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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9. 묵상글 (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 사랑의 타성과 사랑의 갱신.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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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9.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사랑의 타성과 사랑의 갱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오늘 독서는 여호수아기의 마지막 장입니다.
어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얼마나 좋은 것을 많이 베풀어 주셨는지
장황하게 얘기한 여호수아는 이제 자기 삶과 역할을 마감하면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섬길 것인지 다른 신을 섬길 것인지 선택하라고,
그것도 오늘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택하라고 촉구합니다.
저는 오늘 여호수아의 촉구를 들으면서
‘오늘 선택’하라는 말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그런데 선택하라는 것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진정 선택의 자유가 있는 것입니까?
말로만 선택이지 실제로는 어찌해야 할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그런 면이 있고 또 그래야 우리 인간 입장에서는 마땅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분명 우리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그 자유의지로
당신을 선택할 수도 있고 떠날 수도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종처럼 비굴하게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자유가 있는 존재로서 사랑으로 섬기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귀인이 되게 하시고 당신은 귀인의 사랑을 받고자 하심입니다.
우리도 사랑을 받는다면 종의 사랑보다 귀인의 사랑을 받길 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선택하라고 촉구하는 것은 여호수아입니다.
그래서 이것의 의미는 다릅니다.
제 생각에 이것은 너희가 다시 선택하라는 말이고,
부모와 조상의 선택에 떠밀려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너희의 선택으로 새롭게 다시 섬기기 시작하라는 것일 겁니다.
예를 들어 부모의 선택으로 신자가 되거나 부모의 권유로 수도원에 들어온 경우
자녀들이 성인이 되어 성당을 멀리하거나 수도원 성소의 갈등을 겪게 되는데
저는 이것이 오히려 잘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복음의 비유에서처럼 ‘예’라고 하고는 포도밭에 가지 않은 아들보다
‘싫다’라고 했지만 뉘우치고 포도밭에 가는 아들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부모의 선택, 조상의 선택이 아니라 자기의 선택이어야 하고,
그것은 자기의 자유로운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오늘’이라는 말을 강조합니다.
과거 조상들이 어떠했어도 오늘 네가 새로이 결정하고 선택하라는 것이고,
또 나의 결정으로 하느님을 섬겨왔더라도 오늘 다시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이 경우, 오늘 선택하라는 것의 의미는
사랑의 타성을 깨는 의미이고 사랑을 갱신하는 의미입니다.
이는 한번 결혼했으니 사랑 없이도 남편과 아내로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아내와 남편을 매일 다시 선택하고 새롭게 사랑하기로 마음을 먹음으로써
타성적으로 사랑하지 않고 오늘 다시 사랑하기 시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뭐든지 갱신하지 않으면 타성에 젖기 쉽기에
세례를 갱신하고,
서약을 갱신하고,
혼인을 갱신하라는 일깨움을 여호수아로부터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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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9.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더 큰 사랑을 위하여”(Maiorem caritatem)
축하합니다.
오늘은 우리 연합회의 창립자인 성 베르나르도 똘로메이 대축일입니다. 오늘 대축일을 기념하며, 특강을 준비하였으나 그냥 다소 긴 강론으로 대체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위하여”(Maiorem caritatem), 이는 베르나르도 똘로메이의 시성 교황교서 [사도좌 편지]의 제목입니다. 이 구절은 바로 오늘 <복음> 중에 나오는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씀입니다.
“더 큰 사랑”이 진정 어떤 사랑인지, 성인의 삶이 어때했는지는 교종 베네딕도 16세께서 성인의 시성식 때 하신 <강론>에서 잘 말해줍니다.
다음은 시성식 때 하신 교종의 강론 말씀 중의 일부입니다.
