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事/ 내친구 노무현 죽음까지...제1회 ~제5회 <진영신문 기고문>
함께한 40년 눈물로 쓴다
정인석 前 열린우리당 지역균형발전위원회 위원장
나는 노무현전 대통령과 부산상업고등학교를 같이 다녔으며 졸업후 삼해공업(주)회사에 같이 입사를 하여 근무하였다. 그 후 대통령은 사법시험에 합격을 하고 판사를 거쳐 부산에서 변호사사무실을 개업을 하였다.
나는 노대통령의 학창시절은 물론 인권운동을 할때도 함께 했으며 초선시절 민주당동구지구당 수석부위원장, 종로지구당 수석부위원장, (주)오아시스워터, (주)장수청감사 등으로 활약하며 대통령곁을 쭉 지켜왔다.
당선 이후 여러 언론의 접근도 많았으나 모두 사양하고 한번도 인터뷰에 임한적이 없었다. 퇴임후 같이 살자는 대통령과의 약속을 지키며 묵묵히 일상에 열심히 해 왔다
이제 고인이 되신 대통령이 세삼 그립기도 하고, 또 진영신문이 개간을 하면서 대통령의 추억담을 요청 해와 처음으로 기억을 더듬어 대통령과의 과거를 회고 해 보기로 한다.
진영신문 대표 박원철님은 노사모회원으로 많은 활동을 하셨고 해서 달리 보답 할 길도 없고 하여 나의 추억담 이라도 선물로 드리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언론에 나온 통상적인 애기들은 생략하고 히든스토리 위주로 꾸며볼까 합니다-
바보 노무현
보통 사람에겐 보이지 않지만
바보에겐 세상의
하얀 뼈가 보이지
그 뼈 어떻게 곧고 굽었는지
명경알 같이 환히 보이지
하얀 뼈 보이니
하얀 말 쏟아내지
흰 말은 때 묻지 않아
거칠고 투박하지
오염된 말에 익숙해진 귀엔
거슬리기 십상이지
바보의 시선은 하늘에 닿아 있고
바보의 미소는 태양을 닮아 있지
바보의 가슴은 활화산처럼 뜨거워
찬 가슴을 어루만지고
그러다 때론
하얀뼈의 눈물 흘리며
맨주먹으로 닦아 내지
이 땅에
천년에 한번 왔다 가는 바보
우리의 눈 흐려 그 바보 몰라보아
님 떠난 뒤
가슴 아픈 나날이여 ......
이해웅의 伄詩 중에
대통령이 사법시험에 관심을 둔 것은 큰형의 영향이 컸다.
그때 당시 큰형께서는 사법시험에 뜻을 품고 고시공부를 짬짬이 하였다. 그리고 없는 돈으로 다달이 고시계(考試界)란 책을 사 보셨다. 어린 대통령에게는 그 고시계란 책이 성경책과 같이 소중했다. 형님이 보고 난 후 겨우 구해서 읽고 또 읽고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농협에 시험을 보았으나 낙방을 하였다. 그래서 고등학교 이갑도 교장선생의 친구분이 운영하는 어망회사(주)삼해공업에 노무현(대통령) 정인석(만호제강이사) 이충정(제일은행상무) 김수복(금복화학이사) 이렇게 네 사람이 입사를 했다. 그때만 해도 취직난이 심해서 그 회사도 20명이 응시를 해서 4명이 최종 입사를 하게 되었다. 입사 때의 일화는 그 회사 사장님이 관상을 중히 여겨 마지막 면접시험에서 관상쟁이까지 동원해서 관상을 보곤 했다. 제일 성적이 우수한 노무현은 경리과, 정인석은 총무과, 이충정은 영업과 김수복은 수출과로 배치되었다. 그때는 산업화 초기라 모든 공장이 새벽에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하곤 했다. 이 회사 역시 아침 7시30분 출근에 저녁 8시30분이 퇴근이었다.
대통령은 집이 진영이라 어차피 하숙을 하여야 했는데 하숙비도 없고 해서 우리집(동구, 범일동)에서 같이 다니기로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범일동에서 회사가 있는 부산진구 부암동까지는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했다. 우리는 버스비도 줄일 겸 걸어가기로 했다.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서 대충 눈비비고 밥 한 숟갈 뜨고 걷기 시작했다. 깜깜한 밤중이었고 회사까지는 걸어서 1시간 반이 걸렸다.
걸으면서 항상 합창으로 부르던 노래가 있었다 -김상국의 불나비- 밤마다 불을 찾아 헤매는 날개 - 노래를 끝없이 부르다 보면 어느덧 회사까지 도착하곤 했다.
그때 경리과엔 우리와 같이 졸업을 한 부산여상 신입사원들도 있었다. 그 중에 특히 눈에 띄는 정숙례란 예쁘장한 아가씨가 있었다. 내가 보기에도 대통령께서 이 아가씨를 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았다. 괜히 가서 장난을 치기도 하고 모르는 것을 너무 친절히(곁에 붙어서) 가르쳐 주기도 하고 회사 내에서는 점점 대통령과 정숙례양의 관계를 예사롭지 않게 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대통령께서 권양숙이란 동네 처녀에게 공을 들이고 있을 때라 우리의 생각이 오버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양다리?
또한, 경리과에 남선미란 당시 27세의 올드미스가 있었다. 그 아가씨는 대통령을 무척 귀여워하고 사랑하였다. 미스남의 동생이 사법시험을 몇번이나 보다 낙방을 해서 그에 관한 책이 많았다. 그래서 그 책을 대통령이 물려받았다. 그 또한 대통령께서 사법시험을 본 결정적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때 당시 대통령은 워카(군인들 구두)에 군복을 물들여 입고 다녔다. 박희홍 상무가 불러서 이제 사회인도 되고 했는데 복장이 그게 뭐냐고 나무랐다. 그때 대통령께서 점잖게 월급을 많이 주어야 옷도 사입고 할 것 아닙니까? 라고 반격을 가하기도 했다.
대통령께서는 회사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들어가서 용맹정진하여 3번만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거기도 애처로운 사연이 담겨 있다. 대통령께서 마지막 피치를 올린다고 서울에 접수를 큰형님이 대리로 하러 갔다. 접수를 마치고 접수증을 가슴에 넣고 오다가 큰형님은 안타깝게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집안의 대들보인 큰형이 돌아가셨으니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날벼락이었다. 그 멍에를 대통령은 평생을 지고 살으셨다.
대통령께서 연수원생활을 끝내고 대전에서 판사생활을 잠시 하다가 접고 부산 부민동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설하였다. 대통령께서 조세업무에 밝은지라 초기에는 주로 조세사건을 위주로 수임을 했다. 그때 나도 경리통이라 지방세 (대도시 내 중과세) 업무에 상당히 조언하기도 했다.
대통령이 개업할 당시(79)에는 사회가 온통 군사독재하에서 신음하고 있는 터라 일반인들은 쪽도 못 쓰고 힘있는 자만 활개를 치는 실로 불평등한 사회였다.
