북한에서 온 연락 대표입니다. 김 선생과 통일 사업에 관해서 논의하고 싶습니다.”
김영환은 그 순간 당황했다. 약간 흥분하기도 했지만 평소의 평정심을 잃지는 않았다. 본능적으로 주위를 돌아보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북한에서 왔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그렇게 의심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제가 북한에서 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무슨 방법으로……?”
“며칠 후 12시에 평양방송을 들어보면 나올 것입니다. 그걸로 확인하면 될 겁니다.”
윤택림이 말한 내용은 ‘평양의 김영희 씨가 서울의 이경수 씨에게 보내기로 한 편지는 읽어드리지 않겠습니다.’라는 것이었다.
〔1980년대 말, 북에서 남파된 두 사람의 간첩이 있었다. 윤택림과 진운방이다. 1989년 결성된 지하조직 반제청년동맹 초기, 윤택림은 김영환과 접촉했고, 진운방은 김경환과 접촉했다. 같은 지하조직에 있었지만 김영환과 김경환은 처음에는 서로를 몰랐다. 간첩조직은 원래부터 서로 단절된 점조직이다. 김영환은 나중에서야 김경환을 알게 되었고 그가 진운방을 소개해준 것이다. 그 후 북한은 혼선을 피하기 위해서 조정을 했다. 김영환을 총책으로, 김경환을 하부 연락책으로 한 것이다. 그런 후 윤택림은 북한으로 철수했고, 진운방은 남한에 계속 남았다.
윤택림은 1977년부터 1989년까지 다섯 차례나 남파되어 성공적으로 인무를 수행했기 때문에 영웅메달 1개, 김일성 훈장 1개, 국기 훈장 1급 4개를 받은 전문 공작원이었다. 90년대 말에는 대외연락부 5과장이었다.
김동식은 1995년 10월 24일 충남 부여 정각사에서 군경과 총격전을 벌이다 체포된 뒤 전향한 북한 공작원이다. (본명이 곽인수이고 2014년 통진당 해산사건에서 정부 측 증인으로 출석해서 증언했었다.)
그가 말했다. “윤택림은 1999년 당시에는 북한 대외연락부 5과장이었다. 한때 남한에 5개의 망을 한꺼번에 운영했다. 그중 하나가 김영환이었다. 윤택림이 북한에 돌아온 뒤 그의 활동 성과를 자료로 만들어 모든 공작원이 돌려 봤다.”〕
남파 간첩 윤택림 (가명 김철수)과의 첫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정말로 평양방송에 그런 내용이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 다음 날 그를 다시 만났다.
여름이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지루한 여름날에 더위는 불같이 타오를 것이다.
김영환은 독학으로 주체사상을 공부하고 NLPDR 이론도 만들어냈는데 이렇게 남파 간첩까지 접선하게 되니 좀 어리둥절하기도 했지만 사실 언젠가는 마주칠 것이라고 숙명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아주 빨리 스물여섯의 나이에 찾아왔을 뿐이다.
김영환이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가 지시를 내리겠습니다. 제 지시는 본부의 지시 사항이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우리는 가끔 접선해야 합니다. 서로 알고 있는 정보의 교환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각별히 보안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함과 냉정함을 잃지 마세요.
지금부터 내 이름은 ‘김철수’입니다.”
그의 단단한 목소리에서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저한테 어떤 직책을 부여해 주십시오. 그게 필요합니다.”
“그렇지요. 빠른 시일 내에 조선노동당에 현지 입당을 하는거요. 그러려면 입당식이 있어야 하지. 조선노동당 규약을 철저히 암기해서 숙지해야 하오. 그 규약의 깊은 뜻을 뼛속 깊이 새겨야 한단 말입니다. 그리고 하루빨리 공작원 활동을 하는데 필요한 훈련과 교육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게 끝나면 암호명을 부여할 겁니다.”
“무전기 등이 필요할 텐데요?”
“내가 무전기와 난수표 등 필요한 것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는 쓸데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무심하게 묻는다.
“북한 인민의 생활 수준은 어떻습니까?”
“남한의 상류층보다는 못하지만 하류층보다는 잘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는 북한을 방문하여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십시오.”
“저에게 기회가 있을까요?”
“그렇고 말고요.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본부에 연락해서 일정을 잡겠습니다.”
“남한에서 주의 깊게 관찰한 것이 있나요?”
“자본주의는 빈익빈 부익부이지요. 돈이 지배하는 사회는 천박해요. 돈보다는 인간이 중요합니다.”
“북한에서는 진정한 공산주의 사회가 실현되고 있나요?”
“장담하건데…… 우리는 평등 사회요. 우리끼리 잘살고 있소. 자본주의식 약육강식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 말씀에 동의할 수 있을까요?”
“그걸 알아야만 하오. 우리만의 내적 논리가 있습니다. 주체사상이야말로 인류 역사상 최고의 이념이고 사상이오. 자본주의는 계속적으로 타락할 수 밖에 없어요. 내가 남조선에서 몇 달 살아보니 피부로 느꼈습니다. 자본주의는 결국 소멸할 거요. 남조선 인민들이 하루빨리 그걸 알아야만 해요.”
“조금 민감한 질문을 해도 될까요?”
“우리는 동지입니다. 꺼릴 게 뭐가 있겠습니까?”
“제가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1983년 10월 아웅산 테러 사건을 누가 일으켰습니까? 지금 남한에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자작극이라느니 북한의 소행이라니 하면서 말입니다.”
“북쪽에서는 철저히 부인했습니다. 우리는 믿거나 말거나 6·25 전쟁도 북침이라고 주장하고 있소.”
“제가 대학 2학년 때죠. 우리는 지금까지도 정부의 발표를 믿지 못하고 반신반의하고 있습니다. 군사정권을 도저히 믿을 수 없으니까요. 왜……? 당사자 본인은 멀쩡하고 주변인만 죽었을까요?”
“북한군 특수 부대가 했습니다. 그건 빼도 박도 못하는 진실입니다. 세 명의 폭파 전문 특수 요원이 ‘동건 애국호’를 타고 9월 9일 옹진항을 출발해서 15일 새벽 버마 랑군강 입구에 도착한 겁니다.
그날 실수가 있었지요. 너무 일찍 누른겁니다. 그래서 철천지원수는 살아남았습니다.”
당시 운동권에서는 ‘북한의 소행이다.’, ‘남한의 자작극이다.’하는 논쟁이 있었는데, 그때까지도 북한은 자신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계속 주장했었다. 그것을 북한 간첩이 그 앞에서 ‘우리가 한 것’이라고 솔직하게 시인한 것이다. (사실 그때 운동권에서는 ‘북한의 소행이라 하여도 통쾌하다’라는 반응마저 적잖았다. 그만큼 전두환 대통령을 증오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던 것이다.)
김영환은 윤택림과 관악산 등산 등을 하면서 6~7차례 더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윤택림이 물었다. “반제청년동맹을 출범시키면서 왜 당 명칭을 쓰지 않았나요?”
김영환이 대답했다. “남한에서 유일한 전위당은 한국민족민주전선인데 약칭해서 한민전이라고 했습니다. 당이라는 명칭을 쓰는 것은 주제넘은 일이라고 생각한 거죠.”
“한민전이라는 것은 실체가 없어요. 그냥 노동당 사회문화부에서 임의적으로 쓴 명칭에 불과해요.”
“한민전이 실체가 없다면…… 정식으로 지하당을 만들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조선노동당처럼 당 명칭을 사용하는 거죠.”
“남한에서 혁명운동을 주도하는 지하혁명당의 건설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당 명칭을 써도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지하당을 결성하고 나서 적극적으로 활동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합법적인 진보정당이 필요합니다. 김 선생께서 합법적인 진보정당과의 연계 방법에 대해서 깊이 연구해 보십시오. 그 정당을 지하당이 지원하고 조종하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김영환은 윤택림에 의해 조선노동당에 현지 입당했다. 입당식은 관악산에서 진행되었다.
그날, 그들은 인적이 거의 들지 않는 관악산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헉헉대며 가파른 산비탈을 오르며 솔잎을 밟을 때마다 바스락거렸다. 다람쥐가 소나무 꼭대기를 향해 잽싸게 달아날 때 발톱에 나무껍질이 긁히는 소리가 났다.
공기는 상쾌하고 신선했다. 머리 위로 가을 낙엽이 살포시 떨어진다. 멀리서 아득히 도시의 소음이 들려왔다.
그들은 말없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걷는다. 윤택림이 앞장서서 걷는다. 그는 관악산의 작은 봉우리들, 샛길, 계곡의 물줄기, 지류, 굽이 등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남파 간첩들은 혹독한 훈련을 통해서 독도법과 지형도를 잘 알았고 지형지물을 한눈에 익히는 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김영환은 끊임없이 갈등을 느낀다. 하지만 어차피 통과해야 할 거룩한 행사였다.
김일성 초상화나 인공기를 걸어놓지 않고 윤택림의 지시에 따라 조선노동당 규약에 대한 문답 형식으로 당성 심사를 받은 다음 입당 청원서를 선서 형식으로 낭독했다.
김영환이 받은 대호 (代號, 암호명)는 관악산 1호였다. 공작금 9백만원과 구식 무전기, 10개의 호출부호 (이 중 3개의 호출부호는 비상용이었다), 난수표를 받았고 난수 해독용 책은「나는 너에게 장미의 화원을 약속하지 않았다」로 정했다.
이제 조선노동당의 현지 당원이 된 것이다. 전두환 군사정권에 대한 반감을 안고 대학에 들어가 사회주의 이념에 경도되고, 반미주의와 친북주의를 만들어내고, 지하조직을 만들고, 적발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감옥살이를 하고, 다시 지하조직에 가담하고, 급기야 남파 간첩을 만나 북한 간첩이 되는 기구한 운명의 굴레였다.
하지만 그때는 그리 특이한 삶의 궤적이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남한 혁명가로서 당연히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북한은 두 달에 한 번씩 평양방송을 통해 연락을 했다. 이를테면 방송에서 먼저 네 자리의 호출 부호를 말한 뒤 “전문을 보내드리겠습니다”라는 말에 이어 숫자를 방송한다. 그러면 난수표와 해독표를 보고 지시 사항을 판독하는 식이었다.
1991년 2월경 김영환은 동작구 노량진동에 있는 어느 빵집에서 김경환을 만나서 ‘진운방과 나 사이에서 중간 연락책으로 활동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면서 상호연락, 접선방법, 비상시 보안대책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다. 그리고 1991년 8월 중순에는 그를 조선노동당에 입당시키고 ‘관모봉’이라는 대호를 부여했다. 그때부터 김경환은 김영환이 작성한 대북보고 문건들을 건네받아 진운방에게 넘겨주면 그가 북으로 보냈다.
김영환은 관악산에서 현지 입당할 무렵, 윤택림에게 받은 무전기가 있었다. 그런데 구식이어서 메시지를 전송하기가 무척 복잡하고 까다로웠다. 보통 100~150자 정도의 짤막한 전문만 보냈고, 200자가 넘는 내용은 보내기 어려웠다. 1991년 북한을 다녀온 뒤에는 조유식이 디지털 방식으로 된 신형 무전기를 드보크를 통해 전달 받았지만 그 무전기 역시 긴 내용을 주고받기에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진운방을 통하면 하나의 짐을 더는 셈이었다. 북한과 길게 이야기할 내용이 있으면 장문의 문서를 준비하고, 진운방이 그것을 마이크로 필름에 담아 해외를 오갈 때 전달하는 방식으로 소통이 진행됐다.
진운방은 아내 종옥청과 딸을 데리고 일본을 통해 입국해서 활동했다. 그 당시 동남아식 콧수염을 멋있게 길렀고 중국어에도 능통하여 누가 봐도 말레이시아 거주 화교라고 할 수 있었는데, 강남구 논현동에서 말레이시아 전통 음식점인 ‘삿떼리아 코리아’를 운영하고 있었고 명동에서는 ‘마코 인터내셔널’이라는 무역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김경환은 1989년 9월 중순 경부터 ‘삿떼리아 코리아’에서 진운방 (陳運芳), 종옥청 (鍾玉淸) 부부와 만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말레이시아 국적의 화교로 위장한 북한 대외연락부 소속 공작원이었다.
진운방은 몇 달 지나고 서로 얼굴이 익숙해지면서 ‘나는 말레이시아 화교지만 사실은 조선족 출신이다. 북한에서 통일 사업을 하러 온 사람이다. 김 선생이 활동 중인 반제청년동맹 조직에 대해서 출범 초기부터 이미 알고 있다. 함께 통일 사업을 해보자.’고 제의를 했고, 그때부터 김경환은 포섭이 된 것이다.
그러던 중 1992년 9월 26일 남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이 터진 것이다. 그 무렵 신변의 위협을 느낀 진운방 부부는 황급히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들 부부는 종로구 동숭동에서 전세로 살고 있었다. 황급히 떠나면서 집주인에게는 ‘주택구입 자금을 가지러 중국에 다녀오겠다’면서 전세금 3천700만원 등 8천만원 상당의 재산과 가재도구들을 그대로 남겨둔 채 홍콩으로 출국한 것이다.
그 후 한달 뒤 전셋집 주인에게 국제전화와 편지를 통해서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아내와 딸은 죽었고 나는 다리를 많이 다쳐 걸을 수가 없어서 한국에 갈 수 없다. 내가 남겨둔 007 가방, 핸드백, 수첩, 사진, 팩스 서류 등을 DHL편으로 홍콩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 후 진운방의 소식은 두절됐다.
그때 북쪽 본부는 김영환에게 ‘조직 안전 위해 본부 련락원 철수시켰음. 현지 관계자들에게는 해외 여행중 교통사고로 중상을 당해 입국못하는 것으로 위장했음’이라는 내용의 통지문을 보냈다.
1990년 7월 하순 경, 황인오는 (북한 정치국 후보위원이었던) 전설적인 늙은 여간첩 이선실과 남파 간첩 권중현을 만났다. 그는 50대 초반으로 보였다. 반쯤 머리가 벗겨졌고 165센티미터 가량의 다부진 몸매였다.
권중현이 말했다. “나는 대외연락부에서 파견됐습니다. 황 선생님이 노동자들을 위해서 얼마나 헌신적으로 투쟁해 왔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사북 동원탄광 사태를 영웅적으로 주도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미스유니버스 선발대회장을 폭파하려고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황 선생님을 만나보라는 김일성 주석님의 지시를 받고 찾아왔습니다.”
권중현은 황인오를 포섭하는데 성공했다. 그 후 황인오는 대둔산 11호라는 대호를 부여받았고 김춘배, 이윤하, 정중건이라는 가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90년 10월 17일 저녁 무렵 강화도 양도면 건평리 해안에서 황인오는 남파 간첩들인 이선실, 권중현, 김돈식과 함께 북한의 공작 침투용 반잠수정을 탔다. 반잠수정은 남쪽으로 내려와 삼산면 남쪽 끝에서 강화만 쪽으로 올라가 NLL을 통과해서 황해남도 옹진반도와 연백군 사이 해주해협을 지나 해주에 도착했다.
그들 일행은 다음 날 새벽 해주 해군기지에 도착한 다음 벤츠 승용차를 타고 변두리 허허벌판으로 이동했다. 먼지가 자욱한 거리에 반바지 차림의 두 명의 소년이 나무 밑에서 놀고 있다가 그들이 탄 차가 지나가자 장난스럽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나서 깔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날 밤 서해 바다에서 올라온 얕은 밤안개가 뻘밭을 감쌌다. 바다의 짠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건너편 등대에서 불빛이 깜빡였다. 뻘밭은 소금을 뿌려놓은 듯 수만 개의 하얀 물빛이 아득한 꿈결처럼 반짝였다. 파도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절대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고요와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건평리 해안에서 방수복을 입고 긴 고무장화를 신고 북한 호송원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발이 깊숙이 푹푹 빠지는 검은 뻘밭을 지나갔다. 새벽 2시경 그들은 대기하고 있던 북한의 공작 침투용 반잠수정에 올라탔다. 반잠수정이 깊은 바다로 나와 속도를 내기 시작하자 엔진 소리에 귓전이 윙윙거렸다. 차가운 밤바람에 온몸이 덜덜 떨렸지만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속절없이 흘러내렸다.
그들 일행은 해주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조선의 관문이라는) 평양 순안공항으로 날아갔다. 도착하자마자 먼저 만수대 광장에서 김일성 동상을 참배했다. 그때 이선실은 감격에 겨워 김일성의 발등을 쓰다듬으며 오랫동안 흐느꼈다.
황인오는 일주일 동안 머물면서 사회문화부 사람들로부터 온갖 환대를 받았다. 사회문화부는 대남 조직을 총괄하는 대외연락부의 위장 명칭이었다.
특별 영화실에서 세 시간 동안 임수경 양의 방북 활동을 담은 영화 한 편과 김일성 주석의 국제적 사회주의 영도자로서 위대함을 부각하는 영화 두 편을 봤다. 그리고 북한에서 제일 호화로운 식당에서 특별 대접을 받았다. 산해진미가 가득한 식탁에는 북한에서 나오는 술이란 술은 모두 내놓은 듯 술병이 즐비했다. 그들은 함께 건배했다. ‘위대하신 수령 김일성 장군님과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의 만수무강을 위하여’ 건배했고, ‘다가오는 95년에는 기필코 김일성, 김정일 두 분을 통일의 광장에 높이 모실 것을 맹세’하는 건배를 했고, ‘이선실 할머니의 10년간의 공작활동을 성과적으로 마치고 무사히 귀환한 것을 축하’하는 건배를 했고, ‘황동무의 용맹한 결단과 사회주의 조국 공화국 북반부에 무사히 돌아온 것을 축하’하는 건배를 했다.
그는 돌아올 무렵 두 가지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첫째는 이창선 부장으로부터 아주 은밀한 지령을 받은 것이다. 그가 지시했다. “황 선생, 서울에 내려가면 남한 사회에 한 가지 소문을 퍼뜨려 보시오. 다름 아닌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께서 축지법을 써서 남조선을 다녀오셨다고 소문을 퍼뜨리는 거요. 다시 말하면 남한 전역이거나 대학 사회에 김정일 동지께서 축지법을 써서 남조선 인민 등을 위로하시는 등 신출귀몰해서 남조선 인민들이 김정일 동지를 열렬히 흠모하고 있다는 내용의 소문을 만들어 퍼뜨리는 거요. 이것은 일체 비밀이요. 부부장이나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고 황 선생만 알고 결행하시오.”
두 번째는 남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결성이라는 중대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것은 너무나 크고 어려운 임무였다. 그리고 무전기, 권총 (벨기에제 FN BDA 콤팩트 권총), 일화 500만 엔과 주체사상 교양 책자 등을 가지고 함께 올라간 남파 간첩들은 평양에 그대로 남은 채 혼자서 반잠수정을 타고 건평리 해안을 통해 돌아왔다.
황인오는 1992년 7월 말 북한의 지령에 따라 남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북한과 관계없는 자생적인 조직임을 주장하기 위한 위장 명칭은 ‘민족해방 애국전선’이었다)을 결성하고 총책이 되었다.
남한 조선노동당 당원들의 맹세문
나는 수령님께 무안히 충직한 수령님의 전사이다.
나는 영생 불멸의 주체사상으로 무장한 주체형의 혁명가이다.
나는 조선의 영예로운 전사이다.
나는 민중과 운명을 같이하는 민중의 벗이다.
나는 목숨바쳐 조선과 혁명을 지킨다.
나는 한국민중의 애국적 전위이다.
하지만 그는 9월 9일 서울 북부경찰서 (지금은 서울 강북경찰서) 맞은편 생맥주 집에서 체포되었고 안기부의 수사과정에서 비로소 오랫동안 암약해온 이선실과 남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그 당은 탄생하자마자 한 달여 만에 소멸되었다.
중부지역당 사건의 수사 과정에서 안기부는 10년 동안이나 까마득히 모르고 있다가 할머니 간첩 이선실의 정체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선실은 그때 북으로 올라가서 다시는 내려오지 않았지만 기구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미제 간첩으로 몰려 혹독한 고문을 당하던 중 사망한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1991년 5월에 무슨 사건들이 일어났던가? 1991년 4월 26일 명지대 앞에서 시위 도중 (사복을 입은 경찰 체포조인)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강경대 학생이 숨을 거뒀다 (그의 장례식은 당국의 비열한 탄압과 방해를 받으면서 우여곡절 끝에 5월 14일, 18일, 20일 세 번이나 거행되었다).