“베르나르도 똘로메이 안에서, 기도와 노동을 통하여 사랑의 열매가 열렸습니다. 그의 존재는 성찬례와 같았고, 그의 삶은 형제들을 향한 겸손한 봉사로 이끄신 하느님 관상에 완전히 바쳐진 삶이었습니다. ~그는 1348년 큰 페스트가 발생했을 때, 수도승임에도 불구하고, 병에 전념된 그의 수도승들을 돌보기 위해(시에나의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 머물기 위해) 몬떼 올리베또의 고독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역시 전염병의 희생물이 되어, 사랑의 확실한 순교자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성인의 이 모범으로부터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된 삶으로, 최고의 희생으로 준비된 사랑으로, 그리고 형제들에게 봉사하는 삶으로, 우리의 신앙이 인도되도록 우리에게 초대장이 도착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두드러진 표현이 있습니다. 곧 ‘기도와 노동’, ‘형제들을 향한 겸손한 봉사’, ‘하느님 관상에 바쳐진 삶’, ‘사랑의 순교자’,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된 삶’, ‘희생으로 준비된 사랑’, ‘형제들에게 봉사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분리되지 않음을 봅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조화는 결코 이론적인 숙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애덕적인 삶의 실존적인 실행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봅니다. 또한 이러한 애덕의 삶은 무엇보다도 기도와 더불어 실현된 삶임을 봅니다.
성인께서는 <편지 1>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덕들의 어머니는 애덕(사랑)이며,
동시에 이 애덕(사랑)을 발견하고 지키는 것은 기도입니다.”
성인께서는 모든 덕들이 ‘사랑’에서 태어나며, 사랑에 모든 덕들이 달려 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발견하고 지키는 것이 바로 ‘기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그렇게 기도하셨으며, 당신에게 있어서 ‘기도’와 ‘삶’은 서로 다르지 않은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곧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차고 넘쳐서 ‘봉사’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는 <편지 39>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애덕(사랑)은 늘 봉사에 봉사를 더하는 모습으로 자기를 들어냅니다.”
이는 ‘사랑’은 결국 형제들에 대한 ‘봉사’의 모습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곧 형제에 대한 봉사로 드러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닌, 죽은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지금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지금 내가 형제를 사랑하고 있는가 보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성인께서는 실재로 페스트로 죽어가는 형제들에게 봉사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의 봉사였습니다. 그야말로 사랑의 순교였습니다. 그리하여 “더 큰 사랑”을 실행했습니다. 진정,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라는 말씀을 온 몸으로 사셨습니다. 성인께서는 참으로 ‘애덕의 부추김으로 고무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편지 8>에서 이렇게 말한다.
“애덕의 부추김으로 고무된 사람은 ‘소유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떠나, 천상공동체의 지극히 거룩한 사랑을 통해서 모든 선한 것들을 얻습니다. 이 사랑에 의해 모든 것이 존재하도록 만들어졌고, 이 사랑을 통해 사람들은 아름다운 방식으로 하느님이 됩니다. 만일 당신이 땅을 사랑한다면, 당신은 땅입니다. 만일 당신이 하늘을 사랑한다면, 당신은 하늘입니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당신은 하느님입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이 아름다운 방식으로 하느님이 됩니다.” 사랑으로만이 우리는 하느님이 되어 갑니다. 오로지 사랑으로만이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되고, 하느님이 되어 갑니다. 그토록 아름다운 방식으로!
그렇습니다. “만일 당신이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당신은 하느님입니다.”
그런데 성인의 이런 사랑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그 뿌리는 무엇이었을까? 대체, 무엇이 세상에서 이미 명예롭게 살고 있었던 그를 외딴 산골 아코나로 떠나가게 했을까? 곧 성인의 수도승적 체험이 지닌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특성은 무엇이었을까?
이를 안토니오 다 바르가의 <연대기>에서는 이렇게 전해줍니다.
“성령의 영감으로, 심오한 내적 열망에 사로잡혀 시에나 사람들인 고귀한 친구들 파트리치가의 파트리치오 및 프란치스코 그리고 암브로죠와 함께 살면서 밤낮으로 천상 것을 열망하였다. 그들은 함께 하찮은 세상사에 등을 돌리고 뇌성벽력의 하느님(욥 37,5 참조)을 섬기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 하였다.”(연대기 2)
또 같은 책 또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도 전해줍니다.
