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이참에 사문과 집에 한 번 다녀와야 할 것 같소 두령!"
화천옥과 신도기문, 정휴가 겨울이 더 깊어지기 전에 여행의 뜻 을 밝혔다
"그렇게들 하시오! 모두들 궁금해 할 것이오"
천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철공자는 어떻게 할 생각이오! 동생분도 오셨으니 같이 떠나는 게 좋지 않겠소?"
천호가 철도정과 철효민을 바라보고 의향을 묻자 철도정의 얼굴 이 구겨졌다
"나보다도 너희 둘은 어쩔거야?"
구겨진 얼굴로 핑계거리를 찾던 철도정이 유자추와 형일비를 바 라보았다
"네놈 집에 가는 일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우릴 걸고 넘 어지느냐? 우리야 어떻게 하든 네놈 일은 네놈이 알아서 할 일 이지!"
형일비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한 곳에 틀어 박혀 있는 것을 죽도록 싫어하고 이곳 흑수채에서 제 맘대로 술 퍼마시고 늦잠 자는 생활이 몸에 익은 철도정은 엄격한 자기 가문의 법도를 따라 생활하는 것이 생각만 해도 끔 찍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온갖 궁리를 하고 있는 중이다. 그것을 알아챈 유자추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너도 알다시피 점창과 공동은 여기서 너무 멀다! 가는데 만도 두 달이 넘게 걸리고 도중에 폭설이라도 만난다면 도착해서 인 사만 드리고 와도 내년 봄이다 그러니 여기서 겨울을 나고 내년 봄에 무슨 사단이 나도 날 테니 그때 합류할 생각이다!"
유자추가 시종 미소를 지으며 철도정의 표정을 살폈다. 유자추의 말과 함께 구겨졌던 철도정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펴지며 완전 히 득의에 찬 표정이 되었다
"그렇지? 아무래도 그러는 게 낫겠지?"
"그러든 말든 그게 네놈과 무슨 상관이냔 말이다?"
형일비도 철도정의 의중을 짐작하고 어떻게 나오나 장단을 맞춰 주었다
"이놈들아 내가 니놈 둘만 이곳에 남겨두고 마음이 안 놓여 어 떻게 발길이 떨어진단 말이냐? 그새 무슨 일이 일어나기라도 하 면 네놈들 같이 고지식한 놈들이 무슨 수로 대처를 하겠느냐! 당연히 이 형님이 남아서 너희 두 놈을 보살펴야지!"
철도정이 청산유수처럼 내 뱉었다
"기도 안 차는군!"
형일비가 헛바람을 내쉬었다
"누가 누굴 보살핀다는 거야 지금! 여기서 오빠보다 더 모자란 사람이 누가 있다고 하는 소리야!"
철효민이 쌍심지를 돋구었다
"어쨌든 난 못 간다! 백여우 너는 두령 일행과 함께 내일 떠나 라! 그리고 중도에서 헤어져 가문으로 돌아가라!"
철도정이 팔을 내저으며 꽁지를 말았다
"그러면 나도 안가! 혼자 돌아갔다가 할머님 역성을 두고두고 무 슨 수로 다 받아내란 말이야! 그러니 가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철효민이 씩씩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이놈의 기집애가 어디서 죽치고 있겠다는 말이야! 잔소리말고 넌 내일 떠나!"
"안가!"
"떠나라니까!"
"안간다니까!"
막상막하! 용호상박! 난형난제였다!
"어이구 내 팔자야!"
한참을 실강이 하다 씨도 먹히지 않자 철도정의 화살이 과녁을 바꾸어 날아갔다
"야 이놈! 자추! 너 내 동생 어쩔 거냐?"
"무슨 소리야?"
웃음을 참으며 한참동안 철도정 남매의 대결을 지켜보던 유자추 가 갑자기 날아오는 철도정의 뜬금 없는 질문에 얼른 웃음을 지 우고 답했다
"너 이놈! 며칠 전 내 생일날 아침에 우리 가문에서 불면 날아갈 까 쥐면 부셔질까 애지중지 키운 내 동생을 한참동안이나 안고 서있지 않았느냐?"