그 후 노태우 정권에 항의하며 대학생 3명이 연이어 분신 자살을 했다. 전남대 박승희, 안동대 김영균, 경원대 천세용 세 사람은 그 당시 모두 대학 2학년생이었다.
5월 5일 자 ‘조선일보’에 게재한 기고문에서 (저항 시인에서 생명 사상가로 전향한) 김지하는 ‘젊은 벗들에게 죽음을 이용하지 말라’고 준엄하게 꾸짖었다. 사흘 뒤인 5월 8일 서강대 박홍 총장이 기자회견을 열어 ‘지금 우리 사회에는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말했다. “살아서 싸우지 죽긴 왜 죽어?”
“하루아침에 목숨을 두고 제비뽑기를 하고, 시체 팔이를 하는 패륜적 무리들이다.”
1991년 5월 8일 서강대학교 건물 옥상에서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전민련의 사회부장인) 김기설이 유서를 남긴 후 분신 투신해 숨졌다. 그 당시 (전민련의 총무부장이었던) 강기훈은 유서 대필로 자살방조죄를 저지른 역사상 유일무이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1,151일의 감옥살이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2012년 10월 19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여 대법원은 재심을 결정했고, 2014년 2월 13일 서울 고등법원은 원심판결 (서울고등법원 1992.4.20. 선고 92노401 판결)을 파기하고 공소사실 중 자살방조죄의 점은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검찰은 이에 불복해서 6일 뒤 상고했고 2015년 5월 14일 대법원은 검찰의 상고를 기각했다. 유서대필 사건이 발생한지 24년이 지나서야 강기훈은 억울한 누명을 벗게 된 것이다.
유서대필 사건의 핵심 쟁점은 필적 감정이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5명 감정인에 의한 재감정 결과 이들은 일치해서 필체가 다르다는 의견을 제시해서 1991년 당시 국과수 문서감정실 소속 감정인 김형영의 감정을 뒤집었다.〕
1991년 5월 봄날에 김영환은 북한에 갔다.
1991년 2월 평양방송을 통해 “적당한 시기에 통신 연락을 담당할 조직원 1명을 대동 입북하라”는 지령이 내려왔다. 1991년 3월 초순경 김영환은 먼저 하영옥에게 방북 동행을 권유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그래서 대학 1년 후배이고 과거 ‘구국학생연맹’ 활동을 같이 했던 조유식에게 “통일을 위해 아주 중요하고 위험한 일을 하려고 하는데 같이 할 수 있겠느냐”는 제의와 함께 “나는 북한과 연결되어 활동하고 있다. 내가 머지않아 위로 올라갈 예정인데 함께 가지 않겠느냐”는 입북 권유를 하여 승낙받았다.
조유식은 1989년 10월경 울산 현대중공업 하청업체에 용접공으로 위장 취업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으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는데 (징역 1년 6월) 만기 출소하여 쉬고 있었다.
1991년 5월 초 김영환의 연락을 받은 조유식은 16일 오전 가족들에게 “울산에 처리가 안 된 일이 있어 내려간다”고 말한 후, 그날 밤 김영환과 함께 강화군 양도면 건평리 해안에서 북한 호송원 두 명을 접선하였다. (건평리 해안은 그 전 해인 1990년 10월 17일 자정 무렵 남파 간첩 이선실에게 포섭된 황인오가 그들 일행과 함께 북한의 반잠수정을 탔던 곳이다. 하지만 그들은 썰물 때였고 김영환은 밀물 때였다.)
그날 저녁 그들은 외지에서 놀러 온 관광객처럼 가장하면서 ‘바다에서 난 것은 바다의 맛을 살려야 한다’, ‘냉동 식품은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라는 철학을 가진 강화읍 어느 한정식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나서 인근 다방에서 믹스 커피를 마셨고, 그 후 택시를 타고 건평리 쪽으로 이동했다.
5월은 계절의 여왕이다.
일몰에 물든 분홍색 구름이 솜털같이 바다 위로 부풀어 올랐다가 어딘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밤이 깊어 가면서 흐릿하게 해안가를 맴돌던 엷은 회색 안개가 바람에 쫓기듯 걷히기 시작했다. 무수히 많은 별들이 총총히 빛나는 아주 부드러운 밤이었다. 별빛에 물들은 밤하늘에는 보라색이 감돌고 있었다. 물기슭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렸지만 소나무 숲 주위의 모든 것이 완벽하게 고요했다. 그들은 그 아름다운 밤 풍경을 마음속에 새길 여유가 없었다. 두 사람은 숨을 죽이고 건평리 해안가 숲속에서 들릴락 말락 하는 소리로 띄엄띄엄 끊어서 무의미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지만 지루한 줄도 모르고 계속 기다린다.
김영환은 생각한다. 오늘이 1991년 5월 16일이야. 지금부터 꼭 한 세대 전인 1961년 5월 16일 그 빌어먹을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지. 그날은 화요일이었지만 오늘은 목요일인 거야. 최용준 가수가 ‘목요일은 비’라는 노래를 불렀지. ‘오늘은 하루종일 비가 내렸어 그래서 이렇게 눈물 흘렀니’. 내 인생에서 잊지 못할 역사적인 밤이야…… 하지만 우리는 숨을 죽이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지. 우리가 결국 발각된다면…… 암호가 서로 맞지 않으면 어떡하지? 초소에서 총알이 쏟아지고 온몸이 벌집이 된다면…… 그건 비명횡사가 될 것이다. 그들이 무슨 사정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선 맥이 풀릴 것이다. 그러면 없었던 일로 간주하고 서둘러 서울로 돌아가야 하리라.
밤 12시가 될 무렵에서야 잠수복을 입은 북한의 두 명의 호송원이 살금살금 숲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서로 암호를 교환했다.
여자와 사랑과 장미꽃은 사월의 날씨처럼 잘 변하지요.
오월은 푸른 하늘만 우러러보아도 가슴이 울렁거리는 희망의 계절입니다.
선임인 조장이 말했다.
“안심하십시오. 북까지 안전하게 모시고 갈 겁니다.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남쪽 괴뢰군 초소의 서치 라이트만 조심하면 됩니다. 서치 라이트에도 간격이 있습니다. 그 간격을 이용해야만 합니다. 있는 힘껏 빨리 달려야 해요.”
그들은 암호를 교환하고 나서 방수복을 입고 해안가 바닷물 속에 반쯤 잠긴 채 숨어 대기 중이던 반잠수정에 올랐다. 김영환과 조유식은 비좁은 배 밑창에 반쯤 누워서 비스듬히 앉았다. 호송원이 말했다. “선생님들 뚜껑 닫겠습니다. 지금 출발합니다.” 반잠수정이 건평리 해안을 빠져나갔다. 반잠수정은 맹렬하게 요동치면서 검은 바다 밤공기의 벽과 벽 사이를 가르며 빠르게 질주한다. 웅웅거리는 강력한 모터 소리와 물살 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들은 계속 온몸이 덜덜 떨렸고 너무 긴장해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먼바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쉰다. 하지만 (일당백의 특수 전투원인) 북한 호송원들은 경험이 많아서 아주 여유 있는 태도였다. 호송원이 ‘너무 추울 텐데 몸 좀 녹이라고요. 이럴 땐 술이 최곱니다. 이 술은 당 중앙에서 특별히 보낸 겁니다.’라고 말하며 작은 양주 한 병을 건넸다.
NLL을 넘어서자 호송원이 말했다. “여기서부터 공화국 바다입니다. 갑갑하시지요. 열어놓겠습니다.”
해주에 도착하자 선임 호송원이 ‘선생님 도착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육지에 발을 딛자 얼굴을 분간할 수 없는 여러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다음 날 5월 17일 새벽 무렵 황해도 해주에 도착해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북한 사회문화부 소속 성명 미상 부부장, 대남공작 담당 부과장 윤택림 등의 영접을 받았던 것이다.
북쪽 억양의 낯선 사내가 말했다. ‘수고했시다. 어서 오시라요. 부부장입네다. 김 선생께서 크나큰 결심을 하셨습니다.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께서 크게 기뻐하십네다.’
해주는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조선의 5대 도시였다. 한양, 평양, 전주, 개성, 해주 순이었다. 한강과 예성강 하구 경기만과 해주만이 바닷길로 열려있다. 해주는 재령평야와 연백평야 덕분에 북한 최대 곡창지대이다. 재령평야의 젖줄은 재령강이고 연백평야는 예성강 하구에 있다. 해주 출신 역사적 인물을 꼽으라면 백범 김구, 안중근 의사, 장길산 등을 들 수 있다. 황석영 소설 「장길산」의 작중 인물들은 다들 해주, 개성, 강화도, 연평도 출신들이다.
하지만 해주는 1954년 북한의 행정구역이 황해북도와 남도로 개편되면서 황해남도의 도청 소재지가 되었고, 북한 해군의 주력 부대인 서해함대사령부가 자리잡고 있다.
해주 시내에는 석탄 연기에 그으른 듯 잿빛의 2층이나 3층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너무 초라하고 살풍경하다. 변두리 먼지가 자욱한 거리에는 ‘미군은 철수하라.’,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라는 낯선 현수막들이 걸려있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주변에 있는 집들은 대부분 상하수도나 전기같은 기본적인 시설도 갖춰지지 않았다고 한다.
김영환은 밀입북 9일째인 1991년 5월 25일 아침에 대남공작기구인 사회문화부 부장 (당시 이창선)과 함께 승용차를 타고 가서 묘향산 김일성 별장에서 김일성을 만났다.
그때 이창선이 말했다.
“김 선생! 김일성 주석을 만나 뵙는 것을 영광으로 아시오!
아무나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주의할 게 있습니다. 절대로 말대꾸를 하면 안 됩니다. 어떤 곤란한 질문을 해서도 안 됩니다. 그저 듣기만 하십시오. 용안을 정면에서 빤히 쳐다봐도 안 됩니다. 그건 불경한 짓입니다. 그리고 감격에 겨워서 눈물을 흘려야만 합니다. 눈물이 안 나오면 억지로 짜내세요. 눈물이 나오면 닦지 말고 그대로 내버려 두세요. 주석님 앞에서 흐르는 눈물은 신성해요.
주석님은 신이에요. 신이란 말입니다. 공자님이나 예수님보다 더 높은 신이란 말입니다. 도저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는 머리를 단정하게 다듬고 얼굴은 말끔하게 면도를 한 모습이다. 그는 말할 때마다 숱이 많은 눈썹을 씰룩이며 억지 미소를 지었는데 얼굴 전체에 부드러운 잔주름이 잔뜩 생겨났다가 금방 사라졌다. 화들짝 놀라서 곧바로 옷깃을 여미며 정색을 했기 때문이다. 유별나게 과민했고 신경질적이었다. 절망적일 만큼 괴팍하고 변덕스럽고 뇌가 없는 사람처럼 아둔했다. 완전히 비정상적인 인물이었다.
첫날은 별 얘기 없이 인사만 했고 다음 날에도 똑같은 방식으로 만났다. 오찬 자리에는 사회문화부 부장과 담당 과장이 배석했다.
김일성을 만나보니 그의 사상이나 국제정세 인식은 1930~40년대의 그것에 완벽하게 박제되어 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도 모른 채 반세기가 지난 그때까지도 빨치산 활동을 하던 시기의 추억에 묻혀 그저 찬란했던 옛날만을 회고하며 살아가는 노인처럼 보였다.
(그 당시 80세의 늙은 노인이었던) 김일성은 원래 막무가내 혼자 떠벌이는 스타일인데다가 김일성 앞에서는 누구도 함부로 말을 못 하기 때문에 김영환 역시 조용히 훈시를 듣기만 했다.
김일성이 한 말을 요약하면 이렇다.
이란의 라프 산자니 대통령이 공화국을 방문했을 때 내가 ‘이란은 어떻게 혁명에 성공했느냐’고 물어봤더니 ‘따로 혁명조직이 있었던 게 아니라 회교조직을 통한 사상의 전파로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하더라.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 사령관의 부관을 먼저 끌어들인 뒤 (부관의 상사인) 사령관을 항복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군인 30만 명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남조선이 미국의 식민지라는 사실을 폭로하고 남조선 인민 천 명만 주체사상으로 무장시키면 남조선 혁명은 이룩한 것이나 다름없다.
남조선 인민들이 투쟁에 나서지 않는 것은 남조선 인민들이 남조선이 미국의 식민지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조선이 미국의 식민지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사상이 중요하다. 남조선이 미국의 식민지리는 사실을 폭로하는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사상이 중요하다.
강철 시리즈라는 김 선생이 쓴 글을 많이 보았다. 내가 눈이 나빠 글자를 확대해 보았는데 참 훌륭한 글이었다. 특히 반미 투쟁과 관련된 글을 관심 있게 읽었다. 남조선에서 김 선생이 이끄는 혁명조직에 격려를 보낸다.
김영환과 조유식은 북한에 17일간 머물렀다. 북한 당국은 두 사람이 원하는 것을 거의 다 들어주었다. 특별대우였다. 누구를 만나고 싶다고 하면 만남을 주선하고, 어디 가고 싶다고 하면 그곳에 데려갔다. 김정일이 보냈다는 산삼도 먹었다. 심지어 이왕 온 김에 백두산과 금강산도 보고 가시라고 권했지만 두 사람이 놀러 온 게 아니라며 거절했다.
조유식은 5월 17일 김영환과 함께 평양 근교 소재 모란초대소에 수용되어 15일간 무전기 사용법, 지령문 해독법 등을 교육받았다. 1991년 5월 하순경 초대소에서 김영환과 조유식은 사회문화부 부장, 부부장, 과장, 지도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윤택림의 사회로 거행된 입당식에서 정식으로 조선노동당에 입당했다.
조선노동당에 정식 입당하기 위해서는 당 규약과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을 먼저 학습해야한다. 이 원칙은 요약하자면 ‘위대한 김일성 동지 사상을 온 사회에 일색화 하기 위해 투쟁하고, 김일성을 충심으로 모시고, 김일성의 권위를 절대시하며, 무조건 김일성 교시를 신조로 담아 관찰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당성 심사를 받고 정식 당원 입당을 승인 받으면 당증을 수여 받는다.
그들의 머릿속은 대단히 복잡했지만 그래도 북한에 왔으니 또 한 번의 노동당 입당식이 열린 것이다. 남한에서 윤택림의 주선으로 입당한 것은 ‘현지 입당’이라 하였고, 북한에서 정식 입당을 하게 된 것이다.
5월 30일 김영환과 조유식은 함께 남포항 인근 대남공작 해상기지로 이동해서 어선으로 위장한 공작 모선을 타고 서해 공해상을 항해하여 양자강 하류에서 식량과 유류 보급을 받았다. 제주도 남단 공해상까지 이동한 후 작은 보트로 갈아타고 어떤 지점까지 이동하여 그곳에서 잠수복으로 갈아입은 후 추진기에 몸을 싣고 6월 1일 밤 11시경 서귀포 부근 모래사장에 도착했다. 당일은 서귀포 인근 여관에서 자고 다음 날 아침 비행기 편으로 서울로 돌아왔다.
〔조유식은 서울대 정치학과 83학번으로 김영환의 1년 후배였다. 김영환이 82학번 운동권의 대표 주자라면 그는 83학번 운동권의 리더로 평가받았다. 구국학생연맹, 반제청년동맹 때부터 아주 깊은 인연을 맺어왔었다. 그는 4학년 때 ‘구국학생연맹’의 투쟁부장으로 활동하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구속 기소되어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았다. 그래서 1991년에 북한에 갈 때도 동행할 만큼 서로 신뢰가 깊었다. 그 후에도 북한과의 연락책을 맡았다. 북한 공작원 윤택림과 중국, 러시아, 싱가폴 등에서 만나서 자금을 전달받으면 비밀 장소에 보관했다가 김영환에게 전달했다.
(그 당시 김영환의 연락책은 조유식과 윤택림 라인이 있고 김경환과 진운방 라인이 있었다.)
그런 특수한 역할 때문에 나중에 민혁당 조직에는 함께하지 않았지만, 조유식은 김영환의 사상과 이념이 변화된 과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적극 지지해주는 사람이었다. 그는 월간 「말」지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김영환의 변화된 생각이나 신념을 「말」지를 통해 대외적으로 알리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김영환의 대북 연락책으로 활동했던 조유식 (암호명 관철봉)은 1999년 민혁당 사건이 터지기 전부터 인터넷 서점 알라딘을 창업해 운영하였다. 김영환과 함께 전향이 인정되어 공소보류 조치 돼 석방된 이후에도 알라딘 운영에 전념해오고 있다. 알라딘은 국내 대표적인 인터넷 서적 판매 사이트로 성장했다.〕
조유식이 훨씬 나중에 회고하는 것처럼 말했다. 조유식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또렷이 기억나는 인상적인 장면 둘을 말했다.
먼동이 틀 무렵 황해도 해주 해안가에 내려서 승용차로 시내로 들어가는데 유리창이 깨지고 버려진 것 같은 건물들이 차창 밖으로 보였다. 내가 폐공장인가봐요 라고 말했더니 동승한 연락원이 아닙니다. 아파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깜짝 놀랐다. 남한보다 못살거라는 건 익히 짐작했지만, 마치 영화에 나오는 폐허의 도시를 보는 듯한 그로테스크한 풍경이었다. 충격이었다. 또 한번은 주체시상탑을 갔는데, 탑으로 올라가는 계단 통로에 붉은 카펫이 깔려 있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카펫 바깥으로 걸어 올라갔는데, 그걸 본 관리인이 제 길로 안 갔다고 화를 내며 나에게 욕을 했다. 물론 내가 남쪽에서 온 손님이란 건 모르고 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게 더 문제 아닌가. 굉장히 관료적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1992년 4월 12일 북한은 강화도 무인함에 공작금, 무전기 등을 매몰했으니 발굴할 것을 지령한다. 조유식은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의 드보크 (Dvoke, 간첩장비 비밀 매설 장소를 말한다. 무인포스트, 무인함이라고도 한다. 주로 북한에서 남파된 공작원들이 공작금, 무기류, 송수신기, 통신문건 등을 습기가 차지 않게 기름종이 등에 싸 플라스틱 통, 병 등에 담아 묻어 놓으면 고정간첩 등이 이를 찾아간다.)에서 40만 달러 (당시 약 3억원) 권총 2정 및 실탄, 무전기 2대, 보고용 난수표를 파내 김영환에게 전달했다. 이 40만 달러는 조유식 명의의 통장에 입금했고 민혁당의 결성과 활동 자금 등으로 사용됐다.
1998년, 하영옥 (河永沃)과 원진우
1992년 3월 24일 14대 총선이 실시되었지만 좌파 계열의 민중당은 총득표수 1.55%를 획득하는 데 그쳤다. 4월 27일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 붕괴되었고, 8월 24일 한국과 중국은 북한과 대만의 눈치를 보면서 극비리에 협상을 이어가다가 마침내 정식 수교했다. 벌써 한 세대 전의 일이다. 12월 18일 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가 당선되었다. 12월 22일 공산주의 국가인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과 정식 수교했다.
10월 29일 연세대 마광수 교수가 「즐거운 사라」소설이 외설이라는 이유로 서울지검 특수부 검사에 의해 60여 일 동안 구속 수감되어 재판을 받았다. (그 검사는 승승장구해서 나중에 검찰총장이 되었다.) 하지만 마 교수는 이 구속 사건으로 말미암아 심신이 피폐해져서 심한 우울증을 앓기 시작했고 처음으로 자살을 시도했다.
그 후에도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는데 세 번째 시도에서 자신이 살던 아파트 난간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그해 3월 국회의원 선거가 한창일 때 민혁당이 비밀리에 출범했고, 7월 말경에는 남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이 결성되었다. (두 개의 지하조직은 전혀 별개여서 서로 그 존재를 알 수 없었다. 다만 북한의 대남공작기구인 사회문화부에서 각기 별도 관리 조종하고 있었다.)
민혁당 창당은 김영환이 북한에 가서 김일성을 면담하고 온 뒤 10개월 만의 일이다. 조유식이 드보크를 통해 전달받은 3억 원의 자금이 설립과 활동비로 사용되었다.
민혁당은 김일성 주체사상을 지도 이념으로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 혁명 (NLPDR)을 달성하려고 북한 지령임을 내세워 결성한 지하 조직이었다. 그들은 철저한 종북 세력이었다.