“그들은 고독 속에서 마음의 통회와 기도에 몰두하기를 뜨겁게 갈망하였다. 그래서 혹자는 숲 속에서, 혹자는 작은 경당에서, 또 다른 이들은 외딴 장소에서 침묵과 한적함을 찾았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홀로 기도하며 하느님께 순결한 손을 들어 올렸고, 자기 영혼의 내밀한 기도를 주 하느님 앞에 쏟아놓았던 것이다.”(연대기 11)
여기서 드러나는 <첫 번째 특성>은 요한 톨로메이와 그 동료들은 지상의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갈망하며, 특히 ‘참회’의 삶을 통하여 신적 지혜를 추구하였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억누를 수 없는 ‘관상’의 열망과 이와 내적으로 깊이 연관된 ‘참회’의 생활을 추구했다는 점입니다. 곧 끊임없는 회심과 하느님께로 끊임없이 되돌아가려는 열망, 그리하여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 머물기 위해 모든 세상적 삶의 양식과 모든 형태의 우상을 포기하기, 바로 이것이 요한 톨로메이로 하여금 아코나로 물러가게 한 요인이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서관 연대기>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을 이렇게 전해줍니다.
“그들은 거기에 살면서 참으로 비천한 참회의 삶을 살았다. 흔히 쓰는 표현으로는 은수자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들이 지녔던 이 ‘위의 것’을 갈망하며 사는 ‘참회’의 영성은 나중에 아렛조의 귀도 주교는 몬떼 올리베따또 수도원이 최초로 교회법적인 인정을 받은 사실을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사료인 <창설 인가서>(1313년 3월 26일)에서, 이들의 삶을 일컬어 “참회의 마음가짐 안에서 항구하게 머물렀다.”라고 하는 표현에서 다시 확인됩니다.
또한 현대의 역사 연구가들은 “연합회 역사 최초의 사료들에 나타난 올리베따노 영성들”을 다루면서, 창설자들의 카리스마에 대한 증언들의 첫 번째 사항으로 바로 이 ‘관상생활’의 선택을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창설 인가서>의 전문에는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간택된 이들이 더 고요히 그들을 간택하신 분의 관상에 항구할 수 있게 그들은 스스로를 하느님께 봉헌하고 재물을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 내어 놓았다.”
그러니 그들의 형제간의 친교와 세상과의 친교도 하느님과의 친교인 ‘관상’에서 흘러나온 자연스런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종 베네딕도 16세께서는 그의 시성식 강론에서,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베르나르도 똘로메이) 그의 삶은 형제들을 향한 겸손한 봉사로 이끄신
하느님 관상에 완전히 바쳐진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베르나르도 똘로메이의 시성 청원관이었던 레기날도 그레고리오는 성인의 생애를 이렇게 정리하였습니다.
“그의 생애는 그의 수도승들에게 거룩한 삶과 영웅적인 덕을 실천하는 모범을 남기셨고,
다른 이들을 위한 봉사와 관상에 바쳐진 삶이었다.”
오늘 우리는 그분들 안에 일으키신 수도승적 동일한 체험을 우리 안에도 일으켜주시기를 청하면서, 창립자들의 마음을 닮아가기를 청했으면 합니다. 성령의 부추김으로 시작되었던 초대 창립자들의 모범을 우리의 가슴 깊이 품고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곧 언제나 ‘위의 것’에 마음을 두는 ‘관상생활’과 ‘참회생활’과 형제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랑과 친교’를 살아가는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특성>은 이러한 ‘위의 것’에 갈망을 둔 참회생활, 곧 똘로메이와 그 동료들의 회심의 삶은 이미 시에나 시 안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곧 동료 인간들과의 동행으로 시작되었고, 그 삶의 진정성도 역시 사람들 가운데서 증거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형제와 이웃에 대한 사랑은 베르나르도 똘로메이 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곧 <상서관 연대기>에는 복자 베르나르도 똘로메이가 시에나의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페스트에 걸려 죽어가던 80여명의 형제 수사들을 영적으로 또 육체적으로 돌보다가 같은 병에 걸려 돌아가셨음을 전하면서, 이를 그리스도의 형제 사랑에 비유하여 “마지막까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셨다.”는 <요한> 13장 1절의 말씀으로 적고 있습니다.