하루는 대통령께서 날 부르더니 너도 이제 사회를 좀 알아야 하니 너무 양지쪽만 찾지 말고 음지도 알아야 한다고 하면서 나를 부평동 헌책방 골목으로 데리고 갔다.
풀빛출판사가 발간한 책을 여러 권 사주었습니다.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 “분단을 넘어서” “전환시대의 논리” 등 나는 그 책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점점 의식화되어갔다.
부림사건(81), 미문화원사건(82), 그때 부산은 완전 해방구였다.
한차례 데모군중이 휩쓸고 지나가면 온통 도로는 초토화되어 버리고 교통은 완전 마비가 되었다.
당시 대통령은 데모대 앞장을 지켰다. 최루탄 까스를 이기지 못한 데모대들은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대통령 혼자 아스팔트 위에 버려져 있었다.
전경들은 우습다는 듯이 깔깔 웃으며 최루탄 꼭지를 따고 가루를 내어 앉아 있는 대통령의 머리 위에 뿌렸다. 랩도 쓰지 않고 그걸 그대로 머리 위에 뒤집어쓰고 있는 대통령을 보며 전경들은 저게 “사람이가”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84년 변호사사무실에 공해문제연구소를 개설했다. 사실 변호사사무실은 문만 열었지 아무런 수임사건도 없었다. 그리하여 운동권 학생들이 주로 모이는 연구소가 되어버렸다. 그때 당시 부산의 운동권 학생들을 보호해 줄 아무런 장치도 없었다. 자연히 대통령의 사무실에 하나둘 모이기 시작하여 아지트가 되어버린 거지요. 식사비라도 해결해 볼 요량으로 볼펜이나 연필 등도 팔기도 하고 무척 어려운 때였다. 85‘ 86’ 87‘ 민주화의 투쟁은 들불 일듯이 일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용광로처럼 끓어 오르는 민주화의 함성은 온 천지를 뒤덮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가나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가나니 산자여 따르라.
카톨릭센터 앞, 대청동, 남포동, 서면 태화극장 앞,
엄청난 데모군중의 힘 앞에 독재권력은 서서히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대통령께서는 85년 민주시민협회 상임위원장. 87년 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으셔서 시민운동을 지도해 나갔다. 87년 이석규 열사 사건이 일어났다. 대통령께서는 만장을 앞세우고 장의행렬을 리드했다.
힘없이 죽어간 한 노동자를 위해서 힘을 모아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일을 기화로 정부에서는 구속영장을 발부하고 변호사 업무정지를 시키는 작업을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그 당시의 일화로 구속영장 청구 당시에 당직 판사가 조수봉 판사(김해 진례 출신)였는데 영장이 2번이나 청구되었으나 모두 기각시켜 버렸다. 그 후 조 판사는 한직으로 좌천되었다.
이 사건으로 해서 대통령께서는 21일간의 수감생활을 하셨다.
당시 나의 처는 서면 태화극장 앞에서 조그마한 가계를 운영했으며 나는 매일같이 데모 대열에 합류하여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웠다. 아무 생각 없이 오직 투쟁만이 나의 길이었다.
그것은 대통령이 내게 가르쳐준 군사독재에 대한 의식화 때문일 것이다.
서면 일대에서 데모하던 대통령께서 내 생각이 났던지, 최루탄 냄새에 손님은 다 도망가버리고 집사람과 둘이서 셔터를 반쯤 내려놓고 앉아 있는데 갑자기 오셨다.
“야 인석아 나 때문에 장사 못 해먹겠지, 어쩌나 참아야지” 하고 위로하고 가신 적도 있다.
민주화 이후 지도부 몇몇은 공로를 인정받아서 포상금도 타기도 했지만
우리는 이름없이 쓰러져간 들풀이었다. 최루탄에, 곤봉에, 맞아가며 그래도 누구 하나 기죽지 않았다. 누구 하나 보상을 바라지 않았다. 오로지 민주화의 열기 하나로 끝까지 보병으로서 남았다.
87년 6월 항쟁은 우리 민중의 승리였다. 아무 누구도 말리지 못하는 민중의 힘이요
민중의 선택이었다. 작고 힘없는 민초들이 뭉쳐서 드디어 독재를 무너뜨렸다.
범일동 오버브리지에서부터 부산역까지 늘어선 시민들의 대열을 보며 나는 울었다.
참으로 도도하게 흐르는 역사의 물결이었다. 그리고 작은 힘이지만 뭉치면 언젠간 이긴다고 굳게 믿었다.
드디어 군사독재정권이 서서히 힘이 빠지면서 민주화가 시작되었다.
김영삼 총재가 대통령께 총선에 나갈 걸 권유했다. 경쟁이 약한 남구 쪽이 어떠냐고 제안하자
대통령께서는 이왕 나갈 것 같으면 제일 세다는 동구 허삼수 쪽으로 택하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옛날 고관입구 KBS 앞쪽 선거사무실이 꾸려지고 맨땅에 머리박기가 시작되었다.
실지 당시 대통령이 가진 돈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그때는 선거법이 느슨해서 돈을 쓰는 데는 아무 제약도 없었다. 실로 허삼수는 돈이 많았다. 통, 반, 까지 조직책을 두고 조직책 식구들을 전부 선거사무원으로 등록했다. 그러니 동구 주민 거의 전부가 민정당 당원이며 선거수당을 받는 유급당원이었다.
우리측 사무실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하루하루 지날수록 자원봉사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자원봉사자들의 식사란 하루 김밥 한 줄 빵 2개가 전부였다.
동구는 어찌 그리 언덕이 많은지......
아침 일찍 산 위로 올라가서 내려오면서 한집 한집 유인물을 나누어 주고 또한 한 사람이라도 붙잡고 설득을 하고... 정말 우리 자원봉사자들 칭찬해주고 싶다.
나는 대통령 유인물을 내 돈으로 수만 장 찍었다. 당시는 지하철이 막 개통된 때라 일부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범내골역, 범일동역, 좌천동역, 부산진역, 초량역, 부산역, 이렇게 각 역마다 하루종일 유인물을 좌석에 놓기도 하고 지하철을 타고 나누어주기도 했다. 무언가 될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유인물을 다 뿌리고 다음엔 초등학교를 공략했다.
초등학교 하교 시간을 맞추어 학생들을 모아놓고 예쁜 볼펜 2개씩을 주었다. 주면서
복창을 시켰다. 인권변호사 노무현, 아빠도 노무현, 엄마도 노무현 우리 모두 노무현, 동요에 가사를 붙여서 퍼뜨리기 시작했다. 그때 당시 고생한 김범구, 유순철 동기가 생각이 난다. 고단했던 선거운동기간도 끝나고 드디어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제2회 (5공 청문회)
승리의 눈물
시종일간 막상막하의 시소게임이 전개되었다. 이제 막 게임이 끝나려는 즈음 마지막으로 허삼수 후보가 희망을 거는 수정동 지역이 남아 있었다. 그 지역은 허삼수가 막판 피치를 올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더 이상의 이변은 없었다. 몇 투표함에 역전이 있었으나 우리가 이겼다. 50.6%의 득표율로 승리했다. 노 대통령은 초저녁부터 자기 시작했다. 결론이야 어떻게 나든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다음날 아침 내가 아는 중앙동 조그마한 목욕탕에 부탁해서 사람을 받지 않고 대통령과 같이 뜨끈한 물에 몸을 푹 담구어 풀었다.