김영환과 하영옥, 박금섭 이들 세 명이 중앙위원회의 중앙위원이었고 김영환이 중앙위원장이었다. (이석기는 그 당시 경기남부위원장에 불과했다.)
종북은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북한 독재정권의 노선을 따른다.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면서 북한의 주체사상을 신봉하고, ‘주한 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폐지’ ‘연방제 통일’ 등의 대남적화 전략에 동조한다.
그들은 북한의 핵과 인권 유린, 3대 세습에 대해서 이른바 내재적 접근법 (종북사회학자 송두율이 수령독재체제 합리화를 위해 개발한 논리)을 주장한다.
김일성에 대해서는 ‘자주적 사회주의를 건설한 탁월한 혁명가, 노동계급의 위대한 수령’이라고 찬양했고, 김정일은 ‘주체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향도의 태양’으로 미화했다. 또 주체사상을 ‘사랑의 원리를 밝혀준 사상’,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상’이라고 찬양하고, ‘합법 비합법 수단을 총동원해 그런 사상의 전파 활동에 전력을 다할 것’을 촉구했다.
그들은 우리 사회를 ‘미국에 예속된 식민지 반자본주의 사회’로 규정하고 ‘민족해방투쟁을 통해 민족자주정권을 수립할 것’을 주장했다. 또 ‘혁명’의 사전 작업으로 ‘노동현장에서 혁명조직을 꾸리되 이념 소조를 통해 영입 대상 인물을 주체사상으로 무장시켜 남한 혁명의 전위 투사로 육성한다’는 운동 방침을 정하는 한편, 오직 전술적 차원에서 온건 노선을 표방하는 ‘혁명정당’ 건설을 시도했다.
그들은 내부에서 자기들끼리 말했다. 당의 건설 과정에서 공식적으로 ‘이념 정당’이라는 간판을 내건다든지 선명한 이념을 내세우는 것은 좋지 않다. 그것은 일반 대중에게 거부감이나 위화감을 줄 우려가 있다. ‘인간성 회복’, ‘공동체 문화 창달’, ‘사람 중심의 사회 발전’과 같이 우리의 이념은 어느 정도 담으면서도 대외적으로 과격해 보이지 않게 보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 더 큰 문제는 통진당 국회의원 중 북한의 지령을 받고 우리 체제를 전복하려 했던 ‘간첩’ 출신이 있다는 점이다. 북한의 대남 지하당인 민혁당 경기남부위원장 이석기, 수도남부지역사업부 총책 이상규씨가 그들이다. 두 사람은 민혁당 사건 이후 지금까지 사상 전향 여부를 밝힌 적이 없다. 전향을 입증할 발언도 찾을 수 없다. 이들이 전향하지 않았다면 어떤 생각으로 국회의원직을 수행할까 (2014년 12월 19일 선고된 헌법재판소 결정에 의해 통합진보당이 해산되면서 이들도 의원직을 상실했다).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A&nNewsNumb=201207100015)
하영옥은 김영환 다음으로 민혁당의 제2인자였다.
1982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하영옥은 1989년 ‘반제청년동맹 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김영환 (‘관악산 1호’)에 이어 ‘관악산 2호’가 됐다. 1990년 5월 28일 서울 도봉산에서 김영환의 입회 하에 ‘조선노동당’의 현지 입당식을 거행하고 ‘관악산 2호’라는 대호를 부여받은 것이다. 그때 당원증 번호가 102호라는 것도 고지받았다. 그 자리에서 하영옥은 “조선노동당에 입당해 매우 영광스럽고 당원으로서 임무를 수행할 것을 맹세한다”는 결의를 표명했다.
김영환은 1997년 7월 민혁당의 해산을 선언했다. 중앙의원 3명 가운데 2명이 찬성하고 하영옥이 반대했다. 반제청년동맹을 발전적으로 해산시키면서 민혁당을 결성한 지 5년 만의 일이었다. 민혁당 해산에 하영옥은 거칠게 반발했다.
그날은 초여름의 화사한 날이었다. 모든 것이 아름답고 평화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실내는 숨이 막힐듯한 열기로 후덥지근했다. 푸른 하늘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하영옥은 뭔가 미심쩍었다. 그래도 미심쩍어하는 마음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 순간 가슴이 갑자기 죄어드는 것 같았지만 - 다시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입을 다물고 어금니를 꽉 깨문다. 몸이 부르르 떨린다. 불안하고 초조하다. 얼굴을 찌푸리면서 시선을 외면하려고 하지만 불가능했다. 자기가 부당하게 대우받고 있고 핍박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잠시 부자연스러운 침묵이 흘렀다.
그는 분노했다. 그건 김영환에 대한 것이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그가 무섭게 노려본다.
그가 말했다. “너희들이 뭔데 제멋대로 조직을 와해시키고……. 이 조직은 실질적으로 내가 만든 거란 말이야. 내가 반청을 만들었고 그걸 이름만 바꾼거란 말이지. 너는 조직 활동에서 대동단결과 반종파 투쟁을 강조했어. 같은 편인데 나누어져 싸우면 종파주의가 된다는 거지. 바로 지금 너가 하는 행동이야말로 종파주의인 거지.”
김영환이 말했다.
“이건 최후 통첩이야. 번복은 없어. 내가 대충 이야기하는 게 아냐.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정이란 말이지. 잘 알고 있겠지만…… 작년 말부터…… 우리 조직은 완전히 둘로 나뉘어서 마비 상태에 있었지. 더 이상 널 설득시킬 방법이 없어. 그래서 포기한 거야.
다시 말하지만 2:1로 결의가 된 거야. 이건 민주적인 절차야. 절대적으로 복종하라고.”
“네 마음대로…… 그렇게는 안 될걸. 해체는 말이 안 돼. 다시 말하지만 민혁당 본래의 사상과 정책, 노선을 따르지 못하겠다면 생각이 바뀐 사람들이 탈퇴하는 것이 옳은 거고 당을 해산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그렇지 않은가? 너희 둘을 탈퇴한 것으로 처리하면 될걸……”
“그렇게는 안 되지. 내가 중앙위원장으로서 확실하게 해체를 선언한 거야. 민혁당은 민중을 위해서 복무하는 혁명조직이지.
그런데 북한 권력자들은 지금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어. 민혁당의 이념, 사상을 북쪽에서 찾는 것은…… 말하자면 연목구어야.”
“너는 민혁당을 이끌 능력이 없어. 민혁당을 해체하려는 것은 조선노동당에서 탈퇴하려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런 거지. 조선노동당에서 탈퇴하는 것이 중요한 거야.”
“우리 조직의 정통성을 인정하라고. 그건 네가 짊어진 최종…… 최고의…… 책무이자 운명이야.”
“나는 널 이해할 수 있어. 20년이건 30년이건 고수해왔던 자신의 이념, 사상, 노선을 완전히 포기하게 되면 자신의 인생 전체가 완전히 무시되고 무너지는 거지. 그걸 본능적으로 두려워한 거야. 그래서 눈을 감고 귀를 닫는 거야.”
하영옥은 속이 심하게 메슥거렸고 심장이 두근거리고 폐가 부풀어 오름을 느낄 수 있었다. 얼마나 절망적인가. 출구가 있을까? 그는 발작적으로 빈 물컵을 바닥에 내리쳤다. 컵이 산산조각나면서 유리 파편들이 튀었다.
김영환이 하영옥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가 사무적으로 말했다.
“명중했군 그래…… 그걸로는 부족하지. 유리 조각으로 팔목을 그으라고…… 그래야 피가 철철 흐르면서 분이 풀릴 것 같은데.”
“그건 입만 살아 있는 자칭 혁명가가 할 소리가 아니지. 배신자 주제에…… 그렇지…… 배호 가수의 ‘사랑의 배신자’가 생각나는군. 이건 사랑의 배신이 아니라 혁명의 배신이지만.
가사를 바꾸면 되는 거야. 배신자여! 배신자여! 혁명의 배신자여!”
“우선 흥분하지 말라고. 왜? 뜬금없이 흘러간 유행가가 나오지? 우리는 철저히 냉정해야 하지. 그래야만 대화가 성립되는 거야. 솔직하게 말하자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잔 말이야. 그러면 오해가 생기지 않으니까.”
“무슨 예언자인 척 하지마. 잘난 척하지 말란 말이야.
비겁한 자식…… 허위와 위선에 가득 찬 네 인생을 돌아보라고. 엉성한 실수들의 반복이었어. 그런 생각 안 드나? 그렇지만 이번 일은 최악의 실수라고 할 수 있지.”
“지난 시절…… 나의 오류는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지. 설마…… 내가 순진무구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인생의 황금기인 30대 중반 이 나이에 순진무구하다는 건 어리석다는 뜻이니까. 나는 더 이상 젊지 않아. 기성세대에 진입한 거지.”
“아주 복잡한 사람이었지. 복잡한 인간은 왔다 갔다 하지.
너는 지금 감정을 감추려고 애쓰지만…… 얼굴은 너를 배신하고 있지. 얼굴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니까.”
“그걸 인정할 수밖에 없지. 나는 끊임없이 흔들렸으니까.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를 오가면서 또는 현실과 상상을 오가면서 끊임없이 정신적으로 공중그네 타기를 했으니까.”
“북에 가서 김일성 주석을 두 번이나 만나고 내려와서 민혁당을 창당했으면서…… 평양을 다녀온 후에는 북한 공작원 신분으로 70회가 넘는 지령을 받았으면서…… 그때부터 벌써 북을 비판하는 이중적 태도를 취한 거야. 다시 말하면 시계 추처럼 좌에서 우로 왔다 갔다하면서 흔들리고 있었던 거야. 그게 나약한 지식인 프롤레타리아의 전형적인 태도이지.”
“내가 그렇다고 인정했잖아!
내가 저지른 가장 치명적인 오류는 친북적인 분위기가 운동권에 널리 확산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거야.”
“혁명은 직진이야. 지그재그로 에둘러 가면 틀림없이 실패하게 돼 있어. 너의 지금 행동은 이 땅의 자주와 민주, 통일을 위해 묵묵히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등에 칼을 꽂는 행위인 거야. 이걸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단순한 변절이 아니라 배반이라고 해야 정확할 거야.”
“내 입장이 돼보라고. 역지사지라고 하지. 나는 평양에 갔다 왔어. 김일성도 직접 만났다니까. 너는 대담한 상상력이 부족해.”
“주제넘게 충고할 필요는 없어. 이건 상상력의 문제가 아니야. 의지의 문제인 거지. 네가 91년 5월 북으로 갈 때 나를 데려가려고 했지. 그러니까 너 밑에 있는 부하처럼 생각한 거야. 그렇게 해서 통신 연락책으로 만들려고 한 거지. 하지만 나는 단칼에 거절했어……”
“나는 심사숙고해서 내 신념과 이상을 변화시킨 거야.”
“너는 강철이 아니라 고철이 되어버렸지. ‘간생이’이란 말이 있지. 경상도 말로 간사스러운 놈을 말하는 거야.”
그때, 두 사람 사이에는 1982년 봄 대학에 입학하면서 처음 만난 이래 15년 동안에 걸쳐 얽히고설킨 미묘한 적의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둘 사이에는 장편소설 또는 중편소설 한 편쯤은 쓸 수 있을 만큼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험난한 세월이었다. 항상 쫓기면서 가파른 오르막을 헐떡거리며 기어오르는 시간이었다.
김영환이 말했다.
“우리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꼭 최악의 일이 일어난다니까. 다시 말하면 - 인생에서는 가끔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일어난단 말이지. 나는 낙관론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비관론자도 아니야.”
“내가 솔직하게 인정해야겠지. 나는 너를 벗어나지 못했어. 어리석게도 무조건 추종했어. 너는 아주 숙련된 이야기꾼이니까. 너의 교묘한 언설을 논박할 만큼 내 논리가 부족했단 말이야. 너는 자신의 논점을 명확하게 정리하는 장점이 있었지. 그래서 네 주제는 그만큼 일목요연했어. 아주 세련되게 치장을 했고 우리 동지들은 거기에 속아 넘어갔지. 주술이 들어있었으니까. 화려한 산문이었지만 어떤 영감이 들어있진 않았어.
오직 프로파간다만 펄럭였지.
허세였단 말이지. 그래서 무지막지한 악취가 풍겨나지. 자기 기만이고 위선이고 심각한 사기였단 말이지.”
“내 맘대로 떠들어 보라고. 끝까지 들어줄 테니까.”
“그렇지만…… 로직도 의지도 힘도 부족했지. 그게 네 한계…… 솔직하게 인정하면…… 얼마나 좋을까.”
“역설적이지. 너는 내 꽁무니에 숨어서 지냈으니까. 단지 관점의 차이를 가지고 그렇게 왜곡하고 있어.”
“돌이켜 보니까…… 우린 불공평한 조합이었어. 너희 둘은 언제나 한 편이었으니까. 난 너희들에게 이해받지 못했어. 항상 불청객 신세였지. 하지만 나는 전부 다 기억하고 있어. 완벽하게…… 네가 툭툭 내뱉은 말 전부를 기억하고 있다니까.”
“시대가 완전히 변했다니까. 시대정신을 외면하면 안 되지.”
“나는 뭐야? 네 꽁무니나 쫓아다니는…… 너는 맨날 잘난 체하는 소영웅주의자야. 너 때문에 그 모진 고문을 당하고 감옥까지 갔는데. 뭐…… 시대가 변했다고. 80년대이건 90년대이건 시대는 변하지 않았어. 그대로란 말이야.”
김영환은 목이 쉰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한다.
“마지막으로 말하는데…… 나에게도 한때는 활활 불타오르는 혁명의 열정이 있었지만 그건 거대한 착오였단 말이지. 너는 후회할 거야. 완곡하게 표현하자면 우리 모두는 시대착오적이었어.
이제 벗어나자고. 늦지 않았다니까. 현실을 직시하잔 말이야.”
“너 혼자만 살려고…… 자수하고 반성문을 쓰고 전향한다면 넌 정말 더러운 배신자가 되는 거야.”
“오죽했으면 주체사상의 창시자인 황장엽 선생께서 내려왔겠어. 그것도 사랑하는 가족들을 사지에 남겨두고. 나는 황 선생의 망명을 보고 주체사상은 완전히 끝났다고 보는 거지.”
“그럴 수도 있겠네. 네 주체사상은 황 선생의 것을 그대로 베낀 거니까. 표절이란 단어로는 부족하지. 너는 황 선생의 이론을 훔친 절도범이고 횡령범이야.
다시 말하지만 자신을 기망 한 거야. 그리고 수많은 동지들을 기망하고. 난 그걸 애써 눈 감았지. 우리 조직을 유지해야 하니까.”
“내 주체사상은 논리적으로 확고했어…….”
“황 선생은 북한 내 권력 싸움에서 불리하니까 도망쳐 나온 것일 수도 있어. 과대평가 할 필요가 없는 거야.”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하지. 나는 북한에 가서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지. 김일성 주석은 아주 옛날 빨치산 시절의 사고 방식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어. 완전히 그대로야. 그리고 김정일이 이어받았어. 북한은 봉건세습왕조일 뿐이야. 가망 없어. 가망 없다니까. 우리가 민주기지라고 상상했던 사회가 아니었단 말이야.
그걸 보고 나니까 절망할 수밖에 없었어.”
“너는 이미 자본주의에 깊이 물들어서 변절되었지. 자본주의적 시각으로 보니까 그렇게 보이는 거지.”
“네가 눈이 있고 귀가 있다면…… 탈북자들을 보라고.
그들이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지.”
“우리는 혁명을 절대로 포기할 수 없어.
해산이라니…… 그건 자멸하는 길이야. 김일성 주석이 죽었지만 사상, 이념, 정신은 지금도 엄연히 살아있는 거지.
주체사상을 배신하고 조선노동당을 배신한 배신자야! 너는 더러운 변절자야!”
“우리가 지금 헤어지면 다신 만날 일은 없겠지.”
하영옥은 결론적으로 김영환에 대해 변절자, 또는 배신자라고 맹비난하면서 연계선 (북한접촉망)과 남은 공작자금, 무전기 등을 넘기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특히 무전기를 넘기면 북과 직접 연결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김영환은 그런 요구를 모두 무조건 거절했다.
그들은 악수도 없이 헤어질 때 흔히 하는 작별 인사도 없이 그렇게 굳은 표정으로 헤어졌다. 하영옥은 그가 헤어질 때 비웃듯이 희미하게 웃었다고 생각했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으면서 언제나 굳어있고 딱딱한 얼굴인데 말이다. ‘너는 웃고 있군. 눈물을 흘려도 모자를 판에…… 나는 외치고 싶은데…… 나는 절규하고 싶은데. 목구멍에서 지금 뭔가 치밀어 올라온다고.’
그는 목이 메이면서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목이 심하게 말랐다. 뭔가 한 모금 축이면 좋을 것 같았다. 그는 자꾸 끊기는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려 애쓰며 입술을 깨문다. 그는 우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의 기억 속에 무수한 풍경들이, 인물들이 선명하게 혹은 희미하게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무성한 녹색 잎들이 서걱대는 가로수의 우듬지를 쳐다본다. 주위를 감싸고 있는 나른한 공기 속에서 가벼운 바람 한줄기가 가로수길을 따라 지나갔다. 7월의 작렬한 햇빛이 보도블록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때는 김영삼 정권의 말기였고 1997년 4월 20일 주체사상 이론을 정립한 황장엽 선생이 김덕홍 동지와 함께 망명해서 서울에 도착했다. 황 선생은 그 해 1월 30일 평양의 날씨가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기억 속 평양은 잿빛 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 대동강에서부터 올라온 자욱한 회색 안개가 깔려있었다. 공항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설 때 마음이 그만큼 어두웠기 때문일 것이다. 아내가 혼자 집 앞까지 배웅을 나왔다. 여느 때처럼 그를 보내는 아내를 보며 다시 한번 갈등에 시달렸다. 이번 길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털어놓아야 할 것인가. 하지만 끝내 아내에게 희미한 암시조차 할 수 없었다. 지난밤에 잠 못 이루고 마냥 뒤척이면서 망설이다가 굳힌 결심 그대로였다. 그런 결론을 내린 것은 무엇보다도 이번 일이 그의 뜻대로 될지 안 될지가 뚜렷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후 하영옥은 어떻게 해서든지 민혁당을 살리기 위해 그가 장악하고 있던 영남위원회와 경기남부위원회 (위원장은 이석기였다)를 중심으로 당 조직을 수습하고 재건해서 민혁당의 강령과 규약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 당시 전북위원회는 김영환 쪽이었고 나중에 김영환이 반성문을 쓰고 전향하자 그들 대부분은 자수해서 광명을 되찾았다.
1998년의 경우 뉴욕 월가에서 대형 헤지펀드사인 롱텀 캐피털 매니지먼트 사태가 일어났고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사상 초유의 금융위기로 말미암아 국가부도 사태에 직면해서 신음하고 있었다.
1998년 2월 25일 제14대 김영삼 대통령의 임기가 종료되고 15대 김대중 대통령의 임기가 시작되었다. 3월 13일 사상 최대 규모인 2,300여 명이 대사면, 복권되었다. 4월 21일 독일의 테러단체 독일 적군파가 자진 해산했다. 6월 10일부터 7월 12일까지 프랑스에서 제16회 프랑스 월드컵 대회가 개최되었다. 8월 4일 현대그룹은 북한과 유람선 관광 사업을 위한 합영 회사의 설립계약을 체결했다. 11월 18일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면서 금강호가 출항했다. 11월 26일 대도 조세형이 16년 만에 석방되었다. 12월 18일 해군은 거제도 남쪽 해상에서 북한 반잠수정을 격침했다.
1998년경 그 당시 「말」지의 기자였던 김경환은 북한 관련 운동에서 손을 떼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10월 초순 경 6년 만에 느닷없이 진운방이 나타났다.
진운방은 옛날의 콧수염을 말끔하게 깎고 나서 여수 돌산읍 율림리 해안으로 침투해서 서울 마포에 있는 월간 말지 사무실로 김경환 기자를 찾아간 것이다. 그때 진운방은 국내 실제 인물인 ‘원진우’의 주민등록증 (자기 사진을 붙여서) 소지하고 옛날 진운방이 아니라 원진우 행세를 하면서 노골적으로 하영옥과의 접선을 부탁했다.