이러한 두 가지 특성을 오늘 독서기도 <제2독서>에서 “복자 베르나르도의 생애”에서 스카르피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베르나르도의 영성은 바로 천상적 생활과 지상적 생활이 만나 조화를 이루는 곳에 있다.”
마지막으로, <상서관 연대기>에서 창립자들의 아코나에서의 생활을 말해주고 있는 부분을 읽어드리면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거룩한 삼위일체의 진정한 흠숭자요 연인인 이 세 명의 공경 받을 분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모여, 바로 이 황량한 곳의 침묵 속에서 붙박혀 살았으니, 전에는 숲이었고 들짐승들이 살던 이곳은 그들에 의해 이제 기도하는 집, 천사들이 사는 거처로 변모할 터였다. 이 숲 근처, 산을 둘러싸고 그리 넓지 않는 땅 몇 평의 작은 흙 오두막집 한 채가 있었으니, 바로 여기서 그들은 매우 비천한 고복, 곧 통상 쓰는 말로 한다면, 은수복을 입고 살았던 것이다. 붙박혀 살던 이곳에서 이 거룩한 사부들은 손과 마음의 단순함으로, 영혼의 가난함으로, 목마름과 굶주림으로, 추위와 헐벗음으로, 많은 밤샘과 기도로 하느님을 섬겼으며, 먹고 입을 것을 충당하기 위해 몸소 고된 땀을 흘려 일했던 것이다. 그들은 또한 사도들의 모범을 따라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했다. 그들이 무엇보다도 노심초사했던 것은 법으로 정해진 성무일도의 시간을 빼먹는 일이 없도록 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손수 단순한 흙벽돌로 지은 경당에 모이곤 했으니, 거기서 오롯한 신심과 영의 열정으로 성무일도를 바쳤으며, 찬가와 영가로써 주님께 마음으로 노래 불러 드렸던 것이다. 아직 그리스도 안에서 입문자였던 그들은 오직 성령만을 스승으로 모시고 이 모든 것을 열정적으로 실행하였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 19,14)
주님!
어린이같이 아래에 있어, 모두를 받아들이는 바다가 되게 하소서.
아래에 있기에, 떠받들고 존경하게 하소서.
어린이처럼, 이해하지 못해도 신뢰로 받아들이게 하시고,
아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약하기에, 당신께 의탁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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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9.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어미 품에 안긴 젖 뗀 아기”
지금은 구역 반모임을 하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가정방문을 하고 가정축복을 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집을 개방한다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깁니다. 속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마음을 이해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정이 있던 예전이 그리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반모임 미사에 가면 어린이들은 따로 한 방을 차지하고 자기들만의 놀이에 열중합니다. 어른들‘미사에 시끄럽게 굴지 말라.’하면서 특혜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미사참례는 어른이나 하는 줄로 압니다. 시끄러우면 좀 어떻습니까? 좀 더 거룩한 분위기에서 미사봉헌을 하기에 앞서 어린이들에게서 거룩한 미사참례의 기회를 빼앗지 않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이“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19,1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들을 통해 그들의 순수성을 배우려면 그들 곁에 있어봐야 합니다. 진득하게 오래 견디지는 못할지라도 ‘기도손’한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진정, 어린이들로부터 하느님의 은총을 빼앗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레지오 마리애 회합에는 할머니가 데려온 어린아이도 참석합니다. 모임을 갖는 동안 말썽 없이 기도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헤어질 때는 두 손을 가지런히 배꼽에 모으고는 허리를 90도로 굽혀 인사합니다. 예수님이 어디 계시냐고 하면 십자고상을 가리키고 성모상을 바라보며 성호를 그을 줄도 압니다. 어린이는 어른과 달리 자기에게 주어지는 것을 계산하지 않고, 머리 굴리지 않으며 잘 받아들입니다. 어린이들은 부모님이 가르쳐주는 것을 금방 따라 합니다.
