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나오지 않은 더 많은 자료가 있습니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려 했지만, 수구세력의 5.18광주민주항쟁에 대한 폄훼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서 게시물을 올립니다....
최초 충돌, 전남대 정문 앞 5·17비상계엄 전국확대로 휴교령이 내려진 전남대 정문 앞에서 5월 18일 10시경 등교 중이던 전남대생들과 출입을 제지하는 계엄군사이에서 최초 광주항쟁의 단초가 제공되었다. 무장 계엄군의 통제에 항의하는 학생 수는 삽시간에 100여명으로 불어났고 그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계엄군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등교를 원하는 당연한 권리였고 평화적이고 자연발생적인 시위였다.
교문 안에 있던 공수부대는 메가폰을 통해 두어 차례 해산을 종용한 후 지휘관의 지시에 따라 학생들을 향해 돌진해 왔다. 5·18민중항쟁의 최초 충돌이자 과잉진압의 시작이었다. 공수부대는 달아나는 학생들을 잡기 위해 인근 주택을 뒤지기도 하고 이를 저지하는 시민들까지 구타하였다. 이런 공수부대의 포악한 진압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학생들은 가두시위를 벌였고 이것이 5·18광주민중항쟁으로 전개되었다.
제 목 | 전남대정문
민족민주화성회에 참여하기위해 전경과 대치하고 있는 전남대생들
시민의 분노와 저항, 금남로 5월 18일 오전 전남대 정문 앞에서 벌어졌던 계엄군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학생들이 시내에서 가두시위를 하자 계엄군은 오후 3시부터 시내로 투입되어 진압하기 시작하였다. 계엄군은 무력 진압행위를 만류하는 노인들과 아주머니들에게도 무차별 곤봉세례를 가했다. 계엄군의 진압작전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은 진상을 알기 위해 금남로로 몰려들었다. 19일 오전 2∼3천명으로 불어난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군경의 저지선과 대치하게 되었다. 군경과 시민의 충돌이 시작한 지 30분 정도 지나서 11공수여단 천여명이 트럭 30여대로 도청 앞과 금남로에 진출하여 작전명 "화려한 휴가"라는 말 그대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진압봉으로 무차별 구타하였고 3∼4명이 한조가 되어 시위현장의 주변 건물까지 샅샅이 뒤지며 진압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만행을 목격하고 전해들은 광주시민들은 맨주먹 또는 몽둥이, 각목을 들고 나와 결사 항전하였다.
제 목 | 신혼부부
카톨릭센타 옆 미도장에 투숙해 있던 신혼부부
제 목 | 공수부대
공수부대는 청년들이면 시위참여 여부를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구타한 후 옷을 벗긴채 기합과 구타를 일삼으며 트럭에 싣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제 목 | 공수부대
시내에서 붙잡힌 젊은 사람들은 무조건 구타를 당한 후 팬티만 입은 채 기합을 받다가 대기중인 트럭에 실려 연행되었다.
항쟁의 확대와 첫 발포 5월 20일 항쟁 3일째, 오전에는 소강상태였으나 오후가 되면서 광주 시가지는 다시 팽팽한 대치국면으로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시장의 상인들까지 철시하고 시위에 나서기 시작하여 그 인파는 10만여명이 넘었다. 윤상원 등 사회운동 진영에서 계엄당국의 거짓된 선무방송에 맞서기 위해 만든『투사회보』가 시내도처에 수천매씩 뿌려지면서 항쟁의 열기가 고조되었다. 공수부대의 만행에 격분한 택시기사들이 200여대의 차량시위를 감행함으로써 소강상태에 빠져있던 시위군중들의 전의에 불을 질렀다. 시내 곳곳에서는 자발적인 시위대가 형성되었다. 밤 11시경 광주역을 지키고 있던 공수부대와 시위대의 공방전이 격렬해지고 시위대가 차량을 앞세워 군의 저지선을 돌파하려하자 일제히 발포를 하였다. 이것이 시민을 향한 공수부대의 최초 발포였다. 비슷한 시각에 세무서 앞과 조선대 부근에서도 발포가 있었다. 발포에도 아랑곳 않는 항쟁의 불길은 그 승리의 절정을 향하여 불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신군부의 잔학한 만행 공수부대에 의해 최초로 희생된 김경철은 공용터미널에 다녀오다 공수부대원들에게 붙들려 무수하게 구타를 당한 채 트럭에 실려 후송되었으나 다음날 사망했다. 김경철은 말을 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농아였다. 이는 수백명의 사망자, 부상자 중의 한 예에 불과하다. 여성들에 대한 성추행도 무수히 저질러졌다. 시민들 앞에서 어린 여학생들의 옷을 찢고 발가벗기는 만행을 보고 격분한 장노년층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고 공수부대를 몰아내자는 결사적 항쟁의지로 발전했다. 신군부의 만행은 전남대 교내에서도 학생들에게 사격을 가하여 시신을 암매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시내에서 연행되어 온 시민들을 교도소 안에서 구타, 사망케 하여 암매장한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계엄군의 만행은 5월 21일 오후 1시 도청의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시민들을 향해 일제히 집단 발포함으로써 극단적으로 나타났다.