그가 말했다. 민혁당은 이미 해산됐고 지하당 운동을 할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손을 내저었지만 차마 신고할 수는 없었다. 인간적으로 가까운 사이었고 그의 아내와 딸이 북한에 있기 때문이었다. 진운방은 풍채가 좋은 사람이었는데 다시 만났을 때는 얼굴이 새까맣고 깡말라 있었다. 위암 말기였다. 그는 위암 말기 환자로 처자식을 북한에 남겨둔 채 새삼스럽게 다시 남파됐던 거야.
김경환은 2000년 1월 13일 오전 서울지방법원 형사23부 심리로 열린 결심공판의 최후진술에서 말했다. 저는 민혁당의 실체를 인정합니다. 민혁당은 1997년 초기의 노선을 포기했습니다. 지난 10년간 믿고 따른 주체사상도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이념의 문제로 법정에서 사법적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현실이 서글픕니다. 국가보안법 폐지는 물론이고 사상이 법정이 아닌 다른 공간들 속에서 자유롭게 공개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날 검사는, ‘김경환이 지난 10년 동안 반제청년동맹, 민혁당, 조선노동당 등에 가입해 북한과 직접적인 연계를 가지고 남한 체제 전복을 목표로 활동해왔다. 이는 우리 사회의 안보를 위협한 명백한 범죄 행위’라고 하면서 징역 10년에 자격정지 10년을 구형했다.
1998년 10월 하순경이었다. 가을 바람에 낙엽이 지고 있었다. 온 천지에 햇살이 가득했다.
들마다 늦은 가을 찬바람이 움직이네.
벼이삭 수수이삭 으슬으슬 속삭이고
밭머리 해그림자도 바쁜 듯이 가누나.
무 배추 밭머리에 바구니 던져 두고
젖먹는 어린아이 안고 앉은 어미 마음
늦가을 저문 날에도 바쁜 줄을 모르네.
그 무렵 하영옥은 서울대 교수회관에서 김경환이 소개한 원진우와 처음으로 접선했다. 그는 그날 북한이 자신을 김영환 대신 민족민주혁명당 총책으로 임명한 사실을 통보 받으면서 입북 제의를 받았다. 그 당시 하영옥 역시 민혁당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독자적인 북과의 연계망과 자금 지원이 절실했었다. 물실호기였다.
(국정원의 수사 기록에 의하면 - 그는 3학년 때 성적 불량으로 제적됐다. 방위병으로 복무하고 제대한 후에는 잠시 반월공단에 있는 배전반 제작 회사에 위장 취업하기도 했다. 이 무렵 황학동 골동품 시장에서 구한 일제 단파 라디오를 통해 자기 집에서 평양 중앙방송과 ‘구국의 소리’ 방송을 들었다. 87년 재등록하고 2년 후 졸업했다. 졸업 후 몇 년 동안은 속셈학원 원장, 수학 과외교사를 했으나 이 당시에는 일정한 직업 없이 고시 공부를 하는 것처럼 가장하면서 고시촌을 전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92년부터 민혁당 총책인 김영환으로부터 두 달에 4백만 원씩 총 1억 원을 받았고 이 중 일부를 하부조직에 내려보냈다.)
그때 원진우와 접선하면서 그에게서 대북 보고용 무전기 2대, 난수표, 편지지 1장 분량의 은서용지와 인터넷 연락방법이 기재된 병풍식 소책자 한 권을 받았다. 또한 3개의 호출부호를 받았고 인터넷을 이용한 지령의 송수신 방법에 대한 교육을 받았고 공작금으로 5백만원과 엔화 50만엔을 받았다.
그는 심재춘과 함께 무전기를 비닐백에 싸서 관악산 등산로에서 몇백 미터 계곡 쪽으로 들어간 평평한 작은 풀밭에 서 있는 소나무 밑을 오십 센티미터가량 파서 숨겨놓았다.
앳된 여자 종업원이 수줍은 미소를 띠며 과일 주스 두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는다. 실내는 손님이 별로 없어서 한가했다. 하지만 진운방은 본능적으로 눈동자를 굴리며 끊임없이 분위기를 살핀다.
그는 빼빼마른 몸에 얼굴은 어둡고 초췌했다. 하지만 아주 침착했고 철저히 자신의 목표에 따라 행동했다. 그래서 약간의 유머감각도 있다. 그가 하영옥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말했다.
“나는 지금 저승 문턱에 서있어요. 곧 염라대왕이 문을 열거요. 그렇지만 혁명의 열정은 살아있지. 김 동지로부터 들었을 거요. 잘 아시겠지만 나는 얼마전에 북에서 내려왔소. 김정일 동지의 직접 지시가 있었소. 김영환에 대해 알고 싶소. 그와는 접촉이 끊겼어요. 도대체 행방을 알 수가 없지.”
“그를 만날 필요가 있을까요?”
“그의 진의를 알고 싶소. 혹시 위장용인가? 아니면……?”
“위장용이라니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작년 7월 민혁당 해체를 선언한 이후 만난 사실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변절이건 배신이건…… 했단 말이요?”
“그렇게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는 절대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미련을 깨끗이 버리십시오.”
“우리는 배신자를 용서하지 않을거요. 그게 공화국의 법이요.”
“잘 알겠습니다.”
“민혁당의 운명은……? 남한 내 최대 지하혁명조직이었지 않소.”
“제가 조직을 재건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그는 인수 인계를 거절했습니다. 제가 그간의 경위를 말씀드리죠. 우리는 오랫동안 싸웠습니다. 그는 진즉부터 마음이 변했어요.
제가 해체를 절대적으로 반대했습니다. 너희들은 탈퇴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북과 연계선, 무전기, 남은 자금을 인계하라고 요구했지요. 모두 거절당했습니다. 무전기는 구식이어서 이미 폐기 처분했다고 하더군요.”
“우리는 하 동지를 김정일 최고 지도자의 이름으로 이미 총책으로 임명했소.”
하영옥은 갑자기 모든 긴장감이 풀어지면서 온몸이 가벼워짐을 느낀다. 그는 감격했다. 마침내 위대한 조선노동당이 그를 인정한 거였다. 진운방에게 동지의식을 느끼고 조선노동당에 대해서 유대감과 소속감을 느낀다.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감사합니다. 조선노동당에 대하여 충성을 맹세합니다. 보란 듯이 조직을 재건해서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저는 원래 경기남부위원회와 영남위원회를 관장했습니다. 그쪽 조직들은 해체를 원칙적으로 무효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민혁당의 뿌리인 RO는 살아있단 말입니다. 북과의 연계선과 자금 지원만 있으면 얼마든지 재건이 가능합니다.”
“여기서 당분간 활동하는데 증명서가 필요하오. 내가 지금 원진우의 주민증을 사용하고 있지만 주민증 기재 내용이 사실인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원진우의 주민등록 등본과 초본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하루빨리 서둘러 주세요.”
“그런 건 어렵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거든요.”
“지령이 내려오는대로 우리는 함께 북으로 가야합니다. 북에서 정식으로 조선노동당에 입당하고 사상 교육과 공작원 훈련을 받아야 하오. 그리고 나서 복귀하는 거요.”
“어떻게 올라가지요?”
“그건 염려할 것 없소. 항상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저는 장소를 말하는 겁니다.”
“강화도가 될 것입니다. 거기는 황해남도와 가장 가깝지요. 그쪽 물길은 손바닥 보듯이 훤하지요. 반잠수정이 내려올 것입니다. 강화도 본도에서 해주까지는 조류의 흐름을 타고 빨리 가면 두 시간이면 갈 수 있지. 해주에는 서해함대 기지가 있어요. 중간에 북방한계선을 통과하는 거요. 강화도에서 NLL까지는 25분가량 걸리지요. 거길 통과하면 우리 바다요. 나는 북으로 돌아가면 배신자에 대해서 보고서를 제출할 겁니다.”
“제가 준비할 것은……?”
“김정일 최고 지도자 동지에게 바치는 충성의 편지를 준비하시오. 그리고 민혁당의 현황과 앞으로의 운영 계획 등에 대해서 준비하시오. 본부에 보고하고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
민혁당은 우리의 희망이고 미래입니다. 우리는 하 동지를 철석같이 믿고 있습니다.”
“분골쇄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북한은「말」지 1998년 5월호에 실린 ‘북한의 수령론은 완전한 허구이자 거대한 사기극’이라는 김영환의 기고문을 보고 반신반의하면서 김영환의 진위를 파악하고자 했지만 김영환과는 연락이 단절된 상태였다. 1995년에는 남한 내 지하 전위당의 총책인 김영환이 북한을 비판하자 북에서는 ‘김영환의 진의, 연락 통해 보고바람’이라는 지령을 내려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그에 대한 최종 변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원진우를 다시 남파한 것이다. 원진우는 김영환과 만날 수 없게 되자 당시「말」지 기자로 있던 김경환을 통해 하영옥과 접촉하여 민혁당을 검열했다.)
그 며칠 후 직파 간첩 원진우가 심재춘의 집에 일주일가량 숨을 수 있도록 은신처를 제공하고 군경의 검문을 피해 간첩 활동을 수행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했다. 또한 1998년 11월 11일에는 원진우와 함께 강서구 화곡6동 동사무소로 가서 위임자란에 원진우 이름을 기재하고 인근 문방구점에서 판 원진우 명의의 목도장을 날인한 주민등록서류 발급 신청서를 동사무소 직원에게 제시하고 주민등록 등본 및 초본 각 1통을 발급받아서 원진우에게 주었다. (실제 인물인 원진우는 주민등록증을 분실한 적이 없었다. 남파 간첩이 그 주민등록증을 어떻게 위조했는지 경위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는 반잠수정에서 시체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10월 초순쯤 서울에 도착해서 고정 간첩과 접선했을 때 만들었을 수도 있고, 북에서 내려올 때 지참했을 수도 있다.)
그 무렵 하영옥은 원진우로부터 김정일이 직접 하사하였다는 ‘광명성’이라는 대호를 새로 부여받았다.
1998년 11월 19일, 진운방, 하영옥, 심재춘 등 셋은 강화군 화도면 내리 해안에서 대기하면서 밀입북을 시도하다가 그들이 타고 가려던 북한 반잠수정이 기관 고장을 일으키면서 강화도 인근 해역에서 군에 발각돼 밀입북 계획이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그들 셋은 겨우 탈출해서 서울로 돌아왔다.
1998년 11월 27일 하영옥은 원진우와 함께 신세계백화점 건물 뒤편에서 암달러상에게 일화 70만 엔을 환전한 후 활동비 명목으로 현금 500만원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심재춘에게 원진우를 안내하여 복귀 장소인 전남 여수를 사전 정찰하도록 지시했다. (「진보의 그늘」 50~52쪽 참조)
김영환이 말했다. 강화도에서 발각된 잠수함에 탑승할 예정이었던 인물은 간첩 원진우와 남한 국적의 하영옥, 심재춘 등이었다. 그중 하와 심은 내가 당수격인 중앙위원장으로 있었던 민혁당의 당원들이었다. 민혁당은 내가 잠수함을 타고 북한에 들어가 김일성을 만나고 북한의 조선노동당에 입당한 후 만든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지하혁명당이었다. 하영옥 등이 강화도에서 북한에 가려다 실패하고 여수에서 반잠수정이 격침된 1998년 그날 나는 중국에 있었다.
심진구는 1986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그 당시 안기부에 불법 구금되어 구타 등 가혹행위를 당하고 혐의가 조작되었으니 이를 바로잡아 달라고 진실 화해위에 청구했다. 진실 화해위의 결정을 근거로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고, 2012년 11월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26년 전 사건에 대해 무죄 선고를 받았다. (검찰은 1986년 심진구를 구속 기소하면서 공소장에 그가 김영환, 하영옥과 모의해서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 노동자 동맹을 모방한 반국가 단체 지역노동자 해방동맹 건설을 획책했다고 했다.)
심진구는 무죄 선고 직후 소감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김영환을 만난 것을 후회한다. 심진구와 김영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990년대 주체사상을 지도 이념으로 했던 자생적 전위당 민혁당의 두 주역 김영환과 하영오는 모두 심진구와 얽혀있다.
심진구가 김영환을 처음 만난 때는 1984년 1월 무렵이다. 심진구는 진실 화해위에 진실 규명을 요청하기 전인 2007년 7월 오마이뉴스에 보낸 글에서 김영환과의 첫 만남을 이렇게 기억했다.
영환이! 우리가 처음 만난 1984년 1월 20일경 서울 구로3동의 이광우의 자취방이 생각나나. 고교 동창인 광우는 내게 자취방을 불쑥 찾아온 자네를 서울대 공법학과 2학년 (82학번) 김영환이라고 소개했지. 학교에서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묻자 자네는 OB팀 (고전연구회)에서 활동한다고 했지. 학내 사정에 과문한 내가 무슨 맥주회사 야구팀이냐고 묻자 자네는 단재 신채호와 정약용 선생을 연구하는 학교 동아리 모임이라고 설명해 주었다네 자네를 처음 만났을 때의 단상은 이것이 전부였네 자네는 대학 2년 선배인 광우와 나의 대화와 토론을 곁에서 묵묵히 듣고만 있었지. 그러다가 내가 고향에서 올라와 광우의 자취방에서 자고 가는 날이 빈번해지자 지적 호기심이 컸던 자네는 사상학습을 함께하자고 졸랐지.
하영옥은 심진구와의 만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영환이가 철학과 경제학 공부를 많이 한 노동자 형이 있다. 너도 꼭 만나봐야한다고 해서 심진구 씨를 처음 만났다. 만나보니 나이가 우리보다 서너 살 위인데 대학은 안 나왔지만 사색과 연구 수준이 웬만한 대학생보다 높았다. 고교 때 마르크스 주의 비판서들까지 찾아서 읽었다고 했다.
하영옥 (그 당시 37세)은 1999년 9월 반국가단체 (민혁당) 설립 혐의로 기소되어 무기징역이 구형되었으나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징역 8년에 자격 정지 8년이 확정되었다. (대법원 제2부는 2000년 10월 12일 하영옥 피고인에 대한 상고심에서 피고인과 검찰 측 상고를 모두 기각하면서, ‘민혁당은 창당 경위와 목적 등에 비춰볼 때 국가 변란을 1차적 목적으로 하는 지위 통솔 체계를 갖춘 반국단체로서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면서 남한 사회를 ‘식민지 자본주의 사회’로 규정 짓고 반미 자주화와 반파쇼 민주화를 기치로 민족해방, 민중 민주주의, 혁명을 달성하고자하는 노동자 농민의 전위당이다.’라고 설시했다.)
그는 4년간 복역한 뒤 2003년 4월 30일 노무현 대통령 취임 특별사면으로 출소했다. 이후 경기도 어느 도시에서 학원 강사를 하고 있었다. (2012년 당시 그랬고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그 후 일은 알 수 없다.)
2012년경 그가 민혁당 재건을 꾀하고 있다고 동아일보가 보도하자 하영옥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아무리 자기들의 정치적 목적이 있다고 해도, 선입견에 (맞춰) 내가 뭐 하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식으로 함부로 소설을 쓰는 짓은 너무한 게 아닌가”라고 항변했다.
그 무렵 하영옥이 말했다. 나는 출소 후 일신상의 어려운 문제들이 있어, 아무런 사회적 활동도 못하고 생업에 종사하면서 살아왔고 살고 있다. 내가 나름의 결심으로 내 길을 가는 동안, 내가 겪는 고초를 보면서 마음 졸이고 가슴 아파하시던 아버님, 어머님 두 분 모두 가슴에 한을 품으신 채 근자에 돌아가셨다. 크나큰 불효를 저지르고 만, 못나고 못된 아들이 되어 슬픔을 견딜 수 없었으나, 나에게는 딸린 자식들이 있으니 이를 떨치고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금 나는 묵묵히 열심히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며, 생업에 종사하고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이 나라의 자주화와 민주화 통일을 위해 애쓰시는 많은 분들께는 늘 죄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다. 장차 때가 되면 나도 이분들의 노고에 함께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아니 반드시 그리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런 마음이라 하여 보수언론들이 허위와 날조 속에 소설을 써가며, 나를 함부로 매도할 권리는 그 어디에도 없다. (https://m.khan.co.kr/politics/politics-general/article/201205191311361#c2b)
성탄절을 며칠 앞둔 1998년 12월 17일 늦은 밤.
신은 활동을 위해서 낮을 만드시고 휴식을 위해서 밤의 장막으로 우리를 감싸주신다. (코란)
초겨울 밤바람은 쌀쌀했다. 바다는 짙은 어둠에 쌓여있다.
깊이를 잴 수 없는 검은 바다의 고요.
전남 여수 앞바다 해안 초소에서 경계 근무를 서던 초병에 의해 북한 반잠수정이 발견되었다. (그날 밤, 여수시 돌산읍 임포리 해안 초소에서 관측병인 김태완 이병은 열상추적장비로 바다를 주시하던 중 밤 11시 15분경 이상한 물체를 발견했다. 해안에서 2km가량 떨어진 지점에 선박 한 척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선체의 절반 이상이 물 속에 잠긴 채 날렵하게 생긴 선박은 첫눈에도 어선과는 달랐다. 5t 크기 선박에는 안테나와 해치 2개가 설치돼 있었고 사람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김 일병은 간첩선임을 직감했다.)
공작 모선은 여수 근해 공해상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반잠수정은 돌산 해안에서 대기 중이던 진운방을 태우고 모선으로 향했다. 하지만 남쪽 해군의 추적을 눈치챈 모선이 일본 영해로 도망가면서 반잠수정은 갈 곳을 잃게 된다.
모선이 다급하게 지시했다. ‘금강산 나와라. 여기는 묘향산이다. 우리는 발각됐다. 도킹은 불가능하다. 전속력으로 도망가라. 모든 조치는 스스로 판단하라. 보안상 이유로 통신을 끊는다.’
다음 날 새벽 해군 초계함인 남원함에서 함수 76mm 함포와 40mm 함포 사격에 의해 거제도 인근 바다에서 반잠수정을 격파, 침몰시켰다. 해군은 1999년 1월 20일 반잠수정이 격침된 위치에서 450m 정도 떨어진 수심 150m 해저에서 반잠수정을 발견했고 1월 22일부터 잠수정 인양 작업에 착수했다.
국정원은 그 무렵 북한의 침투 활동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 반잠수정은 가동 거리가 짧기 때문에 북한의 항구에서 출발하여 남해 끝자락까지 자체로 이동할 수 없다.
이 반잠수정은 공작 모선이라고 불리는 어선을 가장한 특수 선박에 실려 북한 서해 남포항을 출발했다. 모선은 중국 쪽 해안으로 빙 에돌아 공해를 타고 제주도 인근을 지나 남해안에 닿았다. 국정원은 공작 모선이 남포항을 출발한 때부터 위성을 통해 위치를 파악하고 그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주시하고 있었다. 모선은 여수 앞바다에서 반잠수정을 내려놓았다. 남포항에서 출발한 공작 모선을 정보 기관이 특별히 주시하게 된 이유가 있었다.
그 한 달 전 강화도에서는 잠수함 침투 실패 사건이 있었다. 그 당시 강화도 주둔 해병대는 인근 얕은 바다 물속에서 고장 난 반잠수정을 수리하면서 나온 망치로 땅 땅 땅 두드리는 소리를 포착하고 조명탄을 쏘며 수색작전을 벌였는데 해안가 뻘밭에 사람의 흔적이 있었다. (그날따라 눈이 내려서 접선 장소를 확인하지 못하고 헤매고 있던 중 이들을 태우러 남파되었던 반잠수정이 잠시 고장을 일으킨 것이다.) 공작원을 태우고 북한으로 귀환하려다 실패한 것으로 보였다. 탑승하지 못한 공작원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들은 접선에 실패하자 승용차를 타고 서울로 황급히 돌아왔었다. 그때부터 원진우는 고시생이라고 속이고 서울 봉천동 ‘우등고시원’에 숨어지내며 북과 연락했다.) 머지않아 다시 데리러 오기 위해 강화도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 접근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것이 바로 여수에서 격침된 반잠수정이다.
북은 남파 간첩 원진우를 복귀시키기 위해서 반잠수정을 12월 17일 여수 해안가로 보내기로 했다. 원진우는 12월 16일 고시원에서 나와 여수로 내려갔는데 하영옥과 심재춘이 동행했다. 그 당시 하영옥도 반잠수정을 타고 입북하기로 했지만 항해 기간이 4일 이상 걸린데다가 개인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뒤로 미루어졌다.