그러므로 어려서부터 기도의 분위기를 잘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어미 새의 소리를 듣고 노래를 배우는 어린 새들과 같이 어린 아이들도 세상에서 그들을 가르치기로 되어 있는 아주 열심한 부모 곁에서 하느님 사랑의 숭고한 노래와 덕행의 지식을 배워야 합니다”(성녀 소화 데레사). 또한 우리도 어린이가 부모에게 온전히 의지하고 의탁하는 단순함을 배워 자기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선뜻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어린이가 부모의 가르침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듯이 우리도 주님의 가르침을 그렇게 받아들이고 살아갈 때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어미 품에 안긴 젖 뗀 아기”(시편131,2) 같이 주님의 품에 안겨 평온함을 누릴 수 있길 희망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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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9.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여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 사이에 그런 중재를 잘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수송아지로 우상을 만들 때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벌하려고 하였을 때입니다. 모세는 하느님께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데려다가 광야에서 모두 벌하신다면 다른 신들이 하느님을 우습게 여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이야기를 듣고 이스라엘 백성을 벌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럴 때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와 메추라기는 질린다고 불평했을 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불뱀’을 내려서 이스라엘 백성을 벌하셨습니다. 그때도 모세는 하느님께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해 주기를 청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구리뱀’을 만들어 높이 들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모세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사이에서 ‘밀당’을 잘하였습니다.
지나치면 안 되겠지만 ‘만남’에도 적당한 밀당은 필요하다고 합니다. 전화 빨리 받기, 문자 바로 보내기는 필요하지만 가끔 여유를 가지고 전화하거나 문자 보내는 것도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생각할 시간을 가지게 된다고 합니다. 만날 때 마다 비용을 혼자서 지불하는 것도 좋겠지만 가끔은 상대방이 비용을 낼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좋다고 합니다. 혼자서 비용을 모두 계산하면 처음에는 고마워 하지만 나중에는 당연하게 여길 수 있다고 합니다.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끔은 상대가 나를 이해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것도 필요하다고 합니다. 만남은 일방통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남은 쌍방통행일 때 더욱 깊어진다고 합니다. 100%로 완벽하게 이해하고, 이해받을 수 있는 만남은 없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적당한 ‘밀당’은 서로를 이해하는데 필요하다고 합니다. 성격이 급한 저는 그런 ‘밀당’에는 소질이 없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밀당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여호수아와 그 가족은 오직 하느님만을 섬기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하느님만을 섬길 것인지 다른 이방의 신을 섬길 것인지 선택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은 이렇게 답하였습니다. “다른 신들을 섬기려고 주님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우리에게 없을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집에서 데리고 올라오셨으며, 우리 눈 앞에서 이 큰 표징들을 일으키신 분이 바로 주 우리 하느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여호수아와 같이 오직 하느님만을 섬기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만을 섬기겠다고 한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증표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인이 될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다. 그래서 이것은 너희가 너희 하느님을 부정하지 못하게 하는 증인이 될 것이다.”
세상의 일에는 밀당이 어느 정도 필요합니다. 성직자와 수도자, 성직자와 평신도의 관계에도 선을 넘지 않는다면 적당한 밀당은 사목에 도움이 됩니다. 매일 똑같은 날씨보다는 4계절이 있는 것이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합니다. 매일 맑은 날 보다는 때로 흐린 날, 비오는 날도 있으면 인생이 따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에는 밀당은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제자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물도, 배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부자청년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부자청년은 슬퍼하며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가진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밀당이 아니고 선택입니다. 그 선택에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런 결단은 순수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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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9.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하늘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라는 말씀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또는 다른 교회 강의안에서 혹은 영적인 서적 안에서 들었을 것입니다.
