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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 최초의 반역
조선 최초의 반역이 일어난 것은 태종 2년(1402) 11월 5일이었다. 동북면의 안변 부사(安邊府使) 조사의(趙思義) 등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급보에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이미 세 번째의 왕이 다스리고 있다지만 조선이 건국된 것은 겨우 10년에 지나지 않았다. 태종(太宗) 이방원이 창업에 전력으로 매진하고 있는 형편에 일어난 반란은 치명적인 위협이 될 소지가 적지 않았다. 게다가 반란이 일어난 지역이 동북면이라는 것도 예사로 넘길 일이 아니었다. 동북면의 병력은 태조 이성계의 무력기반으로서 강하고 억세기로 정평이 나지 않았는가. 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면 보통 사건이 아닌데다, 인근의 함흥과 영흥에까지 반란이 파급되는 날에는 심각한 사태를 부를 우려가 적지 않았다.
실제로 영흥판관(永興判官) 김견(金譴)이 반란에 가담하였으며 함흥까지 불온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려의 그늘에서 그리 멀리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발생한 반란에 태종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이번 반란을 확실하게 제압하지 못하면 고려에 충성하는 자들과 불온세력들이 여기저기서 날뛸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였다. 까딱했다가는 조선이 발목을 잡힐 판이었다.
일이 안 풀리려니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때마침 명나라의 사신들까지 와 있는 상태였다. 명나라에서 알게 되면 오죽 태종이 한심했으면 반란이 일어나느냐고 우습게 볼 것이 아닌가. 한 마디로 사면초가였다. 일단 상호군(上護軍, 정삼품의 무관직 고려의 상장군) 박순(朴淳)을 보내 설득하게 하였는데 반군들이 박순을 잡아 죽이고 말았다. 조사의는 대화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이렇게 된 이상 태종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태종이 반역을 진압할 부대를 편성하라고 명하자 조선이 초비상사태로 돌입했다.
그렇다면 조사의는 누구인가, 조선 최초로 반역을 일으켰다면 그리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의외로 신상이 알려져 있지 않다.
조사의는 곧 현비(顯妃) 강씨(康氏)의 족속(族屬)인데, 강씨를 위하여 원수를 갚고자 한 것이었다.
신상과 반역을 일으킨 명분이 너무나 간단하게 기술되어 있다. 현비 강씨는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으로 이방번(李芳蕃)과 이방석(李芳碩), 경순공주(慶順公主)의 2남 1녀를 낳고 신덕왕후(神德王后)로 추증되었다. 이성계가 본부인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 소생의 장성한 아들들을 제치고 강씨 소생의 어린 아들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 이방원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방석이 세자로 책봉된 이후 강씨가 죽었는데, 이방석이 일으킨 1차 왕자의 난(1398)으로 인해 이방석은 물론 이방번까지 죽음을 당하자 조사의가 그 원한을 갚겠다고 거병한 것이었다.
조사의와 강씨가 어느 정도 가까운 친척인지 전혀 기록에 없다. 다만 실록에 나타나는 조사의의 행적이 이방석과 관련되는 것은 분명하다. 처음 나타나는 기록이 태조 2년(1393년) 6월 22일이다. 이때 조사의는 육부(六部)의 정사품 의랑(議郞)이었는데, 세자빈인 현빈(賢嬪) 유씨(柳氏)의 폐출에 관련되어 처벌을 당했다. 이때 유씨가 폐출당한 이유가 참으로 어이가 없다. 태조가 세자빈 유씨를 쫒아낸 것은 기가 막히게도 간통을 하였기 때문인데, 더욱 황당한 것은 상대방이 내시라는 것이었다. 세자빈 유씨와 간통한 내시는 이만(李萬)이라는 자였다. 남성으로서의 기능이 거세된 내시가 어떻게 성관계를 맺을 수 있었는지 의아하지만 감히 세자빈과 간통하다가 들켰으니 어찌 무사할 수 있겠는가.
이성계는 이만을 죽이고 세자빈을 폐출한 다음 가급적 묻어두려 했다. 당시는 고려를 배반하고 보위를 찬탈한 이성계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았다. 게다가 왕씨(王氏)들을 마구 죽이고 이성계의 심복들이 민폐를 끼쳐 인심을 잃고 있는 판에 세자빈이 내시와 간통하였다는 것이 퍼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열불이 터졌지만 왕실의 체통이 땅에 떨어지고 도덕성에까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기 때문에 쉬쉬하고 넘어가려는데,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관리들이 진상 규명을 요청하자 모조리 하옥시킨 것이었다. 이때 조사의가 포함된 것은 강씨의 친족으로서 세자의 거취에 관심이 컸기 때문으로 풀이할 수 있다.
두 번째는 태조 6년(1397) 2월 28일이다.
임금이 임진(臨津)에 머물렀는데, 그 남쪽에 전조(前朝)의 시중(侍中) 정렬공(貞烈公) 경복흥(慶復興)의 묘가 있었다. 임금이 말하였다.
“경 시중(慶侍中)은 강개(慷慨) 청직(淸直)하고 시중 벼슬에 있어서 나를 보기를 자식 같이 하고, 나도 또한 아버지 같이 섬기었다.”
첨절제사(僉節制使) 조사의(趙思義)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별다른 내용은 아니지만 조사의가 무관직인 첨절제사로 되어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보통 첨사(僉使)라고 부르는 첨절제사는 종삼품의 무관직으로 주로 주요 진관을 수비하는 직책을 맡기 때문에 지금의 연대 급 정도의 병력을 지휘할 수 있다. 의랑이던 조사의가 어떤 경위로 고위급에 해당하는 무관이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반역에 필수적인 요소를 갖춘 것은 분명하다.