하지만 하영옥은 여수에서 북한 반잠수정 호송원들과 접선하면서 “수고가 많습니다. 원 선생님을 잘 부탁합니다.” 말하고 그들과 악수까지 나누고 헤어졌다. 그는 반잠수정이 우리 해군에 쫓기는 것을 알고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신림동 PC방에서 인터넷을 이용해서 북에 보고문을 냈다. ‘중개인 (간첩 원진우)이 출발했다. 교통사고 (반잠수정 격침)이 난 것 같은데 결과를 알고싶음’이라고 보냈고, 북은 다음 해 1월 ‘중개인은 사망했다. 영업 (간첩활동)에는 지장 없을 것임’이라고 통보했다.
탑승한 공작원의 신원을 확인해보니 몇 년 전에 말레이시아 화교로 위장하고 남한에 살았던 남파 간첩 원진우 (그 당시 이름은 진운방)였다. 그는 하영옥으로부터 받은 ‘김정일에게 바치는 충성의 편지’, ‘민족민주혁명당 현황’ 등이 담긴 디스켓 등을 전달받아 반잠수정으로 복귀하던 중이었다. (그 반잠수정에는 하영옥이나 심재춘은 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죽지 않고 살아났고 그 대신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갔다.)
원진우의 행적을 따라 추적하다 보니 거기에서 하영옥과 자동차로 이동하다 과속 단속 카메라에 찍힌 사진이 나왔다. 원진우가 북한에 보고하려고 암호화하여 갖고 있던 수첩의 전화번호는 김영환의 중국 연락처와 조유식, 하영옥, 김경환 등 민혁당 핵심 간부와 관련자들의 연락처였다.
여수 앞바다에서 반잠수정을 격침 인양한 것을 계기로 수사가 급진전됐다. 국정원은 그 반잠수정을 ‘보물선’이라고 불렀다. (이 보물선을 수사하면서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민혁당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보물선에는 여섯 명의 승선자 시체가 나왔는데 다섯 명은 호송 업무를 맡은 북쪽 전투원이었고 한 명은 귀환하는 공작원이었다. 그게 바로 원진우였다.
원진우의 수첩에 적힌 모든 전화번호 (12개)가 ‘비산술식 덧셈’으로 변환된 민혁당 당원들의 연락처였다. 하지만 결정적인 단서는 김영환·, 조유식보다 하영옥, 심재춘 쪽에서 먼저 나왔다. 하영옥 또는 심재춘이 원진우의 주민등록 등본이나 초본을 떼어준 증거가 확실히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김영환이 중국에서 귀국 탄원서를 제출하기 전에 하영옥과 심재춘 건은 이미 증거 확보가 끝나 있었다. 다만 ‘큰 건’을 잡기 위해 발표를 늦췄을 뿐이다.
〔심재춘은 (국정원의 수사기록에 의하면) 서울대 사범대 체육교육학과 88학번이다. 대학 입학 후 서울대 동아리 연합회 회장과 총학생회 사무국 부국장으로 있으면서 주체사상에 심취하여 각종 학내외 반정부시위에 적극 가담했다. 1991년 5월경 반제청년동맹에 가입했다. 1998년 10월 하영옥의 지시를 받고 북한 직파 간첩 원진우에게 은거지를 제공하고 11월 20일 강화도 해안에서 북한 공작선과의 접선에 실패한 하영옥과 직파 간첩을 자신의 승용차로 서울까지 도피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11월 28일에는 하영옥의 지시에 따라 자신의 승용차로 원진우와 함께 복귀 접선지역인 여수 돌산도 해안을 사전 정찰하며 군경 검문 실태, 해안 군부대 현황, 주변 지형 등을 탐지 수집하여 보고했다. 그는 이러한 과정에서 조선노동당에 현지 입당하여 ‘광명성 91호’라는 공작 대호를 부여받고 하영옥의 통신 연락 담당으로 임명되었다.〕
보물선에서는 필름 2통이 나왔다. 바닷물이 들어가 부식된 사진 필름을 수차례에 걸쳐 복원해서 현상해 보니까 희미하게나마 윤곽이 드러나고 촬영 날짜가 찍혀 있었다. 1998년 11월에 여수 돌산 해안가 등을 찍은 사진들이 나왔다. 복귀할 장소를 사전 답사한 것이다. 그때부터 원진우는 북으로부터 침투 중인 간첩이 아니라 북으로 복귀 중인 간첩이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그래서 복원한 필름을 토대로 날짜별로 행적을 확인한 것이다. 그런데 주위 시선을 피하느라 차 안에서 사진을 찍었기 때문에 와이퍼나 윈도 브러쉬 같은 차량 부품과 차에 붙인 스티커 같은 것이 일부 사진에 찍혀 있었다. 그것을 근거로 차량을 추적 조회한 결과 하영옥의 하부선인 심재춘의 차라는 것이 확인됐다.
1999년 3월 18일 보물선을 완전히 인양했는데 3월 말까지 누구누구의 전화 번호인지 다 확인한 것이다. 하영옥과 심재춘의 범죄사실은 남파 간첩의 신분 위장용 주민등록 등본이나 초본을 떼준 기록, 1차로 강화도에서 복귀를 시도할 때 김포 강화도 간 기지국을 거쳐 통화한 휴대폰 통화 기록과 강화도에서 차량 검문 기록, 2차 복귀 장소인 여수에 심재춘의 차를 타고 사전답사 때 속도 위반으로 찍힌 무인카메라 사진 같은 증거를 확보하게 되었다.
반잠수정에는 관악구 신림동, 봉천동 일대에서 구입한 것으로 보이는 제과점 포장지, 쓰레기봉투, 가방, 안경집 등이 있었다. 이를 근거로 남파 간첩이 복귀하기 직전 신림동 봉천동 등에서 은신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수사진들이 13개 동이 있는 신림동과 12개 동이 있는 봉천동 지역의 여관, 고시원, 원룸, 하숙방 등을 탐문 한 결과 관악구 봉천6동의 ‘우등고시원’에서 원진우 명의의 입실 원서를 발견했다. 여기에 찍힌 목도장 역시 반잠수정에서 나온 도장과 일치했다. 남파 간첩 원진우는 이곳에 1998년 11월 22일부터 12월 16일까지 묵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김영환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는 없었다. 그러던 중 중국에 있던 김영환이 1999년 7월 초 가족을 통해 귀국 탄원서를 (김대중 대통령의) 청와대에 제출한 것이다. 그는 7월 29일 중국에서 돌아와 국정원의 심사를 받기 시작했다.
국정원 김은환 수사단장이 인터뷰 과정에서 말했다.
우리는 (보물선에서 관련 증거를 수집한 후) 하영옥, 심재춘 사건을 다 확정해 놓고 ‘큰 건’이 걸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조갑제 「월간조선」편집장의 주선으로 김영환의 모친이 청와대에 귀국을 허용해 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했고 청와대는 국정원에 처리 의견을 물어본 것이다. 그래서 국정원은 ‘김영환이 반제청년동맹 조직과 관련되어 있으나 본인이 ‘말’지와 「월간조선」등을 통해 김정일 타도 투쟁을 주장한 것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 현재 국정원은 김영환에 대해 기소중지는 물론 출입국에 관한 어떤 조처도 취하지 않은 상태이므로 언제든지 들어올 수 있다. 다만, 집에서 두뇌난수 책자가 발견됐기 때문에 심사는 해봐야 하겠다’고 답신했다.
1997년, 최정남 부부간첩
1997년은 김영삼 정권의 마지막 해였다. 그해 말 IMF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전설적인 투자 귀재 재일교포 3세 손정의 회장의 소프트뱅크는 1997년 닷컴버블 붕괴 시기에 70억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그 당시 주식시장 역사상 최대 규모의 손실로 꼽혔다.
1997년 2월 15일 밤 탈북자인 김정일의 전처 성혜림의 조카 이한영이 정체불명의 괴한으로부터 권총으로 저격당했다. 4월 17일 대법원은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는 무기징역과 2,250억 원의 추징금을,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는 징역 17년과 추징금 2,628억 원을 선고했다. 4월 20일 황장엽 조선노동당 국제담당 서기가 망명했다. 8월 6일 KAL 801편이 괌에서 추락하여 228명이 사망하고 26명이 부상을 입었다. 8월 19일 유엔 통계국은 세계인구가 57억 5천 100만 명이라고 발표했다. 9월 12일 박초롱초롱빛나리 (박나리)양이 13일 만에 숨진 채 발견되었다. 용의자는 20대 여성으로 몸값을 노리고 여성을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11월 21일 정부는 절체절명의 외환위기를 맞이하여 국제통화기금 (IMF)에 구제 금융을 신청했다. 12월 19일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었다. 12월 22일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이 특별사면복권으로 석방되었다. 12월 30일 (우리나라에서 마지막 사형 집행인) 흉악범 23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
1997년 10월경 울산에서 최정남 부부간첩이 체포되었다. 실제 부부 사이였던 최정남과 강연정이 발각된 것이다.
(최정남은 1962년 5월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태어나 1984년 4월 사리원대 4학년 재학 중 간첩으로 선발되어 1989년 7월 노동당에 입당했다. 강연정은 1969년 10월 평양에서 태어나 1986년 9월 고등중학교 졸업 직후 간첩으로 선발되어 1994년 8월 노동당에 입당했다. 아버지가 인민군 고위 간부인 점과 외모를 인정받아 선발되었다. 1990년 11월 결혼해 1992년 1월 아들 최남혁을 낳았다. 아들은 남파되지 않고 부부가 체포될 당시 평양에서 자라고 있었다.
1997년 7월 30일 오후 7시쯤 공작 모선으로 남포항을 출발해 공해상으로 남하, 제주도를 돌아 일본 대마도 부근 공해상에서 거제도로 접근했다. 그 배에는 무장 전투원 20명, 호송 안내원 3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공작 모선은 8월 2일 밤 9시경 거제도 앞 공해상에서 5톤 상당의 반잠수정을 내렸다. 거제도 해안에는 레이더기지가 있었으나 12마일 밖에서부터는 완전 잠수로 항해했기 때문에 포착하지 못했다.
11시경 거제도 해안 500m 지점에서 두 사람은 수중 침투 장비로 갈아입은 채 반잠수정을 떠났고, 11시 30분경 경남 거제군 갈곶리 해안에 상륙했다. 그 후 이들은 20일간 경주 부산 광주 등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6개의 드보크를 설치하고 현지 적응 훈련을 했으며 8월 23일에는 서울 구로동에 숙소를 마련했다.
안기부는 수사 과정에서 경주 민속공예촌 야산, 서울 관악산, 서울 봉천동 장군봉 체육공원 등에 있는 드보크를 찾아냈는데, 거기에는 체코제 CZ 83 권총 3정, 실탄 170발, 수류탄, 파카 만년필 독총, 독약 앰플 등 인명 살상 장비 10종 205점과 무전기, 난수표 등 기타 간첩 장비 총 54종 284점을 발굴했다.)
그 무렵 (9월에서 10월 중순 경) 부부간첩은 관악산 등지를 등산하면서 심정웅을 6번 만났다. (그들은 관악산과 울산 태화사지 부도 안내판, 여의도 쌍둥이 빌딩 등을 배경으로 함께 사진도 찍었다.) 그 당시 서울지하철공사 동작설비분소장이었던 심정웅은 북의 지령에 따라 국가기간시설인 철도와 지하철에 침투해 39년간 고정간첩으로 암약해 왔다.
부부간첩은 그에게 새로 암호 해독법과 신형 무전기 사용 방법을 교육시켰고, 조국 통일상을 수상했다는 것을 알려주었으며, 김정일에게 바치는 충성의 편지를 받아내고, 유사시 지하철을 마비시킬 방법을 전수해 주었다.
심정웅은 김포군 통진중학교 2학년 때인 1958년 둘째 당숙인 간첩 심웅섭의 권유로 경기도 김포군 대곶면 마을 앞 해안에 정박해 있던 공작선을 타고 입북해 간첩 교육을 받았다. 이때 “교통고등학교 (현 철도고)에 진학한 뒤 철도청에 들어가 유사시 철도를 마비시키라”는 지령과 함께 철도를 뜻하는 ‘철마산 66호’라는 공작 대호를 받았다.
교통고를 졸업하고 1963년 철도청 기사로 임용된 심정웅은 1966년 당숙과 함께 2차 월북해 노동당에 입당해 재교육을 받았으며, 1984년 서울지하철공사로 전직해 시설 분야에서 줄곧 근무해 왔다. 그러면서 남파 간첩들에게서 공작자금, 무전기, 난수표, 인식표 등을 제공받았다. 심정웅은 자신이 근무한 철도, 지하철 등 국가기간시설에 관한 정보를 남파 간첩 김낙효와 여러 차례 접선하면서 넘겨주었다.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징역 10년 및 자격정지 10년을 선고받았다.
부부간첩은 1997년 2월 15일 발생한 이한영 암살사건이 북한의 소행임을 밝혔다. 그 당시 경찰 등 수사기관이 대대적인 조사를 진행했지만 범인을 밝힐 수 없었다. 그런데 부부간첩이 이 사건의 범인은 남파 공작원 최순호와 윤동철이라고 밝힌 것이다.
북한 대남공작부 소속 테러 전문 요원들인 2인조 특수 공작조는 그 사건이 발생하기 일 개월 전에 남파되었고 그들은 이한영을 미행하면서 추적해 살해한 것이다. 1997년 2월 15일 9시 52분, 김정일의 처조카 탈북자 이한영은 경기 성남시 분당동 서현동 시범현대아파트 418동 14층 복도 엘리베이터 앞에서 벨기에제 브라우닝 권총으로 총을 맞은 후 10일 후인 25일 사망했다.
범인들은 대기하던 차량을 타고 고속도로를 통해 남해안으로 갔고 공작용 잠수함을 타고 북으로 복귀했다.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들은 그 후 재남파에 대비해 얼굴 성형수술까지 받았다.
최정남은 1997년 8월 초 남한 내 기존 조직인 고영복 전 서울대 교수, 심정웅 서울 지하철 공사 동작설비분소장 등에 대한 지도 검열과 공작 대상자 포섭 임무를 띠고 거제도 해안으로 침투해서 삼개월 가량 활동하다가 뜻밖의 사건으로 체포된 것이다.
고영복 교수는 그들 부부 간첩과 6차례에 걸쳐 자신의 서울대 연구실 등지에서 만났다. 그때 고 교수에게 북한 노동당 창건 50돌 (1995년 10월 10일)에 조국통일상에 수여되었다는 사실이 통보되었다. 최정남이 말했다. “교수님! 존경하는 서울대 교수님! 조선노동당은 창건 50돌을 맞이해서 교수님께 조국통일상을 수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조선노동당은 창당이래 주석님의 탁월하신 영도로 온갖 가시밭길을 헤치고 전진하면서 위대한 승리를 쟁취했습니다.
이 상은 아무에게나 수여되는 것이 아닙니다. 조국 통일을 위해서 불철주야 헌신하신 분께만 드리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께서 냉철하게 평가하시어 직접 결정한 것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조국이 통일되면 교수님은 틀림없이 서울대 총장님으로 승진하실 겁니다. 그날을 기다려 주십시오.”
고 교수가 답례를 했다. “감사합니다. 너무 과분한 상을 주셨습니다. 백골난망입니다.”
고 교수는 그 무렵 체포되어 구속 기속되었다. 국가보안법 위반 (회합, 통신) 혐의가 적용되어 징역 2년의 실형이 최종 확정되었다. 그래서 서울대 인사위원회는 명예교수직을 박탈했다. 1년 3개월 복역 후 김대중 정부 출범 1년을 계기로 단행한 1999년 2월 25일 특별사면에서 형집행 정지로 석방되었고 같은 해 8월 15일 광복절에 복권되었다.
1997년 10월 21일 남파 간첩 최정남은 재야 단체 간부 정대연을 만났을 때 “김영환 선생 소개로 왔다”고 밝혔다. 그러다 정대연은 안기부의 무슨 공작으로 오해해서 그를 신고했고 엿새 후인 10월 27일 체포된 것이다. (민주주의 민족통일 울산연합 집행위원장이었던 정대연은 그 당시 김영환의 변신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자주의 길」 (3호)에서 ‘세상이 바뀌어도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며 김영환의 주장을 비판했고 이 비판을 김영환이 재비판하고 그가 재차 반박하면서 논쟁은 뜨겁게 달아 오르며 노선 투쟁이 일어난 것처럼 보였지만 김영환이 ‘대꾸할 가치를 못느낀다’고 발을 빼면서 그 논쟁은 결론 없이 끝났었다.)
1997년 10월 21일 정대연은 “남녀 2명이 찾아와 북한에서 왔으며 북으로 함께 가자”고 말했다며 간첩신고를 했다. 그는 이들 2명을 안기부에서 보낸 함정으로 착각하고 자진 신고한 후 기자회견을 열어버린 것이다. 당시 안기부에서는 이런 프락치를 보낸 적이 없어서 북한 간첩의 소행으로 판단하고, 1997년 10월 27일 오전 11시 30분 울산 코리아나호텔 커피숍에서 정대연을 재차 접촉하려던 남녀 간첩 2명을 현장에서 검거했다.
처음에는 남녀 간첩이 진짜 부부 사이인 줄 몰랐다. 다만 남녀 간첩이 함께 내려온 것은 아주 이례적이어서 뭔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했다. 그들에게서 캐내야 할 비밀이 많아 보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생포해야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사살할 수밖에 없었다.
커피숍은 갓 내린 풍미 가득한 커피 냄새가 가득했다. 그들은 적당히 끼리끼리 나눠서 자리를 잡고 시치미를 뚝 떼고 손에 따뜻한 머그잔을 쥐고 커피를 마시는 흉내를 내고 있었다.
체포 당시 그 커피숍과 1층 로비, 비상구, 호텔 주변 건물과 골목에는 30여 명의 안기부 무장 요원들이 사복을 입고 일반 시민으로 가장한 채 걸어서 왔다갔다 하거나 몸을 숨기고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기부 요원들은 그들 일행이 커피숍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일제히 권총을 빼 들고 3명을 겨냥했다. 요원들이 덮치자 여자 간첩은 가느다란 목소리로 "여보, 여보…"란 외마디 소리를 질렀지만 남자 간첩은 별다른 반항 없이 순응했다. 그래서 예상과는 달리 상황이 싱겁게 종료된 것이다.
그 순간 안기부 요원들은 혹시 수류탄으로 저항하거나 자폭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몹시 긴장한 채 권총을 빼들고 외쳤다.
“꼼짝하지마!”
“움직이지마!”
“움직이면 쏜다!”
“옳지! 그대로 있는 거야.”
“잘하고 있지.”
최정남은 이내 눈을 감고 포기한다. 그는 아내를 외면한다. 항복한다는 표시로 머리 위로 두 손을 올린다. 그는 안도한다. 자신이 이 순간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고, 이렇게 체포되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얼핏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그 지긋지긋한 공작원 생활을 끝내고 싶었다. 그는 남한에서 체포된 일부 공작원들이 목숨을 부지하고 잘살고 있음을 어깨너머로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연정은 절망적인 모습이다. 심장이 오그라든 것처럼 느껴지고 위장이 쥐어짠 듯 경련을 일으킨다.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문다. 힘들게 침을 삼킨다. 눈물이 흐른다.
염색한 검은 긴머리를 뒤에서 묶고 멋내기용 안경을 쓰고 위장한 젊은 여자 요원은 구석진 자리에 홀로 앉아 있다. 그녀의 입가에는 보일 듯 말 듯 아련한 미소가 스쳐 지나간다. 남자 요원이 눈짓을 해서 상황이 종료되었음을 알려준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녀 곁으로 다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착하기도 해라.” 그리고 나서 강연정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그녀는 현장 요원으로 선발되어 고된 실전 훈련을 받았지만 처음으로 작전에 투입되어 약간 긴장했었다. 수류탄이 눈앞에서 터지면서 파편이 사방으로 튀는 환상이 잠시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쓰디쓴 에스프레소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입안 가득히 감도는 진한 커피향을 음미하면서 봄에 나온 고한우 가수의 데뷔곡인 ‘암연’의 가사를 되새기면서 자신을 달래고 있었다.