어린이와 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몸은 어른인데 철이 없는 어른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외국에서 언어 공부할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공원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공원에 의자에 앉아 오늘 하루의 힘겨움을 달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이 나이에 다른 나라 말을 배우는 게 참 어렵네.’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주인과 함께 개 한 마리가 지나갔습니다. 개는 주인이 이리 오라면 오가 가라면 가는 똑똑한 개였습니다. 그 개를 보니 제 신세가 더욱 한심했습니다. 왜냐하면 개가 알아듣는 말을 저는 못 알아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유치원 아이들로 보이는 무리의 아이들이 우르르 고원으로 몰려왔습니다. 저마다 뛰기도 하고 흙장난을 치며 친구들과 놀았습니다. 아이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똑같이 예쁩니다.
그러던 중 한 아이가 넘어졌습니다. 멀리서 보고 있던 제가 느낄 정도로 세게 넘어졌습니다. 이내 울 줄 알았던 꼬마는 옷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울지 않고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았습니다. 이내 선생님으로 보이는 여성에게 성큼성큼 걸어갔고 선생님의 품에 안기자마자 서럽게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 들어가는 하늘나라는 주님께 의지하는 사람이 들어가는 나라라는 것을 말입니다. 아프고 힘들 때 그분의 품에 안겨 눈물 흘릴 줄 아는 사람이 들어가는 나라. 그리고 그런 사람이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주님께 의지하는 사람, 나에게 도움을 주실 분은 주님 한 분뿐이라고 고백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그날의 꼬마에게서 배웠습니다.
비상등
외부 특별 강연이 있어서
약속 시간에 맞춰
부지런히 차를 몰았습니다.
어떤 터널에 들어섰는데
갑자기 앞에 차가
비상들을 켰습니다.
앞에 차뿐만 아니라 그 앞차도, 그 차의 앞차도
옆 차도 옆 차의 앞차도 켰습니다.
사고가 있었던 것입니다.
터널 안은 온통 노란색 비상등으로 변했습니다.
저도 비상등으로 뒤차를 안내했습니다.
터널을 빠져나오며 생각했습니다.
위험한 일을 서로 알리는 우리 모습이
서로에게 따뜻함을 전하는 것 같다고 말입니다.
위험을 서로에게 알려주세요.
덜 위험할 수 있도록
그 위험을 잘 비켜 가도록 비상등을 밝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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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9.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배우 윤여정 씨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와 나이에 대한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내가 처음 살아 보는 거잖아. 나 67살이 처음이야.”
윤여정 씨의 말처럼, 누구에게나 지금 자기 나이는 처음입니다. 그래서 낯설고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지금 나이를 생각하지 않고 과거의 나이만 떠올린다는 것입니다. “내가 왕년에는 말이야….”라고 시작하는 말로 과거에만 머물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과거의 나이를 통해 다른 이를 판단하고 때로는 잘못되었다면서 단죄합니다. 이 모든 것이 지금 자기 나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입니다.
처음 살아 보는 자기 나이, 이 나이를 기쁘게 받아들이려면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이가 들어 힘이 없다고, 나이가 들어 정신도 예전 같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나이 들면 어쩔 수 없다면 지금 나이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합니다. 그래서 과거의 나이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많은 어른이 이렇게 과거의 나이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절대로 과거의 나이를 바라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히려 더 나이 먹기만을 바라는 사람이 있지요. 과거에 하지 못한 것보다는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을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누구일까요? 바로 어린이입니다. 어린이는 과거의 나이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바로 지금의 나이만을 바라보며 미래를 꿈꾸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어린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하늘 나라가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면, 우리는 열심히 어린이처럼 살아야 합니다. 외모를 어린이처럼 꾸미면 될까요? 아니면 말투를 어린이처럼 하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대한 미련을 간직하지 않으며 지금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어린이처럼,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어린이처럼, 이것저것 재면서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드러내지 않는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을 잘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따라서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이를 찾는 사람만이 미래에 할 수 있는 것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주님께서 주신 처음 살아 보는 지금의 나이를 기쁘게 받아들였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삶이 주님의 훌륭한 선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이를 떠나 지금의 ‘나’를 더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에 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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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것이 아닌, 우리가 함께하는 사람이다(스티브 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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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9.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린이 예찬
-하늘 나라의 삶-
어제는 결혼과 이혼, 독신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을 나눴고, 어제에 이어 오늘은 어린이에 대해 나눕니다. 강론쓰는 이 시간, 어린이같은 마음으로 책상앞에 앉아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참으로 사랑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와 손을 얹어 기도해 달라고 청했을 때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자 예수님의 즉각적 반응입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이어 생각나는 매3주간 저녁 성무일도시 두 번째 후렴과 이어지는 시편입니다. 이런 시편을 찬미노래로 바칠 때의 기쁨은 이루 형용할 수 없습니다. “어린이와 같이 되라, 그렇지 않고는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후렴에 이어지는 사랑스런 시편 131장입니다.