허삼수 밀어 붙이기
새날이 밝고 초선의 바쁜 업무가 정신없이 시작되었다. 초장기에는 업무방침이 지역구 일보다는 의원으로서 입법 활동에 신경을 쓰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러나 현실은 녹녹치 않았다. 찍어 줬더니 코빼기도 안 보인다는 등 온갖 악평이 난무했다. 반대로 허삼수는 완전히 운동화 끈 졸라매고 지역구를 누볐다. 하루 목욕탕 세 군데 이상을 돌며 등 밀어주는 것은 기본이고 초상이 나면 불이 나게 달려가서 울어주고, 길흉사 부조금도 두둑이 챙겨주고 말 그대로 지역구를 몸으로 때우고 누볐다. 그때 당시 동구지구당은 참모 3명 여직원 1명 이렇게 고정인원이 있었다. 점점 여론이 악화되자 대통령도 대책이 없는지 나보고 지구당을 맡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말이 맡으라는 것이지 어디 돈 좀 구해서 지구당 꾸려보라는 말이었다.
우편요금 없어서 sos
지구당 조직은 청년부 부녀부 직능부 정도 있었으나 그의 청년부, 부녀부에서 일은 다했다. 제일 큰일은 사람 동원이었다. 중앙당에서 지도부가 내려와 세미나를 한다든지 집회를 하게 되면 야당모임에 자발적으로 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거의 동원된 인원이었다. 그 때문에 평소에 청년, 부녀부 관리를 잘 해두어야 한다. 무급이기 때문에 자기들이 안 나오면 그만이다. 동원이 있으면 전화를 몇 번이고 해서 부탁을 하고 또 끝나면 어떤 식이든 회식을 시켜주어야 된다. 그래야 뒷발이 있다. 그때 당시만 해도 지구당에 한 달에 들어가는 돈은 평균 천오백 정도가 있어야 겨우 꾸려나갔다. 사무실 유지비, 고정인원 인건비, 우편료, 경조사비, 등등 서울에서 받는 의원 세비는 서울에 있는 참모들이 숫자대로 나누어 월급 대신 주었다. 그때 참 어려웠다. 안면이란 안면은 다 동원하고 단체식사가 있으면 친구 불러서 서폰서 시키고 별짓을 다했다. 유권자들에게 보낼 우편요금이 없어서 대통령께서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결국 서울에 계신 조종성 회장님(대통령의 대부격임)께 sos 를 보내기도 했다.
정주영 굴복시키다
그러다가 88년11월 5공 청문회가 시작되었다. 실지 5공청문회는 노태우 정부가 5공시절 참고 참았던 민심을 6공까지 연장되는 것이 부담서러워 자기 친구이자 상사였던 전두환을 청문회장에 세우고 죄를 물은 것이었다. 이 청문회에서 초선의 대통령은 실력과 자질을 국민 앞에 있는 그대로 마치 촌뜨기 같은 외모로 밀어붙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청문회의 백미는 무어라 해도 모든 의원이 회장님, 회장님 하고 굽실거리고 또 자기는 정경유착의 주범이 아니고 피해자라고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빠져나가려는 정주영을 굴복시킨 것이다.
대통령: 권력에 돈 갖다 바친 것이 부정이 아니라면 왜 진작 6.29 이전부터 바른 소리를 하지 못했습니까?
정주영: 우리가 그러한 용기를 가지지 못한 것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대통령: 이렇게 권력에 아부하는 것이, 힘 있을 때는 권력에 붙고 없을 때는 권력을 멀리 하는 이중적인 행위이고,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가치관의 오도를 가져오게 하고, 또 한 정의를 실천하다가 죽어간 수많은 양심적인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켰다고 보지 않습니까?
정주영: ......
청문회 마지막 날 나가는 전두환을 향해서 대통령이 명패를 던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내용인즉, 대통령께서 질문하고 있는데 뒤에서 쪽지가 들어왔다. 평민당이 다 뒤집어쓸테니 조용히 있으라는 지도부의 쪽지였다. 청문회 초장부터 타협하려 드는 지도부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대통령은 화가 치밀어 명패를 집어 땅바닥에 후려친 것이 전두환 쪽으로 굴러간 것이다.
권여사 관상
청문회를 무사히 마친 캠프는 잔치분위기였다. 그때 참모 중 조지훈, 강이근, 등이 노무현 대권 프랜을 구상하기도 했다. 대권의 용트림이 꿈틀거리기 시작한 초기였다. 또 하나의 일화는 80년대 초 대통령께서 부산 삼익비치 아파트에 사실 때 얘기다. 여사님께서 새내기 주부 때 얘긴데 어느 날 동네 아주머니들과 같이 용한 관상쟁이가 왔다 해서 같이 따라갔다. 그땐 새내기 주부라 나이든 아줌마들이 앞장서고 뒤에 따라가는 형편이었다. 관상을 다 보고 난 후 그 관상쟁이가 여사님을 조용히 부르더니 두 손을 꼭 잡고 들릴락 말락한 소리로 사모님은 왕비상을 타셨습니다, 뒤에 큰일을 하실 겁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라고 했답니다. 사모님은 부끄러워서 뭐가 뭔지도 모르고 그 자리를 황급히 떴 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대통령 주위를 맴돌고 있었지요! 초선의원으로서의 입지는 순탄치 않았다. 여당과 야당과의 거래? 서로 나누어 먹기식의 행태. 이 모든 것이 의리에 강하고 싱그러운 초선 노무현에게는 눈꼴사나운 일이었다. 환멸을 느낀 대통령께서는 사표를 내어 버려 정계의 파문이 일기도 했다.
보안대 사찰
당시 민주당 동구지구당은 끈덕진 감시를 당하고 있었다. 대통령께서 사상불순자로 분류되어 사무실이 온통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경찰서정보과, 치안 본부대 공분실, 보안대, 안기부 등으로 부터 철저한 감시를 당하고 있었다. 정보과에서는 사무실에도 들어오지도 못하고 프락치를 심어놓고 감시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구지구당 사무실을 빨갱이의 본산지로 취급하고 있었다. 90년 보안대 사찰자료가 언론에 공개되면서 온 세상이 알게 되었다. 그전에도 대공분실 보안대의 내 친구가 몇 차례 조심하라고 언질을 주었다. 당시 나는 망미동 통한병원 앞 단독주택에 살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쓰레기수거는 일정금액을 주면 매일 아침 사람이 와서 수거해 가곤 했다. 뒤에 안 일이지만 우리 집의 쓰레기는 특별히 수거해서 분석을 했다고 한다. 무슨 근거로 그런 짓거리까지 했는지 생각하면 섬뜩하기도 하다. 하루는 집을 비웠는데 누군가 들어온 흔적이 있었다. 아무것도 없어진 것이 없는데 책장 속의 이념서적이 몽땅 없어져 버렸다. 누군가 정보수집 목적을 가지고 침입한 것이 분명했다.