철도정의 한마디에 유자추와 철효민이 화들짝 놀라며 서로의 얼 굴을 쳐다보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 자식이! 지금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어디서 얼토당토 않은 얘기를 퍼뜨리고 있어!"
유자추가 정색을 했다
"흠흠! 그렇지? 얼토당토않고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지?"
철도정이 만면에 승리감이 가득한 웃음을 흘렸다
"이놈아! 그 날 아침 망루에서 망을 보던 산적들이 모두 목격하 고 온 흑수채가 다 아는 일이다! 오죽하면 내 귀에까지 들어오 겠느냐? 그러니 이제 어떡할 작정이냐?"
철도정이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와 함께 유자추와 철효 민이 날벼락을 맞은 듯 허둥거렸다
"그건 미쳐서 날뛰는 말에서 떨어지는 날 구해주려다 그런거지 무슨...."
말을 하던 철효민이 황급히 손을 들어 입술을 막았다. 엉겁결에 자기 입으로 모든 사실을 시인한 꼴이 되어버렸다
"어라? 난 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 망보던 놈이 말하길 아침부 터 깊은 산 속에서 두 남녀가 다정하게 안고 있길래 유심히 봤 더니 바로 너희들이라던데!"
철도정이 악마 같은 미소를 지으며 계속해서 몰아붙이자 철효민 이 기가 막혀 발을 굴렀다
'저 악마구리 자식!'
형일비가 쓴웃음을 지으며 혀를 내둘렀지만 자신도 흥미진진하 기는 남들과 마찬가지였다. 진소혜, 능소빈을 비롯한 다른 사람 들도 형일비와 비슷한 표정으로 현재의 상황을 지켜보며 애타게 다음 상황을 기다렸다. 단지 조화영만이 웃음기가 전혀 없는 진 지한 표정으로 눈빛을 빛내며 철효민과 유자추를 유심히 바라보 았다
"이제 어쩔거냐 이놈아? 온 산채가 다 알고 내년 봄이면 구파일 방과 사대세가도 다 아는 사실이 될텐데 어쩔거냔 말이다?"
이런 방면에 있어서는 천재적인 머리회전을 하는 철도정을 유자 추가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난 몰라! 앙앙...."
급기야 철효민이 밖으로 뛰쳐나가자 철도정이 의기양양하게 가 슴을 쭉 폈다
"십년 먹은 체증이 쑤욱 내려가는군!"
철도정이 트림을 커억 했다
"에라 이 자식아!"
형일비가 철도정의 뒤통수를 냅다 갈겼고 트림을 하다 목에 걸 린 철도정이 캑캑거리며 기침을 했다
"정말?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요 도정동생?"
조화영이 깊숙한 눈으로 철도정에게로 다가왔다
"아까 본인이 직접 실토하지 않았습니까!"
철도정이 덤덤히 말하다 무슨 낌새를 느꼈는지 얼른 고개를 들 었다
"왜 그러시오 누님? 누님이.... 누님이 월하노인역을 해 주시겠 소.? 아이고 누님! 제발 좀 그렇게 해 주시오! 그래서 저 기집 에 누가 좀 업어가게 해 주면 내 평생의 은인으로 모시겠소!"
철도정이 조화영의 손을 두 손으로 덥썩 잡고 무릎을 꿇으며 조 화영의 손에 고개를 파묻고 청승스럽게 주절거렸다
퍽-
"나가 죽어라 이놈아!"
이번에는 신도기문이 철도정의 어깨를 걷어찼다. 철도정이 털썩 옆으로 쓰러지면서도 하던 짓을 멈추지 않고 이번에는 조화영의 발끝을 잡고 다시 청승을 떨었다 급기야 실내에 일장대소가 터졌고 더 견디지 못한 유자추도 온 통 얼굴을 찡그린 채 밖으로 나갔다
안채에서 달려나와 뒤쪽 잡나무 숲에 당도한 철효민은 민망함과 부끄러움에 온통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발을 동동 굴렸다. 두 사 람만의 비밀이 될 줄 알았던 사실이 이제는 온 세상이 다 알게 되어 버렸다. 그 동안 흑수채에서 지내면서 그 사실을 떠올릴 때 면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뛰고 숨이 가빠왔다. 불가항력의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다 큰 처녀의 몸으로 사내의 가슴에 덥석 안겼으니 그 심정이 어찌 말로 형용할 수 있으랴!