“주여, 잘난체하는 마음 내게 없삽고,
눈만 높은 이몸도 아니오이다.
한다한 일들을 좇지도 아니하고,
내게 겨운 일들은 하지도 않나이다.
차라리 이 마음은 고스란히 가라앉아,
어미 품에 안겨 있는 어린이인 듯,
내 영혼은 젖 떨어진 아기와 같나이다.
이스라엘아, 이제로부터 영원까지,
주님만 바라고 살아가라.”
끊임없이 바치는 이런 찬미의 은총이 주님을 닮아 날로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 되게 합니다. 자만심이나 자부심은 추호도 찾아볼수 없는, 순수하고 단순하고 열려있는, 신뢰심 가득한 겸손한 어린이 같은 영혼입니다. 요즘은 노인들은 많은데 어린이보기가 하늘에 별따기처럼 참 힘듭니다. 예전 어린이들 가르칠 때가 생각나 보관중인 옛 일기장을 들춰 봤습니다. 누렇게 바랜 공책은 글씨도 희미했습니다. 정확히 47년전 저는 28세 청년 교사로 12세 5학년 아이들을 가르칠 때 일기장입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치열했던, 가열찼던 초등학교 교사시절이었습니다.
지금 저는 75세, 당시 12세 아이들은 지금 59세가 되었고, 이때 맡았던 학급 인원은 80명 이상이었습니다. 1970년대 후반, 온통 어린이들과 함께 지냈던 8년간의 교사시절은 저에게 가장 행복한 때 였습니다. 지금은 하느님이 제 사랑 전부이지만 그 당시는 아이들이 제 사랑 전부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어린이들을 사랑했듯이 저도 그러했습니다. 일기장은 물론 글씨도 희미하게 바래있었습니다. 두 편의 동시를 발견하고 기뻤습니다.
-‘아이들이 떠나간 반 교실은
썰물이 씻어간 바닷가
먼 파도에 귀를 모으며 나는
귀여운 조개를 줍는다
커텐 주름에서, 꽃병밑에서, 고운 향기로 살아오는
맑은 웃음들,
“저요, 저요, 저요”
고사리 손의 물결속에 방실방실 떠오르는
작은 얼굴들
눈을 감으면 끝없는 물결소리
내 작은 인어들은 어느 수평선을 가고 있을까?
아이들의 옷깃을 고치듯
비뚜러진 책상을 바로 놓는다’-1976.9.15.
또 하나의 동시입니다. 아마 교재준비후 7시 넘어 퇴근할 때의 심정일 것입니다.
-‘텅비어 있는 교실
창을 통해 어둠이 들어오면
마음의 창도 빛을 잃는다
유리창 안에 들어왔던 하늘도
초롱초롱 빛나던 아이들의 웃음소리, 말소리도 흡수해버린
교실은 말이 없다
밤이 무척 쓸쓸하고 무섭지만
아이들의 꿈을 꾸면 즐거워진다
내일을 생각하면 힘이 난다.’-1976,9,18
이때의 추억이 지금도 산책중 동요를 부르도록 부추깁니다. 지금도 즐겨부르는, 해방후 가장 먼저 많이 불렸다는 ‘새나라의 어린이’입니다. 새나라의 어린이는 하늘 나라의 우리로 생각해도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어린이이기 때문입니다.
