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제너럴셔먼호 복제 성공
서구는 1800년대 중반 침략을 본격화하다
군사적인 측면에서 1600년대 이후 쾌속범선에 화약과 대포를 사용해 해양에서의 전투능력에 커다란 발전이 있었다. 특히 영국이 1700년대 해양의 주도권을 장악하며 인도양과 태평양으로의 진출을 강화하였지만 아직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본토를 점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800년대 초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화약과 대포에 커다란 발전이 있었고 180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본토에 침략을 할 수 있었다. 180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 의해 오스만 투르크제국을 해체하기 시작했고, 영국이 호주를 개척하고 태평양을 장악하고 인도를 완전히 장악하고 중국을 침략했으며,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 전역으로 지배력을 확장하였고, 프랑스가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점령하였다. 1800년대 후반은 지구에서의 서구의 지배력이 확실히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관철되던 시기였다. 하지만 1800년대 초반은 서구가 상당히 조심스럽게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점령과 진출을 시도하고 있었던 때이다.
한국에 나타난 서구의 배들은 1800년대 초까지 표류, 탐사 등을 위해서 나타났다. 자신들이 모르는 미지의 땅, 때로는 황금이나 금광이 많은 곳으로 묘사되어 획득할 것이 많은지를 탐사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1830년대부터 점차 직접적인 통상개방이나 식민지적 점령을 시도하려는 노력이 증가하였다. 이당시 서구는 프랑스 대혁명(1789년), 나폴레옹의 등장(1799)과 몰락(1816)을 거치고 있었고,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변혁기를 넘어 점차 산업혁명이 진전되면서 세계적인 자원의 공급과 소비를 위해 식민지 개발에 더욱 신경을 쏟게 되었다.
개항과 통상의 요구
1832년 3월부터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상선 로드 에머스트호가 중국과 통상관계를 맺고 개방할 항구를 파악하기 위해 중국 산둥반도 해안을 탐사한 후 7월 조선에 선교도 하고, 통상을 시도하고자 황해도 장산곶에 도착하여 섬에 상륙하였다. 몽금포의 군대에 비상이 걸렸지만 배는 바로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들은 중국배 한 척이 들어와 이를 쫓아 보냈다고 보고했다. 나중에 관련 관리(장연현감, 조니진 만호, 군인 등)들은 상황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은 죄로 벌을 받았다.
남쪽으로 내려와 충청도 녹도를 거쳐 고대도에서 조선국왕에게 통상을 청원하는 청원서를 한자로 작성하여 관리(홍주목사 이민회 정3품, 수군 우후 김영수 종3품)에 주는 데 성공하였다. 이곳에서 3주를 머물렀다. 장군(충청 수군절도사 이재형 종2품)도 만났다. 청원서가 왕에 전달되어 한양에서 경역관 오계순이 파견되었다. 오계순은 조선은 청나라의 번국(藩國)이어 청나라의 허락없이 외국과 통상을 할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 에머스트호의 배, 물품, 가축, 총기, 사람에 대한 자세한 보고서 작성되어 정부에 보고되었다. 충청감사 홍희근도 관할 지방관리 감독 소홀로 벌을 받았고, 에머스트호에 대한 조사나 사건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충청 수군절도사, 홍주목사, 수군 우후는 파직을 당했다.
그 당시 백성들은 외국인의 착륙을 한사코 반대하고 되돌아가기를 원했다. 그것이 조선의 정책이었고 해안 주민에게 충분히 그렇게 전파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816년 충청도 서천 마량진에 영국 알세스트호가 조사를 위해 도착한 적이 있었다. 이들과 만나 이들을 되돌려 보냈던 마량진 첨사 조대복(종3품)과 비인현감(종6품)도 일을 잘못 처리했다고 파직당한 적이 있었다.
아편을 불법으로 중국에 팔다가 전권대신인 임칙서가 아편을 불태우고 아편 밀무역을 금지시키자 영국 전함이 1839년 가을 청군에게 포를 쏘면서 아편전쟁으로 비화되었다. 1840년 6월 영국 전함 16척이 대포 540문을 장착하여 광동을 봉쇄하고 뒤이어 상해를 함락하였다. 전함의 속도와 대포의 능력에서 중국이 서구보다 열등하여 전투에서 쉽게 영국이 우위를 차지하였다. 1842년 청나라는 남경조약을 체결하여 홍콩을 할양하고 5개 항구를 개항해야 했다. 1800년대 초부터 서구의 중국에의 접근과 기독교나 아편문제가 조선조정에도 보고되었다. 1841년 아편전쟁에 대한 소식이 들어왔다. 1845년 중국에서 세계의 역사와 지리를 다룬 <海國圖志>를 사신이 들여왔다. 이 책은 서양을 배워 서양을 이기자는 것으로 서양의 장점으로 전함, 화포, 군사훈련을 들고 있다. 조정에서 널리 읽힌 것으로 보인다.
교황 그레고리16세는 1831년 조선교구를 만들어 브뤼기에르주교를 초대 주교로 임명하였으나 조선에 들어오지 못하고 부뤼기에르는 1935년 중국에서 병사하였다. 1839년 조선 2대 주교로 임명되어 조선에 밀입국한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등이 붙잡혀 효수되었다. 1846년 프랑스 군함이 천주교 박해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서해안에 나타났다. 이때 김대건 등이 체포되었다. 김대건은 감옥에서 프랑스 군함의 방문을 알았다. 하지만 프랑스 전함은 돌아가고 김대건은 참수형을 당했다.