반역 이전에 마지막으로 나타난 경력이 약간 흥미롭다. 그때가 태조 7년(1398) 8월 26일인데, 조사의를 포함한 상당수의 많은 고위급 무관들이 체포당하여 중징계를 받게 된다. 그날이 이방원이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날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는데, 조사의가 투옥된 것은 이방석의 모친인 강씨와 가까웠기 때문 일 것이다. 그러나 곧 사면되고 주요지역이라 할 수 있는 안변의 부사로 간 것을 보면 직접 이방원에게 대항하여 싸우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강씨와 가까운 친족이다 보니 일단 잡아넣었을 것인데, 특별히 의심할 만한 근거가 발견되지 않다보니 사면되고 다시 채용되었을 것으로 본다. 나쁘게 평하면 잔챙이 급에도 미치지 못했다고나 할까,
이때까지의 조사의는 반역과 무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불과 석 달도 지나지 않아 반역을 일으키고 말았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조사의가 반란을 일으켰던 안변이다. 조사의는 그곳을 다스리는 부사였을 뿐으로서 아무런 기반과 연고가 되지 못한다는 없는 점이다. 또한 그가 거병의 명분으로 삼았던 강씨의 원한을 갚겠다는 것 역시 지역의 정서와는 전혀 합치되지 않는다. 강씨는 개경에서 오래 살던 권문세가의 딸이어서 안변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었다. 그런 점들을 감안하면 그쪽의 백성들에게 강씨의 원한을 갚자고 말했다가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 취급당하기 십상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사의는 군사를 일으켰다. 피어오르기도 전에 꺼져야 할 반역의 불씨가 오히려 활활 타올랐다. 인근의 영흥도 동참했으며 심지어는 여진족들까지 협조를 약속했으니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가?
반역을 명령한 사람은 바로 이성계였다. 동북면과 여진족이 유일하게 따르는 사람이 이성계였으며, 그가 아니고서는 그들에게 반역을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조사의는 ‘바지사장’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이성계의 명령을 전달하는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았을 따름이다.
이성계가 안변의 반역에 깊이 개입되었다는 증거가 적지 않다. 반란을 일으키기 전 이성계의 행적을 추적해보자. 태상왕(太上王)으로 전락한 이성계는 궁궐에 있지 않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를 즐겼다. 태종으로는 민망하기 짝이 없었겠지만 아들에 의해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버린 이성계가 무슨 낙으로 궁궐에 있겠는가. 태종 1년 4월에는 이성계가 안변에 오래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임금이 상왕전(上王殿, 정종)에 나아가서 술자리를 베풀었다. 이날에 박석명(朴錫命)이 안변(安邊)에서 돌아와서 아뢰기를,
“태상왕(太上王)께서 신에게 이르기를, ‘환왕(桓王, 이자춘)의 기신(忌晨, 제사)을 지내고 돌아가겠다.’ 하였으나, 안변(安邊)과 함주(咸州, 함흥) 등처에 양정(涼亭)을 지으라고 명령하시니, 오래 머무르실 뜻이 있으신가 합니다.”
하였다. 임금과 상왕(上王, 정종)이 눈물을 흘리고 파하였다.
이성계가 안변과 함주에 오래 머물렀다는 것과 반역을 연관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 반역이 일어나기 직전인 태종 2년(1402) 10월 27일의 기록이 자못 심상치 않다.
태상왕이 사신 온전(溫全)에게 징파도(澄波渡)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전(全)이 금강산(金剛山)에서 돌아오매, 태상왕이 중로(中路)에서 청(請)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임금이 기생과 풍악을 보내고, 또 종친(宗親)과 별시위(別侍衛)를 보내어 호종하게 하였다. 태상왕이 별시위를 거느리고 동북면(東北面)에 행차하려고 하니, 변현(邊顯) 등이 아뢰기를,
“주상께서, 전하가 사신을 보려고 하시기 때문에 신 등을 보내어 시위(侍衛)하게 한 것이고, 처음에는 거가를 따라 깊이 먼 지방까지 들어간다는 사실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물며 자량(資糧, 여비와 식량)의 준비가 넉넉지 못하니, 멀리 대가(大駕)를 따르기가 실로 어렵습니다.”
하였다. 태상왕이 말하기를,
“너희들은 모두 내가 기른 군사인데, 지금 어찌하여 나를 배반하느냐?”
하고, 인하여 눈물을 흘리니, 변현 등이 마지못해 따랐다.
이때 명나라의 사신 온전이라는 자가 당도하여 이성계가 태상왕의 자격으로 임진강의 징파도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태종이 기생과 악공을 보내고 종친과 별시위를 보내었는데, 그것은 사신과 이성계를 개경(그때는 한성에서 다시 개경으로 천도했을 때였다)까지 호위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성계가 천만 뜻밖으로 별시위를 대동하고 동북면으로 가려는 것이 아닌가. 사신을 모시러 온 별시위를 임의로 대동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별시위의 지휘관 변협이 크게 놀라 식량 등의 준비가 충분하지 못하여 따르기 어렵다고 말하자 이성계가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다. 자신들을 기른 이성계가 눈물로 호소하자 별시위로서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때 주목할 것은 이성계가 별시위에게 ‘배반’을 입에 담았다는 점이다. 정 동북면으로 가고 싶었다면 굳이 배반까지 입에 담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눈물을 흘리고 호소하는 것으로 충분했을 텐데 굳이 배반이라는 극한적 표현을 사용한다는 말인가. 또한 반드시 별시위가 아니더라도 호위병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비록 실권 없는 태상왕이라고 해도 인근의 수령들에게 명하면 당연히 호위해 줄 것인데, 무엇 때문에 조선의 최정예인 별시위를 동북면까지 대동하려 하였을까.
이성계가 별시위의 일부를(사신을 호위해야 했기 때문에 전부 대동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끌고 북상했다는 보고에 태종이 경악했다. 태종이 급히 이성계에게 사람을 보냈다. ‘외교관례 상 종주국에서 보낸 사신을 길가에서 맞이하고 헤어지는 것은 옳지 않으며 그쪽의 고위급들을 모두 만나는 것이 옳다’는 말을 전하여 돌아오게 하였으나 이성계는 따르지 않았다. 이방원의 다급함을 실록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임금이 태상왕의 향하는 곳을 알지 못하여 사람을 시켜 살피었으므로, 〈사람의 행렬이〉 길에 잇닿았다.
이성계의 행적이 파악된 것은 반란이 턱밑에 닿은 11월 1이었다. 이성계는 계속 동북면으로 가고 있었다. 11월 3일과 4일에도 꾸준히 동북면에 근접하고 있었는데 11월 5일에 가서야 비로소 이성계가 의중을 밝혔다.
내가 즉위한 이래로 조종(祖宗)의 능(陵)에 한 번도 참배하지 못하여 일찍이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 다행히 한가한 몸이 되었으니, 동북면(東北面)에 가서 선릉(先陵)에 참배한 뒤에 금강산을 유람코자 한다. 서울에 들어가면 잠시도 문(門)을 나서지 않겠다. 만일 내가 선릉에 참배하지 않으면, 어찌 다른 날에 지하(地下)에서 조종(祖宗)을 뵈올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나의 이번 행차를 미쳤다고 할 것이다. 그들도 부모가 있는 자들이니, 자기 마음속으로 헤아려 보면 내 마음을 알 것이다.