후원금 내고도 이름 남기지 마라
동부산 경찰서에서는 노무현사무실은 빨갱이들이 있는 곳이니깐 조심하라고 공공연히 선전하고 다녔다. 친구들이 후원금이라도 내려고 하면 나하고 사전연락을 해서 대통령을 내 차에 태워서 부산일보 뒤 주차장 등에서 만나자는 식으로 사전 약속을 해서 그곳으로 가서 접선하면, 친구가 다시 내 차를 타고 차를 운행하면서 간단한 인사를 하고 후원금을 차 속에서 전해주고 내리곤 했다. 친구들이 후원금을 내고도 제발 자기 이름은 남기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하곤 했다. 동구지구당엔 아예 아무나 들어오지 못하는 금단의 지역이었다.
사무실을 옮길 때면 노무현사무실이라면 절대 세를 주지 않았다. 보통 건강보조식품 파는 회사 사무실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밀고 들어갔다. 그러면 처음에는 비켜달라고 난리를 친다. 그래도 모른 척하고 한 달 정도를 죽은 듯이 드나들면 수그러진다. 이렇게 해서 지구당을 겨우겨우 이끌어 왔다.
제3회 (함께한 40년 눈물로 쓴다. 조선일보 횡포)
보수언론 기자의 교활함
이즈음 조선일보에서는 노 대통령을 고졸출신이라고 업신여기고 국회의원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가증스러운 공작이 진행되고 있었다. 주간조선에서는 표지모델로 노 대통령을 내놓고 “노무현 의원 그는 상당한 재력가인가?” 라고 포문을 열기 시작하면서, “노사문제에 개입하여 노측에도, 사측에도 돈을 받아 축재했다.” 고 쓰고 있었다.
기사가 나오기 전, 주간조선 우종찬 기자는 노 대통령을 찾아와 취재하였다. 노 대통령께서 친절히 있는 그대로 대답하셨다. 레저용 요트에 관심이 있다는 얘기며, 기자가 질문하는 형님의 밭떼기 얘기며, 노 대통령이 가지고 있는 재산 얘기며 실로 허심탄회하게 얘기했다. 그런데 우종찬 기자가 기사를 낼 때는 마치 노 대통령께서 호화 요트를 타고 다니는 것 같이 기사를 썼다. 형님의 밭떼기 얘기도 기자가 물어서 애초에 몇 마지기 사서 갖고 있다가 몇 마지기 팔고 현재 조금 가지고 있다고 친절하게 대답했는데, 마치 그것을 노 대통령이 팔고 사고했으며, 또한 판 것까지 모조리 합해서 현재 노 대통령이 밭을 소유하고 있는 양 대서특필 했다.
언론의 속성상 한번 나가면 끝이였다. 고스란히 덮어 쓸 수 밖에 없었다.
판사 - 안줏감으로 질근질근 씹었군요.
고민 끝에 조선일보를 상대로 소송을 하기로 했다. 서울 민사지방법원에서 재판이 진행되었다. 법원에 증인으로 나(정인석)하고 동기생(하구락)이 나갔다.
판사 - 그 기사가 노무현 의원에게 영향을 미친 사례를 말해보세요.
증인 - 부산 시내 술집이며, 포장마차며, 저녁에 나가면 그 기사가 화제가 됩니다.
어떤 사람은 노무현이 재벌 못지않은 재산가라고 목청을 돋우기도 합니다.
판사 - 안줏감으로 질근질근 씹었군요......
재판에서 당연히 이길 수밖에 없었다. 판결문에는 안병훈 편집장과 우종찬 기자가 사실을 외면하고 소문에 기초해서 부풀려 기사를 썼다고 적시하고 있다. 애초에 대서특필했던 조선일보는 ‘재판에서 노무현이 이겼다.’ 라는 기사를 모퉁이에 보일 듯 말듯 실었다.
그 후에도 조선일보는 노 대통령을 집요하게 괴롭혔다. 현대중공업사건도 실은 이렇다. “사실 내가 힘이 없소, 국회에 노동자들을 위한 의원 열 명 정도만 있어도 내가 여러분을 위해서 어떻게 해볼 수도 있는데 참 딱하군요.” 이 말을 “국회에서 마음 맞는 의원 20명 정도 모아서 확 판을 쓸어 엎어 버리겠다.” 라는 말로 왜곡 보도했다.
철저한 보수주의자들의 집단인 조선일보는 이때 벌써 ‘한국에 진보세력이 집권할 수도 있다.’ 라는 예측을 한 것 같다. 그 시절 한국 사회는 급하게 변하고 있었다. 노동자와 농민들의 입지가 확대되어가고 있었으며, 사업장에서는 그동안에 억울하게 당했던 노동자들의 시위가 계속되고 있었다.
최초의 지방선거 실시
90년도에 최초의 지방선거가 시작됐다.
동구에는 광역의원구역으로 3구역이 있었다. 민정당 쪽에는 “공천비용이 20억이다.” 라는 말이 있어도 서로 공천을 받으려고 줄을 섰고, 민주당 쪽은 어느 누구도 나와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신문기자들은 취재차 계속 사무실을 드나들며 광역공천자가 누구냐고 묻곤 했다. 마감일이 다 되어가는 데도 선거 나갈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명색이 현역의원 지역에 공천자가 없다니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선 3구역(수정, 좌천, 범일)에 내 사진이라도 기사로 나가게 했다.
등록마감일이 되었다.
부랴부랴 1, 2구역에는 보수성향의 사람이라도 공천을 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3구역에는 내가 나가게 되었다. 부산지역에서는 민주당 간판 달고 나가봐야 되지 않을게 뻔한 일이었다. 그래도 현역의원지역의 체면을 걸고 공천자를 낼 수밖에 없었다. 결과는 뻔했다. 모두 낙선이었다. 그러나 그 뻔한 선거에서도 노 대통령의 애착은 남달랐다.
선거기간 동안 새벽에 시작해서 해가 질 때까지 핸드마이크를 잡고 골목골목을 누볐다. 마지막 날엔 목이 메어서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데도 해가 질 때까지 마이크를 잡고 안창 골목길을 누볐다. 그 뒤에 목에 피가 올라오고 심한 몸살이 나서 나는 대연동의 한약방에 가서 한약을 지어오기도 했다.
