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 바흐의 음악인생은 그가 살았던 장소에 따라 대별된다. 즉 아르슈타트과 뮐하우젠 시대, 바이마르 시대, 괴텐 시대,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을 보내고 만년의 걸작들을 만들었던 라이프치히 시대이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바흐는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음악가로서 취직을 해야만 했다. 처음엔 궁정악사로서 일하다가 자신이 진정으로 원했던 아른슈타트의 교회 오르간 연주자로 취임한다. 바흐 가문과 좋은 관계로 지냈던 이 지역의 당국자들도 바흐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좋은 대우를 해 주었다. 이 직책은 오르간 연주뿐 아니라, 성가대를 훈련시켜야 했는데, 18세인 바흐는 젊은 대원들과 길거리에서 주먹으로 치고 받기도 했다는 일화가 남아있다. 근엄하고 종교적인 이미지의 바흐도 혈기방장한 젊은 시절이 있었다.
또한 젊은 바흐는 휴가 기간을 지키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행동했다. 지역의 성직회의에서는 그의 무책임과 성가대의 훈련을 게을리 했다는 점도 곁들여 바흐를 비난했고, 결국 성직회의와 충돌한 바흐는 1707년 6월에 중부독일의 소도시 뮐하우젠 성 블라지우스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직장을 옮긴다. 그리고 그 해 10월에 육촌 누이동생인 바르바라와 결혼했다. 이들의 일곱 자녀 가운데에서 장남인 빌헬름 프리데만과 차남 칼 필립 엠마누엘은 특히 뛰어난 음악가로 성장했다. 뮐하우젠에서의 바흐는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도다> 를 작곡했다. 북독일악파의 양식에 의한 이 작품은 바흐의 생전에 인쇄, 출판된 단 하나의 교회 칸타타이다. 당시의 뮐하우젠은 다분히 교리주의에 빠져있던 루터 정통파와 개인의 종교 감정을 소중히 여기는 경건주의가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바흐 집안은 대대로 루터 정통파였지만, 바흐는 경건파로 마음이 끌려 그 영향은 그의 작품에도 잘 반영되어 나타난다. |
첫댓글 이마트에 가면 반음계적환타지가 흘러요. 참 아이러니한 느낌입니다. 제가 이십대때 이음 하나하나가는 절대고독과 동일 의미였었는데...
그러시군요.. 좋은 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