이성계의 동태를 살피러 보낸 환관 김완(金完)가 돌아와 그렇게 전했지만 태종으로서는 믿기 어렵다. 음력으로 11월 초면 한겨울이다. 고향에 있는 선조들의 능을 참배하겠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이해하겠는데, 무엇 때문에 굳이 추운 겨울을 무릅쓰려는 것인가. 봄이 되기를 기다려 가는 것이 이성계 자신이나 가마꾼에게나 좋을 것은 세삼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성계가 지금까지 안변에 머물렀다는 것을 감안하면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때껏 안변에 머무를 때는 뭐하다가 이제야 능묘를 참배하겠다는 것인가. 별시위를 대동한 것 등을 감안하면 아무리 보아도 어떤 꿍꿍이가 있는 것이 분명한데, 그 의문은 머지않아 풀렸다. 바로 그날 조사의가 반역했다는 급보가 닿은 것이다.
또한 11월 8일에는 이성계가 철령을 지났다는 보고가 들어왔는데, 그날은 태종이 보낸 박순이 함흥에서 잡혀 죽었다는 급보가 닿았다.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반역의 중심에 있는 자는 이성계가 분명했다. 별시위를 대동한 것은 그들을 포섭해서 반군들에게 위엄을 떨치는 동시에 이미 조정에서도 자신을 지지하고 있다고 선전하기 위해서였다. 태종도 설마 그러기까지야 하겠느냐고 여겼다가 보기 좋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이었다.
결정적인 근거를 제시하겠다.
김권(金綣)과 김온(金溫), 배상충(裵尙忠), 박부금(朴夫金) 등이 복주(伏誅)되었다.
- <<태종실록>> 2년(1402년) 12월 29일
함승복(咸升復)을 베었다. 승복은 환자(宦者)인데, 조사의(趙思義)의 난(亂)에 참여한 자이다.
- <<태종실록>> 3년(1403) 2월 21일
안우세가 말하였다.
“처음에 신이 변현(邊顯)과 조홍(趙洪) 등 16인과 별시위(別侍衛)로서 명(命)을 받고 시종(侍從)하였는데, 11월 초4일에 금화(金化) 도창역(桃昌驛)에 이르니, 정용수와 신효창이 비밀히 나를 불러서 말하기를, ‘함승복(咸承復)과 배상충(裵尙忠)이 북쪽 땅으로 들어가 군마(軍馬)를 뽑으니, 반드시 변란(變亂)이 일어날 것이다.
- <<태종실록>> 18년(1418) 4월 27일
안우세에게 물으니, 답하기를, ‘임오년 11월에 신효창과 정용수가 모든 일을 오로지 주장하여 초4일에 도창역(桃昌驛)에 이르러 4경(更) 4점(點)에 안우세와 변현(邊顯)을 불러 말하기를, 「배상충(裵尙忠)과 함승복(咸承服)이 초군(抄軍, 군사를 모음) 하는 일로 인하여 동북면(東北面)에 들어갔다.」고 하므로......
- <<태종실록>> 18년(1418) 5월 3일
반역에 관련되어 참수당한 함승복은 이성계를 모시던 내시이며 배상충은 풍수를 보던 자다. 당시 반역에 참가했다가 체포된 안우세을 심문한 결과 함승복과 배상충이 먼저 동북면으로 들어가 반역할 준비를 갖춘 것이 밝혀졌다. 그들이 누구의 명을 따랐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이쯤 되면 이성계가 안변에서 반역할 채비를 갖추었다는 것은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이성계는 왜 반역을 명령했을까? 그는 이방원에게 복수하기를 원했다. 감히 자신이 책봉한 세자를 죽이고 보위마저 찬탈한 이방원은 아들이 아니라 복수의 대상일 뿐이었다.
문제의 발단은 잘못된 후계구도에 있다. 이성계의 아내와 아들들에 대해 약간 설명해보자. 이성계는 본처 한씨와의 사이에서 6남 2녀를 두었으며 후처 강씨와는 2남 1녀를 두었다. 이방우(李芳雨), 이방과(李芳果, 정종), 이방의(李芳毅), 이방간(李芳幹), 이방원(李芳遠, 태종), 이방연(李芳衍)의 6남과 경신(慶愼), 경선(慶善)의 2녀를 낳은(이방연은 어려서 죽었다) 한씨와 앞서 소개한 2남 1녀를 낳은 강씨는 많은 점에서 상이하다. 한씨가 일반적인 혼례를 통해 부인이 되었다면 강씨는 정략결혼의 케이스였다. 한씨가 살림을 하고 자녀를 낳아 기르는 부인 이상의 역할이 곤란했던 반면 강씨의 집안은 이성계를 충분히 밀어줄 수 있었다.
한씨가 이성계가 보위에 오르기 직전인 1391년에 죽는 바람에 최초의 정비(正妃)가 되지 못한 데 비해, 강씨는 후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왕비가 될 수 있었다. 어미와 아들이 각각 최초의 왕비와 최초의 세자로 책봉되는 기록을 세웠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방원이 반란을 일으켜 강씨의 아들 형제를 죽이고 보위를 찬탈하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다. 강씨의 비극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방원의 명에 의해 강씨의 무덤인 정릉(貞陵)이 파헤쳐지고 묘석을 비롯한 석물(石物)이 광통교(通交)에 깔려 뭇사람에게 밟히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무덤마저 이리저리 옮겨지다가 도성 밖의 산속에 내팽개쳐진 다음 2백년이 넘도록 방치되었으니 어찌 기가 막히지 않겠는가.
이방석이 세자가 된 것은 태조 1년(1392) 8월 20일이었다.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恭讓王)에게 양위를 받아 이성계가 보위에 오른 것이 7월 17일이고 여러 아들들을 왕자로 승격시켜 군(君)으로 봉한 것이 8월 7일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빠른 책봉이었다. 고려가 망한지 불과 한 달 만에 이방석이 세자로 책봉된 것인데, 어이없게도 적장자(嫡長子)인 한씨 소생의 장남 이방우는 아예 거론조차 되지 못했다. 이방우가 장남의 기득권을 전혀 인정받지 못하게 된 것은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었다. 이방우는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한 고려의 관리로서 끝까지 충성을 다했다. 놀랍게도 이방우는 일반적인 충성으로 그치지 않고 부친의 목에 칼을 겨눴다. 그것을 잠시 설명해보자.