내가 사무실 책임을 진 이상 노 대통령이 내려오면 이런저런 보고를 했다. 워낙 바빠서 보고는 차 속에서 이루어졌다. 김해공항에 내리면 내가 차를 몰고 가서 모시고 오면서 작성한 보고서를 보여주고 약간의 설명 덧붙이곤 했다.
사실 부산지역에서 노 대통령 혼자 현역이라 시 지부 업무도 실은 노 대통령이 맡아서 했다. 그때 당시 부산의 민주당 위원장 중에는 실로 가관인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대통령은 그 사람들을 버리지 않고 같이 일해 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3당 합당! 그리고 비정한 정치판
1990년, 3당 합당이 이루어졌다.
대통령은 이를 통렬히 비난하며 합당을 거부하고, 꼬마 민주당에 남아서 정치를 계속했다. 그때 무척 어려웠다. 영남지역 일부에서는 김영삼을 배신했다는 논리로 공격을 해왔다. 우리측 입장에서 보면 말도 아닌 논리지만 영남지역의 대다수 유권자에게는 이 논리가 먹혀 들어갔다. 심지어는 형 노건평씨까지 이와 같은 이유로 대통령과 논쟁을 일삼았다.
그때 당시 지구당 운영비는 바닥이 났고, 후원도 거의 끊긴 상태였다. 이호철, 이광재 비서는 살길을 찾아 나갔고, 안희정 비서만 남아서 비서업무를 계속 보았다. 사무실 운영비라도 마련해 볼 요량으로 몇몇 뜻이 맞는 의원들은 강남에 ‘화로동선(火爐冬扇)’이란 고깃집을 운영하기도 했다. 사회경험이 없고 의욕만 앞선 경영이었다. 한국의 조세 풍토상 매출을 100% 노출시키면 가게운영이 안 되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젊고 패기에 찬 의원들은 매출을 100% 노출할 것을 주장했다. 예상대로 가게는 몇 개월 못 버티고 본전을 다 까먹고 막을 내렸다.
하룻밤새 맘 변한 이기택 총재
어느 날 갑자기 서울에서 연락이 왔다. 이기택 총재와 다 합의가 되어서 구로(을) 보선에 나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일이 후보신청 마지막 날이니 부산에서 노 대통령 졸업증명서와 성적증명서를 떼 가지고 내일 아침 급히 서울로 올라오라는 전갈이 왔다. 부랴부랴 부산상고에 가서 증명서를 떼서 서울로 올라갔다. 그러나 밤사이에 이 총재가 다른 사람으로 후보를 교체하고 말았다. 아마 이러한 일들도 대통령에겐 전회위복의 사건이 아닌가 생각된다. 91년, 신민당, 민주당 야당통합이 이루어졌다. 대통령은 통합협상대표로 활약하며 야당통합을 이루어 냈다. 그 후 통합민주당 대변인으로 활약했다.
귀인을 만나다.
이 시절 어려울 때 대통령을 도와준 한 분을 소개하기로 한다.
이름은 조종성 회장이다. 조종성 회장은 올해 71세로 (사)팍스코리아나-이사장, 한국 궁도협회 회장으로 있다. 당시 우리 동기 故유순철의 소개로 JC 특우회를 같이하는 연유로 노 대통령과 만나게 되었다.
노 대통령께서는 부산이 연고이고, 또한 학교도 부산상고가 최종학력이라 서울에는 연고가 거의 없었다. 반면 조 회장은 서울이 고향이고, 서울에서 여러 활동을 많이 한바 서울에 발이 넓었다. 조 회장은 민주당 문희상 의원과 각별한 사이라 노 대통령을 소개시키면서 서로 더욱 친분을 쌓게 되었고, 재임시절 비서실장으로 중용 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조 회장은 초선 대통령과 한동안 활동을 함께하며 많은 인맥을 만들어 주셨다. 그런 일들이 거름이 되어 노 대통령은 통합민주당에서 입지를 확보할 수 있었고, 최연소 최고위원이 되기까지 많은 도움이 되었다. 회식이 있는 날이면 노 대통령은 못 마시는 술에 취해서 압구정동 조 회장 집에서 자고 간적도 몇 번 있었다. 가끔씩 노 대통령 용돈이 떨어질 때쯤 되면 조 회장은 지인들을 식당으로 불러 같이 식사를 하면서 십시일반으로 봉투를 만들어서 용돈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국수먹으며 의정활동
이즈음 이광재, 서갑원 비서는 생활비라도 벌어 보려고 종로통에서 ‘꼬추친구와 불알동무’ 란 조그만 카페를 운영하기도 했다. 노 대통령은 이리저리 정치판에서 몸부림치고 비서는 안희정 혼자만 남고 모두 생활비를 구하러 쫓아다니는 형국이었다.
인고의 세월은 짧은 것 같지만, 우리에게는 긴 세월이었다.
우리는 초량 3동으로 사무실을 옮겨서 생활밀착형 의정활동을 전개했다. 지구당 소식지도 내고, 사무실에서 손숙 선생을 초대해서 여성교양강좌를 열기도 하고, 거창에서 유기농 감자, 감나무 밭을 같이 가꾸기도 하였다. 또한 사무실에서 지역주민들과 함께 무공해 비누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 시절이 노 대통령이 가장 알찬 지역주민을 위한 의정 활동을 한때라고 생각된다.
제14대 총선
1992년, 드디어 제14대 총선의 막이 올랐다.
우리 사무실은 달세도 비싸고 해서 본 도로에서 한참 위로 붙은 사무실을 구했다. 돈이 없어서 밀려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노동운동이 사회에 거세게 밀어닥쳤다. 택시노조파업, 부두노동자파업, 노 후보가 노동자를 아끼는 사람이니까 부산의 파업단체는 거의 우리 사무실을 점거했다. 한쪽에서는 선거운동원들이 차지하고 한쪽에서는 파업노동자들이 차지하고 말 그대로 사무실이 쑥대기판이었다.
제4회 노무현 측근들
허삼수와 2라운드
허삼수는 오직 김영삼 총재만 바라보고 선거를 치렀다.
대통령이 김영삼을 배신했다는 논리가 지역구에 먹혀들어가고 있었다.
허무맹랑한 소리지만 현실은 어쩔 수 없었다.
돈 없고, 조직 없이(꼬마민주당) 치르는 선거라 돈과 조직이 월등한 허삼수 후보를 당하기란 역부족이었다.
또한, 허삼수는 조선일보의 엉터리 보도를 십분 활용했다.
- 노무현이 재벌 됐다 카더라...
- 다음엔 서울에 나온다 카더라...
- 뽑아줬더니 코빼기도 안 보이더라...
허삼수는 유권자들의 어렴풋한 판단을 요리조리 파고들었다.
모든 것이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대통령께서는 묵묵히 선거운동에 전념했다.
수정초등학교에서의 합동유세.
성남초등학교에서의 합동유세.
어느 유세장 할 것 없이 허삼수의 동원된 청중들은 대통령의 유세를 방해했고, 거의 조폭 수준으로 대통령에게 우호적인 청중들을 협박하곤 했다.