제 목 | 집단발포
도청앞 집단발포가 자행되기 직전의 도청앞 대치선, 시민들은 그래도 공수부대원들에게 음료수등을 건내기도 하며 더 이상 피흘리지 않게 되기를 바랬다.
제 목 | 부상자
한 외국인 기자가 시민들과 함께 부상자들을 병원으로 후송하고 있다.
제 목 | 부상자
애국가를 신호로 자행된 집단발포에 의해 희생된 시체들이 병원 영안실을 가득채웠고, 시내 병원마다 복도까지 부상자들로 가득찼다.
제 목 | 장례
일부 희생자 가족들은 항쟁기간 중에 장례를 치르기도 했다.
계엄군의 퇴각과 양민학살 5월 21일은 석가탄신일로 공휴일이었다. 광주시민들은 어제의 참상을 뒤돌아보고 계엄군의 만행에 항의하기 위해 아침부터 금남로로 모여들었다. 오후 1시 계엄군은 시민을 향하여 사격을 하였다.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던 시민들 수십명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다. 이때부터 시민들은 무장의 필요성을 느꼈고 서둘러 무장하기 시작했다. 거센 항쟁에 밀린 계엄군은 퇴각하면서 무차별 발포하여 사상자를 내고 조선대 뒷산을 넘어 화순의 길목인 주남마을로 철수했다. 전남대병원 옥상에 설치한 기관총(LMG)의 위력은 계엄군의 퇴각을 서두르게 하였다. 전남대에 주둔하고 있던 계엄군은 교도소로 퇴각했다. 시 외곽지역으로 철수한 계엄군은 27일 충정작전에 투입될 때까지 광주 외곽도로를 차단, 봉쇄하고 인근을 지나는 차량에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또한 송암동으로 이동하던 계엄군과 그 곳에 주둔하고 있던 전교사 병력간의 오인사격으로 군인들이 희생되자 그에 대한 화풀이로 원재마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중학생에게 총질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인근 마을을 수색한다는 명분으로 청년들을 끌어내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항쟁 5일째 되는 22일, 시민군이 도청을 장악하고 어지러운 거리를 자발적으로 청소하는 등 질서를 회복해가기 시작했다. 시장과 상점들도 문을 열고 전기, 수도 등은 관련 공무원의 지원으로 해결되었다. 많은 부상자들 때문에 혈액이 부족하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헌혈자가 잇따랐고 황금동 아가씨들까지 자청하여 제공했다. 치안력이 없는 상황에서도 은행 같은 금융기관에 대한 사고는 한 건도 없었고 금은방 등 일반 상점에도 별다른 사고가 없었다. 시민군과 항쟁지도부의 식사도 시민들의 자발적인 도움으로 해결되었다. 시민군 지도부에서는 차량통행증, 유류발급증, 상황실출입증 등을 발부하는 한편 외곽지대 자체방위를 맡은 시민군과 유대를 갖고 지원하기 위해 기동타격대를 편성, 출동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시민들의 높은 시민정신과 도덕성, 자치능력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다.
제 목 | 시민군
계엄군이 퇴각한 광주는 항쟁지도부가 구성되고 무기가 통제되기 시작했다.