이성계가 회군한 다음 우왕이 폐위 당하고 아홉 살에 불과한 창왕이 아들 창왕(昌王)이 등극한 것은 잘 아는 사실이다. 창왕은 끝까지 고려를 지키려는 이색(李穡)과 정몽주 일파에 의해 옹립되었지만, 어차피 이성계와 정도전 일파가 고려를 폐기처분하려고 작정했기 때문에 별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 이색 일파가 예상외의 승부수를 던졌다. 그들은 창왕을 주원장에게 친조(親朝)시키려 했다. 창왕이 주원장을 찾아뵙고 충성을 맹세하고 주원장이 그것을 받아들여 창왕을 정식으로 승인하게 되면 이성계 일파가 창왕을 제거하기 어렵지 않겠는가. 이색과 정몽주의 의도는 그렇게 해서 반격에 필요한 시간을 벌고 세력을 결집시키려는 것에 있었다. 일단 사신을 보내어 창왕이 친조 하겠다는 의사를 알리는 것이 순서였는데, 반드시 주원장이 승낙하지 않더라도 긍정적인 답변을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때 이성계와 정도전 일파는 크게 당황했다. 이색이 파견한 사신들이 의도를 달성하는 날에는 그들이 설 자리가 사라질 판이었다. 당연히 막아야 했지만 명나라로 가는 사신을 막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위화도에서 회군한 가장 주된 명분이 명나라를 칠 수 없다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 그들이 사신을 막는 것은 스스로 '우리들은 반역자’라고 공표하는 행위이며, 반격당할 빌미를 스스로 제공하는 최악의 자충수였다.
그렇다고 해도 생사가 걸린 만큼 어떻게든 조치를 취해야 했지만 급진파들이 행동에 나서지 못한 것은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회군은 정권을 잡기 위한 정변으로는 충분하고도 넘쳤지만 나라를 뒤엎을 위력까지는 없었다. 고려가 비록 힘이 없다고 해도 거의 5백년을 이어온 나라가 아닌가. 강력한 정적들을 제거한 다음 지방에까지 손을 뻗쳐 차근차근 삼킬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 않고 성급하게 삼키려들었다가는 실족(失足)할 위험이 크다는 판단으로 명분과 역량을 기르던 중에 벌어진 ‘친조정국’은 메가톤급 충격으로 이성계 일파를 강타했다.
다행히 ‘친조정국’은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났다. 주원장이 고려에서 벌어진 정변에 대해 아주 냉담했던 덕택이었다. 주원장은 “고려의 왕이 바뀌건 말건 내가 알바 아니니 너희들 일은 너희들이 알아서 하라.”며 사신을 돌려보냈다. 상당히 주원장답지 않은 행동이다. 주원장이 끼어들어 이득을 취하지 않고 방관하게 된 것은 고려에게 혼이 났기 때문이었다. 고려가 북원과 계속 근접하는 것을 막기 위해 철령위를 설치하겠다고 위협했다가 하마터면 큰 코 다칠 뻔했다. 그때 이성계가 반역하여 회군하지 않았다면 무슨 사태가 벌어질지 몰랐다. 된통 당한 주원장은 가급적 고려를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이성계가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한다는 것쯤은 충분히 짐작했지만, 그때 가서 다시 길을 들이면 될 것으로 판단한 주원장이 창왕의 친조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이성계와 정도전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주원장이 고려를 염두에 두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상 ‘친조정국’은 오히려 급진과격파들의 손에 칼을 하나 더 쥐어준 결과를 낳았다. 급진파들이 이색 일파를 숙청하고 고려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울 수 있었지만 그때 만일 주원장이 약간의 언질이라도 주었다면 상황은 정반대가 되었을 확률이 컸다. 그만큼 친조정국의 파괴력은 대단했다.
그때 사신으로 파견된 관리들 가운데 놀랍게도 이방우가 포함되었다. 사행(使行)이 성과를 거두었다면 이성계의 파멸이 충분히 예상 가능한 만큼, 이방우는 바로 부친의 목을 노린 것이었다.
물론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이성계가 사신들을 감시하고 위협하기 위해 장남을 사행에 포함시키지 않았겠느냐는 추정과 반론이 충분히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실록에 반박의 여지가 없는 증거가 남아있다.
진안군(鎭安君) 이방우(李芳雨)는 임금의 맏아들인데, 성질이 술을 좋아하여 날마다 많이 마시는 것으로써 일을 삼더니, 소주(燒酒)를 마시고 병이 나서 졸(卒)하였다.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경효(敬孝)란 시호를 내렸다. 아들은 이복근(李福根)이다.
- <<태조실록>> 2년(1393) 12월 13일
사행에서 돌아온 이방우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은거하여 날마다 독한 소주만 마시다가 그만 목숨을 잃었는데, 언뜻 보기에도 절망에 따른 자살의 소견이 짙다. 이방우가 부친의 뜻에 따라 사신들을 감시하고 협박하기 위해 동행했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일 그랬다면 큰 공을 세운 것으로 인정받아 장남의 기득권을 행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 결과 최초의 세자와 두 번째 왕은 떼놓은 당상일 것인데, 이방우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라지고 말았다. 부친의 뜻을 정면으로 거역하고 심지어는 목숨까지 위협할 수 있는 극한의 행동에 나섰다가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절망에 빠진 결과였다.
모두가 이방우의 실격을 진심으로 환영했다. 정통성을 갖춘 적장자(嫡長子)가 탈락하자 다른 아들들이 후계에 눈독을 들렸다. 특히 한씨 소생의 다섯 째 아들 이방원은 크게 기뻐했다. 실제로 배극렴 등의 공신들은 매우 비상한 시기인 만큼 서열에 구애받지 말기를 청했다. 조선의 기반을 굳히기 위해서는 왕재(王才)를 가진 왕자를 후계자로 선택해야 할 것인데, 판단의 바로미터는 건국에 이바지한 공로일 수밖에 없었다. 그랬을 때 이방원을 따라올 왕자가 없었다. 이성계 일파를 몰살시키려 했던 정몽주를 격살(擊殺)하여 최대의 공을 세운 이방원을 누가 따를 수 있겠는가. 이방원은 당연히 자신의 세자가 될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이방원이 탈락하고 말았다. 그것도 후처 강씨 소생의 열할 살짜리 막내아들 이방석이 세자로 결정되었으니 어찌 기가 막히지 않겠는가.