여러 지역의 선거운동 현장에서 폭력배들의 운동이 심하였다.
마치 해방 후 좌익세력 척결을 외치며 무자비하게 린치를 가했던, 그때의 정치판이 재현되는 것 같았다.
선거 도중에 허삼수 측에서 노 후보를 고발하여 대통령을 대신하여 내가 부산지방검찰청 공안부에서 조사를 받기도 했다.
부산지검 공안부 하모 검사는 ‘당신들 노무현 옆에 오래 있다간 명대로 못 살 거다.’ 라고 협박하기도 했다.
패배의 슬픔
선거결과는 예상대로 낙선이었다.
그때 몸으로 때우던 자원봉사자들이 사무실 한구석에서 말없이 흐느끼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며칠 후, 부산일보 강당에서 선거본부 해단식이 있었다. 대통령은 덤덤하게 해단 연설을 했다.
- 선거란 유권자들이 후보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유권자들이 저를 선택하지 않고 허삼수 후보를 선택했습니다.
여러분 조금 섭섭하더라도 유권자들의 의견을 존중해 주십시오. 실로 화가 치밀어 오르는 일이었으나, 대통령께서는 오히려 상대후보를 추켜세워 주고 울고 있는 운동원들을 차분히 위로해주셨다.
대통령께서는 "내가 노래 한 곡 여러분에게 선물하지" 하면서 '아침이슬'을 힘차게 불렀다.
노무현 사무실은 실로 무한리필 사무실이었다.
일이 있으면 모두 뭉치고, 모이고
일이 없으면 최소 인원만 남고 각자의 생업으로 돌아가고...
돌이켜보면 14대 총선을 계기로 노 대통령 곁을 지키는 사람들의 판이 짜진 것 같다.
그 중 다소 들어오고 나간 사람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이 마지막까지 대통령과 고락을 같이했다.
대통령의 인맥들
면면히 살펴보면
후원회장 - 이기명 (사업)
수석부위원장 - 정인석 (보라정보대표) 회계책임자 - 최도술(청와대)
기획팀 - 이호철(청와대) 안희정(충남지사) 이광제( 前 강원지사) 서갑원(국회의원) 백원우(국회의원) 천호선(청와대) 조상훈(서울시의원) 홍경태(청와대) 여택수(청와대) 문용옥(청와대) 최영(청와대) 홍성일(청와대) 강이근(사업) 조지훈(사업)
김재순(주부) 고성규(청와대-대통령영어선생) 정윤재(총리실-대통령웅변선생)
문재인 수석은 초장기 변호사 개업할 시기 인연을 맺은 관계이다.
낙선 후 대통령은 전혀 내색 없이 하는 일에 열중했다.
사실 노 대통령은 어찌 보면 이념가이며, 또한 사상가였다.
정치란 자기의 철학을 관철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면 대통령의 철학은 무엇이냐?
가진 자와 소외당하는 사람들과의 기회를 공평하게 제공해야 된다는 것이다.
실로 한국사회의 역사상 가진 자들의 유래는 대부분 탈법과 불법을 일삼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의 몫을 약탈하는 것이다.
때문에 대통령의 일생은 소외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돕는 것이었다.
14대 대선이 다가왔다.
대통령께서는 예의 그 순발력을 발휘했다
통합민주당의 청년특위 위원장으로서 한국 선거의 초유로 물결유세단을 발족시켰다.
과거와 같은 주입식 유세가 아니라 유세단과 청중이 함께 어울려서 노래하고 춤추는 축제의 장을 만든 것이다.
보는 이마다 신기해하며 한국정치판의 변화를 실감했다.
야권이 분열된 상태에서의 선거는 불리했다.
이렇든 저렇든 유세장은 흥겨웠다.
물결유세단은 15대 대선 때 파랑새유세단으로 확장 개편됐다.
대선은 DJ의 패배로 끝이 났다. YS의 3당 합당 승이었다.
일 화
이호철 실장은 갓 결혼을 해서 부산 연산동에 셋방살이를 하고 있다가 아버지의 도움으로 변두리에 아파트를 구하러 다녔다. 그는 덕계방향으로 아파트를 구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덕계보다 기장이 훨씬 나았다.
그래서 내 차에 호철이 부부를 태워 덕계와 기장을 둘러보고 기장 현대아파트를 권유했다.
그때는 미분양 시기라 10층을 당장 계약할 수 있었다. 높은 층이라 기장바다가 훤히 보이기도 했다.
그곳에 살면서 낚시를 배워 김재규(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씨와 같이 낚시에 푹 빠지기도 했다.
최연소 최고위원당선
낙선한 대통령은 당내에서는 왕성하게 활동했다.
조종성 회장님의 권유로 최고의원에 나가기로 결심했다.
조회장님은 자기의 모든 인맥을 동원해서 대통령을 도왔다.
정대철 신순범 김영진 김영배 권노갑 김원기 류준상
박상천 박석무 박지원 이경제 이상수 조세현 한광욱
고흥길 김영배 박주천 신기하 김봉호 김상현 장기욱
장영달 정대철 신계륜 안동선
실로 전 민주당 의원들을 상대로 뛰었다.
당직자들도 죽기 아니면 살기로 뛰었다. 특히 전라도 지역은 오래 묵은 대의원이 많은지라
집들도 도시엔 없고, 촌으로 촌으로 띄엄띄엄 살았다.
하루에 500km는 강행군했다.
드디어 최연소 최고위원으로 당선되었다.
이때부터 당내에서 대통령의 입지는 확고해졌다. 새내기 정치인에서 중견 정치인으로
발돋움하는 순간이었다.
전국 최초로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부산에 열었다.
안희정, 이호철이 실무를 담당했다.
지방자치 실시한 지 2회차라 지원자가 쇄도했다.
그 뒤에 서울에서도 지방자치연구소를 열었다. 안희정이 맡았다.
부산시장선거 막오르다
95년 부산시장 선거가 있었다.
초장기 분위기는 정말 좋았다. 마치 승기를 잡은듯했다. 대통령은 수행원과 같이 유세를 하고, 권 여사님은 홍 여사(현, 봉하마을 거주)가 수행을 해서 따로 선거운동을 했다.
그때 참 열심히 했다.
권 여사님도 이때까지 선거 중에서 제일 열심히 했다고 생각된다.
금정구 서동 시장통에서는 인파가 막혀 빠져나가지도 못 할 지경이었다.
실로 권 여사님의 인기가 대단했다. 이렇게 인기 좋은 분이 여태까지 왜 머뭇거렸을까 싶기도 했다. 대통령 정치 그만두라고 보채기도 하고 말이다. 하하하
그때 당시 선거운동을 마치고 부산 연산동에서 대통령과 같이 술이 얼근히 취해서 숙소까지
어깨동무를 하고 ‘어머니’ 노래를 흥얼거리며 같이 걷든 추억이 아련하다.
