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3일 오후 4시, 미군 C-47 수송기 한 대가 김포비행장에 도착했다. 김구를 비롯한 충칭임시정부 요인 15 명이 탄 비행기였다. 그들은 고국의 싸늘한 초겨울 바람을 맞으며 트랩을 내려 꿈에도 그리던 조국의 땅을 밟았다.
이날의 감격과 실망을 장준하는 이렇게 표현하였다.
"아, 보인다, 한국이! 보인다, 한국이? 모두들 옹색한 기창으로 쏠렸다. 손바닥만 한 셀룰로이드 기창 밖으로 아련히 트인 초겨울의 황해가 푸른 잠을 자고 있었고, 그 광활한 푸르름 아래 거뭇거뭇한 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기체 안에서는 애국가가 합창되었고, 목이 멘 것을 느낀 순간부터 나도 그 애국가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감상을 내어버린 지 오래고 울음을 잊어버린 지 이미 옛날인 강인한 백범 선생, 그의 두꺼운 안경알에도 뽀오얀 김이 서리고 그 밑으로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르 번져 내린다...미공군 하사관이 기체의 문을 열어젖혔다...시야에 들어온 것은 벌판뿐이었다. 일행이 한 사람씩 내렸을 때 우리를 맞이한 것은 미군병사들뿐이었다. 우리의 예상은 완전히 깨어지고 동포의 반가운 모습은 허공에 모두 사라져버렸다. 11월 바람은 퍽 쌀쌀했고 하늘도 청명하지 않았다."
11월 5일 충칭을 출발해 상하이에 도착한 김구는 이곳에서 발이 묶였다. 임정의 자격이 다시 한번 문제가 된 것이다. 11월 19일 김구는 자신의 귀국이 개인 자격임을 숙지하고 미군정에 절대 협조한다는 서약서를 중국 주둔 미군사령관 웨드마이어에게 제출했다. 다음날인 11월 20일 미군 수송기 한 대가 상하이 장완공항에 도착했고 23일 오후 1시 임정요인 제1진 15명이 수송기에 올랐다. 제1진에는 주석인 김구를 비롯해 부주석 김규식, 이시영, 김상덕, 유동열, 엄항섭 등이 포함되었는데 모두 임정의 우파세력이었다. 하지는 우익을 먼저 귀국시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도록 김구를 배려했고 이에 따라 임정요인은 두 차례로 나뉘어 귀국했다.
김원봉, 신익희, 조소앙 등 환국 2진 22 명은 12월 2일 군산 근처 옥구비행장으로 귀국하였다. 짙은 눈발로 김포비행장 착륙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이었다.
김구가 김포비행장에 도착했을 때 장준하의 기록처럼 환영인파는 없었다. 미군정은 이승만 때와 마찬가지로 김구와 임정요인들의 귀국을 비밀에 부쳤기 때문이었다. 김구 일행은 미군정이 내준 차를 타고 숙소인 죽첨장(竹添莊)으로 향했다. 죽첨장은 일제시대 조선의 3대 갑부로 알려진 최창학의 별장이었다. 최창학은 금광 개발로 거부가 된 반민족친일행위자였는데 임시정부환영위원회 위원장 김석황의 부탁으로 죽첨장을 김구의 사저로 제공하였다.(죽첨장이라는 일제식 명칭은 1947년 경교장으로 바뀌었다.)