그것은 정도전과 강씨가 야합한 결과였다. 야심만만한 이방원이 즉위하면 부담스런 공신들을 제거할 것이 분명한데, 정도전이 1번으로 당할 확률이 거의 100퍼센트였다. 정도전이 죽지 않으려면 이방원을 제거해야만 했다. 합법적으로 이방원을 제거하고 태조 이후의 정국까지 장악할 수 있는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강씨 소생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이 유일했다. 아들을 세자로 즉위시키는 것을 열망하던 강씨는 공신들 가운데 가장 비중이 큰 정도전과 자연스레 손을 잡았다. 세자의 책봉에는 생모인 왕비의 존재여부와 총애의 강도가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총애를 받는 강씨의 베갯머리송사와 이성계의 운영체제라고 할 수 있는 정도전이 꼬드김이 배합되자 어렵지 않게 이방석을 후계자로 삼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방원은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결국 칼을 뽑아들고 피를 보게 되지만, 건국 초기의 후계다툼은 그리 드물지 않은 사건이다.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이 이미 황태자로 책봉된 장남 이건성(李建成)과 만만치 않은 동생 이원길(李元吉)을 참살하고 부친 고조(高祖)에게 강제로 양위 받은 다음, 고조마저 유폐한 것은 유명한 사례다. 굳이 당나라까지 가지 않아도 그런 사례는 차고도 넘친다. 이웃한 명나라도 주원장이 죽은 다음 보위를 물려받은 적손(嫡孫)과 숙부가 전쟁까지 치르며 다투다가 이긴 숙부가 3대 황제인 영락제(永樂帝)로 즉위하지 않았는가. 이방원이 세자로 책봉되어 즉위하였다고 해도 언젠가는 한바탕 치고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여하튼 당사자들에게는 목숨이 걸린 일이다. 이방원을 위시한 본처 소생의 왕자들은 이방석의 즉위를 전후하여 의문사를 당하거나 역모에 연루되어 참살당할 가능성이 너무나 농후했다. 이방원은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칼을 들어야만 했다. 이방원이 기습을 가하여 정도전을 위시한 반대파의 수뇌부를 몰살시킨 것은 태조 7년(1398) 8월 26일의 밤이었다. 반대파들에게조차 ‘유방을 도와 패업을 이룬 장량’에게 비유된 천재 정도전의 최후는 너무나 허무했다.
방심의 허를 찔러 정도전 일파를 제거한 이방원의 능력은 아무리 칭찬해도 모자라지 않다. 이방원의 재능이 빛을 발하는 것은 정도전을 죽인 다음이었다. 워낙 열세했기 때문에 경복궁에서 진압군을 내보내는 날에는 당해낼 수 없다는 판단이 들자 ‘기병이 도성을 온통 그득 메웠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만일 이때 이성계가 일백 기라도 내보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터였다, 그러나 어두운 밤에 여기저기 불길이 일어나고 반란군으로 추정되는 부대가 곳곳에 횡행한다는 소문을 들은 경복궁은 움직이지 못했다. 경복궁은 방어를 굳건히 하고 밤이 새기를 기다렸다.
시간은 이방원의 편이 아니었다. 날이 밝아 형편없이 열세한 세력이 드러나면 바로 파멸이었다. 이방원은 다시 한 번 지략을 짜냈다. 이방원이 경복궁 측의 지휘관 가운데 친분이 있는 조온(趙溫)과 박위(朴葳)를 불러내었다. 두 사람이 적의 세력을 파악하기 위해 나오자 아주 좋은 조건을 제시했다. 그러나 박위는 이방원을 따르지 않았다. 이방원의 세력이 대단치 않다는 것을 파악한 박위가 다시 경복궁으로 들어가려다 참살 당했지만 조온은 이방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조온이 돌아가 휘하의 장병들을 데리고 나온 것이 승부의 분수령으로 기능했다.
경복궁의 병력이 이탈하고 이방원이 크게 기세를 올리자 관망하던 세력들이 달려와 충성을 맹세했다. 특히 이성계의 심복 가운데 심복이었던 조영무(趙英茂)가 가담한 광경은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비중이 급격히 이방원에게 기울기 시작했다. 이번 기회에 공을 세워 출세하려는 자들이 앞 다투어 가담하자 엄청나게 세력이 불었다. 날이 밝은 다음 광화문(光化門) 앞을 그득 메운 반란군을 본 경복궁은 그만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날부터 권력은 이성계의 손을 떠났다. 세자 이방석은 물론, 이방번까지 죽어야 했다. 이방원으로서는 십년 묵은 가래가 떨어져나간 것처럼 시원하고 후련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표정관리를 잘 해야 했다.
전 장흥부사(長興府使) 김기(金頎)를 덕산(德山)에 안치(安置)하였다. 김기가 신문고(申聞鼓)를 쳐서 원종(元從)의 반열에 참여하기를 원하였다. 임금이 불러서 원종(元從)의 사유(事由)를 물으니, 대답하였다.
“무인년에 주상이 경복궁 남문(南門) 밖에 계실 때 신이 장철(張哲) 등 15인과 함께 세자(世子) 이방석(李芳碩)을 성 서쪽에서 죽였습니다.”
- <<태종실록>> 11년(1411) 11월 6일
김기라는 자가 신문고를 쳐서 “내가 예전에 이방석을 죽이는데 참여했으니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봉해달라.”고 청했다. 그때 태종은 어디서 헛소리를 하느냐며 크게 꾸짖고 오히려 중죄(重罪)로 다스렸다. 또한 “무인년(1차 왕자의 난)에 위급한 때를 당하여 골육이 상잔(相殘)하는 것을 내가 어떻게 면하겠는가? 그 대체는 그러한데, 지금까지 하늘에 고하고 뉘우친다. 그런 내가 어찌 김기 등으로 하여금 어린 동생을 죽이라고 하였겠는가?”라며 절절하게 토로했다. 그것을 곧이곧대로 들었을 사람은 없을 테지만,
이방원은 바로 즉위하지 않았다. 이성계는 장남 이방과에게 선위하고 상왕(上王)으로 물러나야 했다. 그래야 이방원의 반란이 서자(庶子)를 세자로 삼은 것을 물리치고 적장자를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는 명분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종(定宗) 이방과에게 허락된 것은 이방원의 뜻을 재신 집행하는 것 밖에 없었다. 이방원은 자신의 심복들을 요소에 심으면서 곤란한 것들은 정종의 명을 핑계대어 시행했다. 특히 위험요소인 사병(私兵)을 혁파하여 정부군으로 흡수하고 협조적이지 않거나 껄끄럽게 나오는 자들은 탄핵 기능을 가진 대간(臺諫)들을 이용하여 압박했다. 이방원은 정종을 최대한 이용했다.