5월 22일 거센 시민의 항쟁에 밀려 계엄군이 일시 퇴각했지만 이미 저질러진 엄청난 사태 앞에서 쌍방 모두 슬기로운 수습이 요망되었다. 그리하여 등장한 것이『5·18수습대책위원회』였다. 이 조직은 명망가이자 민주인사로 알려진 신부, 목사, 변호사, 교수 등 20여명으로 구성되었고 선봉에 선 학생들 중심의『학생수습대책위원회』와 종래의 명망가 중심의『일반수습대책위원회』도 출범하였다. 민주인사나 유지급 중심으로 구성된 수습위에서는 주로 계엄당국과의 대화나 건의, 협의 등을 맡았고 학생중심의 수습위에선 대민 업무를 맡아보았다. 그들은 장례반, 홍보반, 차량통제반, 무기수거반, 의료반 등으로 나누어 활동하였다. 또한 계엄사에 요구한 7개항의 요구조건을 홍보하고 300여정의 무기를 회수하기도 했다. 그러나 계엄사의 무성의와 그들의 각본 때문에 실효를 거두지 못했고 무기회수문제도 수습대책위원회의 의견 불일치로 결국 무기반납을 거부하고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는 새로운 항쟁지도부가 탄생하게 되었다.
5월 18일에 발발한 민중항쟁의 소식은 언론보도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전남일원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18일 오후와 19일에 공용터미널 부근에서 행해진 무자비한 계엄군의 살상행위는 시외버스 승객들에 의해 퍼져나갔다. 또 시위대중 일부가 아시아 자동차공장의 차고에서 차량을 대거 획득 운행하면서 도내 각 지역에 직접 알리고 응원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광주의 항쟁은 전남일원의 호응 속에 각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5월 21일의 집단발포 소식은 전남도민의 의분을 사기에 충분했고 이에 화순 나주 영암 강진 무안 해남 목포 등 전남 일원으로 확산되었다. 시위대는 전남뿐만 아니라 전북 등 전국적인 진출을 시도했으나 고속도로와 철도를 철저히 봉쇄한 계엄군에 의해 좌절되었다. 광주는 목마르게 응원군을 기다렸지만 전남 이외의 지역과는 철저히 고립되어 있었다.
시민군의 결사항쟁 5월 26일 새벽 계엄군이 탱크 등 중화기를 앞세우고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하자 수습대책위원들은 일명 '죽음의 행진'을 감행하여 무력진압을 저지 만류하였다. 이것은 계엄군의 무력 진압작전의 예고였다. 저녁 7시 계엄군의 침공이 감지되는 가운데 학생지도부에서는 시민군에 참여하고 있던 고등학생이나 여성의 귀가를 종용했다. 시민군들은 비장한 가운데 마지막 선택이 요청되었다. 항복이냐, 죽음이냐, 민중항쟁의 결전에 서서 전열을 가다듬으며 홍보부에서는 계엄군의 침공사실을 가두방송으로 알렸다. 27일 새벽 4시, 도청 주변에서 총성과 수류탄이 터지는 소리가 울려왔고 도청탈환을 향한 계엄군의 기관총 소리는 밤하늘을 찢는 듯 했다. 구식 무기로 마지막까지 항전하던 지도부는 피를 흘리면서 쓰러져갔다. 진압 끝! 그리고 시민군 생존자는 시체더미 속에서 '총기소지자' '특수폭도'로 분류 체포되어 군부대로 이송되었다.
제 목 | 충정작전
도청 진압을 위한 계엄군의 탱크 진주, 18대의 탱크가 위압을 가하며 광주로 들어오고 있다.
제 목 | 충정작전
무차별한 총격에 희생된 시민군들의 시신과 관이 함께 널부러져 있다.
제 목 | 충정작전
도청 뒤쪽에 사살된 희생자들이 참혹하게 뒹굴고 있다.