1847년 프랑스 배가 부안 앞바다에 표류했다. 상해에서 배가 와서 이들을 싣고 돌아갔다. 1848년에는 경남, 함경, 전남 등지에, 1849년에는 경남, 울릉도, 함경도에 나타났고, 1850년에는 포경선이 울진에 나타나 군과 민간인에게 총을 쏴 죽였다. 51년에는 고군산군도에 나타났다. 1852년에는 미국 포경선이 처음으로 나타났다. 이후 포경선이 여러 번 표류했다. 1854년에는 러시아 배가 거문도, 강원도, 함경도, 두만강 해안을 탐사하면서 지도를 작성하였다. 그리고 세 곳에서 개항을 요청하는 편지를 조선인에게 전달하였다. 1850년대에도 계속 이양선들이 나타났다.
본격적인 식민지 침략
1855년 프랑스 나폴레옹3세는 인도차이나 함대사령관에게 조선을 식민지화 할 조건과 기회를 조사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에 게랭제독이 1856년 2달간 동해, 남해, 서해안을 탐사하고 주민들을 만난 다음 측량보고서와 사회정보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이들은 각지에서 주민과 관리를 만나고 여러 곳에서 소, 닭, 돼지 등을 훔쳐갔다. 이 과정에서 게랭은 보병 6천명, 기마병 3백명, 경포병 1개 중대면 조선을 점령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 이들이 들렀던 함흥에서 남해안, 충청도에 이르기까지 난리가 났다. 해당 지역 수군우호, 목사, 감사 등이 징계를 받았다.
1860년 일본이 서구에 개항한 사실이 알려졌고, 1861년 중국을 다녀온 사신에 의해 북경이 영프 연합군에 점령당하고, 아편무역이 공인되고, 기독교 포교가 자유화된 내용을 상세히 전했다. 영프 연합군이 북경을 함락한 사실은 1860년에 이미 조선에 알려졌다. 洋鬼들에 대한 놀라움이 한성과 조정을 뒤덮었다. 서양 열강이 조선도 침략할 것이라는 소문도 떠돌았다. 영국과 프랑스가 이(利)로서 유혹하고 힘으로 협박하니 통상을 시작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생각하였다. 개항, 통상, 기독교(그 당시 사교(邪敎)로 간주되었다)는 세트로 오며, 이렇게 되면 사회적 혼란과 타락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였다. 또한 이양선들이 불법적으로 조선에 들어와서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고 때로는 약탈과 살해를 하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널리 퍼져 있었다. 더구나 조상숭배를 거부하는 천주교와 연계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수용하는 것은 인륜질서를 파괴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서양오랑캐를 물리쳐야 한다는 척사(斥邪)가 전반적인 분위기였다.
1863년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집권 후 러시아가 두만강에서 통상을 요구하였다. 천주교인들이 늘어나면서 이들이 윤리를 문란하게 하고 금수 같은 양귀(洋鬼)와 내통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조상숭배를 거절하고 이상한 신을 믿도록 혹세무민하는 오랑캐 종교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서 초반부터 이를 뿌리 뽑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대원군에 의해 1866년부터 8천여 명 가까운 천주교 신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처형당했다. 프랑스인 천주교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되었다. 청나라로 탈출한 리델 신부는 베이징 주재 프랑스 함대사령관 로즈에게 전했다. 조선의 프랑스의 천주교 선교사 살해의 책임을 묻기 위해 로즈 제독이 이끄는 함대가 1866년 10월 강화도를 침략하였다. 선교사 9명이 죽었으니 조선인 9천명을 죽이겠다고 했다. 10월 말에 서울 서강부근에 이르자 한성이 혼란에 빠졌다. 겨울에 다시 와 강화도를 공격하여 사고를 약탈하여 갔다. 하지만 강화도 내의 정족산성을 공격하다 실패하자 관아에 불을 지르고 귀중도서와 은괴 19상자 등을 약탈하고 철수하였다. 이 사건으로 조정의 자신감이 커졌으며 양귀에 대한 이미지는 더욱 나빠져 쇄국정책은 더욱 강화되었다. 나폴레옹3세의 프랑스의 이미지는 크게 타격을 받았다.
1866년 두 번에 걸친 통상 요구를 하다가 거절당한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1868년 상선을 타고 충청도 아산만으로 와서 흥선대원군의 부친의 묘를 도굴하려다 주민들이 몰려오자 도망갔다. 흥선대원군은 천주교도의 내응이 있기 때문에 나타난 사건으로 보고 천주교도를 더 심하게 박해하였다. 또한 양이(洋夷)들을 금수(禽獸)로 간주하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이 더 강화되었다.
서구의 개항압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1866년 미국의 제너럴셔먼호가 통상을 요구하며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에 정박하였다. 평양에 금이 많은 것으로 알고 와서 금을 내놓으라고 하며 조선인을 납치하였다. 이에 분개한 주민들이 배를 공격하여 불을 질러 모두 죽었다. 증기선이었던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에 가라앉자 흥선대원군은 그것을 건져다가 연구하도록 지시하였다. 1876년 복제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배가 너무 느리게 움직였다.
미국은 셔먼호의 책임을 추궁하고 통상을 강요하기 위해 1871년 5척의 군함을 보냈다. 통상 및 보상 요구를 거부하자 이들은 강화도를 공격하여 초지진(草芝鎭), 덕진진(德津鎭), 광성보(廣城堡)를 점령하였다. 미국 쪽은 6명밖에 죽지 않았지만, 미군의 총탄과 포탄은 조선 병사 240명의 목숨을 불과 며칠 사이에 앗아가고 말았다. 흥선대원군은 바로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고 교섭에 응하지 않고 통상도 거부하였다. 전투가 장기화되자 미국군함은 그해 6월에 철수했다. 프랑스와 미국군을 물리친 후 서양 열강에 대한 경계심이 더욱 강화되었고 이들과 내통할 가능성이 있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도 더욱 강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