한양에서 다시 개경으로 환도한 것이 정종의 뜻이었다고 하지만 그것 역시 이방원의 뜻을 대신 시행한 것이 지나지 않았다. 정종이 무슨 힘이 있어 수도를 옮기라고 명령할 수 있겠는가. 이성계와 정도전이 건설한 한양은 아무래도 위험요소가 많고 반격을 당할 여지가 적지 않다고 느낀 이방원의 뜻을 대변하였을 뿐이다. 조선보다는 고려에 훨씬 익숙한 백성들은 개성으로의 환도를 고려가 부활하기라도 한 것처럼 열렬히 환영했다. 개성으로의 환도는 안전을 확보함과 동시에 민심을 얻었으며 마음에 들지 않는 자는 한양에 떼어버리는 등의 복합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2차 왕자의 난이 벌어진 것은 정종 2년(1400) 1월 28일이었다. 이성계의 셋째아들 회안군(懷安君) 이방간(李芳幹)이 “이방원이 나를 해치려 하니 어쩔 수 없이 칼을 들었다.”며 군사를 일으켰다가 전투랄 것도 없이 일방적으로 패배하고 말았다. 호기롭게 칼을 뽑아들고 나선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방간은 누구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이미 정보가 누설된 데다 전투경험이 풍부한 이성계의 심복들과 젊은 장수들의 대부분 이방원의 편에 섰으며, 종친들까지 이방원을 지지하였으니 그야말로 사면초가(四面楚歌)였다. 이방간은 생존권의 확보차원에서 군사를 일으켰다고 하지만 동생 이방원의 성공에 배가 아팠던 나머지 이방원을 제거하고 그 위치에 앉으려 했다고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네가 정안(靖安, 이방원)과 아비가 다르냐? 어미가 다르냐? 저 소 같은 위인이 어찌 이에 이르렀는가?
이성계가 크게 노해 펄펄 뛰었으며 정종도 당장 그만두지 못하겠느냐며 노발대발했다. 포위당한 이방간의 군사들은 화살이 날아오자 전의를 상실하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시작하자마자 승기를 잡은 이방원은 “만일 우리 형을 보거든 화살을 쏘지 말라. 어기는 자는 베겠다.”며 여유만만하게 지휘했다. 참패한 이방간은 오직 죽음만을 기다릴 뿐이었는데, 놀랍게도 유배하는 것으로 그쳤다. 동생들을 죽이고 정권을 잡은 이방원으로서는 친형까지 죽이면 민심을 잃을 것이 우려되었고, 완전히 힘을 잃은 이방간은 굳이 죽일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방간을 살려줄 것을 부탁하는 이성계와 정종의 부탁을 들어주어 그들의 체면도 살려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2차 왕자의 난은 이방원의 입지를 더욱 확고하게 굳혀주는 동시에 정종의 유통기한에도 종지부를 찍었다. 공포에 질린 정종은 서둘러 이방원에게 양위했다. 정종의 정비인 정안왕후(定安王后) 김씨가 원자(元子)를 생산하지 못한 것을 이유로 하여 이방원이 정종의 아들로 입적하여 세자로 책봉되는 웃지 못 할 과정을 통하기는 하였으나, 스스로의 힘으로 보위에 오른 명실상부한 제왕이 탄생한 것이었다.
상왕(上王)이 된 정종은 사냥과 격구를 비롯한 취미생활도 즐기고 건강도 관리하면서 유유자적하였는데, 태상왕(太上王)에 오른 이성계는 그러지 못했다. 이성계는 이제 이빨 빠진 호랑이만큼의 존재도 되지 못했다. 태상왕이라는 거창한 칭호는 전혀 구속력을 가지지 못했다. 누구도 그를 존중하지 않았지만 예전의 심복들마저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은 정말이지 견디기 어려웠다. 궁궐은 그를 가두는 감옥 이상은 아니었다. 숨이 막힌 이성계는 밖으로 나돌 수밖에 없었다.
최고의 권력에서 강제로 박리(剝離)된 다음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던 이성계는 이대로 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비참하게 전락하게 된 것은 이방원이가 반역했기 때문이 아니던가. 이에는 이, 반역은 반역으로 되갚아 줄 따름이었다.
안변에서 조사의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급보를 받은 순간, 태종은 번뜩 이성계가 떠올랐다. 조사의는 결코 반역을 꿈꿀 그릇이 되지 못했다. 이것은 반드시 부친에 위한 것이었다. 반역으로 보위를 찬탈한 아들에게 똑 같은 것으로 되갚아줄 심산이 분명했다. 아직도 이성계의 끗발이 통하는 곳이 있지 않은가. 동북면에서 일어난 최초의 반란은 이성계가 내민 최후의 카드였다. 어쩌면 이럴 수가 있다는 말인가? 태종은 한동안 말을 잊었다. 그러나 앉아서 당할 수는 없었다.
조영무(趙英茂)로 동북면(東北面) 강원, 충청, 경상, 전라도 도통사(都統使)를, 이빈(李彬)으로 서북면도절제사(西北面都節制使)를, 이천우(李天佑)로 안주도 도절제사를, 김영렬(金英烈)로 동북면과 강원도 도안무사(江原道都按撫使)를, 유양(柳亮)으로 풍해도 도절제사를 삼았다.
- <<태종실록>> 2년(1402) 11월 12일
이귀철(李龜鐵)로 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를, 강사덕(姜思德)으로 우군총제(右軍摠制)를, 한규(韓珪)로 중군총제(中軍摠制)를, 연사종(延嗣宗)으로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를, 유양(柳亮)으로 동북면 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를, 유귀산(庾龜山)으로 안변도호부사(安邊都護府使)를, 유기(柳沂)로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를, 이화미(李和美)로 대호군(大護軍)을 삼았다.