- 사람세상이 돌아와
너와나의 어께동무 즐거울 때
우리의 다리 저절로 둥실
해방의 거리로 달려가누나
아~아~ 우리의 젊음
아~아~ 이글거리는 불빛으로
두려운 없이 함께 나가자
어머님
해맑은 그날을 위해
당시 분위기론 부산시장은 노후보가 따 놓은 당상이었다.
상대 문정수 후보는 거의 운동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무서운 작전일 줄이야!
움츠리고 있다가 선거 3일 전에 물량공세가 시작되었다. 각 선거구별로 엄청난 실탄이 보급되었다. 동네 똥개도 문정수 후보 만원짜리 물고 다닐 정도였다.
물량 공세 앞에는 이념도 인물도 없었다. 그저 먹고 보자는 식이었다.
열띤 선거전은 끝이났다. 패배였다.
그래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
부산지역에서 민주당이 魔의 15%대를 넘어 본적이 없다.
노 후보가 36.7%를 얻었다. 실로 부산지역의 큰 변화를 예상하는 대사건이었다.
1996년 총선이 있었다.
사실 그때는 DJ낙선 이후에 정계은퇴를 선언했다가 국민회의를 전격 창당했고, 과거 민주당조직은 전부 국민회의로 흡수된 때였다.
대통령은 고민이 많았다.
처음엔 국민회의에 거부감을 나타내었다. 사실 대통령은 ‘죽을 때 죽더라도 食言은 안 된다.’ 는 식이었다. 그래서 자그마한 통추를 꾸려가 보기로 했다.
국민회의의 당위성을 검정하기도 전에 선거가 시작되었다.
참으로 선거조직이라고는 할 수도 없는 작은 조직을 가지고 선거를 치렀다. 대한민국은 여전히 양당정치의 풍토가 대세였다.
이명박, 이종찬에게 밀려 3위를 했다. 이것도 대통령에겐 쓴 약이 되었다.
통추내에서도 갑론을박이 팽배하였다.
이부영과 이철 의원 등은 신한국당을 택했고, 노무현, 김원기, 김정길 의원은 국민회의로 가기로 정했다.
대통령은 1977년 11월 국민회의에 입당하는 변으로 “오늘은 매우 기쁜 날입니다. 단순히 여러분과 다시 일하게 된 데 대한 기쁨뿐만 아니라, 그동안 여러분에게 지고 있었던 마음의 짐을 풀었다는 것이 가장 기쁩니다.” 라고 사과를 대신 했다.
15대 대선이 시작되다
15대 대선이 시작되자 대통령은 특유의 기지를 발휘하여 유세를 이끌어 나갔다.
특유의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로 유권자들의 심금을 울리는 찬조연설도 하고 수도권특별 유세단을 이끌면서(파랑새遊說단) 곳곳을 휩쓸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선거결과 DJ가 40만여표차로 이회창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실로 600년 李朝역사이래 아웃사이드가 정권을 잡기는 처음이었다. 보수세력들의 준동이 극에 달했다. 그래도 DJ는 꾹 참고 남북대화의 물꼬를 터나갔으며 나라를 반석위에 올려놓았다.
제5회 대통령의 사람들
장수천
이쯤 해서 여러분도 의아해하는 노 대통령과 장수천과 관계를 얘기해 보자.
95년경에 대통령께서 민주당으로 활동하실 때 전국을 아우러는 중진당원 중에 부산을 대표하는 민주당 정치인은 단연 노 대통령이었다.
그래서 대통령께서 勢 확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부산, 경남북의 주군 격으로서 최소한 그 지역의 지구당위원장들 정도는 장악해야 하는 판세였다.
여러 계파인 지구당위원장들을 자기편으로 끌어 넣는 게 급선무였다
그중에 대구 구미 민주당 위원장인 이 석면위원장과의 관계를 좋게 할 겸해서, 공을 들이고 있었다,
이 석면위원장이 옥천다가 물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금이 여의치 않아서 고전을 하고 있었다. 자금이라 해 봐야 별것 아닌 5백만 원~천만 원 정도였다.
급하면 대통령께 부탁하여 꾸어가고 해서 물 공장을 꾸려 나갔다.
대통령 역시 자금이 빡빡한 터라 이리저리 꾸어서 빌려 주기도 했다.
어떤 때는 가계수표를 끊어 주고 바꿔가기도 했다.
대통령께서는 한번 연을 맺으면 좀처럼 끊지 못하는 성격이고 또한 이 위원장도 대통령에게 극진히 대하는 터라 이러지도 저리고 못하고 차츰차츰 물려 들어가고 있었다.
점점 말려들어 갈 무렵 부채가 2억 가량 되었을 때 이 위원장은 물 공장을 자금이 부족하여 도저히 운영할 수가 없으니 대통령께 인수해가라고 제의를 했다.
자금을 물렸고 도저히 방법이 없어서 인수할 계획을 세웠다.
변호사사무실에 실장으로 있든 최도술을 시켜서 현장 답사를 지시했다.
최도술은 옥천군 청성면 장수리 물 공장을 현지 답사하였다.
굽이쳐 흐르는 금강 강줄기에 그림 같은 경관에 정신을 잃었다.
관정에는 물이 철철 넘쳐 흐르고 있었다. 물에 대해 전혀 모른 최 실장은 수질이 어떤 줄도 모르고 철철 흘러 넘치는 관정을 보고 환호를 질렀다.
답사 후 보고에서 굉장히 횡재할 사건이라고 보고했다.
대통령도 돈 떼이는 것보다 일단을 공장을 확보하는 게 났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래서 인수하기로 결정이 났다.
물 뚜껑을 망치로 쳐서 막기
먹는물관리법이 2007년 4월에 제정되었으니까 그때까지만 해서 아무런 법적 제재도 없이 되는 데로 통에 물을 넣어서 파는 것이었다.
물통을 죽 새워 놓으면 호스로 차례대로 물을 채워서 다음엔 뚜껑을 망치로 쳐서 막는 방법이었다. 물속의 성분이 무엇이던 상관이 없는 때였다.
그 공장엔 쓸만한 관정을 오직 하나뿐이었다.
공장을 인수하고 대표이사에 비서인 홍경태를 앉혀놓았다. 그냥 2억짜리 물 공장을 그럭저럭 버티다가 팔아 버렸으면 될 것을, 홍경태는 공장을 키워서 본격적인 물 공장을 하면 된다고 여러 차례 건의했다.
그때는 이미 먹는물관리법이 제정(97.4)되어서 관정, 수질, 공정 라인, 공장규모 등이 법적으로 정해진 터라 물을 팔려면 법대로 다 새로 설비를 해야 할 판이었다.
대통령은 고민에 빠졌다. 이렇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 중이다. 사실 돈이 없었다.
그 와중에 홍경태는 장밋빛 계획을 세워서 대통령께 보고해 댄다.
리스 자금을 들여와서 공장만 현대화시키면 판로는 걱정 없다느니.
재벌기업에 OEM으로 얼마든지 납품할 수 있다느니, 정말 장밋빛 계획이었다.