사랑이란 것은 나에게 아픔만 주고 아직도 그대는 그 자리
내 마음 속에는 멍울로 다가와 우리가 잡으려 하면 이미 먼 곳에 그땐 때가 너무 늦었다는 데 차마 어서 가라는 그 말은 못하고
나도 뒤돌아서서 눈물만 흘리다 이젠 갔겠지하고 뒤를 돌아보면 아직도 그대는 그 자리
(부부간첩이 드보크에 은닉한 개량형 메모리식 무전기는 전자기억식 고속 송신장치가 내장되어 있어 무전기를 오래 작동시키지 않고 한 순간에 송신할 수 있어서 추적이 어렵다. 송신 가능 거리가 길어 집안에서도 북한에 보고할 수 있다. 독약 앰플은 액화 청산가리가 들어있어 깨물면 조금만 들이마셔도 사망한다. 립스틱이나 만년필 뚜껑 등에 숨길 수도 있다. 그 당시 여간첩 강연정은 안기부에서 조사를 받던 중 항문에 숨겨둔 독약 앰플을 꺼내 삼킨 후 사망했다.)
그 강력한 독은 빠른 속도로 그녀의 혈관 속으로 흘러 들어가 전신에 퍼졌다. 온몸이 경련을 일으키고 마비되면서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짧은 순간 고통스럽게 헐떡인다. 생명의 마지막 순간 그녀는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누구는 ‘부부란 한 손 속의 두 손가락이다. 죽을 때까지 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했지만 그녀는 북에 인질로 잡혀있는 아들과 남편을 남겨두고 그렇게 홀연히 떠났다.
남자는 동물적 생존 본능에 의거 살아남기 위해서 냉철하게 실리를 택했다. 그는 안기부에 적극 협조하고 그 대가로 형을 면제 받았으며, 여태껏 보호를 받으면서 재혼해 잘살고 있다.
최정남의 남파 임무 중 하나가 새로운 공작 대상자를 포섭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최정남은 당시 재야 단체 기관지 「자주의 길」에 실린 정대연의 기고문과 김영환과 대담 논쟁 등을 분석해 나름대로 대학 총학생회장 출신인 정대연이 사상적 토대가 확고한 인물이라고 평가하고 포섭하기 위해 접촉한 것이다. 그런데 그냥 만나자고 하면 이상히 여길까봐 김영환의 이름을 판 것이다.
하지만 최정남은 김영환이 북한 공작망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전혀 몰랐다. 알 수가 없었다. 북한의 대남공작 조직은 철저히 단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직접 연결된 라인이 아니고는 서로 모른다. 남파 공작원들은 초대소에서 교육받을 때 서로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대낮에도 우산을 쓰고 다니게 할 정도로 철저하다.
다만 안기부의 조사 과정에서 최정남은 ‘90년대 초 남조선 대학생 두 명이 (평양에) 왔다가 김일성을 만나고 간 적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라고만 진술했다. 그래서 국정원은 누가 다녀왔는지 단서를 포착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누군지 알아낼 수 없었다.
김영환 역시 최정남의 존재나 고영복 교수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알 수가 없었다. 당시 고영복에게 전화를 건 사람은 (일부의 오해, 즉 김영환이 아니라) 이북 억양의 이원태라는 이름을 쓴 사람이었다. 안기부는 그를 잡지 못했다. 다만 고정간첩망 (고첩망)의 일원이라고만 추측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발신지 추적이 되는 전화와 안되는 전화가 있었다, 지금은 모든 전화가 다 발신지 추적이 되지만. 그 전화는 당시 발신지 추적이 안 되는 전화였다. 그래서 추적에 실패했다.
하지만 최정남은 안기부의 조사 과정에서, “북한에서 간첩 교육을 받을 때 담당 과장인 윤택림으로부터 ‘1980년대 후반 동남아인으로 위장한 부부간첩 1개 조가 남한에 완벽하게 합법 침투한 후 자신들의 국적을 세탁한 나라의 음식점을 내고 그 나라 대사관으로부터 개업식 축하도 받는 등 활동하다가 1992년 북한 공작원 이선실 사건이 터지자 살던 집도 버리고 급거 복귀한 후 지금은 영웅 대접을 받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1999년 8월 김경환을 수사하던 중에 1990년 1월경 말레이시아 화교로 위장한 남파 간첩 진운방에게 포섭됐었다는 진술을 얻어내고, 원진우의 사진을 김경환과 하영옥에게 제시하여 원진우가 진운방과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런데 여수 앞바다에서 격침당한 반잠수정 속 원진우는 남한의 실존 인물인 원진우의 신원 사항을 도용하여 주민등록증을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김영환은 1997년 10월 18일 중국으로 출국했다. 최정남을 만난 정대연이 기자회견 (10월21일)을 하기 전이다. 중국에서 무역업을 하는 처를 만나러 간 것이다. 그 전에도 처를 만나러 간 적이 있고 처는 그 당시 중국에서 사업을 했다. 그런데 정대연이 기자회견에서 ‘최정남이 김영환의 소개로 왔다면서 북한에 함께 가자고 했다’고 밝히자 간첩 행위, 민혁당 등 자신의 과거 행적이 드러날까 봐 지레 겁을 먹고 귀국하지 못하고 계속 중국에 체류하고 있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이다.
최정남 사건을 계기로 그 당시 안기부 (안기부가 국정원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9년 1월 21일이다)가 입수한 김영환의 대북 연계 혐의를 입증하는 단서는「나는 너에게 장미의 화원을 약속하지 않았다」라는 난수 해독용 장편 소설이었다.
안기부는 최정남이 체포되고 나서 김영환이 자기 집에 있는 책을 없애라고 연락한 사실을 감청 등 여러 수단과 방법을 통해 알아냈다. 안기부는 압수수색 영장을 발급받아서 김영환 집에 있는 수많은 책 중에서 그 책을 찾아낸 것이다. 그러자 김영환은 그 책을 압수해 간 사실을 알고 안기부가 단서를 잡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들어오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안기부는 그 책이 난수 해독용 책이라고 의심은 하고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난수를 풀지 못했다.
김영환이 말했다. “조앤 그린버그의 소설 「나는 너에게 장미의 화원을 약속하지 않았다」는 여느 집 서재에 꽂혀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한 350페이지짜리 소설책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책이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간첩들이 사이에는 주고받을 메시지가 있을 때 숫자를 사용하여 암호화하는데, 이를 해독하려면 서로 간에 약속된 책이나 잡지가 필요하다. 나에게는 북한과 약속된 해독의 키워드가 바로 「나는 너에게 장미의 화원을 약속하지 않았다」였다. 부부간첩단 사건이 터지고 나서 국정원이 우리 집을 압수수색 했을 때에 그 책을 가져갔는데, 많은 책들 가운데 그것이 난수표 해독용이라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1999년, 반성문과 공소보류
1999년은 단기 4332년이고 불기 2543년인 해였다.
2월 12일 미국 상원은 빌 클린턴 대통령의 탄핵안을 부결시켰다. 6월 25일 마이클 잭슨이 서울에서 ‘마이클과 친구들’이라는 자선 공연을 개최했다. 6월 30일 경기도 화성군 소재 씨랜드 청소년 수련원 화재사건으로 유치원생 19명과 인솔교사 4명 등 23명이 숨졌다. 7월 16일 탈옥수 신창원이 2년 5개월 만에 검거되었다. 12월 31일 보리스 옐친이 러시아 대통령을 퇴임했다. 10월 29일 KBO 리그에서 한화이글스가 창단 이래 처음으로 우승을 했다. (그 이후 한화이글스는 다시 우승을 해본 일이 없고 거의 해마다 꼴찌를 달리고 있다.)
김영환은 7월 29일 귀국해서 구속되기 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전향 여부에 대해 국정원의 심사를 받았다. 국정원은 8월 9일부터 16일까지 네 번 심사했다. 한 번은 시내 대공상담실에서, 세 번은 호텔에서 했는데 분위기는 자유로웠다. 첫날에는 ‘본인 것’만 얘기하겠다고 하면서 이러저러한 것을 진술했다. 결국 1989년부터 북쪽 간첩이었다는 사실, 밀입북해서 김일성을 만난 사실까지 진술했다.
심사과정에서 국정원 수사관이 대화 내용을 녹취했다.
김영환은 네 번째 심사를 마치고 8월 16일 돌연「말」지를 찾아가 ‘밀입북한 사실이 없는데 국정원이 간첩 사건을 조작하려 한다’는 취지의 인터뷰를 하고 홍콩으로 몰래 출국을 시도했다.
「말」지 1999년 9월호는 「김영환 긴급 인터뷰 - 『국정원, 대규모 간첩단 사건 조작 위해 나를 회유 협박』」이란 기사를 언론사 가운데 최초로 보도했다. 이 인터뷰에서 김영환은 ‘나는 1991년에 북한에 간 적이 없다. 북한에 가서 김일성을 만난 적이 없다. 국정원이 내가 수괴인 간첩단 사건을 조사 중이다. 「시대정신」편집팀 등 연루자는 수백 명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1999년 8월 18일 오후 6시 35분 김포공항에서 대한항공 605편을 타고 홍콩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그 전날 어머니에게 “어머니 제 내복과 돈 좀 가지고 김포공항으로 와 주십시오”라고 전화를 했다. 어머니는 그 전화를 받고 연락도 없이 집에 들어오지 않은 아들이 김포공항으로 오라는 것은 국외 탈출을 하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청바지에 티셔츠, 운동모자를 쓰고 배낭 하나를 매고 있었다. 비행기 표는 어머니가 공항에 도착해 이미 돈을 지불했다. 시간이 남은 어머니와 아들은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때 그가 말했다. “제가 실수한 것 같습니다. 도와준 분들에게는 대단히 미안합니다. 그 사람들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습니다. 소재도 모르고, 어디서 뭔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데, 제가 어떻게 그들의 활동을 확인시켜줄 수가 있겠습니까.”
국정원 수사관들은 김영환이 출국 직전 긴급체포했다. 그러고 나서 다음날인 8월 19일 오전 9시 서울 충무로에 있는 인터넷 서점 ‘알라딘’ 사무실에서 이 회사 대표 조유식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했고, 같은 날 밤 11시경 서울 신림동 길에서 하영옥을 긴급 체포했고, 8월 20일 모 여대 시간 강사 심재춘을 체포했고, 9월 4일 말지 기자 김경환 (그 당시 정치팀장)을 집에서 체포했다.
그들을 체포 연행해서 본격적으로 수사에 착수한 것이다.
국정원 수사관들은 국정원법에 의해 특별사법경찰관의 지위를 갖는다. 피의자를 신문하여 자백을 받을 수 있는 권한이 있고 (그들은 자백은 증거의 왕이니까 자백을 받기 위해 온갖 가혹행위와 모진 고문을 했다), 그들이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는 일정한 요건 하에 공판장에서 증거능력이 인정되고 유죄 판결의 근거가 된다.
이 대화는 8월 말쯤 어느 날 국정원 조사실에서 정식으로 조서를 작성하기 전 오고 간 문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사법경찰관 : 우리가 호텔에서 만난 게 엊그제 같은데……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우리끼리 하는 거요. 다시 말하면 조서에 정식 기재되는 것이 아니란 말이요. 여기서 잠시나마 당신을 북한식으로 선생이니 선생님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는 것을 아시오. 그건 아주 어색하지.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받는데…… 제이 인칭대명사인 ‘당신’이라는 말은 아주 아름답지.
김영환 : 저는 상관 없습니다. 험한 욕지거리도 감지덕지한 데 말이죠.
특별사법경찰관 : 우리는 당신이 중국에서 귀국했지만 열흘 동안이나 자유롭게 풀어주었어.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8월 9일인데 장소는 당신과 상의해서 조사실이 아니라 대공 상담실에서 만난 거야.
그것도 당신이 서울 지리를 잘 모른다고 해서 대한극장 매표소 앞에서 만나 대공 상담실로 모시고 간 거란 말이지.
김영환 : 귀국하자마자 즉시 연행해서 조사하지 않고 풀어주어서 의아하게 생각하긴 했습니다.
특별사법경찰관 : 두 번째부터는 서울 모 호텔에서 만난 거야. 그러니까 간첩 용의자로 조사하기 위해서 만난 게 아니라 전향과 관련해서 심사하려고 한 거지. 그래서 농담도 하고 웃으면서 아주 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눴단 말이지. 점심시간 때 인근 식당에 가서 돼지고기를 안주로 술을 한잔하고 칼국수를 먹었지.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려고 당신에게 술을 권했는데 먹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두 잔을 먹었어.
알고 보니까 당신은 술을 좋아하진 않더구만.
김영환 : 그랬었지요.
특별사법경찰관 : 당신을 어떻게 처리할지…… 긴가민가했지. 위에서도 딱히 결정을 내리지 못했어. 그러니까 당신을 체포 구속할 생각은 없었어.
그런데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해외로 도망치려고 한 거야.
대단한 귀빈이나 되는 것처럼 호텔에서 모시고 가서 조사가 아니라 그냥 대화를 나눴는데 말이야.
김영환 : 무슨 이용가치가 있었겠죠. 북쪽에 뭔가 보여주려고 말입니다.
특별사법경찰관 : 오버하지 말라고. 95년부터 변화의 조짐이 보였거든. 그걸 분석하면서 우리도 헷갈렸단 말이지. 위장용인가 해서……
우리는 당신이 민혁당 해체를 선언한 97년 7월을 분수령으로해서 그 전에는 약간 흔들렸고, 그 후에는 완전히 전향한 것으로 판단했었지만.
아마 북에서도 반신반의했겠지. 당황했을 거야. 신 같은 존재로서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 주석까지 나서서 두 번씩이나 특별히 만나주고 격려까지 했는데 말이야.
전향한 남파 간첩들에 의하면…… 김일성은 자기에게 인사하는 전설적인 여간첩 이선실을 몰라보고 ‘저 여편네가 누구냐?’고 했다지만…… 당신에 대해서는 너무 잘 알고 있었고 높이 평가했다고 했어. ‘우리 사회과학원 학자들보다 낫다’고 말했다지.
오죽했으면 김 주석이 당신에게 ‘선생’이라는 호칭을 사용했을까.
김일성은 황인오는 만나주지도 않았거든.
북한 입장에서는 당신은 그렇게도 기다리고 기다리던 자수성가한 영웅적 존재였던 거야.
김영환 : 그쪽에서 제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너무 과분하게 평가한 겁니다.
특별사법경찰관 : 우리도 놀랐으니까. 설마 했지…… 어떻게…… 그렇게까지…… 진짜 간첩으로 변신까지 할 수 있었는지.
김영환 : 죄송합니다.
특별사법경찰관 : 그 소설책 말이야. 그걸 압수하고 나서 어느 정도 단서를 잡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어. 최정남이 당신을 들먹였지만 그때는 전혀 감을 잡지 못했어. 그는 당신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 그저 이름 정도만 알고 있더라고.
그런데 당신은 중국에 머물면서 자신의 신분이 탄로 난 것으로 지레 겁먹고 벌벌 떨었단 말이지.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워낙 큰 죄를 지었으니까.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더니.
김영환 : 그 소설을 진즉 없앴어야 하는데 제가 실수한 거죠.
특별사법경찰관 : 당신은 처음에는 그 소설책에 대해서 메모같은 것을 써서 넣어두는 책이라고 얼버부리려 했어. 원문 제목이 I never promised you a rose garden 이었어. 그 소설은 조앤 그린버그의 메디컬 서스펜스 소설이라고 소개되었지. 유대계 작가의 자전적 소설로 정신분열증이라는 병의 증상과 치료과정을 통찰력 있게 묘사하고 있었어.
우리는 당초에는 그게 난수 해독용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다만 책 제목이 너무 어려웠거든. 뭔가를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 그래서 갑자기 의심한 거야. 하지만 노련한 암호 해독 전문가들도 해독할 수 없었어.
김영환 : 제가 속았지요. 뭐. 국정원에서 우리가 다 안다고 추궁하니까 저로서는 난수를 푸는 책이라고 시인할 수밖에 없었죠. 그 막강한 국정원이 안다고 하니까 믿을 수밖에 없었던 거죠. 저는 그 소설책을 들춰가며 난수를 해독하는 방법에 대해서 설명까지 했습니다.
특별사법경찰관 : 당신은 총 98회 지령을 받았어. 그 중에서 26회는 평양에 가기 전에 받았고 72회는 그 후에 받았는데…… 마지막 지령이 내려온 게 작년 6월이었어. 당신이 알려준 대로 그 소설책을 이용해서 모든 지령 내용을 확인한 거야.
그리고 나서 당신은 남파 간첩 윤택림에게 포섭당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조유식과 함께 북한에 갔다 온 사실, 김일성을 두 번 만났단 사실도 다 털어놓았지.
김영환 : 그때는 모든 걸 털어놓고 싶었습니다. 아마도…… 모진 고문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이었을 겁니다.
특별사법경찰관 : 우리를 이용해 먹으려고 한 거지.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어. 그렇게 잘 해줬는데…… 뭐 국정원이 간첩 사건을 조작하려고 한다고……?
김영환 : 제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엄혹한 남북 분단 상황에서 이데올로기 갈등을 겪으며 남과 북으로부터 동시에 버림받은 한 청년의 갈등과 고뇌라고 봐줄 수 있는 거 아닌가요?
특별사법경찰관 : 「말」지는 좌파의 입이긴 하지만…… 우리는 「말」지에 나온 기사는 거의 외울 수 있어. 철저히 분석하거든. 거기에 우리가 모르는 의외로 많은 정보가 숨어있지. 「말」지 기자를 한 조유식은 91년 11월호에 ‘한국군의 신국방 전략과 군비 증강’, 92년 9월호에 ‘지금도 미 핵 잠수함이 들어온다’, 94년 12월호에 ‘북한은 동아시아의 새로운 성자이대로 떠오르고 있다’, 96년 6월호에는 ‘북한군의 판문점 진입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등 대북 보고용 기사를 썼단 말이지.
그러니까…… 북쪽에서는 너무 노골적으로 활동하자 ‘신분이 노출될지도 모르니 보안상 조심하라’고 지령을 내려보내기도 했단 말이지.
김영환 : 제 입장을 이해 해 주십시오.
특별사법경찰관 : 당신의 지위는 뭐야?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다는 거야? 대충만 이야기 해 보시지.
김영환 : 당 강령의 핵심은 수령론과 민주기지론, 대동단결론, 반종파 투쟁론, 통일전선론 등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령론에 의하면 수령의 지위는 확고하고 수령의 지시 명령에 의해서 조직이 일사불란하게 행동합니다.
특별사법경찰관 : 어련하겠어……
김영환 : 민혁당 관련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낼 필요가 있었습니다.
특별사법경찰관 : 어서 빨리 도망치라는 메시지겠지.
수령이라면…… 그들을 설득해서 자수시켜야…… 그래야만 그들도 광명을 찾을 거 아닌가. 자기 혼자만 살아남으려고 하면 그건 비겁한 거야.
김영환 : 탈북자들을 만나서 북한의 가혹한 현실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제가 평양에서는 불과 17일 동안 체류했습니다. 그때는 도저히 알 수 없었던 거죠. 정치범 수용소 말입니다. 평양 방송에서는 ‘특별독재구역’이라고 하더군요. 특히 요덕수용소를 경험하고 탈북했던 강철환씨와 안혁씨의 증언은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특별사법경찰관 : 그렇지. 인간의 상상력을 초월하지. 그런데 말이야…… 황장엽 선생을 만나서 무슨 얘기를 했나? 우리는 그를 삐딱하게 바라보고 있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만 털어놓고…… 정작 알고 싶은 것은 말을 안 해. 잘 협조하지 않고 자기 고집만 대단하지.
김영환 : 제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좋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특별사법경찰관 : 그런데도……?
김영환 : 그럴 수밖에 없었다니까요.
특별사법경찰관 : 우리를 우습게 본 거야. 옛날이 그립지.
안기부가 국정원으로 바뀌었으니까. 그때는 무조건 개 패듯 두들겨 팼으면 되니까. 물 고문, 고춧가루 고문, 전기 고문을 해도 되고.
매에는 장사 없다고 그쯤 되면 다 불었어. 우리가 묻지 않는 것도 스스로 만들어서 진술했어.
김영환 : 지금은 아니라고요? 국민들이 믿을까요?
‘개 버릇 남 주나’라는 속담을 아시겠죠. 저에게는 도저히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가 있지요. 안기부이건…… 국정원이건…… 공포의 대상이지요.