- <<태종실록>> 2년(1402) 11월 13일
인선이 늦어지게 된 것은 사신들을 위무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인선과 편제를 마친 다음 마침내 진압군이 출격했다. 개경의 방비는 민제(閔霽)와 성석린(成石璘), 우인열(禹仁烈), 최유경(崔有慶) 등에게 맡기고 태종이 직접 출전하여 장병들의 사기를 높였다. 진압군을 보낸 태종은 개경 동북방의 금교역(金郊驛)에 머무르고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승리를 기다리는 태종에게 반갑지 않은 보고가 들어왔다. 이천우가 보낸 정예 기병 일백 기가 적에게 포착되는 바람에 전멸당하고 다음 날에는 이천우가 적과 싸우다가 참패하여 겨우 빠져나왔다는 것이다. 서전(緖戰)의 참패는 매우 불길했다. 서전의 승리로 기세가 오른 반란군이 철령을 넘는 날에는 개경이 바로 지척이었다. 반란군이 철령을 넘은 다음 한 차례만 승리를 거두면 새로운 반란이 양산될 것이었다. 반란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반역으로 비화(飛火)하지 못하도록 막으려면 어떻게든 철령을 넘지 못하도록 해야만 했지만 아무래도 괴로운 싸움이 될 것 같았다.
일대격전을 각오하던 태종에게 반란군이 일시에 궤멸했다는 놀라운 희소식이 닿았다. 그것도 회전(會戰)의 결과가 아니라 스스로 붕괴한 것이었다. 그날이 11월 27이었는데, 전말이 참으로 어이가 없다. 조사의의 반란군은 진로를 틀어 서북면 안주(安州, 현재의 평안남도 안주시)로 진출했다. 이때까지는 사기충천하여 성공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하다가 진압군 측의 장교인 김천우(金天祐)가 붙잡히게 되었다. 조사의를 위시한 수뇌부가 적정(敵情)에 대해 심문을 하였을 것인데, 김천우가 “진압군은 모두 4만에 달하며 너희들을 사방에서 포위하고 있으니 장차 어쩔 것인가.”고 말하자 반란군이 크게 동요했다.
그날 밤 반란군의 수뇌부 가운데 하나인 조화(趙和)라는 자가 도망치기 위해 군막(軍幕)에 불을 지르고 크게 소리치자 반란군이 일시에 혼란에 빠졌다. 공포에 질린 반군들은 장교들의 제지를 뿌리치고 달아나는 추태를 연출했는데, 살수(薩水, 청천강)를 건너다가 얼음이 꺼지는 바람에 수백 명이 한꺼번에 물귀신이 되기도 했다. 일시에 전력을 상실하고 황급히 안변으로 돌아가는 조사의를 따르는 병력은 겨우 50여 기에 지나지 않았으니 반란은 한바탕 허망한 꿈일 따름이었다. 전쟁을 공부하다보니 싸우기도 전에 궤멸하는 것을 적지 않게 보았지만 이때처럼 허무하게 붕괴된 사례는 유례를 찾기 어려울 지경이다. 게다가 스스로 일어난 군대가 어찌 그리 오합지졸일 수 있다는 말인가.
서전에서 잇달아 승리하여 기세등등했던 반군들이 포로의 말 한마디에 와해되었다는 것은 믿기 어렵지만, 김천우가 ‘4만에 달하는 대병력이 너희들은 포위했다’고 말한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태종이 전력을 집중했기 때문에 적어도 4만은 되었을 것이며 실제로 이천우를 위시한 장수들이 삼면에서 포위하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그 정도는 충분히 각오했을 터였다. 설마 아무런 싸움도 없이 반란이 성공하겠는가. 반란군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머지않아 훨씬 우세한 정부군과 맞닥뜨리게 될 것을 예상했을 것이었다. 포위당하는 것도 충분히 예상 가능했지만 그들은 이미 두 차례를 이긴 다음이었다. 특히 이천우를 결정적으로 격파한 다음이었는데, 포로의 말 한마디로 붕괴하는 것이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것도 최강으로 공인된 동북면의 병력이 말이다. 특히 가별치(加別赤)로 표현되는 사병집단은 최고의 전투력을 보유하였는데, 그들마저 싸우기도 전에 붕괴한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붕괴의 직접적 요인은 이성계의 부재(不在)였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반란군을 틀어잡고 승리를 확신시켜줄 리더가 존재했다면 포로의 위협 말 한마디에 의해 공포에 질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사의는 애당초 그럴 능력을 가지지 못했으니 기대할 것이 없다. 실제로 조사의는 반군들의 붕괴를 전혀 막지 못했다. 그러나 이성계가 있었다면 결코 그런 추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었다. 비록 보위를 빼앗긴 이빨 빠진 호랑이로 전락했다고 해도 이성계에 대한 동북면의 신뢰와 충성은 절대적이었다. 이성계가 노쇠했다고 하지만 존재하는 자체로 엄청난 용기를 심어줄 수 있지 않은가. 게다가 이성계는 정치력은 빵점이었어도 전쟁에 있어서만큼은 최고의 달인이었다. 몇 배 이상 우세한 적에게 포위를 당했다고 해도 패배하지 않을 방도를 처방할 수 있는 능력이 보유한 사람이 바로 이성계다.
또한 이성계의 존재는 진압군 측에서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하여 제대로 작전을 펴기 어렵게 만드는 효과를 줄 수 있지 않은가. 실제로 그런 근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승세를 탄 반란군이 스스로 붕괴한 것에서는 그때 이성계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결론 밖에 추출할 수 없다.
일단 이성계의 행적을 보자. 반란이 보고된 11월 5일에 이성계는 함흥으로 가서 조상의 묘소에 참배하겠다고 했다. 이성계가 철령을 넘었다고 보고된 것이 11월 8일이었다. 11월 9일에는 이성계가 역마(驛馬)를 타고 함흥으로 갔다고 기록된 이후 한동안 행적이 사라졌다. 갑자기 사라졌던 이성계는 9일이나 지난 11월 18일에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다.
태상왕의 거가(車駕)가 서북면(西北面)의 옛 맹주(孟州)로 향하였다.
맹주는 현재의 함경남도 맹산(孟山郡)으로 강제수용소로 유명한 함경남도의 요덕(耀德)과 어깨를 맞대고 있는 지역이다. 한동안 사라졌던 이성계가 맹주에서 발견된 것은 그때까지 반란군과 함께 했다는 증거다.
이천우(李天佑)가 유기(游騎, 유격전 용도의 날랜 기병) 백여 인을 옛 맹주(孟州)로 보냈으나, 조사의(趙思義)의 군사에게 잡히었다.
- <<태종실록>> 2년(1402년) 11월 19일
이천우(李天佑)가 조사의(趙思義)의 군사와 더불어 옛 맹주(孟州)의 애전(艾田)에서 싸워 패하여, 천우가 포위를 당하였다. 아들 이밀(李密) 등 10여 기(騎)와 함께 역전(力戰)하여 포위를 뚫고 나왔다.