“새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잠꾸러기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새나라의 어린이는 서로서로 돕습니다.
욕심쟁이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나라
새나라의 어린이는 몸이 튼튼합니다.
무럭무럭 크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나라.”
해방후 새나라 건설의 열기를 느낄 수 있는, 지금도 즐겨 부르는 동요입니다. 어떻게 찾은 나라인데... 어제 원장수사에게 부탁의 메시지와 더불어 태극기 선물도 받았습니다.
“내 솜씨로는 안되니 가능하면 태극기 A4용지 크기로 출력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집무실 십자고상밑에 붙여놓고 애국심愛國心을 진작振作시키며 독립운동獨立運動하는 마음으로 살려구요!”
광복 78주년을 지났지만 진정한 독립은 아주 멀었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마음 역시 어리이같은 순수한 마음의 발로라 믿습니다. 오늘 강론은 어린이 예찬입니다. 아무리 나이 들어 늙어도 마음은 순수한 어린이들입니다. 다시 이런 어린이 마음을, 동심童心을 살아야 하겠고, 참으로 예수님처럼 어린이들을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칼릴 지브란의 아이들에 대해서 잠언 역시 깊고 아름답습니다.
“그대의 아이들은 그대의 것이 아니다
아이들이란 스스로를 그리워하는
큰 생명의 아들딸이니
그들은 당신을 거쳐 왔을 뿐
그대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또 그들이 당신과 함께 있을지라도
그대에게 소유된 것이 아니다.
그대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수는 있으나
그대의 생각까지 주려고 하지 마라.
아이들에게는 자기만의 사고가 있으므로.
그대의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을 줄 수 있으나
영혼까지 가두려고 하지 마라.
아이들의 영혼은 그대가 결코 찾아갈 수 없는
꿈에서 조차 갈 수 없는 내일의 집에 살고 있으므로.
그대가 아이들과 같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좋으나
아이들을 그대와 같이 만들려고 하지는 마라.
생명은 뒤로 물러가지 않으며 결코 어제에 머무는 법이 없으므로,”
예수님의 어린이들 사랑 깊이에는 이런 어린이관이 자리하고 있음을 봅니다. 비단 어린이뿐 아니라 동심을 살고 싶은 우리들 하나하나 영혼에 대한 묘사처럼 생각됩니다. 제1독서 여호수아 이름은 그대로 예수입니다. 두분 다 어린이같은 영혼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며 하늘 나라를 사셨던 분입니다. 어제에 이어 계속되는 여호수아의 마지막 열정과 순수를 다한 연설입니다. 여호수아의 연설에 주님을 섬길 것을 약속하는 백성들이 순수한 어린이들 같습니다.
“이제 너희는 주님을 경외하며 그분을 온전하고 진실하게 섬겨라. 누굴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
이구동성, 이에 대한 한 목소리로, "우리도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거듭 응답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그대로 순수한 영혼의 어린이들같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경외하며 섬기듯, 예수님을, 이웃 형제들을 겸손한 사랑으로 섬길 때 동심도 활짝 피어날 것입니다. 마지막 여호수아의 죽음이 장엄합니다.
‘이런 일들이 있는 뒤에 주님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죽었다. 그의 나이는 백 열 살이었다.’
가장 확실한 사실은 언젠가 죽는 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죽음을 눈 앞에 환히 두고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 때 어린이같은 순수한 영혼에 하늘 나라의 삶일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어린이같은 마음으로 하늘 나라 천국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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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9.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어린이와 같은 사람>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 19,14)
다가오시는 분께
다가가는 사람
함께하시는 분과
함께하는 사람
믿으시는 분을
믿는 사람
바라시는 분을
바라는 사람
사랑하시는 분을
사랑하는 사람
품으시는 분께
안기는 사람
내주시는 분께
드리는 사람
이끄시는 분을
따르는 사람
닮게 하시는 분을
닮아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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