그 옛날에 얼마나 지독하게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까. 그것도 47일 동안이나 말이죠. 사건을 조작하고…… 억지 자백을 받아내려고……
특별사법경찰관 : 그건 옛날 일이라니까. 지금은 아니야.
진술 거부권을 행사할 건가? 그건 시간만 잡아먹는단 말이야. 우리는 호텔에서 당신의 이미 말한 거 죄다 녹음해놨어.
그것도 비밀 녹음한 게 아니라 당신의 동의 하에 녹음한 거란 말이야.
숨소리나 기침 소리까지……
민변 변호사들이 도와주는데도 한계가 있을 거야. 소송은 결국 증거 싸움이니까. 그리고 우리에게는 보물선이 있지. 거기에 모든 게 들어있거든.
그런데 말이야…… 보물선 때문에 하영옥은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지. 그래서 인정할 건 인정했어. 걔가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김영환 : 제가 알 바 아니지요. 하영옥은 개성이 강하고 외골수예요.
특별사법경찰관 : 그렇게…… 무책임하게…… 지나가는 말투로 말해도 될까?
김영환 : 그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특별사법경찰관 : 당신들은 1982년부터 둘도 없는 절친이었어. 그렇지 않은가? 그는 당신 결혼식에도 참석 했을거고…… 함께 사진도 찍었겠지.
그런데 말이야…… 그 당시 당신은 틀림없이 북쪽 간첩이었단 말이지. 그것도 아주 거물이었어. 무슨 배짱으로 서울 한복판에서 그렇게 공개적으로…… 우리가 완전히 당한 거지.
김영환 : 저는 결혼할 나이가 돼서 결혼한 것뿐입니다.
특별사법경찰관 : 우리가 지난번에 자필 진술서를 좀 써달라고 요청했지. 당신에 대한 심사 결과를 윗선에 보고하려면 심사했다는 근거가 있어야 했으니까. 그런데 당신은 끝내 못 쓰겠다고 잡아뗐어. 그러면 일문일답식의 진술조서라도 남기자고 제의했지만 그것도 안 된다고 했지.
김영환 : 그랬었지요.
특별사법경찰관 : 우리가 그때 전향서건 준법 서약서건 형식을 차치하더라도 전향서를 쓰라고 강요한 적은 없었어. 당신의 입장을 이해했으니까. 당신도 인정할 거야. 그렇지? 하지만 변신이건 전향이건 했다면 그것을 자필로 입증하는 절차는 있어야 했거든. 그게 우리의 원칙이야.
그런데…… 당신은 마지막으로 오늘 밤에 충분히 생각해보고 쓰더라도 내일 아침에 쓰겠다고 말했어. 그러고 나서 돌연 말지와 인터뷰를 한 거지.
핸드폰도 꺼버리고.
김영환 : 조직의 배신자가 되기 싫었습니다.
자기의 죄를 털어놓는 것도 어려운 판에 자신으로 인해 동지들까지 연루가 되니까 인간적으로 고민스러웠습니다. 전향과 배신은 별반 뚜렷한 차이가 없습니다. 그게 그거죠. 동전의 양면 같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인간은 사상적으로는 전향할 수 있습니다만 인간적으로는 배신하지 못하는 거죠. 자신의 칼로 동지들을 찌를 수는 없었습니다.
특별사법경찰관 : 그리고 한때는 둘도 없는 열렬한 혁명 동지였어. 닮은 사람들끼리 무리를 이룬다고 했는데 둘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을 거라고. 혁명이라는 언어는 전율을 느낄 만큼 강렬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까 시적이란 말이지. 둘 다 혁명가로서 시인의 기질이 있을 거 같은데……
김영환 :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시와는 거리가 멀었죠.
하영옥은 엄청 수학을 잘해요.
특별사법경찰관 : 당신들이 헤어진 과정이 몹시 궁금하지. 왜 그랬을까? 찰떡 궁합이었는데…… 언제나 당신이 앞장섰고 그는 뒤를 따라다녔지만. 하여간에 당신은 그의 내면까지 속속들이 잘 알고 있을 거야.
김영환 :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성인이 다 되어서 만났습니다. 이해타산으로 맺어진 단순한 지인 관계일 수도 있습니다. 속속들이 비밀의 속내를 다 털어놓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다는 거죠.
지금…… 어제 일처럼 너무나도 또렷하게 그날 일이 떠오르는군요. 우리는 격렬하게 논쟁을 했지요. 세 사람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계속 침묵만 지키다가 도중에 나가버렸죠. 우리가 헤어질 때는 원수가 되어서 헤어졌어요. 그의 정당한 요구를 모두 거절했지요. 무슨 심보인지 오기가 발동했거든요. 솔직해야죠. 마지막까지 제가 가진 권력을 과시하려고 한 겁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미안하군요.
특별사법경찰관 : 이제는 별수가 없어. 중간에 무슨 변수가 있을지 모르지만…… 끝까지 수사해서 기소 의견으로 송치하는 거지. 아마 10년쯤은 대전교도소에서 살아야 할걸. 거기에다 자격정지 10년이 붙어.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그러면 네 인생은 완전히 쫑나는 거야.
우리를 원망하지 말라고.
자업자득이니까.
국정원의 수사 결과 북한이 1980년대 중반 이후 대학가의 학생운동을 주도해온 주사파 핵심 세력들을 포섭하여 조선노동당에 가입시킨 뒤 북한의 직접 지도를 받는 지하당을 구축하여 혁명 운동을 시도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제서야 처음으로 민혁당의 실체가 아주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 당시 김영환은 자신의 사상 전향 배경을 「말」지에도 공개했고 국정원에도 밝혔지만 서로 모순이 되는 대목이 있었다. 그런데 난수풀이용 그 책을 들이밀자 김영환은 ‘아차, 이게 아니구나’ 싶었던 모양이다. 보물선에서 나온 민혁당 관련 각종 문건이 수록된 3.5인치 플로피 디스켓과 CD, 간첩 원진우가 사용한 수첩과 전자 수첩 등에서 상세한 민혁당의 조직표까지 나오니까 위기감을 느낀 것이다. 자신을 따르던 조직원들로부터 배신자 소리를 들을까 봐 고민했던 것이다. 그래서 김영환의 주장에 의하면 민혁당 관련자들에게 도피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말」지를 찾아간 것이다. 그 당시에는 국정원도 김영환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몰래 출국을 시도한 것이다.
김영환은 구속되고 나서 처음에는 자기도 괴롭다고 진술을 거부했다. 그러나 네 차례 심사 과정에서 만난 수사관들과 다시 만나자 ‘호텔에서 이미 다 까발렸는데 이제 와서 부인해 봐야 뭐하겠냐’며 「말」지에 거짓말하고 도망간 것에 대해 사과했다.
그런데 나중에 조사해보니 구속 중에도 국정원 수사관한테는 다 진술해 놓고 가족이나 변호사한테는 진술을 강요당했지만 진술하지 않은 것처럼 얘기했다. 그래서 담당 변호사들도 구속 초기에는 국정원이 없는 사건을 조작하려 하는 것으로 오해했고 일부 언론은 고문 가능성을 제기했다. (「공작 2」 109~114쪽 참조)
국정원은 1999년 9월 김영환과 조유식이 사상 전향의사를 밝히고 조사 과정에서 과거를 뉘우치고 관련 조직원의 자수를 적극 권유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는 점을 높이 평가해서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공소보류 의견으로 구속 송치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7일 서울지검 공안부에서도공소보류를 결정하여 석방했다. (그들은 검찰로 구속 송치되어 1개월간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상태에서 검찰 조사를 받고 나서 공소보류 결정으로 석방되었던 것이다. 공소보류는 국가보안법 피의자에게만 적용되는 제도이다. 공소를 제기하지 않고 그냥 보류해두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해당 범죄의 법률상 시효와 상관없이 2년이 지나면 공소권이 자연히 없어지고 만약 필요하다 생각되면 2년 안에 언제든지 기소할 수 있다.)
그리고 자진 출두하여 자수하고 반성문을 제출한 15명의 민혁당 당원들에 대해서는 기소유예 의견으로 서울지검에 일괄 불구속 송치하였고, 공안부는 이들에 대해 기소유예로 처리하였다.
그렇지만 체포된 후에도 끝까지 전향치 않았던 하영옥과 심재춘, 김경환에 대해서는 9월 20일 서울지검에 각각 구속 송치하였고, 그들은 대법원까지 올라가 재판을 받았다.
이석기 경기남부위원장은 1999년 민혁당 사건 당시 3년간 도피하다 2002년 5월 검거되어 2003년 3월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5개월 복역 후 2003년 8월 15일 노무현 대통령의 광복절 특사 때 공안사범으로는 유일하게 가석방되었다. 그리고 2년 후인 2005년 8월 15일 광복절 특사 때 복권되었다. 2012년 4·11 총선에서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후보 2번으로 출마해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김영환은 그를 무시하는 투로 평가했다.
이석기는 민혁당 내에서 5~6위 정도의 서열을 갖고 있는 핵심인물이라고 소개하고 있던데 지하혁명당은 서열 같은 것을 정하지 않는다. 내가 중앙위원장이고 이석기가 지역위원장이지만 대중정당과 지하혁명당은 운영 시스템이 완전히 다르다. 점조직 형태로 운영되는 지하혁명당의 성격상 나는 이석기를 알아도 이석기는 나의 존재를 모르는 철저한 단선연계가 유지되었다. 나는 이석기를 개인적으로 만난 적조차 없다.
민혁당의 원류는 서울대를 중심으로 한 NLPDR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 창립 세대에 뿌리를 두고 있었는데, 다소 학구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분위기가 강했다. 경기남부 (민혁당의 지역조직 명칭은 경기남부였지만 통합진보당에서는 경기동부라고 하였다)의 투박하고 저돌적인 기질은 중앙에서 결정한 것은 그대로 따른다는 것이다.
김영환이 1999년경 국정원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반성문을 쓰려고 할 즈음 황장엽 선생을 처음 만났다. 그때 황 선생은 반성문을 쓸 것을 적극 권유했다고 한다. 그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북한의 봉건왕조체제에 저항하고 있었으므로 황 선생은 김영환에 대해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김영환의 증언에 의하면 그들은 김영환이 석방되고 난 후인 2000년부터 2010년 10월 황 선생이 사망할 때까지 150회 정도 교류했다.
김영환의 반성문 요지
저는 중고교 때부터 정부에 비판의식을 가져 대학에 들어와 자연스레 학생운동에 가담하게 됐고 역사와 사회현상에 대한 명쾌한 해석을 내린 마르크스주의에 이끌려 사회주의 학생운동에 빠져들면서 시위에 적극 나서는 등 열성적으로 활동했습니다.
제가 4학년이던 85년부터 기존 학생운동이 민족자주나 반미문제에 소극적인 점에 불만을 갖고 반미운동을 도입했고 이는 학생운동의 대세로 됐습니다.
저는 강철서신 등의 글을 써 주체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주사파라는 운동권 최대세력이 탄생했습니다.
그 후 체포돼 2년 정도 복역하고 나왔으며 89년 2월 반제청년동맹에 가입해 활동했고 남파공작원에 포섭돼 북과 연계를 맺고 91년 5월 밀입북, 김일성을 만나고 돌아왔습니다.
92년 강철환 안혁 등 탈북자들의 증언은 북의 비참한 실상을 깨우쳐 줬습니다.
97년 2월 황장엽 비서가 망명하고 식량난으로 부한 주민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 김정일 정권의 타도를 호소하고 민혁당 중앙위원회를 열어 해산 결정을 했습니다.
북한 동포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며 앞으로 기회가 주어진다면 북한 인권 실상을 널리 알리고 북한을 민주화시키기 위해 모든 힘을 바치고 싶습니다.
99년 10월 4일
김영환
(민혁당을 설립해서 중앙위원장을 맡은 가장 주범격인) 김영환은 반성문을 쓰고나서 공소보류 처분을 받았으나 하영옥은 끝까지 전향을 거부했다.
김영환은 반성문을 쓰고 전향하면서 오랫동안 자신을 짓눌렀던 과도한 강박 불안, 편집증에서 헤어날 수 있었던가? 그는 주체사상의 정립과 민주기지론에 입각해서 북한과 연계해야 한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그걸 실현하려는 욕망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좌절했고 심신이 피폐해지고 무기력해졌을 것이다. 삶의 원동력을 상실했고 삶의 의미 찾기에도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그에게는 그런 일련의 과정에서 모든 고난을 이겨내고 초월할 수 있는 정신적 면역력인 회복탄력성이 부재했을 것이다. 그에게 술과 담배, 중독성이 있는 약물 같은 위안물이 있었을까? 그 대신 내적 긴장감과 불안을 해소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과 깊이 있는 대화를 했을 것이다. (만약 자신과의 대화에 실패했다면 그가 아무리 강력한 정신력의 소유자라고 하더라도 각종 공포증, 공황장애, 범불안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같은 것을 겪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전향한 김영환과 전향을 끝까지 거부한 하영옥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으로 평가할 순 없을 것이다. 하영옥이 전향을 하고 반성문을 썼다면 그 역시 공소보류로 석방됐을 것이다. 그 대신 8년 형을 선고 받고 4년을 복역했다. 왜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았는가? 반성문 쓰는 게 뭐 대수라고? 바보 같다고 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를 민족반역자로 매도할 수 있는가? 한 인간의 신념, 사상, 의지를 그런 식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그대의 길을 가라. 남들은 뭐라고 하든 내버려 둬라. 누가 무슨 자격으로 그를 비난, 폄하 할 수 있는가? 그건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하영옥은 통렬하게 논박했다. (이 기고문이 실릴 당시는 1999년 7월이었고 자신을 민족해방노동자당 사건 관련자로 소개했다. 그러므로 이 글이 실제 쓰인 시점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하영옥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것은 1999년 8월 23일이었다. 그 당시 그는 37세였다.)
이런 취지의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다음 많은 나날을 번민하며 지냈다. 정말 내가 이 글을 써야 하는가. 결국 너와 이렇게 되어야만 하는 것인가. 마음은 괴롭고 머리는 무겁고 때로는 모든 것을 잊고 현실에서 벗어나 멀리 도망가 버리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 처음「월간조선」에 실린 너의 글을 보았을 때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느끼며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차츰 마음이 가라앉은 뒤에는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서 버린 너에 대한 강한 원망과 함께 마음 저 밑바닥으로부터 올라오는 분노를 참기 어려워 괴로워했다. …… 그래 쓰자! 이미 엎질러진 물, 언제나 그래오지 않았던가. 너는 엎지르고, 나는 그 물에 옷을 더럽히고 살을 데이고 마음을 다치고. 좋다, 이번에는 종결짓자. 차라리 잘되지 않았는가? …… 어떤 행동을 하거나 입장을 표명할때 그와 관련된 많은 사람들의 조언과 충고에 귀 기울이게. 자네는 항시 혼자서 생각하고 혼자서 결론을 내린 다음에 형식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토론을 하고 일을 벌이곤 했네. 자네의 그 자기중심적인 행동 탓에 이미 나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이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받은 바 있네. …… 자네에게 여기서 매운 소리를 하나 해야겠네. 나는 그때 자네의 행동을 보고 자네가 소영웅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생각하네.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공부한 지 두세 달만에 어떻게 주체사상에 대한 팜플렛을 쓰고 한번 제대로 해보기도 못한 노동운동과 관련된 지도지침 같은 글을 쓸 수 있었겠는가. 스스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게나. …… “동지는 무슨 사건으로 잡혀 왔소” 하고 사람들이 물으면 할 말이 없어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뭐 강철사건 관련자라고나 할까요” 하며 얼버무리던 것이 서대문 구치소에서의 내 모습이었다네. 생각해 보게나. 본때 있게 한번 일을 해 보겠다고 노동현장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던 사람이 아무런 일도 해 보지 못하고 자네하고 토론 몇 번 했다는 이유로 잡혀들어가 고문당하고 징역살이를 했으니 왜 억울하지 않았겠는가. …… 안기부 수사관들의 무차별 난타에 호흡이 끊겨 하마터면 아무도 모르게 죽을 뻔도 했다네. 병원에서 내 처참한 모습을 보며 누워있자니 너무나 기가 막혔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저질러진 일을. 나는 그때 이렇게 반성했네. ‘동지를 제대로 설득해서 민중적 관점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당한 일이다. 이것도 내 잘못이니 겸허히 반성하자.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자. 그리고 새로운 길을 찾자.’ …… 무엇을 하든 자기 주관에 빠져 이렇다 저렇다 고집스럽게 내세우고 자신을 반성할 줄은 모르고 온갖 논리를 갖다 대서 자기를 합리화하려는 태도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답답함을 느끼게 할 뿐 아니라 아무런 공감도 얻지 못하는 법이네. …… 더 들어보게. 자네와 같이 이북정권에 대해 극단적인 비판, 반대의식을 가진 사람조차도 자네더러는 ‘간쟁이’라고 하더란 말일세. 그 말뜻이 무엇인지 자네는 잘 알 걸세. 경상도 말로 ‘간사스러운 놈’이라는 욕이라는 것을. …… 내가 이런 걸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이 자네에게 큰 타격이 될 줄은 알지만 밝힐 건 밝혀야겠네. 자네처럼 그토록 극단적으로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에게 돌아갈 말이 그런 말 말고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나. 게다가 극우세력이라고 자네를 좋게 볼 줄 아는가. 내가 보기론 절대 그렇지 않네. 자네에게 이용가치가 있을 때 이용하려고는 할지 몰라도 자네를 신뢰하지는 않을 걸세. …… 자네가 내 질문에 논리적으로 어떤 해명을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실 이런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네. 즉 자네가 이런 주장을 요란하게 들고 나오는 데에는 다른 의도가 있지 않나 하는 것이네. 바로 이남의 지배세력, 그 중에서도 극우세력과 미국에 대해 나는 이렇게 변했으니 잘 좀 봐주십시오, 날 좀 믿어 주시오, 옛날의 김영환이 아닙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 속셈이 아닌가. 나는 그렇게밖에 해석이 안 되네. ……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이 있네. 자네가 감히 “피와 눈물이 메마른 사람”어쩌고 하면서 “무엇이 선이고 후인지 잘 분간을 못하는 사람’ 운운했는데 도대체 자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나 있는 사람인가. 똥 뀐 놈이 성낸다더니 정말로 딱 그쪽이 아닌가. …… 얼마 전 고문으로 출세한 정형근이라는 자가 한국을 대표하여 유엔 인권위에 참석하는 걸 보면서 ‘세상에 어찌 저럴 수가 있나’하고 분개했던 적이 있네. 정형근은 자네도 잘 알겠지. 바로 우리가 고문을 받던 그 시절에 수사책임자이며 고문의 실질적 지휘자였던 자가 아닌가. 그자가 이번에는 그의 그런 행각에 항의했다는 이유로 방양균 씨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는데 이야말로 적반하장이 아니겠는가. …… 그 당시 자네의 얄팍한 공명심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이 직접적인 경우만 해도 수십명에, 간접적인 경우까지 치면 수도 없이 많지 않은 그래도 그 사람들 모두 그 길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고 아무도 너를 원망하지 않고 참고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놓고 이제 와서 수많은 사람들의 등에다 칼을 꽂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행을 저지르고 있으면서 “피와 눈물이 메마른 사람” 운운하는 말이 입 밖에 나온단 말인가. …… 노동운동을 주제로 다룬 자네의 글은 그것에 대한 조사 연구가 거의 전무했다고 해도 무방하지 않는가. 그 외에 다른 글들도 대부분 자주적인 연구라기보다는 자기의 독창적 연구인 것처럼 서술한 글들이 사실은 거의 다 ‘방송’에 나오는 것 아니었던가. 어떤가, 이를 부정할 수 있겠는가. …… 이쯤에서 이 글의 결론을 내려야겠네. 자네는 그동안 소위 주사파의 대부니 뭐니 하면서 명성을 누려 왔네. 나를 비롯한 민족해방노동자당 사건의 직접적인 관련자들은 너의 그 명성이 허명임을 아는 터라 자네의 행보에 대해 적잖이 우려하며 지내왔네. 우리도 나름대로 자네에게 지적도 하고 비판도 하곤 했지만 이미 허명에 사로잡힌 자네는 도무지 들으려 하지 않았네. 그래도 같이 운동하던 사람들끼리 싸우는 모습을 보일 수가 없어서 우리는 참고 또 참아 왔네. 그 고통을 이미 진구형이 자신의 삶으로 웅변해 주고 있네.