언제나 품위를 잃지 않고 침착한 유자추를 볼 때마다 뛰는 가슴 을 진정시키느라 고생이 심했지만 유자추는 그 일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는 듯 무심히 행동하여 야속한 마음이 들기도 했 다. 그 이유가 주은비소저 때문임을 알았을 땐 자기도 모르게 가 슴 한쪽이 무너져 내림을 느끼고는 깜짝 놀라며 머리를 흔들었 다. 그러다 며칠 전 사랑하는 그녀를 위하여 찢어지는 가슴을 묵 묵히 다스리며 진정으로 그녀의 행복을 빌어 주며 떠나보내는 그 사내의 모습을 보고 온통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그 후로부터는 잠자리에 들 때면 말에서 떨어지기 직전 그 사내 의 품에 안겼던 장면을 떠올리는 것이 은밀한 즐거움이었는데 원수 같은 오빠 때문에 그것마저 빼앗겨 버렸다. 이제부터 당장 그 사람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조차 어색할 것이고 짖궂은 눈초 리로 자신들 두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는 시선들은 어 쩌란 말인가!
'어이구 원수!'
철효민이 발을 구르다 옆에 있는 나무 둥치에 괜한 화풀이를 했 다
"빚은 꼭 갚아 주고 말 거야 이 원수 덩어리!"
분을 삭히지 못하고 씩씩거리던 철효민이 나무숲 사이로 몸을 숨겼다 자신이 나온 조금 후 안채에서 벌레 씹은 표정으로 나오고있는 유자추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유자추 역시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렇게 잠시 안채를 돌아보며 머리를 흔들던 유자추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며칠 전 주은비가 떠나가던 길목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바깥채 한쪽 바위 위에 앉은 유자추가 망연히 산 아래를 내려다 보며 바위의 일부가 되어갔다. 필시 주은비를 생각하고 있음이 랴!
사내의 뒷모습에서 피어나는 고독의 냄새가 멀리서 지켜보고 있 는 철효민의 가슴에까지 생생히 전해졌다. 철효민의 가슴이 저미 는 듯 아파왔다. 그 아픔이 저 사내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것이 안스러워서 인지 아니며 다른 여자를 생각하고 있는 저 사내를 지켜보는 자신이 안스러웠기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후우-"
긴 한숨을 내쉰 철효민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무릎 사이 로 얼굴을 파묻었다
'이런 것이 사랑일까?'
만약 자신이 저 사내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라면 앞으로 정말 힘 든 나날이 될 것이다. 저런 사내는 쉽게 정을 주지도 않지만 또 쉽게 정을 끊지도 못한다. 어쩌면 평생을 가슴속에 그녀를 품고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 속을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을까? 사대세가의 한 곳에서 태어나 부러울 것 없이 자란 자신이 난생 처음 주은비라는 그 아가씨가 한없이 부러웠다
내일 떠나는 두령 일행을 따라 떠나야겠다! 갈림길까지 열흘은 동행할 수 있다. 그 동안 진소혜와 능소빈 두 여자에게서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겠다. 그것은 할머니도 어머니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지금으로선 저 사내의 가슴을 눈꼽만큼이라 도 열 자신이 없다. 그럴려고 했다간 오히려 저 사내의 가슴은 조가비처럼 완벽하게 닫혀버릴 것 같다.
내년 봄이 되면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쯤이면 많이 나아져 있겠지. 그때는 지금처럼 뒤에서 지켜만 보지 않을 것이다. 철가 장의 위명은 여자들로부터라는 말을 절실히 실감하게 해 줄 것 이다!
철효민이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바위처럼 굳은 유자추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궁상은 내년 봄까지 뿐이에요! 나는 당신처럼 그런 멍청한 사랑 은 하지 않는답니다!"
철효민이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첫댓글 ㅎ늘 감사 히 잘읽고 갑니다
즐감 하고 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