그날 오후 6시 하지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김구 일행이 개인 자격으로 서울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성명을 발표했다. 미군정을 제외하고 김구 일행의 귀국을 가장 먼저 안 사람은 이승만이었다. 6시 방송에 앞서 미군정이 통보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한걸음에 죽첨장으로 달려갔다. 1921년 5월 임시대통령 이승만이 상하이를 떠날 때 김구는 경무국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25년 만의 재회였다. 그러나 방송을 들은 기자들이 밀려오자 이승만은 30분만에 자리를 뜨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군정은 임정에 우호적으로 대했다. 국무부의 의지에 따라 임정을 개인자격으로 귀국시켰지만 덕수궁에 임시정부의 본부를 마련해 주고 미군 헌병이 경비를 서게 하였으며 교통수단을 제공했다. 또 다른 단체들에 대해서는 무기반납을 명령하였지만 김구의 개인 수행원들이 무기를 지니는 것을 허용했다. 그리고 인공에게는 미군정이 유일한 정부라며 '공화국'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던 것과 달리 임정을 인공의 경쟁자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임정이 '정부' 또는 '내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도록 허용해 주었다.
미군정은 김구의 귀국에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었다. 김구와 이승만의 연합을 통해 국민적 지지기반을 가진 우파가 중심이 되고 좌파 세력까지 아우르는 정계통합기관을 마련함으로써 국무부의 신탁통치안을 철폐하고 한반도에 과도정부를 세울 것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하지의 생각은 11월 2일 맥아더에게 보낸 전문에서도 잘 나타났다.
"김구의 한국행이 결정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도착하는 대로 보다 큰 화합을 위해 이승만 박사와 협조하리라 예상된다. 본관은 이승만과 김구의 도움을 활용하여...대다수 한국인들이 만족할 만한, 속칭 과도적 한국임시정부를 시험적으로 우리의 감독 하에 설치하고 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 총선을 통해 국민정부를 선출케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사령관만 김구의 귀국에 기대를 건 것이 아니었다. 엄청난 사회적 경제적 혼란에 처한 민중들도 기적을 갈망하는 심정으로 임시정부의 환국을 고대하고 있었다. 당시 임시정부는 '전설 속의 존재'인 양 거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어 있었고, 그들이 귀국하면 정부도 서고 정계도 통합되고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초조하게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도 임정의 환국을 기다리고 있었다. 임정이 귀국하면 이들을 독촉중협에 받아들여 자신이 우익 전체와 좌익 일부를 망라하는 민족통일전선의 최고 지도자가 되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민당 또한 임시정부의 환국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민당은 임정요인들이 귀국하기 한 달 가량 전인 10월 24일 안재홍의 국민당, 장안파 조선공산당(8월 17일 글)과 함께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며 임시정부의 환국을 기다렸다. 한민당과 장안파 공산당이 임시정부를 고대하고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취약한 도덕성-친일-을 가려줄 방패막이로 풍찬노속하며 독립운동의 외길을 걸어온 임시정부의 절대적 명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성명에서 임시정부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를 표방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임정의 과도정부 역할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면서도 정식정부는 국내외의 반민족적 분자를 제외하고 민주주의적인 각층 각파가 제휴하여 국민 총의에 의해 수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임시정부의 역할을 과도정부로 한정하고 임시정부를 이용하여 해방정국에서 다시 집권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런 목적을 가진 한민당은 임시정부를 극진히 예우했다. 그러나 이승만이 독주하는 독촉중협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대한 한민당은 임정과의 관계에서도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충족되는 한에서만 협력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군정도 이승만도 임정을 오판하고 있었다. 김구와 임정에게는 자신들이 생각해 온 길이 따로 있었다. 이 길에서 큰 힘이 되었던 세력은 한민당이었지만 또한 가장 큰 부담도 한민당이었다.
첫댓글
드뎌,
각 정파가 머리싸움을 시작하겠네요..ㅠ
네, 수싸움 머리싸움...
사람들은 미군정이 김구를 냉대한 걸로 알고 있는데 김구와 이승만이 하지를 배신했어요.
김구는 45년 12월 31일 미군정 접수 시도를 해서 하지의 뒤통수를 때리고 이승만은 1946년 말 아주 비열하게 하지를 배신합니다.
하지 입장에서는 정만 부들거릴 만한 일이었어요.
@슈 렉
음~~
그렇군요
전말을 알려주시는거죠..? ㅎ
나같이
겉만 대충 아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거 같아요...ㅠ