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1일 이승만은 서울 중앙방송국에서 '공산당에 대한 나의 관념'이라는 제목의 방송을 통해 자신이 공산당에 호감을 가진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정부 수립 후 경제 정책을 세울 때 공산주의에서 채용할 것이 여러 가지 있으며 경제적 측면에서 근로대중에게 복리를 주기 위한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자신도 얼마만큼 찬성한다고 밝혔다.
10월 16일 귀국한 이승만은 10월 23일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했다. 귀국 직후부터 모든 정당과 당파의 대동단결을 주장하며 각계의 인사들과 접촉했던 이승만은 해방 이후 비로소 좌우를 망라한 통일기관의 결성에 성공한 것이다. 그는 독촉중협의 회장으로 추대되어 회의 소집 등 일체의 권한을 위임받고 남한 정국을 주도했다.
그런데 독촉중협의 결성은 미군정의 의지이기도 했다. 미군정은 과도정부 수립안의 실현을 위한 사전조치로 단일화된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의 모임을 원했고 이런 군정의 의지가 이승만의 세력 기반 구축 의지와 결합하여 탄생한 것이 독촉중협이었다.
이승만은 독촉중협이 군정과의 협의 하에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과 미군정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음을 과시했다.
"군정에서 독촉중협에 바라는 것은 대내외 관계에서 이 기관을 경유하게 하여 이 기관을 권위있게 만들려는 것이다...임시정부(과도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과도기관으로 독촉중협을 설립해 민의를 대표하도록 하는 것이 군정의 갈망이다."
그러나 미군정이 독촉중협에 기대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이 꼭 이승만이라는 개인적 인물에 한정된 것만은 아니었다. 미군정에게 필요한 것은 좌익까지 포괄하면서도 우익세력이 중심이 되는 정계통합기관이었다. 이승만이 주도하든 김구가 주도하든 만들어지기만 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남한에서 자발적으로 정계통합기관이 만들어지면 이를 바탕으로 과도정부 수립안이 채택될 수 있도록 본국 정부를 압박할 생각이었다.
독촉중협이 반드시 미군정의 정무위원회(11월 20일 글)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은 오히려 이승만이었다. 그는 독촉중협을 끊임없이 미군정의 의도와 연관시키며 여타 정치세력을 압박했다. 미군정의 권위를 이용해 독촉중협을 정계통합기관으로 관철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단지 미군정의 대리인이나 고문관이 아닌 한국인들의 '민의'대표이자 최고의 지도자임을 부각시키려 했다.
이런 맥락에서 이승만은 임정이 귀국하기 전까지 독촉중협의 실제 조직을 완성하고, 임정이 입국한 후 이들을 독촉중협에 받아들이는 형식을 갖추려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임정이 입국하기 전에 공산당을 독촉중협에 끌어넣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이승만은 오래 전부터 철저한 반공주의자였으며 그가 맥아더에게 호감을 얻게 된 계기도 그의 반소반공에 대한 입장 표명이었다. 하지만 이런 그의 개인적 성향과 별개로 그는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익세력을 끌어안기 위해 노력했고 이런 노력의 일환이 '공산당에 대한 나의 관념'이라는 방송이었다.
그는 방송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악독한 왜적의 압박하에서 지하공작으로 백절불굴하고 배일항전하던 공산당원들을 나는 공산당원으로 보지 않고 애국자로 인정한다. 왜적이 항복한 후에 각국의 승인을 얻기 위하여 인민공화국을 세운 것이 사욕이나 불의의 생각이 아닌 줄로 믿는다...
공산주의자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말할 수 있는데
첫째는 공산주의가 경제방면으로 근로대중에게 복리를 줄 것이니 이것을 채용하자는 목적으로 주장하는 인사들이다. 이러한 공산주의에 나는 얼마만큼 찬성한다."
그러나 이어서 이승만은 중국을 예를 들어 공산주의로 인해 골육상쟁의 분열이 조장될 수 있으며 이는 일본의 모략에 빠지는 것이라 규정했다.
"둘째는 경제정책의 이해는 어찌되던지 공산정부만 수립하기 위하여 무책임하게 각 방면으로 선동하는 중에서 분쟁이 생겨 국사에 손해를 끼치는 이들이니 이 분자가 참으로 염려되는 점이다....
이러한 분자들이 중국에 있어서 국민이 분열되고 골육이 상쟁하는 참화를 양성하니 나는 이러한 공산분자로 인연하여 근심한다. 이 사람들이 일인의 재정을 얻어 가지고 모든 활동으로 각 지방에 소요를 일으키며 외국인을 배척하는 선전과 임시정부를 반대하는 운동으로 인심을 이산시켜서 미국 군정부가 한국을 해방시키지 못하고 속히 밀려나기를 도모하는 것이니 이는 일인의 모략에 빠지는 것이다."
이승만은 공산주의에 일종의 호감을 내비치어 좌익세력을 끌어안으려는 한편 공산주의운동이 민족분열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며 이는 일본의 모략에 빠지는 행위라고 정의함으로써 좌파세력이 독촉중협의 범위 내에서 활동하도록 압박하였다.
이처럼 이승만이 성명까지 발표하며 좌익세력을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그러나 실제로 독촉중협 내에서 좌익에 대한 배려는 거의 없었다. 좌익은 독촉중협의 회의에 입장하는 것조차 거부되거나, 발언 기회도 제대로 갖지 못했다. 11월 28일부터 독촉중협의 중압집행위원 선정이 시작되었지만 여운형의 인민당과 조선공산당이 불참한 가운데 중앙집행위원 선정은 우파의 일방적 우위로 끝났다. 결국 조선공산당은 12월 5일 독촉중협을 탈퇴했고 여운형 세력도 이탈했다.
죄익 세력뿐만 아니라 임정 세력에 대한 포섭도 이승만의 뜻대로 될 수는 없었다.
독촉중협이 임정을 포섭하는 문제는 좌익 문제와는 차원이 달랐다. 미군정의 의도는 임정과 이승만의 연합 하에 좌익을 포함한 정계통합기관의 설립이었으므로 독촉중협은 임정 없이는 성립이 불가능한 기구였다. 그런데 이승만이나 미군정의 염원과 달리, 임정은 독촉중협에 별 관심이 없었다. 임정은 귀국 직후부터 임정추대론을 바탕으로 그들 중심의 독자적인 계획을 추진했기 때문에 독촉중협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도, 임정도, 좌파세력도 각자 다른 욕망과 소신을 가졌으며 세 가지의 다른 생각은 서로 연결되지 못한 채 늦가을 서울의 골목을 배회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