- <<태종실록>> 2년(1402) 11월 20일
이성계가 맹산에서 발견된 직후인 19일과 20일에 진압군은 참패를 거듭했다. 특히 최고급 지휘관인 도절제사 이천우가 맹주의 애전에서 조사의에게 참패하여 겨우 10여 기 밖에 탈출하지 못한 것은 심각한 상황을 야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일주일 뒤에는 반란군이 스스로 붕괴되어 버렸다. 이미 이천우를 격파하였으니 포위망의 일각이 무너진 셈이었고 병력의 격차도 많이 줄어들었을 텐데 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거가(車駕)가 원중포(元中浦)에 머물렀다.
- <<태종실록>> 2년(1402) 11월 22일
반란군이 이천우 부대를 크게 격파한 직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성계가 황해도 연안 인근의 포구인 원중포에서 발견된 것이었다. 원중포는 사냥터로 이름이 높아 고려시대부터 왕들이 자주 사냥을 나가곤 했던 곳인데, 반란군에게 작전을 지도하고 사기를 높여주어야 할 이성계가 무엇 때문에 황해도의 바닷가에 나타난 것일까. 거가(車駕)가 임금의 행차로 해석되기 때문에 적지 않은 기록에서 당시 원중포에 나타난 왕이 태종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태종이 한가하게 사냥터에 나타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상왕 정종을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정종이 미치지 않고서야 반란군과 전투가 치열한 판국에 원중포에 행차할 리가 만무하다. 갑자기 원중포에 나타난 거가는 이성계가 분명한데, 아무리 보아도 정상적이지 못하다.
더욱 이상한 점은 실록에 11월 26일에 거가가 원중포에서 떠났다고 되어있는데, 바로 다음 날인 11월 27일에 태종에게 반란군이 스스로 자멸했다는 보고가 당도했다는 것이다. 또한 27일에는 태종이 ‘내관(內官) 노희봉(盧希鳳)을 태상왕의 행재소에 보내어 문안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것은 이성계의 신병을 확보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반란이 일어난 다음 태종이 이성계에게 사람을 보내었을 때는 ‘철령이 막혀 가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게다가 이성계가 철령은 넘어 안변으로 들어갔다는 기록은 있어도 다시 철령을 경유하여 돌아왔다는 기록이 없는 것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원중포에 나타난 거가를 이성계로 확신할 수 있겠다. 또한 왜 그 시간에 거기에 나타났느냐는 의혹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이유로 인해 이성계가 반란군과 분리되었을 개연성이 높은데, 이천우를 대파한 직후라는 것을 대입하면 아무래도 조사의에게 혐의가 간다. 이천우를 이긴 다음 조사의가 과욕을 부리게 되자 이성계와 갈등이 생겼을 소지가 크다. 반란군이 서전에 이어 연승을 거두게 된 것은 이성계의 지도에 의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표면적이라고 해도 직접 반란을 일으킨 조사의로는 매우 흔쾌하지 않았을 터였다. 여하튼 목숨을 걸고 반란을 일으킨 주역은 조사의가 아닌가. 크게 승리를 거두고 성공에 대한 확신이 서게 되자 계속 이성계가 이끄는 대로 끌려 다니며 하수인 노릇을 하는 것에 만족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터였다.
만일 반역이 실패한다면 태종이 설마 이성계를 죽이지는 않겠지만 조사의는 모든 것을 뒤집어쓰고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조사의의 시각에서 볼 때 자신은 밑져야 본전인 이성계에게 이용당하는 것에 불과했다. 기왕에 엎질러진 물이지만 이제라도 자신의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고 판단한 조사의가 행동에 들어가려 했다. 조사의가 자신의 친병(親兵)을 동원하여 유폐하는 방식 등으로 이성계의 행동을 제한하려하자 반군 사이에 심각한 내분이 발생하고 무력충돌로까지 발전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성계는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이성계가 보이지 않자 그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인 반군이 그대로 와해되었을 개연성이 크다. 상당수의 반란이 내분으로 인해 자멸했다는 것을 감안하고 실록에서 발굴한 증거를 대입했을 때 조사의의 반란도 일반적인 카테고리를 벗어나기 어렵다.
체포된 조사의가 개경으로 압송된 것은 12월 7일이었으며 11일 뒤인 12월 18일에 참수 당했다. 반란에 연루되었음에도 처형당한 자가 그리 많지 않았고 전모가 전혀 밝혀지지 않은 것은 이성계가 깊이 연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초반부에 제시한 증고로 이성계의 혐의가 너무나 명백히 입증된다. 실질적인 주모자가 임금의 부친이라는 것과 부자지간에 반역을 주고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상세히 기록할 수 있겠는가.
태상왕의 거가(車駕)가 평양부(平壤府)에 머물렀다. 태상왕이 말하기를,
“내가 동북면(東北面)에 있을 때에 국왕이 사람을 보내지 않았고, 맹주(孟州)에 있을 때도 역시 사람을 보내지 않았으니, 감정이 없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시자(侍者)가 말하기를,
“주상께서 전 정승(政丞) 이서(李舒)와 대선사(大禪師) 익륜(益倫)과 설오(雪悟)를 시켜 문안하게 하였사온데, 길이 막혀서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하니, 태상왕이 말하였다.
“모두 내가 믿고 중하게 여기는 사람이기 때문에 보낸 것이다.”
- <<태종실록>> 2년(1402) 12월 2일
평양에 머무른 이성계의 억지가 참으로 가관이다. 반란지역에 어떻게 사람을 보내어 문안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때 태종이 보낸 자가 “(당신이 일으킨 반란 때문에) 길이 막혀서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가지 않았느냐.”라고 공박하자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어조로 둘러대고 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그는 제왕의 위치에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심하게 말하면 정도전의 하수인에 지나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권력을 빼앗기게 되었는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다시 반역으로 응수한 이성계에게 그저 탄식할 따름이다.
끝까지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꼼수를 부렸다가 마지막 남은 것까지 몽땅 털려버린 이성계와 태종은 비교가 곤란하다. 정확하게 판단하고 벼락같이 행동하여 모든 것을 쟁취한 태종이야말로 위대한 군주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연산군(燕山君)보다 훨씬 윗길인 양녕대군을 지체고 세종에게 기회를 준 결단과 혜안에는 절로 탄성이 나온다. 태종이 아니었다면 조선이 롱런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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