리스 자금 차입하다
드디어 물 공장 건설 계획이 확정되었다.
외화 리스 자금 200만 불 환율 900원 - 18억 차입
공장부지확보 및 조성, 건물신축 - 15억
자동화 설비 - 40억
주사위는 던져졌다.
차입을 일으키는 데 보증인이 필요했다.
차주는 대표이사 홍경태
보증인은 노무현 노건평 오철주(건평씨 친구) 이기명(후원회장) 최도술(회계) 이었다.
그러나 대출처에서는 노 대통령을 보고 대출해주는 것이었다. 보증인은 반드시 노무현이 들어가야만 했다.
자동화 설비는 창원의 대창 기계(박 사장) 이 맡았고 부지조성 및 건물은 대창 기계 박 사장 친구인 김 이사는 라는 사람이 맡았다.
공사는 외상이지만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홍경태는 공장 명세서를 들고 이리저리 거래처를 뚫어러 다녔다.
별로 신통한 결과가 없었다.
이물공장에는 결정적인 2가지 결점이 있었다.
1. 관정에서 나오는 물의 성분 중 불소가 2.0을 초과하여 사용할 수가 없었다. (물 관리법)
2. 자기 자금이 전혀 없이 처음부터 전부 차입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관정을 새로 뚫어야 했으며, 자금을 구하러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관정하나 뚫는데 최소한 5천만 원은 소요 됐다. 그의 5개나 뚫어도 신통한 물이 나오지 않았다. 관정작업비용은 전부 외상이었다.
공장에 지게차가 필요했다. 이것도 2대를 두원중공업에서 외상으로 사왔다.
그것도 수해 이후에는 고철이 되었다.
공장은 그의 완공 되어갔으나 거래처는 한 군데도 확보하지 못했다
이즘 대표이사가 선봉술로 바뀌었다.
비서 최영 부모님께서 옥천으로 내려와 공장 함빠를 했다.
물을 한 통도 팔지 못하고 운영자금은 자꾸 들어 가고 공장운영이 말이 아니었다.
옥천 보은 대 홍수난리
설상가상으로 97년 가을 옥천, 보은 대홍수를 맞았다. 그때 비가 하루 600밀리를 퍼부었다.
공장은 온통 물에 잠기고 사무실 2층 옥상만 겨우 물에 가무가물하고 있었다.
이즘 최영 비서 부친, 모친이 공장에 함빠를 하신다고 사무실 1층에 계셨다가 물난리를 만났다.
물이 차츰 공장을 치고 들어오자 옥상에 올라가서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 때마침 우리와 친분이 두터운 전 행자부 김정길 장관이 계셔서 급히 연락하니 군부대까지 수배를 해도 비 때문에 헬리콥터가 뜨지 못한다고 했다.
다행이도 충청북도 해병전우회에서 산 중턱까지 잠긴 물속을 뚫고 수상 보트를 띄웠다.
수상 보트는 산을 넘고 금강 본류 홍수지점으로 침투하여 최영의 부모님을 구해내었다.
이때가 노 대통령이 겪은 큰 시련의 한 고비였다.
그때 인명사고라도 났으면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물난리는 끝나고 사후처리를 한다고, 온 관공서며 기업체에서는 수해 업체를 도와 준다고 왔다.
도무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앉아서 밥 먹을 자리 하나 없고 화장실 하나 없는 곳에 수해복구 한다고 몰려 오니 난감한 따름이었다.
TV에서는 수해업체 복구자금 지원해준다고 난리 법석을 떨었다.
그래도 자금이라도 좀 빌어보려고 서류를 챙겨서 이리저리 다녔다. 충청북도. 중소기업청 충북사무소. 신용보증기금. 기업은행. 국민은행. 농협. 실로 한국의 정부기관과 금융업체는 그의 다 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나 결과는 황이었다. 연체중 이라느니. 부채비율이 1000%라는니…….
추석에 홍수가 났는데 그해 12월 까지 서류를 가지고 다녔다.
어느 기관에 가니 하는 말이 “아직도 그 서류를 들고 다니세요.”라고 했다.
맥 빠지는 소리다.
수해복구 공사는 그의 6개월가량 걸렸다.
그동안에 이자는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외환 사정이 점점 나빠지기 시작하여 달러당 900원에 차입했던 외자의 환율이 그의 두 배로 올랐다.
공장은 문은 열었으나 자기 자금 한 푼 없이 그의 차입금으로 운영되었다.
금융기관에서 변호사에게 빌려주는 1회 최대 차입금액인 3천만을 빌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노무현 명의로는 오직 3천만 원 밖에 안 되고 차입자 명의를 바꿔가며 빌리고 노무현이 보증을 섰다.
점점 차입금이 불어나니 새로운 차입자 명의 구하기도 어려웠다.
처음엔 비서들 명의로 빌리다가 차츰차츰 안면 있는 사람으로 늘어났다.
실로 그 수가 40여 명에 이르렀다.
제1금융기관 다 빌리고 보험회사까지 가서 빌렸다.
그렇다 보니 매일매일 이자가 돌아오고 그의 매일 원금 내감 하라는 독촉이 심했다.
리스 차입은 1회만 갚고 한 번도 갚지 못했다. 그래서 계속 연체 하다가 한도가 목까지 차면 원금에서 이자까지 합쳐서 재리스를 하곤 했다.
독자들의 요청에 의해서 전 번 회(4회)에 실은 대통령의 사람들을 한 번 더 정리해서 올린다.
사실 대통령취임 후 대통령 곁에서 고생한 동지들도 많다. 그렇나 내가 지금 거론하는 인맥은 정치 초년병시절, 대통령은커녕 과연, 정치인이라도 크게 성공 할 수 있을까? 라고 하던 시절, 노무현이 무조건 좋아서 곁을 지켰든 분 들임을 말해 드린다.
대통령의 사람들
후원회장 - 이기명(사업)
수석부위원장 - 정인석(보라정보대표)
회계책임자 - 최도술(청와대)
기획팀 - 이호철(청와대) 안희정(충남지사) 이광재 (청와대) 서갑원(청와대) 천호선(청와대) 백원우(국회의원) 조상훈(서울시의회의원) 홍경태(청와대) 여택수(청와대) 문용욱(청와대) 최영(청와대) 홍성일(청와대) 고성규(청와대) 정윤재(총리실) 송인배(청와대) 최인호(청와대) 강이근(사업) 조지훈(사업) 김재순(주부) 성연찬(재미)
정인석 약력-
*부산상업고등학교(53회) 졸업
*연세대학교 법무대학원(19기) 수료
*민주당 부산동구지구당 수석부위원장(위원장 노무현)
*민주당 서울종로지구당 수석부위원장(위원장 노무현)
*변호사 노무현사무소 사무장(서울변협)
*개혁국민정당 부산위원회 운영위원장
*열린우리당 지역균형발전특별위원회 위원장
*(주)장수천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