신군부의 무력진압 수습위의 건의사항도 묵살되고 대화도 평화적인 해결도 거부당한 채폭동을 일으킨 총기소지의 폭도로 지목된 시민군들은 죽거나 부상당하였고 생존자는 모두 체포되어 군부대로 끌려갔던 5월 27일 새벽, 공수부대원들은 시체더미 위에서 승리가를 합창하며 충정작전을 끝냈다. 도청탈환을 목표로 조직된 특공대는 27일 새벽 1시 30분을 전후로 조선대학교 뒷산에서 최종점검을 마친 뒤 시내 주요지점을 향해 잠입, 침투하기 시작했다. 또 시 외곽에서도 시내 중심가를 포위한 채 시민군을 압박해오고 있었다. 전화선은 모두 끊겼고 탱크 지나가는 소리만 금남로의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새벽 4시가 지나면서 도청표적은 탱크와 중무장 헬기, 자동화기와 수류탄 등으로 무장한 공수부대원들에 의해 시민군 말살 초토화작전이 전개되었다. YMCA, 계림초등학교도 총검과 군화발 아래 유린되었다.작전개시 1시간 30분만에 도청진압이 완료되면서 열흘간에 걸친 1980년 5월의 민중항쟁도 참담한 최후의 막을 내렸다.
제 목 | 충정작전
5월 27일 아침, 상황이 종료되고 도청앞 마당에서 사상자들을 수습하고 있는 계엄군
5·18민중항쟁의 부활 19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무력진압으로 많은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폭도로 몰려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광주시민의 의로운 항거는 민주화운동의 밑거름으로 다시 부활하기 시작하였다. 비록 당시 광주는 총검 앞에 유린당했으나 역사는 정의의 편이었다. 폭도는 광주시민이 아니라 헌정을 유린한 반란자 신군부 그들이었다. 의로운 광주, 외로운 광주 그러나 전국 각지에서 5·18민중항쟁의 진상을 알리는 민주인사와 학생들의 5월투쟁이 시작되었다. 투쟁의 선두에 선 유가족들의 소복투쟁은 강력한 인상을 남겼다. 묵시적 배후조종자 미국에 대한 반미의 불길은 광주와 부산에서 미문화원이 불타고 서울의 문화원이 점거 당하여 "양키고홈"의 구호가 메아리쳤다.
마침내 6월항쟁으로 이어져 신군부 세력들은 6·29선언으로 항복했고 1988년 5공 청산을 위한 '5공비리특위'와 '광주청문회'가 열렸으며 '역사바로세우기' '전노일당 사법처리'가 이루어져 광주항쟁은 명명백백하게 정의로운 민주화운동의 의거로 부활, 승리하였다. 연행 구금과정과 잔학상 5·17비상계엄령 전국 확대실시와 함께 이루어진 예비검속으로부터 항쟁기간과 그 이후에 연행된 사람에 이르기까지 광주항쟁과 관련하여 연행, 구속된 사람의 숫자는 수천을 헤아린다. 광주의 전지역을 쑥밭으로 만들고 초토화시킨 토벌작전 그대로였다. 항쟁기간 중 난데없이 들이닥친 계엄군은 집, 사무실, 학원, 도서관, 식당, 시위주변의 길거리 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시민들을 총 개머리판과 곤봉 등으로 구타하여 트럭에 실어 교도소나 상무대로 연행하였다. 심지어 팬티바람으로 줄줄이 묶어 폭도취급을 하였다. 전남대나 광주역 부근에서 붙잡힌 사람들은 전남대 본관과 이학부 건물에 수용했다가 21일 3공수여단이 교도소로 철수할 때 함께 이송되었다. 또한 상무대로 끌려간 사람들은 상무대 안의 교회와 연병장의 임시막사에 수용되었다. 굶주림과 구타, 비좁은 공간에 몇 백명씩 공동 수감되는 등 지옥을 방불케 하는 그날의 참상을 두고 사람들은 "나는 그때 인간이 아니었다"고 회상한다.
죽음과 삶의 갈림길 상무대로 붙잡혀온 많은 사람들은 상무대 영창으로 넘겨지기 전 보안대에서 온갖 고문을 당하며 짜여진 각본에 맞춰 내란음모 선동 등의 죄명으로 수사를 받았다. 특히 신군부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실상 연관이 없는 김대중과 관련한 내란음모 조작이라는 각본 수사가 이루어졌다. 김대중으로부터 폭동자금을 얼마 받았느냐는 허위자백을 강요하며 잔인한 고문, 구타, 심지어 같은 동료끼리 때리게 하는 비인격적 모독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폭거를 자행했다.
