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0일 주한 정치고문 랭던은 미국무부의 한국 신탁통치안 계획을 공식적으로 반박하는 정책안을 국무부에 제출했다.
랭던은 곧 귀국할 김구 집단을 활용하여 정무위원회를 조직하고 이를 미군정 통제 하의 과도정부로 발전시킨 후 최종적으로 선거를 통해 정부를 수립한다는, 이른바 '랭던 정무위원회' 안을 제출한 것이다.
하지의 24군단은 매우 위압적인 태도로 한반도에 진주하였다. 그가 진주를 앞두고 국무부로부터 받은 지침은 '조속한 시일 내에 4대국에 의한 국제신탁통치의 실시'와 이를 위한 '소련군과의 협조'였다. 그러나 하지가 맞닥뜨린 것은 한국 내의 정치적 열기와 '빠른 독립'의 요구였다. 일본군의 항복 접수와 소련에 대한 보루의 구축을 점령 목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하지는 조직적인 좌파세력의 존재와 그에 비해 인기도 없는 보수세력의 역관계를 보면서 점령 목적 자체가 위태롭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를 비롯한 미군정은 대소협력을 통한 신탁통치안이 전혀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하고 국민적 지지기반을 가진 우파를 중심으로 정계를 통합하고 이들을 통해 과도기적 정부를 세울 계획안을 마련하였다. 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10월 15일 도쿄의 정치고문 앳치슨의 전문, 10월 16일 하지의 비망록, 11월 13일 맥클로이의 서한이 국무부로 보내졌다. 그리고 하지 구상의 결정판인 랭던 정무위원회안이 국무부로 전달됐다.
랭던은 신탁통치안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해방된 한국을 한 달 동안 관찰하고 이전에 한국에서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결과, 본인은 신탁통치를 이곳의 현실에 적용하기 어려우며 도덕적 현실적 관점에서도 타당하지 않다고 판단함에 따라 그것을 폐기해야 한다고 믿게 됐다. 한국 국민은 35년 동안 일본에 복속된 것을 제외하고는 늘 독립된 국가였고 아시아와 중동의 기준에 미춰 낮은 문맹률과 문화적 생활적 수준을 갖고 있다...한국인은 모두 자기 생전에 조국을 되찾기를 바라며...어떠한 형태라도 외국의 후견을 받지 않으려 하는 것이 사실이다."
랭던은 신탁통치의 대안으로 김구 임정 세력의 활용 방안을 내세웠다. 그는 김구 집단이 "해방된 한국의 첫 정부로 경쟁할 상대가 없기" 때문에 임정의 귀국은 "불만이나 비난이 제기되지 않는 건설적 한국 정책을 시도할 기회를 미국에 제공할 것이다"고 말하며, 정책의 개요를
'1. 군정 내에 김구를 중심으로 하여 회의체(Council)를 구성하고, 이 회의체가 정무위원회(Governing Commission)을 조직
2. 정무위원회와 군정을 통합하고, 군정을 한국인 조직으로 대체
3. 정무위원회가 과도정부로 군정을 계승
4. 정무위원회는 선거로 국가수반을 선출하고, 국가수반은 정부를 구성
5. 선출된 국가수반이 수립한 정부는 외국의 승인을 받고 조약을 체결하며 외교사절을 파견하고 한국은 유엔에 가입한다'로 제시했다.
랭던의 정무위원회 구상은 한국의 내부정세에 맞추어 정부수립의 경로와 방법을 포괄적이고 구체적으로 제시함으로써 국무부의 신탁통치안과 국제민간행정기구안을 내용적으로 대체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 구상의 마지막 부분 '주석'은 소련과의 관계에 관한 내용이었다.
"군대의 상호 철수를 위해 소련과 협정을 체결하고 정무위원회의 권한을 소련 지역으로 확대한다. (북한 지역 인사도 정무위원회에 참석을 추진해야 하지만) 소련의 참여가 진전되지 않는다면 38도선 이남만이라도 계획을 추진하여야 한다."
이는 소련과의 협의를 거치지 않은 미군정의 선제적 일방적 행동을 의미했고, 소련의 협조를 구하지 못할 경우 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수립할 것이라는 강경한 태도였다. 표면적으로는 남한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까지 아우르려는 시도였으나 소련의 참여가 전제조건이 아닌 만큼 기본적으로 미국 독자의 남한정부수립 계획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계획은 이후 김구가 아닌 이승만에 의해서 하나하나 거의 그 결론에 따라 진행되었다.
국무부는 미군정측의 과도정부형태 구상이 계속 발전하자 이에 대해 제동을 걸었다.
국무부가 미군정측 구상에 반대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이 안이 신탁통치 하의 국제민간행정기구 설치라는 국무부 안에 어긋나고, 국무부가 유지해 온 국제적 해결방식을 교란시킬 것이라는 점이었다. 특히 군정측 제안은 소련과의 사전 협상을 고려하지 않았고, 한국인 정치세력을 조기에 투입할 경우 정부수립 문제에서 한국인들의 주도성을 일정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는 점도 있었다.
둘째, 미군정이 정무위원회의 핵심세력으로 상정한 임정인사들의 효용성에 대한 평가였다. 해방 이전부터 국무부는 이승만과 김구로 대표되는 임정 요인들의 국민적 대표성과 정치적 열량을 불신하였다. 게다가 국무부는 이전부터 임정의 정부 자격을 부인하는 태도를 견지하였다. 국무부는 이들에게 대표성을 부여하면 다른 정치세력들이 반발하여 정치불안만 가중시킬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10월부터 11월까지 맥아더와 하지에 의해 계획된 일련의 정부수립 구상은 국무부에 의해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미 워싱턴의 반대에 개의치 않고 독자적으로 정책을 추진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하지든 그의 국무부 고문이든, 도쿄의 맥아더든, 맥클로이처럼 한국을 방문한 고위관료든, 그때 남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거의 같은 의견이었다. 이들은 소련이 북한에 자신들의 독자적 정부를 수립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는 사실이기도 했다.
미군정은 한국인들의 자주적인 국가건설 열망을 무한정 부인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이것에 대응할 수 있는 나름의 대안을 마련했다. 그리고 이 대안은 한국인들의 독립정부에 대한 열망을 일정하게 만족시켜 주면서, 동시에 한국에서 미국의 지지기반을 마련하는 것이기도 했다.
첫댓글
고생하셨습니다..ㅜ
랭던의 정무위원회 안은 미군정기 나온 문서 중 가장 중요한 문서이고 본문에 나왔듯이 이후 남한의 정부수립 또한 이 안대로 진행됩니다.
북에서는 9월 20일 스탈린의 비밀지령으로
남에서는 11월 20일 랭던의 정무위윈회안으로 남북은 결국 분단으로 나아갑니다.
12월 모스크바3상회의 결과에 따른 신탁통치안을 고려했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겠지만 그때 남한의 우익은 제 정신을 잃었고
김성수가 신탁통치에 대한 중립적 태도를 취하자 김구로 의심되는 우익이 김성수를 암살하는 것으로 1945년은 저뭅니다. 참 안타까운 1945년의 마무리입니다.
랭던안 참 중요한 문서인데 이걸 아는 사람도 드물고 이걸 읽는 사람도 드물고...아무튼 감사합니다.
@슈 렉
감사한건 저입니다..ㅎ
정말
주욱 읽어 오면서 답답한 심정이었습니다..
풋내기 정치인들이 공부를 더많이 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