(1997년 7월호「말」지에 실린 하영옥의 기고문 ‘네 멋대로 사는 건 좋지만 더 이상 운동을 팔지 말라’ 참조)
2020년, 에필로그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1980년대와 1990년대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는 격동의 20세기 마지막 10년간이었다. 20세기에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 있었고 수많은 크고 작은 군사 분쟁과 전쟁, 대공황을 겪었다. 6 · 25 전쟁 (내가 어린 시절 겪어서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과 베트남 전쟁 (국가의 지상명령에 의해 참전해야 했던)도 있었다.
그들과 나는 ‘our contemporaries’이다. 하지만 그들은 남북 분단의 희생자이고 엄혹한 시대의 희생자이고 역사의 희생자이다.
지금 21세기 대명천지에 살면서 되돌아보면 그 시대 사건과 인물들은 기억에 떠오르지도 않는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진다. 지금과 그 시대는 격세지감이라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완전히 단절된 것처럼 시대는 변했다. 세월은 쏜살같이 흘러간다.
1987년 6월 항쟁에 의해 제5공화국이었던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은 붕괴되었다. 제6공화국 헌법은 1987년 10월 27일 국민투표에 의해 확정되었다. 제6공화국이 성립하면서 노태우 정권 (1988.2.25.~ 1993.2.24.), 김영삼 정권 (1993.2.25.~1998.2.24.), 김대중 정권 (1998.2.25.~2003.2.4.)으로 이어졌다. (제6공화국은 우리 헌정 사상 유례가 없는 지금까지 35년 이상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그만큼 정치 사회는 안정되고 경제도 발전해서 선진국 문턱을 넘어선 것이다. 잊을만하면 가끔 당리당략에 따르는 것으로 보이는 즉흥적인 헌법 개정 운운은 자제해야 할 것이다.)
북한의 경우 봉건세습왕조는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인 김정일로 이어졌는데 그는 2011년 12월 17일 사망했다. (김정일은 傳記에 의하면 백두산 산꼭대기에서 태어났다. 그가 탄생하자 제비들이 하늘을 날며 환호했고, 그가 출생하던 순간에 무수한 별이 밤하늘을 밝혔고, 겨울이 봄이 되었으며, 무지개 두 개가 나란히 하늘을 수놓았다. 하지만 그의 집권 초기인 90년대 후반에 북한은 식량 기근으로 수십만 명이 아사한 ‘고난의 행군’을 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김정은으로 세습되었다.
그런데 김일성은 살아생전에 1995년을 ‘남북 통일사업 완수의 해’로 정했다. 그래서 남한의 일부 골수 주사파들은 ‘1995년 위원회’라는 조직까지 만들었었다. 하지만 김일성은 다행스럽게도 (?) 그 1년 전에 사망한 것이다.
1985년 100포인트였던 주가지수가 1989년 초에는 5년 남짓 기간동안 10배 가량 상승해서 사상 최초로 1000포인트를 찍었다. 1987년 11월 29일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인도양의 미얀마 해상에서 KAL 858 여객기가 공중 폭파해서 사라졌다. 전두환 군사정권의 마지막을 장식한 사건이었다. 1988년 2월 25일 노태우 대통령이 13대 대통령으로 취임했고,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제 24회 하계 올림픽이 서울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개최되었다. 11월 23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하고 백담사로 떠났다.
그해 6월 10일 (내가 즐겨 찾아보는) 이어영 편저, 「금성판 文章百科大事典」이 발간되었다. 편자는 머리말에서 ‘누에는 거칠고 푸른 뽕잎을 먹고도 부드럽고 하얀 명주실을 만든다. 나는 이 책이 상상력과 독창력을 가진 여러 독자들에게 슬기로운 문장의 실을 뽑아 낼 수 있는 푸른 뽕밭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라고 썼다.
80년대에는 통행금지가 사라지고 교복 자유화가 시행되고 국외여행이 전면 자유화되었다. 그 당시 중 ·고등학생들은 나이키 신발을 신고 무슨 스포츠 용품 회사의 로고가 새겨진 에나멜 가방을 들고 다녔고, 대학생들은 폴로 셔츠와 스노우 진바지를 입었으며 소니 walkman이 ‘must have item’이었다. 그리고 주말이면 원두 커피를 마시고 맥도날드 햄버거나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을 먹었다.
하지만 80년대는 군사독재정권이 최후의 발악을 하고 온갖 종류의 고문을 자행하던 시기였다. 지금의 MZ세대는 금시초문이어서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차마 믿을 수도 없고 믿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박정희 유신독재정권 시절의 고문 기술은 유구한 전통이 되어 계승되면서 더욱 발전하고 교묘해졌고 악랄해졌던 것이다.
‘가보면 압니다.’ 검은 승용차에 타면 그때부터 욕이나 반말이 시작되었다. 영장의 제시도, 묵비권이나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수사관이 말해주어야 한다는 미란다 원칙의 고지 같은 것도 없었다. 가족들은 물론이고 본인들도 자신이 끌려간 곳이 어디인지 몰랐다.
조사실 (또는 취조실)은 헌법이나 형사소송법이 미치지 않는 성역이었다. 그들은 온갖 종류의 악랄한 고문을 자행했다. 밤낮으로 시도 때도 없이 신발을 벗겨서 얼굴 머리 때리기, 무수한 발길질과 뺨 때리기, 얼굴에 가래침 뱉기, 몽둥이질, 손바닥 발바닥 등 특정 부위 때리기, 손발톱 사이 찌르기, 손가락 사이 나무 막대기 끼우기, 몽둥이를 다리 사이에 끼우고 뭉개기, 발가벗긴 몸을 나무 사이에 묶어 대롱대롱 매달기, 로프로 인정사정없이 등을 후려 갈기기, 터진 살갗에 소금물 붓기, 며칠 동안 흰 벽만 쳐다보게 하기, 수건을 얼굴에 씌우고 주전자로 물 붓기, 손발톱 뽑기, 군대식 원산폭격, 통닭구이, 거꾸로 매달기, 비녀 꽂기, 체모 불태우기, 성적 수치심과 모욕감 자극하기, 며칠 동안 잠 안 재우기, 다른 사람들의 고문 소리 듣게 하기, 가족을 데려다가 고문하겠다고 협박하기, 실제 권총을 들이대고 쏴 죽여 버린다고 협박하기, 성기 고문, 물 고문, 고춧가루 고문, 전기 고문을 했고, 그 과정에서 억지 자백을 받아내고 그나마 조서를 자기들 마음대로 조작해서 범인을 만들었다.
온갖 가혹행위와 고문은 주로 고문의 3대 명소에서 공안 사범들을 조사하면서 사건을 조작하고 범인을 만들기 위해서 자행되었다. 그곳은 고문을 해서 범인을 날조하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인면수심의 악마들이 출몰한다. 그들은 고문을 당하여 파괴된 참혹한 모습의 희생자들을 바라보며 승리감에 도취되어서 히죽히죽 웃거나 은근하게 웃음을 흘린다.
그중에서도 안기부 남산 분실 지하 2층에 있는 제6국 (또는 제6별관)의 취조실이 가장 악명이 높았다. 거기서 그 비극적인 인민혁명당 (인혁당) 사건이 조작되었다. (하재완은 물고문으로 인해 폐농양증에 걸려 입에서 피를 토했고 장이 항문으로 빠져나와 똑바로 앉거나 걷지 못했다. 김용원은 전기 고문을 받는 도중 실신해서 며칠 동안 깨어나지 못했으며 온몸이 고문의 흔적으로 시커멓게 타 있었고, 서도원은 모진 구타로 인해 온몸이 피멍 자국 투성이에다 제대로 걷거나 심지어 바른 자세로 앉아 있지도 못했다. 우홍선은 고문을 당할 때마다 차라리 죽고 싶었다. 전기 고문을 두 번만 더 돌리면 심장이 파열되어 죽을 것만 같았다. 이때 고문관은 술에 취해 있었다. 도예종은 고문이 계속되자 심장병인 협심증이 일어나서 여러 차례 졸도했다. 이수병은 소나 돼지도 그렇게 맞으면 죽을 정도로 몽둥이질을 당했다. 그는 몽둥이질 후유증으로 부축을 받으면서 겨우 계단을 올라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민청학련 사건이 조작되었고, 김지하 시인이 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불법 체포되어 장기간 조사를 받았고, 김영환 하영옥 심진구 등은 1986년 민족해방노동당 사건으로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90년대는 새로운 (고속으로 질주하는) 밀레니얼 (Millennial) 시대로 넘어가는 문턱이었다. 그리고 세기의 전환기였다. 온갖 사건 사고로 얼룩지고 인물들이 사라진 10년간이었다. 그런 와중 (渦中)에도 5·16 군사 쿠테타 이후 지속된 군사독재체제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나 재평가도 없었고 한 세대를 풍미한 경직된 군사문화를 암묵적으로 관통했던 정신을 포착해서 비판하는 어떠한 노력도 없었다.
예술 분야에서도 암울하건 들뜬 열망이건 간에 세기말의 분위기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아방가르드적인 혁신, 모더니즘이나 포스트 모더니즘의 흐름은 찾아볼 수 없었고, 성 담론이나 성 소수자, 페미니즘은 아직 본격적으로 등장하지도 않았다.
20세기와 21세기를 잇는 (현실의 제약이나 문학적 규약을 초월하고 다양한 소설적 실험을 감행하면서 미지의 땅을 개척한) 교두보 역할을 할 소설 역시 나타나지 않았다.
시기상조였을까. 여전히 구태의연하고 관습적이었다. 대체 무슨 시대가 도래했다가 사라진 것인가. 인위적으로 시대를 구분하는 게 부질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10년의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가 버린 것이다.
90년대로 들어서면서 베를린 장벽이 1989년 11월 무너지고 나서 독일이 통일되었고 (1990년), 동구권 국가들은 공산주의 압제에서 벗어났으며, 공산주의 종주국이고 악의 제국이었던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 붕괴되었다 (1991년).
1991년 크리스마스 저녁 7시 모스크바 크렘린 광장 게양대에 걸려있던 소련의 붉은 국기가 내려가고 그 대신 러시아 삼색기가 올라가면서 동서 냉전은 70여 년 만에 종식되었다.
퀸의 보컬리스트 (동성애자였던) 프레디 머큐리는 그 해 크리스마스 이브를 한 달 앞두고 사망했다. 그의 일생을 다룬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엔딩곡은 ‘쇼는 계속될 것이다 Show must go on’였다.
90년대는 암울한 80년대를 점차적으로 벗어난 시기였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던 시절이었다. 젊은 청춘들은 빈익빈 부익부라는 자본주의 체제의 냉혹한 현실에 눈을 뜨면서 그 비정함에 반항하고 작은 성공을 꿈꾸면서 고군분투했던 시절이었다.
문민 정부가 들어선 90년대 들어서서 그들 80년대 학번의 운동권 학생을 지칭하는 ‘386’이라는 용어가 처음 생겨났다. 386은 1980년대를 젊은 청춘으로 살거나 죽어간 수많은 운동권 영웅들의 영웅 서사에서 주어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1990년대를 기준으로 30대 나이, 80년대 학번, 60년대 태생이라는 뜻으로 학생운동의 주역들이 정치권에 대거 진출하면서 언론이 붙여준 이름이다. 지금은 그냥 ‘86세대’라고 하고 정치적으로 대척점에 있는 세대가 ‘97세대’이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그들은 나중에 정치권에 진출해서 출세하기 위해 경력을 쌓으려고 학생운동을 했는지, 아니면 자기 신념에 따른 학생운동, 노동운동을 했으니까 불가피하게 정치권으로 진출했는지 여부를 우리가 판단하기는 난감한 일이다.)
그들은 지금 어느덧 60을 바라보고 있다. 인상의 황금기가 진즉 지난 것이다. 이제 삶의 끝자락인 죽음보다 늙어간다는 사실에 더 두려움을 느낀다. 그들은 인간이 필멸의 존재라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게 된다. 그들은 무신론자로 영혼 불멸을 믿지 않는다. 인간의 가혹한 운명 앞에서 한없이 무력감을 느낀다. 그들은 환상과 망상과 현실의 경계선을 넘나들다가 이제는 (나이가 들자) 실제의 세계로 넘어왔다. 닳고 닳아서 간신히 숨만 붙어있는 프롤레타리아, 부르주아, 유물론자, 사회주의, 조선노동당 등 단어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것들은 사멸해서 조만간 사라져야 할 운명인데 말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철부지들의 불장난 같은) 간첩 활동과 지하 비밀 조직인 민혁당 창당, 남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결성은 그 뿌리가 80년대 암울한 군사독재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기는 하지만, 90년대 들어서서 국제적으로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자유민주주의가 개화하기 시작한 제6공화국 문민정부 시절에 시작되고 종결된 것이다.
그들은 그 당시 정신줄을 놓았거나 미망에 갇혀서 어리석게도 시대정신 혹은 시대상황을 완전히 역행한 것이다. 현실에서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환상을 꿈꾸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심리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쫓기고 있었다. 그들은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을 것이다. 가족들에게 미안했을 것이다. 몹시 외로웠을 것이다. 심각한 우울증에 빠졌을 것이다. 불안 강박 편집증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 파괴적인 비관론자가 되어 차라리 목을 매는 자살을 꿈꾸었을 수도 있다.
탈북자들이 폭로한 북한의 현실을 그들은 받아들였던 것일까? 백문 (百聞)이 불여일견 (不如一見)이라고 김영환과 조유식, 황인오 등은 북한에 가서 직접 비참한 현실을 목격했기 때문에 환멸을 느끼고 전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반면에 하영옥과 심재춘은 북한에 가보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어떤 환상을 버릴 수 없었고 그래서 전향할 수 없었던 것일까?
시대의 흐름에 그들의 신념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후회하면서 반성하고 있을까? 그들이 반성하고 전향했다면 어떤 심리적 갈등과 우여곡절을 겪었을까? 그 과정에서 변곡점은? 그들의 딜레마는 무엇이었나? 양가적 감정이나 이중적 시각 때문에?
지금도 가끔 악몽을 꾸고 한밤중에 식은땀을 흘렸던 적이 있을까? 아니면 젊은 날의 치기, 해프닝, 시대착오적인 난센스, 에피소드쯤으로 가볍게 여기고 있을까? 이기거나 지는 이판사판의 일종의 게임으로 여겼던 것일까?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은 데 대해 허탈해하고 분노하고 있을까? 자신들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인간들을 몹시 경멸하고 있을까?
하영옥은 어떻게 공포와 혼란 속에서 자신의 신념과 사상을 고수할 수 있었을까? 인간의 실존이라는 사회적 정글 속에서 어떻게 강박 장애를 극복하고 자아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다중 인격자처럼 자아 분열을 겪었을 수도 있다. 불안 강박증 때문에 무수한 밤을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렸을 수도 있고 밀실 공포증 아니면 광장 공포증에 시달렸을 수도 있다.) 그게 혁명가에 어울리는 충성스럽고 성실하며 명예로운 길이라고 믿었던 것일까? 그는 못 말리는 몽상가일까?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간 무슨 번뜩이는 영감이 있었던가? 그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다른 사람의 생각을 억지로 자기 기준에 맞추려고 하는 독단주의자일지도 모른다. 혹은 온순하지만 무뚝뚝하고 뜻밖의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고집이 세고 가끔 불타오르는 분노의 폭발을 억제하지 못하는 그런 고리타분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8년 형을 선고받고 감옥으로 갔던 것일까? 공판정에서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던 것일까? 그건 역사적 증언이었을까? 아니면 有口不言이었을까?
조선노동당이라는 단어 자체가 바로 한 편의 시 (詩)였다. 이 단어에는 뭔가 유구한 역사와 도저히 필설로 묘사할 수 없는,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숭고해서 형용할 수 없는 뼈를 깎고 피를 철철 흘려야 하는 무수한 고통과 일일이 나열할 수 없는 거대한 의미가 함께 새겨져 있다.
내가 몇 가지 자료를 통해서 파악한 바로는 그들은 1997년 7월 초여름 민혁당의 해체를 선언한 이후 원수처럼 헤어졌다가 다시 우연히 만난 것은 2005년인가 2006년 써클 후배 장례식에서였다. (김영환이 악수를 청했더니 하영옥이 얼떨결에 악수를 받은 것이다.) 그리고 15년이 넘게 한 번도 만나지 않은 것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말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간첩 활동, 지하조직 결성, 악랄한 고문을 당하고, 장기간 구속과 재판, 감옥살이 등을 하면서 보통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온갖 역경을 겪었다. 그들에게 우리 같은 소시민들이 말하는 행복했거나 평화로운 시절이 있긴 했을까?
그들의 인생역정은 운명처럼 보이는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발생했고 가혹한 운명은 반전과 반전의 반전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진실은 모두 낱낱이 밝혀지지 않았다.
배신은 배신한 사람에게도 상처가 된다.
난 고백이나 회고록 등을 전부 믿지는 않는다.
그것은 결코 자기 자신을 진실하게 내보이는 것이 아니다.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나 거짓말쟁이이며 모든 고백에는 위선적인 동기, 과장, 미화, 자화자찬, 변명 또는 교묘한 선전이 숨어있다. 진정한 사람은 자신에 대해 말할 게 별로 없는 법이다.
그들은 한때 肝膽相照 (간담상조. 간과 쓸개를 서로 드러내 보일 만큼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절친한 사이) 또는 莫逆之友 (막역지우. 마음에 거슬리는 것이 없는 더할 나위 없이 친한 친구) 의 관계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刎頸之交 (문경지교. 목을 베어줄 정도의 우정) 정도의 우정은 아니었을 것이고 管鮑之交 (관포지교. 끝까지 변함없는 돈독한 우정) 는 될 수 없었다.
혹시 민혁당 조직 내에서 권력 다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권력은 대등한 것을 용납하지 않으며 우정을 버리고 아첨을 택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면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든 과거에서 도망칠 수 없다. 그들은 지금쯤 과거의 쓰라린 기억들을 저 깊은 망각의 심연 속에 묻어둔 채 살아갈 순 없을까?
시간은 강물이 흘러서 먼 바다로 들어가는 것처럼 무한한 영원 속으로 흘러들어간다. 시간은 모든 것을 삼켜버린다. 시간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치유한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할 만한 성자는 아닌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 자신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서 원수를 용서하고 잊어버리기로 하자. 그것이야말로 현명한 처사이다. (A. 케네디)
나는 김영환과 하영옥은 물론이고 이 소설에 나오는 다른 작중 인물 (전부 실명이다. 내가 창조한 허구적 인물은 없다) 누구도 개인적으로 알지도 못하고 만난 적도 없었다. 그들과 깊이 있는 대화 (인터뷰)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 그들의 참모습은 알 길이 없다. 여기에 이 소설의 한계가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참고 자료에 근거해서 역사 실증주의자처럼 역사적 사건, 인물, 실재를 엄밀하게 묘사, 서술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인물과 사건에 관심이 많다. 아주 상세한 팩트를 존중해야 한다.
역사의 경우 모든 게 명명백백하게 기록된 건 아니다. 텅 비어 있는 여백이야말로 작가의 상상력이 발휘될 수 있는 곳이다. 철저한 조사를 통해서 합리적으로 추론하고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들의 글에는 실제 대화는 극히 짧게 소개되어 있다. (기억이란 믿기 어려운 것인데 그들이 소개한 대화를 그대로 온전히 믿을 수 있을까. 하지만 본인의 말이니까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 간 논쟁과 대화는 역사적 사실과 전후 맥락에 비추어 추론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내가 상상해서 보충하거나 새로 추가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중편소설이라고 주장하는가. 어쨌거나 조금은 소설적 자유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삼인칭 전지적 시점의 소설이지만 사회비평소설이면서 분단소설이고 역사소설이기 때문에 가공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므로 역사적 인과관계의 사슬에 따른 진실에 더욱 충실해야 했다. 나는 논픽션을 쓰는 것처럼 Facts를 세심하게 조사했다. 그래서 참고 자료가 아주 중요했다.
일인칭 시점은 독자와 심리적으로 가장 거리감이 없는 시점이다. 일인칭 화자가 독자에게 직접 솔직한 의견을 진술하거나 또는 어떤 고백을 하면 화자와 독자 사이에 신뢰가 형성되면서 특별한 공감대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참고 자료는 블로그 참조 https://blog.naver.com/jungwon4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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