고문이나 구타를 당한 사람들은 석방이 된 후에도 오랜 시일동안 후유증에 시달려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고 정신질환을 앓다가 사망하는 등 그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들은 풀려난 후에도 엄청난 공포와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숨죽이며 살아왔다.
<이게 진정 민주항쟁 맞습니까? 아니면 김대중 전위대와 빨갱이의 무장폭동입니까?>바이올린 댁이 쓴 글입니다. 이젠 <공수부대의 행위는 심리적 공황상태에서 벌어졌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런식으로 물러서는 겁니까? 더이상 추해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솔직히 당신의 말과 행동은 너무 구역질이 납니다.
첫댓글 공수부대의 행위는 심리적 공황상태에서 벌어졌다는 의견도 있습니다....한 쪽의 주장만 그렇게 강요하면 안되죠...언제나 반대 주장도 검토해보는 넓은 마음이 필요한 때입니다...
왜 비슷한 강도의 시위가 있었던 부산, 마산에서는 그 "심리적 공황사태"가 없었고 굳이 광주에서만 생깁니까. 왜, 부산, 마산에서는 전경이 투입되고, 광주에서는 "공수부대"가 투입됩니까? 그 차이를 아세요?
넓은마음 같은 지랄 하지덜 마라 바이올린아..........
총칼로 무장한 공수부대가 심리적 공황사태라..... 그럼 아무 무장도 안한 대학생들은 공포에 미쳐야햇겟네요... 이나라에 아직도 바이올린 당신같은 사람들이 있다는게 참 슬프네요........
너 같은 넘을 지지자라고 데리고 다니는 한나라당이 불쌍하고 너 같은 넘들이 지지한다는 박대표가 처량하구나
<이게 진정 민주항쟁 맞습니까? 아니면 김대중 전위대와 빨갱이의 무장폭동입니까?>바이올린 댁이 쓴 글입니다. 이젠 <공수부대의 행위는 심리적 공황상태에서 벌어졌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런식으로 물러서는 겁니까? 더이상 추해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솔직히 당신의 말과 행동은 너무 구역질이 납니다.
이런 짓을 하고도 노태우랑 전두환이 코로 숨을 쉴수 있게 만든것또한 죄악이다. 갈기갈기 찢어죽여도 시원찮을 인간들을 그 이후에도 대통령으로 모셨으니.
도데체 5.18에 대해서도 전두환 편 드는사람은 어떤사람일까? 천사일까? 왜? 518 비난하는 식으로 유영철도 따지고 보면 성인군자다 차라리 살인마 유영철 무죄 석방 운동이나 벌여라
사진 밑에 글은 제가 쓴게 아닙니다...
바이올린//본인이 쓴글 아니라도 자기 생각과 같으니 그냥 올린것 아닙니까!!!
바이올린님 천왕을위해 성전에 참전하라며 친일한 사람들은 거역하기 너무 힘들어서 그런거니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도 되겠죠 김일성이나 이승만측 세력이 권력욕에 나라 반토막낸것도 그만한 지위에 있으면 욕심이 생길수 있으니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도 되겠어요
저는.. 호남지역 출신이 아니지만... 이런 광주항쟁 관련 글과 사진을 보면 눈물이 다 나네요... 에라이~
이런 짓을 한 짐승같은 넘들이 아직도 호위호식하는 거 생각하면...분통 터져요....
반대 주장 검토 그렇다면 무자비하게 시민들을 학살한 야차들의 말을 동조한다는 것 밖에 더 됩니까? 민주주의의 관용에서도 허용이 될 게 있고 안될 게 있습니다. 자유의 적에게는 관용을 베풀어서는 안된다는 생 쥐스뜨의 경구가 떠오릅니다.
저는 호남사람인데요...그때 10살이나 됐겠네요...말로만 들었지 자세한거는 잘몰랐는데요...같이 동참못한게 죄스럽네요..
저를 포함해 무임승차해서 지금의 자유를 누리는 모든 사람들이 죄스럽게 생각해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